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언니 / 원도 / 제철소
입교 첫날, 강당에 모인 우리는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지금껏 살아온 이야기를 짧게나마 나누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들어온 사람, 명문대를 다니다 온 사람, 중소기업을 전전하다 온 사람, 아기 엄마, 소녀 가장, 단편영화 감독, 국가대표 운동선수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여성들이 자기 이야기를 수줍게 그러나 거침없이 쏟아냈다. 한 명씩 발표를 마칠 때마다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성도 저렇게 다채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향도, 나이도 경력도, 성격도 모두 제각각인 여성들이 경찰 동기라는 이유 하나로 똘똘 뭉치는 모습은 얼마나 큰 울림을 주던지! '개인'이던 여성이 하나의 공통점으로 '우리'가 되자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p.11)
직장에 들어갔다. 나를 처음 본 중년 남성은 삼남매 중 막내라는 나에게 "그러면 너희 집은 딸도 있고 아들도 있는데, 부모가 왜 너를 낙태 안 했냐? 딸을 왜 또 낳아?"라며 혼자 고민에 빠졌다. 그의 직업은 장학사였다. 그런 사람이 장학사랍시고 학교를 돌아다니며 으스댈 걸 생각하니, 그로 인해 학교 대청소에 동원될 죄 없는 학생들을 떠올리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새로 발령받아 온 어느 상관은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요즘은 여경도 형사팀에 들어가던데, 남자들 자리 없어서 불쌍해 어떡해. 여자들이 왜 형사팀에 들어와?"라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내가 있던 경찰서는 창립 이래 형사팀에 여경을 발령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p.153)
왜 나는 너와 헤어지는가 / 켈리 마리아 코르더키 / 오아시스
내가 품은 나를 위한 꿈은 우리를 위한 꿈보다 크고, 시끄럽고, 강렬했다.
실제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연애를 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훨씬 젊었을 때 완벽한 이유가 있어야 이별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그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별의 이유는 충분하다고 누군가 얘기해줬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랬다면 엄청난 시간을 아꼈을 텐데 말이죠." 이 글에 1,00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미국의 예를 보면 1840년 이전까지는 학대를 이혼 사유로 인정하는 주는 거의 없었으며, 1840년이 되어서도 배우자 간 학대 여부는 법적인 해석에 좌우됐다. 이혼 사유로서의 '학대'에는 신체적 폭행이나 위협이 포함되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L. 그리스월드는 기록에 따르면 당시 미국과 영국의 많은 여성이 신체적 폭행이나 언어적 폭행, 때로는 둘 다 해당하는 강력한 증거를 제공했음에도 이혼 신청을 거부당했다고 말한다. 1836년 뉴햄프셔주 고등법원은 "드높고 과감한 남성적인 정신과 남편의 정당한 권위 앞에 항상 복종할 자세가 돼 있지 않다"는 근거로 어느 여성의 이혼 신청을 기각했다.
상대적인 안정감은 선택의 부담을 덜어준다. 나는 운 좋게도 삶의 중심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화권과 사회 계층에 속해 살고 있다. 이런 삶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얻기 힘든 운은 꿈을 이루는 데 쓸 수 있는 적절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한때는 중압감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것을 행운으로 받아들인다. 전적으로 내 뜻에 따라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 내게 주어진 이 자유는 대대로 우리 집안 여자들 사이에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권이다.
그들만의 채용 리그 / 로런 A. 리베라 / 지식의날개
능력의 해석은 가치중립적이 아니다. 이 해석들은 한 사회의 더 폭넓은 권력투쟁 속에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두개골의 크기와 관련된 움직임은 백인 유럽인들이 식민주의를 과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인종차별을 합법화하려던 시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사회학자인 제롬 카라벨(Jerome Karabel)의 연구에 따르면, 1920년대 이전에는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의 입학허가는 대부분 과목별 시험 결과를 토대로 이루어졌으며, 지성주의적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유태인들의 입학이 늘어나고 반유대주의가 심해지면서 능력의 정의도 옮겨갔다. 초점의 대상이었던 지적 기량은, 유태인 학생들을 배제하고 백인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들에게 우위를 제공하기 위해 지원자의 스포츠 과목, 비교과 활동 참여로 드러나는 개인의 '성격’과, '남자다움’에 대한 인식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성격과 다재다능함을 강조하는 현상은 오늘날의 대학 입학심사과정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능력은 항상 진화하면서 움직이는 과녁으로, 주어진 사회의 권력 관계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권력 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p.24-25)
자기가 열정을 느끼는 대상을 모르거나 진로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을 몰랐던 학생들 중 일부는 엘리트 기업 취업을 의사결정을 미룰 수 있는 방편의 하나로 보았다. 컨설턴트인 랜스는 투자은행, 경영 컨설팅, 로펌의 일자리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엘리트 졸업생들을 위한 피니싱 스쿨이 되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높은 보수와 볼러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 때문에 이들 일자리에 끌린다. 하지만 또한 일시적인 도피 기회라는 점에서도 끌린다. 이 일자리들은 어떤 진로를 탐색해서 거기에 헌신한다는 과업을 유예할 수 있게 해주며, 새로운 문을 열어 주는 디딤돌 역할을 한다. 일단 이들 일자리에서 일하다가 자신의 열정을 찾게 되면, 기업이나 비영리기관, 정치 분야에서 원하는 자리를 향해 나아갈 더 훌륭한 태세를 갖추게 된다. 투자은행과 컨설팅 분야에만 지원한 MBA 학생 엘렌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정말 열정을 가진 일을 찾는 동안 가능성은 열어 놓은 채로 일정한 기술을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 그리고 이력서에 이런 회사의 브랜드를 포함시키는 것이 저에게는 이롭게만 작용할 거라는 사실도 알고요." (p.100)
평가자들이 선호하는 서사의 유형에는 네 가지 중요한 사회・경제적인 차원이 있었다. 첫째, 후보자들이 손닿는 곳에 선택권을, 특히 매력적인 선택권들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모든 학생에게 심지어 엘리트 학교 출신의 후보자에게도 거의 사실이 아니다. 둘째, 관련 연구에 따르면 개인적인 열정과 지기실현을 위한 욕망에 근거해 직업과 학교를 선택하는 것은 경제적인 특권층이 삶의 선택을 인지하는 방식이다. 의사결정의 우선순위에서 외적이고 현실적인 고민들을 낮은 순위로 만들 수 있는 자유는 모든 개인이 누릴 수 없는 사치이기 때문이다. 셋째, 심리학 연구에서는 더 낮은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개인들은 그 경험이 다른 사람과 연결돼 있으며, 수많은 개별적인 선택의 산물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외부적인 요인들에 의해 형성된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개인의 선택, 자유, 독특함을 강조하는 서사 스타일은 중산층과 상류계층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개인이 직접 자신의 운명을 통제한다는 생각은 (사회・경제적 배경과 상관없이) 개인주의가 덜한 국가나 문화에 익숙한 후보자에게는 불이익을 줄 수 있는, 특히 미국적 시각에서 세계를 보는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평가를 받는 스토리들은 많은 의미에서, 문화적으로 평가자들과 공감하는 스토리였다. 개인주의, 개인의 운명, 통제라는 더 폭넓은 미국 중상위계층의 이상을 재확인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이런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자신의 스토리를 연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후보자들은 추진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보였으며 불이익을 당했다. (p.218-219)
사회학자인 샤머스 칸(Shamus Khan)은 세인트 폴에 있는 특권층의 기숙학교에 대한 연구에서 대화라는 환경, 특히 높고 낮은 지위의 개인들이 참여한 대화에서, 편안하게 보이면서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능력은 현대적인 경제 엘리트의 문화적 특징임을 지적했다. 불평등에 관심이 있던 칸과 다른 사회학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편안한 느낌을 조성할 수 있는 능력이 더 부유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개인들의 특징이며, 이는 더 폭넓은 사회적 네트워크의 개발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조직 위계질서 전반에 있어서 여러 직위에 있는 사람들과 긍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제시했다. (p.242)
엘리트 전문서비스 회사들은 높은 보수와 좋은 일자리로 향하는 길목에서 게이트키퍼 역할을 함으로써 특권의 재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론상으로 이 회사들의 채용 관행은 계층 중립적이다. 즉, 엘리트 고용주들은 단순히 '최고의 두뇌'를 채용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현실에서 이 회사들이 취업 지원자의 가치를 평가하고 채용 결정을 내리는 방식은 엘리트 일자리를 향한 경쟁의 장을 사회・경제적으로 혜택받은 가정 출신의 학생들에게 유리하도록 기울인다. 이 회사들은 혜택을 덜 받은 배경 출신의 성과가 높은 학생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재능을 규정하고, 지원자들을 심사하고 채용 결정을 내리는 데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상관관계가 있는 평가 메트릭스를 활용한다. 이들의 채용방식은 결국 미국에서 경제 엘리트가 되기 위한 관문 역할을 하며, 최고의 보수를 받는 신입 단계의 일자리로부터 사회・경제적으로 덜 혜택받은 가정 출신의 똑똑하고 추진력이 있으며 사회성 기술을 가진 학생들을 체계적으로 제외하게 된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 회사들은 사회적 출발점으로 사회적 종착점을 예측하게 만드는 계층 시스템의 견고화에 기여한다. (p.359)
비록 가상의 묘사이긴 하지만 영의 능력주의와 현재 우리에게 있는 재능의 귀족계층은 어느 정도는 놀랄 만큼 닮아 있다. 인생 초기의 경험과 부모의 자원은 나중에 경제적 기회를 얻기 위한 결정적인 동인이 된다. 개인의 능력으로 치부할 수 없는 차이인 부유한 가정과 가난한 가정 아이들 사이의 교육적 불평등은 유치원 입학 이전에 나타나며, 그들의 삶 전체에 걸쳐 교육과 경제의 궤적을 형성하는 데 지속적인 역할을 한다. 이 메트릭스는 표면상으로는 계층 중립적이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듯 보이지만 현실에서 이 메트릭스에 숙달되려면 부유하고, 관심이 많으며, 정보가 있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한 부대의 부모가 필요하다. (p.371-372)
뉴스 다이어트 / 롤프 도벨리 / 갤리온
게다가 매체의 주목도와 뉴스의 중대성은 상관관계가 없다. 즉 보도가 요란한 것과 중요도는 비례하지 않으며 우리의 삶과는 더 무관하다. 수년 동안 경험한 끝에 나는 다음과 같이 확신하게 되었다. 뉴스가 보도하지 않는 내용이 오히려 더 중대하며 내 삶과 유관한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중요도'와 '관련성'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다. 어떤 뉴스가 나에게 중요하며 내 삶과 밀접한지는 다른 사람이 정의할 수 없다. 국가나 교황, 상사나 심리치료사가 대신 정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매체의 입장에선 대중의 관심을 확실히 끌 수 있는 것은 모두 중요하다. 뉴스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 중심에 바로 이 같은 속임수가 자리하고 있다. 매체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우리와 관련이 없는 뉴스들을 마치 굉장히 중대한 것인 양 포장하여 판매한다. 그로 인해 현대인들은 '중대성 대 새로움' 사이에서 근본적인 갈등을 겪는다.
이는 내가 김나지움에 다니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당시 독일 역사 교과서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원인을 3가지로 꼽았다. (둘도 일곱도 아닌, 딱 3가지 원인만을 소개했다.) 그 3가지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 못 해도 상관없다. 역사책에 소개된 원인은 혁명이 일어난 실제 원인의 단편적인 사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원인을 모두 명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프랑스혁명이 왜 일어났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왜 하필 1789년에 벌어졌는지를 정확히 알기란 더욱 어렵다.
쿠웨이트 출신의 소녀 나이라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걸프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90년 10월, 당시 15세였던 나이라는 미국 의회 인권위원회가 주관한 청문회 자리에 섰다. 쿠웨이트의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다는 그녀는, 이라크 군인들이 병원에 난입해 수많은 신생아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거의 모든 매체가 그녀의 목격담을 보도했다. 미국의 여론은 무섭게 끓어올랐다. 이 목격담은 이라크 공격에 부정적이었던 여론을 돌아서게 했다. 그 결과 미 의회는 과반 이상의 찬성으로 이라크 공격을 승인했다.
하지만 당시 모든 매체가 믿고 보도했던 나이라의 증언은 훗날 철저하게 계획된 조작임이 밝혀졌다. 쿠웨이트 정부가 주도한 전쟁 선전의 일환이었으며, 나이라는 주미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었다. 이 선전은 세계적인 홍보 회사가 오랫동안 기획하고 진행한 일이었다.
매체 소비를 통한 관심과 참여는 일종의 거대한 자기기만이 아닐까? 진정한 동참은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타게스샤우>를 보며 지진의 폐허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에 도취되어 봤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저 언짢기만 하다. 만약 당신이 지진 피해자와 전쟁 난민, 그리고 기근에 시달리는 이들의 상황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면 후원을 하자. 주의도 아니고 관심도 아니다. 무슨 활동이나 기도도 아니다. 그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건 돈이다.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 뉴스 사이트들을 뒤적이며 지진 피해 상황을 계속 들여다보면, 당신의 관심은 지진 피해자들이 아니라 해당 뉴스 플랫폼의 운영자에게 가닿게 된다. 피해자들은 당신이 보내는 관심을 느끼지 못하지만, 플랫폼 운영자들은 확실하게 실감한다. 그것도 이중적 측면에서 느낀다. 첫 번째로, 당신의 관심이 광고주들에게 지속적으로 팔리면 플랫폼 운영자들이 돈을 번다. 당신이 관심을 가질수록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에, 운영자들은 당신의 관심을 몸소 느낄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뉴스 사이트에 접속하면 성향, 성격과 같은 당신에 관한 사소한 데이터들이 쌓이게 된다. 이렇게 축적된 데이터는 광고에 이용되므로 머지않아 당신은 광고 폭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당신의 주의와 관심은 지진 피해자들이 아니라 뉴스 매체들을 도와준다.
매년 한 달이라는 시간을 통째로 선물받고 싶다면 뉴스를 포기하자. 그러면 당신의 가족과 취미, 그리고 경력을 위한 시간이 1년에 무려 한 달이나 주어진다. 뉴스 끊기처럼 그렇게 많은 시간을 얻을 수 있는 시간 관리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버핏의 인생 모토는 다음과 같다. "자신의 능력 범위를 알고 그 안에 머물러라. 이 범위의 크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범위의 경계선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IBM의 창업자 토머스 왓슨은 이 명제를 몸소 입증한 살아 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왓슨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특정 분야에서는 뛰어나다. 그리고 나는 이 분야에만 시종일관 머물 것이다."
현재 당신이 몸담고 있는 일터에서 능력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면 스스로 엄격하게 경계를 그려야 한다. 본인의 능력 범위를 가혹하리만큼 철저하게 정해 놓으면 물질적 결실뿐 아니라 다른 여러 유익한 결과가 돌아온다.
인간은 새로 접한 모든 정보를 지금까지 고수해 온 관점에 부합하도록 해석하는 일의 대가다. 더 많은 뉴스를 소비할수록 당신은 자신의 견해를 확증해주는 정보를 더 자주 마주치게 된다. 당신의 의견이 틀렸더라도 당신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정보는 뉴스를 통해 쉽게 얻을 수 있다. 오늘날 뉴스는 단순한 '시추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시추기는 더 이상 잘못된 견해에 구멍을 내지 않는다. (예전에는 옳지 않은 의견을 무력화하는 뉴스가 생산되기도 했다.) 대신 그 견해를 공고히 할 뿐이다.
날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임무를 완수한 이들 덕분에 무수한 사건, 사고가 예방되고 있다. 기술자들이 튼튼하게 건설한 덕분에 고속도로 다리가 무너지지 않으며, 조종사들은 안전하게 이착륙을 한다. 이 모든 예방 조치가 매우 현명하며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지만, 기자의 눈에도 소비자의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같은 예방 행위에도 노벨상을 줄 것을 제안하고 싶다.
"다른 이들에 대해 의견을 만들어내느라 너의 시간을 허비하지도, 영혼을 불안에 빠트리지도 말라. 너의 능력 밖에 있는 사물에 대해선 선이다 악이다 판단하지 말라."
상자 밖에 있는 사람 / 아빈저연구소 / 위즈덤아카데미
"이런 사실 자체가 놀랍지 않습니까? 내가 상자 안에 있을 때, 나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길 은연중에 바라게 됩니다. 그들을 비난할 수 있고 내 자신이 얄팍한 자기정당화의 느낌을 갖기 위해서요. 나는 실제로 문젯거리를 필요로 합니다." (p.165)
"그렇군요. 이 경우에서처럼, 상자 밖에서 존재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나와 동등한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본다는 것이 내가 갑자기 감당하지 못할 버거운 의무를 지는 것을 의미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운전을 하거나, 쇼핑을 하거나,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그 밖에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들을 인간으로 보고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상자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나와 같지 않은 사람, 종교, 문화 등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것과 가능성에 동기를 부여하며, 훨씬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인 책임'이 만족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만족감이 커질수록 다른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역량과 당신의 그릇이 커질 것입니다." (p.244)
- 완벽해지려고 노력하지 말고, 지금보다 더 좋아지려고 노력하라.
- 아직 학습내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상자'나 기타 단어들을 사용하지 마라. 다만 당신 자신의 삶에서 그 원리들을 적용하라.
- 다른 사람들의 상자를 찾지 말고, 먼저 당신 자신의 상자를 찾아라.
- 다른 사람들이 상자 안에 있다고 힐난하지 말고, 당신이 상자 밖에 있도록 노력하라.
- 당신이 상자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자신에 대해 포기하지 마라. 계속 노력하라.
- 당신이 상자 안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마라. 사과하고, 계속해서 전진하라. 미래에 다른 사람에게 더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라.
-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마라. 그들을 돕기 위해 당신이 올바르게 행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춰라.
-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돕고 있는지에 대해 염려하지 마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하라. (p.276-277)
밀레니얼은 왜 가난한가 / 헬렌 레이저 / 아날로그
여러분은 인종차별주의와 트럼프주의를 계속 경멸하고 온라인에서 해시태그를 달아 경고의 글을 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그들의 물질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만큼 효과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20세기는 미국의 백인 중산층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실업률은 낮았고 백인들의 생활수준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따라서 이 시기 흑인이 겪는 법적, 문화적 억압에 약간이나마 관심을 가진 부유한 백인은 좀 더 관대하고 합리적인 경향이 있었다. 일자리가 있고, 충분한 먹거리가 있고, 희망으로 가득한 미래를 가진 자녀가 있으며,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지 직접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를 모두가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법이다.
흑인 노동자 계층이 오랫동안 엄연한 삶의 현실로 받아들여 온 좌절을 이제 백인 노동자 계층도 느끼고 있다. 지도자들은 여전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전혀 다르다. 물질(먹고 살 만큼 버는 것조차 못하는)과 관념(꿈을 크게 가지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정치인들) 사이의 간극에서 백인 노동자 계층은 자신들이 실패자로 불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구조적인 차원에서 백인 노동자 계층은 그들이 흑인을 향해 '게으르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백인들이 흑인들도 노력한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지금의 백인들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
엄청난 빚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당면한 사람들에게 '미국의 위대함'이라는 제대로 규정되지도 않은 개념이 먹힐 거라고 생각한 것, 바로 이것이 민주당의 실수였다. 미셸 오바마와 그 동료들은 막연한 동지애에 호소하는 것으로 충분히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노동자로서 우리 물질적 삶의 조직 방식, 예컨대 우리가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자고, 노동을 통해 얼마나 즐거움을 얻는지가 우리의 삶과 그에 대한 사고방식을 조직한다. 즉 물질적 조건이 노동자의 사상과 삶의 대부분을 구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