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도쿄 바나나 / 남원상 / 따비
일본의 고고학자 겸 역사학자 히구치 기요유키가 쓴 ⟪먹는 일본사⟫(1976)에는 떡과자와 주먹밥이 한 뿌리에서 나온 전통음식이라 소개돼 있다. 도정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 현미 특유의 가슬가슬한 식감을 없애고 보존기간은 늘리면서 휴대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 주먹밥이었다. 처음엔 실용적인 보존식이었으나 특별식으로 바뀐 것이 오늘날의 모치, 즉 떡과자다. (p.30)
이렇듯 당과자를 만난 일본 과자는 변화를 거듭했다. 일본 각지에 존재하는 신사에서는 과자를 만들 때 지역 특산물을 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것이 오미야게 과자의 시작이었다. 신에게 봉헌하기 위해 정성 들여 만든 과자이니 그 맛과 모양이 특별했다. 물론 지금 관점으로 보면 평범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형태다. 당시엔 조리법이 단순했으니까. 그래도 그 시절 일본인들에게 떡과자는 눈과 입이 즐거운 특별식이었다. 제의가 끝나면 신사에서는 신의 은혜를 공여한다며 참배객에게 떡을 나눠줬다. 신성한 장소에서 제삿날 맛보는 특별한 과자라니, 얼마나 황송했겠는가. 이 과자를 평소에도 먹고 싶어 하는 참배객이 점차 늘었다. 결국 신사에서는 제사와는 상관없이 과자를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신사를 찾은 이들은 과자를 사 먹는 데서 나아가 가족과 지인들을 위한 선물이나 기념품으로 사 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면서 오미야게 과자 문화가 일상 속에 뿌리를 내렸다. (p.30-31)
일본 오미야게 시장 규모는 연간 약 2조 7,000억 엔 수준으로 집계된다. 이 중 오미야게 과자 시장 규모만 약 9,400억 엔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화로 10조 원에 가까운 액수다. 2018년 서울시 복지 예산이 10조 원이다. 요컨대 1년 동안 오미야게 과자를 팔아 벌어들이는 돈이 인구 1,000만 도시의 한 해 복지 예산에 버금가는 것이다. 엄청난 돈이다. 더욱이 외국인 관광객이 지불한 외화가 포함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오미야게 시장에서 오미야게 과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34.9%로 화장품, 의약품 등을 제치고서 1위를 차지했다. 일본 과자 시장 규모가 연간 3조 4,000억 엔 수준이니, 오미야게 과자는 일본 과자 시장의 3분의 1가량을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p.64-65)
쇼고인 야쓰하시 본점이 2011년에 선보인 신규 브랜드 '니키니키(nikiniki)'도 야쓰하시 시장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계피가 일본어로 '닛키(ニッキ)'라는 점에서 착안한 명칭이다. '야쓰하시를 즐기는 새로운 방식'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이 브랜드는 론칭 이후 현지 언론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니키니키'는 서양 과자에 야스하시를 결합한 퓨전 스타일 제품을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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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대표로 꼽히는 건 '카레 드 카넬(carré de cannelle)'이라는 생과자다. 프랑스어로 '카레'는 정사각형을, '카넬'은 계피를 뜻한다. 카레 드 카넬은 이름 그대로 계피를 넣은 정사각형의 나마야쓰하시로 만든 과자다. 주문하면 직원이 로제(장밋빛), 말차, 시나몬, 흑임자, 아주르(쪽빛) 등 화려한 빛깔의 나마야쓰하시를 작은 컵에 꽃잎 모양으로 끼워 넣는다. 이때 나마야쓰하시가 접히면서 생기는 틈에 자두, 망고, 레몬, 복숭아 등 8가지 콩피튀르(잼)를 넣어 건네준다. 흡사 꽃송이 같다. (p.120-122)
워낙 유명한 과자라 일본 여행을 다녀오지 않은 사람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도쿄 바나나'. 이름 그대로 바나나 커스터드 크림이 들어간 바나나 모양(물론 색깔도 노랗다) 스펀지케이크다. 밀가루, 설탕 등에 달걀을 많이 넣어 만든 스펀지케이크는 씹을 필요가 없을 만큼 부드럽고 폭신폭신하다. 바나나 페이스트와 바나나 퓌레로 만든 커스터드 크림은 향긋하고 달콤하다. 한입 깨물어 먹었을 때 단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은은하게 퍼진다. 크기가 조금 작은 편이지만 한꺼번에 많이 먹기엔 부담스럽다. 크림이 다소 느끼하다.
원형은 이러한데, 스펀지케이크에 하트 무늬를 그려 넣고 커스터드 크림에 메이플 시럽을 가미한 '도쿄 바나나 하트'를 비롯해 팬더 얼굴이 그려진 '도쿄 바나나 팬더'(바나나 요거트맛), 기린처럼 얼룩무늬가 그려진 '도쿄 바나나 기린'(바나나 푸딩맛) 등도 있다. (p.141)
일본 오미야게 과자들은 지역 특산물을 원료로 삼는 경우가 많다. 뒤에서 더 상세히 다루겠지만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오미야게 과자 '시로이 고이비토'는 홋카이도산 버터와 우유로 만들어진다. 다른 지역에 비해 냉랭한 기후에 목초지가 넓은 홋카이도는 150여 년 전부터 목장이 발달해 유제품 생산지로 유명하다. 시즈오카현의 '우나기 파이'도 지역 내에서 생산된 장어 분말을 원료로 삼는다. 반면 도쿄 바나나는 의문을 야기한다. 이 과자의 가장 중요한 원료인 바나나는 도쿄에서 생산된 과일이 아니다.
그레이프스톤은 언론 등을 통해 도쿄 오미야게 과자로 '바나나 생과자'를 내놓은 이유를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도쿄 바나나가 출시된 1991년 당시, '도쿄' 하면 딱히 떠오르는 오미야게 과자가 없었다. 정작 수도인 도쿄에서는 오미야게 과자 시장이 미비했던 것이다. 그레이프스톤은 출장 등으로 늘 다른 지방에서 방문하는 이들이 많을뿐더러 외국인 관광객이 늘고 있는 도쿄에서 오미야게 과자를 개발한다면 승산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도쿄를 상징하는 특산물이 없다는 점이었다. 대도시인 도쿄는 농축수산업이 아닌 상업, 금융업 등이 주요 산업이다. 오미야게 과자 원료로 내세울 만한 지역 생산품이 없었다. 이에 그레이프스톤은 발상을 전환해, 아예 일본 어디에서도 나지 않는 수입 원료를 내세우기로 한다. 그렇게 선택된 것이 바로 바나나,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수입 과일이었다. (p.164-165)
때문에 일본인들은 '홋카이도' 하면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눈에 파묻힌 겨울 풍경을 떠올리곤 한다. '시로이'는 바로 이런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간단한 수식어 하나만으로 홋카이도의 특색과 아이덴티티를 고스란히 머금었을 뿐만 아니라 감성까지 자극한다.
'하얗다'는 건 과자의 생김새와도 무관하지 않다. 가장자리가 노릇하게 구워진 밝은 미색의 랑그 드 샤 쿠키에 화이트 초콜릿 크림은 '시로이'라는 표현에 딱 어울린다. 과자의 특징이 잘 녹아 있는 이름이다. 무엇보다도 '시로이'란 단어를 한번 소리 내서 읽어보자. 치아가 맞닿을 만큼 좁아진 입모양에서 마찰음이 강하게 새어나간다. 마치 겨울날 좁은 골목길을 차분하게 쓸고 가는 찬바람 소리 같다.
'고이비토(恋人)'는 이 과자의 근사한 이름을 완성시킨다. 이는 연인,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 일상적인 대화보다는 사랑을 주제로 한 시나 노랫말에 더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p.212)
쭉 나열하고 보니 슌카도가 참 다방면으로 마케팅에 공을 들인다 싶다. 우나기 파이처럼 확고한 브랜드가 있는데도 말이다. 왜일까. 노점으로 시작한 슌카도는 130여 년을 이어왔다. 대표 브랜드인 우나기 파이도 1961년생이니 곧 환갑이다. 세상이 달라지는데 전통만 고집하다가는 고루하고 낡은 이미지에 갇히게 마련. 오미야게 과자 시장에선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신제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 과자를 사 먹을 다음 세대는 계속 줄고 경쟁은 한층 치열해질 것이다. 지금 잘 나간다한들 트렌드 변화를 읽지 못하면 '추억의 과자'로 사그라질 수밖에 없다.
인기 스타를 내세운 드라마 제작, 도쿄 핫플레이스에 마련한 팝업스토어, SNS에서 시선 끌기 딱 좋은 대형 조형물, 젊은 감각을 살린 디저트 테마파크……. 오랜 세월이 갖는 품격은 유지하면서도 매력이 더욱 돋보이도록 새롭게 포장하는 브랜드 전략일 것이다. (p.318)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 / 조애나 러스 / 낮은산
나는 이 책의 새로운 독자들이 자신을 억압자보다는 피억압자로만 보고 자신이 가진 무의식적 편견과 그 편견이 만들어 내는 반응을 마주하길 거부할까 봐 걱정된다. 예를 들어, 카리브 출신 작가들의 글은 너무 지엽적이고 충분히 보편적이지 않다며 콧방귀를 뀌거나, 퀴어 작가들의 작품을 가리켜 "알잖아, 내 취향 아니라는 거"라며 읽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반응 말이다. 또한 우리 모두가 특정한 집단으로 잘디잘게 쪼개져서 오로지 도시에 살고 있는 중서부 출신의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아니면 비혼 여성, 급기야는 별자리가 게자리나 황소자리인 여자들이 쓴 글만 읽으라는 말을 듣게 될까 봐 걱정된다. 오로지 그들만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나와 직결된 문제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문학이 공감력을 키워 준다는 말은 상투적이다. 문학이 그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단, 문학을 당신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로 취급하려는 충동을 매우 적극적으로 극복할 때에야 그렇다. 그 첫걸음은 바로 당신이 바로 문학을 그렇게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p.34)
평등한 사회의 이상적 상황은 "부적절한" 집단의 구성원들도 문학을 (또는 이와 유사한 수준의 주요 활동을) 할 자유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문학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최소한의 진정한 자유를 줘 보라. 그들은 참여할 것이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가능한 허울뿐인 자유만을 준 다음—어쨌거나 누군가는 참여할 것이므로—그 결과로 나온 예술 작품들을 무시하고 비난하고 하찮게 취급할 다양한 책략을 개발하는 것이다. 제대로 먹힌다면, 이 책략은 "부적절한" 사람들이 문학이든 회화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할 (소위) 자유가 있는데도 실제로 그렇게 하는 이는 극히 드물고, 설사 하더라도 잘되지는 않은 (것 같은) 결과를 낳을 테니 이제 모두 발 뻗고 자면 되는 것이다.
위에 제시된 책략은 다양하지만 대체로 특정 핵심 영역에서 일어난다. 비공식적 금지(말리기와 자원과 교육 기회 최대한 안 주기 포함), 논란이 된 작품의 저자 지위 부정하기(이 술책은 단순한 착오에서부터 머리를 돌게 만드는 교묘한 심리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함), 온갖 방식으로 작품 자체를 하찮게 만들기, 작품이 속할 전통에서 해당 작품 소외시키기와 예외적 사례로 만들기, 작품이 저자의 나쁜 특징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기본적으로 추문에 불과한 수준이라거나 애초에 나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이런 일은 19세기에 끝나지 않았음), 마지막으로 작품과 작품을 만든 사람들, 그리고 전통 전체를 통째로 그냥 무시해 버리기가 있는데, 이 전략이 가장 흔히 사용되는 기술이고 또 가장 맞서기 어려운 것이다. (p.40)
우선, 예술을 하지 못하게 공식적으로 금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공식적인 금지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빈곤과 여가 시간 부족은 예술 활동을 방해하는 강력한 원인이다. 하루 14시간씩 일하는 19세기 영국 노동자가 완벽한 소네트를 짓는 데 평생을 바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노동자 계급 문학이 실제로 등장할 때—등장했었고 계속 등장하고 있다—여성의 예술 활동을 가로막아 왔던 방법이 동일하게 동원될 수 있다. 두 집단은 분명 서로 겹친다.) 지난 세기 동안 빈곤과 여가의 부재가 흔히 중산층의 예술 활동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방해가 되었다. 중산층 여자들의 경우에는 말이다. 이 여자들은 중산층 남자들에게 속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당시 독립적으로 경제적인 분투를 통해 중산층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여자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여자가 배우나 가수였다면 부도덕한 사람들로 여겨졌고(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것이다.), 결혼했다면 그 시대 영국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가 없었다. (기혼 여성의 재산 소유권이 성문화된 해는 1882년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은 가정교사였는데 그런 이례적인 직업의 사회적 지위는 상류층 여성과 하녀 사이 어디쯤이었다. (p.46-47)
마리 퀴리의 전기 작가인 그녀의 딸 이브는 어머니가 청소하고, 쇼핑하고, 요리하고, 아이를 돌보던 모습을 묘사하는데 아버지 피에르 퀴리는 집안일을 전혀 나눠하지 않았고 그 일은 마담 퀴리가 과학자로서 첫발을 떼는 시기와 맞물려 진행된 전일제 노동이었다. (p.49)
케이트 윌헬름은 이렇게 말한다.
다시 글쓰기를 포기하고 어머니, 전업주부, 혹은 그와 같은 것이 되라는 압력이 너무 많이 가해졌다. (……) 남편은 그런 나를 안타깝게 여겼고 내가 계속 글을 쓰기를 원했지만 힘이 없었다. (……) 나는 세계가, 그러니까 사실상 모두가 여자들에게 점점 더 많은 책임을 전가하고, 여자들은 계속해서 그 일들을 해 나갈 것임을 알았다. 여자들에게 떠맡겨진 책임이 너무 많아 그들은 정작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 아니면 철저히 이기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세계를 거부하고, 어떤 죄책감이든 받아들이든지. 자신이 또 한 명의 버지니아 울프거나 제인 오스틴이라고 믿지 않는 이상 어떤 여자가 그런 책임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아이들, 가사일, 학교 행사들, 남편이 필요로 하는 것들, 정원 가꾸기 등이 우선한다. 우선순위를 뒤바꾸기란 (……) 어렵다. 우리를 둘러싼 어떤 것도 우리가 뒤바뀐 순서로 살아갈 준비를 시켜 주지 않았다. (p.52-53)
엘렌 글래스고는 자신의 첫 소설의 초고를 뉴욕에 있는 "문학 고문"(출판사)에게 가져갔고, "당신은 소설가가 되기에는 너무 예쁜데요. 옷 안에 들어 있는 당신 몸매도 그렇게 탐스럽나요?"라는 소리나 들어야 했다. 그런 뒤 그는 그녀를 강간하려고 했고 그녀는 사정사정을 한 뒤에야 풀려났다. "나중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해 주자 나를 놔주었어요. 그자는 내 원고뿐만 아니라 내 돈 오십 달러도 갈취해 갔어요. (……) 나는 멍투성이가 되었고 분노로 온몸이 떨렸어요." 그녀가 다시 원고를 가져가 만난 출판 담당자는 그런 공격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여자들이 쓴 글은 더 이상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특히, 가임기 젊은 여자들에게서는. 그는 말했다. '내가 당신한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충고는…… 그만 쓰고 남부로 돌아가 아이들을 낳아 기르라는 거요. (……) 가장 위대한 여자는 훌륭한 책을 쓴 여자가 아니라…… 훌륭한 아이를 가진 여자요.'" (p.57)
한편 1969년에 시카고대 사회학과 여자 대학원생들은 교수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여기까지 온 여자들은 죄다 별종들이다."
"입학처가 일을 제대로 하긴 한 거야? 강의실에 반반한 여학생이라고는 없으니 말이야."
"나한테 너무 많은 여학생이 오고 있어. 어떻게 좀 해야겠어."
"우리는 여기 오는 여학생들이 유능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총명하거나 독창적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네."
"나도, 자네의 지도교수도 자네가 유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네. 문제는 자네가 하고 있는 것을 정말 진지하게 여기고 있는가, 하는 걸세."(박사 과정을 위해 5년이라는 시간과 1만 달러가 넘는 돈을 썼던 한 젊은 여성이 들은 얘기다.) (p.59-60)
성차별주의자인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려면, 더불어 자신의 계급적 특권을 유지하려면 그저 관습적이고,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심지어 예의 바르게만 행동하면 된다. (p.74)
자, 여자가 무언가를 써 버렸다면 이제 어쩔 것인가? 첫 번째 방어선은 그녀가 썼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쓸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남자)가 쓴 것임에 틀림없다. 버지니아 울프는 뉴캐슬 공작부인이었던 마거릿 캐번디시가 남성 학자를 고용해 글을 쓰게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고 말한다. (p.79)
그러나 그렇게 딱 잘라 행위 주체를 부정하는 것, 그러니까 그녀가 쓴 게 아니라 그가 썼다는 주장 대신 더 교묘한 대안도 있다. 그중 하나는 저절로 쓰여졌다는 주장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그런 술책이 공공연하게 쓰였다.
(…)
캐롤 오만은 이 소설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 작가에게 작법이란 허락되지 않았다. 에밀리 브론테가 ⟪폭풍의 언덕⟫을 시작한 건 맞지만, 그 소설은 그녀가 끝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끝이 났다". (p.82-83)
행위 주체성의 부정은 최종적이고 가장 교묘한 형태로 그 모습을 취한다. 여자가 이것을 쓰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을 쓴 여자는 여자 이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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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로웰이 실비아 플라스의 ⟪아리엘⟫에 붙인 발문의 찬사 또한 유사한 시각을 보인다. "실비아 플라스는 하나의 개인 혹은 여성으로만 보기 어려운, 현실을 뛰어넘어, 완전히 새롭고, 야생적으로 창조된 어떤 존재가 되었다. '여류 시인' 이상인 건 물론이고." (p.87)
무지 자체가 자기기만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 피곤해. 그러니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에서부터 "이건 나의 세계관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혹은 "이건 유일하고도 모든 것을 포함하는 나의 세계관을 건드리는 것이므로 생각할 필요조차 없어"까지 무지를 고집하는 것은 분명히 자기기만이다. 일부 남성 학자들과 작가들의 곤혹스러워하는 반응은 솔직한 정도에 그치지만, 여자들의 경험에 대한 몇몇 반응은 정말이지 악랄하다.
1970년, 한 칵테일파티에서 만났던 젊은 교수는 내가 ⟪제인 에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자 "얼마나 형편없는 책입니까! 그건 그저 여자들의 성적 판타지 모음일 뿐입니다!"라며 마치 여자들의 성적 판타지는 말 그대로 문학이 발 담글 수 있는 가장 얕은 물이라는 양 말했다. 그는 적대적이었다.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학과장은 나를 돕는답시고 "나는 당신이 빅토리아 시대 주변부 문학에 관심이 있는 줄 몰랐네요"라고 말함으로써 한술 더 떴다. 생각이라는 게 거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자기기만적으로 행동했다. (p.139)
브론테는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나?
적어도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나는 열두 살에 ⟪제인 에어⟫를 읽었고 이후 내가 열여섯 살이 되고 대학 교육에 그 책이 포함될 때까지 (그러나 ⟪빌레트⟫나 ⟪셜리⟫ 또는 에밀리 브론테의 곤달 시는 포함되지 않았다.) 해마다 의례처럼 다시 읽었다. 나는 ⟪폭풍의 언덕⟫도 열네 살에 시작해서 십대 후반까지 자주 반복해서 읽었다. 대학에서 나는 울프의 소설들을 남몰래, 그리고 봉봉사탕을 먹을 때처럼 죄책감을 느끼며 읽었다. 나는 그것들이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여성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여자들의 책이 내게 "문학적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해 보지 않았고 내 두 번째 소설을 헌정할 당시 내게 진정한 문학적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둘 다 남자로 (당돌하게 들리겠지만) 시드니 조셉 페럴맨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였다. (p.312-313)
커피가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 페테 레파넨, 라리 살로마 / 열린세상
어떤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일 수도 있지만, 스페셜티 커피란 특별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에스프레소를 베이스로 한 커피를 뜻하지 않는다.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은 집에서 간단히 내린 드립 커피와 카푸치노나 라테처럼 바리스타가 우유를 데우거나 거품을 내는 등 까다로운 제조법으로 만들어낸 커피를 구분하는 데서 비롯된 걸로 보인다. 그러나 커피업계에서 스페셜티 커피란 감점 방식으로 진행되는 엄격한 품질 심사에서 일정한 점수를 받은 것을 가리킨다. 커피의 품질은 사람마다 다른 '맛'이 아닌 국제적인 심사 기준에 따라 평가받는다. '스페셜티'는 100점 만점에서 최소한 84점 이상을 받은 것에만 부여한다. 벌크 품질의 커피는 80점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점수의 실제 의미는 심사 대상의 샘플에 결점이 얼마나 적은가이다. 결점이 적을수록 고득점을 얻는다. 로스팅하지 않은 생두는 육안으로 심사한다. 생두의 크기가 균일하고 결점두가 적어야 감점 없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로스팅을 거친 원두는 향과 맛을 기준으로 평가하는데, 로스팅이 과한 원두는 훈연향이 원두에 입혀져 결점을 가리기 대문에 전혀 점수를 얻지 못한다. (p.63-64)
쓴맛과 바디감(묵직한 맛)을 혼동하기 쉬운데, 바디감은 입안을 가득 채우고 뒷맛이 길게 남는 반면, 쓴맛은 입만을 마르게 하고 갈증을 불러일으킨다는 차이가 있다. 커피는 묵직한 맛이 있어야 하지만 쓴맛이 도드라지면 안 된다. 또한 산미는 쉽게 쓴맛이나 신맛, 떫은맛과 혼동되지만, 커피의 맛에서 산미는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와인이나 과자, 딸기나 디저트의 산미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익기 전에 딴 사과가 시큼하고 링곤베리(월귤)가 떫은 것처럼 커피에서 이런 맛이 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 (p.65)
"강 건너로 가고 싶다고 그대로 들어가지는 않잖아. 뭔가 던져서 물살이 얼마나 빠른지 봐야겠지. 그다음엔 상류로 가서 흐름을 본 뒤에 건너는 거야. 안전하게. 그러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아. 자, 시작해볼까? 농장에 어떤 나무들이 있나? 어떤 나무들이 땅에 좋은 영향을 끼칠까? 특별히 관리를 하지 않아도 잘 자라는 나무는 어떤 거야? 즉, 그 외의 나무는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줘야 한다는 거야. 잘 봐! 커피 이야기는 그다음이야. 어디서 커피나무가 자라기 쉬운지 잘 봐야 해. 여기서는 잘 자라고, 저기서는 잘 자라지 않지. 왜 그럴까?" (p.75)
커피는 손쉽게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 아니다. 상당한 물과 토양의 영양분을 뿌리에서부터 빨아올리기 때문에 지속 가능의 원칙대로 재배하지 않는다면 장기간에 걸친 재배는 어렵다. 효율성을 중시하면 성장은 빠르고 수확량도 많지만, 유감스럽게도 농지의 기대수명은 줄어들고 만다. 효율을 중시하는 농법은 농기계와 장비가 걸림돌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은 농지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작물은 한 줄로 심을 수 있지만 농기계가 지나가는 데 방해가 되는 나무는 베어낼 수밖에 없다. 이때 희생양이 되는 것은 자연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열대우림이다. 불도저로 열대우림을 밀어버린 곳곳에 거대한 농지가 생긴다. 나무들이 없어지면 커피는 나뭇가지가 만들어주던 그늘을 잃고 직사광선에 노출된다. 동시에 큰 나무들이 깊고 넓게 퍼진 뿌리로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빨아올렸던 수분도 지표면 가까운 데서 얻지 못해 수분 부족에 시달린다. 결과적으로 작물들이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살아남으려면 많은 양의 수분을 인위적으로 공급해줘야 한다. 이렇게 작물에 물을 주려고 식수까지 끌어다 쓰면서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대부분의 커피 생산국은 그렇지 않아도 깨끗한 물이 부족해 고통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p.79)
서너 살이 된 커피나무는 꽃을 피운다. 대략 이틀 사이에 집중적으로 피고 지는데, 아름다운 흰 꽃이 커피체리로 바뀐다. 짧은 개화기는 커피 재배에서 특히 중요한 시기이다. 만약 이 기간 동안 서리나 폭우가 내리면 꽃가루받이가 원활하지 않아 작황이 나빠진다. 우리가 FAF에 방문했을 때 상파울루에 폭우가 쏟아져서 크로체 가족의 커피 수확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북쪽의 태양을 끌고 온 모양인지 머물던 일주일 동안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이른 아침의 이슬이 커피나무의 잎을 적셨을 뿐, 장마 덕분에 공기가 무척 맑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점점 빨라지는 기후변화로 커피 재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커피 생산국들은 과거 언제, 어느 정도의 비가 내릴지 꽤 정확하게 예측했었지만, 최근에는 예측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어렵다. 2000년대와 2010년대에 걸쳐 커피 생산국은 심한 가뭄과 폭우로 인한 수확량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p.99)
"거대한 나무는 땅속 깊은 곳에 있는 지하수를 향해 뿌리를 뻗음과 동시에 땅 위로 끌어올리는 존재입니다. 휘발유를 한 탱크에서 다른 탱크로 옮겨본 적 있나요? 똑같습니다. 휘발유를 빨아올리는 것과 비슷한 일이죠. 나무들은 땅 속에서 땅 위로 지하수를 빨아올려 숲을 만듭니다. 그래서 나무를 베어내면 물은 땅속 깊은 곳으로 돌아가 버리죠. 많은 농장이 생산량을 극대화한다며 나무를 죄다 쓰러트리는데, 사실 물을 끊어버리는 일입니다. 나무가 주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물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무가 베푸는 선의에 대한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배고픈 사람에게 열매를, 걷다 쓰러진 여행자에게 서늘한 그늘을 주고, 나무꾼에게조차 그루터기로 한때의 편안함을 준다.
"어떤 나무들은 그저 가져가기만 하고, 어떤 나무들은 좀 더 많은 것을 줍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떤 나무를 필요로 하는지 잘 관찰해야 합니다. 어떤 나무는 땅에서 모든 걸 빨아올리는데, 어떤 나무는 비옥하게 합니다. 나무는 미생물을 유인하고, 미생물은 또 다른 생물을 유인하지요. 새와 동물들이 옵니다. 그러니까 나무를 쓰러트리는 건 거기 있는 많은 생명을 없애는 겁니다." (p.104-105)
이후 크로체 가족은 종합적 품질의 10가지 기준을 세웠다. 뜻을 함께하는 쌀먹이새 협동조합은 외부의 전문가를 고용해 이 기준들이 지켜지는지 모니터링한다. 모니터링 대상은 수질, 토양의 상태, 섞어짓기, 비료 사용, 농장 노동자들의 건강과 교육, 농장의 재정, 활동의 투명성과 커피의 품질이다. 그 외에 총체적인 평가도 이루어진다. 가능한 한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어서 마르쿠스와 펠리페가 말하는 '100년 프로젝트'는 정말로 종합적 품질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합적 품질 실현의 전제 조건은 소비자가 지금보다 쉽게 정보에 접근하는 것이다. 만약 모두에게 충분한 정보가 있다면 인증제도는 필요 없을 것이다. 생산자는 자신이 재배한 작물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무엇이 지속 가능한 농업인지 알 수 있다. 소비자는 자신의 선택이 미치는 영향력을 인식하고 단순히 경제적인 제품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고 행동할 것이다. (p.119-120)
지금까지 알려진 커피의 품종은 60가지 정도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아라비카(Coffea arabica)와 로부스타(Coffea canephora)다. 각각 아라비아커피, 콩고커피로도 알려진 이 품종들은 전 세계 커피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아라비카가 3분의 2, 로부스타가 3분의 1가량 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콩고커피, 즉 로부스타는 특히 서아프리카에서 많이 재배했지만, 손쉬운 재배 덕분에 동남아시아와 인도, 브라질로도 퍼져나갔다. 아라비카와 로부스타에 이어 시장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품종으로 리베리카(Coffea liberica)가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아라비카는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상대적으로 서늘한 해발 1,000~2,200미터의 고지대에서 잘 자란다. 연간 강수량도 중요한 재배 조건 중 하나다. 로부스타는 더 뜨겁고 습한 지역에서 자라 기후에 따라 일 년 내내 꽃이 핀다. 반면, 아라비카는 연중 최대 두 번만 수확이 가능하다. 그래서 동글동글한 로부스타가 타원형에 납작하고 익는 데 시간이 걸리는 아라비카보다 맛이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라비카가 풍부하고 다채로운 맛을 내기 위해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데 비해, 로부스타는 병충해에 강하고 날씨 변화에도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로부스타는 기후변화와 생계 곤란을 겪고 있는 커피 농가가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대안으로 부상했다. 저울에 생산자의 생활과 소비자의 선호도를 올려놓고 비교할 때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자명하다. 그러므로 재배하기 쉽다는 이유로 로부스타만 재배하지 않도록, 수십 년 내에 멸종될 것으로 예측된 아라비카를 보존할 수 있도록 생산자들의 교육과 정보 전달은 매우 중요하다. 질이 올라가면 생산자들의 주머니 또한 두툼해질 것이다. (p.127-128)
마르쿠스에 따르면, 커피 생산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정보 접근성의 불평등이다. 대부분의 커피 생산국은 교육 수준이 낮고 정보 격차가 존재한다. 미국의 리하이대학교의 조교수인 켈리 오스틴이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커피를 많이 수출하는 우간다의 부두다(bududa) 지역 생산자들의 생활을 약 1년간 조사한 결과, 인터뷰 대상의 절반 정도만 자신들이 재배한 커피가 음료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머지 생산자들은 빵이나 약을 만든다고 여겼으며,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생산자가 커피가 무기산업의 원료가 된다고 상상했다. 농업 종사자들의 자녀는 부유층은커녕 중산층 수준의 교육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환경에서 정보 접근성은 곧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p.156-157)
커피는 세계에서 가장 수출량이 많은 농산물로서 해당 생산국에서 쌀, 옥수수 혹은 밀보다 더 많이 수출되는 품목이다. 달리 말하면 식품으로 분류되는 품목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국제커피기구에 따르면 세계시장에서 생두, 즉 로스팅하지 않은 커피는 원유 바로 다음으로 많이 거래되는 원자재이다. 공정무역기구에 따르면, 커피는 열대 농산물 중 가장 가격이 높고 폭넓게 보급된 품목이다. 여러 국가와 국민경제가 커피 재배에 의존하며, 수백만 명이 커피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공정무역기구에 따르면, 커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전 세계 인구는 대략 1억 2,500만 명에 달한다. 그중 대다수는 적도 부근의 남미,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인도 등에서 일한다. 이 지역들은 커피가 자생하는 곳으로 2,500만 개의 소규모 농장이 있으며, 여기서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80퍼센트가 나온다. 그럼에도 이런 농장의 대부분이 얻는 수입은 아주 적어 가족을 부양하기에 부족한 경우도 있다.
커피의 세계시장가격은 상품거래소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정해진다. 이때 취급되는 커피는 대량 생산된 벌크 품질이다. 대형 로스터리들은 시장가격에서 몇 퍼센트 낮은 가격에 사들이는 대신 생산자나 협동조합의 수확량을 모두 매입하겠다고 약속한다. 소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가난한 생산자들은 대부분 비싼 화학비료 없이 대량 생산되는 커피보다 더 좋은 품질의 커피를 생산하지만, 벌크 커피의 가격이 지나치게 낮다는 것을 모른 채 중개인들이 제시하는 가격에 만족한다. 모든 커피는 중개인을 통해 최종적으로 로스터리에 판매되기 때문에 생산자는 자신의 커피를 맛보는 일이 거의 없다. 따라서 자신의 노동은 물론 키운 작물의 가치를 알 기회조차 없다. (p.190-191)
유럽의 슈퍼마켓에서 벌크 커피 1킬로그램의 가격이 10유로라면, 그중 9유로 이상이 농장에서 슈퍼마켓의 진열대나 카페 카운터에 이르게 하는 물류 체인 종사자들에게 간다. 남은 1유로가 조금 안 되는 금액이 세금과 기타 관공서의 몫이라면, 생산자에게는 얼마가 남을까? 또는 생산자 밑에서 중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몫은 얼마일까? 너무 적은 대가는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전 세계 대부분의 생산자는 손수 재배한 커피를 킬로그램 단위로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든 가능한 한 빨리 수확량을 늘려 최대한 원가를 낮출 수밖에 없다. 그러니 노동조건이나 땅의 미래 같은 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가족을 굶기지 않으려는 목표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생산자들은 가격과 품질이 밀접한 관계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즉, 품질이 좋다면 수확량이 적어도 된다는 것 또한 알지 못한다. (p.201)
커피와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우리는 쉽게 사회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곤 했다. 정치인, 대기업과 다국적 기업에게 책임을 돌리는 건 쉽다. 맹목적인 탐욕과 단기적인 시각으로 빠른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를 이렇다 할 대안과 건설적인 비판 없이 비난하는 건 무척 쉬운 일이다. 단순히 돌을 던지는 것만으로는 상황을 개선할 수 없고, 더군다나 세상을 구할 수도 없다. 문제의 진짜 원인과 결과에 집중하고 우리 모두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정보도 공유해야 한다. 그러면 미래에도 커피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중요한 건 커피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커피 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훨씬 거시적인 것들, 기후변화와 과시적 소비가 지구 전체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력이다. 한마디로 인류의 미래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소비 행동이 우리 증손자들이 깨끗한 물과 음식을 얻을 수 있을지에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p.248)
인류를 구한 12가지 약 이야기 / 정승규 / 반니
의약품 개발 역사에서 페니실린만큼 위대한 업적은 없다. 페니실린이 등장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항생제가 나올 수 있었다. 세균의 세포벽을 파괴하는 독특한 기전으로 인해 페니실린은 세포막으로 이뤄진 인체에는 해를 주지 않는다. 인류는 푸른곰팡이의 선물 덕에 세균 감염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와 함께 인간의 평균 수명도 급속도로 늘어났다.
일반적으로 약은 용량을 늘리면 더는 효과가 없는 천장 효과(Ceiling Effect)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모르핀은 예외다. 용량을 늘리면 모르핀으로 충분한 진통 효과를 볼 수 있다. 말기 암이 되어 고통이 극심해지면 초기 용량의 10~100배 이상을 투여해 통증을 관리한다.
코르티손은 부신피질에서 분비된다고 해서 부신피질 호르몬이라고 한다. 히드로코르티손 외에도 프레드니솔론, 덱사메타손 등 효과가 훨씬 뛰어난 여러 가지 약이 나왔다. 간단히 스테로이드라고도 하는데, 약효는 탁월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부작용이 있다. 장기간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면 골다공증, 당뇨, 면역 억제, 고혈압, 녹내장, 백내장, 과체중 등이 나타난다. 효과적인 약이지만 남용하면 독이 된다. 대표적인 부작용으로 스테로이드 과잉증인 쿠싱증후군이 있다. 쿠싱증후군 환자는 얼굴이 보름달처럼 둥글어지고, 복부에 지방이 쌓여 뚱뚱해지며 팔다리는 가늘어진다.
마취제가 수술에 굉장히 많이 쓰이지만 아직 정확한 작용기전은 밝혀지지 않았다. 전신 마취제로 사용하는 약들은 서로 간에 화학적 관련이 없다. 이들은 폐를 통해 뇌에 도달해서 마취를 일으키고, 그다음 인체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이것은 미스터리에 가깝다. 단지 공통점이라면 기름 성분에 잘 녹는 작은 분자라는 것뿐이다. 흡입마취제가 체내에서 이온 채널(Ion Channel)을 억제하면서 효과를 나타낸다는 가설이 있지만 아직 추측에 불과하다.
힘들 때 단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장에 탈이 나기도 한다. 전혀 별개인 것 같은 장과 뇌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장은 사람의 감정도 조절한다.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Serotonin)의 90%가 장에서 분비된다. 행복은 뇌에서 느끼지만 뇌에서 분비하는 세로토닌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기분을 조절하는 세로토닌이 모자라면 우울증이 생긴다.
최근 들어 식습관이 서구화되면서 육류 소비량이 급증해 대장암 발생률이 높아졌다. 장이 심하게 나빠진 것이다. 육식을 많이 하면 소화되고 남은 단백질 찌꺼기가 장을 통과하며 점막을 손상시킨다. 지속적인 자극으로 장세포가 변형되고 용종이 발생해 심하면 암이 된다. 대장에 서식하는 유산균은 대장균 같은 부패 세균 수를 감소시켜 암 발생 확률을 낮춘다. 암을 일으키는 효소를 감소시키고 젖산을 만들어 pH를 낮춰 유해균을 몰아낸다.
대부분의 암처럼 대장암도 3기, 4기로 갈수록 완치가 어렵기에 예방이 중요하다. 주기적으로 대장내시경을 받아 암을 초기에 발견하고, 암이 될 수 있는 용종을 미리미리 제거해야 한다. 검사만 잘 받아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대장암 사망률이 절반 이상으로 줄어든다. 또한 식생활도 중요한데, 육식을 줄이고 신선한 채소에 고기를 싸서 먹으면 식이섬유가 장을 보호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농작물은 옥수수다. 옥수수 다음으로 밀, 쌀, 감자 순으로 생산량이 많다.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나라는 중남미의 몇몇 나라에 불과하며, 대부분은 기름이나 액상과당을 만드는 재료로 이용된다. 나머지는 가축의 사료로 사용한다.
비아그라는 1998년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가 개발했다. 약이 나오자마자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켰다. 내가 약대 4학년 재학 때였는데, 매스컴에서는 연일 이 약의 효과를 소개했고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졌다. 언론은 1998년을 '화이자의 해'라고까지 추켜세웠다. 화이자 주식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제약회사에 불과했던 화이자는 비아그라로 세계 정상을 넘보는 일류기업이 되었다.
혈관을 파괴하는 호모시스테인을 줄이려면 비타민 B군 복용도 필요하다. 포화지방과 소금을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육류는 살코기 중심으로 먹고, 생선으로 오메가3를 보충하면 혈관이 말랑말랑해진다. 육류 대신 콩이나 두부 같은 식물성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소금은 혈관을 좁게 하고 심장질환을 일으키므로 맵고 짜게 먹는 습관은 고쳐야 혈관이 건강해진다. 과도한 스트레스도 산화질소 생성에 악영향을 주므로 적절히 스트레스를 관리해야 한다.
최초로 독가스를 개발한 사람은 유대인 출신의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 1868~1934)다. 하버는 1940년부터 질소와 수소를 이용해 암모니아 만드는 방법을 찾았다. 1908년 공기 중 질소를 이용해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했고, 1913년에는 암모니아를 공업적으로 합성해 비료를 대량 생산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고 인류는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공기에서 빵을 만들었다'는 찬사를 받으며, 1918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노벨 화학상 수상을 비난하는 여론이 거셌다. 하버가 독가스를 개발하고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독가스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개발한 독가스(염소가스)는 1915년 4월 벨기에 이프르에서 처음 사용됐다. 염소는 공기보다 무거워서 방공호나 참호 바닥까지 내려갔고, 참호에 숨어 있던 병사들은 고스란히 독가스를 마셨다. 이로 인해 5,000여 명이 죽고 1만여 명이 치명적인 폐 손상을 입었다.
1933년 화학연구소 소장으로 있던 하버는 나치로부터 모든 유대인을 해고하라는 지시를 받자 사직서를 제출하며 나치의 지시를 거절했다. "제가 40년 이상 제 동료들을 선택한 기준은 지성과 성품이지 그들의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한 이 방법을 앞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마지막 편지를 남긴 하버는 독일에서 추방되었으며, 스위스로 가는 도중 죽음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