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인류의 요람, 에티오피아의 초대 / 윤오순 / 눌민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6천여 명의 지상군을 파견한 나라이다. '깍뉴부대'라고 불리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은 황제의 근위병들로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이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며, 전쟁이 끝난 후 잔류 부대원들은 비무장지대 근방에 고아원을 만들어 당시 전쟁고아들을 돌보기까지 했다. 지금은 우리가 한국국제협력단의 봉사단원 파견을 비롯해 정부차원에서 혹은 각종 NGO 및 선교 단체들이 에티오피아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있지만 불과 50여 년 전에 에티오피아가 우리를 도와주던 시절이 있었다. (p.6)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국가 중 드물게 구전이 아닌 문자로 기록된 역사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암하릭어라는 고유 문자 덕분이었다. 게다가 약 5년간의 이탈리아 점령기간 외에는 여타의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강대국의 식민지 경험이 없어 지금까지도 고유의 문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에티오피아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1698년에 이미 암하릭어-라틴어 사전이 출판될 정도로 암하릭어는 자국에서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통용된 언어였다. (p.41-43)
1970년대 사회주의 체제의 돌입으로 한국전 당시 북한을 상대로 싸웠던 이들은 모진 시련을 겪게 되고 그 여파로 주민들 대부분은 여전히 빈곤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7년에 참전용사 후손을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조사에 따르면, 마을 안에 모스크가 하나 있지만 이슬람교(에티오피아 전체 인구 절반이 믿고 있다) 신자는 5% 정도고, 90% 이상이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들이다. 가난을 탓하지 않는 정교회 교리 때문인지 대부분의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들은 아주 가난하다. 마을 안에 공공시설이라고는 한국 정부가 지어 준 초등학교가 전부이다. 학령기의 아이들 중 13.4%만 이곳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우리한테도 원조를 받고 있는 에티오피아지만 1950년대만 해도 황제시대로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 에티오피아 정부가 파견한 참전용사들은 '깍뉴(Kagnew)'라고 불리던 황제의 근위병들이었다. 당시 총 6,037명이 파병되었으며, 253개의 주요 전장에서 단 한 명의 포로 없이 총 122명이 전사했고, 536명이 부상을 입었다. 치료시설이 열악해 부상자들은 대부분 유엔의 군용헬기에 실려 일본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1951년 4월 13일 제1차 깍뉴부대(깍뉴부대는 1965년 3월 1일 본국으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총 5차에 나누어 파병되었다)를 싣고 에티오피아를 출발한 배는 중간에 그리스, 태국, 필리핀 병사들을 태운 후, 같은 해 5월 6일에 부산항에 도착한다. 간단한 훈련을 마치고 이들은 바로 그 해 8월부터 전장에 투입되어 크고 작은 전투에서 용맹을 과시하며 혁혁한 공훈을 세운다.
특기할 만한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 전쟁중에도 깍뉴부대원들은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하기도 했다. 상상이 가지 않지만 교전중일 때는 고아들을 안전한 곳에 대피시키면서 끝까지 함께했다는 것이다. 휴전 후 돌보던 고아들을 위해 고아원을 운영하기도 하고 이들을 해외로 입양하는 일도 추진했다고 하는데 그리스나 다른 참전국에는 군인들을 따라간 고아들이 많았지만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을 따라간 고아들은 한 명도 없다고 한다. (p.137-138)
3세기에 이 세상을 움직이는 4대 제국이 있었으니 바로 로마, 중국, 페르시아, 그리고 악숨제국이다. 앞의 세 나라는 비교적 익숙하지만 마지막의 악숨은 좀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악숨(Axum)은 9세기까지 홍해를 지배한 악숨제국의 수도로 당시 아프리카 최대의 교역 중심지였고, 지금의 에티오피아에 똑같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악숨의 오늘은 조금 초라한 모습이지만, 3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의 에티오피아의 수도로 찬란한 문화의 도시였다. 악숨은 1세기경부터 로마제국, 비잔틴제국과 어깨를 견주었고, 홍해 연안을 중심으로 한 무역으로 번성할 수 있었다. (p.198-199)
보이지 않는 여자들 /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 웅진지식하우스
그러나 설사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에 동수의 칸막이가 있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자의 화장실 사용 시간이 남자의 2.3배이기 때문이다. 노인과 장애인의 대다수가 여성인데 이 두 그룹은 화장실 사용 시간이 길다. 또 여자들은 아이나 장애인, 노인을 동반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여성 인구의 20~25%는 가임기 여성으로 언제든 생리 중일 수 있으며 그 경우 탐폰이나 생리대를 갈아야 한다.
또 여자는 남자보다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할 가능성이 높다. 임신은 방광의 용량을 급격하게 감소하며 여자는 요로감염에 걸릴 확률이 남자의 8배나 된다. 이 또한 화장실에 가는 빈도를 증가시킨다. 이러한 신체적 차이를 알면서도 동일 면적 화장실이 공정하다고 계속 주장하는 사람은 형식적인 평등만 외치는 독불장군일 것이다. (p.77)
전 세계적으로 여자는 무급 노동의 75%를 담당한다. 여자의 일일 무급 노동 시간이 3~6시간인 데 반해 남자는 평균 30분~2시간이다. 이 불균형은 일찍 시작되어—5살 여자아이조차도 남자 형제보다 집안일을 훨씬 많이 한다—나이가 들수록 심해진다. 세계에서 남성의 무급 노동 시간이 가장 긴 나라(덴마크)와 여성의 무급 노동 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노르웨이)를 비교해도 여전히 남자가 여자보다 짧다.
남녀 간 무급 노동의 불균형 문제를 끄집어낼 때마다 나는 똑같은 말을 듣는다. "하지만 확실히 나아지고 있지 않나? 남자들이 점점 더 많이 하지 않나?" 개인 차원에서는 물론 전보다 많이 하는 남자들이 있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전혀 아니다. 남자의 무급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꽤나 요지부동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연구에 따르면 가사 도우미를 고용한 부유한 커플의 경우에도 나머지 무급 노동을 남녀가 분업하는 비율은 똑같다. 여전히 여자가 대부분의 일을 한다. 그리고 여자가 유급 노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점점 증가하지만 남자가 무급 노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그만큼 증가하지 않고 있다. 단순히 여자들의 총 노동 시간만 증가했을 뿐이다. 지난 20년간 수많은 연구에 의하면 여자들은 그들이 벌어들이는 돈이 가계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무급 노동을 한다. (p.102-103)
"안 쓰면 없어지는" 아빠 육아휴직이 도입되기 전에는, 1974년부터 육아휴직 제도가 존재했음에도, 스웨덴 남자의 6%만이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바꿔 말하면 정부가 강제하기 전까지는 있는 휴가도 쓰지 않았다. 이 패턴은 아이슬란드에서도 반복되었다. "아빠 쿼터제"를 도입하자 남자들이 신청하는 육아휴직 기간이 2배로 늘어났다. 한국에서는 2007년에 "아빠 육아휴직"이 생기자 남자들의 육아휴직 사용률이 3배 이상 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례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2015년에 남자에게만 할당된 기간이 따로 없는 부모 육아휴직 제도를 도입했다. 예상대로 사용률은 "끔찍할 정도로 저조했다." 이 제도가 시행된 후 12개월 동안 남자 육아휴직을 신청한 사람은 100명당 1명에 불과했다. (p.118-119)
뉴욕필하모닉에는 20세기 내내 여성 연주자가 거의 없었다. 1950~60년대에 1~2명 고용된 적이 있었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여성의 비율은 끈질기게 0에 머물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뭔가가 달라졌다. 1970년대부터 여성 연주자의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이직률은 대단히 낮다. 단원 수는 100여 명으로 일정하며 한번 고용되면 대개 평생 고용이다. 해고되는 일은 드물다. 따라서 이 오케스트라의 여성 비율이 10년 동안 통계상 0%에서 10%로 늘었다는 것은 뭔가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 뭔가는 블라인드 오디션이었다. 한 소송사건 이후 1970년대 초에 도입된 블라인드 오디션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똑같다. 고용 위원회가 지금 오디션에서 연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들과 연주자 사이에 가림막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가림막은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1980년대 초에 이르자 여성이 신규 고용자의 50%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뉴욕필하모닉의 여성 연주자 비율은 45%를 상회한다. (p.127-128)
오늘날 컴퓨터공학보다 더 총명 편견에 경도된 분야를 떠올리기는 어렵다. "프로그래밍을 좋아하는 여학생들은 대체 어디에 있나?" 고등학교 컴퓨터 교사들을 위한 카네기멜론대학교 여름 프로그램에 참가한 남교사가 물었다. "나는 컴퓨터를 정말 좋아하는 남학생들을 많이 봐왔다." 그는 말했다. "몇몇 학부모는 나에게, 만약 자기 아들이 밤새울 수 있다면 밤새도록 프로그래밍만 할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여학생은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그 말은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동료 여교사가 지적했듯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학생들이 컴퓨터공학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여교사는 자신이 대학교 첫 수업에서 프로그래밍과 "사랑에 빠졌던" 경험을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밤을 새우지도 않았고 심지어 대부분의 시간을 프로그래밍 하며 보내지도 않았다. "뭔가를 하느라 밤을 새우는 것은 그 대상을 향한 사랑 외에도 외골수적인 면과 미성숙의 표시이기도 하다. 여학생들은 컴퓨터와 컴퓨터공학에 대한 사랑을 아마 굉장히 다르게 표현할 것이다. 당신이 찾는 집착적 행동은 전형적인 남자아이의 행동이다. 그런 행동을 하는 여자아이도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p.141-142)
소위 성 중립적인 제품을 '남자에게 맞는 원 사이즈'로 만드는 것은 여자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준다. 여자의 평균 뼘은 18~20cm이기 때문에 길이 122cm의 표준 건반은 좀 부담스럽다. 한 연구에 따르면 한 옥타브가 18.8cm인 표준 건반은 성인 여자 피아니스트의 87%에게 불리하다. 한편 성인 피아니스트 473명의 뼘과 그들의 "명성의 수준"을 비교한 2015년 연구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12명의 뼘은 모두 22.4cm 이상이었다. 이 상위 그룹까지 올라간 여자 2명의 뼘은 각각 23cm, 24cm였다.
표준 건반은 여자 피아니스트가 남자 동료들과 같은 수준의 명성을 얻는 것만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1980~90년대에 연주자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일련의 연구에 따르면 여성 음악가들은 직업 관련 부상을 "남자보다 훨씬 많이" 입었고 그중에서도 건반 연주자들은 "가장 위험한" 그룹에 속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여자 피아니스트는 남자 피아니스트보다 통증이나 부상에 시달릴 확률이 50%가량 높다. 한 연구에서는 반복사용긴장성증후군에 걸릴 확률이 여성은 78%인 데 반해 남성은 47%에 불과했다. (p.204-205)
우리는 여자들이 하는 무급 노동이, 여자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자기 가족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는 여자들의 무급 노동에 의존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한 혜택을 입는다. 우리 모두가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공서비스 예산을 정부가 삭감한다고 해서 그 서비스의 수요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지 여자들에게 노동이 떠넘겨질 뿐이다. 그것이 여성의 유급 노동 참여율과 GDP에 미치는 모든 부정적 영향과 함께. 그래서 여자들이 하는 무급 노동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제도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집어넣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쉽게 뺄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데이터를 수집한 다음에 남성 편향적 허구가 아니라 현실을 중심으로 경제를 다시 설계할 의지뿐이다. (p.311)
여자는 전쟁에 뒤따라오는 사회질서 붕괴의 영향을 남자보다 훨씬 많이 받는다. 소위 분쟁 후 상황에서도 강간과 가정폭력의 수위는 여전히 극도로 높다. "무력 사용에 익숙한 제대군인들이 집으로 돌아와서, 달라진 성역할이나 실업의 좌절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1994년 르완다 집단학살이 있기 전에는 여성의 평균 결혼연령이 20~25살이었다. 그러나 집단학살 도중 및 이후에 난민캠프에서는 15살로 내려갔다. (p.362)
한 끼의 권리 / 오하라 에쓰코 / 시대의창
이제 푸드 뱅크 시스템을 살펴보자.
옆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잉여 식품은 유통의 여러 과정에서 발생한다. 푸드 뱅크는 그것을 모아다가 원칙적으로 개인이 아닌 복지시설이나 단체에 보낸다. 복지시설 같은 곳에는 대개 영양사나 조리사 등 '음식' 전문가가 근무하고 있어 기업이 염려하는, 음식을 '부적절하게 취급하는 일'이 생기기 어렵다. 또한 푸드 뱅크의 취지를 이해하고 신뢰하는 단체에 나누어 주기 때문에 기부받은 식품이 다른 곳에 몰래 팔릴 걱정도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식품 폐기 비용이 절감된다. 푸드 뱅크 한 곳에 식품을 제공하면 그곳에서 몇몇 믿을 만한 단체로 나누어 보내기 때문에, 기업이 개별적으로 단체와 접촉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편리하게 사회에 공헌도 할 수 있다.
식품을 기부받는 단체에서는 식비가 절감된다. 그 돈으로 본래 활동에 더 힘을 쏟을 수 있다. (p.34-36)
'21세기 일본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 이 사실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조사를 해 보면, 매년 일본에서는 50명에서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굶어 죽고 있다. 후생노동성의 '인구실태통계'에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11년 동안 '영양 부족'으로 죽은 사람은 무려 810명이나 되었다. 이것은 의사가 사망 진단서에 '영양 부족'이라고 기록한 수이므로, 다른 병명이 붙여진 경우도 감안하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매주 토요일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붐비는 우에노 공원 한쪽 구석에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을 위해 줄 선 사람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사람들이 만든 또 하나의 긴 줄이 있다. 2HJ가 제공하는 무료 급식을 타기 위해 늘어선 줄이다. 매번 5백 명 정도가 수프와 밥을 받아들고는 이내 자리를 잡고 앉아 묵묵히 먹기 시작한다. 최근에는 이삼십 대로 보이는 사람도 눈에 띈다. (p.41)
빈곤과 비정규직 고용 문제는 요즘 만화와 문학의 소재로도 곧잘 등장한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 사이토 다마키는 이런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요즘 만화나 문학에는 과거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같은 주장이나 고발이 없으며 무엇보다 등장인물이 모든 것을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자가 자학을 하는 것이다." (⟪아사히신문⟫ 2008년 3월 6일)
이는 '자기 책임'이나 '자기 노력'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일본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당사자들조차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탓하며 아무런 주장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
"물질이 넘쳐 나니 일본은 풍요로운 나라라고 착각을 합니다.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죽은 듯이 살면서 아무런 주장도 하지 못하는 나라가 일본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풍요로운 사회가 아니라 빈곤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성숙하고 풍요로운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2HJ 이사이자 일본기독교단 햐쿠닌초 교회의 아소 도시후미 목사는 반문한다. (p.45-46)
식중독 등 기부한 것 때문에 발생할지도 모를 사건에서 기부자를 보호하는 법률도 있다. 1996년에 제정된 '빌 에머슨 식량 기부법(The Emerson Good Samaritan Food Donation Act)'이다. 이것은 원래 각 주마다 있던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연방 차원에서 통일한 것으로, 선의로 기부한 식품이 원인이 되어 어떠한 불상사가 일어났을 때 고의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것이 아닌 한 기부한 사람은 민사 혹은 형사상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법률이다. 실제로 이 법이 적용된 적이 없기는 하지만 푸드 뱅크의 활동에 든든한 뒷받침이 되고 있다. 또한 기업은 과세소득의 10퍼센트, 현물 기부의 경우 많게는 원가의 2배까지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도 식품을 폐기하기보다는 기부하는 편이 이득이 되는 시스템이다.
"일본에는 아직 이런 법률이 없나요? 그렇다면 기업이 굳이 기부하려고 나서지는 않겠네요."
미국의 푸드 뱅크 직원들은 저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p.66-67)
1995년 아칸소 주 주도인 리틀록의 공립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던 양호교사는 어느 날 이상한 변화를 감지했다. 현기증과 복통을 호소하며 보건실을 찾는 아이들이 부쩍 늘었던 것이다. 병이 아니라 배고픔 때문이었다. 그런 아이들은 휴일 다음 날인 월요일과 휴일 전날인 금요일이 되면 점심을 허겁지겁 먹어 댔다.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에는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사는 지역의 푸드 뱅크와 상담하여 음식을 제공받기로 했다. 그런데 저소득 가정의 아이들에게 그 음식을 들려 집으로 보냈더니, "같은 반 아이들이 가난뱅이라고 놀린다"고 호소하는 아이가 생겨났다. 그래서 교사는 다른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음식을 배낭에 넣어 전달했다. '배낭 프로그램(backpack program)'이라 불린 이 작업은 순식간에 각지로 퍼져 나갔다. 지금은 미국의 110개 푸드 뱅크에서 실시되어 주말마다 배낭(계속 다시 사용된다) 3만 5천 개가 아이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대상이 되는 아이는 학교 측이 판단해 부모에게 편지로 알려주는 경우가 많다. 배낭 프로그램은 피딩 아메리카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 중에서 이용자가 가장 급속히 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푸드 뱅크에서는 배낭에 로고와 마크를 찍어 아이들이 뿌듯한 마음으로 배낭을 메고 돌아가도록 하는가 하면 배낭을 따로 만들지 않고 비닐봉지에 넣어 살짝 전해 주기도 한다. 교사는 다른 아이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집에 갈 때까지 절대 열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당부한다. 형식이야 어떻든 주말이나 여름방학 등 수업이 없는 기간 동안 아이들을 굶기지 않겠다는 마음은(아이들의 영양을 보충시키겠다는) 모두 같다. (p.77-78)
활동 자금과 인재 확보. 간사이가 안고 있는 과제는 2HJ에도 해당되고, 일본의 많은 비영리단체가 안고 있는 공통적인 고민이기도 하다. 정부에 따르면, 2007년 말 현재 전국에는 3만 3천개가 넘는 비영리법인이 있다. 그러나 직원들은 대부분 무급이며, 경리 담당 직원을 따로 둔 단체는 20퍼센트에 불과하다. (내각부 국민생활국 2005년 ⟨시민활동단체 등 기본조사⟩)
'다이이치 생명경제연구소' 기타무라 야스코 부주임 연구원은 비영리단체에 종사하는 20~30대 남녀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설문에 응한 182명 중 유급 종사자는 약 77퍼센트가 넘었으나, 평균 수입이 1년에 약 160만 엔(약 2000만 원)으로 전체의 3분의 2가 연 수입이 200만 엔(약 2600만 원) 미만이었다. 이들 중 약 30퍼센트는 다른 일도 하고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가 "비영리단체의 수입만으로는 생활을 꾸려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라이프디자인리포트⟫ 2007년 7~8월).
많은 식품을 운반하는 일이다 보니 푸드 뱅크의 직원과 봉사자들은 대개 허리 통증이나 요통을 앓는다. 고된 일인 만큼 체력이 있는 젊은이들이 필요하지만 20~30대가 이 활동에 전념하려면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p.183-184)
돈의 심리학 / 모건 하우절 / 인플루엔셜
어떤 사람은 교육을 권하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교육을 반대하는 가정에서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모험 정신을 장려하는 경제 번영기에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전쟁과 결핍의 시대에 태어난다. 나는 네가 성공하기를 바라고, 네 힘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모든 성공이 노력 덕분도 아니고 모든 빈곤이 게으름 때문도 아니라는 사실을 꼭 알아두어라. 너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를 판단할 때는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해라.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을 위해 내가 가진 것,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걸 이유는 전혀 없다.' 이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나 그만큼 쉽게 간과하는 진실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멈추게 하는 골대, 즉 목표를 세우는 것, 이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다. 결과와 함께 기대치가 상승한다면 아무 논리도 없이 더 많은 것을 얻으려 분투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도 느낌은 같을 것이다. 더 많은 것(더 많은 돈,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성)을 얻고 싶은 바람이 만족보다 야망을 더 빨리 키운다면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그 경우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면 골대는 두 걸음 멀어진다. 그러다 나 자신이 뒤처진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걸 따라잡을 길은 점점 더 많은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밖에 없다.
강세장에서 현금을 보유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격이 크게 오를 자산을 보유하고 싶다. 강세장에서 현금을 들고 있으면 보수적으로 보이고, 스스로도 그런 느낌이 든다. 그 훌륭한 자산들을 소유하지 않음으로 인해 내가 포기하는 수익이 얼마인지 예리하게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금이 1년에 1퍼센트를 번다면, 주식 수익률은 10퍼센트다. 이 9퍼센트의 격차 때문에 매일이 괴롭다.
그러나 바로 그 현금 덕분에 약세장에서 주식을 팔지 않아도 된다면, 그 현금으로 인한 실제 수익률은 연간 1퍼센트가 아니라 그 몇 배일 수 있다. 좋지 않은 시기에 절박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식 파는 일을 한 번 막는 것이, 크게 성공할 주식 수십 가지를 고르는 것보다 평생 수익률에는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복리의 원리는 큰 수익률에 의존하지 않는다. (특히나 대혼돈의 시기에) 그저 썩 괜찮은 수익률이 중단 없이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되기만 하면 결국엔 승리할 것이다.
유연성이 있다면 커리어에서도, 투자에서도 좋은 기회를 기다릴 수 있다. 필요할 때 새로운 능력을 배울 수 있는 확률도 높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줄 아는 경쟁자를 급히 뒤쫓아야 한다는 압박도 덜 느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열정을 가진 일, 나에게 꼭 맞는 일을 나만의 속도에 맞춰 찾을 수 있는 여유가 더 있을 것이다. 새로운 일상을 찾을 수도 있고, 더 느리게 살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가정들을 가지고 인생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을 내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지능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한 우위가 아닌 세상에서 당신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몇 안 되는 능력이다.
내 뜻대로 쓸 수 있는 시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택권을 더 많이 갖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화폐 중 하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저축을 할 수 있고, 그리고 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좋은 아이디어를 무리하게 밀고 나가 결국은 나쁜 아이디어와 다름없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실수에 대한 대비책을 만들어두는 것이 지혜로운 이유는 불확실성, 임의성, 여러 가지 확률들이 삶에 늘 존재하는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확실성을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발생할 거라고 예상하는 일'과 '실제로 발생하는 일'이 크게 차이 나더라도 계속해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돈과 관련하여 가장 큰 단일 실패점은 월급에만 의존해서 단기지출 자금을 마련하고 저축은 전혀 하지 않는 바람에, 내가 생각하는 지출과 미래에 혹시 생길 수 있는 지출 사이에 여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아주 부자인 사람들도 종종 간과하는 한 가지를 앞에서 보았다. '저축을 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차를 사려고, 집을 사려고, 은퇴 준비를 하려고 저축하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심지어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일들(금융 분야의 들쥐에 해당하는 것들)을 위해 저축을 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직장 생활을 하는 내내 적당한 연간 저축을 유지하고, 적당한 자유 시간을 가지고, 지나치게 긴 통근 시간을 만들지 않고, 적어도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을 목표로 잡아보라. 이 중 어느 하나라도 극단으로 흐르는 경우보다는 내가 세운 계획을 고수하고 후회를 피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저축이란 당신의 자존심과 소득 사이에 생긴 틈이고, 부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미래에 더 많은 것 혹은 더 많은 옵션을 갖기 위해, 오늘 내가 살 수 있는 것을 사지 않을 때 부가 만들어진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돈을 번다고 해도, 지금 당장 그 돈으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덮어두지 않으면 부는 절대로 쌓이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찰리 멍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자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독립성을 갖고 싶었다." 그렇다. 부자가 되는 것은 제쳐둘 수 있다. 그러나 독립성은 그럴 수 없다. 독립성은 늘 나의 경제적 목표였다. 나는 최고 수익률을 추구하거나 레버리지를 이용해 초호화 생활을 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 두 가지는 친구들에게 잘난 인상을 주려고 하는 게임처럼 보이고, 모두 숨은 리스크가 있다. 그냥 매일 아침 나와 내 가족이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잠을 깨고 싶을 뿐이다. 내가 내리는 모든 경제적 의사결정의 중심에는 이런 목표가 있다.
더 많은 것에 대한 욕구 없이 내 능력보다 낮은 수준에서 편안하게 살면, 현대 선진국에서 사는 많은 이들이 굴복하고 마는 사회적 압박을 덜어낼 수 있다. 나심 탈레브는 이를 두고 이렇게 설명했다. "진정한 성공이란 극심한 경쟁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와 내 활동을 마음의 평화에 맞추는 것이다." 마음에 쏙 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