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 홍명교 / 빨간소금
우리는 한국을 화두로 대화를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의 진보적 학생들은 한국의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자운동에 관한 책과 영화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과 구해근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중국어 번역본을 대학생과 활동가가 많이 읽는다. 전자는 해적판이고 후자는 정식판인데, 실제로는 두 책 모두 PDF 파일로 돌아다닌다.
2018년 중국에 몰아닥친 학생운동 탄압 사건이 한국 언론에 보도됐을 때 《전태일 평전》이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처럼 알려졌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일부 좋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중국 인터넷의 진보 매체들에서 전태일에 관한 칼럼이나 언급이 빈번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서울로 돌아온 뒤 샤오장이라는 중국인 친구를 만난 적 있다. 우린 2019년 봄에 개관한 전태일기념관에 함께 갔다. 그 역시 전태일의 생애를 잘 알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최근에 책을 읽어서인지 전태일의 고향이나 살던 곳 등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션위쉔은 한국의 대학생도 《전태일 평전》을 읽는지 물었다.
“흠…… 모든 학생이 읽는다고 할 수 없지만, 아직까지 꽤 많이 읽는 것 같아. 청소년 필독서 목록에도 있고. 전태일 열사는 민주화운동 이후에 꽤 정식화되고 영화나 만화책 등으로도 나와서 많이 보급됐어.”
그러나 위쉔이 진짜 궁금해하는 주제는 그보다 진지하고 급진적인 운동에 관해서였다.
근대 이후 중국의 빛나는 지성 루쉰(鲁迅)은 소설 《고향》에서 이렇게 썼다. “내 생각에 희망이란 본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는 땅 위의 길과 같아서, 기실 지상에는 본래 길이 없지만 많은 사람이 걸어가면 길이 되는 것이니까.” 션위쉔과 천커신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 길을 만드는 청년들이었다.
또래들이 하나둘 사회운동을 떠날 때마다 더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사회에서 가장 적극적인 기질의 소유자일 것만 같은, 그래야만 하는 전업 활동가가 냉소적으로 변한다는 건 뭘까. 주위 사람의 죽음, 부패한 경찰에 의한 시신 탈취, 믿었던 조합원의 배신, 떠나가는 사람들……. 이런 일들을 계속 목격하다 보면 어떤 심각한 일이 터져도 충격받지 않을 마음이 필요하다. 냉소와 경멸, 포기는 기대치를 제로로 수렴시키는 가장 용이한 마음방어법이다. 나는 그런 쉬운 방법을 택했다.
2017년 말 기준 농민공의 숫자는 2억 9,000만 명에 육박한다. 중국은 태어난 지역에서 호적을 옮기는 게 제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1958년 시행된 호구제도에 따라 농촌에서 도시로 호구 이적이 엄격히 제한돼 있다. 과거 농민은 인민공사나 생산대 안에서 평생을 살았으며, 비농민은 ‘단위’를 통해 보호받았다. 농민은 국가가 제공하는 교육, 의료, 주택, 직장 등 복지 혜택을 호구에 따라 제공받았다. 그러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이동이 가능해지고 도시 산업경제가 개발되자 농민이 대거 도시로 유입된다. 도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감당할 수 없었던 중국 정부는 자본주의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호구 이동을 불가능하게 놔두었다. 농민공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불안정 노동자다.
농민공은 2010년대 폭발적으로 증가한 저항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시작은 폭스콘 선전 공장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2010년 1월 23일, 19살의 노동자 마샹치엔(马向前)이 기숙사 옥상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잃었다. 그해 11월까지 16~23살의 노동자 15명이 연달아 자살을 시도해 13명이 세상을 떠났다. 폭스콘의 끔찍한 노동 강도와 엄격한 통제, 매일 12시간 넘게 일해야 하는 장시간 노동이 빚은 참사였다. 엄밀히 말해 노동자는 연장 근로에 대한 선택권 자체가 없었다. 한 달 내내 연장 근무를 하느냐, 아니면 한 달 내내 단 하루도 연장 근무를 하지 않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연장 근무를 전혀 하지 않고 기본급만 받으면 생계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저임금이었다. 폭스콘 공장에서 일어난 연쇄 자살은 아이폰이라는 21세기 첨단 상품에 숨겨진 19세기식 노동의 진실을 드러냈다.
그해 중국에서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각양각색의 기념 행사와 콘텐츠가 쏟아져 나왔다. 국영방송 〈CCTV〉는 4월 27일~5월 1일 매일 저녁 9시 ‘마르크스는 옳았다(马克思是对的)’라는 제목의 강좌를 편성했다. 이 프로그램은 선별된 청중과 관변 마르크스주의 학자의 대화로 이뤄졌는데, 중국의 많은 네티즌이 이 프로그램 속의 동원된 박수와 질의, 낯선 대화에 의문을 드러냈다. 한 네티즌은 이렇게 썼다. “마르크스 이념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인데, 이 프로그램은 죄다 마르크스를 우상화하더라. 마르크스가 가장 반대했던 건 개인숭배 아닌가?”
5월 4일에는 인민대회당에서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시진핑 국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총리 등 정부 지도자들이 거대한 마르크스 사진이 걸린 무대 위에 올랐다. 시진핑 주석은 “마르크스는 천년 제일의 사상가”라면서, “공산당원이라면 마르크스주의 경전을 읽으며 마르크스 원리를 깨닫는 것을 생활 습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사회를 과연 사회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지, 혹은 완전히 자본주의에 다름 아닌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자유주의 칼럼니스트 캐리 황(Cary Huang)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중국은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특징을 갖고 있는데, 국가가 시장을 규제하는 일종의 당 주도 자본주의 사회다. (……) 부패는 구조화되어 있고 불평등이 만연하다. 이 국가자본주의에서 부의 불평등은 볼썽사납고, 찰스 디킨스식의 착취는 흔하며, 세계 최대 경제 규모를 가진 미국보다 억만장자의 수도 훨씬 더 많다. 이것은 바로 1848년 출간된 《공산당 선언》에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전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던 정치경제 시스템의 일종이다.”
중국 사회의 성격을 둘러싼 논의에 무수한 쟁점이 있다. 많은 학자가 지금의 중국은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에 가깝다고 말한다. 2018년 세계에서 10억 달러 이상을 소유한 부자 2,694명 중 중국인은 819명이었다. 소득 분배에 따른 불평등 지수는 0.468에 달했다. 한국이 0.317인 것에 비하면 월등히 높은 수치다.
우리는 세 번째 전시 구역으로 갔다. 전시 공간 끝에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의 국가주석 역임 당시 사진들이 연이어 있었다. 쉐린은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사진이 2장씩이지만, 시진핑 사진은 5장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코너를 돌자 《시진핑, 국정을 논하다(习近平谈治国理政)》란 제목의 선문집을 수십 개 언어로 번역한 책들이 전시돼 있었다.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 전시〉의 마무리가 이 책이라는 사실이 참 애석했다.
톈진에 가면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설계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빈하이(滨海) 도서관이 있다. 개관 당시 도서관에서 배포한 사진에는 책장에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빈하이 도서관에 갔을 때 카메라를 갖고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서 의아했다. 안에 들어가서 그 이유를 알았다. 진짜 책은 없고 책 표지 사진만 가득했다. 그러나 이 도서관에 수백 권씩 꽂혀 있는 책이 하나 있었다. 바로 시진핑 선문집이었다.
확실히 중국인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개방적이어서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를 잘 나눈다. 공공버스에서 종종 느낀다. 한낮의 여유로운 시간대에 버스를 타면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자유롭게 대화하는 걸 볼 수 있다. 기차 안이나 공공장소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르는 사람끼리 같은 탁자에 앉아 주저 없이 대화를 나누고 친구가 된다. 확실히 한국과 다르다.
나 역시 보통의 한국인처럼 낯가림이 있다. 모르는 사람과 얘기를 시작하지 않는 게 내가 한국인으로 살며 익힌 습관이다. 그래서 중국에 처음 왔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눈썰미가 있는 중국인은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이 중국인처럼 보이지 않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편이다. 딱 봐도 한국 사람처럼 생겼다고 한다. 그게 뭔지 깨닫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중국인의 이런 개방성이 부럽고, 어떤 면에선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확실히 중국 문화의 장점이다. 젊은 층에선 덜하다고 하지만, 중국인은 서슴없이 대화하고 곧 친구가 된다.
나는 이 엉뚱한 친구에게 네 실패담은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명랑하게 답했다.
“난 내 또래들이랑 비슷해. 지금 상황 자체가 어려우니까 모든 게 실패지. 이미 명문대생이 아니라서 실패야. 중국에선 베이징대나 칭화대를 나와야 풍족하게 살 수 있거든. 헤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언론은 중국이 초고속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며, IT 기업들이 정부의 강도 높은 지원으로 한국을 추월했다고 보도해왔다. 사실이다. 하지만 그 뒤에 감춰진 그늘은 언급하지 않는다.
베이징에서 만난 대학생들은 하나같이 취업이 너무 어렵고, 취업하더라도 임금이 턱없이 낮다고 했다. 실제 내가 본 베이징의 대학생들은 공부를 아주 많이 한다. 많은 학생이 항상 영어 공부에 열중이고, 취업 시장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그렇게 어렵사리 IT 기업에 취직하면 기다리는 건 저임금 장시간 근무다. ‘996제’는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12시간 노동을 주 6일 한다는 뜻으로,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은 이를 공공연하게 당연시해왔다. 화웨이의 ‘늑대 문화(狼性文化)’ 역시 IT 산업의 급성장 뒤에 감춰진 노동자의 처참한 현실을 보여준다.
피촌에서 이와 비슷한 실험이 있었다. 중국 중앙희극학원의 희극문학과 자오즈용(趙志勇) 교수는 2009년 베이징 피촌에서 연극 공연을 보고 깊이 감동받아 이후 여성 농민공들에게 무료로 연극을 가르쳤다. 그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다른 정주민들로부터 차별받기 일쑤인 여성 농민공들과 함께 놀이에 가까운 연극 수업을 했다. 그의 교수법은 아우구스토 보알의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에 소개된 교수법과 닮아 있었다. 공짜인 데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수업에 함께했던 여성들은 자오즈용 교수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했다. 그러면서 두꺼운 벽처럼 느껴지던 세상에 대해 자기만의 저항 방식을 찾고 삶을 돌아보았다. 직접적인 저항도 딱히 정치적인 시도도 아니었지만, 이런 과정은 밑바닥 민중이 자신의 언어를 찾고 사회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된다. 그런 경험이 있어야 더 고차원적인 행동과 실천이 가능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잘나가던 야학에 노동자들이 오지 않게 됐을까? 일각에서는 교수법이나 수업 내용을 지목했다. 하지만 교수법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경험이 쌓이면서 발전했다. 수업 내용도 시사나 법률, 육아, 영어, 독서회 등 다양했다. 그렇다면 갑자기 노동자들의 취향이 바뀐 걸까? 야학 수업을 멈추게 돼 죄송하다고 말하자 한 노동자가 이렇게 고백했다.
“학생들, 너희 잘못이 아니야. 너희들이 연 저녁 모임에 난 항상 참가했어. 너무 멋지고 훌륭하더라. 우리는 야학에 안 가고 싶은 게 아니야. 절대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럼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대부분의 노동자가 고백한 불참 사유는 다름 아닌 ‘악화된 노동 조건’이었다.
당시 중국의 대학들은 관리 비용을 줄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가장 먼저 시설관리 노동자의 인건비를 축소했다. 2016년을 지나며 식당 노동자의 숫자가 크게 줄고 임금은 동결됐다. 그 결과 일이 훨씬 고돼졌다. 노동자들은 퇴근 뒤 큰 피곤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임금 역시 터무니없이 적었다. 노동자들은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거나, “2,000위안으로는 생활을 꾸리기 어려워서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혹은 고향에 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투잡을 뛰어야 했다. 그런 삶을 반복하다 보니 야학에 다녀오면 잠을 제대로 자기 어려웠고, 여가활동할 여유가 없었다. 이에 더해 대학의 청소·식당·보안 노동자는 1년짜리 계약직으로 일하거나, 아파도 휴가를 내기 어려운 농민공이자 불안정 노동자였다. 이런 구조적 현실이 만든 한계를 야학교실 학생들이 나서서 해결하기엔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오늘날 중국에서 톈안먼항쟁은 금기어다. ‘1989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에둘러 지칭한다. 그해 4월부터 톈안먼광장은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두 달 가까이 이어지던 항쟁은 6월 4일 비극으로 종결됐다. 그날 수많은 학생과 노동자가 목숨을 잃거나 구속됐다. 〈학생방송〉은 “베이징 적십자사 통계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2,60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주 시위는 전국 181개 도시로 퍼졌고, 정부는 경찰을 포함한 계엄군을 동원해 진압했다. 한 달 동안 1억 명 넘게 참가한 시위는 놀랍도록 빠르게 진압되었고, 세상은 빠르게 잠잠해졌다.
이런 정치적 격동이 끝난 이후 학생운동 역시 금기가 됐다. 1989년부터 1990년대 초에 이르는 혼란기에 중국공산당 내 좌파는 역량을 보존하고 다시 개혁을 꾀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천커신에 따르면, 당시 뜻있는 당원들이 대학 사회(학원)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를 문헌으로 확인할 길은 없지만, 구전으로 전해진 후배들의 증언이니 반쯤은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은 대학에서 독서회를 만들고 역사나 시사 문제를 토론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2000년대가 되면서 과거에 가졌던 정치성은 상당 부분 퇴색됐다.
광둥성에 사는 한 청년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싼허에는 사람이 있다(人在三和)〉에서 그 슬픈 절망을 목격할 수 있다. 모아놓은 돈이나 집이 없어 싼허인력시장 인근을 떠돌며 살아가는 신세대 농민공 탄형은 온종일 뼈 빠지게 일한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못에 찔려도 치료받기 어렵고 온갖 억울함을 호소해도 들어줄 이 없는 도시에서 그가 기댈 곳은 싼허에 있는 허름한 PC방뿐이다. 그런 그에게 작은 소원이 하나 있다면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다. 자립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어 남을 돕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게 이 고독한 청년 농민공의 꿈이다.
경제 호황기 국제도시 홍콩은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져 사는 아름다운 도시처럼 묘사됐다. 나 역시 그런 선입견을 갖고 홍콩에 왔다. 하지만 어떤 풍경들은 이 도시의 발전과 저항 모두 인종적으로 분열된 채 지속되어왔음을 느끼게 한다. 이런 분할은 홍콩에 남아 있는 식민지 잔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방해한다. 완전하지 못한 탈식민지화의 후과를 7분의 1에 달하는 극빈층, 홍콩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동남아 출신 여성·이주·가사 노동자가 떠안은 것 같다. 특히 모국의 성차별과 불평등, 빈곤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여성이 홍콩의 모순을 온전히 떠안고 있다. 이주노동을 연구해온 라셀 파르레냐스(Rhacel Parreñas)는 홍콩의 이 같은 현실을 빗대어 “재생산 노동의 국제적 분업”이라 묘사했다. “이민 송출국과 유입국 모두에서 대부분의 여성은 성평등한 가사노동 분업 환경에 놓여 있지 않다. 대신 이들은 자신의 인종적·계급적 특권을 사용해 자신이 책임지게 될 재생산 노동을 무권리 상태의 여성에게 전가했다.” 같은 이민 유입국인 한국 사회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비판일지 모른다.
사라진 나의 중국인 친구들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공학도의 티셔츠에 적힌 문구처럼 “어두운 밤”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오랜 침묵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사람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루쉰이 말했듯 “중국에는 머리를 꼬라박고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있고, 죽기 살기로 악을 쓰는 사람이 있으며, 인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고통을 덜어 달라 비는 사람이 있고, 진리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한국이나 동아시아의 다른 도시들에도 그런 송곳 같은 사람들이 숨어 있다.
베이징에서 만난 어느 익명의 활동가는 ‘지구전을 논하다’라는 긴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인간의 길에는 창상(沧桑: 노련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고, 역사는 탄탄대로가 없다. 보기에 가장 용이한 경로는 왕왕 막다른 골목을 마주하게 된다. 굴곡이 많아 보이는 길이 지름길이다.” 동아시아 송곳들의 지구전이 이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