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없다 / 정혜승 / 메디치미디어
기업에 있는 지인 A는 한 외국계 화학기업의 안전 책임 기준을 전해줬다. 무조건 보고했는지 여부가 책임을 좌우한다. 40년간 안전 업무만 해온 이가 만든 원칙이라는데, 사고가 나거나 날 것 같을 때 보고하지 않은 사람이 책임지는 것이 핵심이다. 무엇이든 괜히 보고했다고 혼나거나 질책 받는 것이 아니라, 보고를 하지 않았을 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책임져야 한다. 보고를 잘하면 칭찬과 격려를 받게 되고, 보고를 늦추거나 피하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 이 경우, 크든 작든 무슨 염려가 있다면 무조건 윗선에 보고하는 것이 개인의 안위에 도움된다. 일단 보고한 이는 책임에서 자유롭고, 결국 안전의 여러 가지 신호에 대해 최종 의사결정권자가 책임지는 구조다. 신속한 판단과 대응이 필요한 재난 재해 현장에서는 이 같은 정리가 필수적이다. 직급이 낮은 실무자에게 책임을 떠넘겨서도 안 되지만, 촌각을 다퉈 다수의 생명을 구해야 할 때, 판단과 결정의 무게를 덜어주도록 책임자급 리더에게도 최고책임자가 든든한 ‘뒷배’가 되어줘야 한다.
장관이 현장에 달려가는 것은 그가 엄청나게 유능해서 온갖 대응을 진두지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장관이 산불이든 재난 현장에 달려간다고 한들, 직접 현장 대응을 지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지역, 재난과 재해 현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관할 소방서장, 경찰서장, 지자체장 등이 분명히 있다. 한참 바쁘고 경황없는 시간에 굳이 장관이 의전 챙기면서 보고 받으러 달려갈 이유도 없다. 그건 오히려 민폐다. 그렇다면 왜 장관은 보고 즉시 현장으로 달려간 것일까?
평소에도 그렇지만 리더의 일은 의사결정이며 책임지는 역할이다. 재난 재해 현장에서는 특히 신속하게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예컨대 화재 현장에서 관할 소방 인력을 총동원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전국 단위에서 소방차를 총동원해야 할지 여부를 누가 결정할까? 현장의 컨트롤 타워다. 대신 부처 책임자인 장관이 확실하게 책임을 질 때 일이 더 빠르다. 현장 지휘관에게 그 모든 결정과 대응에 대해 책임지라고 하는 대신 “내가 책임질 테니 염려 말고 신속 대응하라”고 하는 게 서울에서 달려가 현장 책임자 옆에 앉아 있는, 잠시 방문한 장관의 역할이다. (p.24-25)
“소위 엘리트들은 전문가 바보 같아요. 사람들이 다들 하고 사는 송금하고, 영수증 챙기고, 살림하고, 마트 가고, 그런 일상을 엘리트들이 얼마나 알까 싶습니다. 다들 1등만 해서 자기 손으로 일반적인 경제생활을 제대로 해봤는지 모르겠어요. 민원이나 서류 떼러 관공서에 갔을 때의 어려움과 당혹감 같은 것도 잘 모릅니다. 일반인들과 경험치가 너무 달라요. 사회는 그들을 1등으로 포장해왔지만 무슨 1등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되는 일도 해보고, 안 되는 것도 해봐야 좌절감과 효능감을 느끼는데, 실제 일을 해본 적 없는 엘리트들은 경험 근육이 하나도 없어요.”
마침 하버드 출신 한덕수 총리가 2023년 9월 국회에서 “택시 기본요금은 1,000원쯤, 시내버스 요금은 2,000원”이라고 틀리게 말해 망신을 산 것은 고위 공직자들의 드물지 않은 실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한 번도 직접 눌러본 적 없어서 오랜만에 혼자 탔을 때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아 당황했다는 어느 정치인의 에피소드도 실화다. 국민의 삶을 모르니 어디가 가려운 곳인지 모르는 것은 물론, 누구나 느끼는 문제에 공감이 쉬울 리 없다. 엘리트란 것만 믿고 리더 역할을 맡기는 것이 이렇게 위험하다. (p.36)
오 전 사무처장은 ‘참사의 직면’ 없이 대한민국의 상처는 오래가고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참사의 직면은 첫째, 정부와 지자체 등 재난관리 책임자들이 자신의 역할과 책무가 무엇인지 명확히 인식하고, 무엇을 어떻게 했으면 참사를 막거나 최소화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확인하고 구체적으로 사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둘째, 수사와 재난조사를 함께 진행해서 보다 정확한 원인규명 결과와 재발방지책을 제시하고 실제 개선해서 국민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셋째, 피해자들이 회합하고 연대하여 서로를 위로하면서 목소리를 내고 그것을 왜곡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사회가 경청할 수 있게 하고, 넷째, 피해자들의 일상 회복을 위해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참사 이후 우리는 무엇에 직면했는가? 첫째, 정부는 자신의 역할과 책무를 부인했다. 둘째, 수사만 하고 재난조사는 없었다. 셋째, 정부는 피해자들의 연대를 방해했고, 2차 가해를 방치했다. 넷째, 정말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일각에서는 생명안전기본법을 제정해야 이 같은 문제를 체계적으로 풀 수 있다고 한다. 정부가 왜 그런 실수를 반복하는지,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답을 구하지 않는 수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건 분명하다. 심지어 수사를 앞세우면 재난이 또 일어날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도 있다.“재난이 발생하면 누구 책임인지를 먼저 따지고, 처벌하거나 사표를 받는다. 새로운 조직을 만들거나 조직 간판을 바꾸기도 한다. 이는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 꼴이다.”
많이 익숙한 풍경인데, 저게 재난이 재발하는 이유라고 한다. 이재열 서울대 교수는 하버드 경영대학원 크리스 아지리스 교수의 이론을 소개하며 저런 방식으로 대응하는 내부화, ‘단일 순환 학습’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반대로 재난의 재발을 막기 위한 ‘이중 순환 학습’은 외부화다. 실패의 원인을 점검할 수 있게 내부의 실패 요인을 과감하게 외부 전문가들에게 공개하는 방식이다. 대응 전략을 마련하며 가정이나 전제에 잘못된 것이 없는지 검토하고, 시스템을 바꾸는 개선책을 찾는 과정이다. (p.50-52)
“공무원은 자기 힘을 쓰지 않을수록 안전합니다. 일을 하지 않을수록 안전해요. 예전에는 정부도 경쟁사회라 잘나가는 동료와 못 나가는 동료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잘나가면 절대 안 됩니다. 잘나가면 중요한 일을 담당할 테고, 중요한 일을 담당하면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까 잘나갔던 사람들이 다 이상한 처지에 놓여있어요. 밑에서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하게 존재감 없던 이들이 끝까지 간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 압니다. 적극적이고 열심히 하는 이들은 이제 공무원 하면 안 됩니다.”
중앙부처의 국장급 고위간부 F는 요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실제 주변에서 동료들이 감사원 감사를 받고, 검찰 수사를 받고, 법원 재판을 받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유죄가 확정될 경우, 파면이다. 공무원 연금도 사라진다. 앞으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들이 있을까? 법정에 서게 된 당사자들도 엄청난 확신을 갖고 진행했다기보다 마침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그들이 이전 정부에서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 이는 없다. 부처에서 나름 인정받고 존중받았던 이들이었지만 현재 업무에서 배제된 채 재판 결과만 기다리고 있다.“협업할 때 일 잘하던 분들이 오히려 일을 많이 해서 리스크가 발생하는 과정을 지켜봤어요. 누구도 안 지켜주더군요. 오롯이 본인 책임이고요. 매번 무임승차하는 이들은 따로 있는데 말이죠. 전 정부 정책 어젠다 실무 맡았던 사무관이 우울증 진단을 받았어요. 내사 받고 있는데 ‘너 감옥 갈 생각하라’고 하더래요. 그는 히키코모리처럼 주변과 연락을 다 끊었습니다.”
“길을 잃어버렸어요. 완전히. 공무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뭐라 하기 어려워요. 서슬 퍼런 정부가 동료들을 다 잡아넣고 있는데 뭘 하겠어요. 이건 아니다 싶을 때도 있고, 이렇게 해보자고 말해야 할 때도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전 정부 사람이라고 조금이라도 찍히면 아예 쫓겨나고요.”
(p.108-109)
“검찰은 어떤 사안을 볼 때 우리 편이냐, 적이냐,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여의도 출신들의 감각과 사뭇 다릅니다. 여의도 사람들은 적이 아니라 착한 수준에서 상대를 적대시하는 정도죠. 검찰 성골들은 계속 적을 찾아요. 시민단체, 노조, 차례로 적으로 삼아 공격하죠. 대통령이 두 가지 단어를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전격’, 그리고 ‘압수수색’. 기습공격을 통해 적을 물리치는 게 권력 행사의 방식입니다.”
사상 첫 검사 출신 기관장 덕분에 분위기가 달라진 곳 중 하나는 투자업계다. 검사 출신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에피소드는 투자업계 대표 J가 털어놓았다.“금융감독원장이 업계 사람들 다 불러모아놓고 간담회를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자꾸 하더라고요. 너희들 다 문제 있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진짜 조심스럽게, ‘원장님 혹시 주식 투자를 해보신 적 있냐’고 물었더니, 매우 자랑스럽게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마치 청렴검사 마냥 시정잡배와 돈놀이하는 놈들을 다 때려잡는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분명해지니까 기대가 다 사라졌어요. 몸 사리는 수밖에 없어요. 금감원이 헤집고 다니면 다 문제가 되니까요. 리더가 이렇게 중요하구나, 뼈저리게 느껴요. 시장 상황이 어려운데 각자도생하라는 메시지만 분명합니다. 정부가 아무런 대책도 보여주지 않고, 정부가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리스크예요.”
(p.125-126)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힘, 국민을 위해 행사하는 힘’, 국민의힘과 ‘민생을 살리고, 국민을 지키는 유능한 민주당’이라는데 새로운 어젠다, 국민을 위한 어젠다는 양당 홈페이지를 아무리 살펴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 만약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당 본연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면, 소통이 아쉽다는 정도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솔직히 미덥지 않다. 정당은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 기관이다. 국정 운영과 정책 성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 정당의 존재 이유다. 정당이 정책을 내걸고 선거를 통해 책임지는 민주주의의 기본이 흔들리면 피해는 유권자 몫이다.
예일대 정치학과의 프랜시스 매컬 로젠블루스와 이언 샤피로 교수는 《책임 정당》이라는 책에서 “민주국가의 시민들에게 최선은 정강 정책을 갖춘 강한 정당들 간에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고 책임 정당은 유권자의 욕구를 더 잘 충족할 수 있다”고 했다. 책임은 커녕 정책 어젠다도 제시하지 못하고 정당이 흔들릴 경우, “불만에 찬 유권자는 민주주의의 생존을 위협하는 포퓰리스트와 사기꾼의 손쉬운 표적이 된다”고 했다. 정당 탓만 하고 싶은데, 유권자의 냉소와 불안은 더 나쁜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니,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시민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 (p.185-186)
장덕진 서울대 교수는 재난의 ‘정쟁화’와 ‘정치화’를 구분한다. 재난이 일어났을 때 각자 자기들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짜고 정쟁화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인 반면, 재난의 정치화는 더 큰 범주에서 시민의 조직적 행동에 가깝다. 그는 재난의 정치화에 대해 “대형 재난을 목격한 시민들이 언제든지 본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실감하고 자신들을 보호해줄 의지나 능력이 없어 보이는 정부를 상대로 집합적인 항의를 벌이는 것”이라며, “재난은 많지만 정치화하는 재난은 드물다”고 했다.
재난의 정쟁화에 휘말리는 것도 유감이지만, 정치화는 민주주의 사회의 자연스러운 작동원리 중 하나다. 정치화 프레임에 가두기에는 정치는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 사회의 한 축이다. 정치란 단어가 오염됐다고 해서, 정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정치화란 모두 속셈에 따른 일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p.188-189)
재난과 정치화 이슈로 논문을 쓴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임기홍 박사는 재난 자체가 매우 정치적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우선 재난 대응 및 복구 과정에서 책임 문제가 제기되며, 자원 분배가 이뤄지고, 많은 경우 재난 피해자들의 사회운동이 발생하고, 재난 거버넌스를 둘러싼 입법부, 행정부, 피해자, 시민단체, 전문가들 간 상호작용이 치열하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그간 재난은 오랫동안 기술적인 영역의 문제, 행정의 대상으로만 사고되어 왔다. 즉, 재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또는 어떻게 방지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 재해가 발생한 이후 복구 과정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재난 복구 과정은 복구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이며, 누가 피해자이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어떠해야 하는가, 누가 얼마나 책임을 질 것인가의 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되는 정치적 과정이다.
덕분에 일종의 ‘재난 이후의 재난’이 이어질 수 있다. 재난으로 국민들이 받은 충격과 피해는 재난 그 자체에서 비롯되지만, 그 이후도 재난 상황이다. 재난이 발생한 직후부터 복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국가가 보인 혼선과 책임회피, 무능력과 무책임, 준비부족 등 총체적 실패도 재난에 가깝다는 뜻이다. 그는 “재난이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사회적 갈등의 대상이며, 고도의 정치적 과정”이라고 봤다. 이번 참사처럼 피해자가 분명하더라도, 누가 얼마나 책임질 것인지 따지기 위해 대대적 수사와 국정조사까지 진행됐는데, 이 자체가 정치적 과정이란 거다.
대중들이 참사의 정치화 과정에서 피로감을 느낀다면, 그걸 시끄럽고 무리한 요구처럼 비난하고, 그런 방식으로 보도하는 이들의 문제가 적지 않다. 그들이 바로 ‘재난을 정쟁화’하는 세력이고, 피해자들을 겁박하고 고립시켜 피해자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위축시키는 이들이다. (p.191-192)
국가의 정상적 상시적 안전관리나 재난관리는 이미 중앙정부, 지방정부, 공공조직이 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경찰, 소방, 시청, 구청 공무원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위기관리 컨트롤 센터는 말 그대로 위기를 관리하는 곳이다. 위기관리가 어려운 이유는 상시 조직에서는 위기가 발현되기 전까지 위기를 인지하기 어렵고, 막상 피해가 발생하면 대응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위기관리는 본질적으로 비정상적 상황에서 비정상적 절차나 과정을 거쳐 긴급한 조치를 내려야 하며, 초법적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가 많다. 고도의 정치적, 정무적 판단이 필요하며, (국민) 정서적 측면도 매우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위기대응에는 종종 긴급하게 공권력을 동원해야 한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위기관리는 최고통치자만이 할 수 있는 고도의 통치행위이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을 역임한 박두용 한성대 교수는 10·29 참사 직후 열린 국회 세미나에서 위기관리 대응체계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했다. 예컨대 용산구청이나 경찰이 마련하는 통상적 관리 대책은 압사사고 위험까지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에게 인파가 많이 몰리니 안전대책을 수립해서 보고하라고 했다면 구청과 경찰은 계획을 만들고 실행방안을 강구했을 것이다. 국가위기관리센터는 각종 위기관리 시나리오를 가지고 정상적 상시적 조직을 관리한다. 위기대응은 의사결정 구조도 달라야 한다.
예를 들어, 오후 9시쯤 현장의 어느 공무원이 인파 관리 필요성을 느끼고 현실적으로 용산 야간 경비 기동대를 이동시켜야겠다고 판단했다고 하자. 누가 기동대 투입을 결정할 수 있을까? 파출소장? 용산경찰서장? 서울경찰청장? 경찰청장? 누군가 결정해서 인파관리와 교통통제를 했다고 치자. 별 일 없이 지나가면 잘했다고 할 것 같은가? 이것이 대통령실이 위기관리 컨트롤 타워가 되어야 하는 이유라고 박 교수는 밝혔다. 정부나 공공조직은 일상적 업무에 최적화되어 있지만 위기관리 조직은 그 일상을 벗어난 일에 대응한다. (p.203-204)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정은경 로또’였다고 말했다. 고군분투 애써왔던 정 청장은 사실 2019년 말에 그만둘 생각이었다고 한다. 적절한 후임자를 찾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이 코로나가 터졌다. 메르스 사태 당시 시행착오를 토대로 꼼꼼하게 매뉴얼을 만들고 도상훈련까지 했던 이가 코로나19와의 전쟁을 직접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운, 진짜 로또였다. 게다가 그는 리더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탁월했다. 임 실장은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그냥 일꾼이셨습니다. 차분하게 다 해내죠. 남하고 싸우는 걸 한번도 본 적 없고, 소리를 높이는 일도 본 적 없습니다. 직원들이 청장을 신뢰하면서도 힘들어했어요. 일을 많이 해서요. 그런데 다들 일이 많아도 일을 하는 재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박수 쳐주고, 인정해주니까 일이 많다고 짜증낼 이유는 없었죠. 정 전 청장은 의사 출신으로 보건소장도 해봤고, 공공의료 관련 과장, 국장으로 일했어요. 보통 감염병과 방역 전문가인 다른 질병관리청 분들과 달리 건강보험 체계나 보건의료 행정까지 꿰뚫고 있었습니다.”
정 전 청장의 리더십은 협업에 힘을 더했다. 초기 대응에서 드라이브스루, 워크스루 방식으로 실시간 검사를 진행하고 효율적 프로세스를 만든 것은 모두 아래로부터 올라온 아이디어였다. 정부는 실시간으로 취합해 시·군·구 보건소에 전파했다. 컨트롤 타워는 이 같은 협업이 신속하게 실행되는 데 판단하고 결정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생활치료센터 아이디어가 올라왔는데 의료센터가 아니라서 건강보험 지급이 안 되는 등 법적 문제가 발생하자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신속하게 거들었다.
안타깝지만 이 같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2장에서 언급했듯 과학방역을 둘러싼 고충 외에도 분위기는 싸늘하다. 정부의 역할을 제한하는 ‘작은 정부’는 곳간지기 역할에 따라 재정건전성을 정책우선순위에 둔다. 보건의료 정책도 예외가 아니다. 코로나 전담으로 지정됐던 공공병원의 경우, 예전처럼 병상을 복구해야 하는데 당장 버티기 힘든 처지다. 당초 코로나를 전담하느라 전공이 다른 의사, 간호사들 다 나갔고, 떠난 환자들 돌아오는 데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지원이 필수적인데 지원은 부족하다. (p.226-227)
“현재 공무원 사회는 일 잘하는 게 아니라 충성이 중요한 조직입니다. 일하는 능력으로 경쟁하지 않으니 충성만 남는 거죠. 중간 직급인 사무관부터 난리입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화려한 학력이나 경력에도 불구, 무능한 공직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업무에 노력하기보다 줄 잘 서서 괜찮은 경력 한 줄 더 넣는 데 골몰합니다. 결국 이들이 능력과 실력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도록 해야 합니다. 개방형을 더 개방하고 ‘열린 정부’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험 제도를 바꾸는 수밖에 없어요.”
개방형 전문가로 임용되어 십 년 이상 공직을 경험한 고위공직자 U는 단호했다. 경쟁이 없는 조직은 정체된다. 시험 제도, 인사 제도를 바꿔서 개방직을 늘리고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개방직 공무원을 임용하면서 일부 자리를 내놓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부처는 승진도, 이동도 없는 구조에 개방직을 묶어두고 있다. 조직의 예산을 다루면서 돈의 흐름을 파악하는 자리 등은 절대 개방직에게 개방되지 않는다. 조직 내에서 정치적으로 힘을 갖는 자리도 열외다. 한마디로 개방직은 조직에 들어가서 기존 공무원들과 경쟁할 기회가 없다. 공무원 퇴임 이후 로펌이나 좋은 자리를 가려면 결국 스스로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카르텔이 힘을 발휘한다. 일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p.290-291)
점진적이든, 급진적이든 행정고시를 없애면 고위직 하위직의 불가피한 태생적 갈등과 위화감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철밥통 대신 경쟁이 생긴다. 행정고시는 경쟁하지 않는 순혈주의 분위기를 이끌어온 핵심 고리다. 한번 시험에 붙으면 정년까지 보장되고, 정년 이후에도 회전문 낙하산, 전관예우까지 평생을 보장하는 고시 제도는 일본도 비슷했다. 그러나 일본은 2012년 우리 행정고시와 닮은 1종 시험을 폐지했다. 연공서열에 의한 승진 대신 실적에 따른 성과주의를 도입하고, 퇴직 이후 산하 공기업으로 옮기는 낙하산 관행에도 제동을 걸었다. 공무원의 전문성을 재활용하도록 길은 열어주되 투명하게 관리하는 인재 뱅크 형태의 관민인재교류센터가 등장했다.
미국은 개방형 임용제를 통해 외부 인사를 적극 영입한다. 결원이 생기면 부처에서 자율적으로 채용한다. 석사 이상 인재를 대학으로부터 추천받아 면접과 논술을 거쳐 중간 간부로 임용하는 제도도 있다. 싱가포르는 모든 공무원을 개방형으로 뽑는다. 대학 졸업자 가운데 성적과 면접을 통해 채용한다. 고급 공무원 선발을 위해 최우수 고교 졸업생 중에 해외 유학을 지원하고 나중에 사무관으로 특채하는 제도도 있다. 공무원 보수는 매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과 개인 실적에 따라 결정된다. 각국의 공무원 인사 혁신의 방향은 분명하다. 다양성과 경쟁을 늘린다는 목표다. (p.292-293)
요즘 세상사는 혼자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복잡하다. 인간의 창의성에서 가장 중요한 트렌드는 문제 해결의 주체가 개인에서 팀으로 바뀌는 거다. 집단의 수행 능력에 다양성은 필수다. 서로 비슷비슷한 의견에 동조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대신, 서로 다른 의견을 활발하게 교환하는 과정에서 해결 방안이 나온다. 다양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성이 능력주의보다 결과가 낫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탁월한 능력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던 미국 스칼리아 대법관은 틀렸다. 능력 위주로 구성했으니, 정부 고위직에 다양성 없는 건 문제가 아니라고 했던 윤석열 대통령도 틀렸다. (p.296-297)
에이징 솔로 / 김희경 / 동아시아
비혼을 정치적 견해 표현으로 여기는 사람이든, 자신에게 알맞은 삶의 방법을 고르다 보니 어쩌다 비혼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든, 그 선택의 바탕에는 제도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에 묶여 있지 않을 때 자신이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공통된 가치관이 있다. 도시에서 혼자 살기가 더 수월해지고 다양한 연결망을 통해 사람들의 관계 맺는 방법이 발달할수록 경직된 결혼제도 대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선택하는 사람도 늘게 될 것이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이 증가하는 것은 전 세계적 현상이다. 미국과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남아메리카, 중동, 아프리카에서도 혼자 사는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다.
독신을 연구하는 이스라엘의 사회학자 엘리야킴 키슬레브는 『혼자 살아도 괜찮아』에서 “오늘날 독신은 많은 나라에서 가장 빠르게 등장하는 인구 형태”라면서 “2030년 무렵이면 전 세계 독신 비율이 20%까지 도달할 것”이라는 예측 결과를 소개했다. 결혼 문화가 변화하는 데 영향을 끼친 여성 인권 향상, 기대 수명 증가, 고등교육 확대, 도시화 등의 사회 변화가 후퇴할 리 없기 때문이다. (p.60-61)
작가 리베카 솔닛이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말한 것처럼 이 질문은 “세상에는 하나의 여자만 있다는 생각에서, 그 여자는 종 전체를 위한 엘리베이터처럼 반드시 결혼하고, 번식하고, 남자를 받아들이고, 아기를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이러한 질문은 “질문자 입장에서는 정답이 하나뿐인” 닫힌 질문이고, “사실 질문이라기보다 단언”이다. “스스로를 개인으로 여기고 자신의 앞길은 자신이 개척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더러 너희가 틀렸다고 단언하는 말”이다.
이 해로운 단언의 흔한 변주는 “자식을 낳아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자식을 여럿 두고도 어른이 되기는커녕 성숙한 면모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사례가 현실에 넘치도록 많아서, 나는 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독립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면서 관계 맺을 줄 알게 될 때 어른이 되는 것이다. (p.63-64)
어떤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에게 화를 내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이유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세계관이 침해받는다고 느껴서 그런 게 아닐까. 사람의 삶과 이 세상이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이 그 믿음을 따르지 않고 거부했을 때 마치 자신이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분개하는 이들이 있다. 게다가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이 비참하고 외롭기는커녕 행복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다니, 장관급 고위 공무원 후보자로 인사청문회에까지 올라오다니,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테다. 그러면서 결혼하지 않고 아이 낳기를 선택하는 여성을 ‘미혼모’라고 손가락질하는 사회 분위기는 여전하면서 말이다. (p.71-72)
비혼·비출산 여성은 자신의 아이만 없을 뿐이지, 사회에 무관심하고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다. 되레 사회 참여에 더 적극적인 경우가 많다.
사회봉사단체 등 자발적 결사체에 참여하는 정도를 비교해 보면 남성은 기혼자의 참여가 높고 비혼자는 그렇지 않지만, 여성은 거꾸로 비혼자의 사회 참여가 높고 기혼자의 참여는 낮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즉, 한국 사회에서 가족을 꾸리지 않은 남성은 주관적 삶의 질뿐 아니라 공동체와 결속하는 정도도 낮아진다. 그만큼 자신을 희생하고 뒷받침해 주는 여성의 존재가 남성에게 중요하고, 가족이라는 일차적 사회관계가 ‘관계 자원’으로서 남성에게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여성에게 아내와 엄마 역할이라는 부담은 공동체 참여를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p.76)
정세연은 “아이를 낳든 낳지 않든 책임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각자 이바지하는 부분이 있고 그렇게 사람들의 기여가 모여 사회가 구성되는데,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내가 하는 역할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했다.어떤 사람은 아이를 많이 낳고 어떤 사람은 낳지 않지만 각자 다 사정이 있고 백이면 백 가지 이유가 있는데, 단순히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해서 이기적이라거나 복지에 무임승차한다고 비난하는 건 말이 안 되죠. 저는 결과적으로 사회에 이바지하기를 바라면서 일하고, 공공보육과 공교육이 튼튼해지길 바라면서 세금을 내요. 무상급식이나 무상교육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 모두가 우리 사회의 아이를 공동으로 양육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비출산을 선택한 여성을 이기적이라고 탓하는 것보다, 잘사는 집 아이들은 잘 교육받고 자산을 물려받는데 못사는 집 아이들은 교육 기회도 부족하고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구조를 탓하는 게 먼저 아닌가요?”
어떤 학자들은 전통적인 가족 단위가 가족 구성원에게만 지지와 관심을 쏟는 데 집중한 나머지 가족 외부 세상과 멀어지는 현상을 일컬어 ‘탐욕스러운 결혼’이라고 표현한다.
오로지 자기 가족만을 위해 편법을 써서라도 자녀의 학벌과 취직자리를 만들고 부모가 앞장서 꽃길을 깔아주고 뒤를 봐주는 가족주의의 탐욕은 현실에서 우리도 종종 목격하는 바라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러한 가족주의야말로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보다 훨씬 더 사회에 해를 끼치는 이기적 행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77-79)
병원이 보호자로 법적 가족을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해서 법적 근거가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의료법에는 병원에서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수술 동의서나 입원 동의서에 관한 세부 규정이 없다. 응급 상황에도 항상 법정대리인이나 보호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입원할 때 연대보증인을 요구하는 병원의 관행도 법적 효력이 없다. 보건복지부는 2018년 국민권익위원회의 제도 개선 권고에 따라 연대보증인을 세우는 관행을 시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부 대형병원에서는 이 관행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연대보증인을 요구하는 민간병원들이 많다.
수술할 때 보호자의 동의서를 받는 관행에 대해서도 보건복지부는 이미 2007년 대한병원협회에 공문을 보내 보호자의 수술 동의서가 없다고 환자의 수술을 지연시키거나 거부하면 의료법의 진료 거부 행위에 해당해 처벌이나 행정처분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직계가족인 보호자를 찾고 동의서를 요구하는 관행은 여전하다. 의료사고가 나거나 수술비를 청구할 때 분쟁이 날 것에 대한 병원 측의 우려 때문이다. 사회건강연구소는 2019년 펴낸 연구 보고서 「의료현장에서의 보호자 개념은 다양한 가족을 포함하고 있는가?」에서 “병원의 과도한 ‘보호자 찾기’는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며 “‘환자 중심’의 사고가 아니라 ‘의료현장의 편의성’ 중심 사고”라고 짚었다.
이 관행 때문에 1인 가구, 동성 커플 등 소위 ‘정상가족’의 틀을 벗어난 사람은 실제 일상을 함께하는 이가 실질적 보호자가 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이 보고서는 “이는 단순히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 조건이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무시되고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뜻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p.96-97)
그는 가난한 독거노인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는데 40대 초반에 다니던 직장에서 한 후배의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일을 잘하고 똑똑한 후배였는데 맥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부모와 같이 사는 집에서는 옷장 안에 맥주 페트병을 숨겨놓고 마신다더라고요. 그러지 말라고 충고했더니 걔 대답이 걸작이었어요. ‘저는 정말 맥주가 좋아요. 일도 재미있고 남자도 좋기는 한데 맥주가 제일 좋아요. 맥주만 마실 수 있으면 폐지를 주운들 뭐 어때요? 폐지 줍고 집에 와서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마시면 돼요.’ 이러더라고요.”
젊은 친구의 치기 어린 말일 수 있지만, 강미라는 ‘아,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싶어서 약간 놀랐고, 그 다음엔 ‘듣고 보니 그렇네. 가난하면 뭐 어때.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할 수 있으면 돈을 어떻게 번들 그게 대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최은영의 소설 『밝은 밤』에 나오는 할머니도 이와 비슷하다면서 그 이야기도 들려주었다.“소설에서 할머니는 지방에 혼자 사는데 놉을 다니면서 품삯을 받아 자기 생활을 꾸려요. 풍족하진 않아도 가끔 놀러도 다니고 젊은 주인공보다 훨씬 더 여유롭게 살아요. 사고방식도 열려 있고요. 저도 늙어서 돈이 많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밝은 밤』 할머니 정도로는 살 수 있지 않을까요?”
(p.189-190)
가족에 대한 현행법 규정을 살펴보면 협소하기 짝이 없다. 민법 제779조는 가족을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또는 (생계를 같이하는 경우)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로 정의한다. 건강가정기본법도 가족을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 단위”로 정의한다.
두 법 모두 가족을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2세대의 핵가족으로 협소하게 바라보는데, 현실에서 이런 가족은 전체 가구의 4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 그 나머지는 현행법의 기준을 엄격히 들이대면 가족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예컨대 위탁 가정에서 위탁 부모와 아이가 서로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도 민법에 따르면 가족이 아니다. 부양이나 상속처럼 가족 관계의 다른 양상을 정의하는 조문들이 민법 각각의 조항에 다 있어서 사실 이 가족 조항은 없어도 무방하다. 되레 가족을 협소하게 정의해 놓은 이 조항은 정상가족의 틀을 벗어난 다양한 가족에 대한 제도적 차별의 토대가 된다.
가족구성권연구소가 조사한 결과 1,400여 개의 한국 현행법 조항 중 ‘가족’을 언급하는 조항 240개가 민법 제779조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이 조항을 중심으로 주거·의료·돌봄·연금·상속·재난 시 보호 등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보호받을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p.302-303)
가족이 짊어진 짐을 덜어내고 사회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으로 사회복지학자 김진석은 책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에서 현재의 ‘국가-가족-개인’ 복지국가에서 중간의 ‘가족’을 뺀 ‘국가-개인’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제안했다.
국가-가족-개인 모델은 가족-개인 사이에 부양과 돌봄이라는 가족 기능을 전제하고, 그 기능이 부족하거나 없는 경우에만 국가가 보충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다. 반면, 국가-개인 모델은 개인의 사회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개입이 가족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개인에게 직접 작용하는 방식이다.
김진석은 “가족이 있어야만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구현할 기회와 수단을 보장받는다면 이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개인의 실현이라 볼 수 없다”라고 짚었다.
가족이 아니라 개인이 복지의 기본 단위가 된다면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도 최소화할 수 있고, 노인·장애인 등 일상적 돌봄과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가족에 의존하지 않고도 국가의 제도적 지원을 제공받아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p.31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