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의사, 다시 가운을 입다 / 김선민 / 메디치
선천성 담관낭종이라는 질환을 갖고 조금 더 일찍 태어났다면 나는 지금 살아있지 못할 것이다. 대장암 발병이 2000년대 이전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당시 한국의 의료기술은 발전하지 않았다. 너무 높은 의료비용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여성인 내가 사회에서 영역을 넓혀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평원장이라는 직위에 도전하게 된 것도 2020년의 한국에서나 가능했다.
‘찰나의 우연들이 모이고 쌓여 오늘의 내가 있었다.’
이 생각을 자꾸 떠올리면서 내가 찾은 행운의 모습을 그리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하나하나 그려가면서 생각은 성장해갔다. 우연같이 보이던 행운을 찬찬히 뜯어보니 새 얼굴이 보였다. 행운의 여신은 알고 보니 사회가 내민 연대(solidarity)의 손이었다. 어려운 시기에도 한국사회는 민주와 평등을 두 축으로 빠르게 발전해왔다. 사회적 연대는 차츰 제도화했다. 내가 넘어질 때마다 나를 받쳐준 것은 사회 발전의 다른 얼굴이었다. 한국 사회는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고, 내가 한 일은 그 손을 잡은 것뿐이었다. 그 결과로 나는 성장할 수 있었다. (p.15-16)
환자를 보내고 내 긴 노동은 비로소 시작된다. 백장이 넘는 서류를 읽고, 산업위생사들이 촬영해 온 작업 동영상을 보고, 문헌을 찾고, 정형외과 과장과 회의를 해야 한다. 일이 많을 것 같다. 그래도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30년 전, 처음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고민은 고민도 아니다. 그때 ‘직업병’을 말하는 의사를 사람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봤다. 함께 논의할 사람도 많지 않았다.
지금은 환자 한 명에 매달리는 인력이 몇 명인가. 정형외과 과장도, 산업간호사도, 위생사도, 근로복지공단 지사 직원도, 질병판정위원회 위원들도 모두 이 일에 ‘진심’이다. 활용할 정보도 많다. 직업병이라 해도 아니라 해도 나에게 시비 걸 사람은 없다. 그래서 더 무겁다. 하지만 그것도 큰 걱정은 아니다. 내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바로잡아 줄 이들도 많다. 전국에 있는 근로복지공단 소속 병원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회의에서 물어보면 된다.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에서 합리적 판단을 할 것이다. (p.27-28)
건강한 듯 보여도 며칠 있다가 병원에 갈지 모르는 만큼, 병원에서 고통을 받는 시간도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문장은 솔로몬이 아니라 내 경험에서 배웠다. 물론 그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오랜 고통의 시간은 충분히 값어치가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꼭 단서를 단다. 한 개인에게 고통이 값진 경험이 되려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것을 뒷받침하며 기다려 주어야 한다. 모든 아픈 이들이 참으며 고통의 시간을 지내면 건강한 시간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운이 좋은 환자였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장하다고 말하면, 참 민망하다.
정말 운이 좋게도 나는 의학적 지식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병에 대한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주변에 자원도 풍부했다. 내 부모님은 두 분 다 괜찮은 직장이 있었다. 한국의 건강보험이 충분하지 않을 때도 나는 병원비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의대에 입학했던 덕분에 큰 병 앞에서 좋은 병원, 훌륭한 의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용은 많이 들었지만 불필요한 것에 헛돈을 쓰지 않을 분별력이 있었다. 훗날 노동력을 상실했을 때 최소 생계를 이어갈 만큼의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다.
모든 환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하면 청춘은 서럽다. 아픈 시간을 홀로 꿋꿋하게 견디라고 하면 환자는 갈 곳이 없다. 환자가 충분히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세상은 보호막을 쳐주어야 한다. 그런 전제 조건 아래서 질병을 이겨내면 그 사람의 인생은 정말 풍성해진다. 질병이 인생을 풍성하게 하려면, 적어도 그 병을 이겨야 한다.
투병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듯, 한 사람이 병을 이기려면 온 사회가 필요하다. 아픈 이들이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나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도록 충분히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회, 그것이 내가 바라는 세상이다. (p.43-44)
암과 죽음의 공포는 그렇게 내 몸뿐만 아니라 정신을 움켜쥐고 흔들어댔다. 이성도 멈췄다. 곧 죽을 것같이 두려움을 느끼다가도, 아무데도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감정도 퇴화했다. 느낌을 잘 드러내지 못하기도 했고, 어린아이처럼 정제되지 않은 과도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안부를 묻는 친지들에게 얼토당토않게 화를 내기도 했다. 처음 며칠 동안 오던 전화도 차츰 뜸해졌다.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 연락하기가 싫었다. 퇴원해 집에 와서 휴대전화번호와 집 전화번호를 바꿨다. 이메일 계정도 새로 만들었다. 집도 이사를 했다. 나는 세상과 담을 쌓았다. 버려지는 것보다 내가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현실감각은 점점 더 떨어졌다.
암은 그런 것이다. 죽음과 직결된 병에 걸리면 한 사람의 의식 세계와 사회적 관계 전반이 흔들린다. 내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그때 깨달았다. 인간의 존엄성 같은 단어는 미뤄두었다. 나 한 몸 건사하기 위한 경제력마저 부모 형제에게 의지하면서 ‘염치’라는 것도 옆으로 치워두었다. 간을 배 밖으로 내어서 저 뭍에 두고 온 토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큰 병이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것도 그저 긴 과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나중에 다른 환자들을 보고 알았지만, 내 자의식은 일그러졌다. (p.51)
내가 암에 걸렸다 살아나기까지, 아슬아슬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동네 외과의원에 가지 않아 치료시기를 놓쳤다면, 부모형제들이 나를 도울 수 없었다면, 다시 세상에 나와 직장을 잡을 수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수많은 행운들이 겹치고 얽혀 지금 나는 살아 숨 쉬고 있다.
죽음에 직면해본 후 나는 작은 실패에 집착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일을 더 잘하게 되었다. 직장에서 어려운 일을 겪어도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그래도 지금 살아서 이런 고민도 하게 되었잖아! 그거면 감사할 일이지.’ 당시에 넘쳐났던 ‘감사하기’나 ‘긍정’ 열풍 덕이 아니었다.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무렵, 저절로 그 태도가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세상의 일들이 더 잘 풀렸다. 암이 뒤늦게 내게 준 선물이었다.
암이나 죽음의 공포가 사람을 바꿔놓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려면 나처럼 수많은 행운이 겹쳐야 한다. 간발의 차이로 행운을 놓친 많은 이들은 좌절 속에서 세상을 떴다. 행운의 얼굴은 사회가 아픈 사람들에게 내미는 친절이다. 그 친절이 제도화된 사회가 바로 선진국이다. (p.54)
지금은 어떨까? 오늘날 한국 사회 전체가 앓고 있는 정신병의 크기는 오히려 커졌을 것이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욕이 그 증거다. OECD 국가 중 이렇게 최근에 전쟁을 직접 겪었고, 절대빈곤에서 고소득으로 단기간에 급성장한 나라는 우리뿐이다. 절대적인 소득이 높아졌어도 국민 모두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2013년 OECD가 한국의 자살문제와 정신보건체계를 검토한 이후 어린 학생들에게 지나치게 공부를 많이 시키는 것을 비중 있게 지적했다. 영국 출신의 정신과 의사는 아동학대라고도 했다. 어려서 전쟁을 경험하고 이제는 다시 빈곤으로 떨어진 노인층에서 자살이 많은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우울과 자살은 뿌리가 깊다. (p.68)
1970년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과 함께 스스로를 불살랐지만, 1990년대 초반에도 노동환경은 좋아지지 않고 있었다.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던 17세 노동자 문송면 군이 수은 중독 진단을 받고 사망했다. 원진레이온에서 7년간 일하던 노동자 김봉환 씨는 1990년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진단을 받고 이듬해 뇌혈관 질환으로 사망했다.
그해 환경의학 전공의 자리는 하나뿐이었다. 환자이기도 한 나는 다른 쟁쟁한 인턴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언제 병석에 누울지 모르는 내가 남들과 경쟁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면구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나 말고는 응시의사를 표한 친구가 없었다.
운명처럼 나는 예방의학과 공중보건에 종사하게 되었다. 직업환경의학도, 그 길에서 만난 의료정책도, 보람 있을 것이란 예상은 맞았다. 잊을 만하면 언론을 장식했던 직업성 질환을 진료하는 의사가 된다고 생각하니, 새로운 측면으로 역동을 느꼈다. 비록 건강 때문에 차선으로 가게 된 길이지만, 평생을 살면서 이런 사건들을 하나라도 해결할 수 있다면, 내 인생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p.72)
카드뮴 중독은 일본에서 이미 ‘이타이이타이’(아파아파) 병으로 이름 붙여졌다. 현장으로 역학조사를 가게 된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현장에 가기만 하면 환경 질환이 ‘척!’ 하고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기대했다. 대불의 주민은 건강하고 온산의 주민들은 모두 이타이이타이 병으로 시달리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불도 온산도 주민들은 모두 삭신이 쑤신다고 했다. 그게 퇴행성관절염인지 카드뮴 중독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어르신들은 당장 아픈 것을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인과관계를 밝히고 싶은 연구진의 질문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중금속에 얼마나 노출되었는지, 그로 인한 증상이 얼마나 뚜렷한지를 묻는 설문지는, 어렵게 만난 서울 출신 의사들과 대화하고 싶은 주민에게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인턴을 마치고 두 해 지난 풋내기 의사는 혼란에 빠졌다.
전공의 3년 차에는 포항의 산업공단 근처에 있는 근로자 검진 기관에 파견을 나갔다. 거기서 마주한 것들도 충격적인 노동 관련 질병이 아니라 소소한 만성질환들이었다. 노동자들이 매일 묻는 질문에 답할 역량이 내겐 없었다. 흔한 질병을 진료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나야 그 질병이 업무로 인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직업병을 예방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p.73-74)
3년 만에 다시 산업보건기관으로 파견을 갔다. 여전히 혈압 높은 환자가 많았다. 처음에는 혈압기가 고장 난 줄 알았다. 병원에서 마주쳤다면 당장 침대에 눕히고 고혈압 약제를 정맥 주사로 줘야 마땅할 사람들이 공장 여기저기에서 걸어 다녔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혈압 환자는 심전도와 안저, 콩팥 검사를 하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청진기와 혈압기만 가지고 고혈압 환자를 관리했다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에 한 번 복용하면 되는 안전한 혈압약이 한국에서도 출시된 때였다. 처방과 조제가 분리된 의약분업 전이어서 동네 약국에서도 쉽게 살 수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 앉아서 검진자료를 보고 혈압이 높을 것 같은 이들을 한 명씩 불렀다.
“○○○님, 병원 꼭 가셔야 해요. 약은 제가 알려드리겠지만, 검사 한번은 제대로 받아보셔야지요.”
“병원 가기가 어디 쉽나요?”
“의료보험이 다 됩니다. 큰돈 들지 않습니다.”
“돈이 없나요? 시간이 없지.”
노동자에게 말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노무담당자를 불렀다.
“이 분들은 혈압이 높아요. 진료 받으러 병원에 가게 해주시면 좋겠어요. 이제는 고혈압 환자가 작업장에서 뇌출혈을 일으키면 산업재해 인정이 되는 수가 있어요.”
꽤 전문가다운 협박이었다. 좀 더 자신 있게 환자를 볼 수 있게 된 스스로가 대견했다. 며칠 동안 그러고 다니는데, 어느 날 함께 다니던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선생님, 고혈압 환자에게 산재가 발생한다고 사측에 자꾸 말씀하시면, 그분들 계속 일하기 어려워요. 지난번에 만난 그 환자 오늘은 안 보이는데 찜찜해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내 치기가 그분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몰랐다. (p.75-76)
90년대 중반 한국의 건강문제를 의학교과서로 해결할 수 없기는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대병원은 지방 소도시에서 운영하는 공공의료원과 전공의 수련계약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전공의들이 중증 혹은 희귀 질환을 주로 보는 서울대병원에서만 수련을 받으면 훗날 유능한 의사가 되는 데 부족함이 있었다. 흔한 질병을 볼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대신 일부를 지방의료원으로 보내서 지역사회에서 흔한 질환 진료를 배워오도록 했다. 우수한 인력을 전공의로 채용하기 어려운 지방의료원으로서도 나쁜 일이 아니었다.
지방의료원의 환자는 서울대병원과는 사뭇 달랐다. 경향각지의 병원들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가진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오는 곳이 서울대병원이었다. 나를 포함한 전공의들은 서울대병원을 지칭해 ‘본원’이라고 했다. 수련기관으로서 우리가 속한 기관이라는 겉뜻이 있었지만,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은근한 속뜻도 있었으리라.
질병의 양상부터 판이했다. 서울대병원은 현대의학의 한계이며,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질병으로 가득했다. 진단명이 붙어도 난이도가 높은 환자들만이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는 서울대병원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미국 드라마 〈닥터하우스〉 같이 논리적 추론으로 병명을 찾는 일이 많았다.
지방의료원 환자들의 질병은 달랐다. 맞아서 다친 사람, 일하다 다친 사람, 뻔한 질병인데 치료를 못 받아 아픈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들의 건강은 의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문제였다. 같은 질병이라도 처방이 달라져야 했다. 무릎관절통이나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중년 여성에게는 수영을 권하라고 본원 가정의학과에서 배웠다. 지방의료원 환자들에게 건강을 위해 수영을 권하는 전공의는 ‘철없는 아이’로 취급당했다. 환자들이 돈 걱정을 더 많이 한다는 것도 달랐다.
‘본원’의 환자와 의사들은 첨단의학 지식으로 질병을 해결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임상교수들과 전공의들이 내리는 선택은 언제나 의학교과서를 근거로 했다. ‘과학’으로서의 의학은 전가의 보도 같은 판단 근거였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을 환자들은 존중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서는 의사의 판단에 대해서 돈 걱정을 앞세우는 이들은 없었다. 거기까지 어렵게 온 환자들은 속으로는 걱정해도 비용 때문에 의학적 권고를 포기하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지방의료원의 환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의사들의 ‘과학적 판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다른 것들이 그분들에게는 많았다. 주로 ‘비용’이었다. (p.77-79)
“환자가 당뇨병인 걸 아는데 인슐린을 왜 안 맞았어요?”
“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하셨어요. 몇 주 전 건널목에서 사람을 치어 구치소에 가셨어요. 그러고 나서 인슐린을 못 맞으셨고요.”
주변에 서성거리던 남자들이 구치소 직원이라는 것을 그때가 되어서야 알아차렸다. 몇 시간이 지나 환자의 의식이 돌아왔다. 하루가 지나고 나니, 말라붙었던 구강에 수분기가 돌았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 병실로 환자를 옮겼다. 치료를 위해 풀어놓았던 수갑이 다시 채워졌다. 방 앞에는 덩치 큰 남자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내가 환자를 보러 가면, 그들은 감시라도 하듯 병실로 따라 들어왔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환자는 말하기를 꺼렸다.
나는 구치소 안에서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궁금했다. 환자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작정했다. 그 다음번에 환자를 보러 갔을 때, 다른 때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병실로 들어가, 그 남자들이 따라 들어오기 전에 문을 안에서 잠가버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몇 번 들렸다. 열지 않았다. 키 작은 내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는지 이내 노크 소리는 잦아들었다.
“인슐린을 얼마나 오래 안 맞으셨어요?”
“한 달쯤 된 것 같아요.”
“인슐린 주사 안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계셨어요?”
“알았지요. 구치소에 들어가자마자 인슐린 달라고 했어요. 마약할지 모른다고 일회용 주사기도 들여올 수 없다고 했어요.” (p.84-85)
6년이 흐른 뒤 나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인권위에서 일하게 된 이후, 받았던 가장 많은 질문은 ‘의사가 왜 인권위에서 일하냐?’는 것이었다. 인권은 변호사나 운동권 출신 활동가들의 영역이지, 의사의 영역이 아니라는 의미를 갖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의사는 인권위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인권위가 업무를 시작하고 첫해 받았던 진정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구금시설 재소자의 의료 접근권과 관련된 것이었다. 결핵 환자에게 결핵약을 계속 안 먹이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결핵인 줄 아는데 왜 약을 안 먹어요?”
나는 반문했다. 빈정거린 것이 아니다. 정말 몰랐고 정말 궁금했다. 그 질문은 에이즈 약을 못 먹은 환자가 결핵까지 얻어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한 재소자 사건에서 비롯했다. 그는 에이즈 약을 구하기 위해 절도를 반복했다. 사회보호법이 폐지되기 전, 그는 형이 가중되어 교도소에 오래 있게 되었다. 내가 그 사건을 처음 들었을 때는 면역력이 떨어진 끝에 속립성 결핵까지 덮쳤다. 경남에 있는 교도소에서 에이즈 약도 결핵약도 먹지 못하고 지내다가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p.86-87)
1982년 서울대학교 의예과 입학정원은 260명이었다. 그중 48명이 여학생이었다. 여학생 비율이 20% 가까이 된다고 엄청나게 화제가 되었다. 입시전문가들은 여학생이 과거보다 공부를 더 잘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들이 찾아낸 이유는 ‘본고사 폐지’였다. 학원 교사들도 비슷하게 말했다. 논리적인 문제를 푸는 능력은 남학생이 탁월한데, 사지선다형 문제를 푸는 능력은 남녀가 비등하다고. 그 말을 오랫동안 진실이라 믿었다. ‘본고사가 있었어도 서울의대에 입시원서를 냈겠느냐?’는 질문을 나도 많이 받았다. 그 질문 앞에서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던 여학생들은 스스로를 서울대 무임승차자로 여겼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여학생들을 걱정해주는 말을 졸업할 때까지 들었다. 전문의가 되지 못하면 진짜 의사로 여기지 않는 한국에서, 서울의대를 졸업해도 여학생들은 전공의 과정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선배들은 늘 역설했다. 그때까지 그건 사실로 보였다.
한국 병원의 전공의 수는 보건복지부가 병원협회와 협의해서 결정한다. 전체 전공의 수는 다시 ‘군의 요원’과 ‘비 군의 요원’으로 나눈다. 나중에 군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해야 할 전공의를 군의 요원이라고 한다. 이 숫자는 국방부와 보건복지부가 협의해서 결정한다. 국방의 의무를 마치지 않은 남자 의사들이 군의 요원으로 선발된다. 전체 전공의 수에서 군의 요원 수를 빼면 비 군의 요원 수가 된다. 비 군의 요원은 공중보건의 등으로 국방의 의무를 마쳤거나 군 의무를 면제받은 남자 의사와 여자 의사들 가운데 선발된다.
숫자는 이렇게 정하지만 비 군의 요원 가운데 여의사 몫이 암암리에 정해져 있었다. 소아과 몇 명, 내과 몇 명, 이런 식으로 결정된 여의사 정원에 법적 근거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여의사 할당은 우리를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본고사 없앤 덕에 의대에 들어온 여학생들’은 할당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p.127-128)
많은 영역에서 성차별의 모습은 비합리적이었다. 정형외과 수술을 하려면 힘이 좋아야 한다는 말, 출산을 하면 전공의가 배워야 할 것을 다 못 배운다는 말, 응급 상황에서 여성은 냉철하게 반응하지 못한다는 말, 병원도 사회인데 군대를 갔다 와야 잘 적응한다는 말, 모두 그 당시에는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여의사는 전문의가 되고 나서도 취직을 하려 하지 않아 거시적인 의료인력 정책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발언을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본고사가 없어져 여학생이 많아졌다는 개탄 앞에서도 우리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더 이상 반론도 필요치 않아 보이는 이런 말들이 우리를 주눅 들게 했다. (p.131-132)
어떤 숫자로도 평가할 수 없지만, 인권을 가장 중요한 업무로 하는 국가기관이 있어야 국민들이 받은 인권 침해와 차별을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기관은 행정부처로부터 독립되어 있어야 국가 폭력을 막을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인권위가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공식 의견을 냈던 2003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은 세계 인권선언 기념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와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당연한 현상이고 그것이 존중되고 수용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p.230-231)
마포주공아파트 / 박철수 / 마티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인 1962~1966년 사이 주택투자는 국민총생산의 1.7퍼센트에 불과했고(선진국의 경우는 6~8퍼센트), 전체 투자 중 공공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도 8.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토건국가로 불릴 만큼 건설산업 비중이 커진 것은 나중의 일이다. 1962년의 산업별 투자계획만 보더라도, 계획 기간 중 2차 산업으로 분류된 건설업은 정부(공공)와 민간의 투자 비중이 각각 36.6퍼센트와 63.4퍼센트였고, 3차 산업으로 분류된 주택 부문에서는 정부와 민간이 각각 16.9퍼센트와 83.1퍼센트를 차지했다. 경제개발 정책 초기부터 주택 공급은 정부의 1차적인 목표가 아니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민간 중심으로 건설산업을 육성해 주택을 공급한다는 것이 정책의 기본 방향이었다. 공공주택 보급은 처음부터 고려 사항이 아니었고, 융자를 지원해 민간 주도로 주택을 공급하고자 했다. 이는 국민이 스스로 알아서 자기 집을 마련하라는 신호였기에 이후 투기 자본이 쉽게 유입되도록 길을 열어주게 된다.
1962년 1차 준공식에 참여한 이들 중 한국 사회가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재편되리라고 상상한 이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이들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어 아파트단지는 도시 재개발 방식, 주택 공급 정책, 공동주택의 유형, 생활 습속 등 지금의 한국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나간다. 그 시작점에 마포아파트가 있다. (p.37-39)
‘시범’을 물리적 규모나 최신 설비 도입이 아니라 정책적인 측면으로 해석한 이도 있었다. 대한주택영단 주택문제연구소 단지연구실장을 거쳐 홍익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긴 박병주는 1967년 발표한 글에서 마포의 임대아파트가 분양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금의 현실에서 임대아파트가 사라져도 괜찮은지 탄식에 가까운 질문을 던진다. 그는 마포아파트가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장점으로 ‘공영임대아파트’라는 사실을 꼽았다. ‘공영주택 건설 비용에 정부의 정책 자금이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대단위 주택지에서 (공공이) 먼저 몇 곳을 골라 집을 지은 뒤 이를 모범적 선례로 삼도록 민간을 지도하는 의미’가 ‘시범’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소수에 불과했다. 마포아파트 건립을 추진한 이들에게 임대냐 분양이냐는 부차적 문제였고, 이 결정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규모, 이 규모가 선사하는 새로운 도시 경관, 즉 발전과 등치되길 원한 혁명의 이미지였다. (p.83)
최초 구상한 10층 높이의 아파트 주거동이 6층으로 변경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를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대한주택공사는 미국의 반대와 함께 당시의 전력 사정과 기름 부족, 열악한 상수도 현황 등을 꼽았다. 당시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USOM(미국경제협조처)은 아파트보다 난민구호주택을 더 많이 지을 것을 강력하게 원했고, 언론에서도 전기와 유류 사정을 들어 중앙난방과 엘리베이터 설치에 대해 격렬하게 비난했다. 서울시도 마실 물이 귀한 판에 무슨 수세식 화장실이냐며 반대에 가세했다. 여기에 덧붙여 상습 침수지였던 부지의 지반이 견고하지 못해 10층이나 되는 육중한 건물이 들어서기 어렵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있었다. 6층으로 변경되면서 중앙난방도 개별 연탄보일러로 바뀌었다. 이 반대 의견 가운데 군사 정부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일까? 바로 미국이다. (p.217-219)
공동주택, 특히 정부가 공급을 주도하는 공동주택은 설계와 건설 이상으로 운영과 유지가 중요하다. 거의 동일한 아파트가 세인트루이스에서 슬럼이 되고 서울에서는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자리 잡게 된 것도 건물의 형태가 아니라 소유와 유지 방식에서 생긴 차이의 결과다. 한국인이 욕망하는 아파트는 물리적 형태인 동시에 제도, 금융, 소유 방식의 복합체다. 마포주공아파트의 공급과 관리 방식의 변화에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마포주공아파트의 공급과 관리는 크게 세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1차 준공분에 해당하는 Y자형 아파트 6동 450호는 모두 ‘임대용’ 주택이었다. Y자형 주거동을 에워싸듯 들어선 一자형 주거동 4동 144호(2차 준공분)는 계획 단계부터 ‘분양’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다 1967년 기존 Y자형 임대아파트 450호 전체가 분양으로 전환된다.
임대냐 분양이냐는 단순히 마포아파트의 관리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주택 공급에 관한 주택공사의 역할과 정부 정책의 향방을 결정지었을 뿐 아니라, 이후 분양받은 소유자가 관리와 재개발을 모두 결정하게 됨으로써 아파트단지가 폐쇄적 단위로 변모해간 원인으로 작용한다. (p.233-235)
대한주택공사 주택연구소 단지연구실장이었던 박병주는 『조선일보』 1967년 4월 16일 「마포아파트에 말썽」 기사와 관련해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마포의 임대아파트가 머지않아 분양이 된다 한다. 이로써 마포아파트는 임대하는 아파트가 아닌 일반 분양아파트가 된다. (…) 안타깝기만 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중요시하는 것은 마포아파트의 출발 당초 계획이 변질되어 ‘임대하는 아파트’란 형식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는 데 있고, 우리의 현실에서 공영임대주택이 성립할 수 없다는 개념을 남기게 되는 결과를 자아내게 하였다는 데 문제점이 있다”고 언급했다. 박병주의 예견대로, 이후 대한주택공사의 주택 공급 정책은 철저히 분양, 그것도 선분양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민간 사업자들의 주택 건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정부는 단지까지의 진입로 같은 최소한의 기간시설에만 투자한 뒤 택지를 민간에 매각하면, 민간 업체가 단지 안의 모든 것을 입주자들의 분양대금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취했다. 예산이 부족한 1960년대에 채택한 이 방식은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고착되어버렸다. 이렇게 오늘날의 대한민국 아파트 사정과 주택 정책의 근간은 마포아파트로 다시 되돌아간다. (p.257)
아파트 관리를 위해 대한주택공사가 부득이하게 사용하거나 많은 주민들이 오가는 1층 등을 제외하고 마포아파트 관리소는 엘리베이터 홀 40곳과 창고 19곳을 입주자들에게 별도 임대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않았으니 아까운 면적이 층마다 비어 있는 상황이었고 관리소가 이를 그대로 둘 이유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홀의 임대료는 월 400원, 창고 임대료는 월 200원이었다. 「주택 현황」에 따르면 승강기실 33곳, 창고 16곳이 임대 중이었다. 여전히 엘리베이터 홀 7곳과 창고 3곳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 중산층을 겨냥했다고는 하지만 수납공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당시의 아파트 평면을 생각한다면 수요가 컸을 엘리베이터 홀이나 창고 등이 임대되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주민들의 팍팍한 경제적 형편이었을 것이다.
임대에서 분양으로 전환되면서 불거진 갈등은 결국 정부가 공급하는 주택의 법적 규정과 성격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지난 세기 한국에서 공공이 저소득층을 위한 공동주택을 공급하고 관리한 시기는 무척 짧았다. 주택은 개인이 구입해야 하는 상품이라는 인식은 굳어졌고, 이후 임대아파트는 분양 아파트단지의 틈바구니 속에서 저소득층의 남루한 집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p.258)
그 결과 ‘우리나라 주택건설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이자 ‘주택 건설의 새로운 장을 이룩한 대역사’라 자평한 잠실주공아파트단지는 심각한 쟁점을 던진 문제적 사례가 되기도 한다. 단지화 전략의 사회적 결과인 ‘단지의 폐쇄성’ 때문이다. 잠실지구 아파트단지 이후 가구를 계획의 단위로 하는 생활권계획은 강고한 계획 원리로 자리 잡았다. 이미 이런 생각이 사업시행자들의 마음속에 각인됐던 탓인지 1975년 2월 6일 기공식 현장 무대에 크게 써 붙인 글귀는 흥미롭게도 아파트단지가 아니라 단지아파트였다.
각 블록은 공공 공간과의 접점을 잃은 채 폐쇄적 공간이 되어 인접 가로에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았고 공공 공간은 황폐화 경향을 보였다. 또 다른 문제는 15층의 탑상형과 판상형 주거동만으로 조성한 잠실5단지가 이후 고층아파트단지의 전범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다. 재개발이 완성된 지 오래인 1~4단지의 현재 모습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모든 주민공동시설이나 편의시설을 단지의 울타리 안에 충분히 갖춤으로써 단지화 전략은 완벽에 가깝게 실현되었다. 마포주공아파트 초기안의 10층 Y자형과 一자형은 각각 15층 탑상형과 판상형 아파트로 잠실에서 재현된다. 시범아파트로 시작한 여정은 15년여 만에 한국형 아파트단지의 전형으로 완성된다. (p.325)
대단지 아파트는 ‘기적’의 시대를 풍미했던 대량생산체제의 직접적 산물이자 한국 사회가 ‘양과 속도’의 신조를 따르는 성장 이데올로기에 완벽하게 통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최병두는 일찌감치 진단했다.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20세기 한국이 만들어낸 가장 독창적인 산물이자 매개체이자 상징이며, 한국 현대성의 한 척도이자 전형이라는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드물 것이다. “K-하우징 모델”(K-Housing Model)로 불러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1960년대 초 국가 프로젝트로서 ‘아파트 주택의 성패를 가릴 모형’으로 등장한 마포주공아파트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60년 만에 대체 불가능한 완벽한 독점적 지위를 획득해 한국 사회 전체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여전히 ‘마포아파트 체제’ 속에 있다. (p.328-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