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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나는 도시 / 송민철 / 효형출판

 

 내가 발견한 실마리는 ‘사람들의 만남’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원초적인 즐거움뿐 아니라 실질적인 사회적 효용을 만들어낸다. 이웃과의 만남은 지역 공동체를 복원시키고 우리 사회가 개인의 능력 밖에 산재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사람 사이의 신뢰가 회복되면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 또한 줄어든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감으로써 서로의 인류애를 확인하고 스스로의 존엄성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도시를 설계하는 일은 사람을 만나게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만남을 일으키는 장소를 만들고, 지금처럼 자동차가 도시의 주인 행세를 하며 정작 중요한 ‘사람들의 만남’과 ‘소통’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교통사고, 탄소 배출과 환경오염 등 자동차로 인한 도시 문제가 완화되고, 더 나아가 지역 경제 활성화, 계층 간 융화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p.6-7)

 

 도시의 본질이 ‘건물의 집합’이라면 지금처럼 건물을 문제 삼고 그 건축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물은 도시 조성과 관련된 일체의 제도가 만들어낸 결과물의 하나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도시를 개선하기 위한 공공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 중 하나는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운 아파트다. 아파트는 어디까지나 건축물로서 도시계획이 만들어 놓은 규칙에 따라 자연스레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다. 아파트단지를 금지하지 않는 이상, 그 외관을 차별화하고 좀 더 세련되게 만드는 것은 도시 문제를 해결하려는 차원에서 환자에게 분칠을 하는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때로 청사 등 공공건축물이 매스컴을 타고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화려하다거나 남루하다거나 권위적이라거나 이유는 그때마다 다르지만 비난 속에 담긴 도시에 대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공공건축은 마땅히 혁신해야 한다. 다만 그 외부 효과가 도시까지 혁신할 것이라 기대하긴 어렵다. 그 외 상업 건축이나 단독주택에 연관된 사안도 있으나 도시 문제의 원인 대다수는 건물에 있지 않을뿐더러, 설령 건물을 통해 일부 문제를 개선할 수 있더라도 공적인 도시 문제를 개별적이고 사적인 건축의 영역에 부담시키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도 현재 지구단위계획과 건축법상의 각종 공지 요건, 건축위원회 심의 등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건물이 도시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면 도시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더 나은 도시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문제 삼아야 할까? (p.15-16)

 

 건물의 바깥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유지의 건물도 그 외부는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도시의 인상(image)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도로와 건물, 건물과 건물 사이를 구분하는 어떤 행정적 경계선이나 울타리도 우리의 시선이 사유지 안의 공간과 건물 외벽에 닿는 것을 막을 순 없다. 자연히 사람은 건물 밖으로 드러난 모든 영역을 도시 공간으로 인지한다. 들어갈 수는 없어도 밖에서 들여다보이는 울타리 안의 사유 공간은 그 너머의 공공공간과 시각적으로 통합되어 하나의 도시경관을 구성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풍경이 도시의 얼굴이 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배경을 이룬다.
 우리가 특정한 도시를 생각할 때 주로 떠올리는 풍경도 건물의 바깥이다. 건물의 바깥은 시각적인 미추의 차원을 넘어 우리 모두의 삶과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은 매일 저마다의 사적 공간에서 빗장을 열고 건물의 바깥으로 나선다. 건물의 바깥은 새로운 사람과 사건을 만나는 모험의 장이다. 그곳에서 개개인은 삶의 외연을 넓히고 사회는 두텁게 얽힌다. 건물의 바깥이 차갑고 위험하다면 사람들의 모험은 투쟁과 스트레스로 가득하겠지만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이라면 미소와 인사를 준비하는 일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바깥은 어느 쪽에 가까운가? (p.16-17)

 

 사람의 길과 자동차의 길이 같은 공간을 두고 경합할 때 우리 도시가 이를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지를 들여다보자. 우리가 처한 환경과 그 환경을 구축한 도시계획에 담긴 인본주의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의 도시 환경에선 사람보다 자동차를 우선하는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도시 안에서 차와 사람의 길이 맞닥트릴 때, 힘겹게 먼 길을 돌며 양보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다.
 도로 위에 설치하는 보행 육교가 하나의 예시다. 물론 보행 육교에 비해 고가도로는 너무 비싸고 덩치가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변명할 수 있지만, 애초에 횡단보도를 택하지 않은 것은 차를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겨울철에는 차도에만 제설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인도에 쌓인 눈도 치워 달라 민원을 넣으니 예산이 없단다. 자전거도 눈길을 달릴 순 없다. 보행자는 종종걸음을 놓아야 하고 특히 노약자는 낙상의 위험이 있다. 도로의 주인은 자동차라는 관념이 우리 사회에 팽배하다는 사실이 이러한 현장 행정에서 드러난다.
 차가 없는 사람은 건물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차를 운행할 수 없는 저소득층·청소년·노약자 등은 이미 이동의 권리에 차별과 제약을 받고 있다. 우리 사회가 별다른 논의도 없이, 너무도 당연한 일처럼 자동차에 안방(길)을 내어준 탓에 길을 점령한 자동차는 그 위에 존재하던 모든 유대 관계와 어울림, 미약하게 남아 있던 주변 공간(보도)의 장소성마저 훼손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공동의 안방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채 제대로 된 의심 한번 없이 지금껏 묵묵히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고 자라온 세대에겐 이 도시의 모습이 당연하게 느껴질 것이다.
 오늘도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길을 걷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중 두세 명은 영영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게다가 보행 중 교통사고 사망자의 60퍼센트는 거동이 어려운 노인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의 현실이자 우리가 이룩한 ‘교통 효율’의 대가다. 문제를 해결하고 장소를 되찾기 위해서는 보행자나 운전자의 준법 의식을 탓하기 전에 도시의 구조를 의심해야 한다. (p.21-23)

 

 도시나 건축 관련 저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장소성(sense of place)’이다. 도시나 건축물에 어떤 공간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 공간이 어떤 활동의 배경인 장소(place)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장소는 의미가 부여된 공간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도시의 공공공간은 장소로서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 공공이 큰 비용을 들여 도시를 계획하고 만들면서 그 일부를 공원이나 광장 같은 빈 공간으로 할애하는 일이 타성적인 관행의 결과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차량 통행과 같은 도구적 목적이 부여되지 않은 공공공간이야말로 모든 시민을 위한 휴식처이자 교류의 장으로서 시민 사회의 터전이 될 수 있다. 또한 공공공간은 도시의 모습(appearance)이자 성격(character) 그 자체로, 도시에서 사람들이 만나고 어울리는 방식을 결정하고 드러낸다. 그러므로 도시의 공공공간을 만드는 일에는 그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계획과 설계가 꼭 필요하다. 공공공간이 장소성을 가져야만 목적에 맞는 역할을 비로소 감당할 수 있다. (p.33)

 

 도시에 장소가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삶을 기록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장소에는 우리의 삶이 묻어 있다. 우리의 과거를 형성하는 기억들은 주로 물리적인 장소와 결합하여 강화된다. 즉, 어떤 경험이 기억으로 남는 과정에서 당시의 물리적 환경은 뇌가 기억을 강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건축물·경관·도시와 같은 건조 환경(built environment)은 우리의 개인적 기억과 그에 기반한 자아 정체성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소는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며 성장해온 모든 삶을 기록하며, 또 그 기록들을 추억하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친구들과 뛰어놀며 유년 시절을 보낸 어떤 골목길이 두고두고 회상할 수 있는 소중한 고향이 되는 것처럼, 오랜 기간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을 조금씩 축적해온 장소는 그곳을 공유해온 사람들의 정서적 안식처가 된다. 한 지역의 사람들이 크고 작은 사건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며 서로 애착 관계를 형성하고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도록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장소가 된 공간이다.
 어느 도시에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그곳에 장소가 없다면 우리 모두는 그곳에서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도시 곳곳에 열린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한들 사람들이 좀처럼 그곳에 찾아오거나 머물지 않는다면, 시민들은 매일 집과 직장을 오가면서도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과 마주치거나 친해지기 어렵다. 마을 안에 장소가 된 공간이 없다면 저마다의 가족과 동창, 직장 동료는 있을지언정 이웃 간에 우정과 신뢰가 자라나고 서로의 삶을 조금씩 공유하며 살아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이웃과 함께하는 작은 일상, 그 기억을 담아둘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삶이 뿌리내리지 못한 것이다. (p.35-36)

 

 명지대학교 건축학부 박인석 교수는 아파트단지가 우리 사회에 초래한 다양한 차원의 문제점을 밝혀낸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획일화되지 않은 개인들의 사적 활동이 공공 영역에서 부딪히고 살아 꿈틀댈 때 일상적 삶이 건전하고 합리적으로 작동하며, 의사소통을 거쳐 합리적인 제도들을 견인할 수 있게 된다. 교류를 위해 따로 시간을 내기보다는 ‘길 위에서’ 어울릴 수 있도록 길이 합쳐지고 교차하는 길목에 공공공간을 배치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민 공동체의 가능성을 넓혀가는 공적 영역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p.45)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그 원인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온 사회가 힘을 쏟게 된다. 이를테면 ‘도시’ 내에 부족한 공공장소를 ‘건축’ 계획을 통해 사유지에서 조달한다든지 도시 경관을 개별 건축의 디자인 품질 문제로 인식하는 일이 발생한다. 전자는 도시 내 공공공간의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여 도시를 조악한 품질의 작은 공간들로 파편화시키고 후자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소위 랜드마크적 건축물의 건립에 몰두하게 만든다.
 도시계획의 방향을 바로 세우려면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건축은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곳에 거주할 사람을 깊이 이해해야만 그의 삶을 온전히 담아낼 그릇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계획도 다르지 않다. 다만 고려할 활동의 범위가 더 넓을 뿐이다. 도시를 살펴보면 그 도시를 계획한 이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주택과 초·중·고교, 상업지역, 약간의 공원과 공터, 인도를 포함한 도로와 보행 통로가 있다. 각 공간이 하나의 부품이라면 각 부품을 떼어 다시 조립해도 지금의 도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사람들은 집에서 쉬고, 회사에서 일하고, 상가에서 밥을 먹고 물건을 사고, 공원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 사이를 어떻게든 오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람들에게는 주거나 업무와 같은 명확한 목적을 가진 공간 외에 제3의 활동을 담는 공간이 적소에 필요하다. 특별한 목적 없이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어울릴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맞이할 소소한 일상이야말로 삶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p.49)

 

 사라져가는 지역사회나 이웃 간 소통의 부재와 같은 사회적 단절을 시급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사회적 고통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눈에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고통도 실질적인 손상을 유발하고 때로는 신체적 고통보다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자해나 자살이 바로 그 증거다. 반면에 사회적 접촉은 사회적 고통은 물론 신체적 고통까지 줄여준다. 우리가 다친 자녀를 안아주는 행위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사람이 모여 있는 활기찬 거리를 선호한다. 카페 의자가 대체로 보도를 향해 나와 있는 까닭도 도시 생활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가장 큰 기쁨이다(Man is Man’s Greatest Joy)’라는 아이슬란드의 오래된 시구와 ‘사람들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온다(People come where people are)’라는 스칸디나비아 속담처럼, 타인을 향한 인간의 기쁨과 흥미는 도시에 활력을 부여하는 강력한 요인이다.
 이렇듯 만남은 우리 삶의 밑바탕이자 궁극적인 목표다. 열린 공간에서 이뤄지는 만남과 대화는 개인의 생각을 여론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를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타인을 이해하며 더불어 살기 위해 우리는 더욱 빈번히 부닥치고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만남의 장이 필요하다. 도시에는 단순한 통행로나 빈 공간이 아니라 만남을 위한 공공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p.50-51)

 

 보행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면서 단순히 인도만 확보한 수준의 도시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말하자면 굳이 걸으려면 걸을 수 있는 수준의 도시를 넘어 자발적인 움직임을 유도하는 ‘걷고 싶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연구와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걷게 하는 도시’다.
 ‘걷고 싶은 도시’는 ‘걷게 하는 도시’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현재의 보행 환경을 개선해 걷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전반적인 노력과 기법을 일컫는 명칭이 바로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다. 더 나아가 ‘걷게 하는 도시’ 만들기는 보행을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로 만들어 사람들의 의식적인 선택 과정을 소거하는 한층 적극적인 문제 해결의 자세를 강조한다. 즉, 수동적(비의식적)인 보행을 유도하는 능동적인 도시설계다.
 이를 위해 추가로 도입하는 개념이 ‘보행 경로의 최적화’다. 보행이 가장 효율적이고 즐거운 경험을 선사하도록 계획된 도시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걷게 된다. 도시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람들에게 호소할 것이 아니라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걸어야 한다’라는 의지의 발현이나 ‘걸어볼까?’라는 의식적 반응은 필요치 않다. 그곳에서는 걸으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이동 수단은 굳이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주인인 도시계획과 자동차 이용률의 증가가 되먹임을 해왔듯, 도시 구조를 보행 중심으로 만들면 도시는 나날이 더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게 될 것이다. (p.55-56)

 

 도시설계자가 사람을 만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 중 첫 번째는 보행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단어는 ‘첫 번째’라는 부분이다. 보행로는 이미 모든 도시에 어떤 형태로든 확보되어 있다. 다만 그 도시를 계획할 때 보행로를 가장 우선적(첫 번째)으로 고려하여 확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동차를 위한 도로나 큰 공동주택 용지와 같은 다른 계획 요소를 먼저 배치한 다음에야 보행로의 위치와 형태를 결정해왔다. 바로 그 ‘순서’가 도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나중에 계획되는 요소들은 앞서 계획된 내용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 계획 요소는 나머지 모든 계획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가장 먼저 계획하는 시설은 이후에 들어설 그 어떤 시설에도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백지 위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효율적인 형태를 갖출 수 있다. 즉, 무언가를 첫 번째로 계획한다는 것은 순서를 넘어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보행로를 확보하는 일은 도시계획을 통해 우리 도시에 지금 가장 중요한 사안이 보행로라는 것을 선언하고 실천하는 행위다.
 앞서 언급한 얀 겔의 표현처럼 보행로는 만남의 플랫폼으로서 함께 어울리는 시민들의 삶을 담아내기 위해 도로·전기·상하수도와 같이 도시가 당연히 갖추어야 할 필수 기반 시설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보행로는 이러한 의미에 걸맞은 특별함을 갖추어야 한다. 단순 통행을 위한 이동 공간에 그쳐서는 안 된다. 보행로는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하고 머무는 공간으로 도시 활동의 중심이 될 만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p.59)

 

 도시가 즐거운 보행 경험을 선사한다면 건물의 바깥은 더욱 많은 사람으로 채워질 것이다. 반대로 소소하지만 불쾌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쾌적한 걷기는 오롯이 나의 시간에, 나의 신체를, 내 의지대로 움직이며 걸어 다니는 자유로운 활동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도와 차도가 붙어 있는 탓에 횡단보도와 차도의 신호가 연계될 수밖에 없는 현재의 도로 체계에서는 그러한 걷기가 불가능하다. 지금의 걷기는 일상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자유 활동이라기보단 기다림의 불쾌함을 부각하고 조바심을 일으키는 타율적인 통제의 경험에 가깝다. 흥겨운 발걸음으로 길을 걷다가도 신호등의 지시에 따라 자동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원치 않게 멈추고, 출근길에 시간을 초 단위로 세어가며 신호가 다시 바뀌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기다림이 싫어 때로는 멀리서부터 허겁지겁 달려오기도 한다. 교통신호에 따라 나의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 도시에서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노점의 과일이나 길가에 핀 꽃을 들여다보는 일조차 최소 한 주기만큼의 지체를 감내하는 큰 결단이 필요하다. 이 문제도 보행로에서 차도를 떼어내면 해결된다. 집에서 목적지까지 횡단보도와 신호의 방해 없이 끊어지지 않은 보행로는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거나 등 떠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발걸음으로 걸으며 그 순간을 온전히 소유하고 누릴 수 있다. 시간이 흘러 그러한 경험이 쌓일 때 그 길은 저마다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장소가 된다. (p.77)

 

 미흡한 도시계획이 초래하는 문제는 심미적인 면보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더욱 심각하다. 시각적 통일성이 부족하고 아름답지 못한 풍경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중대한 문제를 일으킬 여지는 적다. 그러나 기능적인 검토가 부족하여 공공공간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도시 전체의 활력과 경제활동, 안전 등 삶의 질 전반에 악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1층에서 광장으로 직결되지 않는 건물이나 특정 사람만 이용하는 건물이 광장의 경계를 형성한다면, 지역 내 소통의 중심 공간으로서 광장의 잠재력은 상당히 약화할 것이다. 요컨대 앞서 보행자를 위해 마련한 공공공간이 온전한 공공의 장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주변 건축물이 공공공간의 경계이자 일부로 계획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건축설계 단계가 아니라 건축물의 기반이 되는 도시를 만드는 시점에 ‘도시설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도시를 계획하는 주체는 그 도시의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위한 개별 건축물의 역할과 책무를 도면을 통해 명확히 규정하고 통제해야 한다. 주택 공급량과 같은 수치적인 목표만으로 유형별 세대수를 계산하고 도면에 필지를 구획하는 행위는 온전한 도시계획이라고 할 수 없다. 이보다 먼저 구체적인 그림(image)으로 시각화한 계획을 공유해야 한다. 구획된 필지가 민간에 분양되어 사유재산이 되는 순간 처음부터 다시 그림을 그릴 방도는 없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우리 도시의 현주소다. 지금 만들어지는 도시들 또한 극적인 변화가 없는 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라도 도시계획의 탈을 쓴 ‘필지 구획’에서 벗어나 명확한 공간의 상(image)을 제시하고 건축을 통해 이를 현실로 끌어내야 한다. (p.96)

 

 도시계획가가 유념할 또 다른 부분은 건축물의 지속 가능성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고, 토지나 건축물의 활용 방식과 같은 도시 공간에 대한 시장의 요구도 예외는 아니다. 건축물이 변화의 흐름을 유연하게 수용하는 하나의 방법은 너무 거대해지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지분을 나눠 가진 큰 건축물은 변화를 위한 의사결정에서 합치를 이루기 어렵고, 융통해야 하는 자본도 비대해 변화에 유연하고 신속하게 대처하기 힘들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건물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오랜 기간 공실로 방치되면, 그 부정적인 여파는 주변 공공공간으로 번진다. 같은 면적이라도 대규모의 단일 건물보다는 소규모의 여러 건물로 구성된 지역이 변화에 유연하게 발맞추며 부가가치를 창출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토지 이용계획이 경직된 규제로 작용하지 않도록 복합적인 용도를 지정하는 등 토지 활용의 유연성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도시 내 주요 공공공간 인근의 건축물이 너무 거대한 덩어리가 되지 않도록 필지를 적절히 나눌 필요가 있다. (p.105)

 

 우리 도시에 광장이나 열린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부분 사람들의 도시 활동을 담는 그릇으로 기능하지 못하는데,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허물어진 광장의 경계다. 광장을 비롯한 도시의 빈 공간은 그 경계부가 닫혀 있을 때 사람들이 안락함을 느끼며 해당 공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광장들의 경계가 주로 차도와 접한 탓에 온전한 공간으로 정의되거나 인식되지 못한다. 지나친 시각적 개방감이나 차량의 소음, 주변 인도의 과도한 유동성 때문에 결국 독립된 장소로서 잠재력을 발휘하거나 도시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 이론가인 카밀로 지테는 위요감(enclosure)이야말로 도시성을 연출하는 핵심 원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광장이 닫혀(enclosed)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국토계획법 하위 규정인 도시계획시설규칙(제51조)에서도 통과 교통을 처리하는 도로를 광장의 내부나 인근에 배치하지 않도록 명시하고 있지만, 많은 광장이 통과 도로에 접해 있다. 더구나 공간의 다양한 쓰임을 위해 내부 장애물을 최소화해야 하지만 우리 도시는 광장이 텅 빈 상태를 참지 못하고 관행적으로 조경을 채워 넣는다. 그 바람에 사람들의 모임과 활동을 수용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 힘을 잃는다. 광장이란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거리에 만들어 놓은 넓은 빈 터’지만 과도한 수목과 장식품 들이 ‘넓게 비어 있는 공간’으로서 광장의 쓰임새와 잠재력을 훼손시킨다. 이런 광장이 주로 담아내는 도시 활동은 ‘흡연’일 것이다. (p.126-127)

 

 전주의 한 건물주의 사연이 뉴스에 소개된 적이 있다. 자기 건물을 뚫어 인근 초등학교를 위한 통학로로 내어주었다는 이야기다. 건물주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위험한 이면도로를 이용하여 먼 길을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의 보행로는 길 위를 걷는 시민들에게 가장 유익한 경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도를 만드는 김에 인도도 함께 만드는 것에 가깝다. 보행을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여기지 않으니 별다른 고민도 투자도 없다. 녹지에 산책로를 추가하는 정도면 할 만큼 한 것이다.
 반면에 차도를 계획할 땐 행여나 정체가 일어날까 걱정하며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전문가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다. 설계자와 설계안을 검토하는 위원들 모두 차를 몰고 다니기 때문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자동차의 원활한 통행은 각종 교통영향평가를 통해 제도적으로도 엄격히 보장되지만 보행자를 위한 통행 대책은 구색을 갖추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걸을 수는 있는 도시’ 이상을 기대하긴 어려운 현실이다. 사람들은 구심점 없이 차도의 양옆으로 흩어져 다니며 신호등 앞에서만 임시로 연결된다. 길이라는 공공공간에서 일어날 법한 의미 있는 도시 활동이나 상호 교류는 기대할 수 없다. 온전한 보행 가로망이 절실하다. (p.130)

 

 ‘통과 교통’이 발생한다는 것은 해당 지역에 용무가 없는 차량도 그 지역을 관통하여 이동한다는 뜻이다. 작은 마을 길의 정체 상황은 주로 교통 혼잡이 심한 큰길을 피하려는 차들이 막히지 않는 마을 안으로 유입될 때 발생하며 결과적으로 마을의 안전과 평온을 위협한다. 지금의 격자형 도로체계는 통과 교통의 천국이다. 도로의 위계는 희미하고 내 집 앞을 지나다니는 차는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막다른 길이다. 좀처럼 막다른 차도를 만들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방식은 설계자에게 매우 낯선 방식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우리의 여건에 맞는 대안과 세부 디자인(detail)을 만들어가야겠지만, 그 시작점으로 유럽의 사례를 참조할 수 있다. (p.135)

 

 우리 도시에서 상가에 대한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대규모 상가 건물은 교통 체증을 유발하고 건물과 길거리를 뒤덮은 불법 광고물의 온상으로 여겨진다. 건물 안을 가득 채운 점포에게 간판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므로 행정적 통제 또한 어렵다. 게다가 경기 침체로 공실이 발생하면 지역 경제, 도시경관,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로 발전하곤 한다.
 그러나 상가는 도시 활성화 측면에서 그 어떤 시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점을 지닌다. 언제나 사람들을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거리의 수다쟁이로서 늘 적극적으로 길 위의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새로운 볼거리와 즐거움을 선사한다. 상가는 매력적인 상품과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사람들은 상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다른 이들을 만난다. 상가는 도시 활력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우리 주변 상가의 부정적인 면이 주로 강조되는 것은 그간의 도시설계가 상가의 장점과 잠재력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하고 단점과 부작용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p.151)

 

 우리의 신도시 개발은 아파트단지를 공급하는 수단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독주택 등 아파트가 아닌 주거 유형은 구색을 겨우 맞추는 수준에 불과하다. 수십 년간 대단지 아파트 일색으로 도시의 밑그림을 그려온 결과는 건설업의 양극화 혹은 소규모 건설업 시장의 소멸이었다. 단독주택을 짓는 건설사와 수천 세대 아파트단지를 지을 수 있는 건설사의 규모는 다르다. 수천 채의 단독주택을 건설할 때 생겨나는 설계·시공·인테리어 분야의 수많은 일거리가 하나의 단지 건축 사업으로 묶이다 보니, 이를 수주하는 소수의 대형 건설사·설계사 외에 소형 건축물을 다루는 중소 건축 분야는 일감이 없는 탓에 시장 자체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누군가 인테리어를 하거나 단독주택을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믿을 만한 업체를 만날 수 있을지부터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p.169)

 

 도시계획을 발주할 때도 설계 내용에 대한 평가보다는 금액을 기준으로 업체를 선정하다 보니 사실상 설계 없는 가로 공간이 창출된다. 공동주택 용지의 구체적인 단지계획은 이를 구매한 건설사에서 건축설계사무소를 통해 수립할 것이므로 시행자가 용지 매각 이전의 도시설계에 힘을 쏟을 이유가 없다. 그다지 창의적인 고민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도시계획가나 도시설계자에게 의존하는 법이 없고,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은 줄을 서 있으니 굳이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할 유인도 없다. 사실상 아파트단지 하나하나가 작은 도시인데 그것을 어떻게 설계할지는 공동주택 용지를 구매한 시행사나 건설사의 일이 된다. 공공용지의 도시계획이 사유지의 건축계획으로 바뀌는 것이다. (p.170)

 

 만약 우리의 경제력에 걸맞은 도시설계 시장이 존재했다면 지금쯤 좋은 도시와 경관, 좋은 공간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영화·음악 등 다른 문화 영역처럼 고유한 우리의 도시·건축 양식을 꽃피우고 있었을지 모른다. 여기서 주장하는 새로운 도시설계 패러다임은 기존에 없던 세밀한 설계 과정을 요구한다. 그간의 방식과 다르다 보니 시작은 다소 어색할 수 있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며 보완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p.171)

 

 설계 공모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 더 짚고 넘어가자. 도시를 만들면서 그 설계안을 공모로 정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할까? 도시를 만드는 주체는 앞으로 막대한 공적 비용이 투입될 도시건설 사업의 최종 책임자로서 공공을 위한 명확한 비전과 전략을 갖추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장기간의 연구와 전문가 자문, 토론을 거쳐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도시설계에 앞서 설계의 목표나 방향성에 대한 논의를 풍성하게 만들고자 아이디어를 공모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최종 결과물인 설계안을 공모해서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당초 도시설계의 방향성이 없었음을 자인하는 행위다. 즉, 도시건설이라는 중대한 공공 사업에 결과를 담보할 수 없는 공모 방식을 도입하는 행위는 매우 무책임한 일이다.
 도시설계는 미술도 스포츠도 아니다. 접수된 모든 설계안이 나름 훌륭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합리적으로 줄을 세울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도 없다. 운이 좋아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설계안이 접수되고 또 다행스럽게 1등으로 뽑히는 기적을 바라야 한다. 도시설계 발주자는 외부에서 손쉽게 설계안을 구하려고 하기보다 책임감과 전문성을 갖추고 최종 설계안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방안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p.173-174)

 

 많은 사람이 건축의 공공성을 이야기한다. 공공을 위한 건축주와 건축설계자의 의무를 말하고 도시를 망치는 원인과 해법으로 건축을 지목하고 변화를 촉구한다. 심지어 공공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건축물은 윤리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건축물이 크고 작은 공공성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도시 문제의 근원을 건축에서 찾는 접근은 문제의 본질을 간과하게 만든다. 도시 공간의 문제는 개별 건축물이 감당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한 비판은 건축에 앞서 도시를 계획한 이를 향하는 것이 옳다.
 건축물은 도시계획의 최종 결과물인 ‘필지’ 위에 자리 잡는다. 필지에 적용되는 모든 건축 관련 규제는 필지의 가격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분양 전에 모두 결정된다. 새로 만들어지는 도시가 어떤 공공의 지향점을 지닌다면 그 내용은 필지를 판매하기 전에 모두 확정지어야 한다. 건축 인허가 과정에서 개별 건축주나 건축가를 도시 공간 창출에 관여하는 공적인 업무의 수행자로 추켜세우곤 한다. 그러면서 공공을 향한 희생과 도시적 맥락을 고려한 공공성을 담은 건축 계획안을 요구하는 일이 만연하지만 이는 정당하지 않다. 모두 사적인 지출을 강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시계획 단계는 정부나 공공기관이 주관하는 공적인 영역이므로 수익 창출이나 시장의 논리에서 다소 자유롭지만 건축설계는 그렇지 않다. 수많은 개인의 일생이 달린 막대한 투자 사업이다. 건축주와 건축가가 설계 변경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 요소를 미리 인지하고 안전하게 건축 사업을 기획하도록 사전에 확정하여 고지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도시 문제의 책임을 건축에 묻는 일은 본말이 전도된 무책임한 행위다. 도의적인 차원은 물론 문제 해결 차원에서도 타당하지 않다. 도시 구조가 정해진 상태에서 공간의 표피에 해당하는 건축물로 도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사후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 건축은 죄가 없다. 단지 도시계획의 잘잘못이 건축을 통해 비로소 드러날 뿐이다. (p.177-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