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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공익 / 류하경 / 한겨레출판

 

 배움이 짧고 재산이 적으며 착취당하기 쉬운 일에 종사하거나, 일의 세계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고 화를 내는 경우가 잦다. 그 반대 조건의 사람들은 참 ‘젠틀’하고 차분하고 배려심이 넘친다. 전자의 사람은 언성을 높이지 않으면, 화를 내지 않으면 자기의 권리를 억울하게 뺏기는 일을 살면서 계속 겪어왔다. 반면 후자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
 법정에 가본 적이 있는가? 판사의 목소리는 마이크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거의 들리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변호사도 없이 홀로 나와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전자의 당사자들은 마이크가 있는데도 법원이 떠나가라 ‘아이고, 판사님 분해서 죽겠어요’ 하고 샤우팅을 한다. 시각적, 청각적 대조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이다. 판사는 작게 말해도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듣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힘이고, 심지어 말할 필요도 없이 판결문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면 그만이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상대방을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힘이다. 권력이 있으면 악다구니가 필요 없다. (p.8)

 

 인류는 근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사적 폭력을 금지하고 폭력행사의 권한을 국가에 위임했다. 경찰과 군대로 대표된다. 즉 공권력의 본질은 ‘폭력’이다. 폭력에는 이성이 없다. 폭력을 길들이고 통제하는 이성, 그것이 바로 헌법과 법률이다.
 앞서 이야기한 2013년 대한문 사건과 최성영의 사례는 다소 이례적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최성영과 같은 양상의 무도한 공권력 행사는 많다. 국민이 긴장하고 견제하지 않으면 무도함의 정도는 심해지고 범위는 넓어진다. 다시 강조하건대 공권력의 본질은 이성 없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임한 폭력행사 권한으로 치안·질서를 유지하는 경찰의 헌신과 희생은 늘 고맙다. 그러나 공권력은 ‘공인된 폭력’이므로 헌법과 법률에 부합하지 않게 행사한다면 국민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돌변한다. 이를 우리는 지난 군부독재 시절 경험했다. 법치주의는 국가권력을 법에 따라 통치하라는 뜻이고 그래서 헌법과 법률은 공권력이 지켜야 할 ‘질서유지선’이다.
 법은 경찰을 ‘국민의 봉사자’로 규정한다. 그런데 공권력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상 기본권을 가장 자주 침해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공권력을 이용해서 집회를 원천 봉쇄하고 언론·출판을 막는 것은 국가 권력자가 참 편하게 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듣기 싫고 보기 싫으니 가려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고,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그 자체다. (p.26-27)

 

 민주주의 체제에서 각종 대의 제도와 감시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이 국가를 ‘불신’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원동력이자 민주주의의 본질이자 당위다. 따라서 국가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영원히 이 불신을 해소해야 할 사명이 있다. 이를 제도로 구체화한 것이 바로 정보공개제도다. 그래서 정보공개제도는 선거제도와 더불어 또 한 송이 수려한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린다. 정보공개가 잘될수록 권력기관에 대한 시민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진다. (p.31)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를 보면 동물을 도살하는 일을 먼 교외의 노예에게 시킨다. 그 일이 백성의 심성을 악하게 만든다는 게 이유다. 우리에겐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이드(id)’, 즉 ‘무의식’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이 영역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스스로를 속이지 못한다. 때문에 나보다 약한 생명체를 내 이익을 위해 죽이면 나도 모르게 ‘심성’에 문제가 생긴다. 나보다 약한 인간을 내 이익을 위해서 계속 희생시킨 사람은 얼굴에 대번 표시가 난다. 교언영색이라고 표가 안 날까? 더 난다. 본인만 모른다. 내가 볼 때 우리 사회의 얼굴은 못나게 주름져 가고 있다. 빈민운동을 대하는 우리들의 표정에서 가장 잘 발견된다. (p.45-46)

 

 2020년과 달리 2024년 총선에서는 시민사회가 참여하니까 다르다는 주장을 민주당과 일부 시민사회 인사들이 펼쳤다. 그런데 이른바 “시민사회” 몫 후보자들에 대한 민주당의 비토 등을 통해 민주당의 일방적인 후보자 명부 작성 권한이 드러났다. 과연 2024년 더불어민주연합이 시민사회와 수평적, 호혜적으로 연대하고 있는지에 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시민사회 몫 1, 2등 후보의 낙마 문제가 있었다. 국가보안법 폐지, 반미운동 이력의 전지예 금융정의연대 운영위원, 사드 반대, 진보당적 이력의 정영이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사무총장이 극우 언론과 이에 편승한 민주당 지도부에 의해 낙마했다. 민주당이 색깔론, 철 지난 종북 타령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군인권센터 임태훈 전 소장의 낙마는 더 심각한 문제였다. 민주당은 임 전 소장의 ‘병역기피’를 컷오프 이유로 들었다. 위성정당의 한 축인 ‘연합정치시민회의’ 측 국민후보 추천심사위원들은 긴급회의를 열어 임 전 소장의 컷오프 결정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병역기피로 규정되고 부적격 사유가 된다는 것은 국제적 인권 기준에도 헌법적 판단에도 지금 시대정신에도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이재명 대표가 7년 전 소셜미디어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해야 한다”고 한 발언도 소환됐다.
 임 전 소장은 지난 노무현 정권 때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어 사면, 복권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임태훈 소장과 소속 단체인 군인권센터의 주도로 대체복무제가 민주당을 통해 입법되기도 했다. 임태훈 소장의 낙마는 민주당의 표리부동, 자기모순을 보여주는 사건이었고, 심각한 인권 후퇴의 ‘흑역사’가 되었다. (p.79-80)

 

 철거민 투쟁은 ‘공룡’ 같다고 나는 표현하곤 한다.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래 문제의 본질은 물론이고 싸움의 겉모습도 거의 변하지 않는 현장이라는 뜻이다.
 순서는 이렇다. 원주민들이 모여서 산다. 자연스레 상권, 교육 환경, 교통권 등이 생겨서 살 만한 곳이 된다. 땅값이 올라간다. 건설 자본이 땅을 산다. 국가가 재개발을 허가해 준다. 더 많은 건설 자본이 마을로 들어온다. 원주민에게 헐값을 제시하며 나가라고 한다. 원주민이 말을 안 들으면 건설 자본이 감정평가한 금액 또는 국가기관인 수용재결위원회가 결정한 금액 만큼을 법원에 맡기고(공탁) 토지 및 건물 인도 소송, 퇴거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다. 건설 자본이 승소한다.
 원주민은 ‘이 돈으로는 주위에 어디 이사 갈 수가 없다’며 버틴다. 건설 자본과 용역 철거 인부, 경찰 이렇게 세 조직이 힘을 합쳐서 밀고 들어온다. 강제집행이다. 집이 무너지고 가족들이 질질 끌려 나간다. 버티기로 결의한 원주민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고 튼튼한 고층 건물 하나를 지정해서 투쟁 기지를 만든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투가 시작된다. (p.117)

 

 2022년 3월부터 연세대 청소 노동자들이 쟁의행위를 시작했다. 노조의 근로조건 개선 요구와 지방노동위원회의 권고안을 용역업체들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청인 용역업체들이 권고안을 거부한 이유는 원청인 학교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요구안을 들으면 놀라게 된다. 너무 별게 아니기 때문이다. 시급 440원 인상, 샤워실 설치, 퇴사자 공석에 신규 채용. 이렇게 세 가지다. 2022년 당시 최저임금이 440원 올랐고, 2023년에는 여기에서 460원이 더 오른다고 했다. 청소 노동자들의 임금은 늘 최저임금에 턱걸이하는 수준이다. 때문에 이들의 시급 인상 요구는 절대 과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 소소하다. 겨우 440원 인상이다. 연세대학교의 누적 적립금은 5,800억 원가량이라고 한다.
 노동자들의 나머지 요구사항인 샤워실 설치, 퇴사자 공석 신규 채용의 경우 통상적인 사업장이라면 당연히 보장하는 필요 최소한에 불과하다. 종일 실내외에서 육체노동을 하고 냉방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건물 한쪽 구석에서 휴식을 취해야 하는 청소 노동자들에게 학교가 지금까지 샤워실 하나 제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신규 채용의 경우, 퇴사자의 공석을 계속해서 메우지 않는다면 결국 한 사람이 학교 전체를 다 청소해야 할 수도 있다. 수년째 퇴사자 공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서 청소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는 점점 세지고 있다. 비용 절감을 위해 노동자를 부당하게 착취하는 셈이므로 반드시 개선해야 할 부분이다. (p.138-139)

 

 연세대 청소 노동자 사건이, 기존의 대법원 판례와 헌법 정신에 대해 학생 사회 및 사회 일반이 다시 학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사회적 연대 의식이 무엇인지 토론할 수 있는 자리가 이어지기를 또한 기대한다. 우리는 모두 상대적 약자다. 잠재적인 권리침해 피해자다. 그래서 나 또한 언제 쟁의행위를 할지, 집회 시위를 하게 될지 모른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를 위해 참고 힘을 모아야 한다. ‘불편함의 품앗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연대 의식이다.
 ‘공정’에 대한 생각에도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공정이란, 내가 조금도 불편하지 않은 상황이 아니라 내 불편함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넓은 범위의 피해자들과 연대하여 구조를 개선해 내는 것, 그것이 아닐까. 이번 사건에서 학생들이 청소 노동자의 손을 잡고 대학 총장실로 가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함께 의견을 내었다면, 그 모습이 더 공정에 가깝지 않았을까. (p.145-146)

 

 피해 노동자들은 모두 ‘CNC 설비’라는 휴대전화 부품을 깎고 다듬는 공정에서 일했고, 메탄올은 그 공정에서 ‘절삭유’로 쓰였다. 노동자들이 취급했던 CNC 설비에는 절삭 공구 주변에 절삭유를 자동으로 분사하는 호스가 있어서 설비 가동 중에는 그 호스를 통해 고농도(99.9%)의 메탄올이 지속적으로 분사됐다. 이때 노동자들은 어떠한 교육이나 보호장치도 없이 메탄올을 매일 온몸으로 받아냈다. 노동자들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 12시간씩 주 6일 근무하기도 했고 일이 많은 달에는 한 달에 채 하루도 쉬지 못했다. 이들은 알코올 제거를 위해 에어건(air-gun)을 사용했는데 이때 알코올이 피부와 눈 등에 수시로 튀었다. 알코올 냄새를 견딜 수가 없어서 이들은 사비로 마스크를 장만해서 착용하고 일을 했다. 알코올 냄새 때문에 답답하면 창가로 가서 심호흡을 하고 돌아왔을 뿐이라고 했다. 1960년대 전태일의 평화시장이 아니라, 2016년 대한민국 대기업의 휴대전화 부품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p.151-152)

 

 제대 후 학내 청소 노동자의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라는 곳에서 진행한 노학연대 사업의 일환이었다. 노동자들은 화장실 빈칸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었고, 계단 아래 한 평 남짓한 창고에 쪼그려 앉아 휴식했다. 통장에 찍히는 급여는 간신히 최저임금을 맞추는 수준이었고 실제 노동시간을 감안하면 실급여는 최저임금보다 적었다.
 고용 형태는 간접고용, 즉 학교가 미화 업무 전체를 하청업체에 도급을 주고 노동자들은 하청업체에 소속되어 사실상 중간착취 당하면서도 고용은 불안정한 형태였다. 학교가 내려주는 돈을 하청업체가 수수료로서 상당 금액 챙기고, 남는 돈을 노동자들에게 내려주는 형식이다.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면 그게 해고가 되는, 또는 학교가 하청업체와 계약을 해주지 않으면 노동자들 전체가 통으로 거리에 나앉게 되는 그런 구조가 바로 간접고용 형태의 비정규직이다.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은 이런 비정규직들 앞에서 멈춘다. 하청업체 사장은 휴일에 노동자들을 불러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청소를 시켰다. 근로계약 외 사적 이용이므로 불법이다. 하청업체 관리자 반장이라는 자들은 수시로 노동자들을 추행하고 희롱했다. 반말, 욕설, 폭언은 예삿일이었다.
 서너 달 남짓 그렇게 노동자들을 만나고 다녔을까. 건물마다 있는 노동자들을 찾기도 어려웠다. 휴게실이나 대기실이 따로 없거나 지하 깊은 곳, 계단 틈 등이어서 그랬다. 노동자들은 다른 건물 노동자와 소통할 수 없었다. 학교와 업체가 엄히 금하고 있다고 했다. 단결할까 봐 그랬을 것이다. (p.156-157)

 

 표현은 언감생심, 생각조차 자기검열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보수주의 위정자들이 외치는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자유’는 자본가, 기업가의 자유일 뿐 노동자의 자유가 아니다. 헌법 제21조 표현의 자유 주체가 노동자가 되면 그것은 반사회적 국가 전복 행위가 된다. 헌법 제119조 경제민주화라고 하는 실질적인 자유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헌법 제33조 제1항(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은 노동삼권 즉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의 주체를 분명히 노동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이는 사내에서 ‘송곳’이 되어 미움받는다. 사회적으로는 국가 성장을 가로막는 이기적인 분열 종자가 된다.
 이러한 선동이 노동자에게도 내면화되는 것이다. 생물로서의 인간은 본질적으로 안정과 안전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한국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노동자의 자유가 아니고 자본가의 자유다. 노동자의 자유 확장은 자본가의 자유 축소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노동자가 자유를 추구하면 자유민주주의 부정 세력이나 친북 좌파가 된다. 의심하지 않으면 이런 거짓말을 믿게 된다. (p.160-161)

 

 조합원들의 요구는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었다. “노동조합 인정하라”, “건당 수수료 체계 폐지하고 기본급을 지급하라.”
 노동조합 결성권은 대한민국 최상위법인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이다. 그리고 건당 수수료 체계를 월급제로 바꿔달라는 것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요구였다. 대기 시간과 업무 준비 시간이 근로시간으로 인정되지 않는 현 체계에서는 성수기와 비수기의 임금격차가 천지 차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 초일류 기업이라는 삼성은 노동자들이 서초동 본관 앞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호소해도 들은 체 만 체였다.
 그러던 중 또 한 번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듬해인 2014년 5월 17일, 또 한 명의 조합원이 스스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고 염호석 조합원이다. 그는 부모님에게 남긴 유서에서 자신의 시신을 안치한 후 삼성전자서비스 투쟁이 승리하는 날, 그때 정동진에 화장해 달라고 했다.
 경찰은 전투 병력을 동원해서 신성한 장례식장까지 밀고 들어와, 울부짖는 조합원들을 방패와 최루액으로 진압하고 시신을 강제로 탈취해 가는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또 한 번의 열사 투쟁과 그에 따른 대기업 삼성의 위기를 국가 공권력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군부독재 시절 민주투사가 목숨을 잃으면 ‘열사 투쟁’ 국면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정보부, 안기부, 공안경찰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시신 탈취’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수십 년 만에, 21세기에 재현된 것이다. 다만 이제는 군부독재 정권이 아닌 삼성을 위해서라는 점만 달랐다. (p.178-179)

 

 우리 헌법과 민법은 결혼을 너무 신성시한다. 동아시아 유교문화의 특성도 있겠고, 해방 이후 국가에 의한 개발, 성장 중심의 중앙집중식 자본주의를 급격히 진행한 탓도 있다. 국가는 ‘복지’를 사사로운 것,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면서도 그 필요를 무시할 수는 없어서 복지 또는 일상적인 복리후생의 책임을 결혼에 의한 가정의 울타리 안으로 다 밀어 넣어 버렸다. 그래서 결혼을 통한 가족 구성이 마치 국민의 신성한 의무인 양 여겨진다. 이는 곧 이혼을 죄악시하고 반사회적 행동, 반국가적 이기주의로 여기는 풍토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참으로 무서운 역사, 숨 막히는 사회 분위기다. 한편 우리가 몽매한 탓도 있다. 남들 눈을 의식하고 남들과 똑같이 사는 것을 안전하게 생각하며 그렇지 않으면 공포를 느끼는 한국 사회 특유의 변질된 집단주의. 이 독특한 집단의식은 위에서 설명한 국가의 기조를 비판 없이 떠받치는 강력한 토양이 된다. (p.198)

 

 이 기나긴 소송에서 전부 승소를 한 후 ‘상처뿐인 영광’을 뒤로한 한 명의 약자가 다시 전쟁터로 들어가고,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약자가 똑같은 전투를 반복한다. 그래서 전투의 룰을 먼저 손봐야 하고, 악화일로의 전쟁을 공정한 평화로 전환하는 방법을 약자들 스스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노동 사건에 국한해서 내가 동의하는 구체적 방법은 아래와 같다.
 첫째, 노동법원을 신설해 노동 사건 구제 절차를 간소화해야 한다. 노동위원회부터 대법원까지 이어진 절차를 거쳐 부당한 인사권 행사임이 확정돼도 사용자가 이행강제금 처분을 받고 판결을 이행하지 않으면 노동자는 별도로 민사소송을 해야 하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진다. 원상회복과 보상에 이르기까지, 노동위원회와 별도 민사소송까지 포함하면 노동자 입장에서는 사실상 7심에서 10심까지 겪게 되는 것이다(지방노동의원회-중앙노동의원회-행정 1·2·3심-파기환송심-대법원 확정-민사 1·2·3심). 노동 사건은 일반 민사와 달리 생계와 직결된 경우가 많으므로 구제 절차의 신속성과, 집중 심리를 위한 법관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이에 2005년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제안한 ‘참심제 노동법원’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참심제란 직업판사 외에 노사를 대표하는 명예판사가 판결에 참여하도록 해서 재판을 공정하고 빠르게 진행하는 제도를 말한다. 노동분쟁 사건을 노동법원에서 일원화해 처리하게 되면 실질적인 구제와 조정이 용이해진다.
 둘째,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이다. 최근 가습기살균제 사건과 자동차 배기가스 조작 문제 등 기업의 횡포와 도덕적 해이가 초래한 사회적 피해들이 발생하면서 이에 대해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다. 이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입법이 검토되고 있는데, 해당 제도는 노동 사건에서 회사의 부당한 인사권 전횡에 책임을 묻고 재발을 막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부당해고, 부당징계, 위법한 구조조정, 부당노동행위 등 사용자의 불법행위에 대해 회사가 실제로 타격을 입을 만큼의 상당한 손해배상금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셋째, 노동조합 가입률의 혁신적 제고다. 우리나라 노조 가입률은 14% 내외다. 비정규직의 경우 1.5%에 불과하다. 노동자들이 뭉치지 않으면 사용자의 인사권 남용과 근로조건 저하가 빈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다른 사회적 약자들의 분쟁 영역에도 구체적인 해결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를 입법하는 곳은 국회고 집행하는 곳은 정부다. 법원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한다. 입법부, 행정부는 사회적 약자들이 각개전투에 나서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각개전투가 반복되고 결국 이들은 전투에서 이겨도 전쟁에서는 패배한다. 그러한 세상이 얼마나 우울한지 변호사는 경험한다. (p.215-217)

 

 한번은 규모가 있는 뉴스 방송사에서 프로젝트 자문 의뢰가 왔다. 주말임에도 양해 없는 개인 휴대전화 연락은 차치하더라도 문제가 좀 있었다. 프로젝트 참여 및 자문은 무료로 해 주어야 한다는 요구다. ‘공익’, 인권, 빈곤 계층 등 무료 자문 대상 기준에 맞지 않고 귀 방송사 정도면 충분히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도 차고 넘치기 때문에 위 제안은 적절하지 않다고 정중히 답변했다.
 방송사의 담당자가 반문하기를, ‘청년 일자리’라는 사회문제를 다루는 프로젝트인데 무료로 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한다. 이에, 나 역시 청년이고 벌이가 시원찮은데 귀사의 제안은 해당 프로젝트 주제도 배반하고 있으므로 유감을 표하며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방송사는 왜 특별한 사정 없이 무료 노동을 요구한 걸까. (p.236-237)

 

 이처럼 나쁜 결과가 뻔히 예견되었음에도 대체 왜 그동안 다들 손 놓고 있었던 걸까? 서서히 끓는 냄비에서 개구리가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학생, 교수 모두 ‘어, 어, 어…’ 하다 보니 2018년 변호사시험 합격률이 40%대에 진입하고 로스쿨은 존폐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다음 해인 2019년 제8회 변호사시험 응시자는 3,617명이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변호사시험은 옛날의 과거 시험, 이를 닮은 사법시험처럼 ‘정원제 선발시험’으로 개악되었으므로 합격자 수는 1,600명 내외로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합격률은 앞으로도 쭉 44% 정도로 유지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위원회 모든 구성원이 50% 미만의 합격률을 보기에 민망하여 사회적으로나 당사자들에게나 용인될 수 없다고 여겼는지 합격자 수를 특별한 이유 없이 조금 늘려서 현재는 50% 초반대의 합격률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주먹구구식 대중요법으로 로스쿨 제도는 가시적 반발 없이 위태롭게 연명하는 중이다.
 이제 로스쿨생 둘 중 한 명이 겨우 합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학생들은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심정으로 신림동 강의와 사교육에 매진하고 있다. 로스쿨 학비로 3,000만 원에서 6,000만 원가량을 내면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로스쿨 수업은 변호사시험 적합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관심이 없고 학점 방어 정도의 의미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다. 교수들도 골머리를 싸매고 있다. 학문의 실종과 로스쿨의 학원화, ‘교육’을 통한 법조인 ‘양성’이 아닌 학습 노동 ‘경쟁’을 통한 법조인 ‘배출’이다. 가장 질식하는 것은 로스쿨생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좋은 뜻으로 도입한 이 제도는 고사화 즉 말라죽었다. 훌륭한 씨앗에서 싹튼 묘목이 자라지도 못하게 물 한 방울 주지 않고 쥐어흔들고 짓밟던 자들이, 스스로 말려 죽인 로스쿨을 내려보면서 “거봐, 내가 그 나무 심지 말자고 했잖아”라고 조롱하는 셈이다. (p.247-248)

 

 변호사는 실력을 키우고 전문 영역을 발굴하거나 직역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전관예우, 전관 출신 일부 변호사들의 무책임한 수임과 터무니없는 수임료 책정, 선임계 없는 전화 변론, 브로커를 통한 불법 수임. 이를 근절하려는 노력은 대체 어떤 변호사단체가 나서서 하고 있는가? 시장을 좀먹고 법조인 전체를 욕되게 하는 이런 거악에 대해서는 ‘형님, 아우’ 하면서 감추고 덮으면서, 막 태어나려는 꿈 많은 예비 법조인들을 밟아서 푼돈이나 지켜보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다. 푼돈도 못 지키고 공멸하는 길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자기개발과 서비스 개선의 책임을 게을리하고 눈앞에 뻔히 보이는 사법 시장 거대 적폐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가장 약자인 예비 법조인 청년들을 죽이는 데 몰두하는 행태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유일한 법조인 양성 기구인 로스쿨을 붕괴시키는 결과까지 낳고 있으니 말이다. (p.254)

 

 고발 사건은 내부 제보, 아동학대, 성폭력 피해자, 심신미약자 등 본인이 직접 고소하기가 곤란한 사정이 있어서 가족, 대리인, 시민단체 등 조력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개정법에서는 경찰이 무혐의로 수사종결 처분을 해버리면 고발 사건은 그대로 끝난다. 이의신청을 할 수 있어야 검찰에 재검토를 받을 수 있고, 이때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하면 기존 제도대로 항고, 재항고, 그리고 법원 재정신청까지 여러 번 시정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고발 사건에서는 경찰이 최종심급이다. 즉 경찰이 대법관인 셈이다. 검경수사권 조정 때 생긴 이런 터무니없는 제도적 문제를 왜 아직도 그대로 두고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직접 목소리 내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를 대리해 고발하는 경우가 잦은 내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경찰이 수사종결을 해버리면 정말로 애간장이 타고 분노가 하늘까지 치솟는다. 경찰에게 직접 전화해서 언쟁을 하거나 다소 무례한 말투로 강력히 항의하는 것 외에 더 할 게 없다. 참으로 피해자들, 고발인들을 비참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나쁜 법률 개정이 아닐 수 없다. 변호사 업계에서는 정치성향이나 전문영역을 불문하고 이 고발인 이의신청권 박탈에 대해 황당해하지 않는 이가 없다. (p.281-282)

 

 잘못도 했고, 구성원 대부분이 자신을 원하지 않고 미워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괜히 소송을 걸어 싸우는 아집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심리학에서는 ‘악성 나르시시즘’이라고도 한다.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내가 그 사람의 변호사라면 수임료는 안 받아도 되니 이렇게 조언해 줄 것 같다. “그냥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면 어느 정도 존중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뭐든 다시 시작하면 되고요.”
 그런 조언이 통할지는 의문이다. 자존감이 낮고 품격에 자신이 없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조언에는 귀를 닫는 경향이 있다. 결국에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특히 그렇다. 자신의 의견과 행위에 대한 비판을 마치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이는 탓에, ‘공격받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잦다. 사실 그는 겁이 나는 것이다. 공감과 대화, 성찰과 사과, 그리고 행동 개선을 통한 관계 회복이라는 과정을 두려워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약한 자신이 버텨낼 수 있을까 겁이 나고, 누추한 자아가 들킬까 봐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또는, 귀찮은 것이다. 설명하고 토론해서 오해의 폭을 좁힌 다음 최선의 방안을 찾아 나서는 길이 번거롭다고 느낀다. 그 길에 나서본 적이 별로 없어서 방법도 잘 모른다. 대화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다.
 독재자들을 보자. 명분과 근거가 없는 자는 논리와 이성을 마주했을 때 감정적으로 언성을 높이거나 주먹을 휘두르고 만다. 낮은 자존감이 열등의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민주적 공동체라면 명분 없이 날뛰는 자마저도 차분히 설득해 감싸안는다. 이렇게 볼 때 대화, 성찰보다 법을 먼저 꺼내는 자는 그야말로 평화로운 민주 공동체의 적이라 할 만하다.
 법은 마지막 단계여야 한다. 형사사건의 피해자라면 가해자와 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수사기관으로 가야 하지만 사사로운 인간관계 갈등 및 사회 활동 중의 분쟁인 경우에는 대화가 우선이다. 이런 대화가 불가능할 때 권리를 침해당한 사람이 구제나 조정을 요청하는 최후의 기관이 법원이다. 그런데 스스로 소통을 차단하고 막무가내로 행동해서 사람들과 불화를 빚은 사람이 적반하장으로 남들을 공격하거나 복수하려고 변호사 사무실이나 기웃거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속으로 혼잣말을 하게 된다. ‘법 되게 좋아하시네.’ (p.304-305)

 

 드디어 우리 순서가 왔다. 판사가 지난 기일에 “다음 재판 때는 변호사님들만 오지 말고 당사자들도 꼭 같이 나오세요. 아셨지요?”라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변호사와 원고, 변호사와 피고 이렇게 네 명이 짝을 이루어 앞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바로 앞 사건에서도 당사자들과 변호사들이 우르르 나가는 것을 보았다. 또 한 번 생각했다. ‘판사님 재판 참 열심히 하신다.’
 우리는 원고였다. 판사가 변호사 말고 원고가 직접 소송 이유를 말해보라고 마이크 기회를 줬다. 오래 걸렸다. 피고에게도 마찬가지로 발언 기회를 줬다. 역시나 오래 걸렸다. 누구나 타인의 행동은 단순히 결과만을 평가하지만 자신의 행위는 복잡하게 동기부터 이해시키려 한다. 그래서 변론, 변명은 길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판사님이 오래 닫았던 입을 열었다.
 “양보는 결국 좋은 일입니다. 원고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면이 있으시겠지만 물러서는 만큼을 평화비용이라고 한번 생각해 주시면 어떨까요?”
 그러고는 따스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봤다. ‘평화비용’이라는 단어에 원고가 움직였다. 조금 후 판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원고를 직접 뵈니 제가 많이 설득이 됩니다. 그러나 원고가 고등법원과 대법원에 올라가서도 오늘처럼 판사님들을 마주해서 이렇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또 있을까요? 그 판사님들은 원고의 마음이 아닌 기록만을 보고 판결문을 쓰실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저는 원고에게 좋은 판결문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고가 고등법원과 대법원으로 상소를 할 거예요. 그럼 평화는 여전히 오지 않은 것이겠지요?”
 기록을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판사 얼굴을 쳐다봤다. 내 의뢰인도 여기서 끝난 것 같았다. 한 치도 물러섬 없던 채권채무 소송에서 갑자기 조정이 성립됐다. 조정 기일도 아닌 변론 기일에 조정이 성립되는 일은 흔치 않다. 그 판사의 능력이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유독 박식하거나 카리스마 있는 주도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첫째, 목소리가 부드럽고 인자하다. 둘째, 당사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는다. 셋째, “제가 볼 때는 이런 것 같은데 ○○ 씨는 어떤가요?”라고 질문한 후 생각할 시간을 준다.
 주된 특징은 그 정도였다.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매력이다. 진심이 있어야 하고 그 진심을 전달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도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하는 눈빛과 몸가짐이 오랜 시간 체화되어야 가능해 보인다. 속된 말로 판사에게 ‘심쿵’ 하기는 처음이다.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p.31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