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존엄사 / 비류잉 / 글항아리
내정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전국 평균 수명은 81.3세이고 남성은 평균 78.1세, 여성은 평균 84.7세다. 그런데 사망 전 건강하지 않은 상태(와상 상태, 타인의 돌봄이 필요한 상태)로 보내는 여명이 8.47년에 달한다. 급사 사례를 제외하면 와상 기간이 수십 년에 달하는 사람도 있다. 고등학생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식물인간이 된 왕샤오민王曉民은 와상 47년 만에 임종했다. 우리 시아버지와 시숙부님 두 형제는 치매로 인해 누워서 12년을 보낸 후 돌아가셨다. 나는 임신했을 때 안정을 취하느라 집에 누워서만 지낸 적이 있다.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석 달을 보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하루가 일 년 같고 머리는 멍했다. 반신불수로 오랫동안 와상생활을 하는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면 “이제 그만 저를 보내주세요!”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간병하던 사람은 가족이 고통받는 모습을 봤으니 다음 대에 똑같이 넘겨주고 싶을 리 없다. 나는 나중에 이렇게 안 사느니만 못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무엇 때문에 국민 수십만 명은 이런 무의미하고 존엄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자신이 위독해지면 중환자실에 보내지 말고, 어떤 튜브나 의료기기로 연명치료를 하지도 말라고, 차디찬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은 더 싫다는 의사를 살아 있을 때 분명히 밝혀두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인투베이션, 심장충격기, 비위관, 도뇨관 같은 것을 모조리 거부한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혔을지라도 여전히 그를 깊이 사랑하는 가족은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했음에도 가족들이 다른 의견을 내비치는 바람에 의사가 어쩔 수 없이 무의미한 의료를 하는 경우가 있다. 보험금이나 퇴직 연금 때문에 어르신의 생명유지장치 제거를 거부하며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이어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서글픈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의료가 아무리 발전했어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고통스럽지만 치료 효과가 없는 질환에 대해서 우리에게는 치료를 포기할 권리가 있다. 현실 세계에 있는 수많은 환자, 심지어 의료인조차 의사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확률은 50퍼센트 이하다. 그래도 한번 부딪혀보고 싶어한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시작하면 사망해서야 퇴원한다. 가족들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몸이 불편해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암 말기였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예후가 좋지 않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치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집에서 요양하던 몇 달 내내 힘이 조금 없을 뿐 크게 불편하지 않아 진통제도 필요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는 소파에 기댄 채 나와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하기도 했다. 떠나기 하루 전에는 의식이 뚜렷하지 않고 음식을 못 먹더니 다음 날 평온히 눈을 감았다. 이것이 의료의 개입이 없는 전통적인 자연사다.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현재 중환자실에서 20퍼센트에 이르는 자원이 무의미한 의료에 사용되어 건강보험 부담을 높이고 다른 환자들이 응급 처치 받을 기회를 간접적으로 박탈하고 있다.
재활학과에서는 삶의 질이 몹시 낮은 중증 장애인들을 자주 만난다. 환자의 남은 생애 동안 고통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가족들이 진 막중한 부담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 부모님을 돌보기 위해 평생 홀로 지내는 딸도 많다. 애인을 사귈 기회도 가정을 꾸릴 여력도 없기 때문이다. 많은 어머니와 아내는 와상 환자인 자녀나 배우자를 간병하느라 오랫동안 침대 옆에서 잠을 이기며 지내고 자신의 생활이라곤 조금도 없다. 물론 이런 희생을 하는 남성 가족도 있다. 이런 남성은 재활학과에서 모범생처럼 칭찬을 받는다. 존엄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은 당사자와 가족에게 잔인하기 짝이 없다. 안락사 입법을 기대한 지 어느새 40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쉬울 따름이다.
일본의 의사 나카무라 진이치는 다른 종류의 ‘죽음 의사’로 불린다. 나카무라는 1996년부터 ‘자신의 죽음 생각하기’ 모임을 정기적으로 열었다. 모임의 슬로건은 ‘현재를 훌륭하게 살려면 죽음에 대해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로, 참석자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나눴다. 말기 의료, 암 선고, 뇌사, 장기 이식, 연명의료, 존엄사, 안락사, 생전 소원 등에 대한 의제를 두고 토론하기도 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후련한지 이야기할 때가 많았다. 담론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 ‘수의 패션쇼’ ‘모의 장례’ ‘내가 들어갈 관’ 같은 행사도 열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죽음은 금기어였다. 나카무라의 행보는 많은 논쟁을 야기했지만 그 모임에는 매번 수십 명의 사람이 참가했다. 연속으로 개최한 지 21년차였던 2017년까지 225회가 넘는 모임이 열렸다.
나카무라는 심지어 조립·분해가 가능한 친환경 골판지로 만든 관을 집에 두고 매년 설날에 몇 분씩 그 안에 들어가 1년 동안 어떤 나쁜 일을 했는지, 개선해야 할 부분은 없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지 일생을 곰곰이 돌아보고 반성했다. 그는 70세부터 자신이 이미 ‘유통기한’을 넘겼으니 언제든 여한 없이 인간 세상을 떠나도 괜찮을뿐더러 하루하루가 하늘이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월급을 모두 본인에게 썼다. 취미가 많아 신작 영화가 나오면 혼자 보러 다니고 카메라, 악기, LP, 녹음기 따위를 사들였다. 그리고 홀로 뤄둥에서 기차를 타고 타이베이 구링제에 가서 우표, 옛날 지폐, 동전을 샀다. 애국 복권이 1700여 회 나오는 동안 매회 샀는데 당첨을 바란 것이 아니라 수집용이었다. 선생님으로서 아이들 공부를 중시하기 마련이건만 남편은 나에게 옷은 그만 만들고 집이나 깨끗이 치우고 밥만 지으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돈을 벌지 않으면 아이들 학비가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 물으니 돈이 없으면 공부를 안 하면 그만이라고 했다. 공부를 좋아했으나 형편 때문에 못 했던 나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켜야 했다. 자식들에게 책 한 권 사주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사는 남편이 참 이상했다.
어머니는 발병 훨씬 전에 요가를 배웠다. 이렇게 건강 밑천을 잘 마련해두면 복을 받는다. 젊었을 때 나는 요가가 단순한 스트레칭이라고 오해했다. 그런데 나중에 1년 동안 직접 배워보니 요가가 심신의 균형을 돕는 종합 운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는 것 같지만 근력이 충분히 뒷받침돼야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근력이 생긴다. 유연성은 당연하다. 동시에 호흡법과 고요한 마음은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촉진시킨다. 요가를 한 시간 동안 하면 숨이 차고 땀범벅이 되는데 독소는 빠지고 심폐 기능은 향상된다. 서 있거나 걷지 못하게 되더라도 매트 위에서 계속 요가를 할 수 있다. 안전이 중요하므로 동작은 조금 변형해야 한다. 또한 끈기와 꾸준함이 전제돼야 한다. 우리 어머니는 이런 면이 강점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부단히 운동을 해온 덕분에 발병 시기도 늦고 악화 속도도 느렸다고 굳게 믿는다. 요가를 할 수 없게 된 후에 와르르 무너져 안타깝다. 어머니는 요가뿐만 아니라 공원에서 산책하고 체조하고 단전호흡을 했다. “만병통치약은 운동뿐이지 건강식품을 아무리 먹어도 소용없어”라고도 자주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건강식품은 챙겨 먹지 않고 자연식만 드셨다. 갖가지 인공식품은 전혀 입에 안 댔다.
어머니가 주식을 할 줄은 몰랐다. 나는 재테크에 소질도 흥미도 없어서 주식을 하는 건 도박을 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더구나 주변의 박사나 의사 선생님들이 주식으로 몇천만 위안이나 잃어 부부 사이가 안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행여나 어머니가 힘들게 번 피 같은 돈을 잃을까봐 걱정돼 주식을 하지 말라고 계속 반대했다. 그런데 우리 큰아들은 어르신이 주식을 하면 머리를 쓰게 되고 생활이 무미건조해지지 않는다며 주식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어머니는 주식 수업을 듣거나 책을 사서 본 적이 없다. 텔레비전을 보며 분석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들으며 실력을 갈고닦았다. 누구에게 돈을 빌리지 않고, 손해를 보더라도 팔지 않으며,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주식을 하면서 30년 동안 자산에 0을 하나 더 붙였다.
어렸던 우리 눈에 아버지가 가장 잘하는 일은 요리였다. 어머니가 재봉 일로 바쁘던 몇 년간 아버지가 요리를 담당했다. 콩나물볶음마저 맛이 기가 막혔던 기억이 난다. 나는 면을 먹으면 뾰루지가 나서 먹기가 두려웠지만 아버지가 충유빙과 참깨전을 만드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아이 셋이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식탁에 빙 둘러앉아 아버지가 마술사처럼 밀가루를 반죽하고 반죽을 얇게 밀어 송송 썬 파를 넣은 다음 참깨를 뿌리는 과정을 지켜보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마름모꼴인 참깨전의 바삭함이 여전히 입안에 향긋하게 맴돈다.
환자는 음식을 안 먹어서 죽는 게 아니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소화 흡수를 못 해서 안 먹는 것이다! 여러 번 반복해 설명하고 실제 조치를 보여주자 요양원 직원과 가족들은 마침내 나카무라의 ‘아무것도 안 하고 요양하며 자연사’하는 방식을 받아들였다. 나카무라는 임종 직전의 환자가 평온한 모습으로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만약 병원으로 실려가면 효과 없는 여러 의료 행위에 심폐소생술까지 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런 고통스러운 죽음 방법을 ‘의료사’라고 칭했다!
일반인들은 임종 전 한동안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것을 ‘아사’라고 오해한다. 나카무라는 여러 지면을 통해 ‘자연사’의 과정과 신체 반응에 대해 설명했다.자연사의 실질적인 상태는 ‘아사’와 ‘탈수’다. 일반적으로 ‘아사’와 ‘탈수’라고 하면 비참한 상태를 연상할 것이다. 배가 고픈데 먹을 음식이 없거나 갈증이 나는데 마실 물이 없어 마치 사막에서 길을 잃거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상황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 ‘아사’와 ‘탈수’는 다르다. 생명의 불꽃이 꺼지기 직전과 같은 상황에서는 허기나 갈증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기아’ 상태일 때 뇌에서 모르핀이 분비돼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감까지 느끼게 한다. ‘탈수’가 오면 혈액 점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의식 지수가 떨어져 몽롱한 상태가 된다.
강제 인공영양법은 최선을 다해 반드시 환자를 살리려는 의료인의 사명감과 환자를 굶겨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가족의 죄책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런 관념 이면에 ‘사망’을 직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어머니는 책을 읽은 후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단식으로 삶을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시기는 이듬해 생일이 지난 후로 정했다. 나는 너무 빠르다고 생각해 조금 더 미루는 게 어떻겠느냐 설득했다.
“나는 이번 생에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누구한테 빚진 것도 없고 여한이 없어. 지금은 재봉도 못 하고 밥 먹고 화장실만 가잖아. 매사 다른 사람한테 민폐만 끼치니까 쓸모없는 인간이 된 거 같아. 살 만큼 살았어. 일찍 가면 틀림없이 기쁠 거야. 여기저기 아플 일도 없고 다른 사람한테 민폐도 안 끼치고.”
어머니는 확실히 마음먹은 듯 의지가 굳건해 보였다. 나는 약속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호스피스 전문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가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도와드리겠다고. 어머니는 내 말을 듣고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제 걱정이 사라졌으니 기쁘게 디데이를 세겠다고 했다. ‘어떻게 떠나지? 자식들이 내가 떠나게 놓아줄까?’라는 문제가 어머니를 오랫동안 괴롭히고 있었다니 새삼 놀랐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의사라는 사실이 어머니에게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두 집안의 다섯 자녀가 치매에 걸린 노인 두 명을 돌보며 금전적, 물질적으로 쓴 비용도 비용이지만 황혼기의 두 여성이 손주가 커가는 모습을 보며 행복을 맘껏 누리지 못하고 병상에 묶여 있어야 했던 점이 특히 마음 아프다. 온전한 내 생활 없이 젊었을 적 육아하던 때보다 더 고된 날을 보냈다. 아이는 커가며 큰 기쁨과 보람을 준다. 그러나 수십 년간 매일같이 병상에 누운 채 의식이 없는 배우자 곁을 지키고 있으면 집 안 분위기도 가라앉고 미래가 안 보였을 텐데 어떻게 견뎠을지 짐작도 안 간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두 어르신이 이렇게 원망 없이 남편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것이 사회적 가치관 때문인지 부부의 정 때문인지 존경스럽고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이런 희생은 가치 있는가? 그들에게 공평한 일인가? 매년 수많은 가정에서 비슷한 일이 생기면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부담인가?
누워 있는 쪽은 더 고통스럽다. 바뀐 체형, 끙끙 앓는 소리, 이따금 흐르는 눈물, 병문안 온 가족들의 참을 수 없는 버거움. 그 누구도 이렇게 오래 누워 있고 싶지 않다. 그들에 대한 가족의 사랑 때문인가? 가족들이 이별로 인한 상실감을 마주할 수 없어서? 아니면 생명이 신성불가침 영역이기 때문에?
가족애와 죽음이 얽힌 문제이기에 모든 윤리, 논리, 과학은 소용없다. 문화나 신앙이 더 중요한 가치관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문화가 다른 서양에서는 장기간 병상생활을 하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적다. 일본은 우리와 상황이 비슷해 ‘장수 지옥’이라는 명칭이 생긴 듯하다.
가족들은 응급 상황이 생겼을 때 논의를 거쳐 빨리 합의를 이룰 수 없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중대한 병이 돌발적으로 생기면 대부분의 가족은 제정신이 아니고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손을 놓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 간 의견이 분분해 싸움으로까지 번지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결정하기 어렵다. 의료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의료 조치를 취해야만 소송당할 기회를 줄일 수 있다.
우리 친정 식구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리지 않았다. 연로한 아버지는 당신이 자다가 떠날 거라고 자신만만해했다. 그리고 몸이 편치 않아도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보낼 필요 없다고 했다. 어머니가 중년의 나이였을 때 소중한 어머니의 언니가 백혈병에 걸려 3년 동안 앓다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3년이나 그렇게 고생스레 사는 것이 할 만한 일이 못 된다고 했다. 평소에 미디어나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안락사 주제가 나오면 우리 가족은 모두 찬성했다. 중병에 걸린 부모가 본인 뜻대로 발관해 임종하려고 하는데 재산 싸움 때문에 반대하는 자녀를 보고 우리 가족은 질책했다. 우리는 평소에 독서나 시사 이야기를 하면서 차츰차츰 합의를 이뤘다.
친구들에게 어머니가 단식 존엄사를 결심하셨다고 말하니 한 친구는 이웃집 어르신도 그렇게 떠나셨다며 가는 길이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친구네 집 어르신도 점진적으로 단식을 했는데 몸이 금방 적응했다고 했다. 일반인들에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니. 친구들의 말을 듣고 나와 어머니는 자신이 생겼다.
어머니가 단식을 시작하고 여동생은 거의 매일 왔다. 타이베이에 사는 큰아들도 일이 없으면 들렀고 남동생은 매일 저녁 어머니를 모시고 영화를 봤다. 어머니의 세 증손주와 증손주 며느리들도 틈날 때마다 들러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의 쉴 새 없는 방문으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일을 회상하고 시사 문제를 논하면서 어머니의 목소리는 밝아지고 기운을 내는 듯했다. 허기를 전혀 못 느끼고 위장통도 없다고 했다.
먹는 양이 적어져 화장실에 가는 횟수가 줄었다. 밤에 잠도 잘 자서 어머니의 정신과 체력이 전보다 좋아진 느낌이었다. 단식 캠프에 참가했던 친구는 단식하면 몸이 가벼워진다고 했다. 어머니의 이런 변화를 보며 우리가 평소에 너무 많이 먹어 신체가 느끼는 부담이 오히려 큰 게 아닌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아들은 직접 인터뷰하며 할머니가 얼마나 능력 있는 분이고, 신세대인지 깨닫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존경심이 우러나왔는지 몇 번이나 탄성을 질렀다.
“할머니 진짜 대단해요. 우리 모두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아시죠? 할머니 희생이 없었으면 지금의 우리 가족은 없었을 거예요.”
또 이렇게 덧붙였다.
“할머니가 단식 존엄사를 결정하고 평소보다 더 건강해지신 거 같아 정말 신기해요. 이런 결정을 안 하셨다면 이렇게 가족들이랑 자주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거고, 나도 할머니 일생에 대해서 들을 리 없었을 텐데. 할아버지 두 분은 자다가 돌아가셔서 이런 일이 없었잖아요. 만약 중병에 걸려서 입원했으면 더 못 그랬을 테고.”
우리 어머니는 곁에서 듣다가 한마디 했다.
“나는 몸이 너무 건강해서 안 죽을까봐 걱정이다!”
불효녀인 나는 말했다.
“지금은 그냥 워밍업이나 다름없어!”
병원에서 호흡 정지, 심정지가 온 대부분의 환자는 심폐소생술을 받는다. 원래 심폐소생술은 긴급한 상황에서만 시행했다. 예를 들면 익사, 화재, 기도폐쇄, 교통사고, 중독, 구타, 의식 불명처럼 우발사고 같은 상황이다. 응급 치료를 통해 많은 환자의 목숨을 살려내고 성공적으로 기능을 되돌릴 수 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말기 환자나 목숨이 위태로워 응급 처치로 살려내더라도 며칠 못 사는 환자까지 있는 힘을 다해 치료한다. 전체 과정은 보통 30분에 달한다. 젊은 의사는 병상 위로 뛰어 올라가 흉부를 압박한다(체외식 심장마사지, 이제는 기계로 대신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은 삽관하고, 암부백을 누르고(공기 주입), 수액을 맞히고, 강심제 주사를 놓고, 심장충격기를 사용한다. 환자가 사망하고 잠시 뒤 의사는 사망 선고를 내린다. 30분 이상 소요되는 응급 처치는 대개 불필요한 것들이다. 가족이 서둘러 도착하기를 기다리거나 의료진이 전력을 다함으로써 가족을 위안하기 위한 목적이다. 어떤 가족은 어찌 되든 끝까지 살려보기를 원하며 포기하지 못한다.
예전에 타이완대학병원 외과중환자실에서 일하는 의사 황성젠이 선생님으로부터 ‘의사의 소명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필사적으로 살려라!’라는 가르침은 받았는데 의료 한계에 직면해 환자를 살릴 수 없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배운 적이 없다고 했다. 한번은 응급 처치를 30분 넘게 했더니 환자의 동생이 용감히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놔주세요. 우리 언니가 더 괴로운 건 싫어요!”
그제야 황 의사는 ‘환자를 구하는 소명의식’이라는 말이 그의 머릿속을 옭아매 멈출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환자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가슴팍은 충격기로 검게 그을린 채 피를 토하는 결과가 초래됐다.
최근 10년간 의학계에서 반성의 물결이 점점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가혹한 ‘사망 세트’ 형벌이라고 부른다. 병원 문화를 잘 아는 의료진은 하나같이 자신은 이렇게 고통스럽게 죽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소극적 안락사는 효과 없는 의료를 포기하는 것이다. 생명유지장치를 하지 않거나 제거해 환자의 자연사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미국이나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합법이다. 미국을 예로 들면, 응급 처치를 받은 환자는 생명유지장치를 일정 시간 동안 유지해야 한다. 완치 가능성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나면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대리인이 생명유지장치 제거를 결정할 수 있다. 일찍이 1990년 서른두 살이었던 식물인간 낸시 크루잔은 7년의 병상생활 후 가족이 경관영양 중단을 법원에 신청했고, 이해관계 없는 친구 세 명이 환자가 이 상태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증언을 했다. 법원은 비위관 발관을 허가했고 낸시는 12일 후 사망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타이완에서 발전한 뒤로 많은 환자가 호스피스에서 심신의 안정을 찾으며 영면했다는 공헌은 명백하다. 그렇지만 의사는 신이 아니며 의료에는 한계가 있다. 푸다런 선생 역시 안녕완화의료의 도움을 오랫동안 받았지만 고통은 여전히 참기 힘들었다. 심지어 모르핀 알레르기 때문에 심각한 부작용을 겪었다.
호주의 식물학자 구달 박사는 104세의 고령에 스위스로 건너가 조력사망의 도움을 받았다. 신체가 노쇠하고 시력이 퇴화되어 연구를 지속하기 힘들고, 좋아하는 일(식물표본 보기, 독서, 드라마 보기)을 할 수 없게 됐으며, 운전도 못 하고 여행도 갈 수 없으니 삶의 질이 떨어져 살아가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는 이유였다. 이런 것들은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도와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자유’ ‘의미’ ‘존엄’은 삶에서 믿는 기본 가치다.
의학 윤리에 위배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윤리의 기준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뀐다고 생각한다. 서양에서는 국민들의 안락사 법안 통과를 원하는 목소리가 날로 커지고 있다. 입법안이 통과된 국가 역시 21세기에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일부 의사단체가 여전히 반대 의견을 내는 점을 감안해, 세계의사회(World Medical Association)는 2017년 제네바 선언을 다음과 같이 수정했다. ⑴나는 환자의 건강과 ‘행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 ‘행복’ 두 글자를 추가했다.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의사의 유일한 임무이며 평온한 죽음을 돕는 것 역시 의료의 일부다. ⑵‘나는 환자의 자주권과 존엄성을 존중하겠다’라는 항목을 추가하며 환자 자주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과거에 ‘생명권’은 신성불가침 영역이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생존을 넘어선 삶의 질과 존엄이 더욱 중요해졌다. 미래에는 환자의 ‘사망 자결권’을 존중하여 의학 윤리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으로 예견할 수 있다.
가족은 갖가지 이유로 아픈 이를 차마 놓지 못하며, 의학계는 사람을 구하는 일이야말로 자신들의 소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안락사 국민투표의 주체가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이나 의사의 돌봄을 받는 환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면 어떨까. ‘몸에 여러 튜브를 꽂은 채 침대에 누워 대소변을 보고,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사지가 뻣뻣해진 상태로 매일 자그마한 침대에서만 생활해야 한다면 당신은 안락사를 택하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주어가 당사자로 바뀐다면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답변이 나올 것이라 장담한다.
2017년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사람은 6585명으로 그해 사망인구의 4.4퍼센트를 차지한다. 이 중 250명(0.38퍼센트)은 스스로 약물을 복용했고 나머지는 의사가 직접 주입해줬다. 80퍼센트는 환자의 집에서 시행됐다. 각 분야 연구에 의하면 안락사가 남용되는 현상은 없었다.
네덜란드가 아무리 개방적일지라도 안락사를 신청한 사람 중 절반 정도만이 심사를 통과한다. 2015년 네덜란드 안락사 인구는 5515명으로 사망인구의 3.75퍼센트를 차지한다. 2680명은 스스로 안락사했는데 사망인구의 1.82퍼센트이다. 스스로 안락사했다는 말에는 절식, 약물 과다 복용 등의 자살 방식이 포함된다. 법규는 지금도 여전히 엄격해 많은 수요자의 ‘사망 자결권’을 만족시킬 수 없는 실정이다.
세계 각국에서 안락사 법안이 통과됐을지라도 안락사 반대 목소리는 계속 나오고 있다. 주로 종교계와 의사단체에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안락사를 지지하는 의사가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종교계는 안락사를 반대할 권리가 있으며 신자는 교리에 따를 권리가 있다. 그렇지만 특정 종교계가 다른 종교의 신자에게 안락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할 자격은 없다. 마찬가지로, 나는 의사에게 안락사 수행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는 데 동의하지만 국민이 안락사를 선택할 권리를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의사는 국민의 생명 자주권을 존중해야 하며 의사에게 권리를 박탈할 권리는 없다.
환자 자주 권리법이 시행된 지 3년이 넘었다. 환자를 위해 튜브를 제거하여 연명의료를 거부하는 소극적 안락사도 받아들였는데, 이러한 환자가 임종을 앞두고도 여전히 고통스러워할 때 수면제나 진정제를 주사해 몇 분 내로 평안하게 사망하도록 하는 일은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기어코 환자가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한 후 며칠 혹은 몇 주나 견디게 한 뒤에야 떠나게 해야 하는 걸까. 환자가 임종하는 마지막 길에 의사가 모르핀 같은 진정제를 투여해 환자를 며칠 동안 잠들게 하면서 치사량까지 높이지 않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의사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신념을 고수한다”라고. 하지만 나는 환자는 질병으로 사망하는 것이지 의사가 죽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환자의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의 임종 과정도 의료인의 직업적 소명이다. 의사가 그 과정을 줄여주는 것은 타인을 돕는 자비로운 일이다. 의사의 직업적 소명의식인 ‘선행’이라는 의사 선서에 위배되는 일이 결코 아니다.
안락사 제도가 없는 국가에서 고통이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면 자력 구제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가장 흔한 방법은 ‘자살’이다. 자살은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효과를 낳는다. ⑴예고 없이 일어났을 때 가족과 지인은 매우 큰 충격을 받는다. 화해, 사과, 감사, 사랑의 말을 미처 전하지 못해 아쉬움과 풀지 못한 마음속 응어리가 남기 때문이다. ⑵작별 인사를 제대로 할 수 없다. 인생에는 늘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별 전에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모두 잘 지낼 수 있다. 그것이 망자와 남은 사람 모두 얽매이지 않고 마음 편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⑶자살 방식은 대부분 잔혹해서 당사자가 아주 고통스럽다. 가족 역시 미련이 남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큰 상처를 입는다. 미국 배우 로빈 윌리엄스는 뇌 질환으로 목을 맸다. 친척도 친구도 아닌 우리 같은 팬들도 마음이 아팠는데 그의 가족들은 오죽했을까. ⑷어떤 이들은 일시적인 오해나 곤경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문제가 해결되어도 생명은 이미 되돌릴 수 없다. 이런 상황이 가장 안타깝다! 암 진단을 받자마자 놀라서 자살한 사례가 있다. 만약 안락사 제도가 있어서 나중에 벌어질 일에 대해 마음을 놓을 수 있다면 가슴을 졸이다가 성급하게 자살할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
불치병에 걸리면 환자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기만 한다. 안락사가 합법인 국가에 살고 있다면 생애 말기에 고통을 완화하는 의료를 받을 것이라 기대하고, 고통이 극심해져 참을 수 없을 때 빠르고 고통 없는 안락사를 신청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껴 사망에 대한 우려가 줄어들고 살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해진다. 심지어 안락사 심사에 통과한 후, 바로 시행하지 않고 어떤 의미를 찾아 더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다.
가장 비참하고 안타까운 자력 구제 방법은 수년간 돌봐온 가족을 제 손으로 살해하는 것이다.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법적 처벌은 남들이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나는 무신론자다. 교회에서 기도하거나 절에서 향을 피우지 않고 조상께 제사를 지낸 적도 없다. 나는 하루하루가 평범하면서 특별하다고 생각해 명절을 딱히 쇠지 않는다. 지구와 태양은 광대한 우주에서 모래 한 알에 지나지 않는데 나라는 존재는 또 뭐란 말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유한한 삶 속에서 존귀하고 책임감 있게 하루하루 사는 것이다. 우연히 태어나, 필연적으로 죽는다. 죽음에 초연했던 어머니는 가장 소중한 수업을 해주셨다. 나 또한 이곳에 밝히겠다. 앞으로 다른 이들이 혐오하는 노인이 되지 않으리라. 어느 날 몸이 노쇠해 고통만 남았을 때 중환자실에 들어가지 않고, 응급 처치를 받지 않고, 튜브를 삽입하지 않고, 죽은 뒤에는 어떤 의식도 하지 않도록 하여 지전 한 장 태우지 않고 한 줌의 먼지로 돌아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