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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 조장훈 / 사계절

 

 이 나라에서 대학 입시는 차별의 출발점이다. 만 18세 무렵에 치른 한 번의 대학 입시로 사회 구성원의 상당수가 사회적 이동 가능성을 차단당한다. 이 무시무시한 차별적 보상 때문에 대학 입시는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학력과 학벌이 사회적 지위와 직결되는 사회에서 대학 입시라는 통과의례는 인생이 걸린 계급의 거름망이고 운명의 갈림길이다. 대학 입시를 통해 인간이 분류되고, 한 번 분류당한 인생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 대학에 따라 인생길이 갈리고, 계급이 나뉜다.
 몇 년 전, 겨울 방학 강의를 시작하면서 나는 2학년 2학기를 마친 한 예비 고3 학생에게 수험생이 된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이제 정신 차리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충고를 조금 덜 꼰대스럽게 하고 싶어서 시작한 질문이었다. 그 학생은 날 보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떨어지면 천국도 갈 수 있고, 지옥도 갈 수 있는 벼랑 앞에 선 기분이에요.”
 나는 준비했던 충고를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떨어지면 계급이 분류되는 거대한 벼랑 앞에 선 그 마음이 어떠할까? 대학 입시는 더 이상 생애사에서 낭만적인 추억의 한 조각으로 남을 성인식이 아니다. 수험생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놓고 벌이는 건곤일척의 승부처이며,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삶을 통째로 걸어야 하는 운명의 도박판이다. 벼랑 앞에 선 듯한 그 아득한 마음 앞에서 나의 훈계는 부질없었다. 그 학생은 이미 PC방을 같이 다니던 친구들에게 이별을 고했고, 함께 축구를 하던 친구들과 당분간 축구할 일이 없을 것임을 알았다. 친구들과 자신을 이어주고 더 넓은 세상을 엿보게 해주던 스마트폰을 2G폰으로 바꿀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다.
 참가자 스스로 절벽에 선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불평등과 차별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카지노. 이런 대학 입시를 통과의례라 부르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한국의 대학 입시는 방주네프가 언급했던 통합의 단계를 상실했다. 대학 입시를 거치며 사회 구성원들은 승자와 패자로, 상층과 하층으로, 가능한 자와 불가능한 자로 양분된다. 대학 입시는 사회를 뚜렷하게 경계 짓고 있다. 분리와 차별이 시작되는 지점은 사회가 해체되는 지점일 수는 있어도 (재)구성되는 곳일 수는 없다. 우리 아이들이 선 벼랑 앞에 그간 성인식으로 여겨졌던 대학 입시라는 통과의례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p.34-35)

 

 그러나 논문 활동 쪽은 상황이 좀 달랐다. 더 적극적인 학부모들은 자녀의 이름을 학술 논문의 공저자로 올리기 위해 학생을 대학과 연구소로 보내 여러 실험과 연구 활동에 참여시켰다. 그 대가로 기본 시가 300만 원을 전후한 돈이 오갔다. 실험실 사용료, 재료비, 활동 지도비 등 구체적 이름이 붙은 돈 거래가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2020년 전국 37개 국립대에서 제출한 ‘교수 미성년 자녀 및 미성년 공저자 논문 검증 진행’ 자료에 따르면 2017년 12월 이후 발행된 대상 논문 458건 가운데 34건이 연구 부정으로 판정되었다. 또한 교육부가 2019년 대학 소속 연구자들의 미성년 자녀 공저자 등재 실태를 조사한 결과, 2007년 이후 10여 년 간 87명의 교수가 139건의 논문에 자녀를 공저자로 등재했고 이 가운데 12건의 연구 부정행위가 확인되었다. 그렇게 일부 학부모는 자식을 품앗이하며 수입도 얻었다. 학교마다 상황은 조금씩 달랐겠지만 몇몇 학교는 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했고, 대부분의 학교는 최소한 방치했다. (p.92)

 

 학종은 그 제도의 아름다운 목적과 취지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비극을 초래하고 있다. 학력고사 시절에도 입시는 모두에게 고통이었다. 심지어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권위주의적 교사의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학교라는 공간은 많은 학생에게 친구를 만나는 즐거운 곳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학종은 입시만이 아니라 학교의 일상 자체를 경쟁의 지옥으로 바꿔놓았다. 이곳에서 일부 교사와 학생은 서로를 이용하고, 무시하며, 고독 속에서 스스로 정신 승리하는 법을 익혀나간다. 일부 교사는 학생부를 기록하는 알량한 권력을 교권으로 착각하고,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며 책상에 엎어지는 3분의 2의 아이들을 없는 사람 취급한다. 심지어 상위권 아이들의 입시 성과를 위해 애꿎은 아이들을 들러리로 세운다. 학생들은 그 알량한 권력을 이용하기 위해 거짓 웃음을 흘리거나 내 바로 앞의 타인과 완전히 분리된 채 자신만의 세계에 머무르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학종이 애초에 아무리 훌륭한 교육적 가치를 지녔다 할지라도 나는 이 전형이 한국의 교육 풍토와 사회적 신뢰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비극의 원인이 학종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비극은 학벌을 얻으려는 욕망이 무섭게 들끓는 이 과도한 교육열의 사회에서 모든 입시 제도가 처하게 될 피치 못할 숙명인지도 모른다. (p.99-100)

 

 2018년 이 단체를 통해 대학 입시 거부를 선언했던 김정래(투명가방끈 활동가) 씨는 자신이 선택한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이 사회가 부과하고 있는 차별의 현실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대학에 가지 않고 보니 살기가 참 팍팍했다. 아르바이트만 6번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겨우 어느 콜센터에 들어가서 하도급 노동자로 일했다. 일은 고됐다. 100건 가까이 되는 상담을 하루 동안 겨우 쳐내야 했고, 그 가운데 99번 잘해도 1번 실수하면 눈총을 받곤 했다. 화장실에 자주 가지 못해 전립선 건강이 나빠졌다. 특히 상담을 하면서 잘못하지 않아도 ‘죄송합니다, 고객님, 이용에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사과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럴 때마다 감정 노동이 다 이렇지 뭐, 하고 넘겼다. 그러다 하루는 콜센터 휴게실에서 끼니로 김밥을 먹는데, 창밖에 다른 사무실들이 보였다. 콜센터가 위치한 곳은 서초동 한가운데여서, 인근에 법무법인 사무실이 많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로 앞 건물도 법무법인 사무실이 늘어선 건물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아래 주차돼 있는 외제차도 즐비했다. 그러려니 하고 김밥을 씹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은 얼마를 받을까. 기껏해야 최저 임금 조금 넘게 받는 나는 만져본 적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을 벌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조금씩 우울해지다 이내 서러워졌다.
 어디선가 사람의 가치는 분명 같다고 배웠는데. 사람이 가치가 다 같다는 건 말뿐이고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않구나. 사람마다 가치를 다르게 치는구나. 소위 ‘못 배운 사람’과 ‘배운 사람’에게 돌아가는 몫은 전혀 같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노동자가 태반이었던 내가 다닌 콜센터와, ‘많이 배운’ 이들이 일하고 있을 창밖 법조타운은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이 있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p.102-104)

 

 완벽한 입시 제도는 없다. 학벌이라는 희소 자원을 둘러싼 과잉 경쟁이 존재하는 한 모든 새로운 입시 제도는 분석될 것이고, 모순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학벌 독점을 유지하려는 소수의 지배 계층은 새로운 입시 제도의 맹점을 찾기 위해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그 제도가 아무리 교육적 가치와 정당성이 있더라도 지배 계층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위협한다면 이를 채택하지 않기 위한 여론 형성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흐름에 대중은 소외감과 박탈감, 무력감을 느끼고 이는 복고적인 반동으로 이어진다. 당장의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육적 가치를 훼손하는 퇴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 대중은 여론 및 공론 조사, 선거 등 민주주의의 다수 지배 원리를 이용해 제도의 변화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계급 간 힘겨루기 속에서 대입 제도는 파행을 면치 못하고, 여론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일관성을 상실한다. 문제는 제도의 격변 아래에 우리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미성년이기에 제도의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형식적 권리조차도 없다. 그저 주어진 입시 제도하에서 묵묵히 압박감을 견디고 있다. 대입 제도는 매년 조금씩 수정되고 정권이 바뀌면 급격하게 변한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모르는 암담함과 압박감 속에서 모든 아이는 계급과 처지를 가리지 않고 정신적 상처와 트라우마를 얻는다. (p.111-112)

 

 한국 사회에서 학벌이 취업과 승진, 명예와 명성의 취득 기회를 높이는 이유는 학벌이 능력을 보증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학벌이 우생학적 결정론과 연고주의에 기반하여 작동하는 거대한 편견과 차별의 카르텔이기 때문이다. 좋은 머리를 타고난 자가 공부도 잘하고, 상황 파악도 잘하고, 업무도 잘할 거라는 인간에 대한 이 고정된 편견은 일종의 우생학이다.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이미 결정된 존재로 보는 뿌리 깊은 편견에 기초하여 한 번의 시험 결과를 낙인처럼 모두의 이마에 새겨 보존하는 것이 학벌주의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좋은 성적을 받아 소위 명문 대학에 진학한 사람들이 이러한 편견 덕분에 기업과 정부와 조직의 요소요소마다 포진하고, 이들이 자기 학교 출신을 밀어주고 끌어주며 특혜와 가산점을 주어 만들어온 강고한 연고주의의 성채가 바로 학벌주의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의 학벌은 능력(학력)주의를 보완하기 위해 이용된 장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능력주의의 정반대편에서 인지적 편견에 기초한 집단주의적 차별이 문화적 악습으로 뿌리내린 결과일 뿐이다. 학벌을 얻기 위한 교육열은 사회적 악습과 모순된 기득권에 편승하기 위한 과잉 경쟁의 열기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서구의 능력주의 비판 담론으로 학벌주의를 비판하고자 할 때 현실적 간극이 발생한다. 우리 사회는 신입생과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능력주의를 제대로 실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근대적이고 연고주의적인 편견을 넘어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련된 세습 구조로서의 능력주의는 경험해본 적도 없는 것이다. 첫 대학 입시에서 원하는 학벌을 얻지 못한 젊은이들이 반수를 하고, 재수를 하고, 삼수를 해서라도 다시 명문대에 도전하려는 이유는 능력주의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학벌만 한 영향력을 가진 스펙을 만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p.117-119)

 

 우리가 사회적 경구나 원칙으로 삼는 말들 중에는 현실과 거리가 먼 것이 많다. ‘법 앞의 평등’이나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나날이 허망해진다. 사실 어느 시대라고 법 앞에 사람이 평등했겠는가. 권력 관계 속에서 억울한 송사가 나오지 않는 시대는 없었다. 이런 말들은 아마 ‘그래야 한다’라는 당위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겠지만, 윤리적 당위란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이상일 뿐이다.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대기업 정규직 같은 이른바 ‘좋은’ 일자리에는 높은 임금, 정기적 급여 인상, 법정 휴가, 상여금, 각종 수당 등 많은 이점과 혜택이 있지만 영세 기업, 비정규직 등 ‘나쁜’ 일자리는 그렇지 않다. ‘나쁜’ 일자리에서 사람들은 낮은 임금, 열악한 노동 조건, 쉬운 해고 등 삶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차별을 경험한다. 2018년 한국은행은 대기업 정규직에 해당하는 1차 노동 시장을 213만 명, 전체 노동 시장의 10.7퍼센트로 추산했다. 한편 대기업 비정규직 33만 명,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각각 1130만 명, 624만 명으로 2차 노동 시장의 총 규모는 89.3퍼센트였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성공은 고사하고 차별적 삶의 조건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2차 노동 시장으로 밀려나지 않아야 한다. 즉 변호사,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수의사, 약사, 공인회계사, 세무사, 노무사, 감정평가사, 법무사, 변리사, 관세사 등 1년에 1만 2000명 정도만 얻을 수 있는 전문직 자격증을 따거나, 노동 시장의 10.7퍼센트에 해당하는 대기업 정규직 취업에 성공하는 것. 이것이 차별을 면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p.158-159)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응시한 수험생을 지역별, 학력별로 분석해보면 N수생 비율은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전국 기준 27퍼센트에 비추어볼 때, 서울은 39퍼센트로 12퍼센트 더 높았다. 강남과 서초 지역의 N수생 비율은 무려 53퍼센트였다. 그러니까 수능 응시자 중 재수생이 절반이 넘는 것이다. 수치상으로도 전국의 2배에 근접한다. 재수종합학원이 몰려 있는 탓에 지방에서 올라온 재수생들이 강남, 서초로 주소지를 옮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년도 강남 서초 지역 고등학교의 대학 진학률을 보면, 이 수치가 유입된 재수생의 영향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강남 서초 지역 고등학교(일반고, 자율고)의 대학 진학률은 51.3퍼센트로 전국 최하위였다. 대치동에 위치한 자사고 A고등학교는 진학률이 39.7퍼센트로 가장 낮았다. 그러니까 60퍼센트 이상이 목표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반수도 아닌 ‘풀(full) 재수’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반수까지 포함한다면 그 비율은 아마 65퍼센트를 상회할 것이다. 한 학교의 3분의 2가 더 좋은 대학에 가겠다고 입시를 다시 치르는 것이다. 이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기현상이다. (p.180-181)

 

 왜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에, 주식 투자에, 코인 투기에 이토록 열렬하게 빠져드는가? 사람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바라는가? 그 욕망은 바로 ‘불로소득’을 향한 것이다. 한 사회에서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삶의 필요를 충족하고, 원하는 가치를 취득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노동을 신성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계급적 위계가 고착되어 자원의 분배가 고르지 못하고, 자원 획득에 진입 장벽이 생겨 노동을 통한 접근이 불가능해지면 사람들은 더 이상 노동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일확천금을 꿈꾸기 시작한다. 단순 노무직이나 일용직 종사자들이 스포츠 토토와 로또에 몰두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정당한 노동으로 자기 상황과 여건을 바꿀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불로소득을 꿈꾸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한 사회 안에서 불로소득을 꿈꾸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는 얻을 수 없음을 사람들이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p.190)

 

 학벌에 집착하는 이유도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의 대가는 학벌에 따라 달라진다. 부모로부터 계급적 유산을 물려받지 않은 이상, 학벌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고소득이 보장되는 직종에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물론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특정 직업은 일정 수준 이상의 학력이나 경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취업, 승진과 급여 인상, 사회적 관계를 확장할 기회를 이토록 크게 좌지우지하는 나라는 없다. 한국 사회에서 명문대 졸업장을 갖는다는 것은 똑같이 일해도 더 많은 소득과 기회를 보장받는 도깨비방망이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서 남들만큼 일하지 않아도 남들보다 더 큰 소득과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소득 증폭, 소득 뻥튀기의 수단을 하나 손에 넣게 되는 셈이다.
 나의 어린 시절,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보면 주위의 어른들은 “너 그렇게 머리 쓰는 거 싫어하면 몸이 고생한다”라고 핀잔을 주거나 “기술이나 배워야 먹고살겠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말은 노동과 배움에 대한 우리 인식의 단면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를 뒤집어보면 결국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머리를 써서 남들처럼 몸고생을 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지식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오랜 불신과 뿌리 깊은 반지성주의가 깔려 있다. ‘배운 것들’은 그 배움을 이용해 힘겨운 노동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여전히 많은 부모가 자신이 겪은 부당한 대우와 착취를 경험하지 않도록 자녀에게 더 많이 배우고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한다. 차별과 착취 속에서 어느새 자신의 기술이나 육체노동을 비천한 것으로 여기며 자녀 세대는 그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p.191-192)

 

 혹여 누군가는 불로소득이 뭐가 문제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노동을 하지 않고도 소득을 얻을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로빈슨 크루소의 외딴 섬이라면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으며, 그 노동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심지어 자유무역의 선구자였던 데이비드 리카도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준 많은 경제학자들은 노동이야말로 본원적 화폐이며, 경제적 가치의 유일한 근원임을 강조한다. 이들에 따르면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경제적 가치는 오직 노동에서 나온다. 예컨대 포도의 가격은 그것을 생산하고 수확한 농부와 운반하고 보관하여 판매한 상인의 노동력에 대한 대가다. 우리가 볼펜 한 자루에 지불한 1000원이라는 가치는 그 볼펜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생산하고, 조립하고, 운반하고, 판매한 사람들의 노동 대가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게 세상은 사물을 매개로 서로의 노동과 노동을 잇대어 유지된다. 특히 오늘날처럼 극도로 분업화, 전문화된 사회에서는 타인의 노동 없이는 단 하루도 살지 못한다. 따라서 누군가 노동하지 않고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면, 그는 타인의 노동이 만들어낸 경제적 가치를 무상으로 취득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누군가는 노동을 해도 합당한 소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약탈이며 착취다. (p.193-194)

 

 나는 오랜 시간 대치동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종종 이곳이 거대한 회전목마 같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학원으로 배달하는 엄마와 아빠들은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그 소망과 바람은 실현될 수 있을까. 아이들은 기계로 돌리는 말들처럼 쉬지 않고 학원과 학원을 오가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시절을 고통과 인내의 시간으로 채우다 기계처럼 무감각해져 갔다. 상상할 수 없는 경쟁과 스트레스 속에서도 젊은 생명은 여전히 생글거렸지만, 그들의 눈동자는 회전목마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닮아가고 있었다. ‘엘도라도’라는 상상 속 황금의 땅을 찾아간다지만 실은 제자리를 맴돌던 도시마엔의 회전목마처럼 이들도 혹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1951년 영화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도는 회전목마를 통해 긴장과 공포를 자아낸다. 가장 안전하고 심심한 놀이기구인 회전목마는 규칙적인 일상이 반복될 때 나타나는 현실감의 상실이나 일정한 속도와 상하 회전운동의 리듬감이 가져오는 혼란한 시야를 통해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장치가 된다. 대치동의 학생들도 그렇다. 규칙적으로 여러 개의 학원을 돌고 돌아 집으로 회귀하는 느릿느릿한 회전운동 속에서 주기마다 나오는 성적표에 따른 상하 이동은 격렬하고 파괴적이다. 반복되는 회전운동과 위아래로 내리꽂히는 상하 이동 사이에서 아이들은 현실감을 상실하고 공포에 휩싸인다. (p.198-199)

 

 고3에 올라가기 직전 겨울 방학에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서 3월 학력평가에서 꽤 큰 폭의 성적 상승을 이루었다고 해도 이것은 재학생 집단 내에서의 위치일 뿐이다. 6월 모의평가에서 6만여 명의 N수생이 들어오면 1차로 성적이 하락한다. 아무래도 객관식 학력평가의 특성상 오래 공부한 학생이 유리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재수생은 중간·기말고사와 수행평가의 부담이 없기 때문에 수능에만 전념할 수 있고 더 많은 사교육의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 9월 모의평가에서는 1만 명 이상의 반수생이 들어온다. 반수생의 과반 이상은 이미 꽤 좋은 대학에 진학했으나 SKY 등 더 상위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이라 이들 중 상당수가 최상위권에 포진하니 재학생의 상대적 위치는 또 한 번 내려간다. 여기에 실제 수능에는 5만여 명의 N수생이 추가로 들어온다. 이뿐만이 아니다. 재학생 가운데 대학에 갈 생각이 없는 학생들이 있다.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치르는 모의평가에서는 한 줄로 내리 답을 찍고 깊은 수면을 취하던 이 학생들은 실제 수능에는 응시하지 않는다. 이들의 수가 매년 5만 명 이상이다. 다시 말하면 겨울 방학에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을 좀 올린다 해도 모의평가에 참여하는 N수생 수가 증가하고, 소위 ‘바닥을 깔아주던’ 재학생들이 실제 수능에서 빠져나가면서 대다수 학생은 다시 성적이 하락한다. 실제로 전 과목 4등급 이상을 받는 재학생 가운데 고2 11월 모의평가의 성적과 비교해 수능 성적이 큰 폭으로 상승한 학생의 비율은 십수 년째 극히 미미하다. (p.252-253)

 

 다시 말하지만, 공교육의 몰락은 사교육 탓이 아니다. 공교육과 사교육은 애초에 목적이 다르다. 공교육은 일정 정도의 지성과 사회 참여 의지를 가진 시민을 육성하고, 그 시민이 각자의 개성과 적성을 살려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둔다. 입시에서의 성공만을 목표로 하는 학원 사교육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학교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입시에만 전념하는 학원보다 더 나은 입시 결과를 만들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설사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즉 학교가 효율적인 입시 학원처럼 된다면 그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는 공교육의 가치를 실현하면서 대학 입시를 치르지 않는 학생에게도 의미 있는 학습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공부가 시험공부, 입시 공부만 있겠는가. 나는 매년 학원 설명회 자료집을 만들며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 대학 합격 인원을 기준으로 한 전국 고등학교 순위표를 실었다. 이는 각 고등학교의 입시 실적을 알아야 입시 지도와 컨설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학원 사교육 종사자로서 한 일이지, 이것이 공교육 기관인 학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공교육과 사교육을 대립 관계로 놓고 학원 사교육을 억압하는 정책이 성공할 리도 없다. 학벌주의가 엄연히 존재하고, 자본주의적 계급 질서가 한층 공고해진 상황에서 학벌을 통해 계급 상승 혹은 재생산을 하려는 열망은 점점 더 강력해질 것이다. 학원 사교육을 망치로 내리누르면, 두더지 같은 욕망은 다른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 것이 자명하다.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의 욕망, 자녀가 좋은 학벌을 얻기 바라는 부모의 욕망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다. 이것이 다 틀렸다고, 없애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p.333-334)

 

 공교육은 학생 개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육성하고 지원하기 위해 사회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과 취미를 살피고, 적성과 개성을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질과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교내외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조사, 기획, 추진하는 일. 이것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그것을 운영할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일. 나는 이것이 공교육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는 많은 교육 프로그램과 자원이 이미 있다. 이를 활용한 교육 시스템을 공적으로도 충분히 구현할 수 있다. 각 지역의 문화재단, 연구재단, 대학과 기관마다 사회에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는 예산과 기회가 충분히 존재한다. 이미 만들어진 교육 프로그램조차 아무도 이용하지 않거나 제대로 이용하는 방법이 홍보되지 않아 소수만 그 혜택을 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정보들이 무슨 고급 투자 원천인 양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되어 입소문을 타고 팔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통해 모두가 참여하고 누릴 기회를 얻을 때 교육 평등이 실현될 것이다. (p.352-353)

 

 1991년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종합적 사고 능력을 평가하는 새로운 시험, 즉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도입하겠다는 정부의 발표에 박수를 쳤던 사람들은 교육 제도를 인간의 기본권과 교육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더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모두가 똑같은 것을 외우는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에 많은 사람이 동의했다. 그러나 2008학년도 입학사정관제의 도입이나 2015학년도 학생부종합전형의 시행 과정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 새로운 입시 정책은 학생 개개인의 적성과 선호에 따른 교육을 가능하게 할 요소가 더 많았지만,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더 이상 입시 제도를 인간의 기본권이나 교육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벌이 점점 더 사회적 이동성(social mobility)을 좌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제 학벌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공정하고 정의롭게 분배되는가를 최우선 기준으로 입시 제도를 평가하게 되었다. 대학 입시 제도를 어떻게 설계하는가는 이제 고등 교육 자원의 분배를 넘어 계급 유지 또는 계급 상승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중차대한 일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좋은 취지를 가지고 교육 및 입시 제도를 고안하더라도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거나 실현하기 어렵다. 학벌을 통한 사회적 지위 상승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입시 제도를 낱낱이 분석해 전략을 수정하고, 제도의 빈틈을 찾아 목적을 달성하는 데 혈안이 된다. 교육 수요자들의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학원 사교육 종사자들은 새로운 제도를 해킹하여 그 핵심을 단계적으로 판매하는 전략을 세운다. 이 고급 정보에 더 빨리 접근할 수 있는 계층은 학벌 자원을 선점하게 된다. 누가, 어떤 제도를 설계하더라도 이 실패의 경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p.358-359)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입시는 더 다양해져야 한다. 각 대학의 학과마다 필요한 인재상이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학문의 영역과 다루는 주제가 다르니 요구되는 소양이나 적성, 능력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국어, 영어, 수학 중심의 시험 성적으로 순위를 매겨 선발하는 것은 행정적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획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 교육은 더 나은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을 길러낼 수 없을 것이다. 대입 전형이 많고 복잡한 것은 현상이지 불평등이나 불공정의 원인이 아니다. (p.366)

 

 문해력은 나이가 많을수록, 독서량이 적을수록 줄어드는 경향이 있지만, 한 사회가 지닌 문해력의 장기적 수준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교육 시스템과 입시 제도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해력 수준은 지난 수십 년간의 교육 및 입시 제도의 산물인 것이다. 우리의 중등 교육과정에서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이 제대로 정착한 적이 없다. 논술전형이 도입된 뒤에도 공교육은 글쓰기 교육을 외면했다. 학부모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자녀를 초등학생 때부터 독서논술학원에 보냈다. 그나마도 논술전형이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 시대의 아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유튜브를 비롯한 영상 매체로 세상을 배우고, 텍스트는 다섯 줄만 넘어가도 읽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실제로 나는 20년 넘게 논술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문해력 수준이 평균적으로 크게 하락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초등학교 때 다닌 독서논술학원의 효과는 고3이 되면 최상위 일부 학생에게만 긍정적 영향으로 남는 듯하다. 최상위권 학생들의 문해력은 과거에 비해 훨씬 좋아졌다. 이들은 책과 인터넷, 영상 매체, 직접 경험을 넘나드는 광범위한 정보 수집 능력과 빠르고 정확한 독해력을 갖추고 있고, 어휘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도 놀라운 수준이다. 물론 이런 아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보통의 아이들은 글 읽기 자체가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일상에서 글을 읽고 쓰는 일을 경험할 기회가 적다. 인터넷 게시판의 댓글이나 카카오톡 메시지에서 짧은 어구나 이모티콘으로 자신의 감정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데만 익숙할 뿐 다섯 줄 이상의 완전한 문장으로 일관된 생각을 전달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 당연히 이런 아이들은 논술을 처음 시작할 때 한 단락도 쉽게 완성하지 못한다. 대개는 독해 능력도 부족하다. 필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아는 단어들을 이미지처럼 조합해 자의적으로 다른 의미로 이해하거나 자기 상상대로 곡해하는 일이 많다. (p.368-369)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더라도 교육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망친다. 학원에서 상담을 진행할 때면 상당수의 부모가 자녀의 성적을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 옆에서 아이들은 잔뜩 주눅 들어 있거나 다 포기한 듯 무시하는 눈초리를 보였다. 이런 상황은 입시가 진행되면서 점점 악화되곤 했다. 부모가 교육에 집착하고 많은 돈을 쓰는 이유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일 텐데, 사랑이 강해질수록 그 근간이 파괴되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신뢰는 작은 일로 무너져 내리는 법이다.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적이 떨어져서 가장 속상한 사람은 학생 본인이다. 학생은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에 다음엔 더 잘할 거라며 허세를 부리고 공수표를 날리지만, 자신을 믿지 않고 부끄러워하는 부모의 얼굴을 보며 점점 더 궁지로 내몰린다.
 그간의 관찰과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좋은 부모는 자식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모가 아니라, 만족스러운 성취를 얻지 못한 자녀를 다독이면서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믿어주는 부모다. 잘하는 자식을 자랑스러워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잘하지 못한 자식을 진심으로 끌어안는 일은 더 많이 노력하고 고민하는 부모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더 나은 교육은 이런 노력과 고민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p.381-382)

 

 이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10대 청소년이 미래에 관한 구체적인 전망과 꿈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밀려드는 교과 공부 사이에서 틈틈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나름대로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그 앎의 수준이 깊지 않다. 청소년에게 꿈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한정된 정보를 미래에 투사하여 나름의 상상을 하는 것이다. 정확한 정보 없이 건너편을 향해 뛰어오르는 생의 도약이자, 발 디딜 곳 없는 허우적거림 같은 것이다. 그런 도약이 때로 어떤 잠재적인 힘이나 의지에 의해 놀라운 결실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그 끝에서 다시 원래의 바닥으로 허무하게 돌아오거나 다른 꿈을 향해 다시 뛰어오른다. 혹은 꿈을 꾸지 않고 살아가게 된다. 사실 그런 꿈이라도 가지고 있는 아이는 무척 드물다.
 나는 꿈이 없는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교육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술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미래에 대한 무지야말로 인간 자유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유전자를 복제하더라도 그 복제인간은 아인슈타인만큼의 과학적 성취에 이르기 어려울 것이다. 그 복제는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를 또 하나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행해진 만큼, 복제인간은 탄생의 순간 이미 자유를 상실한다. 미래가 정해져 있는 자에게 자유는 없다. 자유롭지 않은 자가 스스로 앎을 추구하고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리도 없다.
 아직 꿈이 없다는 것은 더 많은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뜻이다. 더 많은 배움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선택하고 노력할 기회가 아직 자신의 것이라는 의미다. 아이들에게 억지로 꿈을 갖게 하는 것은 교육이 할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학생부종합전형은 일정 비율 이상 증가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수험생은 아직 꿈이라는 말로 규정된 한 가지 목적에 종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기 때문이다. 교육 제도는 그 자유를 존중할 책임이 있다. (p.389-390)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실패도 아니고 패배도 아니다.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일은 어렵다. 제도 교육 속에서 칭찬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일이고, 그간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으레 듣던 “너 이걸 아직도 몰라?”라는 힐난조의 말은 오래도록 사람을 무지의 구렁텅이에서 서성이게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거나 아는 척하며 배우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솔직한 일일 뿐 용기를 내야 할 일도 아니다. 누군가 “너 이걸 아직도 몰라?”라고 한다면, “그거 배울 때 제가 잤나 보죠”라고 당당하게 쏘아붙이는 학생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부끄러워지도록. 누구나 모를 수 있다. 그것을 당당하게 인정하는 것이 즐거운 앎의 시작이다. (p.393-394)

 

 대학이 줄어든다고 해서 사람들의 인식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학벌주의와 대학 서열화, 그리고 사교육에 대한 인식 변화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낱같은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사회 구성원들이 무엇이 문제인지 인지는 하고 있어야 한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기정사실로, 바뀌지 않는 현실로 이해하는 사람이 다수라면 문제는 해결은커녕 악순환을 거듭하며 확대 재생산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고민과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자녀의 명문대 입학에 집착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학벌주의의 폐해로 고통받았거나, 혹은 그것이 열어준 기회로 혜택을 입었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학력 차별을 받은 당사자였거나 혹은 학력 차별을 행하는 주체이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겪은 부당함이 자녀의 결핍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초조함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학벌주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한,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오더라도 우리는 눈치조차 채지 못할 것이다. 삶의 필요를 구하기 위해 살아가다 보면 ‘잘’ 살아가지 못할 수도 있고, 비겁해지거나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이후로도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변화도 불가능할 것이다. 살아온 방식을 돌아보며 비겁함과 타협을 정당화하지 않고,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남겨 부끄러움으로 간직하기만 하더라도 우리는 변화와 개선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p.408-409)

 

 

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 / 미카엘라 르 뫼르 / 풀빛

 

 청소과 직원으로서 비난받는 이 시스템의 한 요소이기도 한 그는 중압감에 짓눌린 듯 보였다. 은퇴를 앞두고 있는 그는 “힘을 모으고 또 모아야 해요. 그렇게 되리라 생각하긴 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어요. (중략) 어찌 됐든 가난하지만 깨끗한 도시는 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이 불행해지면 그 불행은 보통 지속되죠. (중략) 파벌, 부패, 빈곤은 모두 함께 존재해요. 더러움, 질병도 마찬가지고….”라며 걱정했다. (p.20)

 

 조르주 바타유는 저서 『저주의 몫』에서 일반 경제가 생산한 에너지와 재료의 과잉을 정의하면서 인간 사회가 ‘소모’의 길을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축적된 쓰레기 속에는 실제로 저주의 양상이 있을 수 있다. 어쨌거나 물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행복과 불행은 역사의 주역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2016년에 베트남 중앙 지역에서 목격한 재활용 쓰레기를 파는 여성의 모습은 나에게 ‘운명의 수레바퀴’를 떠오르게 했다. 가뜩이나 적은 그의 수입은 변동적인 시장 상황과 원재료 가격에 따라 달라진다. 권력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기회의 불공평과, 누군가는 폐기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 실상의 불평등은 세계에서 작은 지역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퍼지며 갈등을 낳는다.
 이에 더해, 유럽이든 아시아든 더러움과 깨끗함을 관리하는 데 있어 젠더 논리에 근거한 분업이 가정에서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잘 지워지지 않는 불결한 오물은 그렇게 사회학자 모니크 헤코가 고안한 표현인 ‘가사 정신노동’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는 1980년대 가정에서 부여받은 ‘완전한 청결(Propre Total)’과 싸우며 집과 일터로 하루 두 번 출근했고, 그 과정에서 허우적대는 주부 노동자들의 ‘이분된 일상 관리’에 주목했다. 우리는 실제로 한쪽에는 물건을, 다른 쪽에는 쓰레기를 두는 사물의 분리와 노동의 분담이 동시에 일어나는 첫 번째 장소가 가정임을 목격한다. (p.43-44)

 

 사출기가 플라스틱 조각들을 녹이면 스크루의 내부 압력을 통과한 걸쭉한 용암 같은 것이 기계 주둥이에서 천천히 나와서 금속 골판에 떨어진다. 공기와 접촉하면 식어 버리는 이 폴리머 반죽의 색이나 외형은 재활용 라인에 들어가기 전, 폐플라스틱의 질에 따라 달라진다. 색깔은 민트색부터 밤색, 회색, 검은색까지 다양하다.
 환기가 안 돼서 이미 후텁지근하고 공기도 탁한 작업장에서 사출기는 가스 기포를 내뿜으며 덩어리지고 김이 나는 걸쭉한 용암을 내보낸다. 노동자들은 매일같이 이런 공기를 마시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전염병이 창궐했던 2000년대 이후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유해물이 존재할 때 의료용 마스크나 천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에 익숙하다. 하지만 비말로 전파되는 바이러스를 제외하면 이런 보호 장비는 대단한 효과가 없을뿐더러, 부패하거나 녹은 플라스틱에서 발생하는 가스나 기타 유독한 증기가 유발하는 실질적 위험에 대처하기에는 불충분하다. (p.68-69)

 

 반짝이는 논 위로 왜가리가 날고 밤에는 개구리가 울어대는,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과거 베트남 평야의 평화로운 풍경을 그와 함께 상상해 보려 했다. 그러나 이제 쓰레기, 오염, 공장, 도로 교통의 존재감이 워낙 뿌리 깊어서 이런 풍경을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다.
 부서진 쓰레기들이 햇빛에 썩어 가면서 뿜어내는 악취가 코끝을 자극하고,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모터와 기계의 소음뿐이다. 아마도 개구리는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디. 오염된 늪지에 숨어 있겠지만 소음이 점령한 이 풍경에서 개구리는 사라지고 없다.
 재활용된 알갱이들을 생산하는 작업장에서는 플라스틱 입자가 둥둥 떠다니는 더러운 물을 흘려보낸다. 분쇄된 폴리머 쓰레기의 세척 수조에서 나오는 오수는 마을의 도랑이나 재활용 공장 주변의 공터로 흘러가 고여 있다. (p.87)

 

 2018년에 미국 언론들이 중국의 금지 조치 이후 수거 및 분리센터 창고에 쌓여 있는 쓰레기 보따리들을 보도하자, 격분한 국내 언론들은 베트남 내에는 살 사람이 없어 갈 길을 잃은 쓰레기 화물들이 쌓여 있는 항구에 몰려왔다. 플라스틱, 철, 알루미늄, 폐지로 가득 찬 컨테이너 9,000개가 큰 항구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고 일부는 수개월 동안이나 주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베트남 정부 부처는 이 쓰레기들을 다시 수출하든, 처리장으로 옮기든 위반 기업의 비용으로 처리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쓰레기 산은 계속 높아지며 영토를 점령했다. 민 카이 플라스틱 재활용 마을은 당시 텔레비전 뉴스에도 등장했는데, 한 기자에 따르면 폴리머 쓰레기가 매일 1천 톤씩 들어오면서 1년 만에 그 규모가 10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 쓰레기 국제무역의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는 쓰레기의 유입을 규제하지 못하는 베트남 정부의 코앞에서 음성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p.119-120)

 

 조찬이 진행되는 와중에 나는 한 기업가가 ‘바이오 플라스틱’을 반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대체품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을 쏟아내는 유일한 한 사람은 (한 단체뿐이었지만 내내 조용히 있던) NGO의 대표도, 국회의원도, 고위 공무원도 아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재활용 기업 조합의 대표였다.
 그는 ‘2차 원료’(쓰레기)가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폴리머들에 의해 혼합되고 오염되어 재료 가공의 안정성과 재활용 제품의 내구성이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모든 종류의 폴리머(HDPE, LDPE, PET, PP 등)를 인지하는 것 외에도, 분리수거에는 (아마 유일하게 재활용되는) 합성 플라스틱과 생물 분해성 혹은 생분해성 플라스틱을 구별할 수 있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는 가정에서 담당하는 과정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주로 담당하는 이는 쓰레기 처리 노동자들이다. 분해되는 플라스틱이 합성 플라스틱을 대체하게 되면 재활용은 사라지고(혹은 매우 특화되어 있고 수익성 있는 일부 산업에 국한되어), 현재의 재활용 시장의 역할을 매립 또는 퇴비화시키는 정도로 축소시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쟁점은 점점 확대되고 찬성파와 반대파 사이에서 새로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전문가와 문외한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는 기업가들의 의도대로 이 사회 기술적 논쟁을 전문가 집단이 독차지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플라스틱 제품이나 플라스틱 쓰레기의 미래는 다수의 주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도 고려해야 한다.
 각 지역의 거주민과 시민, 관련 분야의 전문가와 기술자, 지도자, 환경운동가, 국회의원과 정당 대표 등 모든 목소리가 지식을 공유하고 플라스틱 문제와 관련된 모든 쟁점을 파악하면서 민주적으로 최선의 선택에 대해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
 2016년에 베트남의 한 제강소에서 강으로 방출한 화학 제품 때문에 수천만 마리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맞은 ‘포모사 플라스틱 위생·환경 사건’ 이후 (금지된) 한 시위의 슬로건에서 언급했듯이 말이다. “물고기는 맑은 물이 필요하다. 사람은 투명성이 필요하다.” (p.139-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