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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의 해방 : 너머의 미술 / 박소영 / 편않

 

 그러나 기대는 인터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스라지고 말았다. 내 질문이 조금만 깊어질라치면 화가가 앞서 했던 대답을 반복하며 같은 이야기로 되돌아온 것이다. 질문의 각도를 바꾸어 보아도 대답은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철학과 관련해서는 다소 빈곤해 보였던 그가 시장 논리에는 놀라우리만큼 해박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왜 시장이 더 많이 원하지 않는지, 정부는 왜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는지, 나아가 왜 누구도 자신의 미술관을 지어 주겠다고 나서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농담 섞인 푸념을 내뱉었다. 그 끝은 “이러다 나 죽으면 그때는 늦는다”는 앙탈 섞인 겁박(?)이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동석했던 갤러리 관계자는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줄곧 내 눈치를 살피던 그는 인터뷰가 끝난 뒤 조심스럽게 다가와 몇몇 문제적인 발언이 뉴스에 나가지 않았으면 한다며 양해를 구했다. 나는 순식간에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인터뷰를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역시 예술가에 대해서는 모르는 채 작품에만 호감을 가지는 편이 대체로 현명하다.
 미술 기자로 일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비슷한 경험을 벌써 여러 차례 했다. 말하자면 ‘벌거벗은 임금님’을 꽤 자주 목격했다는 뜻이다. 작가를 보필하는 갤러리 관계자와 주위 사람들, 질문하는 기자 모두 눈앞의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사실을 발설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공범이 된다. 갤러리 관계자는 물론 작가를 그럴듯한 모양새로 포장해 미술품(상품)의 가격을 올려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이 임금님의 진짜 모습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시장은 타격을 입고 그들의 생활 세계가 위협받는다. 그런데 나는? 미술 기자로서 나는 왜 솔직해질 수 없는 거지? (p.14-15)

 

 내가 아는 한 기자들은 공범이 맞다. 우리는 미술계의 외부자 혹은 관조자를 자처하며 그 수원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마신다. 나는 종종 미술 기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혼란에 빠진다. 작품과 작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야 하는 비평가와 달리, 미술 기자의 역할은 대체로 전시회 개최를 알리고 전시장에 나온 작품을 소개하는 데서 그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차적으로는 다양한 독자를 상대로 하는 대중 매체에서 진지한 미술 비평을 다룰 수 없기 때문이고, 나아가서는 비평가만큼의 전문성을 가진 기자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거리 감각 혹은 문제의식의 부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p.17-18)

 

 기자들에게 질문 기회가 주어지자마자 나는 저 동물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작품으로 변모하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작품을 위해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닌지, 이미 죽은 동물을 데려온 것이라면 어떤 방법을 동원했는지 정확히 알기를 원했다. 미술관 관계자는 내게 카텔란이 자연사한 동물만을 작업에 쓰며, 작품 제작을 위해 인위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개와 고양이는 물론, 외과적 상처 없이 건강해 보이는 당나귀가 이곳에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꼼꼼히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방송용 인터뷰를 위한 추가 질문 기회가 주어졌을 때, 놓치지 않고 재차 물었다. 죽은 동물을 이용하는 것에 작가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의 그런 경향에 주위의 비판은 없는지.
 그때 미술관 관계자의 대답은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죽은 동물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니 동물들 입장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 편이 그들에게도 좋은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현장을 카메라에 담고 있던 촬영 기자가 순간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 말에 내가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인터뷰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좋을지 몰라 붉어진 얼굴로 서 있었다. 동물을 착취하고도 그것이 착취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지 않았다. (p.28-29)

 

 어떤 예술 작품은 보는 사람을 둘러싼 무지의 장막을 순식간에 걷어 내고 기습 침투한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은밀한 곳, 곧 내면이라는 도피처로 숨어 버리기 일쑤인 우리 안의 회피하는 자아에 날카로운 빛을 들이댄다. 나는 시오타 치하루의 작품을 통해 그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던 나의 나약함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말았다. 그것은 나의 환부를 불시에 확인한다는 불쾌와 인식이 주는 쾌를 동시에 불러오는 독특한 경험이었다. 정확하게 아는 것은 언제나 다음으로의 움직임을 예비하는 일이므로, 나는 내 안의 깊은 수렁을, 그곳에서 썩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p.41)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해 볼까.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미학은 곧 정치(학)라고 이야기했다. 그에게 미학이란 감각적인 것의 나눔, 즉 사람들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감각 지각의 틈새를 벌리는 일이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함으로써 현실을 제대로 가시화하는 일. 이때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좋은 예술 작품을 보며 내가 느끼는 감정도 이와 비슷했던 것 같다. 내가 만난 훌륭한 작품은 대개 정치적이어서 세상과 어떤 식으로든 강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지금의 불완전한 세계를 품어 안은 채 어딘가 다른 세계를 향해 열려 있었다. ‘지금-여기’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님을, 다른 세계가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 주고, 증명했다. 그렇다면 예술이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정치가 아닌가?
 그런 맥락에서 나는 문화부 기자에게 꼭 필요한 것이 전문성이라고 생각해 왔다. 어떤 작품이 세계의 변화를 위해 꼭 필요하고 유의미한지, 어떤 작품을 보아야 하고 또 보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할 심미안을 문화부 기자라면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국방 전문 기자나 교육 전문 기자, 보건·복지 전문 기자를 양성하는 언론사는 많아도 문화 전문 기자를 양성하는 곳은 많지 않다.) 물론 지식과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쩌면 애호하는 마음일 수도 있다. 이 분야를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과 지칠 줄 모르는 학습 의지. 이때 둘은 당연히 해당 분야가 중요하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p.51-52)

 

 현대미술 전시회를 다니다 보면 시대의 의제를 자신의 작가적 과제로 여기는 예술가가 적지 않음을 체감하게 된다. 그들은 인간 중심주의와 인간 이성에 대한 집착적 과신이 우리가 당면한 숱한 문제를 만들어 왔다고 비판한다. (여기까지는 맞는 말이다.) 그런 문제의식을 작품에 녹이고자 비인간 동물/식물을 등장시키고 기후위기의 화급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문제의식과 작품을 나란히 놓는다고 해서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지금 이 목소리가 작가의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 그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말인지 아니면 이 말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하는 말인지. 다시 말해 이 메시지가 진짜 작가의 것인지 아닌지.
 삶에서 나오지 않은 것으로는 보는 사람을 결코 울릴 수 없다는 것. 나는 이것이 예술의 위대한 측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p.68)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확실해지는 것 하나는 세상에 확실한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 요즈음 나는 무엇인가를 확신에 차서 말하는 일이 갈수록 두렵다. 하물며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관해서라면. (정치부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 쓴 기사를 최근 다시 보고 무척 놀랐다. 당시의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을 몹시 중차대한 일인 양 다루고 있었고, 그럼으로써 진짜 중요한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p.83)

 

 이쯤에서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일선 기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안에 대해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것.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진다는 것. 허겁지겁 정보를 취합하기 시작해 짧으면 몇 시간, 길면 며칠을 공부한 후 기사를 작성한다는 것. 종국에는 그 사안에 제법 정통한 척하게 된다는 것……. 전문 기자 제도가 있는 회사라면 사정이 좀 낫겠지만 전문 기자라고 해서 아는 기사만 쓸 수는 없는 법이고, 그래서 기자 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일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는 지금도 말과 글로 업보를 쌓고 있다. (p.83-84)

 

 데스킹 과정에서 부장은 질문한다. 이 단어를 조금 더 방송에 걸맞은 것으로 바꿀 수 없냐고. 가령 ‘물질’이라면 사물이나 물체, 물건 같은 단어가 대체어로 거론된다. 그러나 물질과 사물, 물체는 각각 조금씩 다른 뜻이어서 하나를 다른 하나로 바꾸면 어떤 맥락에서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더 쉬운 낱말을 고르는 순간 작가 철학의 정수에서는 필연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확실히 단순 명확한 것은 희생을 부른다. 잃는 것이 무엇인지, 얼마만큼인지는 쓰는 사람이 따져 보아야 한다.
 쉬운 글이 좋은 글이라는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다. 요즈음에는 ‘쉽게 쓰자’는 말이 어쩌면 언론을 망가뜨린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안을 단순화하지 않으면서, 납작하게 묘사하지 않으면서, 편의에 따라 취하고 버리지 않으면서, 복잡한 맥락과 결을 모두 고려하면서 쉽게 쓸 수 없다면……. 차라리 모호하고 복잡하게 쓰는 것이 윤리적이겠다. (p.85-86)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내가 아끼는 글은 액체와 같은 글이다. 갇히지 않고 흐르며, 잡으려 하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글. 뚝뚝 분절되지 않아서 나누어 취할 수 없는 글. 읽고 나면 만족스럽게 읽었다는 감각만이 희미하게 남는 글. 그러나 기자가 된 이래 내가 쓰는 글은 대개 고체였다. 첫 문장을 읽으면 마지막 문장을 곧바로 연역해 낼 수 있을 만큼 투명하고 단순한 글. 더듬어 가지 않고 단번에 결론으로 도약하는 글.
 이틀에 한 번꼴로 기사를 쓰는 사람이 기사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글을 뚝딱 써 내기를 원한다면 그게 이상한 걸까? 아니면 이 모든 건 그저 내 능력의 부족인 걸까. 지금 이 글도 누군가에게는 영락없는 기자의 글로 읽혔을까 생각하니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든다. (p.86-87)

 

 수많은 동물과 식물이 기거하는 터전이었을 골프장은 텅 비워지고 완전히 벌거벗은 채였다. 짧은 잔디와 몇 그루 나무만이 예외적으로 남아 자본과 기계의 냄새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 광활한 면적이 모두 골프장에 속한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참혹함을 느꼈다.
 참혹함. 누군가는 이 단어가 과하다고, 내가 느낀 감정을 얼마간 과장했다고 생각할까. 그러나 버스에서 내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나는 내가 본 광경에 불쾌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그 넓은 공간이 통째로 잘려 나가고 비워지는 동안 그곳에서 삶을 이어 나갔던 존재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먹고 잠자고 숨고 사랑하던 공간에서 한순간 밀려났을 때 삶을 다시 시작할 용기를 과연 낼 수 있었을까. 동물과 동물권을 인생의 마지막 어휘로 삼은 사람으로서 골프장이 동물의 터전을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하는지 모르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껏 내가 알았던 것은 그저 ‘머리로’에 불과했다. (골프를 즐기면서 동물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에 마음을 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믿지 말자.)
 골프장에 대한 소개를 찾아보니 참나무 군락지를 75% 이상 보존하며 ‘자연 친화적으로’ 설계한 곳이라고 한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고 해도 최소한 참나무 군락지의 4분의 1은 파괴되었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 여기에서의 ‘자연 친화적’은 ‘이용자 친화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라는 사실. 이 모든 것은 이용자가 ‘천혜의’ 자연 속에서 ‘기분 좋은 안락함’을 누리며 골프에 몰입할 수 있도록 설계한 장치일 뿐이다. (p.92-93)

 

 물론 건축은 삶을 위한 것이기에, ‘안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안도 다다오라는 세계적인 건축가의 일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 지붕을 내어 주는 일과는 아주 거리가 있었다. 내 기준에서 전혀 재건축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앞으로도 수십 년을 너끈히 살아 낼 것처럼 보이는 건물이 단지 외관이나 다른 사정을 이유로 해체될 때 나는 건축가의 일에 회의를 품었다. (내가 본 다큐멘터리는 2016년 작으로 건물의 지속 가능성이나 환경오염 등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안 할 수 없다면, 덜 할 수는 없을까? 그저 생김새가 멋지다는 이유로 화려한 건축(물)을 추앙하기 전에 이제는 다른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p.96-97)

 

 모든 시대는 시대에 맞는 예술가를 원한다. 나는 동시대 작가에게 아주 엄격한 몸짓을 요청하고 싶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로서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를 저울에 올려야 한다는 것, 주목받고 싶어 하는 커다란 자아는 폐기 처분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의 자아에 빛을 비추는 데 자원을 쓰기에는 이 행성이 너무나 치명적인 위험에 놓여 있다는 것을 그들이 통렬히 자각했으면 한다. 무엇보다, 큰 것을 말할 때도 작게 존재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으면 한다.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