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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회복 / 주디스 루이스 허먼 / 북하우스

 

 내가 처음 『트라우마』에서 트라우마의 망각된 역사를 썼을 때, 나는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의 고통이 개인 심리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회정의의 문제라는 논의를 펼쳤다. 트라우마의 원천에 있는 폭력은 지배와 탄압을 목적으로 삼는 폭력이라서, 애초에 그 폭력이 트라우마로 승인되고 트라우마라고 명명되려면, 세속적 민주주의 운동, 노예제 폐지 운동, 여성해방운동, 전쟁 종식 운동 같은 폭넓은 사회적 인권 운동의 역사적 맥락이 있어야 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베트남전쟁 참전 유공자들이 자신들의 몸은 안전하게 돌아와 있지만 마음은 평생 베트남을 떠날 수 없다고 증언하며 백악관을 향해 훈장을 내던진 뒤에야 비로소 미국에서 정식 진단명으로 승인되었다. 성폭력은, 여성들이 여성해방운동과 함께 발언권을 얻게 되고, 강간, 폭행, 근친 성 학대라는 은폐된 일상적 범죄들에 대해 증언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전 세계적 병폐로 승인되었다.
 트라우마 장애가 힘을 빼앗긴 이들의 질병이라면,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야말로 회복의 원리여야 한다. 트라우마가 수치심과 고립감을 낳는다면, 회복은 공동체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내 작업의 치료적 통찰이다. 다른 문화권에서도 다른 시대에도 통했던 통찰이 아닐까 싶다. (p.7-8)

 

 공개적 인정을 통해 생존자들을 예우하는 것이 정의라고 하면 이는 흔히 생각하는 정의 개념과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러한 인정이야말로 생존자 정의 실현에 필수적이다. 생존자들에게는 이러한 인정이 큰 의미가 있다. 공동체와의 깨진 관계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에 세워져 있는 무수한 ‘남부 연합 기념비’들에 대한 뼈아픈 청산으로부터 우리가 최근에 알게 된 것처럼 기념비는 정말 중요하다. 기념비는 우리 사회가 누구를 예우하고 누구를 존중하는지를 말해주는, 오래가는 공개 선언이다. 기념비는 어떤 경우에는 직접, 더 많은 경우에는 누락을 통해 누가 치욕당하고 무시당해야 하는지, 누가 안 보여야 하는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p.22)

 

 아울러 독재 정권은 일반 대중에게 냉소, 무관심, 옹졸한 이기주의 즉, 내 몸의 안락에 관심을 쏟을 뿐 내 이웃이 피해를 당했을 때는 관심을 거두는 태도를 심어놓는다. 통치자는 공동체 감각을 훼손하고 공익을 파손함으로써 종속 주민을 고립당하고 통제당하는 상태에 고정시킨다. 또 이런 정권은 부패를 크고 작은 규모로 키우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혜택을 누리는 데 혈안이 되게 만든다. 나는 항상 나의 동료 시민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저널리스트 마샤 게센에 따르면, 전제 정권에서 권력 가까이에 있는 것은 부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 경우에 따라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역으로, 부는 권력을 지키는 데 사용된다. 게센에 따르면, “이 체제는 부패 없이 존립할 수 없다. 이 체제에서 부패는 연료이자 사회의 아교이자 통제 도구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 체제에서 부패는 국민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하고 법치를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의 용제일 수도 있다. 이어서 게센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체제 진입자는 부패 공모자가 된다. 이 말은 모두가 언제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법의 적용 범위를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뇌물 수수 같은 작은 부패에 관여한 사람은 ‘다들 마찬가지’라고 못 박고 ‘오직 바보들만 정직 같은 공덕을 믿는다’라고 못 박음으로써 자기가 법을 안 지키는 체제에 관여한 것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게센에 따르면, 전제 정권에서 독재자들과 독재 변론자들은 끊임없이 거짓말을 한다. 범죄를 부인하기 위한 거짓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독재자가 무슨 헛소리를 하든 그것이 곧 현실임을 확실히 하기 위한 거짓말에 더 가깝다. 독재자가 끊임없이 쏘아대는 거짓말, 가스라이팅, 프로파간다에 지친 많은 보통 사람들은 그냥 신경을 꺼버린다. 진상 알아내기가 너무 위험한 일이 되었을 때 또는 그저 너무 고단한 일이 되었을 때, 그냥 모든 공적 관계에서 발을 빼버리고 싶은 마음, 가장 좁은 사적 관심사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공공 영역으로부터 관심을 거두는 보통 사람이 많아질수록, 절대 권력을 휘둘러 법뿐 아니라 진실성 그 자체를 마음대로 주무르겠다는 독재자의 큰소리가 점점 힘을 얻게 된다. (p.46-47)

 

 내가 피해자가 되면 친구들, 친척들, 이웃들을 포함하고 법조 관리들도 물론 포함하는 방관자들의 공모와 침묵이 엄청난 배신으로 느껴진다. 피해자라는 운명과 함께 고립당하고 방치당하기 때문이다. 약탈자가 존재하고 절대 권력을 노리는 사이코패스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런 사실은 생존자로서 받아들일 만하다. 하지만 그 많은 협력자들, 그러니까 조력자들, 변론자들, 남들의 복종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그 많은 암묵적 공모자들, 알고 싶지 않아 하거나 도와주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내 알 바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일신의 안락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은? 분란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정의를 시행할 책무를 다하기는커녕 권력자들과 결탁하는 사람들은? 생존자는 이렇게 배신당한 쓰라림을 가해자로부터 직접 당한 피해보다 심지어 더 크게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 책에 나오는 생존자들의 증언 속에서 거듭 듣게 될 주제다. (p.49)

 

 어떤 독재자도 전능하지 않다. 아무리 큰소리쳐봤자 그저 독재자다. 많은 다른 사람들의 적극적 공모나 소극적 묵인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것이 독재 정권이다. 방관자들이 생존자들을 지지하면서 옳은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면, 독재자 권력은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런 까닭에, 독재의 피해에 대한 보상은 다른 무엇보다 방관자들과 더 큰 공동체에게 스스로의 윤리적 책임을 인지할 것과 피해당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진상을 알아내 인정할 용기, 스스로의 공포와 냉소를 극복할 용기, 독재의 범죄를 규탄할 용기, 인간의 존엄함의 이름으로 생존자들의 동지가 될 용기를 내야 한다. 많은 생존자들이 정의를 말할 때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런 화해, 더 큰 공동체와의 화해다. (p.49-50)

 

 런던은 정의의 기원이 피해자와 윤리 공동체, 즉 상생의 규약을 집행하기 위해 결집하는 공동체의 동맹에 있다는 논의를 펼친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근본적으로 무너지고 공동체가 불의하다는 느낌이 드는 때는 언제인가를 두고, 공동체가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에게 책임을 지게 하지 못할 때라고 묘사하면서 런던은 이렇게 말한다. “범죄 피해자의 고통을 그저 개인의 불행이라고 여기는 곳에 있을 때 범죄 피해자는 어떤 느낌이 들까. 고립감을 느낄 것이고, 윤리 공동체로부터 무시당한다고 느낄 것이다. 피해자의 울분을 공유하고 정의에 대한 피해자의 요구를 공유하는 곳에 있을 때라야 비로소 피해자는 자신이 윤리 공동체에서 온전한 구성원으로서의 자리를 되찾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p.62)

 

 이런 피해자 의견서에 비판적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피해자에 대한 판사의 공감이 지나치게 가혹한 판결로 귀결되리라는 잘못된 편견 또한 갖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판사는 그런 감정들에 좌우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나는 판사가 바로 그런 감정들에 좌우되어야 하는 존재, 범죄가 저질러졌음이 판명된 뒤에는 윤리 공동체의 대표로서 범죄 피해자에게 연대를 표시해야 하는 존재라는 정반대의 논의를 펴겠다. 피해자에게 연대를 표시하는 것은 사실 여부가 합당한 절차에 따라 인정되기도 전에 피고인 쪽으로 또는 신고한 증인 쪽으로 기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배심원단이 범죄 사실을 인정했다면 사법기관들은 생존자와 동맹해야 한다. 권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피해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피해자의 옳은 공분을 공유한다는 것을 피해자 본인이 알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신뢰가 재구축된다.
 윤리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에 따르면, 타인의 피해에 공분을 느끼는 능력은 사회적 유대의 중요한 기반이다. 그는 울분과 공분을 눌러두어야 할 유해한 감정들로 보는 대신 공감과 연결의 잠재적 원천으로 본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공분은 내 명예가 훼손되었을 때뿐 아니라 타인의 명예가 훼손되었을 때도 발휘될 수 있다. 이렇게 “공유된 감정은 사람들을 감정 공동체로 묶어주는 데 도움이 된다.” (p.66-67)

 

 강간 사건 신고를 접수, 수사하는 경우는 드물고, 강간범을 체포, 기소, 처벌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최근의 기소 현황을 보면, 강간 사건의 1퍼센트에서 5퍼센트가 실제로 기소되고 강간 사건의 0퍼센트에서 5퍼센트가 유죄 인정이나 유죄판결로 마무리된다. 아동 성 학대 사건은 신고율 자체가 너무 낮고 기소율은 더 낮아서 일단 불처벌이 확실하다. 성폭행 피해자들의 승소를 위해 조력하는 법정 변호사 제인 매닝은 말한다. “나는 성폭행 생존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이런 종류의 직무 유기를 전국에서 거듭 목격하고 있다. 성폭행 사건이 접수되었을 때 수사관들은 피해자로부터 적절한 진술 확보하기, 증명력을 갖는 녹화 영상 찾기, 주요 증인들로부터 진술 받기, 가해자 배경을 수사해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전력이 있는지 알아보기, 증거가 될 만한 전자 자료나 문서 자료 보관하기, 그 외 기본적인 수사 절차 밟기라는 의무를 일상적으로 불이행한다.” (p.77)

 

 법정에 가는 사건은 이렇듯 극소수인데, 사건이 법정에 갔다 하더라도 피해자는 공방 중심주의 법정에서 겪을 장기적 시련을 예상해야 한다.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돌봄과 사회적 지지를 필요로 하는 시기에, 상대편은 피해자의 약점들을 모두 들추어낼 것이다. 법정이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보면, 외상 후 스트레스 징후들을 악화시키는 데 거의 최적화되어 있는 듯하다. 피해자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자기 생활에 대한 통제력과 통제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법정은 피해자에게 복잡한 규칙들과 관료주의적 절차들에 복종하기를 요구한다. 피해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일 수도 있고, 어쨌든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다. 피해자에게는 회복될 시간이 필요한데, 법정 일정은 피해자의 회복 생활을 거듭 방해한다. 소송은 그렇게 몇 달씩, 몇 년씩 계속될 수 있다. 피해자에게는 자기 이야기를 자기 방식으로 들려줄 기회가 필요한데, 법정은 피해자에게 증인석에 서서 검사의 단도직입적 질문들에 답변하기와 피고인 측 변호인의 반대신문 참아내기를 요구한다. 트라우마를 재경험하게 하는 특정 자극들은 종종 통제되거나 제한될 필요가 있는데, 법정은 피해자에게 과거를 아주 상세하게 재경험하기를 요구한다. 피해자는 가해자와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우려하는 경우가 많은데, 법정은 피고와의 대면을 요구한다. 성폭력 피해자가 사법 시스템과의 조우를 흔히 “2차 강간”이라고 말하는 데는 바로 이런 이유들이 있다. (p.79-80)

 

 트라우마 생존자는 자기 이야기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고 적대적 질문 앞에서는 그런 경우가 더 많으니, 법정에서 그만큼 더 불리하다. 트라우마 생존자의 이야기에 일관성이 없는 이유는 트라우마 기억이 통상적 기억과 다르다는 데 있다. 충격이 닥치는 순간 사람들은 종종 의식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전문용어로 해리라고 한다. 이 순간에는 경험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진다. 시간이 느려진다는 느낌일 수도 있고, 유체 이탈의 느낌일 수도 있다. 이런 상태에서 저장된 기억은 파편적이라서 통상적 내러티브의 논리를 결여하고 있다. 생존자는 냄새나 소리 같은 감각 자극적 세부 사항은 강하고 괴로운 플래시백으로 선명하게 떠올리는 반면 시공간 정보 같은 방향 지시적 세부 사항은 거의 혹은 전혀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다. 부분적 기억상실, 심지어 전면적 기억상실의 구간들도 나타날 수 있다. 많은 자료를 통해 알려져 있듯 이런 종류의 기억력 장애는 종종 혼란의 원천이 되어왔다. 생존자는 이런 종류의 기억력 장애 때문에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거나 자기가 미쳐버렸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기억 결손이 생존자의 신빙성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는 경우도 잦았다. 실은 이런 종류의 기억력 장애는 트라우마 사건의 진상 밝히기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p.81-82)

 

 캐버노 판사의 인준에 찬성한 한 상원 의원은 포드 박사의 증언이 완벽하게 신빙성 있는 증언이라고 생각되지만 지명자에게는 “무죄로 추정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 상원 의원처럼 무죄 추정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법을 제정해야 하는 상원 의원이면 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형사재판에만 적용된다. 캐버노 판사는 형사사건의 피고인으로 재판받은 것이 아니었다. 인준이 거부된다고 해서 신병이 구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법정의 판사로 승진하기에 적합한 인물인가에 대한 판단은 철저하고 공평무사한 조사에 따른 판단이었어야 했다. 지명자를 지지하는 증인이든 지명자가 승진에 부적합하다고 증언하는 증인이든 똑같이 존중받고 경청받을 권리가 있었다. (p.82-83)

 

 피해자, 가해자, 방관자의 삼각관계에서 가해자를 불처벌한다는 말은 방관자가 가해자와 한편이 된다는 뜻이고, 피해자가 사회와 법의 무게에 짓눌려 고립당한다는 뜻이다. 범죄는 피해자를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로부터 고립시킬 뿐 아니라, 피해자의 진실성을 의심하거나 가해자를 비난하는 대신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범죄를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킨다. 가부장제의 공고한 권력에 가로막혔을 때 거의 대부분의 윤리 공동체는 피해자 지원에 나서지 못한다. 피해당한 것은 피해자의 “개인적 불행”이라면서 알아서 회복하라고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것이 독재가 영속하는 방식이다. (p.84)

 

 정의의 이상적 모습에 관해 답변해준 생존자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한 것은 바로 이 첫 번째 내용이었다. 그들은 진상이 알려지기를 원했다. 수년간 가정 폭력 피해자였던 한 생존자(이름의 머리글자를 따서 ER)는 그 소망을 단순하게 표현했다.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그걸 사람들이 좀 알면 좋겠다. 저도 사람이면 다른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 아울러 그녀는 가해자가 가해 사실을 직시하기를 원했다. “저 사람은, 그거 다 거짓말이다, 라고 말하고 다닐 사람이다. 그렇게 믿고 살 사람이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 듣고 싶겠지. 야, 어딜 도망가!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말하고 있잖아!” (p.96-97)

 

 많은 생존자는 가해자의 진상 인정뿐 아니라 적극적 또는 소극적 공모자인 방관자의 진상 인정 또한 필요로 했고, 이런 종류의 인정에 가해자의 자백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예를 들면, 프라이스 박사는 아동·청소년 성매매의 진상이 자신이 나고 자란 펜실베이니아 러스트벨트의 더 넓은 공동체에 알려지기를 바랐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 문화가 그것을 작동시키는 연료다. 우리가 그것을 성장시키는 비료다. 가난을 당연시하는 문화, 가난한 사람에게 분수에 맞게 감사해하면서 살라고 하는 문화가 애팔래치아 문화다. 이런 문화에는 착취의 패턴이 있다.” ‘당신이 미성년자이고 약물에 취해서 저항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았을 텐데도 당신의 신체를 사용할 목적으로 돈을 냈던 남자들, 당신은 그 남자들에게 어떤 처벌을 내리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그녀는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단, 자신을 팔아넘긴 부친에게 처벌이 내려지는 것은 간절히 원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모든 구매자를 수감 시설에 가둔다 해도, 다음 세대에 다른 구매자들이 생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방대한 규모의 진상 인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국가의 권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피해자 증언을 중요한 증거로 채택하는 사법 시스템이 만들어지려면 그 길밖에 없다.” (p.98)

 

 진을 빼고 질질 끄는 법정 싸움 끝에(체잇은 이것을 “끝까지 싸운 싸움”이라고 묘사했다), 성가대는 결국 체잇의 소송을 법정 밖 합의로 가져갔다. 대부분의 민사사건들은 이런 방식으로 해결된다. 법정 밖 합의라는 신경줄 전쟁은 때로 공판 예정일 아침까지 이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법정 밖 합의는 (종종 기밀 유지 협약이 동반되는) 책임 인정 없는 합의금 지불로 성사된다. 상당한 재량을 쥐고 있던 성가대 측 변호사에게는 상대의 요구 조건이 곤혹스러웠다. 체잇은 성가대가 학대범과 달리 법원이 지급을 명한 배상금을 실제로 지급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배상금 액수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체잇은 기밀 유지 협약 서명을 거부하면서 합의에 필요한 협상 불가 조건으로 포식자 은닉 책임의 공개적 인정이라는 사항을 넣을 것을 요구했다. 체잇은 말했다. “그것이 심리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를 못 했다. 마음의 상처에는 인정이 약인 것을.” (p.110)

 

 진심이 담긴 사죄를 받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런 드문 경우, 정말 벅차오른다. 성실한 사죄는 악행의 구제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키운다. 반면에 불성실한 사죄는 바로 그 희망을 조롱함으로써 피해에 모욕을 더한다. 그런 까닭에, 나와 인터뷰한 생존자들은 피해를 인정받고 정당성을 입증받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에는 모두가 강하게 그렇다고 답변한 반면, 사죄받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양면적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후회의 표현은 조종의 다른 형태일 뿐일 것이라는 답변도 많았다. ‘나를 학대했던 자는 공감 능력 자체가 없는 것 같다’, ‘나를 학대했던 자가 후회한다고 말해도 나는 못 믿을 것 같다’라는 답변도 있었다. “과오가 범해졌다” 같은 수동태 사죄나 “피해자가 있었다면 유감이다” 같은 가정법 사죄를 일컫는 소위 “정치가의 사죄”를 받고 싶다는 답변은 전혀 없었다. (p.119-120)

 

 나와 인터뷰한 생존자 중에 학대 가해자로부터 사죄받으려고 한 적이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였고, 실제로 사죄받은 사람은 더욱 소수였다. 사죄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답변과 함께 몇몇 생존자는 사죄받은 뒤에 화해 부담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학대 가해자인 오빠로부터의 사죄를 절대 원치 않는다는 시인이자 근친 성폭행 생존자 “캐럴라인”은 이렇게 말했다. “오빠는 그런 짓을 한 걸 미안해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짓에 대해 말하는 걸 좋아라 할 거다. 오빠는 그런 짓을 했다고 후회할 사람이 아니다. 나는 또 한 번 오물을 뒤집어썼다는 느낌에 괴로워질 거다. 그러니 사죄받지 않도록 조심할 거다. 사죄를 받으면 용서해주라는 압력이 내려올 테니까.” (p.120-121)

 

 물론 용서한다는 말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생존자들에게 용서한다는 말은 가해자와 무관하게 울분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용서는 가해자가 반성하거나 사죄하는가 여부와는 무관하게 생존자 본인의 치유에만 관여한다. 그런 의미의 용서라면 나와 인터뷰한 사람들 중 다수가 용서를 목표로 삼는다. 이런 종류의 내려놓기가 그저 의지력을 통해 행해지기는 불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용서할 때 드는 감정은 진실한 반성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반응인 용서해주고 싶은 즉각적, 자발적, 해방적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러한 일방적 유형의 용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모든 것과 보상받지 못할 모든 피해를 능동적으로 애도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생존자들이 이 과정을 묘사할 때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내려놓는 과정인 것과는 별도로 모든 자기 비난을 내려놓고 마침내 스스로를 용서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가정 폭력 생존자 메리 월시의 표현대로, “용서한다는 것은 더 좋을 수 있었을 과거에 대한 모든 희망을 접는 것이다.” (p.123-124)

 

 현대 기독교의 설교들은 종종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피해에 대처할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용서를 통해 분노를 초월하라고 훈계하는데, 그렇게 용서의 미덕을 기를 것을 늘 권고받아온 것은 특히 여성들, 그리고 기타 종속 집단의 구성원들, 정당한 울분을 표출함으로써 권력자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용서하는 것은 피해자의 영혼에 좋을 뿐 아니라 피해자의 건강에도 좋다고 홍보되어왔다. 민간 기독교 비영리 단체인 템플턴재단은 ‘범죄 피해자를 위한 용서 테라피’의 효과를 자료화하는 운동을 제안했다. 재단의 연구비를 지원받은 한 연구 집단은 용서라는 명확한 의제를 따르는 주 1회 근친 성폭행 피해자 테라피 프로그램을 단행본으로 자료화했다. 극도로 제한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삼은 이 책의 저자는 근친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다른 모든 요법들보다도 용서 배우기 요법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트라우마 스트레스 분야에 종사하는 대개의 전문가들이 일반적으로 이러한 판단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p.128)

 

 형법에서 정의의 척도는 처벌이다. 정의의 구현 주체로서 국가는 처벌의 기준(벌금 액수, 징역 기간)을 정하고, 이러한 획일적, 수량적 기준은 범죄의 경중에 비례해 공평하고 합당하게 적용되리라고 여겨진다. 이렇듯 척도의 표준성, 죄질과 처벌의 상응성, 차별 없는 공정성을 지향한다는 점은 응보적 정의의 중요한 장점으로 여겨진다. 실상을 보자면 사법 시스템이 모든 국민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서, 잘 알려진 대로 젠더, 인종, 계급에 따라 처벌에 상당히 큰 격차가 있다.
 국가 기반 형사 사법 시스템의 진화는 통상적으로 전근대적, 비공식적, 공동체적 불의 시정 시스템으로부터 일진보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통념에 따르면, 국가는 진상을 밝히고 잘못을 벌하는 주체로 나섬으로써 위험한 응징(자경 활동, 폭력단 패싸움, 가문 간 혈투)을 차단하고 처벌의 임의성, 잔인함, 과도함을 억제한다. 또 국가는 수많은 힘없는 피해자들에게 정의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국가가 없었다면 그들은 그 어떤 형태로도 불의의 시정을 모색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가 원고의 배역을 가져갈 때, 법정이라는 무대에서는 원고 대 피고의 대격돌 드라마가 펼쳐지는 만큼 피해자는 비중 없는 조연의 지위로 밀려나게 되고, 증인 자격으로 본인의 경험을 증언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때 법정의 피해자 심문은 적대적일 수도 있고 피해자 수치 주기로 흐를 수도 있다. 우리가 앞 장들에서 보았듯, 괴롭힘과 겁박에 시달리는 피해자 증인은 형사 사법 시스템으로부터 그 어떤 유효한 보호책도 제공받지 못하고 있고, 자기 이야기를 자기 맥락에서 들려줄 기회 또한 거의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p.134-135)

 

 그녀는 말했다. “내가 그저 범행의 증거물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이게 내 사건이 아니라니! 내 사건이 아니라니! 피해자는 한 번 더 대상화된다.” 사디나의 모친은 소송의 과정을 “계속 다시 시작되는 악몽”이라고 묘사했다. 그녀가 보기에는 피고인이 피해자보다 더 많은 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가족에게 소송의 과정은 돈이 많이 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공판이 있을 때마다 온 가족이 집에서 뉴욕주 북부까지 장시간 이동해야 했다. 가해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지고 형이 언도되면 시련도 “종결”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소송이 끝났을 때, 가족은 아무런 안도도 만족도 느낄 수 없었다. 회복이라는 기나긴 과정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정의의 좀 더 바람직한 형태는 어떤 것이겠느냐는 질문에 사디나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범인에게 ‘왜 그랬냐?’라고 따져 물었어야 했고, 범인은 범행을 인정하고 피해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할 방법도 없었고 범인에게 그렇게 하게 만들 방법도 없었다. 애초에 의사를 교환할 기회가 없었다. 생존자에게는 중상모략으로부터 보호받을 방법이 더 있어야 하고 피고인에게는 범행을 부인할 때보다 인정할 때 유리한 점이 더 있어야 한다. 기존 시스템에서 피고인은 ‘손댄 적 없다, 손댄 적 없다, 손댄 적 없다’로 일관하는 것이 유리하다.” 기존 시스템에서는 범행 인정을 끈질기게 거부하고 피해자의 신빙성을 공격하는 것이 가해자에게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았다. (p.136-137)

 

 회복적 정의 운동은 비균질적인 연합체로, 그 토대에는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선주민들의 실천들을 활용하는 작업들이 있고, 과도한 처벌을 혐오하는 진보적 감수성, 급진적 평화주의, 기독교의 용서 교리를 테두리로 삼고 있다. 세계 무대에서 이 운동이 유명해진 것은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를 앞세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TRC)를 통해서였다. 아프리카국민회의가 아프리카너 정부를 상대로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을 위해 합의한 내용 중 하나가 폭력적 정치범죄를 저지른 백인 가해자들을 철저한 자백의 대가로 사면해주는 것이었다. 많은 가해자들이 이 기회를 이용했다. 최고 지도부의 가해자들은 그러지 않았지만 말이다.
 가해자들의 자백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시절 자행됐던 잔혹한 독재의 추악한 진상을 기정사실화하는 힘이 되었고, 백인 우월주의를 인자하게 그려 보이는 그럴듯한 역사 수정주의 서사가 창조되는 것을 불가능한 일로 만들었다. 이는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한 성취였다. (이와 대비되는 예로 행복하고 충성스러운 노예들과 친절한 주인들을 감상적으로 그려 보이는, “잃어버린 대의” 프로파간다의 마스터피스이자 미국 영화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생각해보라.) 이 위원회의 성과 중에 가장 혁신적이었던 것은 생존자 증언을 중심에 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많은 생존자들이 공개 석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 이야기들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생방송되었다. 투투 대주교가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보여준 존중과 공감의 자세는 생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생존자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존자에게 어떤 범죄가 얼마나 끔찍하게 저질러졌는지 인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측면에서 이 나라에 본보기를 제공했다. (p.144-145)

 

 펌라 고보도-마디키젤레 박사는 진실화해위원회에 젊은 심리학자로 참여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찾아내서 가능하면 대면 모임, 회복적 정의의 비전에서와 비슷한 종류의 모임을 주선하는 것이 그녀의 업무였다. 그녀는 많은 피해자가 그런 모임이 성사되기를 원한 반면 대부분의 가해자들(또는 그들의 변호사들)은 싫다는 반응이었다고 전하면서, 모임에 나가서 사죄하겠다고 말한 가해자는 5퍼센트 미만이었다고 가늠했다. 변호사의 개입이 없었다면 20퍼센트까지는 올릴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 그녀의 짐작이었지만 그래봤자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치는 비율이었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게나마 있었고, 그런 경우에는 모종의 치유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니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상받지 못한 상태에서 일괄적으로 용서한 것은 시기상조였다고, 펌라 고보도-마디키젤레 박사(현재는 교수이자 유명한 작가)는 그로부터 수년 후에 반성했다. (p.146)

 

 케임브리지에서 경찰 교육이 시행된 초기에 교육 담당자로 참여했던 심리학자이자 폭력 피해자 프로그램 동료인 바버라 햄도 교육 중에 그런 저항적 태도(“나약한” 생각들, 그중에서도 특히 폭력 피해자의 최초 응대자인 경찰은 폭력에 빈번히 마주칠 수밖에 없으니 본인의 정신 건강에 손상이 있을 수도 있고 스스로 자기 돌봄에 힘쓸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에 맞닥뜨렸던 경험이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비교적 젊은 경찰들은 수용적인 태도를 보였음에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인정하면 나약해 보일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표했다. 아무리 미미하게라도 취약성을 드러내게 되면 일부 동료들로부터 조롱당할 수도 있고 중간 관리자들(이른바 “늙은 황소들”)로부터 호되게 혼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예상이었다. 그들의 의무가 지역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할 때, 정형화된 남성적 강인함의 지속적 수행을 요구하는 전통적 경찰 문화는 지역 주민들에게 해로울 뿐 아니라 경찰 본인들에게도 해로운 듯하다. (p.185)

 

 워드가 보았을 때 정의를 구현한다는 말은 폭력 피해자를 위한 법적 보호책을 확보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폭력 피해자의 회복과 생장을 위해 조력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법원이 가지고 있었던 권력을 보통 사람들에게 넘겨준다는 뜻이었다. 이것을 공동체 법의 실천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정의를 배달합니다’는 버몬트에서 설립되어 20년이 넘게 성장하고 번영해왔다. 워드가 지금도 센터장으로 있다. 센터의 사명은 여전히 시골 지역 가정 폭력·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법률 서비스, 교통편, 상담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피해자의 자립을 지원하는 것이다. 워드는 최근에 나와 다시 한번 인터뷰하면서 지난 20년간 달라진 점들을 개괄했다. 지금 버몬트 판사의 절반이 여성이고, 거기서 변화가 생겼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판사들이고,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에게는 경청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워드는 의뢰인들이 살아온 삶과 법률 언어 사이에 번역이 필요한 간극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변호사 선임은 여전히 필수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여자들에게는 여전히 워드 같은 변호사가 필요하다.
 ‘정의를 배달합니다’ 서비스 같은 서비스가 모든 공동체의 기준이 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생존자의 안전과 치유를 실질적으로 우선시하는 사회이자 생존자의 피해를 실질적으로 보상하는 사회가 그런 사회일 것이다. (p.188-189)

 

 「생존자 의제」를 통해 그려지는 정의의 급진적 비전은 가해자 처벌 대신 생존자를 위한 안전과 치유에 초점을 맞춘다. 「생존자 의제」는 가해 당사자와 피해 당사자 양쪽 다의 인간성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가해 행동을 중지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가장 어려운 문제를 진심으로 고심한다. 「생존자 의제」의 정의 비전은 나와 인터뷰한 생존자들이 그리는 비전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생존자 의제」는 기존의 공동체 안전 체계들이 적어도 당장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생존자 의제」는 경찰을 없애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법원을 없애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감옥을 없애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생존자 의제」는 “공동체가 안전을 다루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상상”하자고 하고, “형법 제도”의 대안, 가해자 처벌 대신 생존자 치유에 초점을 맞추는 제도를 창안하자고 한다. 「생존자 의제」는 가해자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새로운 방식, 가해자를 감금하거나 가해자를 추방하거나 가해자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방식을 상상해보자고 한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책임의 정도를 결정할 수 있는 모델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존자 의제」도 인정하고 있다. 쇄신된 윤리 공동체에서 방관자들은 종속당해온 사람들과 단호하게 함께하기 위해 지배하는 사람들과 공모하는 편한 길을 포기하는데, 「생존자 의제」는 바로 그렇게 윤리 공동체를 쇄신하자고 한다. 마지막으로 「생존자 의제」는 백인 남성 우월주의를 미화하는 문화를 변혁하고 성폭력의 “근본 원인”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성폭력을 예방하면서 이를 위해 공중 보건과 교육에 대한 공동체 투자를 확고히 단행하자고 한다.
 이것이 생존자 정의의 급진적 비전이다. 우리 안에 너무나도 깊이 박혀 있는 억압 체계들을 해체하기 시작할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새로운 체계들을 창안할 것을 이 비전은 우리 모두에게 요구한다. 한 사람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피해를 보상할 방법을 생각하면서 정의의 초점을 그 사람에게 맞출 것, 그리고 치유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것을 생존자 정의는 우리 모두에게 요구한다. 생존자에게는 진실을 통과해 회복에 이르는 과정, 곧 윤리 공동체로부터 인정받고 옹호받고 사죄받고 보상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공동체가 이 과정을 완수했을 때 비로소 공동체와 생존자 사이의 망가진 관계가 치유되고, 신뢰가 회복되고, 더 나은 종류의 정의가 이루어진다.
 폭력의 근본 원인은 독재의 규칙들이다.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우리는 호혜의 규칙들, 곧 민주주의 사회에서 신뢰와 정의의 토대를 만드는 규칙들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호혜의 규칙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니, 그 규칙들에 따라 살 수 있는 행운이 우리 모두에게 있으면 좋겠다. (p.280-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