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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 인문 기행 / 서경식 / 반비

 

 멕시코 벽화운동은 사회주의 운동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이승만 정권 시절에도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에도 엄격하게 금지당했다. 전시회는커녕 화집조차 출판되지 못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한국의 일반인에게 멕시코 벽화는 접할 수 없는 금단의 미술이었다. 한국의 어느 미술가에게 들은 바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멕시코 벽화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졌고, 몰래 화집을 입수하여 돌려 보면서 이후 민중미술 운동에도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예컨대 우리는 오윤(1946~1986)의 작품을 통해 멀게나마 멕시코 벽화와 공명하는 울림을 들을 수 있다.
 한국에 비하면 일본에서는 멕시코 미술은 비교적 낯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기타가와 다미지(1894~1989)처럼 직접 멕시코에 머물며 오로스코, 리베라, 시케이로스와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은 작품을 남긴 화가도 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1955년에는 도쿄에서 본격적인 멕시코 미술 전람회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미술계의 주된 관심은 일관적으로 인상파를 중심으로 한 19세기 유럽 미술로 향해 있었다. 멕시코 같은 제3세계 미술이나 사회주의권 미술은 지금도 주류에서 밀려난 방계에 머물고 있다. 나 역시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본 주류 미술계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멕시코 벽화운동이라고 해도 지식으로만 알았을 뿐, 실제 작품을 본 것은 디트로이트에서가 처음이었다.
 멕시코 벽화운동이라는 용어만 듣고서 나는 주로 농민 생활을 그린 민속적 작품을 상상했다. 어리석고 얕은 생각이었다. 리베라를 ‘좌익 화가’라고 여겼던 미숙한 선입관 때문에, 자본가 중의 자본가라 할 만한 포드의 지원을 받았고 작가 스스로도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직접 벽화 앞에 서보니 그러한 의문을 훌쩍 넘어서는 설득력으로 육박해오는 대작이라는 사실만은 틀림없었다. (p.105-107)

 

 그래도 ‘선한 아메리카’ 역시 여전히 분투 중이다. 미국 전역으로 퍼진 트럼프를 향한 항의 운동, 비판의 펜을 놓지 않는 매스컴, 미국이 일방적으로 ‘테러 위험국’으로 선포한 이슬람권 7개국 일반 시민의 입국을 일시 금지한 ‘7개국 출신자 입국금지조치’에 사법부가 정지 명령을 내린 것 등이 그 사례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린 입국금지조치에 대한 항의 의사를 담아 모마는 해당 국가 출신인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했다. 전시 해설에는 “환대와 자유라는 궁극의 가치가 이 미술관과 미국에게 불가결하다는 점을 확실히 드러내기 위해 전시를 기획했다.”라는 내용이 쓰여 있다. 「게르니카」의 망명지였던 모마다운 기상이 여기에도 살아 있다.
 ‘선한 아메리카’와 ‘악한 아메리카’ 사이의 투쟁에는 긴 역사가 있으며, 이 투쟁은 앞으로도 길게 이어질 것이다. 예술에 전쟁을 억제하는 힘이 있는지, 나쁜 권력을 타도하는 힘이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예술은 언제나 어떤 악몽의 시대에도 관용, 연대, 공감을 추구하려는 인문 정신이 살아 있음을 가르쳐준다. 예술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p.155-157)

 

 당시 본 영화 중에 「사형대의 멜로디」가 있다. (한국에서는 「사코 & 반제티」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1971년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합작해서 만들었고 일본에서는 이듬해 개봉했다. 주제가였던 「승리의 찬가」는 저항 가수로 유명한 여성 포크 가수 존 바에즈(Joan Baez)가 불렀다. 이 영화는 192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코와 반제티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니콜라 사코(1891~1927)는 구두 제조공이자 아나키스트였다. 바르톨로메오 반제티(1888~1927)는 생선을 파는 행상인이었다. 두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징병을 피해 멕시코로 도망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서로 알게 되었다. 1920년 4월 15일 사우스브레인트리에 있는 구두 공장에서 직원과 경비원을 사살하고 현금을 강탈한 사건이 발생했고 사코와 반제티는 용의자로 체포됐다. 두 사람이 아나키스트라는 점을 두고 법정은 재판을 사상 검증으로 몰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불황과 ‘빨갱이 사냥’의 광풍이 그 배경이었다. 때마침 이민도 급증하자 이에 반발하여 ‘전통적인 아메리카’를 수호하자고 주장하는 세력과 백인지상주의자가 대두했다. 트럼프가 등장한 지금의 상황과 무척 비슷하다.
 검사는 두 피고의 징병 기피 이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반복했다. 이에 대해 사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큰 부자가 되기 위한 짓거리다. 우리에게 서로를 죽일 권리가 있는가? 나는 아일랜드인을 위해 일했다. 또한 독일인 친구들과도 일했고, 프랑스인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일했다. 내 아내를 사랑하듯, 나는 이들이 좋다. 어째서 내가 이런 사람들을 죽이러 나서야 하는가? 나는 전쟁을 신뢰하지 않는다.”
 1921년 7월 사코와 반제티가 유죄 선고를 받자 미국과 유럽에서 항의 운동이 번져갔다. 벤 샨은 여행지였던 파리에서 이 운동을 접하고 미국으로 귀국한 뒤, 이들에게 연대하는 의미로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을 비롯하여 이들을 주제로 한 연작 제작에 힘을 쏟았다.
 결국 사코와 반제티는 1927년 8월 전기의자에 앉아 처형당했다. 1977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두 사람의 무죄를 확인하는 내용의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처형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p.173-177)

 

 9·11 메모리얼을 찾아간 날은 쾌청했고 전 세계에서 찾아온 수많은 방문객으로 북적거렸다. 건물들은 볼만했지만 경건한 추도의 마음이나 깊은 성찰, 더구나 식민주의를 고발하려는 의도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추도 시설에는 흔한 경우겠지만, 피해자를 향해 일반적으로 갖는 동정심이나 피해자와의 무비판적 동일시를 통해 자기를 긍정하려는 심리를 이용하여, 정서적으로 자국민 중심의 이야기 속으로 몰아가는 장치로 기능하는 듯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나의 사전 예측은 적중했다.
 9·11 테러 발생 직후,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국은 사건 소식에 환호성을 지르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영상을 내보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반사적으로 사이드를 떠올렸다. 사이드라면 지금 어떤 말을 했을까. 문제의 영상은 ‘팔레스타인 사람=테러리스트’라는 서구인의 평균적인 편견을 더욱 공고히 해 적개심을 부채질하는 효과를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민중이 사건 소식에 환호하고 싶어진 감정의 원인을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희생자를 살피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기에 앞서, 미국을 뒷배로 둔 이스라엘의 횡포로 팔레스타인 민중은 또 얼마나 부당한 희생을 당해왔는지, 그 희생에 자신은 얼마나 관심과 동정을 가졌는지도 반성해보아야 할 일이다.
 9·11 이후 정서적 애국주의가 미국 전역을 뒤덮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일주일 정도 지나 사이드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애국주의에 휘말린 호전적인 집단 열광에 몸을 맡기지 말고, ‘이슬람 대 서구’라는 단순화된 대립 구도에도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테러 방지에 필요한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인내와 교육’에 투자하는 일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성의 목소리’는 감쪽같이 지워졌고 세계는 ‘전쟁’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출구 없는 대립 구도 속으로 눈사태처럼 휘말려 들어가고 말았다. 세계 최강의 부자 나라 미국이 일본을 포함한 동맹국과 하나가 되어, 최빈국 아프가니스탄에 빗발처럼 폭탄을 퍼붓는 일이 벌어졌다. (p.221-223)

 

 사람은 승리를 약속받았기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넘쳐나는 불의가 승리하기 때문에 정의에 대해 되묻고, 허위가 뒤덮고 있기에 진실을 위해 싸운다. 단적으로 말해 사이드는 우리에게 현대를 살아가는 자에게 있어 도덕의 거처는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전 지구적 시장 경제, 세계 전쟁의 시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본래 귀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 떼어 놓았다. 모어, 모문화, 역사로부터 추방된 수많은 디아스포라가 지구상을 유랑하고 있다.
 하나의 언어공동체로부터 다른 언어공동체로 건너간 그/그녀들은 이들 복수 공동체의 틈새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고뇌와 얼마 되지 않는 환희를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들 중 대다수는 아직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그녀들은 새롭게 찾아간 공동체에서 항상 마이너리티의 지위에 있기에 자신들의 모어와는 다른 언어를 구사해야 하며, 경제적 곤궁이나 법적 지위의 불안정으로 지식과 교양을 축적할 조건 자체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수많은 곤경을 넘어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일이 가능해졌다고 해도, 이번에는 들어줄 독자를 구해야 하는 가장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 독자가 될 다수자는 대부분 자신이 단일한 공동체에 귀속한다는 신화 속에 안주해 있다. (이 표현이 껄끄럽다면, 신화에 ‘구속’되어 있다고 바꿔 말해도 좋다.) 한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는 항상 다수자의 안주를 위협하며(구속으로부터 ‘해방’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때때로 다수자가 의심 없이 누려오던 기득권에 뾰족한 가시와도 같은 불편한 의혹의 눈길을 던진다. 과연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맘 편히 나누며 즐길 수 있을까. 그리하여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는 소수만 이해하는 채로 고립되거나, 또는 판타지나 환상으로서 ‘노마드적 삶’을 동경하는 다수자에게 소비되고 만다. (p.233-235)

 

 여러 아이덴티티를 껴안고 살아가는 상태는 한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다름 아니라 자기가 분열된 상태를 뜻한다. 복수의 아이덴티티가 서로 대립할 때, 자기 분열의 아픔은 점점 커진다. 구식민지 출신 디아스포라는 누구나 이러한 자기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다. 그것을 어찌 ‘거침없고 활달한, 경계 없는(borderless) 삶의 방식’이라든가, ‘가볍게 경계를 넘나드는 노마드적 삶’ 같은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성과 이름을 둘러싼 어색함을 이해할 수 없는 다수자는 이런 아픔 또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NHK 엔터프라이즈의 가마쿠라 히데야 감독이 제작하여 2003년 4월에 NHK 제1위성방송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사이드, 이라크 전쟁을 말하다」에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담겼다. 미국과 영국 군대가 이라크 전쟁을 개시했다는 소식에 사이드는 “미국인으로서, 또한 아랍인으로서 부끄럽다.”라고 말했다. 두 번 정도 왼손과 오른손 주먹을 마주 붙인 후, 이어서 맞붙은 두 주먹을 좌우로 갈라놓는 몸짓을 했다. ‘아랍 출신 미국 국민’이라는 분열된 아픔을 그 간단한 포즈로 보여준 셈이다.
 사이드는 고독했다. 미국에서 제대로 이해받을 수 없었던 그는 팔레스타인에서도 그리 이해받지 못했다. 물론 다른 의미에서지만, 그는 두 곳 모두에서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었다.
 사이드와 마찬가지로 고독한 자, 즉 복수의 공동체에 걸쳐진 인생을 성실히 살아가고자 노력하지만, 그렇기에 어떤 공동체에서도 자기를 이해해주는 동조자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는 적지 않다. 사이드가 느낀 고독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결코 적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장소에서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며 고독한 자들이다.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놓인 자들은 아주 멀리서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만남을 열망하며 서로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갈라놓고 가로막는 장벽은 여전히 높고 견고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정표나 등대처럼 유달리 높이 서 있어주었던 사이드는 이제 우리 곁에 없다. 얼마나 거대한 상실인가. (p.243-245)

 

 

이제 공간에 주의하십시오 / 신지연, 이승빈, 김영대 / w.h.d

 

 우리가 일일이 알 수 없을 노력 끝에 변은 이제 하천과 세계에 극적인 재난을 가져오진 않는다. 대신 탄소가 그 역할을 이어 받았다. 강물에 변을 풀던 시절 그랬듯 우리가 별생각 없이 풀어놓는 탄소는 이제 행성적 역량을 가진 기후재난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서울 바깥으로 내보낸 변이 어떻게든 서울로 돌아온 것처럼, 남한 바깥으로 내보낸 탄소는 이상기후와 먹거리공급망 붕괴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돌아온다. 지구가 도시로 뒤덮인 상황에서 도시세계의 변두리는 없다. 도시는 다른 도시에게 영향을 주고 우리는 이제 원하든 원치 않든 행성에서 함께 사는 데 드는 비용을 함께 치러야 한다. 아직 미진한 수준이지만 위 비용을 두고 경제와 생태 간의 번역은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유럽연합이 준비 중인 탄소국경세가 대표적인 예다. 기묘한 우회와 함께 도착한 자연변증법적 울림과 함께 환경은 이제 경제다.
 최근 K-문화산업의 전지구적 약진은 남한의 사람들에게 전지구라는 규모의 공간에서 우리, 남한인을 위치 짓고 상상하는 데에 어떤 자극을 준 것 같다. 우리가 예상한 적 없었던 어느 향유층을 통해 전지구적인 무언가에 연루되어 있다는 어떤 감각은 우리가 언제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묘한 방식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규모의 세계들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것만 같다. 우리가 전지구적인 연루를 통해 문화산업과 국민됨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식으로만 연결되어 있으면 좋겠지만 실상은 다른 방식으로도, 기후재난에 공동으로 가담하는 방식으로도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기는 불편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변을 보고 나서 변이 저절로 적당한 방식으로 행복하게 세계의 일부가 되지만은 않는 것처럼 탄소도 저절로 우리를 위해 적합하게 존재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연결에 응답하는 상대 없이 전지구적인 연결로 우리가 문화적, 경제적 성공을 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생산한 문화에 그들이 응답해온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생산한 탄소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생산한 탄소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치와 생태를 가로지르며 이 행성을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해 보기에 물과 변이 주는 상상력이란 변기 너머의 세계들을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이해하고 거기 응답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게 해주는 능력이다. 또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도시와 변기 이상의 세계에 관여하는 방식으로 다른 세계들에 의존하면서 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행동하는 정치의 기초다. (p.66-67)

 

 서울에 독립해 살면서 나는 쾌적한 공기와 냄새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품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참 미세먼지 담론이 유행할 때는 원룸에 쾨쾨한 냄새가 가득 차는 느낌에 공기청정기를 들였다. 아파트 베란다에서는 하루면 잘 말랐던 빨래가 원룸에서는 며칠을 두어도 잘 마르지 않았다. 빨래가 잘 마르기 위해 필요한 충분한 햇빛과 적절한 공기의 순환은 내가 살던 원룸에서 실현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처음에는 돈을 아낀답시고 섬유유연제를 사지 않다가 빨래에서 나는 물 냄새 때문에 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섬유유연제를 써도 물 냄새를 완전히 막기란 어려웠다. 나중에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실내건조용’ 섬유유연제가 새로 출시되었음을 알게 되었고(원룸 자취생에게는 필수 아이템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내가 원래 쓰던 섬유유연제보다 몇천 원 비쌌지만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장마철이라도 되면 섬유유연제도 효용이 떨어져 결국 무인 세탁방에 들러 빨래를 한다. 모자를 눌러 쓰고 슬리퍼를 신은 내 또래들이 삼삼오오 무인 빨래방에 앉아 핸드폰을 하며 기다리는 모습은 ‘장마철’ 하면 떠오르는 기억 중 하나다. (p.71)

 

 영향이 적진 않겠으나, 수도권의 미세먼지 원인을 이야기할 때 중국의 영향을 중심으로 ‘피해 서사’에 집중되어 온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분석 기간과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어도 국내 미세먼지의 국외 영향은 알려진 만큼 압도적이지 않으며, 서울에서 관측된 초미세먼지의 70% 이상은 국내에서 발생된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또한 코로나19가 미세먼지 감소에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은 미세먼지가 중국에서, 공장이나 발전소에서 발생할 뿐만 아니라 당장 나의 생활 공간에서 지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캠핑에서 즐기는 바비큐, 비행기로 이동하는 여행, 불꽃축제 등도 많은 미세먼지를 발생시킨다. 특히 높은 비율의 인구가 집중된 수도권은 이런 점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다. 생활 먼지는 서울의 많은 문제처럼 다른 지역으로 외주화(이 책의 5장과 7장을 함께 참고)할 수도 없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p.78)

 

 다시 서울에, 광주에 돌아와 자전거 타기가 나에게 줬던 즐거움과 해방감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이동 수단을 타는 행위를 이렇게 그리워할 수도 있나? 그래서 인터넷에서 자전거 타기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Dutch Cycling Embassy”와 “Bicycle Dutch”라는 사이트에서는 자전거 타기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자전거 타기가 주는 다양한 이점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저렴하다, 환경에 좋다, 자동차 공간을 축소시켜 공공 공간을 개선할 수 있다, 자동차 소음을 줄일 수 있다, 운동 효과가 있다, 시간을 절약한다, 교통사고가 줄어든다, 소비를 촉진시킨다 등 개인과 사회에 자전거 타기가 어떤 이익을 주는지 통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중 이동 방식에 따라 인지된 스트레스와 행복감이 어떻게 다른지 분석한 한 심리학 연구는 자전거 사용이 가장 강력한 긍정적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주장하는데,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자전거 타기가 사회적 접촉을 증대시킨다는 것이다. 길 위의 다른 자전거 이용자들과의 접촉과 갈등을 중재하면서 일종의 상호작용이 발생하며 이는 인지된 외로움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는 자동차와 대비시켜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자동차 모빌리티는 사람을 가두고 운전자를 도로로부터, 서로로부터 소외시키는 반면에 자전거 모빌리티는 서로를 더 접촉하게 한다.” 자전거 타기는 그 자체로 공동성과 집단성의 형태를 포함하는 예이며, 아주 사회적인 활동인 것이다. 자전거 이용자가 사이클리스트(cyclists)라는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인 활동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p.98-99)

 

 대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사건으로 기억되는 4월 혁명의 주역에 고학생과 도시하층민도 있었음을 지적하는 오제연은 당시 대학생도 도시하층민의 행동을 ‘파괴’와 ‘혼란’으로 인식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엘리트’이자 ‘혁명의 주체’로 인식했던 대학생들은 이승만 하야 직후 질서 확립을 위한 수습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도시하층민들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뿐 아니라 당시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서도 반발했으나, 대학생들은 이를 인지하면서도 공동체의 질서 확립을 더 중요시했다. 여기에는 1950년대 국가의 학원 통제 아래 성장했던 대학생들이 지니고 있던 ‘체화된’ 규율과 1959년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 진보당 당수를 법살한 사건, 1960년 4월 혁명 내내 시위를 공산주의자의 사주 내지는 북한의 침략 기회로 몰아붙였던 정권의 영향이 있었다. 지식인과 언론은 지속해서 도시하층민의 시위를 과격한 것으로 비난하고 학생들의 ‘질서정연한’ 시위와 구별했다. 간혹 “‘양아치’도 이 나라의 아들딸들이다”와 같은 칼럼이 실리기도 하였으나, 도시하층민들의 행동은 언어를 갖지 못한 채 잊혀졌다.
 함께 운동에 참여했음에도, 왜 이들은 무지와 불량, 비합리성을 이유로 운동의 ‘타자’로 취급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를 사회문화적 자본이나 언어의 문제로도 해석할 수 있겠으나(이 책의 12장을 함께 참고), 이 글에서 나는 이 구분의 기준에 ‘이동을 자제할 수 있다는 믿음’의 여부가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정한 공간(토지)과 재산을 가져 정착과 이동을 균일하게 조절할 수 있는 자가 아닌, 과도한 이동을 할 수밖에 없거나 할 가능성이 큰 자들은 마치 도덕적 결함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이는 현재를 근거로 한 판단일 수도 있으나, 미래에 안정적인 이동성과 공간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잠정적인 여부도 강력하게 작동한다. (p.106-107)

 

 총기회수를 두고 엇갈리는 주장에 대해 이정선은 신념을 차치했을 때, 이들이 생활했던 공간의 차이가 중요하게 작동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당시 외곽으로 철수했던 계엄군은 재진입을 시도하는 상황이었고, 5월 21일 이후 외곽에서는 통행자들을 향한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와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렇듯 충돌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외곽 지역의 일부는 도시에서 밀려난 하층민의 거주 공간과도 겹쳤을 것이다. 더불어, 이정선은 이들 중 상당수가 주민등록증이 없었던 점도 지적한다. 주민등록증 없이는 공수부대의 검문에 걸렸을 때 고정간첩이나 불순세력이 아님을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시위가 끝나지 않으면 시내에 있었던 이들이 외곽의 거주지로 돌아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도시 빈민의 무장항쟁 참여는 이들의 선도성 또는 폭력성의 발로이기보다는 정황의 산물일 수도 있다.” 이정선이 지적하는 ‘정황’은 돌아갈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없다는 사실과 주민등록증 없이는 이동 자체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이 혼재된 것이었다. 실제로 무연고자 비율이 높은 ‘부랑자’들은 남파 간첩이라는 의혹을 받기도 쉬웠거니와 항쟁 이후 행방불명, 학살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고 이러한 사실들이 기록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대다수의 경우에 우리는 기록되는 과정을 거쳐야 이동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등록되어야 ‘온전한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등록된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었고,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될 수도 없었다.
 광주에 살면서 학교나 집, 전시관 등에서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만, 고아, 부랑자, 넝마주이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것은 영화 〈김군〉(2018)을 봤을 때였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이들 존재와 역할이 잘 이야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러 연구를 참조하는 과정에서 나는 떠돌았던 이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집단수용시설로 보내지거나, 혹은 도시에서 점점 바깥으로 밀려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슬픈 공통점이었다. 떠돌았던 몇몇 이들은 자신의 이주 경력이나 이동을 많이 하는 직업적 특성(쓰레기 수거, 구두닦이 등)으로 인해 민주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이동성을 지녔기 때문에 기록되지 못했다. 운동 주체들 내부에서도 이들은 손쉽게 경계 대상이 되곤 하였다. 기록은 가해자 편일 뿐만 아니라 피해자 중에서도 이름 있는 자들의 편이었다. (p.1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