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짜로 공부한다 / 살만 칸 / 알에이치코리아(RHK)
구식 교육모델은 우리의 변화하는 요구에 더 이상 맞지 않는다.
구식 모델은 완전히 수동적인 학습방식이며, 세상은 점점 더 '능동적인' 정보처리 방식을 요구한다. 구식 모델은 학생들을 나이별로 무리를 지어 모두 같은 보조를 맞추는 커리큘럼에 밀어넣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뭔가 얻기를 바란다. 백 년 전에는 그게 가장 좋은 모델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분명 아니다. 한편, 새로운 기술은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지만, 혼란과 두려움도 불러온다. 빛나는 새 기술이 진열대 위의 장식물처럼 거의 쓰이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낡은 교수법과 새 교수법 사이에는 제도적 균열이 있다. 날마다 전 세계의 아이들이 그 틈으로 추락한다.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지만, 구조적 변화는 매우 더디게 일어날뿐더러 종종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다. 매일 매번의 수업시간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식과 아이들이 실제로 배울 필요가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은 더 커져간다.
더 골치 아픈 사실은 많은 이들이 무엇이 위기인지를 간과하는 것이다. 위기는 졸업률이나 시험 성적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요소가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관한 문제다. 잠재력의 실현 또는 낭비, 자아존중감의 향상 또는 부정의 문제다.
나는 우리 각자가 우리 모두의 교육에 이해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어디서 천재가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 사는 어린 소녀에게 암 치료제를 발견할 잠재력이 있을 수도 있다. 뉴기니에 사는 어부의 아들이 해양 보존에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통찰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왜 그들의 재능이 낭비되도록 내버려 둬야 하나?
우리가 그런 아이들에게 세계적 수준의 교육을 제공할 기술과 자원을 갖고 있는데도 제공하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런 일이 실현되도록 하는 비전과 용기를 그러모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는 기본 전제들을 되짚어볼 것이다.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배울까? 표준적인 교실모델, 즉 학교에서 다수를 상대로 한 강의를 듣고 저녁에 혼자 숙제를 하는 방식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한가? 왜 학생들은 당연히 '배웠다' 싶은 내용 대부분을 시험이 끝나자마자 잊어버릴까? 왜 어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실제로 세상에 나와서 하는 일들 사이에 그토록 괴리감을 느낄까? 우리는 이 같은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게다가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 해도, 현 교육 상황을 한탄만 하는 것과 그와 관련하여 실제로 뭔가를 하는 것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모든 메시지들에서는 하나의 주제가 선명히 드러났다. 너무 많은 영리하고 의욕적인 아이들이 (가난한 학교뿐 아니라 부유한 엘리트 학교에서도) 교육과정에서 푸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아이들의 자존심이 짓밟힌다. 심지어 많은 '성공적인' 학생들조차 사실 별로 배우는 것도 없이 좋은 점수를 땄다고 고백한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배운다. 어떤 이는 직관적으로 단번에 이해하지만 다른 이는 끙끙거리고 시간을 오래 끈다. 빠른 사람들이 반드시 더 영리하지도, 느린 사람들이 더 멍청하지도 않다. 더 나아가 빨리 알아듣는다고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속도는 스타일의 문제이지 상대적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거북이는 결국 토끼보다 더 많은 지식, 더 유용하고 '오래 남는' 지식을 얻게 될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산수를 배우는 데 느린 학생이 관념적 창의력이 필요한 상급 수학을 공부할 때는 평균 이상의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 요점은 교실에 열 명이 있건 스무 명이 있건, 아니면 쉰 명이 있건 간에 하나의 주제를 이해하는 데에는 언제나 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학생들이 얼마나 개념을 잘 이해했는지에 상관없이 교사가 정해진 속도에 맞추려고 진도 나가기만을 강요한다면, 심지어 교사 대 학생 비율이 1대 1이더라도 이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 과를 끝내고 시험을 보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그런 독단적 '순간'에 여전히 어떤 학생들은 뭘 배웠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있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아마 궁극적으로는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바로 문제다. 표준 교육모델은 '궁극적 이해'를 사실상 허용하지 않는다. 크기가 어떻든 간에 학급은 진도를 나가야 한다.
전통적인 학습모델에서는 과제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가 서로 달라도 뭔가를 배우기 위해 할당된 시간은 고정돼 있다. 워시번은 그 반대를 지지했다. 고정돼야 할 것은 높은 수준의 이해이며, 서로 달라져야 할 것은 학생들이 개념을 반드시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양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어떤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다른 것과 연관지을 수 있다면 그 정보를 이해하고 기억하기가 더 쉽다. 이는 왜 시 암송이 같은 길이의 무의미한 음절의 나열을 기억하는 것보다 쉬운지 설명해준다. 시에서는 각각의 단어가 마음속의 이미지, 이미 알거나 경험했던 것과 관계를 맺는다. 노골적이지 않더라도 시가 따르고 우리가 이해하는 리듬과 연결의 규칙이 있다. 시를 외울 때 우리는 정보의 조각난 단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뭔가 총체적인 것을 더 가까이 볼 수 있도록 하는 논리의 형식과 가닥들을 다룬다.
이는 우리의 뇌가 지식을 오랜 기간 보유하려면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가장 효과적인 교육방법은 배우는 주제의 흐름, 그리고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이어지고 주제들을 가로지르는 연결의 연쇄적 고리를 강조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실에서의 표준적 교육방법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이는 교과목의 인위적 구분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학습 주제들을 임의적인 자리에 갖다 두고 가지를 쳐내며 분리해 가둔다. 일맥상통하는 주제인데도, 유전학은 생물학에서 가르치고 확률은 수학에서 가르친다. 물리학은 대수학이나 미적분학을 직접 적용한 것인데도 서로 분리된 과목이다. 화학과 물리학은 다수의 같은 현상을 다른 차원에서 연구하는데도 별개의 과목으로 분리됐다.
위대해지고 싶은가? 그러면 존재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크고 높은 구조물을 짓고 싶은가? 먼저 겸손의 기초를 생각해보라.
구조물을 높이려면, 기초는 더 깊어야 한다.
― 성아우구스티누스
성공은 문제를 새롭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게다가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아이들에게 활동적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한 시간 동안 조용히 앉아서 듣고 있는 게 자연스러운가? 아니다. 아이들은 뭔가를 하고 싶어 하고, 뭔가를 하거나 노느라 바쁘고 상호작용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 학생들은 원래 수동적이지 않다. 얄궂게도 그들을 수동적으로 만들려면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수동성이 습관이 되어 학생들이 더 다루기 쉬워지긴 하지만, 아마 덜 기민하고 자신들이 하는 일에 덜 참여하게 된다. 이런 트레이드오프는 학생들이 꽉 들어찬 전통적 교실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학생들이 뭔가를 배우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적극적인 배움, 주도적 학습은 각각의 학생에게 언제 어디서 배울지 결정할 자유를 주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인터넷과 개인 컴퓨터의 장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차방정식을 새벽 3시에 뒷베란다에서 공부하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커피숍에서, 또는 축구장의 사이드라인에서 공부가 가장 잘 된다고 해도 문제 될 게 없다. 우리 모두 교실에 있을 때만 빼면 영리하고 초롱초롱한 아이들을 만나본 적이 있지 않은가?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이 있음이 확실하지 않은가? 인터넷에 기반한 교육은 어디서든 공부할 수 있는 혁신적인 이동성을 보장해주며, 이는 학생들이 자신의 개인적 리듬에 따라 가장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게 한다.
'이동성'과 '스스로 속도 조절하기'는 능동적이고 스스로 동기부여가 된 학습의 필수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배움에 주인의식을 가진 학생을 위해 필요한 또 다른 자원이 있다. 지나간 수업에 언제든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인터넷에 기반한 학습이 교과서나 다른 전통적인 자료들에 비해 훨씬 큰 이점을 제공하는 지점이다. 수업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칠판은 절대 지워지지 않고 교과서들은 절대 반납되거나 버려지지 않는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찾는 내용이 바로 거기, 자신의 컴퓨터에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힘껏 복습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학생이 특정 주제를 언제 마지막으로 공부했는지를 알면 곧바로 복습을 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이는 광합성을 설명해보라는 요청을 받은 12학년 학생에게 마침 복도를 걸어가던 11학년 때 생물 선생님이 다가와 도와주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육학적으로도 교과서의 배포는 새로운 질문과 난제들, 여전히 오늘날 교육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질문과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책들이 널리 배포되기 전에 교육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제각각이었다. 교사들은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자기가 아는 것을 가르쳤다. 각각의 교사는 달랐고, 한 교사가 지혜나 독창성을, 또는 늘 정확한 정보만을 전달하지 않더라도 열광적인 웅변술로 명성을 얻으면 학생들은 그에게 몰려들었다. 마치 마을의 인기 많은 랍비나 성직자처럼 인기 많은 교사는 어디에도 없는 무언가를 가진 존재로 여겼다. 학생들은 그 특정한 수업에서 (가끔씩은 잘못된 정보였을지라도) 독특한 가르침을 받고 떠났다.
책의 대량생산은 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교육의 역사에서 이는 지나치게 간과된 측면이다. 더 이상 교사가 정보의 유일한 출처이자 해당 과목의 최고 권위자가 아니었다. 이제 지식의 원천으로서 교사의 특권을 나눠 갖는 '전문가 뒤의 전문가'가 있다. 교사는 교실에서 다스리지만, 교재는 교실 너머 세상에서도 지위를 갖게 됐다. 만약 교사와 교재가 일치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권위를 정당화하는 인쇄의 힘은 책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 다른 한편, 교재는 학생들이 더 넓은 세상에서 온 최신의 사고를 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교재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속도에 맞춰 공부하고 숙달된 교사와 함께 더 깊은 수준을 공부할 준비를 갖춘 채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
성격의 모든 위대함은 개성에 의존한다.
주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는 일 이외의 다른 생활이 없는 사람은 평범한 존재 이상의 무엇도 될 수 없을 것이다.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뻣뻣한 수염과 모자, 엄격하게 발맞춰 행군하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프러시아에서 우리의 기본적인 교실 모델이 만들어졌다. 세금으로 지원하는 의무적인 공교육은 교육적 수단일 뿐 아니라 정치적 수단으로도 간주됐다. 애초에 공교육은 독립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와 교사, 교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왕의 권위에 굴복하는 가치를 배워 충성스럽고 다루기 쉬운 시민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도입됐다. 이 체제의 발전에 핵심 인물이었던 프러시아의 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 요한 코틀리브 피히테는 이 목표를 분명하게 밝혔다. "만약 당신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다면, 단순히 그에게 말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 그를 만들어야 한다. 당신이 그가 하기를 바라는 것을 그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시험에 대해 생각해보자. 무엇이 합격 점수를 결정하는가? 대부분 교실에서 75~80퍼센트의 학생이 통과한다. 통상 그렇다. 그러나 이 문제를 잠깐 생각해본다면 받아들이기 어렵거니와 처참하기까지 하다. 개념은 하나씩 다른 것 위에 쌓인다. 대수학은 연산을 필요로 한다. 삼각법은 기하학에서 흘러나왔다. 이 모든 것들은 미적분학과 물리학의 기초가 된다. 초반에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완전히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분별없이 75점이나 80점에 합격점을 주고 있다. 많은 교사들에게 이는 주변부의 학생들을 통과시키기 위한 친절 또는 단순한 행정상의 필요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해악이고 거짓말이다. 학생들에게 그들이 사실상 배운 적이 없는 무언가를 배웠다고 말하는 셈이다. 우리는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고 좀 더 어려운 다음 단원으로 나아가라고 슬쩍 떠밀지만 학생들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실패하도록 설정해놓고 있다.
이처럼 교실에서 배운 내용을 궁극적으로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 실패하는 것은 우리의 망가진 교실 모델의 핵심적 결점 중 하나다. 개념적인 교과목 단원을 서둘러 마치고 얕은 수준의 기능적 이해에 도달하면 공부가 끝났다고 선언해버리는 습관의 직접적 결과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대수학에서 무엇을 얻을까? 슬프게도 보통 아이들에게 남는 것은 대수학이란 x들과 y들의 묶음이라는 것, 기계적으로 암기한 몇 가지 공식과 절차에 갖다 넣으면 답을 알 수 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대수학의 힘과 중요성은 시험지 위의 x들과 y들에 있지 않다. 중요하고 멋진 사실은 그 모든 x들과 y들이 엄청나게 다양한 현상과 생각의 집합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거다. 내가 상장기업의 생산비를 알아내기 위해 썼던 같은 방정식을 우주공간에서 미립자의 운동량을 계산하는 데 쓸 수도 있다. 같은 방정식으로 발사체의 최적 경로를 구할 수 있고 새로운 상품의 가장 적절한 가격을 정할 수 있다. 질병의 유전 확률을 다루는 같은 개념으로 미식축구에서 10야드 라인을 바로 앞둔 지점에서 마지막 공격 기회 때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다.
시험은 답이 맞거나 틀린 이유를 거의 또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틀린 답은 학생이 중요한 개념을 놓쳤음을 말해주는 걸까, 아니면 그저 한순간의 부주의에 불과할까? 만약 학생이 시험 문제를 다 푸는 데 실패했다면 그 학생은 좌절해서 포기한 걸까, 아니면 단순히 시간이 모자랐던 것뿐일까? 시간이 필요한 만큼 주어졌다면 학생은 과연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었을까? 다른 한편, 정답을 맞혔다면 이는 학생의 추론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정답을 맞힌 것이 깊은 이해의 결과였을까, 아니면 빼어난 직관이나 암기력 덕분일까, 아니면 운 좋은 추측의 결과일까? 알기 어렵다.
전통적인 학교들은 학생의 선천적 능력이나 잠재력의 척도로서 시험 결과를 매우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표준화된 시험뿐 아니라 잘 고안됐는지도 알 수 없고 완전히 표준에 맞추지도 않은 기말고사까지 말이다. 그리고 이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성적을 매겨 A, B, C, D의 점수를 나눠줄 때 우리가 실제로 얻는 건 뭘까? 우리가 살펴봤듯 시험을 통해서는 학생의 의미 있는 잠재력을 측정할 수 없다. 반면, 아이들에게 꼬리표를 붙이고 고정된 범주 안으로 몰아붙여 규정하고 종종 그들의 미래를 제한하는 일은 매우 효과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사실 우리의 표준 교실 모델을 만든 프러시아의 교육 설계자들이 분명하게 의도했던 바이다. 시험은 8학년을 마친 뒤 누가 상급학교에 갈지를 결정한다. 이는 결국 누가 더 권위 있고 보수가 많은 직업에 적합한지, 그리고 누가 평생 하찮은 일과 낮은 사회적 신분에 처할 것인지를 좌우한다. 초기 산업사회는 많은 하급 노동자들, 즉 머리보다 손과 등을 써서 일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했다. 프러시아식으로 학생들의 '등급'을 나누는 것은 풍부한 노동력의 공급을 보장했다. 그 모든 결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체제 안에서는 공정함에 대한 환상이 유지됐다. 만약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고 가족의 부와 정치적 연줄, 개인교사를 고용할 돈 같은 걸 도외시한다면, 이런 시스템은 능력주의로 통할지도 모른다.
경쟁적이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에서 성공하려면 우리가 가진 모든 정신이 필요하다. 사람들 간의 관계와 우리 행성 지구의 건강에 관한 공통과제를 해결하려면 우리에게는 찾을 수 있는 모든 재능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게임에서 그렇게 일찍 일부 아이들을 걸러내어 그들은 아마 아무런 기여도 못하리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이가 늦게 피는 꽃이라면 어떻게 하나? 우리들 대부분과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며 초기에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할 수도 있는 천재들은 어쩌고?
아이들을 나이로 분리하는 것이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가족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고 세상도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이는 대부분의 인간 역사에서 아이들이 배우고 사회화되어온 방식에 역행한다. 미키 마우스 클럽조차 다른 나이의 아이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이들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본 사람이면 누구나 말할 수 있듯, 다른 나이대의 아이들이 섞이면 더 어리거나 더 나이 많은 아이들 모두에게 유익하다. 더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어린 아이들을 책임진다(나는 이를 나의 세 살 배기와 한 살 배기 아이들에게서도 본다. 그러한 행위를 지켜보는 건 정말로 경이롭다). 더 어린 아이들은 더 나이 많은 아이들을 우러러보고 따라한다. 모든 아이들이 좀 더 분별 있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 어리거나 더 나이 많은 아이들 모두 어려운 일에 잘 대처한다.
이 같은 나이의 혼합을 없애면 모든 사람이 뭔가를 잃는다. 더 어린 아이들은 영웅과 우상과 조언자를 잃는다. 훨씬 더 해로운 것은, 더 나이 많은 아이들이 리더가 되고 책임지는 것을 연습하는 기회를 박탈당하여 결국 어린애 취급을 당하고 만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교육기관은 실패가 마치 더러운 단어라도 되는 양 지속적으로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처럼 보인다. 학점의 세계에서 D나 F는 오점이다. 불안정한 기준과 정치적으로 자극된 인센티브 아래서 '실패'는 오명과 불이익을 가져온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의 수중에 '성공'을 가져오겠다는 환상적인 희망으로 기준들을 낮추고 기대를 희석시킨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위선적인 데다 잘난 체하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이상적인 탁월함의 의미를 퇴색시킬 뿐 아니라 결과가 미치지 못할지언정 높은 목표를 겨냥하는 가치를 이해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세상은 대담한 생각과 혁신적인 시도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것들은 작고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성공들보다 큰 실패들의 파생물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직업의 지리학 / 엔리코 모레티 / 김영사
혁신 부문은 여전히 미국의 고용 전체를 놓고 볼 때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데 그친다. 그 중요성이 빠르게 커지고 있지만, 혁신 부문이 일자리의 다수를 차지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비록 종종 잘못 이해되기는 하지만 단순하다. 미국, 유럽, 한국, 일본을 막론하고 현대 경제에서 일자리의 3분의 2는 지역적 서비스에서 나온다. 교사, 간호사, 가게 점원, 웨이터, 미용사, 변호사, 목수, 치료사 같은 일자리가 그것들이다. 순수하게 수로 따져 지난 20년 사이 고용이 가장 많이 증가한 경제 부문은 첨단기술이 아니라 의료 서비스 분야였다. 하지만 비록 일자리 면에서 방대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는 해도 지역적 서비스가 번영의 원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여타 부문들에 의해 만들어진 번영의 결과이다. 생활수준을 높이려면 근로자들의 생산성이 높아져야 한다. 그런데 서비스 부문의 생산성은 그다지 많이 바뀔 수 없다. (p.16-17)
혁신에 있어 한 기업의 성공은 근로자의 단순한 자질 이상의 뭔가에 의존한다. 그 성공은 또 기업을 둘러싼 전체 생태계에 의존한다. 이는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전체 생태계 때문에, 혁신의 본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전통적 제조업이 본거지를 옮기는 것보다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섬유 공장은 노동력이 풍부한 곳이라면 세계 어디에든 자리 잡을 수 있는 독립형 존재이다. 그와 반대로 생명공학 연구소는 다른 나라로 내보내기 어렵다. 그러자면 단지 기업 하나만이 아니라 전체 생태계를 이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p.30-31)
개발도상국은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그곳의 공장은 미국에서보다 기계를 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융통성을 더 발휘해 갑작스러운 변화에 좀 더 잘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추가 이득을 그 공장에 안겨준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어느 미국 사업가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중국이 싸다고만 생각하지만 정말이지 중국은 빠르다." 중국에서 일하는 어느 산업 디자이너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이야말로 가장 적응력이 뛰어난 기계이다. 기계는 가동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곧바로 다음 주에 전혀 다른 무엇인가를 하게 할 수 있다." 미국 공장들과는 달리 중국 내 공장들은 생산 계획이나 디자인의 변경을 거의 하룻밤 사이에 소화할 수 있다. (p.53-54)
혁신 부문이 (제조업과 달리) 그토록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핵심적 이유 하나는, 심지어 오늘날에도 혁신 부문은 놀라울 정도로 노동 집약적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연구의 주된 생산 투입은 인적 자본, 다른 말로 사람과 그들의 아이디어이다.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데에는 여전히 오랜 시간에 걸쳐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어떤 생산 투입이 진정 중요한지 알아보려면 작업장을 방문하기만 하면 된다. 공장에서 작업 현장을 지배하는 요소는 명백히 기계이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은, 기계를 운전하는 사람들의 위치와 활동을 포함해, 기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연구소나 소프트웨어 기업에서 중요한 것은 명백히 사람이며, 모든 것은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혁신적인 기술이 창조되는 작업장들은 여전히 인간의 노동에 크게 의존하는 반면, 전통적 제품이 만들어지는 작업장들은 대체로 로봇에 의해 가동된다. (p.101)
40년 전 미국은 물리적 자본이 풍부한 제조업 본거지들이 있는 곳이 부유했다. 클리블랜드, 플린트, 디트로이트는 롤리, 오스틴보다 평균 소득이 월등히 높았다. 오늘날 인적 자본은 개인에게든 공동체에게든 봉급을 예측하는 데 있어 최상의 변수이다. 롤리-더햄과 오스틴의 평균 소득은 클리블랜드, 플린트, 디트로이트보다 훨씬 높다. 대졸 주민의 수효가 많을수록 지역 경제는 엄청나게 변화되며, 결국 주민들이 얻을 수 있는 일자리의 종류와 전체 근로자의 생산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결국 이것은 숙련된 근로자뿐만 아니라 저숙련 근로자들에게도 임금 인상을 가져다준다. (p.142-143)
미국의 사회경제적 분리가 이렇게 심화되는 것은 정치적 과정에도 복잡하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 전국 차원에서, 유권자의 분열은 국가의 장래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미국인들이 합의에 도달하는 것을 갈수록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추세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예비선거는 과거보다 더 자주 과격한 후보들에 의해 지배된다. 케이블 TV들의 정치 보도는 갈수록 양극화되고 있다. 하원의원들과 상원의원들은 소속 정당의 노선에 따라 표결할 유인을 더 강하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지리도 갈수록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리적 분리로 인해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사는 사람들이 증가하며, 이 때문에 극단적인 정치적 태도가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빌 비숍은 그의 책 ⟪거대한 분류(The Big Sort)⟫에서 30년에 걸친 대통령 선거 자료를 통해, 동일한 성향이 너무나 강해 압도적으로 한 후보에게 쏠려 투표하는 공동체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었음을 밝혀냈다. (p.172)
모두들 아는 바와 같이, 혁신의 세계에서는 생산성과 창의성이 인건비와 부동산 비용보다 클 수 있다. 월마트는 샌프란시스코라는 위치에서, 경제학자들이 싸잡아 뭉침의 힘이라고 부르는 세 가지 중요한 비교우위를 발견했다. 바로 층이 두툼한 노동시장(즉, 특정한 분야에서 훈련받은 숙련된 근로자들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곳), 전문적 서비스 제공자들의 존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지식 전파이다. 비록 많이 논의되지는 않았지만, 이 힘들이 결국 혁신적 근로자들과 기업들의 소재지를 결정하고 그렇게 해서 공동체 전반의 미래를 형성한다. 이 힘들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힘들이 지난 30년의 '대분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p.187-188)
지리는 지식 확산에 중요하며, 지식은 거리가 멀면 신속하게 죽는다. 인용자가 피인용 발명가에게서 0~40킬로미터 사이 거리에 있을 때 인용 정도가 가장 높다. 인용하려는 발명가가 피인용 발명가에게서 4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을 때 인용 비율은 현저하게 낮아지며, 그 효과는 거리가 160킬로미터가 넘으면 완전히 사라진다.
심지어 한 기업 안에서조차 지리적 거리가 있으면 아이디어의 흐름이 방해받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라도 기업들은 혁신 단계의 어떤 부분을 비용이 덜 드는 다른 국가에 외주 주는 것을 꺼려하는 면도 있다. (p.211)
필자도 멀리 있는 동료들과 매일 전화나 이메일로 의견을 주고받지만, 최고의 아이디어는 뜻밖의 상황, 즉 점심을 함께 먹는 동료나 물을 마시려 정수기 앞에 모인 동료들과의 만남에서 더 자주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핵심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일단 자리를 잡고 난 상황에서 정보를 전송하고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전화와 이메일은 훌륭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런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데에는 최선의 수단이 아니다. 새 아이디어는 자유롭고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신비롭고도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떠오른다. 멀리 있는 동료에게 새 아이디어를 교환할 시간을 전화로 정하자는 것은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연구자라면 대부분 필자와 같은 생각이리라 짐작한다. 따지고 보면, 누구를 채용하고 누구를 해고할지를 놓고 우리가 학계에서 토론하느라 그토록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이유는, 우리의 동료들이 우리 자신의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면 우리는 더 똑똑해지고 더 창의적이 되고 궁극적으로 더 생산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똑똑할수록 그 효과는 그만큼 더 강하다. (p.212)
규모의 경제성이라는 용어는 대개 규모가 커지면 더 효율적이 되는 기업의 능력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대형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소형 업체들보다 효율이 높다. 하지만 이 규모의 경제성은 단일 기업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어떤 지리적 지역에 있는 모든 기업에 적용된다. 더 큰 단지는 효율적이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는 노동시장이 더 두꺼우며, 전문적인 사업 서비스가 더 많이 공급되며, 지식 전파의 기회도 더 많기 때문이다. 그 효과는 놀라울 수 있다. 단지 내 개별 기업들은 규모가 커지면 반드시 더 효율적이 되지는 않지만, 뭉뚱그려진 모든 기업들은 단지가 성장하면 더 효율적이 된다. 무엇보다 놀라운 결과는, 미국의 혁신 부문이 모든 도시에 걸쳐 분산된 게 아니라 제한된 수의 혁신 중심지들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로서의 미국이 더 생산적이라는(그리고 따라서 더 부유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지식경제의 역설 가운데 하나이다. 끌어당기는 힘들과 경제적 활동의 뭉침은 공동체들 사이에서 차이와 불평등을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 경제의 활력과 번영의 상당 부분이 여기에 달려 있다. (p.217)
혁신적 과정은 대체로, 한 공동체의 다른 부분들이 연결될 때 생기는 뜻밖의 타가수정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다양화를 향한 실리콘밸리의 움직임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보성을 심화시키고, 첨단기술 생태계의 다른 부분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아이디어와 재능의 교환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명과학 연구와 컴퓨터 게임 모두에서 실리콘밸리가 지닌 독특한 강점은 언뜻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 두 부문을 '진지한 게임', 즉 최첨단 컴퓨터 게임 기술을 질병 치료에 적용하는 제품의 형태로 서로 얽히도록 만들었다. (p.227)
미시간대학교의 경제학자들이 존 바운드의 지도 아래 팀을 이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지역 대학들이 수여한 학위 수는 해당 주 내의 대졸 근로자 수에 별반 영향을 주지 못한다. 세계 최상급의 공적 교육 체계를 갖춘 미시간과 오하이오 같은 주들은 대졸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붙잡아두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정작 그 대졸자들은 캘리포니아나 뉴욕의 취업 기회에 더 많이 마음을 빼앗긴다. 일반적인 학사학위 취득자의 경우, 바운드와 동료 학자들은, 주립대학 졸업자 수와 그 주에 남는 사람의 수 사이에서 미미한 관련성만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들은 의학사 취득자에게서는 어떤 연관성도 발견하지 못했다. 미시간에 남는 의사 수는 미시간대학교가 배출하는 의사 수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대졸자들의 이동성이 높기 때문에 고등교육에 투자함으로써 주 노동 인구의 숙련 수준을 끌어올리려는 주의 노력은 그 효과가 한계가 있다고 미시간대학교의 경제학자들은 결론지었다. 혁신 중심지들의 인력(引力)이 주들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든다. 이것은 대졸자들을 유치하려는 도시들에게는 희소식이다. 이들 도시는 다른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한 인적 자본을 사실상 공짜로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고등교육에 투자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고투 중인 주들의 힘을 크게 제한한다. 바운드의 연구는 교육 정책에도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그는 연구를 통해 공립대학들의 자금 조달을 주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고등교육 투자의 사회적 편익이 주 경계 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감안한다면, 연방정부가 이러한 투자의 일부를 보조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맡는 게 효율적인 교육정책이란 것이다. (p.246-247)
1998년 사회학자 린 G. 주커와 경제학자 마이클 다비가 놀라운 이론 하나를 제시했다. 이제는 고전이 된 대단히 흥미로운 이 논문과 일련의 후속 연구들에서 두 학자는 민간 생명공학 기업들의 소재지와 성공을 진정으로 설명하는 것은 학문적 스타들(구체적인 유전자 배열 순서를 규명하는 최고의 논문들을 펴낸 연구자들)의 존재라고 주장했다. 최고 대학들 중 어떤 대학들에는 우연히도 생명공학에 중요한 특정 하위 분야를 전공한 스타 교수들이 있었는가 하면, 다른 대학들에는 연구 역량은 비슷했지만 그 특정한 세부 분야를 전공한 교수들이 없었다. 전자 집단은 민간 생명공학 기업들로 지역에서 단지를 만든 반면, 후자는 그러지 않았다. 자료에 따르면 학계 스타들의 자석 효과는 대단했다. 주커와 다비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모험자본 기업들과의 근접성, 우수 대학들의 존재, 또는 정부 자금 지원의 효과보다 스타 학자들이 훨씬 더 중요했다. 스타 학자들은 생명공학 신생 기업들이 언제 어디서 지도 위에 등장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신생 기업들이 성공하며 어떤 신생 기업들이 사라지는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p.270-271)
혁신 부문에서 경제적 기반을 굳건히 구축한 도시들이 흔히 활기차고 재미있으며 문화적으로 개방적이라는 것은 확실히 맞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를 확실하게 구분해야 한다. 성공적 혁신 단지들의 내력을 똑바로 보자. 많은 경우 도시들이 굳건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매력적이 된 것이지 그 역 또한 마찬가지이지는 않다. 예를 들어 오늘날 시애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멋진 식당들과 관대한 사람들이 있는 도시가 문화적으로 활기차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창의적인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시애틀에서 혁신 부문이 성장한 거라고 결론짓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것은 정확히 반대이다. 지미 헨드릭스와의 그 모든 연고에도 불구하고, 1980년 시애틀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먼지투성이였고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으며, 주민들은 수천 명씩 도시를 떠나고 있었다. 그 모든 첨단기술 일자리들을 유치하기 시작한 뒤에야 시애틀은 활기차고 국제적인,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p.282-283)
리처드 플로리다의 주장은, 창의적 계층을 위한 생활 편의 시설의 증대는 노동력 공급의 증가로 이어지며, 이것이 결국 한 도시의 경제를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멋있는 것으로 일관한 베를린의 20년 세월 끝에, 고학력의 창의적인 노동력의 공급은 수요를 훨씬 능가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무려 사회과학자의 30퍼센트와 예술가의 40퍼센트가 실직 상태이다. 독일은 번영하는 첨단기술 부문과 발전하는 고급 제조업 부문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아주 작은 일부만 베를린에 소재하고 있다. 이 도시가 제2의 실리콘밸리로 변신할지 여부는 오직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화려함은 지역 경제를 지탱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결국 도시는 일자리를 유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삶의 질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샌프란시스코에 본사가 있는 옐프 사의 공학기술 담당 부사장 네일 쿠마르는 〈유에스에이 투데이〉 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회사 소재지는 두뇌가 명석하고 교양 있고 다양한 노동력을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어 공학기술 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서 도시 그 자체가 핵심적인 구인활동 수단이라고 덧붙였다. "샌프란시스코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창의적이고 기술에 능한 인재를 유치할 수 있다." (p.287-288)
생기를 잃은 삼류 경제학과를 일류 연구 집단으로 탈바꿈시키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던 핑왕은, 학자들이란 어느 정도 첨단 기업들과 같다는 사실, 즉 학자들은 아이디어를 교환할 만한 우수한 동료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생산적이고 혁신적인 경향이 있음을 재빨리 깨달았다.
(…)
핑왕은 이러한 덫에서 탈출하는 단 하나의 길이 있음을 인식했다. 그에게는 '대대적 지원' 전략이 필요했다. 그가 한 일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 그는 각기 다른 대학에 있는 두 명의 학계 스타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을 했다. 60만 달러에 가까운 연봉을 제시한 것이다. 그 도박은 성공했다. 스타 학자 두 사람은 재직하던 일류 대학을 그만두고 세인트루이스로 이동했다. 경제학과에 스타 두 명이 있었으므로, 다른 경제학자들도 그 학과를 매력적이라고 보기 시작했으며 정상적인 봉급을 받고 있었음에도 이 대학으로 옮기라는 핑왕의 제의를 수락했다. 좋은 경제학자들이 점점 많이 그곳으로 이동함에 따라 경제학과는 더더욱 매력적인 곳이 되었다. 워싱턴대학교의 순위는 껑충 뛰어올랐다. 핑왕은 빈곤의 덫에서 탈출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양의 피드백 회로(positive feedback loop)는 금융위기를 맞아 워싱턴대학교에 오는 기부금이 크게 줄고, 이에 따라 경제학과가 교수 채용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던 2008년 끊어지고 말았다. (p.295-297)
우리는 역설로 가득 찬 세계에 살고 있다. 이것은 때로 그 세계를 이해하기 버겁게 만들지만 대단히 흥미롭게도 만든다. 가장 흥미로운 역설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지구촌 경제가 갈수록 지역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폭발적 상호 연결, 거리의 종말에 주목하는 온갖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일하는 장소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우리의 최고 아이디어는 여전히, 우리가 마주치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 바로 펼쳐져 있는 사회 환경에서 우리가 얻는 일상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자극을 반영한다. 우리의 중요한 상호작용 가운데 대부분은 여전히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배우는 가치 있는 것의 대부분은 위키피디아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세계의 전화통화, 웹 트래픽, 투자의 방대한 다수는 여전히 지역에서 이뤄진다. 재택근무는 지금도 매우 드물다. 화상 회의, 이메일, 인터넷 통화는 혁신적인 사람들이 나란히 근무할 필요를 떨어뜨리는 데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사실 이것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다. 상품과 정보가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갈수록 빠른 속도로 여행하는 바로 그 시점에, 우리는 어떤 핵심적인 도시의 중심부로 향하는 정반대의 중력을 목격하고 있다. 세계화와 현지화는 동전의 양면처럼 보인다. 점점 더, 지역 공동체들이 경제적 성공의 비결이 되고 있다. 최근 자신의 신생 기업을 실리콘밸리로 이전한 이스라엘 기업인 야니브 벤사돈의 말마따나, "인터넷을 통해 어디서든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사람이 하는 일이다." 21세기의 이러한 두 가지 주요 추세(세계화 심화와 지역화 심화)는 우리의 작업 환경과 공동체들의 구조 자체를 개조하고 있다. (p.361-362)
책의 말들 / 김겨울 / 유유
책 읽기는 느린 행위다. 책 읽기는 우리에게 멈춰 서도록 요구한다. 눈과 귀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허겁지겁 처리하는 대신 천천히 생각하도록 요청한다. 어떤 책에는 저자가 과속방지턱을 많이 설치해 두는데, 그러한 과속방지턱은 몇 날 며칠에 걸친 고민으로 완성된다. 어떤 책에서는 저자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서서히 미끄러지도록 도로를 설계하는데, 이러한 도로 역시 몇 날 며칠에 걸친 고민으로 닦아진다. 성실한 독자는 그 과속방지턱을 갈라 보고 잘 닦아진 도로를 문질러 본다. 독서란 곧 경청이며, 경청이란 곧 집중하고 반응하고 되묻는 일이다.
그러므로 책 읽기란 얼마나 비효율적인 행위인가. 어떤 이들은 문학을 읽지 않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 허구의 세계가 쓸모없다 믿고, 당장 써먹을 만한 지식을 알려 주는 책만이 가치 있다 여긴다. 그러나 비효율이 곧 우리가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더 나아가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경청하는 이들은 안다. 이 힘이 쓸모없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한탄할 것은 없지만. 슬프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 바쁘지 않은가. (p.29)
어린 시절에는 뭘 읽는지도 모르고 읽었던 책들이 너무나 많고, 그렇게 읽은 책이 없었다면, 그리고 뭔지도 모르고 신나서 떠든 그 이야기들을 친절히 들어준 어른들이 없었다면 나는 무척 위축되어 아마 책에 흥미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어린이들이 실컷 읽고 실컷 떠들도록 두어야 한다. (p.89)
책은 선물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인 듯하다. 상대가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고리타분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고 선물한 책의 행방도 장담할 수 없다. 반대로 상대가 책을 좋아한다면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일 수도 있고 그의 취향과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대개 잘 아는 사람에게 맞춤형 책을 주거나, 선생님이 제자에게 주거나, 혹은 책이 어떤 취급을 받든 괜찮다고 생각할 때 책을 선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p.97)
나는 왜 여성은 열등하다고 말하는 소크라테스를, 루소를, 니체를 좋아했을까? 왜 아내와 아이를 버리고 예술을 택하는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를 동경하고, 여성을 불완전한 존재로 보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흥미롭게 읽었을까? 남성이 여성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소설가나 성폭력을 저지른 시인들까지 갈 것도 없다. 그런 책들은 공기처럼 존재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말처럼(감독의 말에서는 '책'이 아니라 '영화'였지만) 오랫동안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책을 사랑해 왔다.
(…)
나의 독서를 후회하는가? 그렇지 않다. 물론 어떤 책들은 버렸고 어떤 책들은 다시 보지 않지만, 책 속에서 느낀 순수한 희열이 읽을 당시에는 있었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나는 여성이지만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아마도 남성 독자와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그 속에서 느낀 보편성만큼이나 그 반대의 경우에도 충분한 보편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인간인 만큼 그들도 인간일 테니까, 혹은 인간이어야 할 테니까. 그러니 우리는 조금 더 여성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뇌하고 설치고 돌아다니는 모든 여성의 이야기에. (p.193)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 오찬호 / 위즈덤하우스
새벽은 가난의 깊이가 언제나 사람의 상상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화려한 도심에서도 골목 몇 개만 들어가면 여기에 과연 사람이 사는지 의심이 들 정도의 집들이 즐비하다. '그래서'인지 '그런데'인지 헷갈리지만, 그 남루한 집에 사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일찍 출근한다. 가난하니 (그래서) 고단한 하루를 빨리 시작하는 이들은, 열심히 살아도 (그런데) 계속 가난하다.
새벽 첫차를 타러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매일 마주한 나는, 가난의 책임을 개인에게 찾으려는 게 얼마나 기만적인지 잘 안다. '게으르니까' 빈곤한 것 아니냐면서, 죽을 때 가난한 건 자기 탓이라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행복은 사람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이는 사회가 개인에게 미치는 무서운 영향력을 지나치게 축소하는 소리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야만 했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배운 불평등이란 잔인한 덫을, 나는 왠지 아름다운 이야기만 해야 할 것 같은 방송 카메라 앞에서 외면하지 않았다. 살면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다.
사회의 제도를 만들고 정비하는 사람들이 맹목적 긍지로만 뭉쳐 "이 나라는 완벽해요! 차별과 혐오는 생각도 할 수 없어요!"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사회에서는 불평등에 대한 정당한 항의가 '객관적으로 나아진 현실을 부정하는 배배 꼬인 생각'이라는 냉소에 막혀버린다. 한국처럼 말이다. 새마을 운동, 한강의 기적,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 단군의 후예, 열정과 성실로 무장한 국민 정서 등등 '찬란한 역사에 자긍심을 지니자'면서 무한 긍정만을 강요하는 듣기 좋은 말들이 얼마나 자주 등장했던가. 여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렇게 내뱉는다.
"그 덕에 우리가 잘살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이 나라에 감사하자!"
여성이기에 위태로워져야 하는 세상 물정을 목격한 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여성의 진로는 더 좁아질 것이다. '살아보니' 어쩔 수 없다는 경험 사례는 '공부 잘하면 교대 가라'는 무례한 조언으로 이어진다. 다른 전공을 선택한들 고시 합격만이 유일한 탈출구처럼 개인을 짓누른다. 이들 중 성공한 일부는 '프로페셔널한 여성'으로 포장되어 유리천장에 막힌 다수를 핍박하는 소재가 된다. 사회에서 여성의 입지가 좁아지면 가정에서는 '모성애'를 발현하여 정체성을 찾는 엄마들이 많아지고 워킹맘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대학의 청소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 나는 시간강사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교육자라는 생각에, 학교 곳곳이 쓰레기로 넘쳐나는 상황을 학생들이 불편함만으로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고 가볍게 강의시간에 다룬 바 있다. 그때 누군가 당당하게 했던 말이 10년이 지나서도 기억난다.
"수요와 공급이잖아요. 현재 급여로도 청소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은데, 저 사람들 말을 학교가 들어줄 필요가 없죠."
대학의 분위기는 오래전부터 이러했다. 돈이 안 된다는 학문은 무시당했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학과만 몸집이 커졌다. 구성원의 성분이 편향적이니, 여기서는 의견을 모은들 비용 절감, 이윤 증가의 법칙만이 부유한다. 시장경제를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교수들이 많은 곳에서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할수록, 노동을 수요와 공급이라는 제한된 언어로만 이해한다. 왜 양질의 일자리가 줄었는지, 왜 양질이 아닌 일자리에도 사람이 몰리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행복과 노력을 결부시키면 위험하다. 특히, 사회가 흔들릴 때의 이런 조합은 '넘어진 사람'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부메랑에 불과하다. 다수의 비극이 소수의 희극에 덮이면 되겠는가. 우리는 결코 공평하게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 불행은 가장 아래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의 삶부터 야금야금 씹어 먹는 굉장히 정직한 녀석이다.
정규직 전환 자체가 절대적인 정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니, 다양한 각도에서 정책이 사회에 미치는 여파를 따져보는 것이야 자유다. 하지만 오해를 풀자며 사실관계를 따질수록, 어떤 노동자의 소중한 생애는 '공부 안 하고 편히 돈을 벌려고 했던 사람'으로 너무나도 단순하게 정리된다. 상대의 주장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확신하기에 가능한 무례 아니겠는가. 이는 공부, 시험, 성적 등에 얽힌 수천 개의 변수들을 납작하게 찌그러트리며 살아온 삶의 시간과 비례한다.
자본주의적 시점에선 신의 한 수였다. 불안한 일자리 형태를 많이 만들수록, 노동자들끼리 다툰다는 예측은 완벽했다. 바늘구멍을 통과한 을(정규직)에게 갑(기업)이 괜찮은 보수를 지급하면, 사람들은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았다'면서 알아서 박수치고 선망한다. 그러면 노동자들 사이에는 공정이란 단어로 포장된 벽이 생겨 을은 결코 섞여서는 안 될 병, 정, 무로 철저하게 구분된다. 그리고 자신이 을 정도는 되리라 희망하는 취업 준비생들은 병, 정, 무의 요구를 마치 자신의 자리를 뺏는 것처럼 느끼며 분노한다.
예수는 격한 언행을 일삼았는데, 지금 예수를 찬양하는 공간에서는 사회를 '진보'시키겠다는 태도를 배척한다. 그리고 차별에 반대하자는 법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교회에서 강연을 하면, 여기는 정치적인 색깔을 강요하는 곳이 아니라면서 항의하는 분들을 만난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인류 역사에서 예수보다 정치적이었던 인물이 있었나요?"
몸의 결함을 개인의 책임으로 떠미는 담론이 부유하는 세상에는 아이가 햄버거를 먹고 신장이 망가지는 병에 걸렸다고 하소연하는 부모에게 어떻게 햄버거를 먹일 생각을 했냐면서 당당하게 빈정거리는, 거만하고 무례한 사람이 탄생한다. 하긴, 암 환자들이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병문안을 온 지인들이 '어쩌다가 암에 걸렸대?'라는 표정을 지으며 위로인지 추궁인지를 할 때라고 하지 않은가.
학력차별의 문법은 오랫동안 성차별이 유지되었던 상황과 다르지 않다. 모든 비열한 차별처럼 '그럴만한 객관적 이유'가 탄탄한 토대가 된다. 공부를 못했으니 사람처럼 살지 못해도 별 수 없다는 논리가 가능한 이유다. 성별 임금 격차 등의 문제를 지적할 때, '객관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또박또박 따지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존엄성이 무너진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풍토에서 조롱은 부지기수다. 이런 배경은 사람의 정당한 주장을, 박스나 깔고 자야 할 사람의 (또는 집에서 살림이나 할 여자의) 필요 이상의 요구라고 해석하고 무시하는 여론을 만든다. 이들은 '공정'이라는 프레임을 자신의 편에 세워 반대쪽을 혐오한다. 학교 급식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논의에 한 정치인이 "그냥 동네 아줌마인데 왜 정규직을 해야 하나"라고 말했다가 논란이 되었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무임승차, 도둑놈 심보로 이해한다.
중립적인 교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사건도 교사의 입을 통해 전달되면서 미세한 해석 차이가 생기지요. 학교 폭력으로 누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데, "신경 쓰지 말고 공부에나 집중해!"라고 말하는 교사는 중립적인가요? 교실은 언제나 정치적이었어요.
본질, 순수 등의 고상한 단어로 교육을 포장하는 사람들은 기득권을 비판하는 내용에만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자본주의를 자연적 질서처럼 가르치는 교과내용은 문제 삼지 않지만, 이를 비판하면 정치적인 사람이 된다. 성장은 절대 규율이지만, 분배는 정치적 선동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발전을 찬양하면 도덕적이지만, 이면을 따지면 뒤틀렸다고 욕먹는다. 기업을 칭찬하면 긍정적이지만, 노조의 필요성을 말하면 정치색깔로 얼룩졌다고 비난받는다. 석차와 대학 서열화는 세상의 이치지만, 학력주의를 비판하면 포퓰리즘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지금껏 성차별에 둔감하고 동성애를 공공연하게 혐오했던 수많은 정치적 교사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지만, 성평등을 주장하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부르짖었던 또 다른 정치적 학생들은 온갖 혐오에 노출되었다.
누군가가 수업 때마다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면, 그건 운이 좋은 사례다. 한번도 결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석할 일이 없었다는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 이를 '모범적인' 모습으로 인정하면서 반대편을 집중력이 저하되었다, 학생의 도리가 아니다 등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중년들도 공인중개소 앞을 지나가다가 벽에 붙은 아파트 가격을 보고 입이 쩍 벌어지고 하루 종일 잡생각이 떠나질 않는데, 학생들은 오죽할까? 영혼 없이 수업을 듣는 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다른 생각들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이 미친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지.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에 힘을 보탠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처음부터 똥을 피하는 데 익숙해졌기에 치우는 건 자기 몫이 아니라고 여긴다. 무엇보다 '그러다가' 자신의 일상이 어그러지면 취업 등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안다. 이들은 힘들어도 팔자가 그런 걸 별 수 있냐는 체념으로 살아간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악순환의 선순환이다.
자본주의가 무서운 것은 이러한 지친 개인의 생애 과정조차 경쟁적으로 전시되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개인의 서사를 더 안쓰럽게 포장할수록 효과가 좋다. '고통 경쟁'의 종착지는 끔찍하다. '내가 더 힘들다! 너는 이런 삶을 모르지?'라는 분위기에 길들여지면 어떤 노동자가 노조 활동을 하려다 회사의 탄압을 받는 모습을 봐도 심장이 송곳으로 찔리는 그런 아픔까지는 느끼지 않는다. '나도' 그 정도 무게의 고충은 있다고 여기기에.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무슨 말도' 해도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노동자의 파업도, 사람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도 찬반토론을 한다. 애초에 '누군가의 존엄한 권리'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이들은, 반대할 자유가 민주주의 사회에 있는 것 아니냐면서, 논리적으로 보이기 위한 걸쭉한 수사만 남용한다. 시각장애인도 영화를 접할 권리가 있으므로 관련 오디오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기사에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댓글이 추천 1위가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