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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내일들 / 유선애 / 한겨레출판

 

 세상이 본래 아름답고 착한 것일까라는 의문은 여전하죠. 그러기엔 저는 너무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니까요. 어느 순간 세상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것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확신했어요. 무언가를 많이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모든 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더러워 보이고 나아가 그것들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황소윤) (p.102-103)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잖아요. 그런 순간을 더 많이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보여지는 직업을 가질수록 남을 의식하게 될 때가 많고, 그건 필요보다 불필요할 때가 더 많으니까요. (황소윤) (p.115)

 

 루이제 린저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에 좋아하는 구절이 있어요. "니나는 마치 폭풍우에 좀 파손된, 그러나 대해에 떠 있고 바람을 맞고 있는 배와도 같았다. 그리고 볼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배가 어디든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새로운 대륙의 새로운 해안에 도착해서 대성공을 거두리라는 것을 돈을 걸고 단언할 것 같았다." 훼손과 상처, 두려움에 꺾이지 않고 어디든지 가는 여성. 이런 분들이 제가 사랑하는 여성상이지 않나 싶습니다. (재재) (p.141)

 

 올곧지만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구부릴 줄도 알고 때를 기다릴 줄도 알고 싶어요. 과정에서는 유연하게 대처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의도대로 결과를 만드는 사람들 있잖아요. (재재) (p.143)

 

 자신을 내려놓지 않은 채로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요. 나를 버리고 난 뒤에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거지, 나를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 사회에 다른 것이 너무 많은데 서로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들도 많은 것 같아요.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 같아요. (정다운) (p.174)

 

 영화 ⟨메기⟩ 촬영 초반까지만 해도 뭔가 다 내가 감당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좀 힘들었어요. 내 몫을 내가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거든요. 근데 점차 촬영을 하면서는 이게 나만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고, 나의 부족한 부분을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됐어요. '아, 내가 왜 이렇게 못하지, 내가 못한 걸 내가 다 해결해야 돼' 했지만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해줄 수도 있는 거더라고요. 어떤 작품 그리고 어떤 관계 속에서 내가 모든 걸 다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최근 들어 배웠어요. 나 혼자 강해지려 하기보다 곁의 사람들과 함께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이 진짜 강함이라는 생각이 이제야 조금씩 들어요. (이주영) (p.202-203)

 

 그러다 문득 내가 아시안게임 메달을 땄던 순간보다 부상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그 극복 과정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나중에 할머니가 됐을 때 손녀에게 '내가 메달 몇 개 땄다'라고 말하기보다 '내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겨냈다'는 이야기를 해줄 것 같단 말이에요. 메달 개수만 목적이고 내 삶인 게 아니라, 결과를 포함한 이 모든 과정이 내 삶이라고 생각을 바꾸니까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완벽하게 편해졌다기보다 계속 싸우고 있어요. 삶은 곧 과정이라는 생각의 에너지를 점점 키우면서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하는 건 프로 선수는 자기 결과와 기록에 책임져야 한다는 거예요. 과정이 훌륭했다고 정신승리하지 말고 기록과 결과로 내 이름과 팀, 연봉에 대해 책임져야죠. (김원경) (p.221)

 

 발 디딘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의 가치를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요. 한창 자격에 대해 고민할 때는 자책도 많이 했어요. 모델 활동을 하며 원치 않게 유해한 영향을 주기도 했고 신념에 반하는 위선자가 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어요. 내 신념과 나의 직업적 속성, 이 둘을 모두 품고 유지하는 게 힘에 부칠 때도 있었고요. 그렇지만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모델이기 때문에 발언의 기회가 주어질 때가 있는데 이번 인터뷰도 그렇잖아요. 주목받는 위치에 있는 만큼 이를 잘 이용해서 계속 이야기하려고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지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내가 100% 옳지 않아도, 신념을 완벽하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더라도 그 가까이에 가보려는 노력은 계속할 거예요. 이런 노력은 모델뿐 아니라 직업을 막론하고 모든 여성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서희) (p.254-255)

 

 제가 베트남 전쟁에 관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나이도 어린 여자가 전쟁에 대해 안다면 뭘 안다고' 였어요. 그 말을 지겹도록 들었어요. '나는 정말 전쟁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걸까' 의문을 가지고 베트남에 갔는데 그곳에서 제가 만난 학살 피해자들은 여성이거나 청・시각장애인이었어요. 주류 언론과 매체에게 이들은 전쟁의 주인공이 아니에요. 이들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거죠. 저는 드러나지 않았던, 하지만 거기 분명히 존재하는 피해자들을 만났어요. (이길보라) (p.278)

 

 가장 했어야 하는 질문은 왜 헤어지고 나서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일까. 이슬아 작가 특유의 '등 두드리는 다정' '다정한 선동'에 대해 생각하던 차에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말을 만났다. "다정함이란 다른 존재, 그들의 연약함과 고유한 특성, 그리고 고통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그 존재들의 나약한 속성에 대해 정서적으로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다정함은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유대의 끈을 인식하고, 상대와의 유사성 및 동질성을 깨닫게 합니다. 이 세상이 살아 움직이고 있고,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고, 더불어 협력하고, 상호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p.320-321)

 

 

런던 거리 헤매기: 버지니아 울프 산문집 / 버지니아 울프 / 민음사

 

 아마 연필에 대해 열렬한 감정을 느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연필을 꼭 손에 넣고 싶은 상황이 있다. 티타임과 정찬 시간 사이에 런던 거리의 절반을 거닐기 위해 그 목적이나 목표, 핑곗거리를 찾으려는 순간들이다. 여우 사냥꾼이 말의 품종을 보존하기 위해 사냥을 하고, 골프 치는 사람들이 건설업자들로부터 녹지를 보존하기 위해 골프를 치듯이, 거리를 거닐고 싶은 욕구가 일 때는 연필이 좋은 핑계가 된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우리는 "연필을 사야겠어."라고 말한다. 이런 구실을 대면 겨울에 런던에서 생활하며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런던 거리를 헤매는 기쁨에 탐닉해도 무방하다는 듯이. (p.7)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들 대부분은 적어도 독서에 발을 들여놓게 된 단계들을 떠올릴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접근 불가라고 여겨진 서가에서 훔쳐 와 읽은 책들은 온 집안이 잠들어 있을 때 고요한 들판에 밀려드는 새벽의 풍경을 몰래 엿볼 때처럼 비현실적이고 으스스한 느낌을 일으켰다. 커튼 사이로 살짝 내다보면 안개 속에 흐릿한 나무들의 낯선 형체가 보이는데, 알아보지 못해도 우리는 이를 평생 기억할지 모른다. 아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것을 신기하게도 예감하기 때문이다. (p.59)

 

 질병은 얼마나 흔한 것인지, 병이 일으키는 정신적 변화는 얼마나 엄청난지, 건강의 빛이 스러질 때 드러나는 미지의 영역은 얼마나 놀라운지, 약한 독감에 걸리면 얼마나 황폐하고 삭막한 영혼이 드러나는지, 체온이 조금 오르면 어떤 절벽과 풀밭이 화사한 꽃들로 어른거리는지, 병을 앓을 때면 우리 내면의 얼마나 굳센 참나무 고목들의 뿌리가 뽑히는지, 이를 뽑을 때면 어떻게 죽음의 구덩이에 굴러떨어져서 머리 위로 차오르는 소멸의 물결을 느끼다가 천사들과 하프 연주자들이 눈앞에 있을 거라고 느끼며 깨어나서는 치과의 의자에 앉은 채 수면으로 떠오르다가 "입을 헹구세요. 입을 헹구세요."라는 치과의사의 말을 천국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환영하는 신의 인사로 착각하는지를 생각해 볼 때,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을 자주 해야 하므로, 이런 일과 무수히 다른 것도 생각할 때, 질병이 문학의 중요한 주제로서 사랑이나 전쟁, 질투 옆에 놓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참 이상하다. (p.66)

 

 그러므로 소설가, 특히 영국 소설가는 다른 예술가들에게는 그리 심각하지 않은 장애로 고통을 받는 듯하다. 소설가의 작품은 그의 출신에 영향을 받는다. 그는 오로지 자기 계층에 대해서만 속속들이 알 수 있고 이해심을 갖고 묘사할 수 있는 운명이다. 자신이 성장한 유리 상자에서 탈출할 수 없다. 소설을 전체적으로 조감해 보면, 디킨스의 작품에는 신사가 없고 새커리의 작품에는 노동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제인 에어를 숙녀라고 부르려면 망설여진다. 제인 오스틴의 엘리자베스와 에마 같은 인물은 다른 계층으로 오인될 수 없으리라. 공작이나 청소부를 찾으려 해 봐야 헛된 일이다. 이처럼 극단적 계층의 인물을 어느 소설에서도 찾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따라서 소설은 기대보다 빈약하고, 사회의 최상층과 최하층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설에서는 대체로 알 수 없다는(어떻든 소설가들은 중요한 해설자이므로) 우울하고도 안타까운 결론에 이른다. (p.86-87)

 

 실로 내가 나의 직업 경험을 강조한 것은 그것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더라도 여러분의 경험이기도 하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명목상으로는 길이 열려 있더라도, 여자가 의사나 변호사, 공무원이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없을 때라도, 많은 유령과 방해물이 불쑥 나타나서 그녀를 가로막습니다. 그것들에 대해 논의하고 정의하는 것은 대단히 가치 있고 중요합니다.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 노고를 함께 나누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
 여러분은 지금껏 오로지 남성들만 소유했던 집에서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큰 노고와 노력을 들여야 하지만 임대료를 낼 수 있게 되었지요. 여러분은 연간 500파운드를 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시작일 뿐입니다. 그 방은 여러분의 것이지만, 아직 휑하니 비어 있습니다. 그곳에 가구를 비치하고 장식하고 공유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가구를 비치하고 어떻게 장식할까요? 누구와 공유하고, 어떤 조건에서 공유하게 될까요?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여러분은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으니까요. 처음으로 여러분은 스스로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기꺼이 남아서 이런 질문과 답을 논의하고 싶습니다만 오늘 밤에는 안 되겠군요. 시간이 다 되어서 이제 마쳐야겠습니다. (p.137-138)

 

 

일자리의 미래 / 엘렌 러펠 셸 / 예문아카이브

 

 생계수단을 박탈당한 마을 사람들은 항의를 위해 단결하지도 않았고, 정치적인 행동을 선동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 침잠했다. 한때 붐비던 도서관은 텅 비었으며, 공원은 버려진 채 잡초만 무성해졌다. 공개적인 토론은 중단됐고 갖가지 클럽들도 해산했다. 아이들은 의지를 잃었다. 열두 살 아이 한 명은 연구원들이 요구한 작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조종사가 되고 싶고, 잠수함 함장도 되고 싶고, 인디언 추장도 되고 싶고, 기술자도 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좋은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울까 봐 너무 겁이 난다."
 이 아이가 자신이 '되고 싶은' 것과 '일자리'를 연결시키고 그 일자리가 모자라다는 인식을 하는 것이 흥미롭다. 어쨌든 마리엔탈에서는 무직 자체가 직업이 됐으며, 그곳 사람들이 하는 일은 사회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한심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밀고했는데, 특히 돈 문제에 민감해 정부를 '속여서' 복지수당을 타내고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이웃이나 친구여도 당국에 바로 고발했다. (…)
 연구원들은 충격을 받았다. 가난은 물론 끔찍한 것이지만, 가난이라는 요인 하나만으로 이 비극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굶주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이 실업수당을 받고 있었으며 일부는 연금까지 받았다. 그들은 각자 자기 집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데, 모두가 단결해서 분연히 일어나는 행동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예컨대 그 누구도 정부에 무엇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마리엔탈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에만 눈에 불을 켜고 앞 다퉈 허둥거리는 사람들로 분열돼갔다. 연구원들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실업수당으로 사는 삶이란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회주의 학자들이 그리는 삶도 아니고, 입으로는 "이제 푹 쉬면서 여유 있게 삶이나 즐기시게"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그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삶도 아니었다.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그 상황 자체가 무척이나 사악해서, 삶의 의지를 빼앗고 인간의 영혼을 죽이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1971년 출판된 이 연구보고서의 미국판 서문을 보면 당시 연구원들이 이렇게 요약한 대목이 나온다.
 "그들의 여가는 비극적인 선물이었음이 분명했다."

 

 몇 년 전 경영학 이론가 제임스 바커(James Barker)가 규모가 작은 제조업을 세심하게 들여다본 적이 있는데, 이 회사의 고용주는 자기 회사를 계층적인 관료주의에서 벗어나 '분산주의(holocracy)'에 따라 스스로 자신을 관리하는 팀들의 집합체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바커는 팀 구성원들이 경영자의 감시에서 벗어나게 됐을 때 과거 그들의 상사들이 했던 것보다 더욱 심하게 서로를 통제하는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다.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압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직원들은 스스로 계급을 만들고 학대를 가하기 시작해, 자신이 그 팀의 일원으로 보다 가치 있게 보이기 위한 열망으로 근무시간을 늘리고, 자신의 시간과 가족들의 시간을 희생했으며 건강까지 희생했다. 이에 대해 바커는 이렇게 썼다.
 "동료들의 압박과 합리적인 규칙이라는 대단히 강력한 조합은 새로운 강철 우리를 만들었는데, 그 우리 안에 수감된 노동자들은 그 창살을 거의 보지 못했다."

 

 사실 어떤 것들을 '좋은 일자리'로 분류하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견해에 따른다고 할 수 있지만, 2012년 경제정책연구센터 소속의 경제학자 존 슈미트와 재널 존스는 실질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좋은 일자리'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은 연간 보수가 3만 7,000달러(이 책이 나온 시점에서는 3만 8,900달러)이며 건강보험과 퇴직연금까지 모두 보장돼야 한다. 이 기준을 적용했을 때 전체 미국인 가운데 25퍼센트 이하만이 '좋은 일자리'를 갖고 있다. 그리고 미국 국민의 대략 절반은 '저보수-무복지-무연금'이라는 불운의 삼형제에게 농락당하고 있다. 슈미트와 존스는 자신들이 조사한 자료를 들여다보면서 미국 경제가 1979년 이후 좋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을 3분의 1 이상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 원인의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힘을 잃은 것이었다.

 

 노동통계국(US Bureau of Labor Statistics) 자료에 따르면 가장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일자리는 보수가 낮은 간호조무사, 노인요양사, 간병인, 보육 도우미, (패스트푸드점을 포함하는) 식당 식자재 준비 담당자, 잡역부 등이다. 소프트웨어 디자이너나 컴퓨터 시뮬레이터처럼 보수가 괜찮은 자리도 아직 늘고는 있지만 그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MIT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오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일자리의 가장 활발한 증가는 최상층 직업에서 일어나지 않고 급여 수준이 가장 낮은 3분의 1 구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제가 더 많은 엔지니어나 과학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믿고 싶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숙련된 기술을 훨씬 덜 요구하고 교육 수준이 별로 필요 없는 '서비스업' 노동에 훨씬 더 많은 수요가 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배우는 모든 것들은 결국 성공에 관한 것들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우리가 막상 성공했을 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쏟아 부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어요. 늘 적합한 사람만 만나야 하고, 늘 올바른 생각만 해야 하고, 늘 똑똑한 사람이 돼야 하고, 늘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고… 이런 것들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지 절대로 알 수가 없죠. 여기에서 벗어나게 됐을 때 내게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리더라고요. 그건 불안정한 삶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그냥 하면 되고, 내 나름대로 잘하면 되거든요. 물론 고백컨대 과거의 나로부터 벗어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짜릿했어요. 난생 처음으로 내 삶을 내가 통제한다는 느낌이 뭔지 알게 됐으니까요. 일이 아니라 내 자신이 됐어요."

 

 우리 모두 도서관 사서라든가 자료검색 전문가처럼 '지식'을 요하지만 '반복적'인 일들, 특히 한때는 높은 임금을 줘야 했던 일자리는 자동화의 위협을 받고 있지만, 의사결정 과정이 필요하고 매 업무마다 전혀 다르게 접근해야 하는 이른바 '창의적' 일자리는 가까운 미래에 여전히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내가 수십 명의 컴퓨터공학자, 엔지니어, 경제학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복잡하지 않은 일자리들만이 위협에 당면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복잡한 작업을 하는 일자리 역시 자동화될 위험성에 노출돼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안주하지 말라"는 조언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만약 여러분이 엄청난 열정으로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그에 따른 월급봉투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이는 무엇의 전조가 될까? 스티브 잡스의 생전 연설이나 인터뷰, 전기 등을 종합해보면 그가 가진 최고의 열정은 불교의 선(禪)을 향해 있었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그것을 자신의 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IT산업에 안주했다. 잡스는 우리가 파산이라는 문제에 직면하면서도 우리의 열정을 따르라고 조언했던 걸까? 아니라면, 우리의 진정한 열정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급여를 받는 일자리에 열정적으로 임하라는 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무엇이든 열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 세뇌라도 하라는 것이었을까?

 

 열정을 따르라는 조언은 편안하면서도 대담하게 들린다. 부정적 느낌은 전혀 없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 경구는 매우 무책임한 말이다. 이 조언은 마치 우리가 기존의 관습적인 것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는 동시에 그 관습적인 측면에서도 얼마든지 열정만 가지면 성공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언은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 열정이 미래의 부와 성공을 약속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라는 매우 잘못된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성공의 씨앗인 열정을 갖고 태어났다는 전제다. 그러나 열정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그가 믿고 있던 것과는 달리 현실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 열정이 고용주에게 좋은 것만큼은 확실하다.

 

 열정에 관한 사전적 정의는 강력하면서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감정이지, 우리가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보기를 원하는 무엇은 아니다. 열정적인 사회사업가는 어떤 고객을 지나치게 파고들어 그 고객에게 손해를 입히게 될지도 모르고, 열정적인 엔지니어는 앞서 나가려는 욕구 때문에 동료의 일을 방해할지도 모르며, 열정적인 경찰관은 어린 아이의 물총을 진짜 권총으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몰입을 해야 하는 일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열정만은 가슴의 문제로 아껴두는 것이 옳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자아실현까지는 아니지만 노동자들의 만족도는 매슬로 이론의 전성기 때 더 높았고 오늘날보다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한 연구조사 결과를 보면 다수의 미국인들이 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그때까지는 고용주들이 '의미 있는' 일자리를 제공해주지 않던 1950년대와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이어진 기간 동안 무려 92퍼센트에 달하는 피고용인들이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응답자들이 만족하고 있는 이유는 제각기 달랐다. 당시에는 매우 소수였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직업 만족도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도전적 업무'를 꼽았다. 노동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금전적 보상'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뒀다. 또한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 비해 동료들과의 관계, 부수적인 복지 혜택, 직업 안정성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도전적인 업무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이슨 에드워드 해링턴은 시카고 오헤어 공항 수하물 검색대에서 6년째 근무 중이었다. 몇 곳의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는 자유 기고자이기도 한 그는 처음에 이 직장이 임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취업했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일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이 일이 그냥 일이라면 훨씬 더 오래도록 일할 수 있을 것 같다고도 말했다. 세계 각지에서 오는 승객들을 보는 게 흥미롭고 그 승객들 중 일부도 자신에게 흥미를 보이곤 했다. 그랬던 그를 맥 빠지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의심의 기초 위에 세워진 감시 시스템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철저하게 추적되고 녹화되는데, 교통안전국에서는 모두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이런 논리다. 가령 승객 중 한 사람이 아이패드를 분실하면 그 즉시 그가 호출된다. 그러면 녹화 영상이 그에게 잘못이 없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의 말에 따르면 진짜 문제는 감독관들이 그 영상을 보면서 아주 사소한 잘못, 검을 씹는 것부터 화장실 가는 것까지 모든 것에서 꼬투리를 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렇게 항변했다.
 "우리를 믿어주고, 우리를 존중해준다면, 우리는 정말로 이 일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죠.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가능한 한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것뿐입니다. 다른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면, 근무 시간에 그놈의 카메라 범위 밖으로 나가 있으려는 최소한의 몸부림은 합니다."

 

 두 번째 그룹은 그들의 일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 병원을 깨끗하고 말쑥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와 함께 그들은 환자들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 침대 옆에 서성거리면서 환자들을 위로하고 심리적으로 도왔다. 그들은 병실을 청소할 때에도 침대 심장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뭔가 잘못됐다 싶으면 간호사들에게 알렸다. 그들은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고 나이든 환자들을 위로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청소부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자기 깜냥을 벗어나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 역시 치료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살피고 있는 환자들은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에이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병원이 이런 것들에 주목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실제로 병원에서도 주목을 하긴 했지만 주목한 방향은 완전히 달랐다. 두 번째 그룹의 청소부들은 크게 야단을 맞았고 청소 일이나 잘하라는 주의와 비아냥거림을 받았다. 에이미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아직까지도 그 청소부들이 환자의 상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가치를 평가할 지표가 없어요. 이런 걸 마련해야 합니다. 나는 여태껏 직원의 존엄성을 조직의 최종 가치로 여기는 회사를 본 적이 없어요."

 

 "내가 관찰한 복지혜택 대상자들은 대부분 중산층 사람들만큼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극빈자들의 고통은 일하기를 싫어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의 것, 그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훼손하고 있는 사회 시스템에서 오는 것이다. 에딘은 연구 대상자들에 대해 동정심과 애정을 갖고 있다. 그는 두 명의 입양한 딸들을 키우고 있는데 이들은 유색인으로 그들의 생물학적 어머니는 그들을 무척 사랑했지만 그들을 돌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했다. 이런저런 일을 겪었던 에딘은 쉽게 내려진 결론에 의문을 갖고 보다 깊은 진실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몇 년 동안이나 시카고, 보스턴, 찰스턴, 샌안토니오,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캠던, 뉴저지의 가장 가난한 동네들을 다니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사람들은 여러 면에서 각자 매우 달랐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좋은 일자리를 갖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딘은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에서 일자리는 곧 시민권입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진정한 시민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첨단기술의 혁신에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전자공학 분야를 보더라도 미국 내 고용 인력은 2002년 약 38만 5,000명에서 2016년 약 32만 4,000명으로 감소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STEM 분야의 졸업생 공급은 수요보다 2배, 심지어 3배 정도까지 큰 상황이며, 이로 인해 경험 있는 엔지니어들 중에서 많은 수가 가장 한계 상황에 있는 일자리를 찾거나 아예 과학기술 분야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다.
 "아주 제한된 특별한 분야를 제외한다면, 급격한 임금의 인상과 같은 인력 부족 현상을 암시하는 그 어떤 조짐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히라 박사는 그가 이전에 이민에 관한 회의에 참가했을 때의 일을 회상했다. 그는 그때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 법률가와 같이 겁에 질린 사람들이 자격 있는 엔지니어들이 부족한 현상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현실과 괴리된 상황이기도 했다.
 "바로 그때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5,000명의 직원들을 정리해고하던 시기입니다."
 이런 단절 현상은 컴퓨터 부문이나 공학 부문에서만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학, 화학, 생물학 등 모든 STEM 분야에서 발생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에 최고 과학자들의 특별위원회에서 경고한 바 있었다.
 "훈련 과정에서 나오는 과학자들의 숫자가 학교, 정부, 민간 부문의 모든 직책과 직위에서 흡수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그(가난한 자의 아들)는 한편생 내내 어떤 인공적이고 품위 있는 평안을 찾아 헤매지만, 그곳은 그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고 그는 이것을 위해 진정한 평온을 희생했던 것이다. 이런 기만은 인간이 하는 산업의 세계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계속되는 일이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팀 쿡이 애플이 외국에서 제조를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설명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미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종류의 직업 스킬을 갖추는 것을 중단해버렸습니다. 미국에서 금형 제작자들을 모두 모으면 아마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바로 이 방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중국에서는 여러 개의 축구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쿡이 근무하는 사무실이 굉장히 넓은가 보다.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그가 연설을 하던 그 시점에 미국에는 거의 50만 명에 육박하는 금형 제작자들이 있었다. 실제로 부족했던 것은 그들의 서비스에 대한 수요였다. 1998년 이래 금형을 제작하는 공장 중에서 40퍼센트가 사업을 접었으며 그로 인해 이 부문의 고용도 절반 이상 줄어들었는데, 그 부분적인 요인이 애플과 같은 회사들이 즐겨하는 아웃소싱이었다.

 

 특정 산업에서 어떤 수준의 보수를 제공하는 노동력에 대한 공급이 일시적으로 부족한 현상은 언제나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공적인 자원을 특정 직업군에 대한 '적시' 훈련에 모두 집어넣는 것은 아무리 잘 봐줘도 도박 이상의 것은 아니다.

 

 "거창한 게 절대로 아닙니다. 일자리는 그저 일자리일 뿐이죠. 내가 어떤 기술을 획득했는데 그 기술과 관련된 일자리가 없다면, 글쎄요, 그건 운이 없는 것입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이 바로 유연성인데, 평생 동안 계속 뭔가를 배우면서 자신들의 기회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계속 배우는 겁니다, 계속."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은 이런 글을 남겼다.
 "인간은(그리고 동물 역시) 서로 협동해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획득한 자들만이 투쟁에서 승리해왔다."
 핀란드인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던 상황에서 다윈의 충고를 가슴 깊이 새겼다. 인류평등주의를 바탕으로 그들은 선택된 소수가 아닌 점진적으로 절대 다수에게 혜택이 가는 수단들을 채택했다. 교육, 실업자 지원, 건강관리와 같은 공공 서비스 분야에 대한 투자를 과감히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정하고 사회간접자본과 연구개발에 집중했다. 다행히도 이 같은 노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결실을 맺게 됐다. 한때 고립된 채 에너지 부족에 시달리고, 언어적으로도 어려움을 겪던 이 낙후된 나라는 가장 생산적이고 혁신적인 국가로 탈바꿈했다.

 

 핀란드에서는 직업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법률에 근거해 정해진 급여 수준을 보장받는 계약을 맺는다. 의사, 교사, 잡역부, 가정부 등 직업군을 막론하고 비슷한 수준의 사회보장 혜택을 받으며, 정부와 사업체가 함께 관리하고 있다. 그 결과 핀란드에서는 '노동 빈곤층'이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물론 모든 핀란드인들이 중산층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직업을 가진 이상 자신의 재산, 의료보험, 교육 기회 등을 잃게 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핀란드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핀란드인들의 국민적 기질을 일컫는 용어 '시수(sisu)'는 '절망에 맞서는 인내'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은 갖가지 도전에 엄청난 끈기와 노력으로 단호하게 임한다. 미국의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일할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전히 믿고 있다. 세계 경제가 요구하는 핵심 사안이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핀란드에서 만난 경제학자들은 그런 주장을 일축한다. 사회 변화에 맞게 시민들의 변화를 유도하고 새로운 현실에 따르도록 설득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게 그들의 입장이다. 그들은 "사회 자체가 모든 시민의 욕구와 능력과 재능에 맞는 기회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나라도 번영을 기대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핀란드인들은 낮은 임금을 변명하고자 사회적 지위 상승을 약속하는 것 따위는 신뢰하지 않으며, 모든 일자리가 지위 향상으로 이어지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자체로 마지막이라고 여긴다. "올바른 하루 일에 대한 올바른 하루치 보수"라는 말이 핀란드에서는 진리로 통한다.
 (…)
 "핀란드인들은 자신이 식당에서 식사할 만큼의 여유가 있다면, 자신에게 서비스하는 식당 종업원 또한 같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핀란드는 특정 일자리 창출을 예측한다거나 그 일자리에 맞춰 개인을 준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보다는 국민들이 예측 불가능한 세계 경제 속에서 스스로 자신들이 갈 길을 그려나가는 데 필요한 지식, 도구, 자원을 얻도록 돕는다. 그가 계속 설명했다.
 "생물공학, 나노공학, IT와 같은 산업 하나하나를 분리해 고민하는 걸 그만두는 게 중요합니다. 만약 어떤 일을 디지털화할 수 있다고 한다면, 물론 실제로도 그러고 있지만, 어떤 분야든 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가 차원에서 특정 산업을 각각 전문화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요. 사람들 스스로 미래의 일을 찾아낼 수 있는 통찰력과 내적 자원을 가진 지식인이 되도록 돕는 게 오히려 효과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핀란드의 비밀'이란 무엇일까? 핀란드 교육위원회의 교육 담당 고문 레오 파킨이 한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비밀은 없어요. 우리가 학생들을 보살피는 이유는, 일찍부터 돕지 않으면 나중에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들어가게 된다는 경제적 계산에 따른 것입니다. 학생들은 훗날 핀란드 사회를 위해 일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간단한 논리죠. 특별히 국가 차원의 어떤 소명이 있어서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