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닌 여자들 / 페기 오도널 헤핑턴 / 북다
미국 인류학자 니아라 서더카사(Niara Sudarkasa)가 요루바족 여성의 친족 패턴을 연구하기 위해 1960년대 초 나이지리아에 도착했을 때, 베이커가 리틀턴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재키의 어머니로서 보낸 성년 시절과 매우 비슷한 공동체 돌봄과 윤리를 발견했다. “내가 사는 작은 마을에서 나는 이상한 존재였다”고 그는 기록했다. 서더카사는 20대 후반의 독신이었고 자녀가 없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고등교육을 받은 미국 여성의 삶으로서 특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루바의 주민들은 그를 이상하게 여겼다. “다양한 사람들이 내게 아이를 ‘주고’ 싶어 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 아이에게 나는 어머니 역할을 배정받게 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 제안은 매우 타당했다. 서더카사는 유능한 손을 갖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성인 여성이었고, 그 지역에는 돌봄이 필요한 아동과 육아로 인해 힘에 부치는 여성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공동체의 부담을 나누기 위해 요루바 여성은 정기적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 아이’는 아닌 아이들과 ‘어머니로서’ 관계 맺도록” 배정받았다. 그곳 주민들은 서더카사가 자녀를 갖는 기쁨과 수고를 생물학적 부모가 아닌 사람들과 나누는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초대한 것이다. (p.97-98)
“모든 가족은 그 자체로 애정 어린 마음으로 연결되고, 가부장의 통치를 받는 작은 국가 혹은 제국이며 지상의 어떤 권력도 간섭할 수 없는 특권을 지닌다”고 1840년에 히먼 험프리가 기록했다. 험프리는 애머스트 칼리지 총장이었고 그의 저서 『가정 교육(Domestic Education)』은 가족 가치에 관한 논문의 원조격이다. 그 무렵 핵가족은 미국의 이상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핵가족은 물리법칙처럼 자명한 사실이 됐다. “국가는 정부 형태를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 (……) 하지만 가족은 언제 어디서나 한 가지 모델만 존재할 뿐이다. 태초에 그랬듯이 지금도 똑같고, 그 아름다움을 해치거나 창조주의 지혜와 호의를 거스르지 않고 그것을 위배할 수는 없다.”
영토 확장론이 19세기 미국 정착민을 서쪽으로 몰아가는 동안, 그들은 하나의 영속적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가족 모델이 존재한다는 개념에 도전하는 원주민의 가족 구조를 접했다. 1850년대 말, 인류학자이자 철도법 전문 변호사였던 루이스 헨리 모건은 미국의 교육재단인 스미소니언에서 연구비를 받아 캔자스주에서 미주리강을 따라 현재의 몬태나주까지 올라가며 원주민 친족 관계를 연구했다. 그는 1862년까지 51가지 친족 패턴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이 최근에서야 미국 중산층의 표준이 될 혈연과 결혼으로 인한 가족 구조보다 열등하다고 결론 내렸다. 핵가족 제도를 채택함으로써 인간은 “야만적인” 과거와의 “난잡한 관계를 끊고” “최종적인 문명”에 올라섰다고 표현했다. (p.105-106)
선택에 의해서든 강요에 의해서든 19세기 중반 미국인은 대체로 댄 퀘일이 찬양하는 가족을 갖게 됐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 가정을 돌보고 가족의 도덕적 나침반이 되는 어머니 그리고 그들의 생물학적 자녀가 그 가족이었다.
물론 핵가족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히먼 험프리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세계의 다른 지역이나 과거 200년을 살펴보면 핵가족은 붕괴하고 있다. 하지만 핵가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퍼지면서 대가가 따라왔다. 공동체와 가족이 오랜 세월 서로를 유지하게 한 여러 가지 방법이 부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작은 국가’로서 생존하려면 과거에 이웃과 친구들이 도와준 가사노동을 보충할 자원이 필요하다. 과거에 베이커 가족이 나누던 콩이 있어야 하고, 공동체의 타인이 키워주던 아이들을 직접 돌봐야 한다. 그런 지원이 필요하면 안 된다고 믿는 사회,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이 자연법칙에 어긋난다고 믿는 사회는 쉽게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가족을 오히려 처벌할 때도 있다. (p.106-107)
이 법은 12월 백악관으로 들어갔다. 지지자들은 초당적 지지를 받은 이 법이 워터게이트 사건 이전이지만 이미 궁지에 몰린 리처드 닉슨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닉슨의 생각은 달랐다. 그에게 이 법안은 트로이의 목마였다. 겉으로는 관대하고 매력적이지만, 공화국을 쓰러뜨릴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 존재였다. 닉슨 대통령은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국회의원들을 향한 혹독한 비난을 서면으로 전했다. 포괄적 아동 양육법은 “암흑으로 뛰어드는 행위”이며 “도덕적 권위를 갖는 국가 정부가 가족 중심을 버리고 공동체 중심의 아동 양육의 편을 드는 짓을 저지르게” 할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일하는 동안 어머니 이외의 사람에게 아이를 키우게 하는 공공 보육의 개념 자체가 핵가족이라는 미국의 이상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본 대통령, 본 정부는 그 발걸음을 내딛고 싶지 않다”고 닉슨은 적었다.
이 법안을 비판한 이들은 19세기 여성의 취업이 출산율을 낮춘 것처럼 여성이 가정에서 자녀를 키우지 않고 일하도록 장려하면 출산율을 낮출 것이라고 우려했다. 물론 문제는 어린 자녀와 가족을 지지하는 인프라를 갖지 못하면―좀 더 정확히는 여유가 되는 사람만 이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가지면― 어쨌든 출산율은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150년간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핵가족을 찬양하고,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 벽을 세우고 부모만이 자녀 키우는 부담을 지기를 바랐다. 혹은 필요한 도움에 돈을 지불하기를 바랐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 보육 비용은 너무 많이 들고,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일하고 있으며, 2인 부모 가정에서도 부모가 모두 일해야만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 하지만 시간과 에너지를 돌려줄 공동체 재건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든다. 그런데 외부에서 지원해주지 않는다면, 그 시간과 에너지를 가진 개인은 없다. (p.115-116)
진보주의자라고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이는 여성을 우상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10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엘리너 케이건을 대법원 판사 후보로 지명했을 때, 그의 사법 기록과 함께 출산 기록도 조사했다. 케이건은 오바마가 대법원에 지명한 두 번째 여성 판사였으며, 소니아 소토마요르와 함께 자녀가 없는 두 번째 여성 판사였다. 진보 진영을 비롯한 많은 이가 보기에 이런 결정은 실수였다. 『뉴욕 타임스』에 리사 벨킨은 한 “페미니스트 친구”의 불평을 적었다. “난 그가―케이건이―어머니가 아닌 게 마음에 걸려. 그러면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케이건과 소토마요르가 아이를 갖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대법원 판사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이왕이면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성을 대법원으로 보내면 더 좋지 않겠냐는 주장이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성에 대한 집착이 우스운 것은 남편과 자녀, 직장을 ‘모두’ 가진다는 개념이 특별히 새롭거나 혁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여성은 자녀를 가지고 가족 경제에 이바지하기를 기대받아왔다. 미국의 유색인 여성, 이민자 여성, 노동자 계층과 빈곤층 여성은 관심과 노동력을 자녀에게만 집중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흑인 여성은 늘 집 밖에서 일했다. 노예제도 아래에서는 폭력에 의해, 그 이후에는 경제적 요구에 의해 강요된 일이었다. 유럽 농촌 지역에서 여성은 그들이 출산하는 자녀 못지않게 소중한 노동력으로서 가족의 생존을 위해 땅에서 충분한 열량을 끌어내느라 고생했다. 원주민 여성은 유럽인이 등장하기 전부터 북미 대륙에서 살며 일하고 자녀를 양육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배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일하는 여성도 있었다. 경제적 생산력은 정착 시대 ‘현모양처’의 미덕이었다. (p.128-129)
1880년대부터 미국의 고용주들은 여성이 결혼하자마자 직장을 그만두게 하는 ‘결혼 후 퇴사’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1931년 캔자스시티와 필라델피아의 회사를 조사한 결과 보험회사 61퍼센트, 출판사 37퍼센트, 은행 35퍼센트가 기혼 여성 고용을 엄격히 금지하는 정책을 갖고 있었다. 또한 보험회사 46퍼센트, 출판사 34퍼센트, 은행 21퍼센트가 결혼한 여성 근로자를 해고했다. 진보주의 변호사이자 훗날 대법원 판사가 된 루이스 D. 브랜다이스는 1908년 미국 대법원에 이런 법을 지지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모든 여성은 “잠정적 어머니”이므로 “지나친 노동 시간으로 인해 어머니 역할에 부적합해질 수 없다”고 적었다. 그해 대법원은 세탁소에서 여성이 하루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제한한 오리건주의 법을 지지하며 이에 동의했다. “건강한 자녀를 위해서는 건강한 어머니가 필수적이므로, 여성의 신체적 건강은 국민 전체의 힘과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공의 관심과 배려의 대상이 된다.”
미국 대법원의 승인과 함께 기혼 여성과 어머니의 노동을 제한하는 법이 줄지어 나왔다. 1932년 연방 정책은 두 명의 공무원이 결혼하면 한 명은 반드시 퇴직할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많은 사람이 실직한 대공황 시기에 두 명의 정부 수입이 한 가정에 들어가는 것은 비양심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경제적 공평성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1935년 위스콘신주 상원에서는 이중 소득을 가진 가정에 대해 “심각한 도덕적 의문”을 제기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한 가족은 “산아제한을 장려하고 남편과 아내의 취업 소득에서 비롯한 이기심이 문명과 건전한 분위기를 붕괴시키고, 가정을 꾸리려는 개념을 뒤흔들며 가족생활을 파탄시킨다”고 상원의원들은 우려했다.
매사추세츠주 법은 고용주들이 여성의 근로 시간표를 엄격하게 통제하도록 했고, 여러 주에서 여성의 야간 근무가 완전히 금지되어 병원 등 24시간 근무하는 직장에 취업할 수 없게 됐다. 1970년대 초까지 교사는 첫아이를 임신하면 해고되었고 항공사는 정책적으로 임신한 승무원을 해고하고 어머니 고용을 금지했다. 19~20세기에 ‘결혼 후 퇴사’ 법을 통과시킨 이들은 여성에게 선택을 제공했다고 여겼다. 자녀 없이 독신으로 사는 것이 교사 일이나 타자수, 간호사, 공무원 등의 직업을 그만두는 것보다 당연히 더 나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계산은 틀렸다. 어머니가 되도록 여성을 직장에서 내쫓음으로써 그들은 그 반대의 일을 해낸 것일지도 모른다. 여성이 일하기 위해 모성을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p.142-144)
1970~1980년대는 미국 사회와 문화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나 성역할과 직장 기준이 변화했다. 가장 눈에 띈 변화 한 가지는 미국 여성이 대규모로 임금노동에 뛰어든 것이었다. 1990년 약 60퍼센트의 여성이 집 밖에서 일했다. 가족의 경제적 생존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여성과 직장에서의 성공이나 지적 관심을 위해서 일하려는 여성을 모두 합친 수치였다. 노동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자녀가 있는 가족의 부부” 가운데 3분의 2 가까이 두 사람 모두 직업을 가졌다. 전국적으로 한 사람의 임금만 가지고는 편안하게 살 수 없다는 것도 그 이유였다.
가장-주부의 가정 모델은 잠시 생겨났던 예외다.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경제적으로 이바지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던 역사의 맥락 속에서, 문제는 모성이 노동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일하는 방식이 모성과 양립할 수 없게 변해가는 것이다. 노동과 가족, 소득과 자녀가 대치되는 가운데 모두 실패했다. 미국의 출산은 수십 년간 감소했고, 미국의 노동력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9년에 비해 2014년에는 5퍼센트 낮아졌다. (p.145-146)
부모가 될 이들이 앞으로 자녀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서 과연 생존할 능력이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일도, 우리 시대만의 일도, 우리만이 겪는 위기도 아니다.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국경 지역인 그란차코의 원주민 아요레오족의 삶은 1932년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며 붕괴됐다. 10만 이상의 군인이 해당 지역에 무기와 질병을 가지고 들어왔다. 민족학자들이 마을 여성을 인터뷰한 결과, 전쟁과 그 여파로 인해 아요레오족의 거의 모든 어머니가 영아를 살해했다고 인정했다. 결과적으로 전쟁 중 태어난 신생아의 40퍼센트가 어머니의 손에 죽임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아요레오족은 아이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영아 살해를 중범죄로 여긴다. 하지만 긴급 상황에서는 공동체의 생존이 우선해야 했고, 인구가 늘어나면 생존 능력에 직접적인 위협이 됐다.
1850년대 유타주 남부 파이우트 지역에 모르몬교도가 이주하면서 전파한 질병으로 인해 파이우트 정착지의 인구 90퍼센트가 사망했을 때도 출산은 급감했다. “우리 민족은 아주 오랫동안 불행했다.” 수십 년간 전쟁, 죽음, 상실을 겪은 뒤 1883년 파이우트족 여성은 기록했다. “그들은 수를 늘리는 대신 줄이고자 했다.” 기후변화는 늘 새롭게 느껴지고, 그 변화가 유일무이한 측면도 있지만 소외된 공동체 사람들은 전에도 이런 질문에 직면했다. “노예제도와 짐 크로 법, 폭행과 차별에 직면했던 멀지 않은 과거의 흑인들도 세상에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떨었다.” 메리 아네즈 헤글러는 최근 이렇게 적었다. “익숙한 이야기가 아닌가?” (p.188-189)
내게 지난 2년은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어머니와 가족, 아동에게 얼마나 무관심한지 가르쳐주는 기간이었다. 우리는 결국 기괴한 정치적 교착 상태에 봉착했다. 미국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을―아기와 어린이를 위해서라며―기회를 제공한 재판이 시작된 곳은 이미 태어난 아기와 어린이를 보살피는 일도 형편없음을 증명한 미시시피주였다. 비영리기관 세이브더칠드런 발표에 따르면 미시시피주의 미성년자 네 명 중 한 명 가까이 기아를 경험한다. 테이트 리브스 주지사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히면 어머니와 자녀를 보살피는 데 헌신하겠다고 트위터에 썼다. 사람들을 돕기 전에 임신중지 법이 바뀌기를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한 논평자가 물었다. (p.286-287)
냉소적인 마음이 들 때면 “미국 여성은 어째서 자녀를 갖지 않는가?”라고 할 것이 아니라 대체 “어째서 자녀를 가져야 하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희망이 느껴질 때면 더욱 생산적인 질문을 떠올린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원이 고갈된 지구와 시간과 돈이 고갈된 존재가 요구하듯이, 새로운 생명을 적게 만들면서 아이들이 선사하는 기쁨과 희망,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을까? 자녀를 갖고 갖지 않는 것의 차이가 그렇게 냉혹하지 않은 미래, 한 아이에게 둘 이상의 어른이 개입하는 미래, 모성이 직장과 삶에 짓눌리지 않는 미래, 어머니가 아니라고 해서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까? “만약 새로운 아이를 만드는 것이 진정 공동체에 기쁨이 되고, 매일 실질적인 책임이 된다면 어떨까?”라고 이론가 도나 해러웨이는 질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몸으로 낳은 아이”라는 생각을 뛰어넘는 사고가 요구된다고 그는 설명한다. (p.290)
우리가 어머니와 어머니가 아닌 여성 사이에 현실이라고 알고 있는 구분은 오래전 목적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여성의 선택지를 모성과 가정에 제한하고 다른 일을 하려는 것은 일탈로 규정하기 위함이었다. 어머니라는 선택지와 정체성은 이런 틀에 제한되어 자녀 없는 여성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우리를 갈라놓고자 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행동은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우리 가정과 삶과 가족에 초대하는 것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거듭 함께하는 해방을 위한 상호 협력의 제안을 해야 한다”고 샘 애들러벨은 최근 『뉴욕(New York)』 잡지에 기고했다. “아이 말고 친족을 만들자” 범퍼 스티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이 말고”만이 아니다. “아이 말고” 운동이 최근 역사와 먼 과거에서 밟아온 길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여성은 어쨌든 아이를 덜 낳고 있으므로 “친족을 만들자”는―즉, 우리 가족과 마음과 헌신을 우리가 낳지 않은 아이들, 우리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들, 우리 미래를 대표하는 젊은이들에게 열자는―제안에 우리는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낸시 올리비는 1만 명의 아이를 키웠다.” 또 한 명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가 그리울 것이다.” (p.294-295)
하필 책이 좋아서 / 김동신, 신연선, 정세랑 / 북노마드
책을 보면 가끔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여러 장의 종이를 엮었을 뿐인 이 단순한 물건의 생산과 소비에 이토록 오랫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열성적으로 가담해왔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책의 형태, 종이 여러 장을 겹쳐서 한쪽 변을 묶고 표지로 감싸는 코덱스(codex) 형식은 역사상 책이 취했던 여러 형태 가운데 한 가지이지만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책의 대명사가 되었다. 오랜 세월 사람 가까이에 자리했기 때문일까. 책의 세부를 일컫는 명칭을 살펴보면 신체 부위를 뜻하는 말에서 가져온 것이 많다. 책머리, 머리띠, 책배, 책발…… 앞표지는 자주 ‘책의 얼굴’로 비유되며, 표지 종이를 판형 폭보다 길게 내어 안쪽으로 접어 넣은 부분은 ‘날개’라고 부른다. 디자인 저술가 엘런 럽튼(Ellen Lupton)은 「책의 몸」이라는 글에서 책과 타이포그래피 관련 용어에 몸과 관련된 것이 많은 것은 글쓰기가 신체의 확장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눈이 볼 수 없는 영역을 카메라를 통해 보고 발로 갈 수 없는 거리를 자동차로 쉽게 도달하듯이 글은 생각을 그 소유자로부터 시간적·공간적으로 분리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준다. 글이 생각의 몸이라면 책은 글의 몸이다.
신체와 관련된 책의 세부 명칭 가운데 가장 절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책등이다. 등에는 인체를 지탱하는 기둥인 척추가 있기 때문이다. 코덱스의 구조적 정수가 종이를 엮었다는 점인 만큼 엮인 부분들이 모여 만들어진 면을 등이라고 일컫는 것이 퍽 적절하게 들린다. 영어권에서는 직접적으로 spine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노출 바인딩으로 제작한 책에서 표지를 입히지 않은 책등을 보면 종이 묶음을 실로 엮은 모습이 뼈마디와 닮아 보이기도 한다. (p.110-111)
“난 홀로코스트에 놀라지 않았어. 강간과 어린이 노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고. (중략) 난 내가 길거리에 장갑 하나를 떨어뜨렸는데 어느 10대 아이가 그걸 갖다 주려고 두 블록을 뛰어올 때 놀라고, 사리사욕의 가면을 쓰고 있는 내게 계산대 여직원이 거스름돈을 주면서 함박웃음을 지을 때 감탄해. 주인에게 돌아간 분실 지갑들, 꼼꼼하게 방향을 가르쳐주는 낯선 사람들, 실내용 화초에 서로 물을 주는 이웃들, 난 그런 것들에 놀라.”
이런 사람들이다. 내 나이테의 간격을 넓힌 이들은. 나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선함을 차마 숨기지 못하고 내보이는 사람들을 기억한다. 이 사람들은 세상의 고통에 진심으로 아파하고 자신의 나약함에 끊임없이 괴로워하면서도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볼 줄 알고 어떻게든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꿔보려고 애쓴다.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미약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해 보탠다. 무너지는 댐에 난 구멍을 제 몸으로 막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를 다독인다. 일말의 희망을 가르쳐준다. 비와 햇빛이 되어준다.
그 존재들에 번번이 감동하고 놀라는 이유는 인간이란 존재가 쉽게 변질되고 마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의 허기가 타인의 병보다 중하기 때문에. 애쓰지 않으면 타인은, 언제나 나의 바깥에만 머무는 존재이기 때문에. 도무지 가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영역까지 나아가 타인과 세상의 고통을 그대로 나의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언제나 놀랍다.
나의 사랑하는 울보들. (p.235-237)
출판계에서 경력이 쌓이고, 일을 거듭 할수록 ‘다 알 것 같아서 지루해지는 순간’은 언제까지나 오지 않을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게 좋다. 책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작디작은 나의 세계를 무려 노동을 하면서도 넓힐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알면 사랑한다’는 말을 늘 좋아하는데 나로 말하자면 책이 가져다준 다양한 세계 덕분에 사랑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다. 책과 저자에게서 알게 된 새로운 세계를 ‘잘’ 알고자 하면 그 세계를 이내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 덕분에 세상에 대한 환멸이 닥쳐올 때도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나에게 그런 용기를 준 책이 몇 권쯤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큰 용기이고.
그래서 출판계 노동자이자 독자인 나는 이 덕업일치의 삶을 행운으로 여기며 산다. 일을 위해서 읽던 책을 다 끝내면 휴식을 위해 다시 또 책을 꺼내면서 말이다. 천수를 누리다 죽은 행복한 돼지의 이야기, 장애인 운동가의 이야기, 세월호 유가족의 이야기,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이야기, 인도의 작은 출판사 이야기, 프리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야간의 인공조명으로 죽어가는 새들의 이야기, 사랑의 정의를 넓혀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두 책에 있다.
다큐멘터리나 뉴스 기사로는 미처 다 알 수 없던 깊이 있는 세계가 책 속에서 꼼꼼하게 펼쳐진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이 귀한 사람들을 나의 거실에서 단 둘이 만나는 일이다. 그 내밀한 이야기를 내 두 귀에 직접 전해 듣는 일이다. 나의 바깥으로 간신히 한 발짝 나가보는 일이다. 그 불가능한 일이 일어날 때의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는 일이다. (p.249-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