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 마틴 리스 / 서해문집
우주로 관점을 넓히다 보면 우리의 관심사가 오히려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에 집중되곤 한다. 우리의 지구가 얼마나 특별한지 깨닫고, 지구가 이 오래된 놀라운 생명의 미래를 제공할 수 있다는 비전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놓인 다가올 미래에는 훨씬 더 놀라운 다양성이 나타날 수 있다. 발전을 거듭하는 지능과 복잡성은 아직 절정에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우리 세대가 관리를 소홀히 하면 우리 자녀와 손자 손녀의 안녕을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거대한 잠재력을 잃게 될 위험이 있다. (p.88)
오늘날의 우주론과 다윈 진화론이 제공하는 파노라마, 즉 여전히 신비로운 시작점에서 원자-항성-행성으로 이어지며 창발하는 복잡성의 사슬과, 지구상에서 어떻게 생명이 나타났고 어떻게 진화했는지(이 모든 경이로움을 숙고할 수 있는 두뇌를 가진 존재를 포함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하나의 문화적인 박탈이다. 이는 국가나 신앙을 초월해야 한다. 과학적 발견과 응용은 우리 인류의 집단적 미래에 매우 중요한 만큼 모든 시민은 과학이 제공하는 관점의 범위와 한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p.105)
가끔은 ‘과학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거대한 돌파구가 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진보는 혁명적이지 않다. 대신에 이전의 개념을 확증하거나, 뛰어넘거나, 일반화하거나, (가장 자주 벌어지는 일로) 단지 몇 가지 세부 사항을 덧붙일 뿐이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중력 이론을 ‘뒤엎지’ 않았다. 물론 아인슈타인은 더 넓은 범위에 적용되는 이론을 고안하고 우주와 중력의 본질에 대한 더 깊은 통찰력을 제공했지만, 뉴턴의 법칙으로도 여전히 우주선의 궤도를 예측하기에는 충분하다. (아인슈타인 식의 정교함이 필요한 실제적인 맥락이 하나 존재하기는 한다. 위성항법시스템에 사용되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의 정확성이다. 상대성 이론에 따라 지구와 우주 궤도에서 시계가 똑딱이는 속도의 미묘한 차이를 적절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GPS의 정확도는 치명적으로 저하될 것이다.) (p.108-109)
오늘날 우리는 정부의 결정 중 점점 더 많은 것이 과학적 증거를 포함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최근의 팬데믹과 기후 변화가 우리 머릿속에서 어떤 문제보다 최전선에 있었던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보건·에너지·환경에 대한 다른 정책들 역시 과학과 관련된 차원을 가진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들에는 경제적·사회적·윤리적 측면도 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는 과학자들도 전문가가 아닌 시민으로서만 발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중이 참여하는 공개 토론이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수준을 넘어서려면, 모든 사람이 과대 선전이나 잘못된 통계에 휩쓸리지 않도록 과학에 대한 ‘감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방향을 잘못 잡은 기술의 압박이 더욱 다양해지고 위협적으로 바뀌면서, 적절한 토론의 필요성은 앞으로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 (p.128)
과학을 연구하려면 힘든 노력이 따라야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유레카를 외치는 순간’, 즉 통찰력 또한 중요하다. 이것은 예술 분야의 창의성과 어느 정도 유사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모든 예술가의 작품은 독자적이고 독특하지만 대개 계속 이어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과학자들은 실력이 그럭저럭인 사람들조차 공적인 지식의 꾸러미에 단단한 벽돌 몇 개를 얹을 수 있다. 그렇지만 과학적인 공적에는 개인의 독자성이 없다. A가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해도 대개는 B가 곧 발견한다. 실제로 발견이 거의 동시에 이뤄진 사례도 많다. 반면에 창의적인 예술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와 관련해 생물학자 피터 메더워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바그너는 ‘링 사이클’이라 불리는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를 작곡하던 중에 10년 동안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했지만, 그러는 와중에 누군가 4부작의 마지막 ‘신들의 황혼’을 먼저 완성했을까 봐 걱정하지는 않았다. (p.156-157)
과학 자문가들은 자신의 특별한 전문지식(그들의 의견이 실제로 중요한 경우가 종종 있는)을 넘어서는 영역에서는 자신이 보통 시민처럼 말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팬데믹의 맥락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핵무기, 에너지, 환경, 약물 분류, 보건상의 위험에 대한 정책적 판단에서 정치적 결정이 순수하게 과학적이기만 한 경우는 거의 없다. 윤리, 경제, 사회 정책 역시 고려해야 할 사항에 포함된다.
이러한 긴장과 갈등에 대처하는 것은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을 공식화하는 과정에서 특히 시급하다. 아무리 전 세계의 기후가 어떻게 바뀔지 그 불확실성이 최소화된다 해도, 정부가 이에 대처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것이다. 지구 온난화를 완화하는 것과 여기에 적응하는 것 사이에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또 다른 질문들도 있다. 우리의 손자 손녀들이 나이가 들었을 때 세상이 더 나빠지지 않게 하려면, 우리가 지금 얼마나 희생해야 할까? 그동안 화석연료 배출 문제를 거의 유발했던 부유한 국가들은 개발도상국에 얼마나 많은 보조금을 지원해야 할까? 우리는 청정에너지에 얼마나 인센티브를 주어 장려해야 할까? 우리는 후손들이, 우리가 지금 취하는 어떤 행동도 되돌릴 수 있을 만한 기술적인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도박을 해야 할까? 이 모든 선택에는 아직 최소한의 합의가 있을 뿐이며, 여전히 덜 효과적인 행동이 존재한다. 정부에 조언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기후과학자들은 최선의 정책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견해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표출해야지 자기 말에 특별한 무게를 두어서는 안 된다. (p.178-179)
우리는 정책을 조금 더 장기적으로 숙고해야 한다. 우리는 조상들이 남긴 유산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안다. 그런 만큼 우리 자신도 ‘좋은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미래 세대에 자원이 고갈되고 위험해진 세상을 남기지 말아야 할 의무가 분명히 있다. 오늘날 아이들은 이번 세기말까지 생존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정책 입안자들은 이 아이들의 생존 기회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삶을 고려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권고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면, 장기 공공투자 평가 기준을 정하는 영국 재무부 지침(이른바 ‘그린북’이라 불리는)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기 투자의 비용당 가치를 계산할 때 2050년까지의 미래 효용이 갖는 현재 가치를 대부분 연 3.5퍼센트만큼 깎는데, 이것은 그런 효용들이 장기적인 위협의 완화를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확실히 지나치게 높은 수치다. (p.198-199)
만약 교사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신과 다윈주의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면, 상당수 학생들은 자기 종교를 고수하고 과학을 버릴 게 분명하다. 우리가 과학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때는 원자와 같은 기본적인 개념도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존재의 어떤 심오한 측면에 대해 매우 불완전하며 은유적인 통찰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하는 회의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종교의 문화적 전통, 의식, 미적 산물, 그리고 우리를 가뜩이나 많이 갈라놓는 세상에서 공통된 인간다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막을 필요는 없다. (p.212-213)
국가적 차원에서 우리는 복원력과 효율성 사이의 균형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제조업자들이 글로벌 공급망과 무재고 방식의 적기 공급에 의존한다면, 그 사슬에서 하나만 끊어져도 취약해져서 타격이 크다. 그러니 무재고 방식의 공급보다는 만일을 위해 다량의 재고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옮겨야 한다. 또 다른 예로, 병원의 중환자실 점유율을 높게 유지하는 것은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효율적이지만, 응급 상황을 위한 여유분이 너무 적다는 의미에서 현명하지 못하다.
물론 전 세계적인 초대형 위협을 완화시켜야 한다는 것은 국제적인 도전과제다. 예컨대 인터넷을 더욱 복원성 높게 개선하고, 전 세계적으로 수십 곳에 달하는 최상위 보안(레벨4) 생물학 실험실들이 실제로 안전한지 확인하고, 세계보건기구가 신종 바이러스를 신속하게 식별할 수 있도록 자원을 확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위원회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첨단 기술이 발달하고 상호 연결된 세계는 위험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깊은 통찰력을 좀 더 발휘하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험난한 여정을 겪어야 한다. (p.221-222)
우리는 특정 연구 프로젝트가 언제, 어떻게 성과를 거둘지, 심지어 성과를 거두기는 할지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활용해서(활용할 수만 있다면) 사회적·경제적 이득을 안길 시점이 언제인지도 미리 점칠 수 없다. 하지만 성공은 양육 환경에 따라 정해진다. 왕립학회 회장을 지냈던 생화학자 에런 클루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과학이 제공하는 통찰력은 주로 문제에 대한 긴밀한 이해를 발전시킬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진 사람들, 직업적인 위험을 감수할 여유와 자유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마주하는 뜻밖의 일을 창의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온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차이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어디에서든 이들을 찾아서 키워내야 한다.
자신감과 의욕은 과학·예술·기업 활동을 막론하고 창의성과 혁신, 위험 감수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공공연하게 협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떤 성과를 특정 개인에게만 돌려서는 안 된다. 지적인 토양과 사회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사람들도 중요하다. (p.226-227)
자금 지원 기관에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지원을 할 것인지, 아니면 특정 프로젝트에 지원을 할 것인지 사이에서 지속적인 긴장을 겪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후자의 선택지가 더 흔하며 행정적으로도 깔끔하다. 그뿐만 아니라 자금 제공자가 진행 상황에 대한 분기별 보고서를 요구하고, 명시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단계를 추적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큰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이뤄지는 연구와 조사인 경우가 많았다. 활기찬 연구 그룹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사람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던지고 최신 발견에 대해 토론을 하는 건 흥분되는 일이다. 최고의 연구기관들은 모두 이런 분위기를 조성한다(나 역시 그중 한 곳에서 일할 수 있어 행운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특권적인 환경 속에서도 요즘의 젊은 동료들은 삭감된 보조금이나마 얻고자 제안서를 작성하고 고용 안정성을 위해 예전보다 애쓰는 것 같다. 이러한 걱정과 우려가 이 뛰어난 신진 연구자들의 마음을 지나치게 괴롭힌다면, 우리가 여러 문제에서 돌파구를 얻을 전망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p.228-229)
1980년대에 영국에 도입된 ‘연구 평가 시스템’은 처음에는 선의의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훌륭한 연구를 수행하는 학과에 학생당 더 많은 공적 지원금을 할당해서, 해당 학과의 교수 대 학생 비율을 개선하고 교수들에게 연구 시간을 더 확보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여전히 추구되는 목표다.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왜곡되었다. 대학 당국은 다음번 연구 평가에서 어떤 분야가 점수를 가장 잘 받을지에 초점을 맞춰 직책을 임명한다. 게다가 이런 압력은 젊은 학자들을 두 가지 비뚤어진 방향으로 이끈다. 위험성이 높은 연구를 피하고, 학생 가르치는 일을 경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구 평가를 성가시지 않게 하는 것이 대학 교육을 개선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럴 경우 헌신적인 학자들이라면, 품질 높은 연구를 하는 효율적인 대학이 가장 좋은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데 뒷받침이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의 인센티브 시스템 역시 문제가 있다. 분명히 학계에서 하는 일의 일부여야 할 광범위한 교육 업무와 장학금 업무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1960년대 영국의 대학을 확대시키기 위한 선언문인 ‘로빈스 보고서’는 학자의 임무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한 사람의 학자는 가르치는 것, 연구하는 것, 그리고 ‘반성적 탐구’라는 세 가지 임무를 가진다고 말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반성적 탐구를 힘들여 해나가는 중이다. 그것은 교육과 연구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중요하다. (p.242-243)
그렇다면 과학자들에게 주어지는 상은 어떨까? 과학 분야의 문외한이라면, 과학은 객관성이 지배하기에 운동경기와 마찬가지로 논란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과학의 특정 분야에서 어떤 과학적 진보가 중요한지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쉽다(물론 서로 다른 분야의 상대적인 지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특정한 진보에 대해 누구의 공로인지 인정하고 배분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터너상 수상자의 창작물은 수명이 짧지만 그래도 창작자 자신의 것이다. 그들이 그 특정한 예술작품을 제작하지 않았다면, 결국 아무도 그렇게 똑같이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 분야에서는 만약 A가 특정한 발견을 하지 않았다 해도 조만간 B가 그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게다가 각각의 진보는 다른 사람들의 작업에 기반을 둔다. 어떤 과학자의 업적도 진정으로 독자적인 것은 아니다. 마치 축구에서 골을 넣은 사람의 성공이 경기장의 다른 선수들, 그리고 경기장 밖의 감독과 독립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p.253)
그뿐만 아니라 노벨상은 과학의 거대한 다른 영역을 배제한다. 예컨대 수학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우주, 해양, 기후, 생태와 같은 환경과학 분야 역시 제외되었다. 컴퓨터과학, 로봇공학,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노벨상은 현재 과학에서 어떤 분야가 중요한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왜곡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병렬적으로 수행되는 작업이나 협력 작업의 공로를 적절하게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해, 과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오해의 소지를 안긴다. (p.255-256)
한 발자국 더 나아가자면, 이런 과학 논문이 얼마나 더 오랫동안 유명 학술지에 ‘출판 가능한 형태’로 남아 있을지 또한 불확실하다. 학술 논문을 처리·검토·수정하고 최종적으로 출판하는 데는 여러 달이 걸리며, 일부 분야에서는 여러 해가 걸리기도 한다. 젊은 학자들의 진로 전망이 하드커버로 찍은 한 편의 전공 논문이나 학술지에 실린 논문 몇 편의 계량 서지학적 점수에 달려 있다는 것은 분명 큰 제약이다. 제도화된 학술지들 사이에 서열이 있고, 젊은 학자들이 최상위 학술지에 논문을 싣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심각한 문제다. 내가 최근에 들었던 가장 개탄스러운 말은, “논문이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 어떻게 결정하는가?”라는 내 질문에 한 교수가 답한 말이었다. “그 논문이 실린 학술지가 결정하죠.” 게다가 대학 관리자들은 대학의 순위 등급을 높이겠다며, 단지 논문의 피인용지수를 높이기 위해 연구자들에게 미국 학술지 게재를 압박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슬픈 일이다(그리고 이 모든 지표가 부당하게도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에게 더 유리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p.268-269)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와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대학에서 과학·기술·공학·수학뿐 아니라 인문·예술 분야의 진흥을 위해서도 지속적으로 명성을 이어가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들은 이공계 분야를 뜻하는 스템(STEM: 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ematics)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의 예술(arts)의 A를 합쳐서 스팀(STEAM) 분야에 관여하는 셈이다. 이런 주제들은 시민의 한 사람인 대중이 과학이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안내한다. 과학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것과, 과학을 신중하고 윤리적으로 활용하는 것 사이에는 어느 때보다도 격차가 크다. 앞에서 나는 유전학과 인공지능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해 제어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지구 환경에 우리가 끼친 영향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를 강조했다. 이런 진퇴양난의 문제에 대한 답이 자연과학 자체에서 나올 수는 없지만, 학생들은 교육의 일환으로 이런 문제에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 (p.270-271)
오늘날 최악의 교육 불평등이 인생의 초기 단계에서(유아기부터 초중등 교육을 거치며) 각인되듯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 국가의 지리적·사회적인 전체 스펙트럼에 걸쳐 모든 학생이 학교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일은 길고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사실 이 목표는 등록금을 따로 받는 사립학교에서 학생에게 제공하는 자원과, 국가 시스템이 제공하는 자원 사이의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한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아기부터 기회를 박탈당해 점점 더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에 맞닥뜨린(그래서 두 번째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배제’로 이어질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유연한 평가 제도를 갖춘 평생 학습 및 시간제 학습 제도는 좀 더 많은 지원을 제공할 것이다. (p.276-277)
신문과 라디오가 뉴스의 주요 원천이던 시절에는 극단적인 주장을 담은 ‘가짜 뉴스’가 책임감 있는 기자들에 의해 묵살되었다. 하지만 인터넷 세계에서 이런 ‘주장’은 사람들이 클릭을 많이 할수록 더 극단적인 견해로 증폭된다. 바로 이것이 내가 과학자들의 특별한 의무를 강조해온 이유다. 과학자들은 더 많은 대중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과 언론에 관여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발견이 실질적인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경우, 그것이 유해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이롭다는 것을 확실히 밝힐 책임이 있다. 과학자들은 잠재적으로 비윤리적이거나 위험할 수 있는 과학의 응용 방식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그리고 가능하다면 관련 정보를 정부에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또한 자신들이 특정 전문 분야를 벗어나면 단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만 발언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p.289-290)
최근의 팬데믹 사태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듯이, 과학에는 결정적인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불확실성을 줄이고자 노력하는 과학자들의 견해는 특별한 무게를 가질 만한 자격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몸소 깨닫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과학에 대한 충분한 ‘감각’이 필요하다. 또한 통계 수치에 당황하지 않을 정도의 기본적인 산술 능력, 누가 봐도 믿음직스럽지 않은 인터넷 사이트의 내용을 무시하는 회의적 태도 역시 당연히 필요하다. (p.291)
마지막으로,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의 낙관적인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사려 깊고 헌신적인 시민들의 작은 모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마세요. 실제로 지금까지 그들만이 유일하게 그렇게 해왔습니다.
(p.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