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서점 : 세계를 이해하는 완벽한 장소 / 호르헤 카리온 / 이봄

 

 서점은 세계를 축약한다. 당신의 나라와 언어를 다른 언어권 나라들과 이어주는 것은 항공로가 아니라 서가들 사이의 통로다. 건너가야 할 것은 국경이 아니라 한 걸음(단 한 걸음)이며, 그 한 걸음을 내디디면 지형과 지명, 시간이 바뀐다. 어제 출판되어 갓 서점에 도착한, 아직 바닐라 향 비슷한 리그닌 냄새가 나는 책이 1976년에 출판된 책 곁에 놓여 있고, 선사 시대의 이주를 다룬 논문이 21세기의 메갈로폴리스를 논한 연구서와 공존한다. 카뮈 전집을 지나면 세르반테스 전집이 나온다(“새로운 것은 흥분시키고 오래된 것은 유혹한다”는 푸아의 시구가 이토록 진실되게 울리는 축소 공간은 없다). 걷다보면 대로가 아니라 계단이나 문턱이, 때로는 문턱도 아닌 것이 장르와 장르를, 하나의 학문이나 집념을, 종종 그것을 보완해주는 반대 분야와 이어준다. 이를테면 그리스 비극과 북아메리카의 위대한 소설들을, 미생물학과 사진술을, 극동의 역사와 서부를 다룬 베스트셀러를, 힌두교 시와 인도 연대기를, 곤충학과 카오스 이론을 서로 연결하는 것이다. (p.25-26)

 

 서점의 역사는 도서관의 역사와 크게 다르다. 서점은 연속성과 제도적인 뒷받침이 부족하다. 민간 주도를 통해 대중적인 문제에 해결책을 내놓으므로 자유롭지만, 같은 이유로 연구 대상이 되지 못하고, 관광 책자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드물며, 완전히 문을 닫고 신화가 되지 않는 한 절대로 박사 논문의 주제도 되지 못한다. (p.32-33)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인 서재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역사상 도서 분류 체계가 적용된 최초의 도서관일 것이다. 개인 컬렉션과 공공 컬렉션의 교류, 서점과 도서관의 교류는 그래서 문명만큼이나 역사가 길다. 그러나 역사의 저울은 항상 도서관으로 기운다. 서점은 가볍고, 도서관은 무겁다. 현재로 이어진 가벼움은 전통의 무게감과 대비된다. 서점이란 개념에서 문화유산은 거리가 먼 개념이다. 도서관 사서는 상품을 모으고 쌓아두고 기껏해야 임시로 대여하는―상품이 되지 못하게 하거나 상품 가치를 동결시키는―반면, 서적상은 구한 것을 놓아주기 위해 손에 넣고, 사고팔고, 유통한다. 서점은 교통이고 통로다. 도서관은 항상 한걸음 뒤에 있다. 과거를 향해 눈을 돌리며. 그러나 서점은 현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에 시달리면서도, 변화를 탐닉하며 흥분한다. 역사가 도서관의 연속성을 보장한다면, 미래는 서점의 존재를 끊임없이 위협한다. 도서관은 굳건하고 기념비적이며 권력, 지방자치단체, 중앙정부, 군대와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이집트의 문화유산 약탈을 두고 피터 버크는 『지식의 사회사』에서 말하길, 프랑스의 왕성한 도서관 장서 욕구를 채우기 위해 “나폴레옹 군대는 합스부르크가 시대의 네덜란드에서 필사본 약 1500점을, 그리고 이탈리아, 특히 볼로냐와 바티칸에서도 필사본 약 1500점을 가져갔다”고 했다. 반면에 서점은 유동적이고 일시적이며 기존의 개념을 가능한 한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계속 보존하는 능력을 유지한다. 도서관은 안정적이다. 서점은 유통하고, 도서관은 보존한다. (p.50-52)

 

 1802년에 샤토브리앙은 자신의 네 권짜리 저서 『기독교 정수』의 불법복제본을 제보받고 아비뇽으로 갔는데,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서점들을 돌아다닌 끝에 복제한 범인을 찾았는데, 그는 내가 누군지 몰랐다.” 도시마다 이런 일이 많았고 대부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사실 문학은 대상과 육체와 물질과 공간이 얽힌 수많은 망으로 이루어졌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추상적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글을 읽는 눈, 글을 쓰고 책장을 넘기거나 책을 잡은 손, 대뇌의 시냅스, 서점과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 생화학적인 욕구, 책을 살 돈, 종이와 마분지와 천, 책이 꽂힌 책장, 으깨진 나무와 사라진 숲, 트럭을 몰고, 상자를 싣고, 책을 정리하고, 알고 싶어하고, 눈길을 주고 훑는 많은 손과 눈, 계약서와 글자와 숫자, 사진, 창고, 점포, 도시의 넓이, 문자, 스크린, 잉크와 픽셀로 만들어진 단어들로 이루어졌는데도 말이다.
 스페인어로 시를 뜻하는 ‘poesía’라는 단어는 ‘만들다’라는 뜻의 어원 ‘poiein’에서 파생했으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문학’을 의미했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장인』에서 손과 눈의 긴밀한 관계를 탐구했다. “모든 훌륭한 장인은 실질적인 수행과 생각이 서로 대화를 한다. 이 대화는 진화를 거듭해 습관으로 자리잡으며, 동시에 그 습관을 통해 문제의 해결과 발견 사이에 리듬이 생겨난다.” 그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장인 즉 목수, 음악가, 요리사, 바이올린 제작자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의 성찰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 무수한 장인(제지업자, 식자공, 인쇄공, 제본공, 삽화가)은 물론이고 독자들의 육체로, 즉 그들의 동공확대로, 집중력으로, 몸의 자세로, 손끝의 기억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점이다. 글쓰기 자체, 그러니까 서예 같은 손글씨 작업은 중국이나 아랍 문명에서는 아직도 완벽을 추구하는 규율을 따른다. 그리고 문화사로 볼 때 손으로 쓰기에서 자판 두드리기로 이행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사물 창작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음에도 서적상의 모습은 장인 독자로 간주할 수 있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1만 시간으로, 일을 탁월함과 결합할 줄 알고 제작을 시와 통합할 줄 아는 기술을 갖춘 자가 전문가가 된다. (p.67-68)

 

 리스본의 서점 레르 데바가르가 생겨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조제 피뉴가 내게 말했듯, 서점은 열린 구역에서 사회 조직과 경제 조직을 되살리는 힘이다. 변화를 위한 현재의, 가속화된 엔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서점들이 중요한 사회적 프로젝트의 일부를 담당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도시들에 있는 엘로이사 카르토네라와 연계된 서점들을 떠올려본다. 일례로 아르헨티나 본점은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제보한 책들을 내놓는다. 멕시코 오악사카에서 훌륭한 현지식을 차려내는 식당 라 히카라는 서점으로 둘러싸인 구조인데, 그곳은 아동서와 성인 도서를 모두 다루며 독립출판물 인증을 받은 책만 취급한다. 또 생각나는 곳, 하우징 워크스 서점 카페는 자원활동가들에 의해서만 관리되며, 도서 판매와 공간 임대와 카페 수익 전액을 뉴욕에서 가장 소외된 자들을 돕는 데 쓴다. 이 서점들은 인간 사슬을 구축하기 위해 손을 뻗는다. 책을 사랑하는 전통을 이야기할 때 이보다 더 좋은 비유는 없다. 책은 눈으로 읽을 뿐 아니라 손으로도 읽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 이와 같은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서점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했을 때, 이미 친구가 되어 이사를 도와준 고객들이 있다. 스페인 팜플로나에 있는 오래된 아우솔란 본점이 새 본점과 통합할 수 있었던 것도 인간 사슬 덕분이었다. 포츠머스의 리버런 지점들, 이스탄불의 로빈슨 크루소 389 지점들, 바르셀로나의 포블레노우 구역에 있는 노예히우 지점들도 인간 사슬의 지원을 받았다. (p.70-71)

 

 거의 비어버린 서점보다, 책을 태우던 화형장의 잔해보다 더 우울한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19세기에 소르본대학교는 이단으로 선고된 책 500종을 퇴출시켰다. 18세기 말에는 7400종의 책이 ‘금서 목록’에 등재되었고 바스티유 감옥 습격 때 혁명가들은 소각되기 직전의 책들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1920년대에 미국 우정국은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소각했다. 1960년대까지 영국과 미국에서는 D. H. 로런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나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합법적으로, 외설 혐의 없이 출판할 수 없었다. 1930년에 소비에트연방은 민간 출판을 금지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공식적인 검열이 존재했다. 미래의 교황 비오 12세인 에우제니오 파첼리는 1934년에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은 뒤에, 비오 11세에게 총통이 격노하지 않도록 금서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고 설득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마지막 군부독재 기간에 책을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세르비아는 박격포를 동원해 사라예보 국립도서관 파괴를 시도했다. 국기를 불태웠듯 책을 불태우는 청교도, 기독교, 이슬람교 시위대는 주기적으로 출현한다. 나치 정부는 유대인, 동성애자, 정치범, 집시, 병자 들을 말살하면서 유대인 작가들의 책 수백만 부를 폐기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희귀하거나 가치 있는 책들은, 이른바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의 확정적 마무리 이후에 개관할 유대교박물관에 전시할 의도로 보존했다. 많은 이들이 강제수용소를 관리하던 나치들의 클래식 음악 애호를 기억한다. 반면 그 시대의 통제, 억압, 처형의 주요 시스템을 설계했던 자들, 가장 효과적인 도서 검열을 실증한 자들 또한 문화연구자이자 작가, 열렬한 독자들이었다는 사실, 즉 서점 애호가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p.131-133)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무엇인가를 새로이 발견하기도 하지만, 이미 알던 것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그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 우리가 여행에서 찾는 만족이 조화를 이룬다. 그런 면에서 서점들은 거의 항상 안전한 도박이다. 그 구조는 언제나 친숙해서 평화를 안겨준다. 또 우리는 직관적으로 그 질서를, 그 배치를, 그것들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적어도 해당 글자를 알아보고 읽을 수 있는 매대가 있어야 하고, 무심히 넘겨볼 수 있는 그림책 구역이, 정확히 아니면 우연히라도 해독 가능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p.146)

 

 에로틱한 환경으로서 모든 서점은 최고의 만남의 공간이다. 서적상과 책, 독자와 책, 독자와 서적상, 여행하는 독자들 간의 조우. 세상의 모든 서점들이 공유하는 친숙함의 특성, 피난이나 격리의 장소라는 성질은, 다른 공간들보다 그 안의 사람들을 서로 가깝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서점에서 아랍어나 일본어로 출판된 톨스토이나 로르카의 책을 제목이나 작가 사진이나 어떤 직관으로 알아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서점에서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경험도 그렇다. 그래서 서점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문학이나 영화의 토포스로 굳어졌다는 점은 극히 자연스럽다. 〈비포 선라이즈〉는 유럽 기차 여행을 하던 중 빈에서 꿈같은 몇 시간을 함께 보낸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속편 〈비포 선셋〉에서 이들은 9년 후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에서 재회한다. 남자 주인공은 작가가 되었고, 그들이 만난 장소는 미국 작가들이 파리에서 작품을 발표하는 곳이다. 있을 법한 우연이다. 그가 그녀를 알아보는 순간은 고전적 에로틱의 재현 마술로 펼쳐진다. 그가 청중에게 자신이 쓰고 싶었던 이야기, 즉 최소한의 현재와 최대한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책을 설명하는 동안, 팝송이 흐르면서 플래시백을 통해 또다른 표면적 이야기가 전작의 편린들, 그 빈에서의 밤의 조각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를 보게 된다. 그는 바로 그녀를 알아본다. 몹시 긴장한다. 거의 10년 전에 손에서 놓은 인연의 끈을 그들이 다시 붙잡는 데는 불과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서점이란 개념은 낭만주의가 지배적이고, 여기에서 소통과 우정과 사랑의 상징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대중문화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소설 『바람의 그림자』와 『잊을 수 없는 재스민』부터 스트랜드 서점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두 로맨틱코미디영화 〈리멤버 미〉와 〈줄리 & 줄리아〉, 그리고 독립서점이 바로 옆에 문을 연 체인 서점으로 위기를 겪는 내용을 다룬 〈유브 갓 메일〉에서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서적상(멕 라이언)과 체인 서점의 이사(톰 행크스)는 서로 이름도 얼굴도 모른 채 이메일을 주고받는 관계를 이어간다. (p.182-183)

 

 이동성은 19세기의 위대한 발명이다. 열차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변화시킨다. 인간의 삶을 가속화할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에 대한 생각을, 네트워크의 구조에 대한 생각을, 아무리 광대하더라도 단 며칠 안에 전체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시스템 전체가 신체 크기로 줄어든다. 조용한 가운데에서만 읽을 줄 알았던 여행자들이 적응기를 거치고 나면 이동하면서도 읽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페이지에서 시선을 뗄 수도 있다. 즉 읽은 조각들을, 차창으로 보이는 조각들을 통해 상상한 것들과 연결할 수도 있다(영화를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승강기가 생겨나, 실로 오랜 세월 동안 수평 성장해온 도시의 수직 성장이 가능해진다. 귀족과 상류층 부르주아의 무거운 가구들은 이사가 가능한 가벼운 가구로 단출해진다. 레나토 오르티스는 이를 공간적 용어로 “방에 대한 거리의 지배”라고 바꾸어 말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신속하고 가장 어마어마한 양의 이주가 일어난다. 파리와 런던의 만국박람회는 산업 성장과 제국 팽창의 결실이며, 자신들의 패권을 세계만방에 알려야 할 필요에 대한 응답이다. ‘진보의 신화’의 증폭기이자 괴물 같은 진열장이다. 연속 생산을 요구하는 현기증 나는 리듬인 유행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모든 것이 유효기간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 새로운 소비사회가 탄생한다. 유행과 가벼움은 책에도 적용된다. 문고판, 싸구려 축소판, 염가 도서, 재고 상자, 중고책 진열대. 이 모든 것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런던과 파리에서 등장하고, 그와 동일한 환경에서 근대 서점, 그리고 그 서점들과 더불어 서점 체인들이 형성된다. (p.265-267)

 

 방금 언급했듯 나는 이튿날 글리북스로 갔지만, 여행에 꼭 필요한 책 두 권은 그냥 아무 서점에서나 샀다. 세상의 위대한 서점과 유사시 서점은 구별해야 한다. 물론 후자는 더 필요한 독서를 우리에게 공급하는 서점이자 기다릴 수 없는 서점이고, 기차나 비행기 여행 중에 무료함을 달래게 해주는 서점이며, 그 지역을 떠나기 직전에 선물을 살 수 있는 서점이고, 출간을 기다려온 책을―책이 나온 당일에―구할 수 있는 서점이다. 이런 유사시 서점 없이 전자의 서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도시는 책 거래의 관계망이어야 한다. 가판대부터 주요 서점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해 중소 서점, 체인 서점, 슈퍼마켓 베스트셀러 섹션, 중고서점, 영화·만화·탐정소설·대학 교재·대중매체·사진·여행 전문 서점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다뤄야 한다. (p.282-283)

 

 사실 나는 패스트푸드점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나는 맥도날드를 좋아한다. 아니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여행에서는 현지 맥도날드의 맛을 보기 위해 매장을 찾는다. 거기서는 항상 아침을 먹을 수 있으며, 파히타나 햄버거 혹은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 맥도날드 버전의 아로스 콘 레체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서점이 점거당하는 고통을 덮어주지는 못한다. 그 몇 달 동안 나는 아침이면 작은 세계가 파괴되는 모습과 그 공간을 다른 세계가 점령하는 모습을 쓸쓸하게 지켜보았다. 오후에는 독서에 관한 책을 읽고 이 책의 원고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p.352)

 

 문화는 기억 없이 존재할 수 없고 망각 없이도 존재할 수 없다. ‘도서관’이 모든 것을 기억하기를 고수하는 반면, ‘서점’은 필연적인 망각 덕분에 현재를 선택하고, 배척하고, 적응한다. 미래는 노후화를 발판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이나 낡은 과거의 사상을, 허구를, 최소량의 빛의 포기를 중단했던 담론들을 폐기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지식을 포기하는 일은 바람직한 것일 수도, 필요한 것일 수도 있는데,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잃는 만큼 얻는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피터 버크가 지적했듯이 말이다. 따라서 일단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을 구성하는 일련의 선택과 포기가 발생하면, 인간들이 잘못될 수 있었던, 가장 귀중한 것이 망각으로 내던져질 수 있었던, 사라질 만했던 많은 자료와 사상들 사이에서 “수세기에 걸쳐 배척된 지적인 쓰레기를 연구하는 것”이 타당하다. 책은 수세기에 걸쳐서 잔존한 후에 소프트웨어와 함께 계산된 노후화와 유효기간의 법칙에 따른다. 책은 우리와 텍스트의 관계를 훨씬 깊게 변화시킬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번역하고, 바꾸고, 상상할 수 있는 한계까지 개인화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어학이 익히 알려진 쓸모없는 권위에 맞서 문제를 제기하고, 종교 서적들이 미신적인 생각이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력을 통해 각각의 언어들을 쏟아내면서 시작되었던 인문주의의 여정은 잠정적인 정점에 이르게 될 것이다. (p.370-371)

 

 2012년 6월에 뉴욕에서 사망한 작가 데이비드 마크슨의 마지막 소망은 자신이 보유한 장서가 스트랜드 서점에 통째로 팔려 수많은 도서관과 익명의 독자들이 나눠 갖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달러, 20달러, 50달러 등으로 가격을 매긴 그의 책들이 원래 속했던 서점에 다시 모이게 되었다. 각자의 행운과 운명을 기다리면서. 마크슨은 장서를 대학에 기증할 수도 있었는데 그랬다면 먼지만 쌓이고 기껏해야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이들만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고, 그야말로 예측 불가능한 앞날의 결과를 무릅쓰고 자신의 서재를 해체시켰다.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의 저자 데이비드 마크슨을 추종하는 독자들이 맨해튼에 위치한 스트랜드 서점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본문에 밑줄이 그어졌거나 주석이 달린 책들을 찾았다. 온라인상에 그룹이 형성되었다. 책장들이 스캔되어 네트워크상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생전에 마크슨은 『필경사 바틀비』에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올 때마다 밑줄을 그어놓았고, 『화이트 노이즈』에는 “놀랍고, 놀랍고, 놀랍고”라는 문구와 “지루하고, 지루하고, 지루하고”라는 문구를 번갈아 적어놓았다. 또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전기의 여백에는 “이사크 바벨이 모스크바에 있는 지하 감옥에서 처형당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체포되었을 때 출간된 소설의 원고가 스탈린의 문서 보관소에 아직 있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라고 적었다. 그가 소장했던 책들에 남겨진 메모들만으로도 소설 한 편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독서 일기와 시적인 표현, 의견 등의 주석은 마치 재핑(zapping)처럼 계속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소설일 것이다. 그의 서재를 채웠던 책들은 이제 그 소재가 파악될 수 없을 것이고, 그중 다수가 이미 팔렸거나 이 순간에도 스트랜드 서점에서 마크슨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팔릴 것이다. 그러한 행위까지도 그의 유산에 속한다. 그가 죽음과 상속과 부성애와 무수한 서점 가운데 단 하나를 결합해서 시도한 최후의 행위는 범세계적인 문학의 유물로, 유일무이한 이야기로 요약될 것이다. (p.374-376)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 / 김경수 / 필로소픽

 

 매체학이 본격적으로 학문 분과로서 자리하기 시작한 것은 사진기와 영사기, 축음기 등 여러 매체가 발명되면서부터다. 특정 대상을 보고 듣고 느끼는 우리의 지각 체계를 한정 짓는 틀로서 매체를 바라보는 문제의식이 강해진 것이다.
 매체학의 촉매제가 된 학자는 발터 벤야민이라 할 수 있다.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은 영화, 사진 등 1900년대 매체와 그 이전의 매체의 차이를 분석한 글인데 지금까지도 수많은 매체학자에게 영감을 준다. 이후로 유럽에서는 여러 매체학자가 등장했다. 무성영화의 출현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영화가 새로운 시각적 언어를 탄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분석한 벨라 발라즈,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활동한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은 작가가 있다. 또 매체의 탄생으로 인해 생겨난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테오도어 아도르노 등이 벤야민과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루었다. 한편 저 너머 신대륙에서는 글쓰기와 영화, 구술문자와 같은 여러 매체를 오가며 매체의 본질을 탐구한 해럴드 이니스와 월터 옹, 마셜 매클루언 등의 캐나다 학파가 등장했다. 이윽고 2세대 매체학자로 빌렘 플루서와 귄터 안더스, 키틀러, 폴 비릴리오, 장 보드리야르 등이 나타났다. (p.24-25)

 

 죽은 키틀러가 지금의 매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한 지금이야말로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는 키틀러의 말을 되돌아볼 때다. 식당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는 노인을 보는 일은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에 매여 있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목줄에 묶인 개의 모습 같기도 하다. 나아가 가짜뉴스나 데이터 알고리즘 등이 우리의 사고를 확증편향으로 몰고 가며 의식을 옭아매는 중이기도 하다. 매체로 인해 우리 삶이 확장되기는커녕 뒤흔들리고 있는, 우리가 보지 못한 우리의 심연을 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는 전제가 더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p.36)

 

 인터넷 밈은 우리를 일상의 예술가로 만든다. 시프만은 인터넷 밈을 포스트모던 시대의 민담이라고 정의했다. 정체불명의 원본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잠시나마 이야기를 마음껏 변형하고, 타인에게 물려주는 이야기꾼으로 거듭나는 재미야말로 인터넷 밈의 재미라고 본 듯하다.
 위와 같은 점에서, 시프만의 정의를 확장해 인터넷 밈을 ‘합성 소스를 기반으로 하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참여하는 대안적인 놀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나 이는 놀이를 통해서 작품을 생산하는 창작 행위이기도 하다. 인터넷 밈이 생기려면 영화나 드라마, 만화 등의 원본이 있어야 하며 그 원본은 디지털 파일로 제작되고 인터넷에 유포되어야 한다. 거기서 우연히 짤방과 같은 합성 소스가 생긴다. 합성 소스는 그림, 사진, 영화 등 무엇을 토대로 하는지에 따라 그 형식을 나눌 수 있다. 합성 소스는 불특정 다수 유저에 의해 음악 등의 여러 요소와 합해지고, 거기서 밈의 장르가 생긴다. 밈화는 각 요소가 장르적인 규칙을 형성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한 이미지가 분해와 결합을 거쳐서 계속 다른 이미지로 생산되는 셈이다. 이 모든 조건을 통과해야만 인터넷 밈이 된다. (p.44)

 

 오늘날 이미지는 언제 어디서든 전송하고 가공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특히나 유명 작품을 파일로 저장할 수 있는 사유화는 영화관이나 미술관 등 특정한 장소에서만 즐길 수 있는 이미지를 그곳으로부터 해방되게끔 했다. 예술 작품이 파일로 변환되고 디지털화되면서 모든 이는 예술 작품을 소유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그것을 가지고 놀 수 있다. 원본과 무관한 굿즈를 만들어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 작품을 복제한 파일을 소유하고 있기에 작품 뒤편에 있는 가치와 권위, 맥락을 무시할 수 있어서다. 누구의 작품이든지, 거기에 어떤 맥락이 엉켜 있든지 간에 그 자체로 아름답거나 기이하거나 쓸 만한 것이라면 곧장 콘텐츠로 소비된다. 작품의 콘텐츠화는 합성 소스가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이는 한편으로 인터넷 밈이 저작권 등 작품의 가치를 규정하는 근대적 법적 시스템, 경제적인 시스템으로부터 예외 상태에 있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p.58)

 

 인터넷 밈의 저자를 밝히기엔 너무 복잡한 문제가 뒤엉켜 있다. 표절과 창작, 익명과 실명, 합법과 불법이 한데 있어서 딱 잘라 말하기가 힘들다. 인터넷 밈에는 네트워크를 거치며 우연하게 매개된 공통 저자들이 있다. 심지어 인터넷 밈의 디지털 풍화(화질 열화)마저 인터넷 밈을 구성하는 요소다. 기계도 인터넷 밈의 저자 중 하나인 셈이다. 예술 작품의 주인은 단일 저자라는 환상은 근대의 산물에 불과하다. 인터넷 밈의 저자는 여기저기에 퍼져 있다. (p.59-61)

 

 합성 소스를 발굴하는 행위, 그리고 합성 소스라는 원본을 복제하고 특정 맥락에 따라서 재구성하는 행위인 밈화도 예술을 창작하는 과정인 미메시스가 아닐까. 합성 소스를 상대방이 예기치 못한 맥락에 삽입한다든지 하는 위트도 사실은 가장 작은 단위에서 할 수 있는 미메시스다. 밈화를 하는 순간 우리가 느끼는 쾌감은 거기서 온다. 사소한 복제 행위만으로도 상대방이 생각지 못한 어떤 상황을 만들고 경탄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인터넷 밈으로 상대방을 웃길 때 작게나마 예술가나 코미디언이 되는 듯한 창작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p.123)

 

 물론 제3의 장소로서 인터넷 밈에 한계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위징아는 “놀이가 벌어지는 현실은 인간 생활의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에 합리성에서 그 기반을 찾으려는 것은 무리”라고 이야기한다. 다만 이는 마법의 원에 속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오컬트에서 마법의 원은 사탄을 소환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거기에 있는 이들은 본인이 외부에 끼칠 영향을 모를 수도 있다. 현실로 되돌아오자. 우리가 즐긴 놀이가 사실은 혐오나 차별 등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패악질에 불과할 수 있다. 순간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인터넷 밈은 현실적으로 깊게 생각해야 하는 사안도 증발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이는 사건에서 파생된 밈 너머로 숨기 마련이고, 사건 자체는 인터넷 밈으로 인해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진다. 그 밈의 소비가 문제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은 “선비”라고 조롱당한다. 여론은 그 대상을 망각해버린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인터넷 밈을 둘러싼 맥락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인터넷 밈 자체만 탐닉할 때 우리는 거기에 뒤엉킨 사회적인 문제를 외면하게 될 수 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의 죄의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어떻게 아냐고?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p.132-133)

 

 인터넷 밈에 관한 정설이 하나 있다. 바로 광고나 정부 기관 등에서 인터넷 밈을 쓰는 순간이 바로 그 밈의 사망선고라는 것이다. 이는 흔히들 인터넷 밈의 생애 주기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최근 인터넷 밈은 틱톡과 숏폼, 커뮤니티에서 업로드된 게시물이 X(트위터)에서 빠르게 전파되고, 인스타나 페이스북 등 SNS에 퍼지다가 공중파나 유튜브 채널에서 재탕된 후 마지막으로 정부 기관에서 쓰이며 소멸한다는 식이다.
 거시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인터넷 밈이 기출변형이 되며 유행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끼어드느냐다. 그것은 바로 실용적인 목적이다. 인터넷 밈에 쓸모가 생기는 순간, 놀이문화가 형성되지 않는다. 죽은 밈은 이처럼 인터넷 밈의 개성을 이해하지도 않은 채 광고 등 돈벌이로 쓰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할 때 생긴다. 누군가 그 인터넷 밈의 의미를 함부로 정하고 그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 순간에 죽은 밈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인터넷 밈은 제3의 장소다. 정치공학과 자본에 기반하는 기성세대의 세속화된 논리에 저항해 형성된 대안적 공간이다. 죽은 밈은 외부의 판단으로 인터넷 밈 유저 사이에 통용되는 놀이 규칙을 무너뜨리려는 것에 반항하는 성격을 지닌다. 애들 놀이에 불과한 것을 굳이 광고 같은 돈벌이에다가 써먹으려는 이를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충주시의 김선태 주무관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정부 기관이나 광고, 마케팅에 어떤 인터넷 밈이 쓰인 순간, 해당 인터넷 밈을 쓰는 사람은 놀 줄 모르는 이에 불과해진다. 죽은 밈은 모든 것을 돈벌이 수단으로 쓰는 세상에 대한 놀이문화의 저항을 드러내는 사례다. (p.175-176)

 

 철학자 폴 비릴리오는 기계 장치가 오류를 일으키고 작동을 멈추는 피크노렙시(picnolepsie)의 순간에 인간이 해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가속화되고, 모든 것이 과잉 연결되고 가까워지는 시대에서 필터버블에 생기는 균열은 우리에게 자유의 감각을 선사한다. AI 알고리즘에 우연히 뜬 아름다운 이미지가, 혹은 저항적인 인터넷 밈이 우리를 또 다른 곳으로 이끌 수 있다. 더 재밌고, 더 낯선 인터넷 밈을 퍼뜨릴수록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또 그것이 우연하게 유행할 때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p.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