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스의 기준 / 켄 코시엔다 / 청림출판
리처드의 브라우저 데모를 본 뒤로, 나는 오랫동안 그의 접근 방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 데모를 만들 때마다 이용자를 생각했고, 어떤 기능을 포함시킬지 구체적인 판단을 내렸다. 두꺼운 가상의 펜을 들고 핵심 세부 사항을 중심으로 한 개념의 고리를 그렸다. 고리 안쪽에는 영화에 등장하는 가로등 같은 핵심 요소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나중에 수정해도 괜찮은 덜 중요한 세부 사항은 고리 외부에 놔두고, 최소한의 관심만 기울였다. 모자 매장 내부 인테리어 같은 요소를 가급적 데모에서 제외시켰다. 경계선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다. 어떤 요소는 두꺼운 가상의 선 위에 있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장면을 연출하고 관객이 의심을 거두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p.78-79)
이 사례는 커누스 같은 경험 많은 프로그래머가 왜 최적화에 관해 경고했는지 말해준다. “왕복 횟수를 최대한 줄이세요”라는 추가 명령은 버그 가능성을 높이고, 코드 수정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애매모호함을 가중시킨다. 우리가 그 단계 뒤에 있는 핵심 논리를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해, 최종적으로 더 빨라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추가된 ‘최적화’ 명령은 도움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커누스는 시간의 97퍼센트가 그렇게 흘러간다고 지적했다. (p.120)
매니저를 맡으면서, 내 일은 날마다 소프트웨어를 작성하는 것에서 팀을 걱정하는 것으로 넘어갔다. 온종일 회의의 연속이었다. 업무와 관련해 다른 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런 일은 예상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수완을 필요로 했다. 그때까지 나는 코드를 작성하는 일이 내게 생산적이고 행복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매니저가 되면서 내 프로그래밍 기술이 갑자기 별로 중요하지 않게 돼버렸다. 게다가 나는 관리자로 성공하려면 뭐가 필요한지 잘 알지 못했다. 잘못된 이유로 그 자리를 원했던 것이다. 사파리 팀 매니저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다른 팀 매니저 자리를 맡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p.160)
애플 사람들은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업무를 처리한다. 데모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반응을 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가지 데모에 대한 직접적인 피드백은 더 개선된 데모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데모는 창조적 결정을 위한 촉매제다. 생산적인 논의를 빨리 시작할수록(누르기 쉬운 큰 키를 택해야 할지, 아니면 소프트웨어가 뒷받침해주는 작은 키를 택해야 할지) 결정을 가다듬고, 필요하면 한발 물러서고, 가능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데모는 우리가 개념적인 계곡의 바닥에서 뛰어올라 노력의 가치를 더욱 높일 수 있도록 발판 역할을 해준다. 끊임없이 데모를 만들어내는 노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를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전환하는 과정의 핵심이다.
물론 데모 제작은 힘들다. 데모를 만들기 위해서는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데 따른 불안감을 이겨내야 한다. 애플 사람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고 적극적인 비판을 마다 않는 동료들 앞에 자신의 아이디어와 데모를 내놔야 한다. 특히 많은 데모(사실은 거의 전부)가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게 된다는 사실은 심리적 장벽을 더욱 높인다. (p.186)
첨단 IT 분야에서 흔히 A/B 테스트라고 하는 이런 형태의 실험에서 그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구글의 파란색 색조 테스트 최종 결과는 41가지 선택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A/B 테스트는 클릭하기 가장 좋은 파란색을 택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일지 모르나, 최고와 최악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더 중요한 사실은 모든 선택지를 시험하는 데 들어가는 기회비용이 사람들이 두 배, 세 배, 혹은 열 배 더 좋아할 수 있는 디자인을 개발 팀 모두가 꿈꾸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앗아 간다는 것이다. A/B 테스트는 이용자가 링크를 더 자주 클릭하도록 만들 색상을 선택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즐거움을 주고 통합된 전체라는 느낌을 전달하는 제품 개발에는 기여하지 못한다. 어떤 정제된 선호 반응도, 선택의 균형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인식도 없다. 다시 말해, 구글은 디자인 과정에서 취향을 배제했다.
애플 사람들은 절대 그런 방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그 어떤 아이폰 소프트웨어에 대해서도 A/B 테스트를 실시하지 않았다. 색상을 골라야 할 경우, 그냥 하나를 택했다. 그 과정에서 훌륭한 취향을 활용했다. 그리고 색상 인식에서 시각적 어려움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소프트웨어를 접근 가능하게 만들지에 대한 지식을 활용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언제나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대해 신속하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언제나 이전 의사 결정을 기꺼이 다시 한 번 고려하고자 했다. 더욱 중요한 질문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꾸준히 발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뒀다. (p.250-251)
이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다 / 엘리자베스 워런 / 글항아리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지출은 교육에 대한 투자와 비슷했다. 곧, 미래의 가능성을 내다본 투자였다. 누가 다음번에 좋은 사업 구상을 떠올릴지, 새로운 발명이 어디서 등장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성공적인 사업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는 혁신을 몰고 올 사람들에게 사회기반시설을 반드시 제공해야만 했다. 사업체를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전기가, 상품을 시장으로 운송하기 위해서는 도로와 다리가, 그리고 근로자들이 매일 출퇴근을 하기 위해서는 대중교통 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일이라고 암묵적으로 합의한 셈이었다. 도로와 발전소를 건설하는 일이라면 누구나 힘을 보태려 할 테고 그 뒤로 사업이 성장하면 투자자들에게는 이윤이, 노동자들에게는 더 나은 일자리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업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하는 것은 언제나 시민 모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p.171-172)
약간의 조사를 한 뒤 나는 럿거스 대학으로 향했다. 럿거스는 학기당 학비가 460달러인 공립 법대였다. 난관은 통학 방법이었다. 정지 신호등과 어린이 보호구역이 여기저기 있고 교통이 혼잡한 도시들을 이리저리 누비며 장시간 운전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가을학기가 시작하기 두 달 전 주간 고속도로의 새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 도로 덕분에 나는 뉴저지의 로커웨이에 있는 우리 집에서 뉴어크의 법대까지 단 25분 만에 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만약 고속도로와 사랑에 빠질 수만 있다면 나는 그 고속도로를 사랑했을 것이다. (p.189-190)
로비스트를 고용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자녀를 최고의 사립 유치원과 최고급 사립 고등학교에 보낼 능력이 되는 이와 동일한 인물이다. 그들 중 일부는 6학년 반 교실에 42명의 아이가 있어도, 아이들 화장실의 타일이 벽에서 떨어져나가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그런 상황은 자기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결코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수백만 명의 아이에게 돌아갈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 해도 자기 자녀들에게는 수많은 기회가 보장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온갖 기회 말이다.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자기 자녀가 부딪히는 실질적인 문제가 소수의 사람에게는 자기와 동떨어진 강 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p.205)
사실 나는 억만장자 및 CEO들과 나눈 시간이 개인의 세계관을 실제로 바꾼다고 믿는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자. 하원의원 후보는 제약 회사들이 17년 동안 지속적인 매출 증대를 이룰 것인지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과 10만 달러의 간염 치료비를 낼 능력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쪽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까? 상원의원은 월마트 투자자와 월마트 직원들 가운데 누구와 이야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까? 정치적 우선순위는 논의할 필요가 있는 문제들이 무엇인지 지각하면서 설정되고 돈이야말로 지각을 형성시키는 강력한 요인이다. (p.275)
물론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올리는 것과 아무 상관없는 좋은 목적에 돈을 지불하는 부자들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부유한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갖기 위해 돈을 쓴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장 좁은 의미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을 때 그들은 돈을 이용해 정부로부터 호의를 산다. 하지만 정부의 호의를 살 때 그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다. 그리고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이 (혹은 부유한 기업들이) 충분한 호의를 사면 경제와 정치 시스템 전체가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p.340)
장제우의 세금 수업 / 장제우 / 사이드웨이
우수한 복지국가는 누구나 가진 이기심을 이용해 이기심을 제어하고, 누구나 가진 이타심의 발현이 이기적 물욕의 충족으로 연결되도록 사회구조가 조직돼 있다. 이와 같은 사회의 작동 원리는 약화된 연대의식과 심화된 격차로 멍들고 찢긴 한국에서 필히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p.10)
세금과 복지의 선진국이란, 사회구조적으로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서로 긴밀한 도움을 주고받는 연대적 관계로 맺어지는 사회를 의미한다. 물론 이런 사회라고 해서 사악한 행동과 이기적 인간 군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연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에선 구성원 대다수가 상호 도움을 주고받는 사회구조에 편입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세금과 복지를 발전시킨 나라에서는 '선의 평범성'이 사회구조에 따라 자동적으로 실현된다. 한 사회에 속한 개개인의 취향이나 가치관과는 맞지 않더라도 사회구조가 그러하기에 따라야 할 삶의 규율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p.43)
복지가 값진 것은 무상이라서가 아니라 세금이라는 무거운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p.182)
사향고양이의 눈물을 마시다 / 이형주 / 책공장더불어
영상에 등장하는 곳은 에르메스 소유의 가죽공장에 악어가죽을 납품하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와 미국 텍사스 주의 악어농장이다. 좁고 더러운 콘크리트 수조의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빼곡히 채워진 악어는 농장동물의 공장식 축산 장면과 흡사하다. 짐바브웨 농장 관리인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1년에 4만 3,000마리의 악어가죽을 벗기는데, 버킨백 1개를 만드는 데 악어 3마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p.71-72)
인구 증가로 인한 각종 개발과 인간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축산 농장의 확대가 야생동물의 서식지까지 침범해 가고 있다. 따라서 서식지와 먹이가 줄어든 야생동물은 농장까지 찾아와서 농장동물과 접촉하는 기회가 잦아졌다. 또한 야생동물을 가까이에서 보고 즐기고 싶어 하는 문화는 인간과 야생동물 간의 거리를 좁혔다.
이처럼 점점 비정상화되는 생태계에서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전염병이 창궐한 후에야 애꿎은 동물을 가두거나 구경도 못해 본 고기를 먹지 말라고 광고할 것이 아니라 인수공통전염병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그에 따른 철저한 방역과 관리 대책을 상시적으로 세워야 한다. (p.119)
중국, 베트남, 라오스의 곰 농장을 방문해 곰 쓸개즙을 구입하는 소비자는 대부분 한국인 관광객이다. 국제동물단체 아시아동물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해마다 약 30만 명의 한국인 관광객이 중국 옌볜(연변) 지역을 방문하고, 그중 30퍼센트가 곰 농장을 방문한다. 2014년 베트남 하롱베이에서는 곰 농장을 운영하며 한국인 관광객 앞에서 반달가슴곰의 쓸개즙을 직접 뽑아 판매한 한국인 농장주가 적발되어 처벌받기도 했다. (p.133)
도살된 하프물범은 다 어디로 갈까? 창피하게도 우리나라와 중국이 거의 유일한 무역 상대국이다. 우리나라는 모피를 만들고 남은 기름과 고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다.
한국으로 수입된 물범기름은 건강보조제 오메가3의 원료로 쓰인다. 어디에서나 캐나다 하프물범으로 만들었다고 광고하는 오메가3 제품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오메가3는 혈관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런 성분은 호두, 아몬드 같은 견과류와 들기름 등 우리가 흔히 먹는 식품에도 포함되어 있다. 아마씨기름은 중금속 위험이 없고 식물성 오메가3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 식재료뿐 아니라 건강보조제의 원료로도 쓰인다. (p.180)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 / 아즈마 히로키 / 마티
인류의 역사를 가만히 보듬어 안으려 할 때 투어리즘은 매우 의미 있는 방법론이다. 한 공간에서 생긴 슬픔은 그곳에 가야만 무게와 참담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외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해 슬픔은 공유되고 지역 사람들 또한 치유의 힘을 얻을 수 있다. 동시에 지역의 슬픔은 투어리스트를 통해 외부에 전파된다. 이 결과로서 시대와 지역을 넘어 보편적인 슬픔의 존재가 인지되고, 지역은 서로 '구조적인 연결 고리'를 얻게 되기도 한다. (p.99)
일련의 사고로 인한 인적 피해는 얼마나 될까. 국제원자력기구(IAEA), 세계보건기구(WHO) 등 유엔 관련 여덟 개 단체와 우크라이나・벨라루스・러시아 정부의 전문가로 구성된 '체르노빌 포럼'이 2005년에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사고 처리에 참여한 군인과 소방관 중 작업으로 숨진 사람은 2,200명이며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방사선 피폭 사망자 수는 앞으로 발생할 암 사망자를 포함해 전부 4,000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방사선 피폭에 의한 암 사망자 수 데이터는 여러 설이 난무해 약 3만 명이라는 예측에서부터 4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설까지 다양하다. 체르노빌 사고의 역학 평가는 아직도 정립되지 않은 실정이다. (p.147)
1954년 원폭 돔을 상징으로 삼아 설계한 단게 겐조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이 완공된 뒤, 히로시마에는 '볼 때마다 원폭 투하의 참사를 떠올리게 되니 없애달라'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보존할지 없앨지 방침을 정하지 못해 오랫동안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해오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자 노화로 인한 붕괴 위험성이 제기됐다. 한때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원폭 돔은 한 소녀가 남긴 일기 때문에 보존하자는 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다. 한 살 때 피폭됐고 15년 후 백혈병으로 사망한 가지야마 히로코가 남긴 일기에는 "저 보기만 해도 괴롭고 아픈 산업장려관(투하 당시의 원폭 돔 시설 명칭)만이 오래오래 남아 무시무시한 원폭의 고통을 후세에게 전해주겠지."라고 적혀 있었다. 이 일기에 마음이 움직인 평화운동가 가와모토 이치로가 중심이 되어 보존 운동이 시작되었고 1966년에 히로시마의회는 원폭 돔을 영구보존하기로 결의했다. (p.160)
왜 증강현실로는 불충분하며 실제 현실이어야 하냐면 심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증강현실에서도 사고 당시의 상황은 정확히 재현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정보는 정보로서만 존재해서는 안 되며 '알고 싶다!', '만져보고 싶다!'라는 욕망을 환기시켜야 합니다. 이는 실제 현실에 견줄 게 못 되죠. 실제를 눈으로 직접 보면 정보뿐만 아니라 감정이 더해져 지금까지 분명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해석이 바뀌고 관계가 바뀝니다. 그런 체험이 중요한 것이죠. (p.232)
넷플릭스 세계화의 비밀 / 라몬 로바토 / 유엑스리뷰
소프트 인프라는 더욱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 고려할 것을 요한다. 넷플릭스가 현금이나 직불카드와 같은 대안 결제 수단보다 신용카드 결제 시스템에 의존하는 것이 특정 고객 군을 배제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모바일 기기나 셋톱박스에서 이용하는 운영 시스템의 종류가 넷플릭스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처럼 넷플릭스의 글로벌 진출을 이해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것은 인프라 연결 문제(전력공급, 대역폭 속도 등)만이 아니다. 결제, 가격 책정, 언어의 가용성을 비롯한 기타 여러 문제들도 본질은 인프라에 속해 있을 수 있으며, 파이프와 케이블과 마찬가지로 인프라의 관점에서 이론화될 수 있다. (p.101-102)
인터넷에 대한 정기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접근성을 가진 사람들은 정보의 홍수(대부분 지나치게 과도하거나 관련이 없거나 불필요한 정보)에 압도되는 반면, 인터넷 접속이 제한된 사람들은 인터넷이 제공하는 기회, 인터넷 접속으로 인한 시간과 돈의 절약, 순전한 편리성, 오락적 가치, 버스 시간표부터 요리법, 세계 뉴스 등에 관련된 데이터를 얻는 능력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
전화선의 위치와 도달 거리, 연결 속도와 신뢰성, 특정 위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의 다양성, 가정 내 인터넷과 모바일 인터넷의 사용자 비율 및 차이 및 사이버 카페와 공공 와이파이의 사용, 그리고 통신 인프라와 도시화 사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공간에 관한 문제들이다.
디지털 격차에 관한 담론의 중심에는 접근에 관한 사회 공간적 질문들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누가 온라인이고 누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췄지만 오늘날 디지털 격차에 관한 담론은 접속 장애물들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고 계층, 나이, 성별, 지역, 교육 등의 변수에 의해 더 심화되는지에 대한 우려를 포함한다.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에서 접속에 대한 정의를 수정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는 뜻이다. 그 결과, 디지털의 포함과 배제에 관한 오늘날의 담론에서는 통신 네트워크의 지리적 범위뿐만 아니라 연결의 속도와 신뢰성, 인터넷 서비스 제공사(ISP)의 가격 책정, 모바일 데이터 허용, 인터페이스 디자인, 소비자 보호법 및 공공 와이파이 정책과 같은 이슈를 주로 다루고 있다. (p.104-105)
이러한 변수를 고려했을 때 프리미엄 스트리밍 서비스의 확장은 최소한 중기적으로는, 도시의 중산층을 훨씬 넘어서는 범위로 확대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리미엄 비디오 서비스는 이메일처럼 모바일 우선이나 모바일 전용, 그리고 저대역폭 사용자에게 맞는 유연성과 용량을 가진 기본적인 인터넷 프로토콜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용카드 결제 필요성은 구독 서비스의 확산을 방해하기도 한다. 즉 스트리밍 사용자의 규모와 범위를 결정하는 데에는 공간적 논리뿐만 아니라 경제적 논리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106)
ISP 속도 지수는 현재 넷플릭스 구독자뿐만 아니라 인터넷 속도에 관한 비교 데이터를 찾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투명해 보이는 이 ISP 속도 지수는 인터넷 인프라에 대한 정밀 조사, 지지 및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ISP―그리고 그러한 모든 국가의 인터넷 인프라―를 거론해 망신을 주려는 넷플릭스의 더 큰 전략을 감추고 있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원칙들을 지지하겠지만 이것이 넷플릭스의 상업적 계산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장 성장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장기적인 이익에 대한 디지털 서비스 제공자들의 인식이 이러한 캠페인의 원동력이다. (p.109)
ISP와 통신사들은 그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수요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화질 동영상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초고속 인터넷과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에 대한 수요 증가로 상업적인 혜택을 볼 수는 있다). 우리가 이 회사들의 동기를 신뢰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인프라에 대한 실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초고속 인터넷은 현대 생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라기보다는 투쟁과 권리를 필요로 하는 희소 자원이자 불공평하게 분배된 자원이다. (p.112-113)
우리는 인터넷을 평등한 라우팅 방식을 통해 모든 장소에 똑같이 접속할 수 있는 거미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프라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타당하지 않다. 피어링이나 상호 접속 비용, CDN 등과 같은 복잡한 네트워크 엔지니어링 전략은 인터넷 인프라가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특정 트래픽을 더 빠르게 처리하고 다른 트래픽보다 더 빠르게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실제로, CDN의 증가는 규제적 문제를 야기하며 우리는 이제야 이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망 중립성 논쟁은 특정 종류의 트래픽에 고속 차선을 제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특정 용도나 특정 사용자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CDN과 기타 네트워크 배치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침묵을 지키고 있다. (p.122)
각각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는 소규모의 번역가 그룹이 필요하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토크쇼인 첼시의 한 시즌을 번역하는 데에만 200명의 번역가가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넷플릭스는 이 모든 업무를 사내에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대규모 프리랜서 네트워크를 이용하거나 미국, 폴란드, 스페인, 호주, 멕시코, 영국, 스웨덴 기업들과 하도급 계약을 맺기도 한다. 이들 기업은 GILT(세계화, 국제화, 현지화, 번역)의 일부를 형성한다. 1990년대 이후로 성장세를 보이는 GILT는 비교적 새로운 산업으로, 현재 전 세계에서 수천 명의 현지화 전문가를 고용하고 있으며 이들은 국제 사용자들을 기반으로 하는 웹사이트 및 애플리케이션의 효율적인 구축을 위한 업무를 담당한다. 이들은 문화적 마찰을 줄이고 넷플릭스와 같은 서비스를 전 세계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디지털 미디어 세계화의 숨은 주역이다. (p.145)
국제적인 가격 책정 과정은 글로벌 미디어 경제가 가진 가장 매력적인 측면 중 하나다. 이 기술적 프로세스에 고객과 돈과 가치에 내재되어 있는 모든 아이디어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초국가적으로 운영되는 디지털 미디어 서비스는 차익거래의 가능성을 차단하며 균일한 글로벌 가격을 제시할 수도 있고, 각 시장에서 최대의 가치를 끌어낼 수 있도록 현지 사용자의 의중과 지불 능력에 맞춰 실정에 맞는 가격을 설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선택 사이에서 넷플릭스와 같은 대부분의 다국적 구독 서비스는 전자를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의 결과로 인도의 최상위 부유층을 제외한 일반 국민들은 넷플릭스를 이용하기 어렵다. 이러한 가격 전략은 현지의 경쟁사들보다 더 높게 가격을 책정하는 결과로 이어지며, 사용자들은 불법 다운로드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어진다. 이는 넷플릭스가 프리미엄 서비스로 남기 위해 기꺼이 치러야 할 대가일지도 모른다. (p.153-154)
EU에서 문화 정책의 이슈에 대한 규제적 성향이 가장 강한 나라는 프랑스다. 프랑스에는 영어권 문화의 영향에서 국가의 관습과 언어와 미디어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 존재한다. EU 콘텐츠의 쿼터를 더 높은 수준으로 올리기로 한 프랑스는 현재 방송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의 40%를 자국 콘텐츠에, 주문형 콘텐츠의 60% 이상을 유럽 콘텐츠에 할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무료 TV, 유료 TV, TVOD 서비스는 수익의 일부를 유럽과 프랑스의 콘텐츠 제작에 투자해야 하며, 엄격한 연대기적 규정(프랑스 영화 시장에 개봉하는 영화들을 종영 후 2년간 VOD/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유통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통해 영화관이 아닌 경로로 영화를 유통하는 것을 규제한다. (p.180-181)
리드 헤이스팅스가 2016년 CES 무대에서 넷플릭스가 130개 국가에서 새롭게 서비스를 개시하게 되었음을 발표했을 때, 그는 디지털 기술에 의한 공간의 소멸이라는 손쉬운 시장 진입의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다. 이 책에서 보듯이 디지털 시장의 현실은 이보다는 더 복잡하다. 넷플릭스는 이전의 다른 다국가적 텔레비전 사업자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서비스 지역이 곧 세계적인 인기를 의미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디지털 배급은 문화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것은 취향, 가치, 문화적 기준, 시청 습관, 소득 수준 및 연결성의 근본적인 차이로 특징지어지는 시장의 영역과 협상을 해야만 한다. (p.224)
댓글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