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조형근 / 한겨레출판

 

 ‘콰이강의 다리’의 실제 역사는 우리에게 역사에 대한 관습적인 인식을 재고하라고 요청한다. 어떤 인식일까? 역사는 국가나 민족 단위로 흐르며 가해자도 피해자도 분명하다는 인식이다. 실제의 역사는 종종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를 만들며 바꾼다. 콰이강의 다리에 얽힌 실제 역사도 영국, 일본, 한국, 태국, 미얀마가 함께 연루된 ‘어긋나는 공동의 역사’다.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인 사람이 다른 면에서는 가해자인 경우도 적지 않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형식상으론 자원하여 간 것이었지만 실질은 강제 동원된 것에 가까웠다. 그들은 일본군에게 맞고 학대받았다. 잘 때리라고 맞았다. 그리고 포로들을 때리고 학대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유형의 사례들을 근거로 한국도 일본과 같은 전범국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전범국이니 일본의 책임을 묻지 말라는 우익적 주장의 변형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 조선인 포로감시원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을까? 무엇보다 당사자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져야 할 몫의 역사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역사에 연루시키는 자만이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 연루됨의 윤리다. (p.9-10)

 

 일본의 정치학자 쿠마가이 나오코는 일본인들이 전쟁에 대해 두 단계에 걸쳐 상이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후에는 한 가지만 선택적으로 기억되었다고 지적한다. 초기 단계의 전쟁 기억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자랑스러워하는 대일본제국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최종 단계의 전쟁 기억은 일본인 개인들이 겪어야 했던 모든 고난과 고통들에 대한 일화들로 구성된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서 전쟁 기억은 후자로 귀결됐다. 무조건항복과 도쿄전범재판으로 전쟁이 범죄화되자, 일본인들은 전쟁 전반부의 영광스러운 군사적 전진의 기억을 묻어버린 채 전쟁 후반부의 고통스러운 경험만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역사와 문화 연구의 권위자인 네덜란드 학자 이안 부루마는 일본인들이 스스로를 희생자로 생각하게 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천황이 무죄로 판명되고 대신 그의 지시를 받은 군국주의자들이 모든 비난을 받았다. 일본이 도쿄전범재판에서 배운 것은 왜곡을 통해 거짓과 정치적 위선을 은폐하는 것이었다. 전쟁 초기에 해외 파병에 대한 대중적 열기가 무척 뜨거웠었다는 사실도 대충 넘어갔다. “군국주의자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일본인이 그들의 천황과 같이 무죄라면, 그들은 희생자들인 것이다.” (p.43-44)

 

 한국 사회는 과연 얼마나 다를까?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파렴치한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고통을 우리는 얼마나 감내해 왔을까? 착한 마음을 넘어 구조의 문제들을 얼마나 직시했을까?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어느 조사관이 쓴 표현처럼 “그날 지켜본 것은 배 한 척의 침몰이 아니라, 사회의 참담한 실패였다”. 그렇다면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거기에 연루된 우리 자신의 고통스러운 변화도 필요했다.
 초기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선명하게 공유됐다. 2014년 특별법 제정 운동 당시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한 나라’라는 대표 슬로건이 바로 그런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진행 과정은 달랐다. 처벌은 선원과 출동한 해경, 해운회사, 해운업계 등 직접 관련자와 하급자들에게 집중됐다. 구조 책임을 진 해경 지휘부와 정부 당국자들에 대한 조사와 책임 규명은 회피됐다. 그렇게 되자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와 세월호선체조사위원회,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를 거치면서 논의는 책임을 회피한 나쁜 개인을 찾아내는 데 집중됐다. 사과를 보관한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썩은 사과’ 한 알만 골라내면 된다는 ‘썩은 사과’ 프레임이 논의를 지배했다. 안전 사회를 위한 구조적 개혁, 우리 자신을 포함한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라는 과제는 계속 미뤄졌다. 슬픔에 공감한다는 선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도, 희생자들과 연결되는 방식은 비극이 남긴 과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는 데 있다. (p.44-45)

 

 패전 후 일본에서 전쟁기 대중가요는 좌·우익 모두에게 비판받았다. 단절과 쇄신이 절실하다는 공감대가 확고했다. 평화 국가, 문화 국가 수립의 꿈이 부풀었다. 하지만 그 공감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1948년경부터 미국의 주도 아래 역사의 후퇴, 소위 ‘역코스’가 시작됐다. 전범들이 공직에 복귀했고 재무장이 시작됐다. 노동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도 시작됐다. 이제 일본은 미국의 적국이 아니라 반공 전선의 든든한 동맹국이었다.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많은 연합군 포로들이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침묵해야 했다. 그 힘든 기억을 털어놓은 《잊힌 하이랜더 부대원》의 저자 알리스터 어쿼트의 고발처럼, 전쟁 범죄에 대한 단죄도, 전쟁을 찬미한 문화에 대한 단절도 없었다. 많은 것들이 되살아났다.
 대중문화의 영역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야말로 오히려 피해자라는 감수성이 자라기 시작했다. 전범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있던 이들의 존재가 피해자 감수성을 키웠다. 1948년 9월, 시베리아에 갇힌 전쟁포로들이 고향의 가족을 그리는 마음을 노래한 〈이국의 언덕〉(1948)이 히트했다. 이국의 언덕에서 “울고 웃고 노래 부르며 견디면 바라던 날이 온다. 아침이 온다”는 가사가 마음을 울렸다. (p.77-78)

 

 약육강식의 질서를 승인하게 되면 약자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벌이는 투쟁이 무의미해진다. 강자는 지배할 만해서 지배하고, 약자는 지배당할 만해서 지배당한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는 윤치호의 말은 유명하다. 1919년 3월 2일의 일기에서 그는 3·1운동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어리석은 소요는 무단 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다.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물리적 진압이라는 당장의 결과만 보면 이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3·1운동이 조선인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은 염원을 남겨놓았는지, 일제가 3·1운동으로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 한국인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성찰하지 못하는 단견이다. 피지배자가 이런 자학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다면 지배자로서는 최상이었다. (p.96)

 

 여행의 체험은 이중적이다. 바깥을 경험하며 안을 돌아보게 된다. 타자와 만나면서 자아가 흔들리기도, 단단해지기도 한다. 세계 일주는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가 가장 멀리 확장되는 경험이다. 보편적인 세계라는 시점을 확보할 수도 있다. 유럽 여행이나 서구 체험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세계는 평평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돌아온 여행자의 마음도 그랬을 것이다. (p.101)

 

 2012년 3월 29일,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 50년 경과를 기념하는 연설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이렇게 전쟁을 미화했다. “베트남전쟁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피부색 그리고 종교적 신념을 지닌 채, 매우 힘겨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함께 의무를 다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서 사랑하는 조국에 봉사하기 위해 따뜻한 가족의 품을 떠나야 했던 미국인들의 이야기다.” 권투 영웅 무하마드 알리처럼 부도덕한 전쟁에 끌려가길 거부하며 감옥행을 택했던 수많은 이들, 반전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미국인 대중의 분노를 생략하는 화법이다. 미군의 총칼에 죽은 베트남인에 대해 침묵하는 화법이다. (p.144)

 

 하버의 부인 클라라 임머바르는 브레슬라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독일 최초의 여성 화학박사였다. 여권운동에도 참가할 정도로 여성 인권에도 열정적이었다. 화학자 동료인 하버와의 결혼으로 화학자로서의 경력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하버는 마리 퀴리를 전폭 지원한 피에르 퀴리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코 앞치마를 벗을 틈이 없었다”. 하버와 연구서 《기체반응의 열역학》을 공동 집필했지만, 사람들은 하버가 혼자 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버의 독가스 개발에 대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규율을 타락시키는 야만성”의 상징이라며 반대했다. 제2차 이프르전투의 참상이 전해지고, 하버가 다시 독가스 공격을 위해 전선으로 떠나려던 날, 클라라 임머바르는 그의 권총으로 자살했다. 하버는 어린 아들에게 장례를 맡기고 전선으로 떠났다. 1991년 국제핵전쟁예방의사연맹 독일지부는 과학의 악용에 죽음으로 항거한 그녀를 기리기 위해 ‘클라라 임머바르상’을 제정했다. (p.157)

 

 과학사학자 김영식은 현대 한국 과학기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으로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과학기술관을 꼽는다. 개화기 이래 과학기술이 주로 경제적 효용 달성이라는 도구적 측면에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 동도서기론적 입장에서 역설적이게도 일제시기 지식인들에게 과학주의적 태도가 널리 퍼졌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세상에 쓸모가 없는, 힘이 되지 못하는 과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계적인 과학저술가 사이먼 싱은 말한다. “기술은 삶(그리고 죽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반면, 과학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과학자들의 동기는 유용성이나 편리함이 아니라 호기심이다.” (p.161)

 

 한국에서는 과거사에 대해 매우 무책임한 일본과 대비하여 독일의 과거사 처리가 곧잘 칭송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일본과 비교할 때 독일이 낫다고 해도, 독일의 사정이 그리 명쾌했던 것은 아니다. 독일인들이 패배하자마자 곧장 과거와 단절하고 반성했을까? 천만에, 사람들은 어제까지의 그 독일인이었고, 사회 곳곳에는 예전의 나치가 가득했다.
 미국 등 연합군이 주도한 서독의 탈나치화 작업은 소련과의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둘러 종결됐다. 군정이 끝나고 1949년에 출범한 아데나워 총리의 보수 기민당 정권 아래서 중견 나치들이 사회로, 요직으로 속속 복귀했다. 이를테면 유대인과의 결혼을 금지하고 정치적 권리를 박탈한 악명 높은 뉘른베르크법(1935)을 기초하고 공식 주석을 달았던 한스 글롭케가 총리실 국무장관으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군부와 외무성, 사법부에는 대표적인 인물 일부를 제외하면 나치 시절 관료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열렬한 나치당원, 친위대 경력이 있어도 상관없었다. 여기서는 나치 청산이 이루어진 적이 사실상 없었다.
 소련과의 냉전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나치 핵심 간부들이 정보기관의 요직을 차지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고위 정보장교 라인하르트 겔렌은 CIA의 보호를 받으며 전범을 탈출시키고, 1956년에 창설된 서독 연방정보부의 책임자가 됐다. 유대인 학살과 전쟁범죄는 히틀러라는 광기 어린 개인과 일부 추종자가 저지른 잠시간의 재앙적 범죄로 여겨졌다. 대다수 독일인은 선량했고, 심지어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라는 분위기도 자라났다. 1950년대 말이 되자 반유대주의가 다시 부상하고 나치의 추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p.263-264)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1995년, 함부르크 사회조사연구소는 〈절멸전쟁: 정규군의 범죄〉라는 제목의 순회 전시회를 개최했다. 곳곳에서 개최를 반대하는 저항이 일어나면서 전시회는 사회적 스캔들이 됐다. 왜 그랬을까? 과거사에 대한 오랜 이분법적 태도가 도전받았기 때문이었다. 유대인 학살 등 전쟁범죄는 어디까지나 나치당과 친위대 등의 범죄 집단이 저지른 과오였던 반면, 국민의 의무로 징집되었던 정규군은 결코 범죄 집단이 아니라는 이분법 말이다. 전시회는 바로 그 이분법적 믿음을 부쉈다. 친위대만이 아니라 정규군도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아니, 정규군의 협력 없이 소수의 친위대 병력만으로 그토록 엄청난 대학살을 저지른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전쟁 중 독일인 1700만 명이 정규군에 징집됐다. 독일인 대다수가 정규군이거나, 그 가족 혹은 친지였다. 범죄 조직 나치를 단죄하며 양심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독일인은 없었다. “나는 몰랐다”고 말할 수 있는 독일인은 없었다. 그들이 정말 몰랐다면, 그것은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고의로 획득한 무지’였을 것이다. (p.265-266)

 

 평범한 독일인들이 어떻게 이렇게 악마가 됐을까? 독일 출신의 역사학자 죙케 나이첼과 사회심리학자 하랄트 벨처는 프레임과 경험이라는 틀로 사람들의 변화를 분석한다. 모두가 주어진 업무를 맡아서 처리해야 한다는 산업사회 프레임이 전쟁에 적용된 것이 주효했다. 군인들은 자신들이 마치 기관총처럼 전쟁을 수행하는 무기일 뿐이라고 여겼다. ‘전쟁 노동자’들이 ‘업무로서의 전쟁’에 참여했던 것이다. 전쟁은 위계 구조 속에서 각자가 맡은 일을 지시에 따라 무관심하게 처리하는 업무였다. 최종 생산품에 대한 책임 의식은 거기에 없었다. (p.267)

 

 님 웨일스와의 인터뷰 말미에 장지락은 강경하기만 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이 아닐까? …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기가 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신념과 오류를 지닌 채 행복하게 죽도록 내버려두어라. 근본적인 질문으로 타인의 영혼을 괴롭히지 말라.”
 적과의 싸움에 목숨 건 혁명가들이 동지가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의혹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렸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독립혁명의 길에서 증오가 자랐다. 미움이 서로를, 스스로를 파괴하기 일쑤였다. 사방이 캄캄한데 어쨌든 나아가야 했다. 싸우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반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별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상처 입은 채 서로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그 걸음을 생각하다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p.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