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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자격 / 희정 / 갈라파고스

 

 사람들은 어디서든 일하고 있으면서 여자가 가야 하는 일자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 사무실에 퀴어가 없다고 생각하고, 장애인하고는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일하는 한 평 일터에도 수많은 정체성이 있다는 사실을 잊거나 모르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하여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일의 영역에서 다양하거나 고유한 특성을 인정받기보다 ‘골골대는’, ‘굼뜬’, ‘미숙한’, ‘사고 치는’, ‘문제 있는’ 또는 ‘별난’ 사람으로 취급된다.
 세상의 평판에 자신을 맞추지 못하는 이들은, (뻔한 표현이지만) 맞지 않는 기성복에 몸을 구겨 넣고 출근을 한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매일 출근하는 일은 고역이다. 자기반성도 해보고 저항도 해보고 무시하기도 하고 극복하겠다며 발버둥 치기도 한다. 무엇을 하건 가만있진 않는다. 가만있으면 돈을 벌 수 없고, 버틸 수 없고, 살아갈 수 없다. 내가 살펴볼 것은 이들이 가만있지 않기에 일어나는 충돌과 협상이다. 사람을 좌절시키고 학습시키는, 그럼에도 때론 버틸 수 있게 때론 성취하게 하는 그런 일들. (p.8-9)

 

 그리고 나에겐 나의 노동 현장이 있었다. 종종 지인들에게 이런 농담을 했다. 나는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쓰기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기록하는 분야가 노동이다 보니, 쓰는 글마다 과로사회에 대한 비판이 빠지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속도, 방향, 시간 등 뭐 하나 도마 위에 오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과중하게 일했다. 나를 야근시키는 악덕 사장이 바로 나 자신이라 농하는 같은 처지의 사람이 주변에 수두룩했다. 주로 프리랜서나 시민 사회 단체 활동가들이었으나, 자발적 과로는 이들만의 일은 아니었다. 기업에 걸맞은 인재가 되길 넘어 나 자신을 기업처럼 운용하라고 하는 세상이었다. 프리랜서건 자영업자건 정규직 사원이건 자기 자신의 악덕 사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늘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이상할 것이 없이 과로했다. 나의 사장은 변덕스러워서 어느 날은 일만 해서 우울했으나 어느 날은 열심히 살지 않아서 우울했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자책하고 우울함에 시달리는 것이 현대인의 특성이라고들 했다. 나는 지극히 현대인이었다. (p.18-19)

 

 회사원들의 첫 직장 근속 평균이 1년 2개월이라고 한다. 취업 준비 기간이 평균 2년인데, 막상 직장이라는 곳에 들어가면 그 시간의 반 토막밖에 다니지 못하고 그만둔다. 직장이란 그런 곳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두 달은 너무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헝클어진다. 인사팀도 의아했는지 미리를 호출했다.
 “왜 그만두려 하냐고 묻더라고요. 이제 입사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그만둔다고 하니까. ‘이런 좋은 직장을 왜?’ 이런 분위기. 퇴근이랑 업무랑 이런저런 게 불합리하다고 말했는데, 그 사람들 중 아무도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신입이니까 당연하죠.’ 이런 식.”
 미리에겐 좋은 직장의 기준이 달랐다. 미리가 견딜 수 없었던 건, 막내 직원이기에 퇴근 시간 후에도 남아야 하는 부조리함과 윗사람들에게 성실함을 인정받아야 하는 직장 문화만이 아니었다.
 “퇴근을 제때 하는 분들이 계셨거든요. 그분들은 무기계약직이었어요. 그분들을 두고 ‘저 사람들은 너랑은 다르다. 너는 공채로 뽑혔고 저들은 아니니까. 너는 남아서 일을 배워야 한다. 그 사람들보다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기분이 나빴죠. 그 사람들도 같은 팀이고 직책도 같은데. 우리는 저 사람들과 다르고 여긴 ‘우리’ 회사라고 하는 게. 이걸 너무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게 기분이 나빴어요.”
 미리에게서 좀처럼 낯선 퇴사 이유를 듣는 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 일하던 곳에서 미리는 경리 직원이었지만, 포장 작업반으로 불려 가는 일이 더 잦았다. 생산 업체를 겸한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미리를 불편하게 한 것은 근로계약과 다른 업무 지시가 아니었다. 비닐 포장재를 하루에 몇천 개씩 버려야 하는 곤혹스러움이었다. 자신은 이런 소비를 지양하는데 회사에 가서는 내내 쓰레기를 만들어야 했다. (p.27-28)

 

 “알바할 때 보면 사장들도 웃겨요. 젊은 알바생을 원하잖아요. 그 청년이 알바를 열심히 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이것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알바는 미래에 뭔가 더 괜찮은 일을 하기 위해 임시로 하는 일로 취급하니까요.”
 미리는 한때 청년 창업자들의 지원을 돕는 업무를 맡았었다.
 “학생들이 지원금을 받으려면 창업 계획서를 써내야 해요. 의지, 열정 이런 걸 본다고요. 그런데 지원하는 사람들도 창업을 진심으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단지 스펙의 일부니까.”
 스펙으로 수치화되는 열정의 점수를 세다 보면, 노력을 믿지 않지만 노력해야 한다. 젊은 진취성은 이력서에 적히고, 이미지화된 노력은 포트폴리오에 알차게 담긴다. 도전, 진취, 열정, 성실이라는 청년의 이미지마저 스펙을 이룬다. 꿈꾸는 자아를 잃지 않으면서도 생산적 성취를 이끌어내는 젊음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욕망을 건든다. 미라클 모닝, 갓생, 독기라는 이름을 달고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만 추앙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성실한 젊음의 이미지가 놓이는 장소가 사회이고, 이 사회에서 성실은 시민권의 발급 조건이다. (p.32)

 

 이번에는 일하고 있어도 일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다. 효빈은 관광학과를 졸업한 후 방과후교사로 일하면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3년 이상 병행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너무 성실한데? 이 사람이 인터뷰 콘셉트에 맞는지를 의심하고 있는데 효빈은 ‘성실하지 않은 청년’이라는 내 말에 “느낌이 딱 왔다”고 했다.
 “그거 뭔지 알아요. 노력하지 않는 거. 열심히 사는데 노력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거. 엄마나 아빠, 어른들 눈에는 제가 열심히 살지 않는 거예요. 못마땅한 거죠. 제가 아침에 출근하고 이런 게 아니니까. 부모님은 저만 보면 가만있지 말고 뭐라도 하라고 하세요.”
 방과후교사 일을 하며 카페 아르바이트를 겸하게 된 이유가 바로 ‘아무것도 안 한다’는 눈총 때문이라고 했다. 성실은 효빈이 획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취업은 언제 하니?” 늘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하게 된 방과후교사가 자신의 종착지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란 평가는 억울했다. (p.41)

 

 효빈의 부모님 눈에 기간제 일자리는 성장이나 성취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효빈이 웹 개발자 양성 과정을 수강하자 훈계는 멈췄다. 어쩌면 효빈보다 부모님 쪽이 조금 더 ‘요즘 사람’이겠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기간은 예비 기간이 아니다. 노동 능력을 증대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거치는 투자의 시간이다.
 이 시기는 미래의 소득을 위한 자연스러운 경제행위의 일환이 된다. ‘인적자본’에서 기인한 관점이지만, 한편으로는 미래를 위해 지금의 시간을 ‘투자’하는, 어찌 보면 전통적인 가치관(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떠올려보자)이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시간을 직선으로 만들어버린 이후 현재는 늘 미래를 위해 감내할 무엇이었다.
 그런데 취업 준비마저 투자의 개념이 되자, 어떤 커다란 책임 하나가 사라진다. 기업이 ‘예비 노동자’를 훈련시키는 데 시간과 비용을 들일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취업 경쟁이 과열될수록 기업은 이른바 ‘경력 있는 신입’을 맞이하며 비용을 절감한다. 이제 오직 개인이 무엇을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투자할 것인지의 문제만 남아버렸다. 취업 준비 기간은 개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자원을 운용하고 투자하는 능력 발휘의 시간이 되었다. 그 결과, 효빈은 스스로 자신의 성실함을 부정하게 되었다. (p.43-44)

 

 그의 걱정은 현실적이다. 남녀 임금 격차를 비롯한 여성을 향한 수많은 차별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혼자 살거나 여자들끼리만 살기 위해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그렇게 따진다면 사회적 소수자들은 모두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장애인도, 질환자도, 성소수자도. 취약한 사람이 ‘남들처럼’ 살려면 더 많은 자본이 있어야 한다. 더 많이 가질수록 취약함은 희미해진다. 예를 들어, 젊은 몸을 숭배하는 사회에서 노인은 소수자이지만, 돈 많은 회장님은 노인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노인으로서의 취약함은 그의 자본 앞에서 가려진다.
 이렇게 사회적 문제가 개인의 자금력 문제로 치환된다. 늙을수록, 아플수록, 외로울수록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 오래된 말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관계와 평등, 사회적 안전망임을 잊게 한다. (p.48)

 

 “처음 여기에 올 때, (동료들과) 헤어질 때 잘 헤어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일을 시작했거든요.”
 일터에서 좋은 헤어짐을 꿈꾸며 과정을 함께 밟아가는 일. 나는 거기에 ‘관계’라는 이름을 붙인다. 문화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해석에 따르면 그것은 “의무, 신뢰, 헌신, 목적과 같은 장기적 가치”로 불릴 것이다. 하은과 동료들에게 그것은 ‘노동’을 새로이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이들에겐 관계를 맺는 일도 노동이다. 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센터)을 유지하고 지키고, 일할 자격을 살아갈 권리로 전환시키는 일. 이를 무엇이라 부르건, 분절과 속도를 원하는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에서는 쉬이 얻을 수 없는 가치이다. (p.57)

 

 스스로에게 ‘성실한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성실은 눈금 없는 자이다. 그것으론 무엇도 잴 수 없음을 알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그 자를 가져다 댄다. 이 글을 쓸 즈음, 화제가 된 드라마가 있었다. 〈안나〉. 계급 상승의 욕망으로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만드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유미(안나)가 손에 쥐고 싶어 한 것은 커다란 평수의 아파트와 외제 차, 고급스러운 장신구만이 아니었다.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였다. 거짓말 하나만으로 자신을 보는 눈빛부터 달라지는 사람들이었다.
 3년을 계약직원으로 근속한 유미가 하루 휴가를 내겠다고 하자, 관리자는 말한다.
 “너희는 왜 약속을 안 지키니? 게으르고 멍청한데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살려니까 그 모양인 거야.”
 유미는 그동안 성실했다고! 내가 대신 항변해주고 싶을 정도로 억울했다. 그러나 그 항변이 소용없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무시할 이유가 있어서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무시할 수 있는 위치가 있을 뿐이다. 특정 계급은 낙인찍히기 좋다.
 유미는 저런 평가(질)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가난하니까.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하니까. 그리고 내 삶의 통제권이 나에게 있지 않으니까. (p.60-61)

 

 앞서 언급했던 일본의 ‘자유와 생존의 메이데이’ 시위에서 한 참가자는 이렇게 말했다.
 “임금노동이 아닌 일만이 우리 ‘잡민’의 희망이 아닐까?”
 주류가 되길 거부하는 잡민들은 시위에 나가고, 생존을 하고, 춤을 추고, 나와 타인을 돌본다. 나답게 살려고 애쓰고 때때로 공동체를 생각한다. ‘그런 것도 노동으로 인정해야 해?’라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과학자의 설거지와 엄마의 설거지는 다르지 않다”라는 제목을 단 칼럼은 그런 이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왜 어떤 설거지는 위대한 노동이고 어떤 설거지는 허드렛일인가.” 화학자이자 양육자인 필자는 자신의 연구 과정을 나열한다.
 “출근 → 실험복 착용 → 메인 실험 → 실험 테이블 정리 → 실험 후 정제 → 실험 테이블 정리 → 연구 노트 정리 → 사용한 실험 도구 세척 → 퇴근”
 정리와 세척이라 고급스럽게 부르지만 결국 청소와 설거지이다. 우리가 공적인 영역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모든 곳에 세척(설거지)과 같은 일이 존재한다. ‘돌봄’, ‘수발’, ‘감정’이란 이름을 붙여 등급이 낮은 노동으로 취급하는 일들이다. 사람들은 ‘허드렛일’이라 착각하지만, 이런 행위가 없다면 일의 세계는 멈출 것이다.
 세상 ‘살림’도 마찬가지다. 휠체어 이용자와 속도를 맞춰 걷는 이가 없다면, 광장에 나온 장애인의 연설을 귀 기울여 듣는 이가 없다면, 그들이 광장에서 돌아간 집에 저녁 식탁을 차리는 이가 없다면, 그 식탁을 차리는 이의 성별과 노동을 말하는 책이 없다면, 그 책을 책방 책장에 꽂아 정돈하는 이가 없다면 세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것은 노동이 아니다’라고 선언할 권한이 있을까. 무엇이 노동인가. 이 질문은 세상을 작동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그 작동 체계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 선택하게 한다. (p.63-64)

 

 프랑스의 노동법은 청년의 권리로 “일자리 자율성을 향한 계약된 동반 활동 여정”을 명시했다. 이때 무업의 상태는 사회적 손실이나 즉시 해소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의 순간들, 즉 여정이 된다. 이동, 주거, 여가 등 생활 전반을 비롯해 정치적 참여까지, 이 모든 것의 지원은 청년인 그가 사회적 구성원으로 ‘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취업 준비를 하지 않은 시간에 대해 ‘그냥 쉬었다’고 말한다. 노동시장 진입을 위한 활동 외의 것은 어떤 의미도 인정되지 않은 채 ‘그냥’이 되어버린다. 앞서 소개한 니트컴퍼니의 모토는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백수가 된다.”
 우리가 언젠가 백수가 된다면, 필요한 것은 백수가 되지 않는 법이 아니라 백수로 잘 지내는 훈련이 아닐까. 백수로 지내도 괜찮은 사회를 꿈꿀 순 없는 것일까. 덧붙이자면, 2019년 교육·직업훈련·취업 상태가 아닌 장애 니트 청년은 전체 청년 장애인의 절반(49.3퍼센트)에 다다랐다. (p.68-69)

 

 무턱대고 낳아야만 삶에 ‘불행’이 찾아오는 건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삶을 좌우하는 사건은 교통사고처럼 온다. 계획된 대로 인생이 굴러간다는 생각은 착각이거나 환상이다. 문화 연구자인 사라 아메드는 사회적으로 약속된 행복의 자리는 행복에서 우연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우연성을 제거할 경우 사람들은 행복을 “내가 한 일의 결과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진다. 그렇게 행복은 자기통제의 기술을 운용한 결과로서 인식된다. 마찬가지로 우연이 제거된 불행은 그 사람의 잘못된 선택과 노력 부족의 탓으로 비추어진다. ‘정상가족’의 형태를 온전히 갖추지 않은 가정의 구성원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처럼 말이다. (‘성숙하질 못했다’, ‘인내심이 없었다’, ‘남자에게 의존적이다’, ‘여자 보는 눈이 없었다’….) 개인은 잘못되지 않은 선택을 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그렇게 행복과 불행이 온전히 개인 차원의 책임이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적 노력과 자기관리(통제)밖에 없다. 아니다, 자기관리라니. 한국 사회에서 이 일은 ‘가족관리’가 되었다.
 이 사회에서 누군가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원의 대부분은 왜 ‘가족’에서 나와야 하는가. 안정적인 가족이 없다는 말은 왜 모든 자원을 박탈당했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야 하나. 세상을 아무리 경기장으로 보지 않으려 해도, 경기에 동참하지도 못한 채 트랙 밖에서 머무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 트랙 안에서는 가족 경영이 활발하다.
 그러니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구호가 불편한 까닭은 생명권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이 구호가 무시하는 권리는 ‘한 사람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권리’, ‘개인이 살아갈 조건을 공동체(보통은 국가라고 인식한다만)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일명 사회권이다. 낳을 조건을 운운하는 말은 그 권리를 박탈한다. 삶을 영위할 권리는 자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p.115-116)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 특히 여성과 청년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는데, 그래서 성폭력 관련 문제가 생겼을 때,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문제 제기를 한단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쟤가 이상한 애라서가 아니라, ‘정상’적인 애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하는 평판이 있어야 하는 거지. 그걸 인정받기 위해 일도 더 열심히 하고 그랬어.”
 말할 ‘자격’을 얻기 위한 분투. 그 자격을 포기한 이들은 낙오되고, 자격에 저항하는 이들은 불순하다. 자격을 얻으려면 세상의 틀에 맞춰 자신을 갈아 넣어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걸, 사람들이 내 말을 믿게 하려면. 그 사건도 내가 이만큼 신뢰도를 쌓아왔기 때문에 그 정도라도 통했다고 생각하거든. 이런 폭로 기사 나오면 진상 조사를 하는 책임 단위에서 이 기사를 쓴 기자의 신뢰도를 본단 말이야. 이전에 쓴 기사들이 내 평판이 되는 거지. 싸울 자산을 만들기 위해 평소에 열심히 했고, 실제 그게 통한다는 확인을 그때 확인했지.” (p.153-154)

 

 연우는 한동안 정신의학과 치료비를 건강보험으로 처리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후 다시 평판 조회를 당하거나 이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때를 대비해서였다. 이직이라. 권하는 말은 쉽지만, 그 길이라고 평평할 리 없다. 이 회사를 나온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다른 회사를 간다고 해도 다를 것은 없다. 이직을 생각할 때조차 절망감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갈 수 있는 회사는 한정되어 있고, 이직을 준비하는 시간 동안 나이를 착실히 먹는다. 그 말인즉, 노동시장에서의 경쟁력은 더 떨어진다는 소리.
 “더 좋은 기회로 그 사다리를 올라가고 싶어 하는데, 노력을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없고, 점점 인생이 하향 곡선을 그리는 게 아닌가.”
 퇴사, 재취업, 하향된 조건의 입사.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변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90년대생 여성 노동자의 노동 실태가 우울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박선영 연구자는 토론회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퇴사나 이직을 반복하면서 결국은 내가 문제구나. 내가 여자라서 그렇구나. 이 감각이 젠더화된 문제의식으로 발전하지 않고, 자기 부정이나 자기 책임론으로 가게 됩니다.” (p.156-157)

 

 한 기사에 따르면, 미국식품의약국(FDA)이 난치성 우울증 치료 목적으로 2019년에 승인한 ‘케타민 클리닉’은 3년 사이 20배나 증가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이 증가한 것은 국제적인 현상이지만, 이토록 급격한 성장에는 시장과 투자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미국을 비롯해 국제적으로 투자 붐이 불고 있는 영역이 바로 정신건강서비스 분야이다.
 투자의 영역은 단지 병원이나 클리닉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 내 “정신건강 관리를 지원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시장 규모만 작년 기준 42억 달러(약 6조 원)로 집계”된다. 정신질환 관련 온라인 약물 처방, 전문가 연결, 진료 중개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애플리케이션) 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투자의 집중 이면에는 과잉의 결과를 떠맡는 집단이 있다. 『도파민네이션』의 저자이자 중독의학 연구자인 애나 렘키는 “지역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정신 치료제의 처방 횟수가 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정신건강 서비스가 계급·지역 문제와 이어져 있음을 밝혔다. 정신의학과 진입 장벽이 높은 국내 상황과 차이가 있겠지만, “인종·계급적 특권이 없는 환자들의 기본적 욕구에 주목하지 않으면 약물치료만으로서의 BMT(부프레노르핀 유지 치료라고 불리는 중독 처방 치료)는 해결책이 아니라 기관의 방치와 구조적 폭력의 형태가 된다”는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p.184-185)

 

 요양보호사는 자신이 돌보는 노인을 안쓰럽게 여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지닌 나약함을 연민했다. 그래서 계약된 시간을 넘겨 일했다. 주 3일로 정해진 요양방문을 매일 하기도 하고, 불편한 몸으로도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는 어르신을 염려해 교회 가는 길에 동행하기도 했다.
 “나는 그 어른 상황을 아니까. 혼자 그 길을 간다고 생각하면 좀 그렇잖아요. 계단도 많아요. 넘어지기라도 해봐요. 그런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하지.”
 주말이면 요양보호사는 초조했다. 평일 내내 그 어르신이 자기 없이는 생활하기 어렵다는 걸 보고 왔는데, 주말은 휴일이라고 돌보는 일을 멈춰야 한다니.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무급노동을 하러 가는 이도 있다.
 “동네잖아요. 가는 길에 들르는 거예요. ‘어르신 뭐 하세요?’ 하고 고개라도 내미는 거죠.” (p.191-192)

 

 정년을 65세로 연장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크다. (국민연금 지급 연령이 65세로 늦춰진 영향이다.) 옆 나라 일본도 연금 수령 연령이 65세로 변동됐다. 다른 나라들도 연금 보험료율을 올리거나 수급 개시 연령을 늦추는 등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정년 연장은 국제적 추세이다. 그런데 이 문제로 홍역을 치르는 국가가 있다.
 2010년, 프랑스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양질의 일자리, 65살이 아닌 60살 은퇴”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사르코지 정부가 퇴직과 정년 수급 연령을 높이겠다고 발표한 직후의 일이었다. 이때 62세로 연장된 정년은 이후 10년 넘게 쟁점이 된다. 2023년에도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왔다. 정년을 현행 62살에서 64살로 늘리겠다는 마크롱 정부의 계획에 반발한 것이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오래 일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이 이른 퇴직을 꿈꿀 수 있는 이유는 공적 연금 소득대체율이 65퍼센트에 이르기 때문이다. (한국은 12~25퍼센트에 불과하다.)
 고령화와 장기 불황으로 연금 납부자들의 부담이 커진 것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프랑스 국민은 70퍼센트가 넘는다고 조사되었다. 시위 참여자는 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정년 연장에 맞선 파업에 동참하는 의외의 집단이 있다. 바로, 고등교육기관 학생들이다. 이들은 국민연금 적자 부담을 짊어져야 할 ‘젊은 세대’다. 그런 이들이 앞장서 정년(연금 수급 연령) 연장에 반대한다.
 이를 두고 국가와 사회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정부에 맞서 ‘사회적 연대를 중시하는 유럽식 모델’을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저항이라 분석하는 이도, 프랑스 국민이 불공정 자체에 분노하고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
 “프랑스 정부안대로 수급 개시 연령을 늦출 경우 유독 불리해지는 계층이 있다. 블루칼라, 육체노동자들이다. … 이들의 은퇴 시기는 비교적 빠를 수밖에 없다. 이들을 더 불리한 연금 체계에 빠뜨리는 게 ‘과연 공정하냐’는 질문을 던진다.”
 분노의 원인이 무엇이건,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대상이 늙어가는 ‘개인’들일 뿐 아니라 세대를 막론한 공동체임을 엿볼 수 있다. (p.216-217)

 

 “예전에는 지방선거에 후보가 나오면, 이런 이야기들이 들려왔어요. ‘누구 후보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살을 몇 킬로나 뺐다.’ 이런 이야기들이 칭찬으로 나오고. 그걸 보고 사람들이 ‘이 사람 정말 프로답다’, ‘정치를 잘할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아, 선거를 나가려면 샤프한 이미지가 필요하겠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살을 뺐다는 얘기가 들리는 정치인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이것이 소라가 적극적으로 정당 활동을 하면서도 선거에 적극 나갈 생각을 못 했던 이유이다. 이미지 정치라는 말은 익숙하고, 선거 기간에 정책 홍보는 물론 후보의 외양마저 관리하는 선거 기획사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소라가 활동하는 곳은 진보 정치를 추구하고 있는 당이었지만 선거는 세상 사람들에게 표를 받는 현실에서 이뤄진다. 후보자들은 ‘예뻐’ 보이기 위해 체중 감량을 하는 것이 아니다. ‘보기 좋아 보이도록’ 살을 뺀 것이다. 부지런하고 빠릿빠릿하고 지적이고 강단 있는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서는 얼굴 살이 없는 편이 더 낫다고, 이른바 옷태가 나는 몸이 낫다고 판단한다. 그러니까 ‘적합해’ 보이기 위해서 체중 관리를 한다.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독일 여성 정치·경제 아카데미(EAF)는 독일 여성 정치인의 60퍼센트가 정치적 성과와 외모의 상관관계가 실재한다고 말했음을 밝혔다.
 살을 빼는 일이 독한 것(의지가 강한 것)이라면 살을 빼지 ‘못하는’ 일은 의지박약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절제력이 없어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고 평가받는 사람을 일터가 인정해 줄 리 없다.
 “몸이 크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나를 나태하다고 생각할까 봐. 이를테면 늦잠을 자서 지각을 하면 면목이 없잖아요. 그런데 면목 없다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나를 게으르게 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더 컸어요. 지각과 내 몸을 ‘게으름’이라는 단어로 연결할까 봐…. 그게 걱정이 됐었어요. 지금은 안 그런데.”
 나를 게으르게 보지 않을까, 둔하게 보지 않을까. 과체중인 사람에게서 아침부터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고, 이는 ‘자기관리에 서툰 인간’이라는, 그를 향한 판단으로 이어진다. 누워 있기를 더 좋아하는 게으른 사람. 먹을 것을 절제하지 못하는 통제력 없는 사람. 운동을 꾸준히 못 하는 끈기 없는 사람. 음식을 탐하는 탐욕스러운 사람. (이상하다. 우리는 더 많은 돈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음식을 더 먹고 싶은 욕망은 탐욕스럽다고 한다.) (p.225-226)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비만 혐오를 다른 차별과 같은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 뚱뚱하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고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쉽게 살이 찌는 생활 습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는 내용을 보면, 이 사회가 말하는 ‘긍정적 인간상’과는 거리가 먼 행동 패턴이 나열되어 있다. 부정적 행동들의 결과로 살집이 있는 몸이 만들어진다고 결론 내린다. 개인의 체질, 선호하는 경향, 질병이나 호르몬의 변화에 따른 체중 증가·감소 같은 것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p.229-230)

 

 이런 제목의 기사를 봤다.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폭식하나요? 정신질환입니다.” 거기에 다른 제목을 붙이고 싶다. “폭식하나요? 그건 정체성과 계급의 문제입니다.” 누가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는가, 누가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유리한가, 누가 균형 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가. 노동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시간을 포함한다. 먹고 자고 살아감으로써 노동력을 재생산할 때 그 조건은 소득과 계급, 그리고 정체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p.231)

 

 ‘성과’를 증명하기 위해선 몸이라는 상징물도 협조를 해야 한다. 끼니보다는 일이 우선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몸, 철저한 자기통제력을 보여주는 몸, 아침에는 어학원에 가고 야근이 없는 날에는 헬스장에 갈 것 같은 몸. 그 몸은 건강하고 날씬해야 한다.
 1장에 등장하는 미리는 이런 말을 했다.
 “회사에 화장을 안 하고 다니다가 어느 날부터 ‘그래, 나도 제도권에 한번 편승해보겠어’ 하는 마음으로 화장도 하고 옷도 정장 같은 걸 입기 시작했어요. 놀랍게도 그 이후부터 부장님이 저한테 ‘요즘 회사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거 같다, 일도 열심히 하고’라는 거예요. 난 변한 것이 없는데.”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우연들이 모여 직장 문화가 된다. (p.236)

 

 자본은 누군가의 노동과 연관된다. 당연히 음식이라는 상품도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국내 농업·어업 산업 종사자 중 많은 수가 이주노동자이다. 특용작물 재배업의 이주노동자 고용 비율은 47퍼센트이고, 원예는 37퍼센트, 채소·산나물 채집은 36퍼센트, 김 양식업은 무려 95퍼센트이다.
 그러나 정작 이주노동자가 신선한 채소나 해산물을 섭취하긴 어렵다. 채소는 많이 먹어도 든든하게 느껴지지 않는 데다, 쉽게 상하기까지 한다. 손질하는 데도 오래 걸리고 비싸다. 그뿐 아니다. ‘이주와인권연구소’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간소한 취사도구조차 없는 숙소에서 지내는 이주노동자가 다섯 명 중 한 명꼴이었다. (p.245)

 

 ILO 아·태 지역 총회에서 정부와 노동계의 연설이 있던 그해, 국회에서는 ‘국제 노동 정책 포럼’이 열렸다. 이날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윤효원 실장은 한국 정부가 비준하지 않은 핵심협약 105호를 설명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한국에서 ‘핵심협약’으로 불리는 조항들은 ‘핵심’이 아닌 ‘기본협약’일 뿐이라고. 이어 그는 이 열 개의 기본협약 외에 ILO 협약의 대다수를 이루는 기술협약(Technical Conventions)에 대해서도 말했다.
 “노동자가 생애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의 세계(the world of work)’에서 일어나는 핵심 문제들인 근무 시간, 고용, 직업훈련, 임금, 안전보건, 사회보장, 이주, 모성보호와 관련된 협약들은 모두 기술협약으로 분류됩니다.”
 기술협약 178개 중 한국이 비준한 조항은 22개이다. OECD 국가 평균 비준 수와 비교했을 때 3분의 1 수준이다. 이 중 ‘일의 시간’과 관련된 8개 협약 가운데 한국이 비준한 협약은 1935년에 채택된 ‘주 40시간’ 근무를 규정하는 협약인 47호 하나뿐이다.
 기술협약은 ‘시간, 고용, 임금, 안전, 이주’ 등으로 노동권을 세분화하고 있다. 190호(일의 세계에서의 폭력 및 괴롭힘 근절을 위한 협약), 118호(사회보장에서 내외국인의 균등 대우에 관한 협약), 121호(업무상 재해 급여에 관한 협약) 등은 한국 정부가 국제 기준을 따르겠다고 밝힌 적 없는 내용들이다. (p.268-269)

 

 ‘일의 세계’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은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서였다. “일의 세계에서 소수자들이 겪는 문제는 ‘노동’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소수자는 일의 세계를 먼저 겪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의 세계는 차별을 통하지 않고는 굴러가지 못한다.” 소수자들은 노동시장에 쉽게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지지만, 사실 이들은 가장 앞서 일의 세계의 작동 원리인 위계와 차별, 소외와 착취를 겪는다.
 차별과 착취를 먼저 겪는 이가 있는 세계. 그 세계에서는 ‘정상’이라고 불리는 사람도 행복할 수 없다. 운 좋게 낙인을 피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불안과 짙은 혐오다. 우리는 다른 세상을 꿈꾸기에 1급을 선별하고 1등 국민을 만드는 위계의 질서를 거부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말할 자격을 박탈하는 시선을 뚫고 이야기한다. 이 행위들이 ‘일의 세계 안에서 나다움을 지키며 타인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우리의 오롯한 권리’를 가져올 것이라 믿으면서. (p.270)

 

 언젠가부터 나에게 인터뷰란, ‘왜’라는 질문에 인생의 많은 것을 걸고 답해온 이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에서 ‘왜?’라는 물음에 직면해왔다. 사건으로부터 생겨난 상처와 고통, 치부와 흠집을 감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스스로 묻고 답한다.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세상이 정해둔 답을 좇는 일이다. 그러나 ‘사건’을 겪은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의 정답으로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들은 ‘왜?’를 묻게 된다. 그 물음의 답이 무엇이건, 그것이 변명이건 성찰이건, 세상의 답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 한다. (p.278-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