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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 존 스튜어트 밀 / 현대지성

 

 따라서 공권력의 폭정을 막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적인 여론이나 정서의 폭정도 막아야 한다. 또한 사회가 공적인 처벌 이외의 다른 수단들을 사용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념들과 실천들을 그들의 행위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방식과 부합하지 않는 개성(individuality)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형성되는 것조차 차단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인격을 사회가 정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도록 강제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집단의 의사가 개개인의 독립성에 합법적으로 간섭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규정해서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독재를 막는 것만큼이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적절한 여건을 조성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인간의 행동의 규율과 관련한 사람들의 견해를 결정하는 실제적인 원리는 모든 사람이 당연히 자기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하는 각 사람의 생각,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감정이다. 자기가 좋아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 즉 자신의 선호가 어떤 행동을 할 때에 자신의 판단 기준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다. 하지만 어떤 행동에 대한 의사가 이성적인 근거들에 의해 밑받침되지 않는 경우에는,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의 선호일 뿐이다. 그리고 이성적인 근거라고 제시한다고 하면서, 단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비슷한 선호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면, 마찬가지로 그것은 이성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선호 대신에 많은 사람의 선호를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개인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적절한 것인지, 아니면 부적절한 것인지를 객관적으로 판별해 내는 데 사용할 공인된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결정한다. 어떤 사람들은 정부의 개입으로 좋은 결과가 생겨나거나 사회악이 고쳐질 것으로 보이는 경우에는 정부의 간섭을 촉구하고 나선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삶에서 정부의 통제를 받는 영역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회악을 어느 정도 감수하는 쪽을 선호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고유한 영역은 이런 것들이다. 첫 번째는 “의식”이라는 내면적인 영역이다. 거기에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 실천적이거나 사변적이거나 과학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신학적인 모든 주제에 대해 자신만의 의견과 정서를 가질 절대적인 자유가 속한다. 의견을 표현하고 출판하는 자유는 한 개인의 행위 중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부분에 속하기 때문에 다른 원리 아래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자유는 거의 사상의 자유만큼이나 중요하고, 대체로 동일한 이유들에 의거해 있다는 점에서, 실제적으로 사상의 자유와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번째는 취향과 추구의 자유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맞는 인생 계획을 세우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을 행하며, 그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이 어리석다거나 비뚤어졌다거나 틀렸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우리의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는 각 개인의 이러한 자유로부터 결사(結社)의 자유가 나온다. 물론, 이 자유에도 여러 제약들이 따른다. 이것은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목적을 위하여 강제적이거나 속아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진정한 의사에 의거해서 단체를 결성할 자유다.
 전체적으로 이런 자유들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그 통치 형태와는 상관없이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이런 자유들이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오직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다른 사람들의 노력을 가로막고자 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추구해 나갈 수 있는 자유만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개개인들을 강제해서 인류에 이익이 되어 보이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보다는, 개개인들이 그들 자신에게 이익이 되어 보이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인류에게 더 큰 이익이 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정치 공동체들의 규모가 커졌고, 무엇보다도 영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가 분리되었기 때문에(사람들의 양심을 통제하는 권위와 세상사들을 통제하는 권위가 따로 존재한다), 법률을 통해서 개개인의 사적인 삶에 속하는 세세한 부분들에 지나친 간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지배적인 여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가해져오는 도덕적인 압력의 기제(機制)는 더 집요해졌고, 심지어 그러한 압력은 사회 문제보다도 개인과 관련된 문제에서 더 심해졌다.

 

 하지만 한 개인의 의견의 표현을 침묵시키는 것이 심각한 해악이 되는 이유는 그런 행위는 현재의 세대만이 아니라 미래의 세대들까지, 그리고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찬성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인류 전체에게서 중요한 것을 빼앗아버리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 견해가 옳은 경우에는, 인류는 오류를 진리로 대체할 기회를 빼앗긴 것이다. 그 견해가 틀린 경우에는, 오류와의 충돌을 통해서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고 더욱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유익한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인류의 건전한 식견이나 판단을 위해서는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언제나 인정하지만, 현실에서 어떤 문제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관련해서는 실질적으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가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는 하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판단이 틀릴 경우를 대비해서 어떤 예방조치를 취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아주 확실하다고 느끼는 어떤 의견이 사실은 그들 자신이 인정한 대로 틀린 경우들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절대적인 군왕들, 또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무제한적인 복종을 바치는 것을 보는 데 익숙한 자들은, 통상적으로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그들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에 대해 완벽한 확신을 갖는다. 의견을 냈다가 종종 다른 사람들의 반박을 듣곤 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견이 틀렸을 때에는 때로 고치려고 하는 좀 더 나은 환경에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자신의 의견들 중에서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 또는 자기가 습관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의 의견과 동일한 것들에 대해서는 무한한 집착을 보인다. 왜냐하면,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일수록, 통상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는 “세계”는 완벽하게 옳고 절대로 틀릴 수 없다는 암묵적인 믿음 위에서 그 세계가 지닌 의견들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 가운데서 전반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우세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삶이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던 시기를 제외한다면, 인류는 언제나 그래왔는데, 이것은 인간 지성의 한 특질 덕분이다. 지성적 존재 또는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존재하는 모든 훌륭한 것들을 만들어낸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잘못들을 고쳐나가는 특질이다.
 인간은 토론과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 단지 경험만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고, 반드시 토론이 있어야 한다. 토론은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틀린 의견들과 실천들은 사실과 근거에 의해 점차 밀려난다. 하지만 사실들과 근거들이 인간의 지성에 어떤 효과를 미치기 위해서는 지성 앞에 호출되어야 한다. 사실들이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말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실들이 지닌 의미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판단이 지니는 모든 힘과 가치는 그 판단이 틀렸을 때에 바로잡을 수 있다는 데 달려 있다. 그 판단을 바로잡을 수 있는 수단이 언제나 마련되어 있을 때에만, 신뢰가 생겨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판단이 진정으로 신뢰할 만하다고 했을 때, 도대체 그런 결과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그 사람은 자신의 의견과 행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늘 자신의 마음을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람은 자신의 의견과 행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것들을 경청해서, 그들이 하는 올바른 말들에 의해서도 유익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틀린 말들에 대해서도 그것들이 어떤 점에서 틀렸는지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유익을 얻어왔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의 범위 안에서 어떤 문제의 전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온갖 다양한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고, 온갖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 문제를 바라보는 각양각색의 방식들을 깊이 연구해 보는 것임을 알고 있다. 이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은 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지성의 본질을 생각할 때,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의견을 수정해나갈 때에만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한 의견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실천에 옮겨서 확고한 습관으로 정착시키는 것만이 신뢰할 수 있는 의견과 판단을 생산해내는 유일하게 안정적인 토대이다. 자신의 의견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취약점을 지적해주는 것을 피하기는커녕 도리어 기꺼이 반기는 태도로, 적어도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의견을 비판하는 모든 말들을 경청하고, 그 비판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다시 설명하고 나서 거기에 대한 그들의 논평을 또다시 들어보는 식으로,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빛을 밝혀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차단하지 않는 사람의 판단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개인이나 집단의 판단보다 더 나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장 틀림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들일지라도, 온 세계로 하여금 그것들이 근거 없음을 증명해 보이도록 초청하고, 그 기회를 항상 열어놓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신뢰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거나, 또는 주어졌지만 틀렸음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 이성의 현재의 수준에서 최선을 다해 검증해 본 결과 틀렸음이 증명되지 않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진실에 도달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소홀히 하지 않고, 검증의 기회를 차단하지 않고 늘 열어두기만 한다면, 우리는 더 나은 진실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언젠가 인간의 지성의 수준이 더 높아졌을 때, 그 진실은 반드시 발견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동안에는 위에서 말한 방법으로 우리 시대에서 도달가능한 최고의 진실을 확보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것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는 존재인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확실성의 정도이고, 그러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진리는 언제나 온갖 박해를 극복하고 결국 승리한다는 말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거쳐 이제는 상식처럼 굳어졌지만, 사실은 인류의 모든 경험에 의해 틀렸음이 증명된 기분 좋은 거짓말들 중 하나일 뿐이다. 역사는 진리가 박해에 의해 진압된 사례들로 가득하다. 영원히 매장해버리지는 못할지라도, 수 세기 동안 창고에 처박아두는 것쯤은 쉬운 일이다.

 

 진리가 단지 진리라는 이유만으로 거짓에게는 없는 어떤 내재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지하감옥과 화형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허한 감상의 산물일 뿐이다. 진리에 대한 인간의 열정은 거짓에 대해 때때로 가지는 열정보다 결코 더 강하지 않고, 법적인 처벌, 또는 심지어 사회적인 제재를 충분히 동원한다면, 일반적으로 거짓은 물론이고 진리를 전파하는 것도 얼마든지 중단시킬 수 있다.
 진리가 지닌 진정한 이점은 이런 것이다. 즉, 어떤 옳은 의견을 박해해서 한 번, 두 번, 또는 수십 번 매장해 버리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 의견을 다시 내놓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게 되고, 그때마다 박해가 계속된다고 해도, 그러다가 운좋게도 좋은 환경을 만나 박해를 피하게 되면, 이후의 모든 박해를 이겨낼 만한 힘을 기를 수 있게 되어, 언젠가는 인류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는 선지자들을 죽였던 우리 조상들과 같지 않고, 도리어 그 선지자들을 기리고 기념해서 무덤을 만들어주기까지 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새로운 의견들을 제시하는 이들을 죽이는 일 같은 것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이단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말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의견들을 개진한다고 해도, 법적인 형벌을 통해 그런 사람들을 죽여서 그들의 의견들을 말살시켜야 한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만은 금물이다. 여전히 우리는 법에 의한 박해의 잔재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 의견을 처벌하거나, 적어도 그런 의견을 표현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이 지금도 존재한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서조차도 그런 법이 시행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온갖 의견들을 처벌하는 법이 전면적으로 시행될 날이 언젠가는 다시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근거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좀 더 심한 형태의 법적인 박해들은 지난 한 세대 동안 중단되었지만, 대중이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자 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 시대에서는 인간 사회에 유익한 새로운 혜택들을 도입하고자 하는 시도들만이 아니라, 과거의 해악들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시도도 자주 우리의 평온하고 질서 있는 삶을 흔들어놓고 있다. 사람들은 오늘날 과거의 신앙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그러한 옛 신앙의 부활이라는 것은 언제나 적어도 개화되지 못한 편협한 사람들 속에서는 종교적인 신념에 의거한 뿌리박힌 편견과 고집의 부활에 다름아니다. 이 나라의 중산층의 내면에는 아주 강력한 불관용의 누룩이 지속적으로 존재해 있고, 그런 누룩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약간의 명분을 주고서 부추기기만 해도, 이제까지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속으로는 박해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던 것을 과감하게 실행에 옮기게 된다. 즉,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 신념들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런 생각과 감정을 품고 있고, 바로 그것이 이 나라에서 정신의 자유가 꽃피우지 못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과거에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해악을 가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오늘날에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해악을 가하지는 않지만,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통해서 그들에게 가하는 해악은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대중에 의해 고발을 당하여 결국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철학은 태양처럼 하늘에 높이 솟아올라서, 인류의 지성이라는 세계 전체에 빛을 비추고 있다. 과거의 기독교인들은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기독교회는 웅장하고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서, 미처 자라지 못한 다른 고만고만한 온갖 교리들을 그 그늘 아래에서 질식시키고 있다. 우리 사회는 법적인 처벌을 통해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의견들을 박멸하지 않지만, 사회적 불관용의 분위기를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의견을 정직하게 표현하지 않고 위장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단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악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이단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대처하게 되면, 이단들의 의견에 대한 공정하고 철저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고, 만일 그런 토론이 이루어졌더라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잘못되었음이 드러나서 축출될 수 있었던 의견들이 토론이 차단됨으로써 도리어 살아남을 수 있게 되며, 심지어 확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인정하는 정통적인 결론만을 용납하고 그것과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는 모든 시도를 차단하는 경우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이단들의 지성이 아니라, 도리어 일반 사람들의 지성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이 혹시 이단으로 낙인찍히게 될 것을 우려하는 상황에서는, 그들의 정신적인 발전은 저해될 수밖에 없고, 그들의 이성도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결론이 도출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지성이 이끄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사상가의 첫 번째 의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위대한 사상가가 될 수 없다. 진리와 관련해서 인류가 점점 더 발전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이미 옳다는 것이 증명된 의견들을 늘 좇아가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갖춘 후에 스스로 사고해 나가다가 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들을 범하는 사람들이다.

 

 역사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지적 활동이 잠시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들은 이단적인 사고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한동안 중단되었던 시기들이었다. 한 사회가 옳다고 전제하는 대원칙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봉쇄되어 있는 곳에서는, 인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났던 몇몇 시기들에서 나타났던 사회 전반에 걸친 고도로 활발한 정신 활동을 찾아볼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인류에게 중요하고 큰 문제들에 대한 논쟁이 요원의 불길처럼 거대하게 활활 타오를 때에만, 인간의 지성은 그 토대로부터 뒤흔들리게 되고, 그 충격은 지극히 평범한 지성을 지닌 사람들에게조차 가해져서, 그들의 지성이 고양되어, 그들도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일정 정도 되찾게 될 수 있다.

 

 고대 세계에서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가장 위대한 변론가였던 키케로(Cicero)는 자신의 논증을 연구하는 일 못지않게, 자신의 논쟁 상대의 주장을 연구하는 일에도 언제나 똑같이 힘을 기울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어떤 문제와 관련해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사람들은 키케로가 법정 공방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했던 방식을 그대로 본받을 필요가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자기가 이해한 부분만을 아는 사람은 그 문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제시하는 논거들이 타당해서, 아무도 그 논거들을 반박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의 논거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 논거들을 반박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어느 쪽의 의견이 더 나은지를 판단할 수 없게 된다. 그런 형편이 되지 못한다면, 어느 쪽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것 자체를 중지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권위 있는 사람의 판단을 따르거나, 일반 사람들처럼 가장 마음에 드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낫다.

 

 오늘날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심지어 자신의 의견을 거침 없이 내놓고 그 근거를 막힘 없이 제시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백 명 가운데 구십구 명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자신의 주장과 그 근거들은 거침 없이 제시하면서도, 그들과 다른 의견을 펴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 그 근거들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랬을 경우에는, 설령 어떤 문제에 대한 그들의 결론이 옳다고 해도, 그 문제에 대해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틀릴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생각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을 깊이 들여다본 적도 없고, 그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경청해서 숙고해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들 자신이 제시한 주장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상대방의 어떤 논거들이 사실은 자신의 어떤 논거들을 설명해주고 정당화해준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어떤 논거와 상충되어 보이는 상대의 어떤 논거가 사실은 서로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자신의 논거와 상대방의 논거가 둘 다 겉보기에 아주 강력해서 따로 보면 둘 다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둘을 비교해보면 어느 한 쪽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한 분파의 특징이 되는 특이한 교설들은 모든 분파에 공통되는 교설들보다 더 많은 활력을 지니고, 가르치는 자들은 바로 그 특정한 분파에 속한 교설들이 계속해서 살아 있게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데에는 여러 가지 많은 이유들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런 특이한 교설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질문과 의문들이 제기되고, 공개적인 반대자들의 반론들에 맞서 변호해야 할 일들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대하는 자들이 아무도 없게 되면,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배우는 사람들이나 책상 앞에 앉아서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잠을 자게 될 것이 뻔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도덕이나 종교와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인생을 알고 지혜롭게 사는 것과 관련된 것도 포함해서 모든 전통적인 교설들에 적용된다. 온갖 언어로 씌어진 모든 문헌들 속에는 삶에 관한 전반적인 성찰들, 즉 삶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논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모두 그런 성찰들을 읽거나 배워서 알고 있고,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말과 글에서 그런 진리들을 인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진리들의 의미를 진정으로 아는 것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현실의 삶에서 그 진리들이 말한 진정한 의미를 몸으로 직접 겪고 나서야, 처음으로 그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 사람이 어떤 예견하지 못했던 불행이나 좌절을 겪으면서 고통스러워할 때, 그가 평소에 아주 잘 알고 있었던 속담이나 격언이 갑자기 떠오르며,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처음으로 깨닫게 되면서, 자기가 그 참된 의미를 진작에 알았다면 이런 불행이나 좌절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데에는 토론의 기회가 없었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들도 있다. 진리들 중에는 사람이 직접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될 때까지는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에 그런 진리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면, 사람들은 그 진리들이 지닌 진정한 의미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았을 것이고, 그 지식은 그들의 지성에 훨씬 더 깊이 각인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해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심도 제기되지 않게 되는 경우에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을 그만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르는 잘못들 중 절반은 그들의 그런 경향에서 비롯된다. 우리 시대의 한 작가가 “확정된 결론이 불러오는 깊은 잠”이라고 말한 것은 정확한 표현이다.

 

 부정적인 논리를 펴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것이 오늘날의 경향이다. 즉, 적극적으로 어떤 진리들을 제시함이 없이 어떤 이론이나 실천 속에 내재하는 약점이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을 보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부정적인 비판은 적극적으로 어떤 진리들을 만들어낸다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그 결과물이 보잘것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적극적인 지식이나 확신이 진정으로 가치가 있음을 확증해주고 그 토대를 더 공고하게 해주는 수단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제라도 다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기존의 정설에 대해 부정적인 논리를 펴는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지 않는다면, 위대한 사상가들이 배출되기가 극히 어려울 것이고, 인간의 사고를 필요로 하는 분야들 중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인류 지성의 수준의 평균치는 낮아지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어떤 의견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촉발된 것이든, 아니면 스스로 촉발시킨 것이든, 반대자들과의 활발한 논쟁을 하면서 겪게 되는 사고 과정이 없는 경우에는, 그 의견은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그러한 부정적인 비판 및 반대자들과의 활발한 논쟁은 어떤 의견이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이지만, 그런 과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기는 아주 어렵다. 그런데 그런 기회가 저절로 생겨났는데도, 그 기회를 날려버린다면, 그것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의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법이나 여론에 의해 허용되는 경우에 실제로 나서서 그렇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해주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마음을 열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이 분명히 옳고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면, 우리 스스로 나서서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검증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그런 일을 해준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기존의 지배적인 정설이 바른 토대 위에 의거하고 있을 때조차도 진리 전체의 일부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진리 전체 중에서 그 정설이 배제해버린 여러 부분들을 반영하고 있는 온갖 의견들은, 비록 그 의견들 속에 부분적인 진리와 함께 많은 오류와 혼동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소중하게 여겨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인생사를 공평하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 진리와 오류가 혼합된 의견을 말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의 그런 의견이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진리의 한 부분을 볼 수 있게 해준 경우에, 사실은 우리도 그 사람처럼 진리의 일부만을 보고 진리와 오류가 혼합된 의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진리에 오류를 혼합했다는 이유로, 그 사람에게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 다수 의견인 정설이 진리의 한 면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소수 의견이 마찬가지로 진리의 한 면만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의견이 제시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소수의 의견이 진리의 일부만을 반영한 것인데도, 늘 그렇듯이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의견이 진리 전체를 반영한 것인 것처럼 열렬히 주장하겠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런 기회를 통해서 사람들은 그 소수 의견에 반영된 진리의 한 부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실천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들과 관련된 진리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을 화해시키고 결합시키는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충분히 큰 포용력을 지니고서 모든 것들을 다 고려하여 공정하고 정확하게 그러한 조정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 진영이 서로를 반대하는 기치를 높이 세우고서 그 기치 아래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는 거칠고 험악한 과정을 거쳐서 그런 조정 작업이 완성된다. 방금 위에서 열거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두 의견 중에서 어느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나은 주장이어서, 단지 용납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장려되고 지지되어야 한다고 다수가 생각하더라도, 또 다른 때와 장소에서 그 의견은 얼마든지 소수의 생각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둘 중의 어느 의견이든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해서 인간의 이해관계와 복리에서 소홀히 되고 결핍된 부분이 생기게 되면, 그 부분을 대변하는 그 의견이 한동안 지배적인 의견으로 출현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도덕은 사람들에게 미덕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적절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 천국에 대한 소망과 지옥에 대한 경고를 제시한다. 이러한 동기에 의거한 도덕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은 고대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 훨씬 못 미치는 사람들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동기로 인해서 사람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필요한 일들만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웃을 접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인류와 이웃들의 이익을 위한 의무들은 행하지 않게 됨으로써, 기독교 도덕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기독교 도덕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으로 순종할 것을 가르친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모든 권위에 대해 복종하라고 역설한다. 그 권위들이 신앙에서 금지하는 일을 명령할 때에는 능동적으로 복종해서는 안 되지만, 개개인에게 손해나 해악을 끼치는 일들은 아무리 큰 손실이라도 감수하고 저항해서는 안 되며, 그 권위를 타도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또한 나는 오직 기독교의 교리 속에서만 우리의 모든 삶을 규율하는 완전한 규범을 찾아내고자 하는 편협한 태도는 오늘날 뜻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장려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도덕 교육과 훈련의 가치를 크게 훼손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중대한 해악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내가 크게 우려하는 것은 역사상 지금까지 기독교 윤리와 공존하면서 상호 간의 영향을 통해 보완하는 역할을 해왔던 세속적 기준(더 나은 이름이 없어 이렇게 부른다)을 버리고, 오로지 종교적 기준에 의거해서만 인간의 지성과 감정을 형성해 나가고자 하는 시도가 저급하고 비열하며 굴종적인 사람들만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고, 심지어 현재에도 그런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최고의 의지(the Supreme Will)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복종할 수는 있어도, 최고의 선(Supreme Goodness)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거나 거기에 공감할 수는 없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가 불신자들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게 하고자 한다면, 그들 스스로 불신자들을 정당하게 대우해주어야 한다. 인류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씌어진 명저들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덕적으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소중한 가르침을 설파하는 상당수의 저작들이 기독교 신앙을 알지 못했거나, 또는 알면서도 배척했던 사람들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에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진실과 진리를 추구한다고 할 수 없다.

 

 각각 진리의 어느 부분을 반영한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것은 해로운 것이 아니다. 도리어 진리의 절반을 담고 있는 어떤 의견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억압되고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가공할 해악이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도 찬반양론을 모두 들을 수밖에 없는 곳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다. 하지만 오직 한 쪽의 의견만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는, 그 의견 속에 들어 있는 오류들이 진리로 여겨지고 굳어져서 편견으로 자리 잡게 되고, 그 의견이 마치 진리 전체인 양 과장됨으로써, 그 의견 중에서 진리인 부분은 진리로서의 효과를 지닐 수 없게 되고 만다.
 인간의 정신적인 능력들 중에서, 어떤 문제에서 진리인 부분과 오류인 부분을 가려내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극히 드물고, 각 사람은 진리의 오직 한 부분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에, 진리의 각각의 부분들을 담고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의 각각의 부분들을 경청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어떤 의견을 단정적으로 말하게 되면, 비록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심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식의 의사 표현 방식을 엄격하게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옳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의사 표현 방식이 지닌 더 큰 문제는 상대방에게 확신을 심어주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자폭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데 있다. 그런 의사 표현 방식 중에서 최악의 것은 궤변을 일삼고, 사실들이나 근거들을 은폐하며, 자신의 주장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에 대해 거짓으로 제시하고, 반대 의견을 왜곡해서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모를 리가 없고 얼마든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에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 모든 짓을 심지어 대단히 악질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끊임없이 일상적으로 저질러왔다. 이렇게 한다 하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이런 일들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도덕적인 근거들 위에서 그러한 행위들을 도덕적으로 악하다고 낙인을 찍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잘못된 행동들에 법이 개입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인간은 절대로 틀릴 수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안다고 하는 진리들은 대체로 단지 부분적으로만 옳은 진리들일 뿐이다. 인간이 지금보다 훨씬 더 역량이 발전해서, 지금처럼 진리의 한 부분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모든 부분들을 두루 인식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서로 반대되는 의견들이 완전히 자유롭고 충분히 비교되고 토론되고 나서 그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의견의 일치는 도리어 바람직하지 않고, 의견의 다양성은 인류 사회와 개개인에게 해악이 아니라 이득이다. 이러한 원칙들은 사람들의 의견만이 아니라 행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이 불완전한 동안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다양한 삶의 실험들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이 되지 않는 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개성들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각자가 시도해 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서로 다른 생활방식의 가치를 실천적으로 자유롭게 증명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치지 않은 일들에서는 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개개인의 개성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전통이나 관습이 행위 규범으로 작용하는 곳에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임과 동시에,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사고방식 속에서는 개개인의 자발성이라는 것이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독자적으로 주목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늘날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에 만족하고 있고, 그들 자신이 이 인류의 구성원들이어서, 모든 사람이 그들의 생활방식을 따라 살아가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과 다른 생활방식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도덕과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개개인의 자발성을 그들의 이상의 일부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그들이 인류를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방해하고 저항하는 골치아픈 요소로 보고서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류의 경험에 의해 확인된 결과들을 알고 거기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어릴 때부터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인류의 경험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고 사용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들을 성숙하게 발전시킨 사람들의 특권이자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기록으로 남겨진 인류의 경험 중에서 어느 부분을 자신의 환경과 개성에 적용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찾아내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다. 다른 사람들의 전통들과 관습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추정될 수 있다. 그리고 증거로 추정되는 것들은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것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그들의 경험은 지나치게 좁은 것일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둘째로, 그들이 경험한 것들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 옳은 것일지라도, 그 경험이 어떤 사람에게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관습은 특정한 시대와 사람들에게 일반적이었던 환경과 개성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환경이나 개성은 그 관습이 전제한 환경이나 개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특정한 관습이 옳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적절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단지 관습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관습을 따라 살아가는 경우에는, 인간에게 주어진 독특한 능력들과 자질들의 교육이나 발전이 그 사람에게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인지, 판단, 독특한 감정, 정신 활동은 물론이고 심지어 도덕적 선호 같은 인간의 능력들은 오직 선택을 행할 때에만 훈련된다. 관습이라는 이유로 어떤 일을 행한다면,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모든 일을 관습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분별하는 훈련도 되지 않고, 가장 좋은 것을 원하는 훈련도 되지 않는다. 근육의 힘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힘도 오직 사용할 때에만 커진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것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믿고, 단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한다는 이유로 그 일을 한다면,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능력들은 전혀 훈련될 수 없다.
 사람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이성을 토대로 하지 않은 의견을 갖는 경우에는, 그의 이성은 강화될 수 없고, 도리어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권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에서, 사람이 자신의 감정과 성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것은 그의 감정과 성격에 큰 타격을 주어서, 처음에는 적극적이고 활기찼던 사람도 활기를 잃고 무기력하게 되고 만다.
 사람이 세계 또는 그를 직접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정해준 대로 자신의 일생을 살아간다면, 그에게는 원숭이 같이 흉내 내는 것 이외의 다른 능력들이 있을 필요가 없다. 반면에, 자신의 일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정하는 사람은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 보기 위해서 관찰력을 사용해야 하고, 미리 내다보기 위해서 추리력과 판단력을 사용해야 하며, 결정을 하기 위한 자료들을 모으기 위해서 활동력을 사용해야 하고, 결정하기 위해서 분별력을 사용해야 하며, 결정을 내린 후에는 자신이 신중하게 결정한 것을 실현해내기 위해서 확고한 의지력과 자제력을 사용해야 한다.
 사람의 이러한 능력들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 중에서 자신의 판단과 감정에 따라 결정하는 부분이 얼마나 큰가에 따라, 정확히 거기에 비례해서 요구되고 훈련된다. 이러한 능력들이 전혀 없어도, 해로운 길을 피해서 안전한 길로 가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좀 더 가치 있는 길은 어느 쪽일까?

 

 인간의 모습으로 된 자동기계들이 사람들을 대신해서 집을 지어주고 곡물을 길러주며 전쟁도 해주고 재판도 해주며, 심지어 교회를 짓고 기도하는 것도 대신해주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해보자. 반면에, 오늘날 이 세계의 좀 더 개화된 지역들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이 만들어낼 수 있고 앞으로도 만들어낼 수많은 생물의 종들 가운데서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그런 자동기계로 대체해버린다면, 그것은 이득이 아니라, 상당한 손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어떤 정해진 모형을 따라 만들어져서 정해진 곳에 배치되어 정해진 일을 정확히 해내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내면의 힘을 따라 사방으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발전시켜 나가게 되어 있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지위가 높거나 개인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법과 규범을 위반하는 일이 관행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법과 규범으로 엄격하게 묶어놓아야만,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이 그나마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반면에, 우리 시대에서는 사회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계층에서부터 가장 지위가 낮은 계층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적대적이고 무시무시한 검열의 시선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
 개인이든 가족이든,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일들에서만이 아니라 오직 자신과만 관련된 일들에서조차도, 내가 무엇을 더 선호하고, 나의 개성과 성향에 맞는 것이 무엇이며, 나의 능력을 최고로 발전시키고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무엇인지를 자기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그런 것들 대신에, 그들은 나의 위치에 어울리는 것이 무엇이고, 나와 같은 지위와 경제적 수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것이 무엇이며,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심하게도) 나보다 더 나은 지위와 경제적 수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무엇을 하는지를 묻는다.
 나는 그들이 그들 자신의 성향에 맞는 것이 아니라 관습에 의해 정해져 있는 것을 선택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관습에 의해 정해져 있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외에, 그들 자신만의 고유한 성향이라는 것 자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정신 자체가 노예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저 즐겁기 위해서 하는 일조차도, 남들이 무엇을 하며 즐겁게 노는지를 먼저 생각하고서, 사람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서 한다. 그들은 군중 속에 묻혀 있기를 좋아한다.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것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뿐이다. 그들은 범죄를 꺼리는 것과 동일한 수준에서 특이한 취향이나 튀는 행동을 꺼린다.
 그들 각자가 타고난 본성을 따르지 않는 것이 습관화되고, 그 결과 그들에게는 이제 그들이 따를 본성조차 사라지게 된다. 인간으로서 타고난 자질과 능력들은 시들시들해지고 결국은 굶어죽는다. 어떤 것을 강력하게 원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힘도 없어진다. 그들 자신 속에서 생겨난 어떤 의견이나 감정, 즉 그들 자신만의 고유한 의견이나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 본성의 상태로서 바람직한 것인가, 아니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인가?

 

 인간은 개개인들에게 있는 온갖 개성들을 깎고 다듬어서 획일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이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모두 다 불러내어 계발하고 육성할 때에 누가 보아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만든 작품 속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개성이 녹아 있는 것처럼, 인류가 무한히 더 나아진다면, 거기에 속한 사람들의 삶에도 풍요로움과 다양함과 활기가 넘치게 될 것이고, 인간 사회에는 고귀한 생각과 고상한 감정들이 차고 넘치며, 모든 개개인을 하나의 인류로 묶어주는 유대감도 강력해질 것이다. 각 사람은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킨 정도에 비례해서 그만큼 더 자기 자신에게 가치를 지니게 되고, 그 결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더 가치 있게 된다. 개개인의 삶이 만개하여 풍성해지면, 그 개개인들로 이루어지는 사회도 풍성해지게 된다.

 

 만일 새롭게 해야 할 일이 전혀 없다면, 인간의 지성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어 쇠퇴해버리지 않겠는가? 과거의 것들을 그대로 따라하는 사람들이 그것들을 자신들이 왜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이성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그저 짐승처럼 그것들을 행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인류 역사에서 최고의 신념이고 최고의 실천이라고 하는 것들도 그런 식으로 해서 기계적인 것들로 전락해버리기가 너무나 쉽다. 그렇기 때문에, 독창성을 지닌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서 그러한 신념들과 실천들이 그 근거들이 망각된 채로 기계적인 관습이나 전통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막아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최고의 것들이라고 해도 이미 죽어버린 관습이나 전통이 되어버린 것들은, 진정으로 생명력이 있는 것이 나타나서 약간의 충격만 가해도 와해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또한 비잔틴 제국 같은 문명이 하루아침에 붕괴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른 시대들에서는 천재들이라고 할지라도, 대중과 다르게 행동할 뿐만 아니라 더 낫게 행동할 때에만, 사회에 유익을 끼칠 수 있었다. 반면에, 이 시대에서는 단지 대중과 다르게 행동하고, 관습과 관행에 무릎을 꿇기를 거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다. 여론의 독단과 폭정이 너무 심해서, 그 기준에서 벗어난 엉뚱한 행동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난이 쏟아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그런 독단과 폭정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기준을 벗어나 엉뚱하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개성이 활발하게 발휘되었던 시기나 지역에서는 언제나 엉뚱한 행동들이 차고 넘쳤다. 한 사회가 담고 있는 천재성과 정신적인 활력과 도덕적인 용기가 클수록, 엉뚱한 행동들이 많아진다. 오늘날 그런 엉뚱한 행동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사람들마다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 고통을 느끼는 예민함의 정도, 그런 것들에 대해 반응하는 육체와 정신의 기제 같은 것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에게 맞게 개개인이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면, 자신이 본래 누릴 수 있게 되어 있던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고, 각자의 본성 안에서 이룰 수 있는 정신적이고 도덕적이며 미적인 최고의 발전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왜 오직 다수가 선호하는 취향과 생활방식만이 용납되고, 다수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수의 취향과 생활방식을 따라 살아가도록 강요당해야 하는 것인가? 일부 수도원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서도 취향의 다양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사람들은 노를 젓는 것, 담배를 피우는 것, 음악을 듣는 것, 운동하는 것, 장기를 두는 것, 카드놀이를 하는 것,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싫어하는 사람들이 둘 다 수가 너무 많아서 억압해서 제거해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한다든지, “모두가 다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마치 아주 중대한 도덕적인 의무를 어기기나 한 것처럼, 그 사람에게는 사람들의 비난과 혹평이 쏟아진다. 더구나 그 사람이 여자라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평판에 손상이 가게 하지 않는 가운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호사를 “어느 정도” 누리려고 한다면, 그런 것이 용인될 정도의 사회적 지위가 있거나,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그럴 만하다는 인정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사람조차도 그런 것을 “어느 정도만”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지나치게 되면, 그가 누구이든, 비난이나 혹평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제재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법원에서 정신병자로 판결을 받아, 그의 전 재산이 몰수되어, 가족이나 친척에게 주어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중이 반대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개성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서로 달라야만, 자신의 부족함이나 다른 사람들의 뛰어남을 주목하게 되고, 서로의 장점들을 결합해서 개개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낼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다. 또한 한 사회의 구성원 전부를 모두 다 똑같은 사람들로 만들어야만, 경이로운 일들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사회적 지위가 서로 다른 사람들, 서로 다른 이웃들, 직업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갔다. 하지만 현재는 상당한 정도로 동일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이제 동일한 것들을 읽고, 동일한 것들을 들으며, 동일한 것들을 보고, 동일한 곳들을 간다. 사람들이 희망하는 것이나 염려하는 것들도 동일하다. 사람들은 동일한 권리들과 자유들을 누리고, 그런 것들을 누리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도 동일하다. 사람들 간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의 차이는 아직도 크지만, 사람들 간에서 사라진 차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이러한 동질화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이 시대의 모든 정치적 변화들이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았던 사람들은 높여주고 신분이 높았던 사람들은 낮추는 경향으로 작용하는 것이 그런 동질화를 촉진시킨다.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어서, 사람들이 동일한 교육 환경 속에서 동일한 사실들과 정서들을 접하게 된 것도 그런 동질화를 촉진시킨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손쉽게 접촉할 수 있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주거를 신속하게 옮길 수 있게 된 것도 그런 동질화를 촉진시킨다. 상업과 제조업의 발달로 편리한 환경이 주는 이점들이 널리 확산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온갖 목표, 심지어 최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서로 경쟁할 수 있게 됨으로써, 출세가 이제 더 이상 특정 계층이 아니라 모든 계층의 목표가 된 것도 그런 동질화를 촉진시킨다.
 하지만 사람들 간의 전반적인 동질성을 촉진시킴에 있어서 이 모든 것들보다 더 강력한 요인은, 이 나라를 비롯한 여러 자유로운 나라들에서 여론이 국가를 지배하는 힘으로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에는 사회적으로 이런저런 특권들을 지닌 사람들이 자신들의 보호막인 그러한 특권에 힘입어서 대중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특권들이 점차 사라져서, 모든 사람들이 거의 평준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도 자신의 고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인식되면서, 대중의 의지에 저항하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현실 정치인들에게서 점점 더 사라졌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대중의 여론과 다른 것에 대한 그 어떤 사회적 지지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즉, 대중이 수적인 우위를 내세워서 관철하고자 하는 여론에 반대하여, 대중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행동하는 그 어떤 사회적인 세력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아니 아무리 많은 사람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기에게 가장 좋겠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려고 하는데,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 자신이 행복하고 잘되는 것에 대해 가장 많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당사자다. 인격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관계에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3자가 어떤 사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관심은 당사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관심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다.

 

 사회는 자신의 구성원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그들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들이 어린아이와 미성년자인 기간 전체에 걸쳐서, 그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삶과 행동을 할 수 있게 교육할 수 있다.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를 훈육하는 선생임과 동시에, 그들이 성장하는 환경이다. 기성세대가 선량함과 지혜로움에서 너무나 통탄스러울 정도로 결핍되어 있다면, 다음 세대를 온전히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들로 만들어낼 수 없다. 최고의 노력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모든 개개인들에게서 최고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를 전체적으로 그들만큼, 또는 그들보다 좀 더 나은 수준에서 선량하게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라서 사회가 자신의 구성원들 중 상당수를 장기적인 안목에서 합리적인 계획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단지 어린아이처럼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로 만들었다면, 사회는 그런 결과에 대해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사람들은 사악하거나 방종하다는 것이 아무리 본인 자신에게만 관련된 사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본보기가 되는 것을 막아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쁜 본보기가 사람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고도 아무런 징벌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지만 본인 자신에게는 큰 해악을 끼치는 그런 행동이다. 게다가, 나쁜 본보기는 그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진정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잘못된 행동인 경우에는 통상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럽거나 수치스러운 결과도 사람들에게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해롭기보다는 유익할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나는 나쁜 본보기를 사회에 해롭다고만 믿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중을 구성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단지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들일 뿐인데도, 그런 행동들을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고 자신의 감정을 짓밟고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서 적대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경향은 어떤 종교적인 광신자가 다른 사람들의 종교 감정을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자, 다른 사람들이 가증스러운 예배나 신조를 고집함으로써 자신의 종교 감정을 무시하고 있다고 반박했다는 유명한 얘기 속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도둑이 어떤 사람의 지갑을 훔치고자 하는 욕망의 가치와 주인이 그 지갑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의 가치가 서로 대등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대해 가지는 감정의 가치와 그가 그 의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해 상한 다른 사람의 감정의 가치는 서로 대등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취향은 그의 의견이나 지갑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만이 관련되어 있는 사적인 문제다.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는 아무 관련이 없는 한 개인의 부도덕한 행동들을 억압하고 금지하고자 하는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이런저런 근거들 중에서, 그런 행동들을 신 앞에서 불경스러운 행위로 몰아가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 박해자들이 사용하는 논리, 즉 우리는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박해해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틀렸기 때문에 우리를 박해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기꺼이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적용하면 분개할 것이 분명한 그런 터무니없이 부당한 논리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적용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문명화된 한 사회가 미개한 다른 사회를 강제적으로 문명화시킬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악법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한 사회에 속한 다수의 사람들이 다른 사회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닌데도,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만족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제도를,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그들에게서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개입해서, 그 제도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기할 것을 요구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할 수 없다.

 

 한 명의 인간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삶 속에서 가장 큰 책임이 주어지는 행위들 중 하나다. 한 인간을 태어나게 하여 저주일지 축복일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삶을 주어놓고서는, 적어도 그의 삶이 바람직한 삶이 될 수 있는 통상적인 기회를 그에게 조성해주지 않는 것은 그에게 지고 있는 그러한 책임을 저버린 범죄 행위다. 그리고 인구가 너무 많거나 그렇게 될 위험이 있는 나라에서 많은 수의 자녀들을 낳는 것은 결국은 과잉 인구로 인한 과도한 경쟁으로 임금이 내려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에, 노동 수입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대한 범죄가 된다.

 

 오늘날의 자유 개념은 한편으로는 오직 개인 자신에게만 관련이 있는 일들에서 철저하게 보장되어야 할 개인의 자유를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침해하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행동들과 관련해서 한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 그들의 자녀들의 삶은 비참하게 되고 타락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그런 행동들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상당한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해악들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가 거기에 개입하여 규제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그런 개입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자유를 도가 지나치게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를 도가 지나치게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한데 놓고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가할 수 있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함이 없이 만족할 권리는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