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 존 엘리스 / 마티

 

 프랑스의 보병 중위 알프레드 주베르는 사망하기 직전에 남긴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은 미쳤다! 현 사태를 지속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이 지독한 살육전이라니! 이 끔찍한 공포와 즐비한 시체를 보라! 내가 받은 인상을 말로는 전할 길이 없다. 지옥도 이렇게 끔찍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미쳤다!"
 그러나 대다수의 병사들은 이 경험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또 얼마간은 제정신을 유지했다. 아마도 그 경험의 본질을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수준에서 검토해보면, 참호의 병사들이 자신들의 생존과 지속적 전투를 가능케 해준 필연적이고도 논리적인 현실 이해 방식을 조금이나마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10)

 

 참호전은 흔히 1914년 9월에 시작된 걸로 본다. 독일 제7예비군단이 슈멩 데담 고지(Chemin des Dames Ridge)에서 방향을 돌려 영국 제1군단의 전진을 차단한 것이 바로 이때이다. 이곳의 교착 상태가 불과 수 주 만에 전체 전투 구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전선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이어진 것이다. 전체 760킬로미터에 이를 정도로 전선이 길었으므로, 지형과 지세도 상당히 다양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당연히 구축된 참호와 요새도 지역에 따라 달랐다. 전선의 북부, 그러니까 벨기에와 솜 이북까지의 프랑스는 영국군이 담당했는데 이곳은 모든 전선 가운데서도 최악의 지세였다. 영국군의 참호 상태는 악몽과도 같았다. (p.14-15)

 

 그렇다면 서로 대항하던 두 개의 참호선을 분리해주었던 좁은 구역, 곧 '무인지대'의 상황은 어땠을까? 개념 자체의 부정적 의미가 서부 전선에서 노정된, 전략과 전술의 파산을 증언해준다. 동시에 이 초토화된 불모의 공간이 얼마나 무용하고 비참한 곳인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무인지대의 폭은 구역별로 엄청나게 다양했다. 대개는 10미터에서 450미터 사이였는데, 참호 사이의 평균 거리는 180~270미터였다. 플랑드르에서는 평균 거리가 약 130미터 정도로 약간 더 짧았다. 그러나 이 폭을 일반화하기는 매우 어렵다. 영국군 전투 구역 가운데서도 가장 평온했던 캉브레 인근에서는 무인지대의 폭이 450미터였다.
 (…)
 당연한 얘기지만 철조망이야말로 무인지대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이었다. 참호에서 가장 흔한 작업반은 철조망 가설 부대였다. 거의 매일 밤 소규모 부대가 아군측 흉벽을 기어올라가 낡은 철조망을 수리하거나 추가로 부설해야만 했다. 초기에는 나무메로 때려 박은 말뚝으로 철조망을 지지했다. 그러다가 말뚝을 비틀어 돌려서 땅에 박는 방법이 고안되었고, 그리하여 소음을 내지 않고 말뚝을 박을 수 있게 되었다. 철조망이 언제나 아군측 참호에서 적어도 수류탄 투척 거리 밖에 설치된 이유는 명확하다. 철조망 사용량은 해당 부대의 열의와 근면함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독일군은 이 점에서 특히 열심이었다. 그들의 철조망은 길이가 15미터 미만인 경우가 거의 없었고, 많은 곳에서 30미터 이상이었다. 지크프리트 진지의 모든 참호에는 전방으로 적어도 열 줄의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다. 프랑스군도 이런 종류의 장애물에 크게 의존했다. 1916년 4월 랭스(Reims) 인근의 제4군 참호에서는 모든 부대가 매주 기존의 철조망에 최소 2미터씩 철조망을 더 부설해야만 했다. (p.34-35)

 

 참호의 병사들은 원시적 본능에 따라 생활했다. 극단적인 물리적 상황, 귀청을 찢을 듣한 소음, 갑작스런 섬광, 극도의 추위, 참기 힘든 고통 속에서 공포와 굶주림과 갈증을 느꼈다. 지성과 사유가 발휘될 여지는 거의 없었다. 가장 단순한 자연현상도 치명적인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비는 유쾌한 선물이 아니었다. 서부 전선에서는 보통 그 비가 무자비한 적으로 돌변했다. 전장의 분위기가 더욱 더 불길해졌다. 플랑드르는 특히 강우량이 많은데다가 지표가 해수면과 거의 같은 높이이거나 더 낮은 곳도 있다. 그래서 땅을 파기만 하면 곧 물이 솟아올랐다. 여름철을 제외하면 영국군이 직면한 가장 막강한 두 적은 물과 진흙이었다. 참호는 늘 진흙창으로 발목까지 빠졌으며 더 깊이 빠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물이 최소 30센티미터 정도 차는 것은 보통이었고, 장정의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실제로 병사들이 허리, 심지어 겨드랑이까지 차오르는 차가운 물속에서 며칠씩 계속 근무를 서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물은 흔히 참호에서 흙과 섞였고, 걸쭉한 진흙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걷는 데 엄청난 수고가 뒤따랐다. 아무리 짧은 이동도 엄청난 일로 돌변했다. (p.59-60)

 

 진흙이 가져온 가장 끔찍한 결과는 실제로 많은 병사들이 그 속에 빠져 죽었다는 사실이다. 참호에서도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통행이 불가능한 교통호를 어쩔 수 없이 기어올라가 위에서 이동하다가 끔찍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더 잦았다. 이때 닥친 커다란 위험이란 포탄 구멍으로 추락해서 서서히 빠져 죽는 것이었다. 전방의 한 군종 신부는 자신이 진짜로 들었다는 아주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속 사단의 병사들이 전방 대호로 투입중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참호의 모퉁이를 돌았고, 수렁에 처박힌 병사를 발견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고, 머리와 다리만 보였다고 한다. 그를 끌어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는 게 불가능했다. 부대원들은 전우가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내버려둔 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공격전에서 부상을 입고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진 병사들에게는 물이 들어찬 포탄 구멍도 죽음의 덫이 될 수 있었다. (p.61-62)

 

 이런 계급적 성향의 특정한 측면은, 전통과 관습에 대한 지나친 강조나 공허한 형식주의에 대한 애착처럼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1912년 프랑스에서 모뒤(Maud’huy) 대령이라는 사람(1915년에 아루투아 10군의 지휘관이 되었다)은 연대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훈시했다. "많은 병사들이 정확하게 경례한다. 그러나 아름답게 경례하는 병사는 매우 드물다. 후자의 제군들은 상명하복의 자세를 완벽하게 체득했고 육체적∙정신적 훈육을 철저하게 받은 병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바로 엘리트이다. 경례 하나만 봐도 그 병사가 어떻게 교육 훈련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허하고 편협한 규범이 전투 수행 방법으로 확대되면서 보다 심각한 결과가 야기되었다. 1914년의 장교들에게, 그리고 여전히 1918년의 지휘관들에게 전쟁이라는 개념은 나폴레옹 전쟁의 워털루와 그 이전 사태의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병사 자신이 집단 속에서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특히 기병이 수행하는 명예로운 돌격을 열망했다. 인간과 짐승의 용기와 기세가 승리를 가져다주는 기병 돌격전을 말이다. 그들은 기술 혁명으로 도래한 상황에 대처하는 최상의 수단으로 보병과 기병을 숭배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한 프랑스 군인은 그런 개념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우리 병사들은 영광이라는 망상에 계속 이끌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름도 없이 애매하게 죽어갔다. 한때 강인한 팔뚝과 용맹한 심장이 부여했던 확실성 따위는 없었다. 무기가 발달하면서 과거의 용기는 무색해졌다." 전쟁 기간 내내 많은 장성들이 전쟁 수행 방법이 철저하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많은 군사 저술이 이루어졌지만, 대부분이 계속해서 일종의 군사적 '정신주의'만을 강조했다. 물질적 힘의 잠재력은 무시한 채 인간의 능력만을 끊임없이 강조했던 것이다. (p.113-114)

 

 요점은 단순하지만 흔히 간과된다. 지휘관은 적당한 전술을 만들어내기 전에 먼저 물리적 세력 균형의 본질을 정확히 평가해야만 한다. 1914년의 장군들은 이 일을 하지 않았다. 양측의 모든 군대가 비슷한 규모로 장비를 갖추었고 마찬가지로 조직화 상태도 양호했다. 따라서 전투는 접전 양상을 띠며, 승리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쪽에 승리가 돌아갈 것이라 여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손에 쥔 무기가 갖는 의미를 완전히 무시했다. 그들은 양편 군대가 공격과 방어를 하는 식으로 다른 역할을 수행할 때 가용한 무기 체계의 효율성에 큰 차이가 나리라는 점을 보지 못했다. 고정된 상태의 기관총과 라이플은 방어자들에게 절대적인 이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장성들은 이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장성들에게 돌격은 초조하게 무기를 만지작거리다가 두려움에 떨기 시작하고 이윽고 도주하는 일종의 지옥의 변방이었다. 백 년 전이라면 이런 돌격 개념이 어느 정도 타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참호의 방어자들은 자신들의 무기에 대한 확신이 투철했고, 따라서 이런 개념이 적용될 수가 없었다. 맥심 기관총의 사계 너머로 이미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를 살펴볼 수 있었던 독일의 기관총 사수는 적병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들의 사기를 측은하게 여겼을 가능성이 더 컸다. (p.121-122)

 

 음식이나 술보다 심리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위안이 되었던 것은 가족과의 서신 교환이었다. 가족 및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행위가 아주 중요했다. 이 과정을 통해 병사들은 전쟁에 투입되기 이전의 온전한 정신 상태를 마음으로나마 경험했다. 모든 병사들이 참호에 머무를 때나 휴식을 취할 때 편지를 쓰거나 집에서 보내온 평범한 내용의 편지를 거듭거듭 읽으면서 휴식 시간의 상당 부분을 보냈다. 엄청난 양의 우편물이 매일 프랑스와 영국을 오갔다. 1914년에 영국 육군 공병대의 우편 취급 부서에는 250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1918년경에는 새로 편성된 육군 체신부(Army Postal Service 이하 APS로 표기)에서 4000명의 군인이 근무했다. 매주 1250만 통의 편지가 전선으로 배달되었다. 그러면 거의 모두가 답장을 보냈다. 소포의 양도 엄청난 규모였다. APS의 소포 취급 부서는 리전트 파크에서 6000평 규모의 목조 건물을 차지했다. (…) 전체적으로 볼 때 우편물은 아주 신속하게 도착했다. 편지는 보통 2~3일 만에 도착했고, 분실되는 편지는 거의 없었다. 1918년 3월 경황 없이 무질서하게 퇴각하면서도 분실한 우편 행낭은 세 개에 불과했다. 모든 군대가 우편물의 엄청난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병사들에게 우편물을 최대한 빨리 전달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병사들은 편지를 받기 위해 예비대로 대기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매일 편지를 받았고, 심지어는 최전선에 투입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대의 우편 행낭은 보급 부대가 가져왔다. 식량과 술이 도달할 수 있으면 우편물도 도착했다. 소포가 개봉되어 내용물을 돌리고, 편지를 읽고, 우편물을 전혀 받지 못해 풀이 죽어 있는 소수의 병사들에게도 흔히 편지를 쥐어주었던 이 순간이 하루 중에 가장 유쾌한 시간이었다. (p.202-204)

 

 찰스 캐링턴은 이렇게 썼다. [세월이 흘렀고] 이제 24시간 연속 포격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면 당연히 96시간 휴식이 갖는 의미도 모를 수밖에 없다. 플랑드르의 진흙밭에서 소나기에 흠뻑 젖거나 꽁꽁 얼어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딱딱한 바닥에 깔린 물기 없는 담요가 주는 기쁨을 누가 알겠는가? 프랑스의 보병 장교 폴 랭티에는 아주 드물게 찾아왔던 순간적인 동물적 만족 상태를 이렇게 요약했다.
 삶을 빼앗긴 사람은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게 된다. 잠시라도 위험에서 멀리 놓여나면 어찌나 즐거운지 온몸이 나른하게 이완되고 살아 있다는 달콤한 만족감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온전하게 만끽하는 것이다. (p.234)

 

 서부 전선에서 형제애가 발휘된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14년 크리스마스였다. 그때는 전선 전체에서 프랑스군과 독일군과 영국군이 자발적으로 참호를 이탈해 무인지대에서 만났다. 그들은 그곳에서 담배와 술과 음식과 사진과 주소를 교환했다. 심지어 랭커셔 퓨절리어 2대대의 한 중대는 작센의 어떤 부대와 축구 시합까지 했고, 3대 2로 승리했다. 많은 군인들은 자신들의 적이 인간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런던 라이플 여단의 한 장교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봐서 매우 훌륭했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나는 독일 사람들을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p.251)

 

 죽을 때조차도 다수의 장교들은 많은 것을 공유했던 병사들을 염려했다. 해군사단의 비어 함스워스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소속 대대의 병사들'에게 남긴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겼다. "나의 전 존재는 나의 병사들, 심장, 육체, 영혼과 결합되어 있다. 내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제68보병연대의 뤼키아르 중위는 1915년 5월에 포탄에 피격당했다. 푸피아르 이병이 그를 참호까지 옮겨왔다. 뤼키아르는 공책에 자신의 생각을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나와 함께 싸워온 모든 병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여러분들은 나의 부모님께 내가 항상 의무를 다했다고 말해주기 바란다." 그는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내용을 이렇게 갈겨쓰고 있다. "독일군이 곧 참호를 장악할 테니 나를 후송하지 말도록. 내 돈 500프랑은 푸피아르에게 전해주기 바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죽었다. (p.287)

 

 그러나 사람들이 이 열정적인 형제애에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고, 또 얼마나 고양되었든 간에 참호전은 비할 바 없는 잔인함과 고통의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무수한 영웅을 탄생시켰고, 그 속에서 사랑과 자기 희생이 발휘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문학은 사랑과 동정과 용기와 인내심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서부 전선이 타락, 쇠퇴, 소음, 유혈, 죽음으로 점철된 미증유의 악몽이었음도 주장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병사들의 죽음은 헛되이 될 것이다. 병사들은,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 별로 믿지도 않는 미래를 위해 싸웠다. 전쟁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보답하지 않았다. (p.294)

 

 죽어간 사람들을 분명히 애도해야 한다. 그러나 포격 속에서 흐느꼈던 병사들, 포탄 충격으로 정신 병동에 수용되어 영문 모를 말을 지껄여댔던 병사들, 진흙 수렁에 빠져죽은 병사들, 찢어진 몸통 밖으로 쏟아진 내장을 그저 붙들고 있던 병사들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무용성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신원을 확인해주는 모든 단서를 제거하고 돌격전에 나서는 군인의 모습이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적과 맞붙어 싸우기 위해 완전한 암흑 속으로 걸어나간다. 그 무명의 병사는 마찬가지로 익명의 상대를 죽이기 위해 앞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무명 용사의 정수인 '영웅들의 안식처(Homes fit for Heroes)'와 관련한 그 모든 미사여구의 최종 결과이다.
 '영국의 한 고위 장교'가 눈을 가린 채, 여러 돌출부에서 후송된 여섯 구의 유해가 안치된 어떤 오두막으로 인도되었다. 그가 손으로 이리저리 더듬다가 만진 최초의 관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옮겨져 성대한 군사적 의례 속에서 매장되었다. 우리는 그 장군이 이제 자신의 눈가리개를 풀기 바란다. (p.295-296)

 

 

뭐든 다 배달합니다 / 김하영 / 메디치미디어

 

 사실 쿠팡은 최저임금 일자리 중에는 좋은 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셔틀버스를 태워주고 식사도 제공하며 젊은 친구의 말처럼 관리자가 일일이 감독하며 잔소리 하지도 않는다(마감 시간에 몰리면 관리자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물량 처리를 독촉하기는 한다). 무엇보다 임금이나 4대 보험 처리가 정확하다. 일용직도 매일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주 15시간 이상 일하면 주휴수당을 따로 계산해 지급하고, 월 60시간 이상 일하면 4대 보험도 가입시켜 보험료를 내준다. 당연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뿐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게 특별하다. (p.35-36)

 

 자, 계산기를 두드려보자. 배달대행을 하기 위해서는 400만 원을 주고 오토바이를 사야 하고, 300만 원을 들여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일단 700만 원이 있어야 배달대행을 시작할 수 있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휘발유 값이 들어가고(연비가 리터당 40킬로미터 안팎으로 훌륭하긴 하지만), 엔진오일도 갈아줘야 하며, 타이어 교체 등 수리유지비도 들어간다. 연간 오토바이 유지비가 적어도 800만 원 정도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오토바이 가격을 180만 원 선으로 낮춰도 600만 원은 있어야 한다. 오토바이 가격을 낮췄지만 나이가 20대 초반이라면 보험료가 올라가 1,000만 원 아래로 맞추기 어렵다.
 그래서 배달대행사들은 오토바이를 빌려준다. 렌탈 혹은 리스 방식으로 운영을 하는데, 요금에는 오토바이 임대료, 보험료, 수리비 등이 모두 포함돼 있다. 역시 관건은 보험료다. 나이가 어리면 보험료가 올라가 요금이 비싸지고, 나이가 많으면 상대적으로 적은 요금에 빌릴 수 있다. 요금 단가는 하루 단위로 매겨지는데 보통 2만~3만 5,000원 수준이다.
 다시 계산기를 두드려보자. 한 달에 25일 일한다고 치고(배민 직고용 라이더를 제외하고 배달대행 세계에 주5일 근무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리스료가 하루 3만 원이라면 리스료만 한 달에 75만 원이 들어간다. 주유비도 들어간다. 얼마나 배달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한 달에 15만 원 정도는 들어간다. 한 달 최소 비용으로 90만 원 정도 든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수익은 얼마나 날까? 배달료는 거리와 주문 폭주 정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대부분 3,000원이다. 하루에 30건을 한다 치면 할증 붙는 콜까지 더해 10만 원 정도, 한 달(25일)이면 250만 원이다. 여기서 고정 비용 90만 원을 빼면 한 달에 쥐는 돈은 160만 원이다.
 주 5일 근무도 아니고 주휴수당도 없이 25일을 꼬박 일해서 160만 원을 벌면 최저시급도 안 된다. 그래서 배달대행을 하려면 최소 하루 50건은 잡아야 한다. 50건을 잡으면 하루 18만 원(장거리 배달 할증료 포함), 한 달에 450만 원 매출을 올릴 수 있다. 그러면 고정비용 100만 원(기름값, 정비비 추가)을 빼고 350만 원을 벌 수 있다. (p.108-110)

 

 퇴직 후에는 '주말' 개념이 없어졌다. 이왕이면 사람들 붐비지 않는 평일에 쉬려고 했는데, 회사에 소속돼 있지 않다 뿐이지 일은 계속 있었다. 오히려 '평일에 쉬면 된다'는 생각에 주말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배달대행 라이더들, 대리기사들 대부분 1주일에 6일, 심지어는 7일을 일하는 경우도 많다. 주휴수당이 없기 때문에 주말까지 일해야 소득을 보전할 수 있어서, 1주일에 6일 일해야 한다는 암묵적 계약 조건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등등 이유는 다양하다. 쿠팡 물류센터에 이틀 나오는 일용직도 쿠팡에는 주말에만 나오지만 역시 주 7일 일한다. '투잡'이기 때문이다. (p.205)

 

 통계에 따라 제각각이지만 전체 고용 근로자 중 비정규직이 50% 안팎이다. 6개월, 1년 단위로 계약하는 비정규직에게 회사의 10년, 20년 뒤를 바라보며 함께 노력하는 공동체 정신이 생길 수 있을까?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정규직'이 되라 가르치고 있고, 아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종신 고용' 보장 정규직 직장인 공무원과 공기업에 몰린다.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플랫폼 노동은 회사 공동체를 약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붕괴 수준으로 내몰고 있다. 전국에 배달 노동자만 8~10만 명이라고 하는데 '라이더 유니온'의 조합원은 몇 백 명 정도다. 대리기사는 16만 명 정도인데 대리운전노동조합 조합원 수는 몇 천 명 수준이다. 이밖에 다양한 '특수고용 노동자' 직종 노동조합이 활동 중이지만 조합원 수 규모로만 보면 직종을 대표한다고 보기 어렵다.
 플랫폼 노동업무의 특성상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지 않기 때문에 소통을 할 기회도 없을뿐더러 유대감 형성도 어렵다. 무엇보다 '건당 수수료'를 받는 입장에서 같은 직종 종사자는 '동료'라기보다는 '경쟁자'에 가깝다. 게다가 배달 라이더나 대리운전 기사를 자신의 '평생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다. (p.244-245)

 

 회사가 하던 역할을 이제는 정부가 해야 한다. 20세기에는 회사가 분배와 복지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21세기에는 회사 간의 격차가 커지고 또 노동자 간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인공지능, 자동화 등으로 불평등은 더욱 격화될 것이다. 이제 개별 회사들에게 분배와 복지를 맡기지 말고 정부가 사회 전체의 부를 관리하면서 정교하게 분배를 해야 한다. (p.251)

 

 '가장 인간적인 노동'을 갈구하던 나는 2020년 2월 사무실 책상과 의자를 떠나 길 위에 섰다.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고', '내가 일하는 만큼 벌 수 있다'는 일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노동을 만났냐고? 글쎄다. 대신 "일하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은 확실하게 들었다.
 한번은 20년 된 오래된 차를 고치러 동네 정비소에 갔을 때였다. 트럭을 전문으로 고치는 곳인지 개인용달의 1톤 화물차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사장님. 요즘 택배 화물차 늘어서 수입 좀 늘었겠어요?"
 "택배기사들은 새벽 6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하는데 어디 차 고칠 시간이 있대요? 잔 고장 정도는 그냥 타고 다녀요. 그러다가 아예 퍼져서 안 움직이면 그때 견인돼서 들어와요."
 2020년 1월부터 10월가지 과로사로 추정되는 택배 관련 사망자만 15명이다. 팔 다리 허리가 쑤시고 아파도, 가슴이 답답해도, 시간이 없어 참고 일하다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길 위에서 퍼져야 견인돼 정비소로 가는 트럭들처럼. (p.269-270)

 

 

저는 비정규직 초단시간 근로자입니다 / 석정연 / 산지니

 

 초단시간 비정규직 노동자, 우리는 더 가치가 없으면 쓰다가 내다 버리면 되는 플라스틱처럼 필요와 소용의 가치만으로 판단되는 일회용, 아니 소모성 인력풀이었다. 그런데 사용자, 그들은 간과한 것이 있다. 커다란 철밥통을 차고 앉은 그들만의 세상에 사느라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도 생각하는 사람임을, 말할 수 있는 사람임을, 글 쓸 수 있는 사람임을.
 그들에게 전하고 싶다. 지금 생태계를 위협하며 전 세계 심각한 환경문제가 되는 먹이사슬의 침입자 플라스틱은 그것들을 내다 버린 우리를 향해 다시 비수가 되어 나타났다. 편리의 이기로 잉태된 스스로 만든 새로운 물질이 생태계를 교란하며 먹이사슬 최상위층 인간을 공격하듯 권력자들 부의 축적 수단으로 소비하고 버려진 최하위 직군 노동자도 돈과 권력으로 나누어진 계층사회의 유리 벽을 허물어버릴 수 있는 똑같은 인간임을 잊지 말라고.

 

 아이들에게는 창의적 사고, 융합, 혁신을 외치면서 정작 10년 넘게 바뀌지 않는 권장도서목록과 추천도서목록들은 왜 만들어놓은 건지 모르겠다. 아이들 사고의 밑거름이 될 자료배치 공간인 학교도서관은 학교의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자료가 정체되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더 큰 날갯짓을 하라는 건 맨땅에 헤딩하도록 등 떠미는 것과 진배없다. 정말 무책임하다.

 

 나라님이 바뀔 때마다 국책사업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지만 일관성 실효성 없는 정책들은 늘 반짝하고 사라졌다.
 대규모 국가사업이 경제 발전을 이루어왔지만 우리나라의 최대 자산인 '인력'에 투자하고 지원하는 인간 중심이 아닌 겉으로 보여지는 외형의 성과물로 업적을 남기려 하니 우리 모두 그토록 원하는 진짜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것 아닐까? 사람이 사는 세상, 사람이 바꿀 수 있고, 사람들을 깨워야 한다. 움직이게 하고, 일할 수 있게 하고, 연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멀쩡한 일자리를 없애고 재능기부나 자원봉사자를 찾는 사례는 이제 차고 넘친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국가행사에 걸핏하면 고급인력을 자원봉사로 모집하는 것은 분명 자원봉사의 의미를 악용하는 것이다. 무상노동을 강요하는 행위는 착취다.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인 최저 임금을 주려면 최저 노동을 바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요구하는 봉사활동들은 강도를 훨씬 뛰어넘는 활동들이다. 전문적인 기술과 자격을 요구하는 자원봉사 활동가를 찾는 몰염치한 단체도 많다. 그러면서 '열정페이' 운운하는 그들의 행태는 국가의 대규모 행사 때마다 애국심에 호소하며 동원됐던 수많은 자원봉사자를 마음껏 부린 정권에게 배운 것이 아닐까 한다.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움직여주는 인력들이 이렇게 널려 있는데 국고를 함부로 열 수 없다는 거다. 그 인건비 아끼고 아껴서 누가 잘살게 되었던 걸까?

 

 "제가 주 14시간 근로 계약자입니다. 근무시간은 계약 시간보다 훨씬 많았…."
 뒤에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한다.
 "초단시간 근로자네요."
 "예? 초단시간 근로자? 제가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주 15시간 이상 근로자를 단시간 근로자라 하고, 주 15시간 미만이면 초단시간 근로자라 합니다. 초단시간 근로자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가 없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예에…? 아니."
 "해드릴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애당초 그런 계약을 하면 안 되지요."
 참담했다. 무식하고 한심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너무 창피했다.

 

 21세기 최고의 석학이자 비평가 노암 촘스키는 저서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1장에서 도날도 마세도와 대담을 하며 일찌감치 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역설한 바 있다. 순종을 강요하고 독립적인 사고를 막는 통제와 억압 시스템으로 제도화된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은 권력 구조를 지탱하도록 사회화된다는 것. 또한 권력층에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는 교사는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가르쳐야 하는 학교가 직면한 모순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깨어 있는 교육을 주장한 촘스키는 '훌륭한 교사'의 덕목을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을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더불어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학생들이 스스로 진실을 찾을 수 있도록 일깨워주는 것, 거짓과 진실을 판별할 능력을 키워주는 것, 왜곡된 정보를 바로잡고 진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훌륭한 교사이며 진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방관자가 아닌 행동하는 참여자로 나서라고 한다.

 

 사서교사는 학교도서관 도서를 연구하기 위한 고급 인력들이다. 그런 인력들이 학교도서관 책장 정리나 하고 있고 대출, 반납을 위한 단순 업무만으로 시간을 다 보내버리면 사회적으로 너무 손실이 크다. 도서관 업무만 보면 차라리 낫다. 학교의 잡다한 업무를 맡아 하는 사서 선생님들이 많다. 학교에 일손만 부족하면 불려가 도와야 한단다. 책을 보고 연구하는 것이 책무인데 책을 보고 앉아 있으면 노는 줄 안다. 그러니 책을 볼 시간이 없다. 책 펼 시간이 없다는 거다. 책 제목과 표지는 훤히 아는데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시간과 노력으로 채워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닌 일, 내가 하고 있어도 시키지 않은 일, 업무 분장에도 업무 성과지에도 기록되지 않는 수많은 사소한 일들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지 않거나 모른 체하면 표가 나는 일이다.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산업 현장이나 사무 현장이나 나 아니라도 누군가는 하겠지 하는 사소한 점검과 확인을 미룬 결과는 대형 사고나 재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숨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근로자 자신의 입으로 '나 잘했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관리자가 왜 있겠는가? 부하직원의 잘못된 점만 찾아서 지적하고 점수를 매기고 쳐내려고만 하지 말고 숨은 공로를 찾아 치하하고 격려해주면 신이 나서 더 잘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다. 관리자는 그러라고 있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 사이먼 사이넥 / 타임비즈

 

 서툰 결정의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비단 잘못된 추정만은 아니다. 만사가 순조로울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잘 안다고 여긴다. 일이 잘되고 사업이 확장일로에 있고 선택한 것마다 잘 맞아떨어지는 데는 탁월한 논리적 식견이 한몫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지금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앞으로도 줄곧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어딜 가보셔도 이와 똑같은 가격, 똑같은 품질, 똑같은 특징의 제품을 절대 구입하실 수 없어요!"
 10년 전이라면 모를까, 요즘 시장에선 상상하기 힘든 명제다. 선발주자의 이점은 몇 개월이면 사라진다. 당신이 정말로 새롭고 진기한 제품을 시장에 선보였다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비슷하거나 훨씬 좋은 제품을 출시할 것이다.
 그런데도 기업에게 '고객이 왜 당신 기업 제품을 구매하느냐?'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여전히 한결같다. 품질이 우수해서, 제품의 특징이 두드러져서, 가격 경쟁력 덕분에, 탁월한 서비스 때문에……. 이 대답을 내놓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고객이 왜 자사 제품을 구매하는지' 그 이유를 도통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대단히 흥미로운 깨달음의 지점이다.
 고객의 의중도 모르는데, 종업원들이 왜 자사에서 일하는지 그 이유를 알 리가 없다. 고객이 자기 제품을 사주는 이유를 모르고, 종업원이 왜 자기 회사에 몸담고 있는지 그 이유도 모른다면, 훌륭한 인재를 더 많이 데려갈 방법은 어떻게 알 것이며 구성원을 격려해 더 많은 충성도를 이끌어낼 방법은 어떻게 알 것인가?
 이렇듯 대부분의 기업은 '추정'을 근거로 의사결정을 한다.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인 추정을 근거로 말이다.

 

 '1+1', '무료 증정' 등의 프로모션은 너무도 흔히 사용하는 조종 방법이라 처음에는 조종당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디지털 카메라 같은 것을 사기 위해 매장에 나가게 된다면, 자신의 의사결정 방식을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용량, 화소, 가격, 브랜드, 디자인, 모든 면에서 흡족한 제품 두세 개는 쉽게 골라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에는 프로모션이 걸려 있다. 가방이나 메모리카드를 준다는 따위의. 특징이 비슷할 때, 이 별것 아닌 추가사항이 때로는 결정을 좌우하게 된다.
 기업 대 기업(B2B)의 거래로 옮겨가면 이러한 프로모션은 '부가가치(value added)'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원리는 동일하다. 아무 대가 없이 뭔가를 거저 주는 상대가 있다면, 그쪽과 손을 잡게 될 공산이 커진다. 가격이 그렇듯 프로모션은 가시적 효과를 낳는다.

 

 기업의 구매담당자는 합리적인 가격에 뛰어난 품질의 제품을 고르지 않는다. 평판이 높고 안정적인 회사 제품을 골라야 혹시라도 생길 후환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뛰어난 품질에 좋은 가격을 제시한 공급업체가 설령 망하지 않는다 해도(두려움의 실체가 없어도), 두려움의 감정을 품게 만든 것이다. 그 결정이 자기 회사를 위해 최선의 선택이 아닐지라도, 자기 자리를 보전하고자 하는 욕망이 우선한다.
 '두려움'을 조종의 방편으로 삼으면, '사실(facts)'은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생존이라는 동물적 욕구 깊이 자리한 이 감정은 제아무리 정확하고 세세한 정보로도 없애기 힘들다. 테러리즘의 원리가 바로 그렇다. 테러로 피해를 입는 개인의 통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무작위의 집단이 무차별적 위해를 입는다는 공포만이 부각될 뿐이다.

 

 경영 컨설턴트인 한 친구는 자산규모 10억 달러인 회사를 꽤 오랫동안 컨설팅 하고 있다. 그는 회사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무슨 주제든 상관이 없어. 어떤 것에 대해서든 더 나은 장기적 해결책 대신 돈이 덜 드는 쪽을 선택해. 그게 그 회사의 고질적인 문제야."
 습관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처럼, 습관적으로 솔루션을 찾아 헤매는 이들은 처음부터 꾸준히 제대로 시간과 돈을 들이지 않는다. 친구가 고객사에 대해 한 말처럼 말이다.
 "다 망친 다음에 또 다시 시간과 돈을 들여서 다시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