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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각본 / 김지혜 / 창비

 

 18세기 말, 여성의 삶을 가족에 종속시키는 사회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페미니즘 초기 저서의 표현은 강렬하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1792년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미덕’의 이름으로 작용하는 종속의 기제를 비판한다. 여성의 온화함과 온순함을 칭송하는 사회적 조건이 “여성들의 지성은 짓밟고 여성들의 감각은 예민하게 함으로써 여성들을 노예화”한다고 비판한다. 인간을 종속시키는 힘은 물리력만이 아니라, 순종을 여성의 가치로 미화하는 사회적 규범 속에도 숨어 있다는 지적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69년에 발간된 『여성의 종속』에서 “실질적으로 결혼제도야말로 우리 법체계 안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노예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직설한다. 그런데 여성에게 강요된 “족쇄는 그 성질이 다르다”라고 말한다. 여성이 “강요에 의한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인 노예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혼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타인의 삶에 종속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p.34-35)

 

 오히려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구호는, 이 사회가 평등을 추구한다면 맞서고 해체해야 했을 가족질서가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을 간접적으로 일깨운다. 이 구호를 들으며 성소수자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생긴다면, 먼저 며느리는 여자, 사위는 남자여야 한다는 관념을 의심하고 질문해보면 좋겠다. 며느리의 역할을 남자가 하면 왜 안 되며, 사위가 여자이면 무엇이 문제인가? 며느리와 사위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인가? 원치 않는 며느리나 사위를 반대할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불변의 가치인가? (p.40)

 

 생각해보면, 아이를 낳는다는 건 불확실한 세계를 여는 일이다. 태어나는 아이가 어떤 아이일지,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양육자의 상황이 어떨지,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양육자는 현재 상황을 토대로 미래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만일 현재의 세상이 불평등하고, 양육자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나아질 전망이 없다면 어떨까? 물론 자녀에 대해 예측할 수 없는 부분도 많다. 그럼에도 양육자가 제공하는 ‘가족’이라는 환경이 자녀의 삶을 거의 결정해버리는 사회라면 그 사회에서 자녀를 낳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국가적 위기를 논하며 출산을 압박하는 사회 분위기는 어떤가. 정부와 언론은 저출생이 계속되면 인구구조가 변화하면서 사회보장 지출이 증가하고 경제성장률이 저하될 우려가 있다고 거듭 말한다. 정책적으로 타당하고 필요한 분석일 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이유로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건 좀 다른 문제다. 저출생을 극복해야 할 이유가 사회적 부양과 경제 발전을 담당할 인력 확보를 위해서라고 하면,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의 가치는 그저 노동력에 불과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건 노동력 생산의 의미가 된다.
 출생하는 아이의 입장으로 관점을 돌리면, 사람의 탄생을 맞이하는 마음이 어떠해야 할지 다르게 보인다. 국가의 존속과 발전보다는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존엄하고 평등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양육자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도 행복한 시간을 나누며 성장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된다. 사람을 그 자체로 존엄하게 여기지 못하고 도구로 취급하는 사회에 기꺼이 태어날 아이가 있을까. 자신이 어떤 삶의 제비를 뽑을지 모르는 불평등한 세상에 나오기로 마음먹는 일이 쉬울까. 어쩌면 지금의 낮은 출생률은,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든 존엄하고 평등한 삶이 보장되는 사회가 될 때까지 세상에 나올 수 없다는 아이들의 절박한 집단행동일지도 모른다. (p.63-65)

 

 재생산 권리를 보장한다는 건 임신·출산에 관한 개인의 결정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여 출생하는 사람을 존엄하고 평등하게 대우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차별을 용인하고 묵인할 때에는 누군가의 출산을 막는 일이 아동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처럼 보였겠지만, 차별과 맞서기로 결정한다면 양육자의 권리가 곧 아동의 권리이고 그 가족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모든 사람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된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가 출산을 할 수 있는 세상은, 성별이라는 오래된 구획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일 수 있다. (p.94)

 

 현모양처로 상징되는 신사임당은 유신체제에서 적극적으로 소환되었다. 박정희 정부 아래 1970년부터 신사임당 동상이 세워지고,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이 추진되며, 1977년 강원도 주문진에 사임당교육원이 개원했다. 강원도는 1975년부터 시작된 신사임당상을 매년 수여하여 2023년 현재 제49회를 맞이한다. ‘강원특별자치도 신사임당상 조례’에 의하면, 수여 대상은 “어진 인품과 부덕을 갖춘 훌륭한 어머니로서 지역사회 발전과 향토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여 모든 여성의 귀감이 된 사람”이다.
 현모양처 교육은 민주화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최근까지도 학교에 “현모양처의 요람”이란 문구가 걸려 있고, “착한 딸, 어진 어머니” “부덕을 높이자” “여성의 참모습을 갖자” 등의 문구가 교훈에 남아 있다고 보고된다. 이를 바꾸려는 움직임도 있다. 부산의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전교 회의와 투표를 거쳐 교훈을 수정한 일이 알려지기도 했다. 1977년 개교 당시 제정된 교훈이 “슬기롭고 알뜰한 참여성”인데, “알뜰한 참여성”이란 문구를 바꾸어 2019년 “슬기롭고 따뜻한 참사람”으로 개정했다고 한다.
 현모양처 교육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현모양처’라는 여성상은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여는 열쇠였다. 하지만 철저히 성별분업에 기초한 교육목표였고, 여성의 역할을 집안으로 한정했다. 외면적으로 보면 평등을 추구하는 듯하나 여성의 자리를 가족으로 한계짓는 교육이라 처음부터 모순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오랫동안 사람들은 여성이 대학을 다닐 만큼 세상이 평등해졌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대학 졸업장으로 좋은 집안에 시집가는 것을 이상적인 삶이라고 말해왔다. 모순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익숙하고 당연해 보이는 생각이었다. (p.112-113)

 

 메리 브린턴과 이동주는 한국과 같이 전통적인 성역할 이념을 고수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우호적인 국가에서 특히 출생률이 낮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 자체가 출생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여성에게 여전히 가사노동의 책임을 맡겨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사회에서 출생률이 낮아진다는 ‘상식적인’ 결론이었다. 이런 현상이 평등으로 가는 과정에서 과도기적으로 겪는 몸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브루노 아르피노 등은 27개국의 데이터를 통해 성평등 태도와 출생률의 관계를 분석했는데, 국가가 전통적인 성역할 태도에서 벗어나는 초기에 합계출산율이 떨어지는 현상을 관찰했다. 하지만 이후 사회적으로 평등의식이 정착하면서 합계출산율이 반등하여 높아지는 U자형 변화가 있었다.
 한국도 곧 성별분업 이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출생률이 반등하게 될까? 아직까지는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2021년 양성평등 실태조사를 보면, 가사·돌봄을 ‘전적으로 또는 주로’ 아내가 담당한다는 응답이 68.9퍼센트로 압도적이었다. 맞벌이 부부여도 60퍼센트 이상이 ‘전적으로 또는 주로’ 아내가 가사·돌봄을 맡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성은 독립을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데에는 남성 84.7퍼센트, 여성 89.2퍼센트가 동의했다. 여성의 경제활동을 당연시하면서도 여전히 성별분업의 이념을 버리지 않는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이런 이율배반 속에서 고용상의 불평등은 계속되고, 여성에겐 일도 가족도 불안한 삶의 조건이 된다. (p.117-118)

 

 한국 정부도 스웨덴 모델을 소개하려고 시도한 일이 있다. 2019년 여성가족부는 ‘나다움어린이책’ 사업을 통해 성교육을 위한 도서 134종을 선정해 일부 초등학교에 배포했다. 그중에는 1971년 덴마크에서 발간된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와 2001년 스웨덴에서 발간된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이란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각 덴마크 문화부 아동도서상과 스웨덴의 아동문학상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 등을 수상한 책으로,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사랑은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며,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과 삶의 양식이 있다고 알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내용이라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2020년 8월 25일 한 국회의원이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이 두 책을 비롯한 일부 선정도서들을 문제삼았다. 도서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는 몸과 성관계를 직접적이고 즐거운 일로 묘사해 아동의 “조기 성애화”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도서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은 “동성애를 미화”한다고 했다. 책에 “아주 비슷한 사람들이 사랑할 수도 있어. 예를 들면 남자 둘이나 여자 둘이”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여성가족부는 이 두 책을 포함해 7종의 책을 초등학교에서 회수했다.
 한국사회가 성교육을 불필요하게 여기는 건 전혀 아니다. 적어도 90년 이상 성교육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듯이, 실제로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다만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스웨덴 모델처럼 성을 둘러싼 죄의식과 수치감을 없애고 개인의 성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성교육에 관해 반복되는 담론을 보면, 스웨덴과는 정반대로 성에 관해 죄의식과 수치감을 심어줌으로써 성에서 최대한 멀어지게 만들려는 목적이 컸다고 생각된다. (p.129-130)

 

 이상한 일이다. 학교는 학생의 결혼 가능성이나 가족의 위신과 이해관계가 없다. 학교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개인의 재능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개발하며, 공동체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민주시민의 소양을 갖도록 학생을 교육하는 기관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학교는 가족윤리를 수호하는 일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것일까? 만일 학교가 가족질서를 유지하는 소임보다 개인의 교육받을 권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학생이 임신을 했다거나 연애를 한다는 이유로 교육 기회를 빼앗지는 않을 것이다. 학교는 가족이 아니라 교육기관이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학교가 성적 통제를 수행하는 기관이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학생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에서 추진하는 학생인권조례가 등장할 때마다 격렬한 반대가 제기되곤 하는데, 주요한 이유는 성 문란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성 문란이란 주로 동성애와 임신·출산을 지칭한다. 한 예로, 2018년 경남학생인권조례 공청회 현장에는 “학생에게 섹스·임신 출산이 웬말이냐” “성관계, 임신 권리, 동성애 옹호 조장 (…) 아동 청소년의 교실 붕괴 조장” 등의 피켓과 현수막이 등장했다. 이런 반대가 결국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무산시켰다.
 이와 상반되게 인성교육을 진흥한다는 ‘인성교육진흥법’은 국회에서 출석인원 199명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2015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세계 최초라고 하는 이 법의 목적은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을 갖춘 국민을 육성하여 국가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함”이다. 인성교육의 목표인 핵심 가치·덕목은 “예, 효,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 등의 마음가짐이나 사람됨”이다. 민주시민의 덕목만이 아니라 유교사상에 기초한 예와 효도 포함된다. 이 법에 따라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에서는 매년 인성교육계획을 수립하여 교육을 실시하고, 핵심 가치·덕목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하여야 한다.
 여기서 예와 효를 교육한다는 의미를, 단순히 사람 사이의 예절이나 부모에 대한 존경을 가르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지 의문이다. ‘인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교육이 유교적 가족질서를 근본적인 도덕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무시할 수가 없다. 공교육이 ‘충’과 ‘효’를 강조함으로써 국가권력에 순응하는 전체주의적 국민을 길러내려 한 유신시대의 역사도 있다. 위계와 복종에 기초한 가족 이념을 오늘날 반복함으로써 추구하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p.143-145)

 

 가족을 통한 계층 세습은 가족끼리 재산을 공유하게 돕는 이런 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일반적인 사회관계와 달리 가족 사이에는 부양의 명목으로 돈이 상당히 자유롭게 이동한다. 노동의 대가로 소득을 쟁취하는 치열한 사회에서, 당당하게 불로소득을 요구하는 세계가 가족이다. 이렇게 설계된 제도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족에게 더 유리하게 작동한다. 가령 교육비에 지출할 재력이 충분한 가족은, 교육비에 대한 세금도 감면받으며 부모로부터 자식에게로 사회경제적 지위를 대물림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부모는 자식에 대한 부양의무를 충실히 수행한 훌륭한 양육자라는 도덕적 인정도 받는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세금을 면제받거나 공제받는 게 무슨 혜택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통상 국가가 직접 자금을 제공하는 방식만을 지원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때때로 국가는 세금을 감면함으로써 같은 효과를 얻는다. 연말정산에서 부양가족공제를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부양비용을 지원하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후자의 방식은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이라야 혜택을 누린다. 그렇지 않은 이는 혜택과 무관하다. 게다가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가족에게 받을 수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얻어야 하는데, 그럼 이자든 세금이든 지출해야 할 수 있다. 가난해서 돈이 더 많이 드는 아이러니다. (p.161-162)

 

 2008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법적 성별변경을 위해 이혼을 강제하는 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독일은 2017년이 되어서야 동성결혼을 인정하게 되었으니, 당시로서는 한국처럼 ‘동성혼의 외관’이 문제되었다. 하지만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한국의 대법원과 다르게, 이혼을 강제하는 것이 독일의 헌법인 ‘기본법’이 보호하는 결혼생활을 침해한다고 보았다. 원치 않게 이혼을 하고 결혼제도가 제공하는 법적 보호를 박탈당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보았다. 이성결혼이라는 외관이 아니라 실재하는 가족생활을 보호하기로 한 것이다.
 이어 2011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성별변경을 허가하는 조건으로 성확정수술을 받고 생식능력을 제거하도록 요구하는 법에 대해서도 위헌이라고 판결한다. 국가가 강제로 수술과 불임을 요구하는 건 신체의 온전성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로 인해 트랜스젠더가 자녀를 낳고 키울 가능성이 생기고, 이것이 기존의 가족질서에 어긋나게 되었다. 하지만 성별이 달라져도 양육자-자녀 관계가 변치 않도록 법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며 문제삼지 않았다. 여기서 양육자-자녀 관계란 성별에 의한 부/모 역이 아닌 실질적인 양육의 책임을 의미했다.
 한국의 대법원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인 2011년 내린 결정에서 성별정정을 위해 신청인이 결혼하지 않은 상태일 것과 미성년 자녀가 없을 것을 요구함으로써, 동시대에 반대되는 경로를 택했다. 독일이나 한국이나 모두 개인의 성별변경이 가족관계 속에서 미치게 되는 영향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독일은 공문서상 개인의 성별이 변해도 법적으로 배우자나 양육자-자식 관계가 변치 않도록 보호하는 방식을 채택했고, 한국은 공문서상 성별을 바꿀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독일은 성별에 관한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고 실제 가족생활을 보호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한국은 가족관계등록부에 ‘보이는’ 가족관계를 ‘정상’으로 만드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당시 대법원이 자녀가 겪을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염려하면서 한 말을 다시 천천히 들어보자. “미성년자인 자녀는 취학 등을 위해 가족관계증명서가 요구될 때마다 동성혼의 외관이 현출된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 문구는 트랜스젠더의 가족뿐만 아니라 ‘정상’에 속하지 못하는 다른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즉, 한부모가족, 이혼가족, 혼외출생자 등 가족 형태를 이유로 차별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족관계증명서는 문제가 된다. ‘동성혼의 외관’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탈’한 가족의 ‘외관’은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겪는다. (p.180-182)

 

 그 결과는 무엇보다 아동에게 영향을 미친다. 가족각본은 아동에게 불평등하고 가혹한 사회를 만든다. 이 말이 의아하게 들릴 수 있다. 앞서 본 것처럼 2011년 대법원은 사회적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배려라며 ‘동성혼의 외관’이 드러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2015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오히려 정반대로,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동성결혼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성결혼만 인정하면 동성커플의 자녀가 “자신의 가족이 어딘가 부족하다는 낙인”을 겪게 되므로, 아동이 해를 입지 않게 동등한 가족지위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아동들이 가족 배경을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차별을 겪는다. 아동이 겪는 온갖 놀림과 괴롭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족 형태, 가족소득, 가족 구성원의 특징 등 가족에 관한 이유 때문인 경우들이 많다. 가족의 상황이 아동들 사이에 권력관계를 만든다. 흔히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며 운명으로 받아들이곤 하지만, 이는 가장 부정의한 불평등이기도 하다. 어느 가족에게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누구는 존중을 받는 반면 누구는 무시를 당하고, 누구는 풍족한 기회를 얻는 반면 누구는 생존도 어렵다면, 벌거벗은 아기 때부터 우리의 몸에 계급이 새겨져 있다는 뜻인 거다.
 2장에서 나눈 혼외출생자 이야기나 3장에서 나눈 ‘혼혈인’, 한센인, 장애인 등의 이야기는, 부도덕하거나 열등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불행이 아니라, 가족각본이 만들어낸 불평등의 결과였다. 한부모가족, 입양가족, 재혼가족, 이주배경가족, 조손가족, 비혼가족, 동성커플가족, 트랜스젠더가족 등 모든 가족은 가족의 ‘위기’나 ‘해체’, 혹은 ‘붕괴’의 결과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 양식이다. 그런데 가족각본이 이러한 삶을 열등하고 비정상적이라고 규정하여 낙인을 새기고 차별을 정당화한다. 국가가 특정 가족 형태를 ‘건강가정’이라고 명명하며 ‘만들어내는’ 이 불평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 (p.190-191)

 

 장경섭은 ‘가족도덕’의 회복을 강조하는 정치적 기조의 이면에, 국가가 사회보장 책임을 축소하면서 이를 합리화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한국의 공공부문 지출 수준은 낮은 편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문 지출의 비중은 프랑스 31.6퍼센트, 독일 26.7퍼센트, 일본 24.9퍼센트, 스웨덴 23.7퍼센트, 영국 22.1퍼센트 등이고, OECD 평균이 21.1퍼센트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공공부문 지출은 GDP의 14.8퍼센트에 불과하다. 한국은 사회보장에 필요한 비용을 아끼고 가족에게 돌봄의 책임을 맡김으로써,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렇게 기업 역시 오랜 시간 돌봄의 책임을 피하며 이익을 누렸다. 돌봄을 ‘사적인’ 가족의 문제로 분리시키고 여성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 의지한 결과, 기업은 돌봄에 관해 신경쓰지 않고 노동자의 노동력을 한껏 사용할 수 있었다. 기업은 돌봄의 책임과 무관하다는 생각에서, 여성을 결혼과 육아를 이유로 차별하고 남성에게 과도한 노동시간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국가의 ‘가족 정책’은 여전히 가족이 공동생활을 위한 시간을 갖도록 제도를 마련하는 일보다, 아동을 돌봄 기관에 맡김으로써 국가와 기업이 노동력을 확보하게 만드는 데 집중되어 있다. 돌봄을 국가와 기업을 포함한 모두의 책임이자 개인의 권리로 인식하고 함께 연대하게 될 때, 비로소 불평등한 돌봄의 시간도 재배치될 수 있을 것이다. (p.199-200)

 

 이 책을 쓰며 인용한 문헌들에서 보듯, 이미 수많은 연구자와 활동가 들이 가족제도를 비판적으로 연구해왔다. 놀랍도록 풍부한 연구들을 감탄하며 읽고 정리하면서 생각했다. 가족제도에 대한 논의는 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지 못하는가? 가족생활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 경제, 국방, 교육 등 다른 의제보다 가족을 덜 중요하게 다루는 관념 자체가 말해주는 현실이 있다. 가족은 여전히 국가를 위해 유용한 인력을 생산하는 수단이며, 헌법이 요구하는 가족생활의 보장은 아직도 국가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
 합계출산율 1명 미만의 시대는 이토록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사회에 아이를 낳으라는 불가능한 요구와 함께 계속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의 저출생이 국가적 위기라면, ‘인구’가 줄어서가 아니다. 웬만해서는 사람이 태어나 살 수 있는 땅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돌봄의 공동체가 시간과 마음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구정책은 가족정책이 아닌데,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는 사회를 또 반복하며 우리 삶의 시간은 흘러간다. 그래서 묻고 싶다. 이제 우리, 가족각본을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요? (p.21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