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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천선란 / 허블

 

 그날 이후로 하루에 5시간씩 훈련을 했다. 5시간 내내 훈련을 한 건 아니었다. 사실 대부분의 시간을 기다리는 데에 썼다. 콜리는 긴 시간 동안 경기장에 우뚝 서서 하늘과 경기장 외벽 너머로 보이는 나무를 관찰하는 것에 몰두했다. 하늘은 매일, 매시간 색과 모양이 바뀌었다. 하늘은 파란색이었지만 가끔 보라색이나 분홍색, 노란색, 회색이 섞이기도 했다. 그렇게 섞인 색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콜리는 ‘파랑분홍’이나 ‘회색노랑’으로 단어를 합쳐서 불렀다. 세상에는 단어가 천 개의 천 배 정도 더 필요해 보였다. 동시에 걱정이 들었다. 혹시 세상에 이미 그만큼의 단어가 있는데 자신이 모르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단어들은 어디에서 알 수 있을까.
 다양한 하늘이 존재했지만 콜리는 그중에서도 구름이 선명한 날을 좋아했다. 여기서 ‘좋아했다’는 더 자주, 더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봤다는 뜻이다. 구름은 제각기 다른 형태로 뭉쳐 있었으며 저마다 두께감이 달랐다. 하늘이 평면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존재였다. 구름은 바람을 타고 흘러가기도 했다.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흐를 수 있는 물체라니. 무게가 있는 콜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루는 민주에게 구름을 만져 보고 싶다고 말했다. 민주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세상이 조금만 더 자신을 남들처럼만 대해준다면 은혜는 사이보그 따위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몇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 휠체어를 끌어주는 휴머노이드나 사이보그 다리가 아니라.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지구가 너무 많이 바뀌어야 했다. 다수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은혜는 사람들이 전가한 ‘한 사람의 몫’을 아직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다. 한 사람이 아니라 반쪽짜리 사람이랄까.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혼자 다니기 위험한 영유아처럼 은혜에게도 반쪽의 몫을 보충해줄 보호자가 늘 필요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은혜의 판단이 아닌 은혜를 지켜보는 타인의 판단이었다.

 

 “운이 나빠서 죽게 되는 경우는 단순해요. 그 좁은 마방을 벗어나 살 곳이 없거든요. 저는 안락사를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무턱대고 반대하는 건 결국 그 아이들에게 알아서 죽으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미 이 행성은 인간 중심의 행성이 됐잖아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세상 밖으로 나가면 어느 동물도 살아남지 못해요. 동물들이 살 수 있는 네트워크가 아예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을 고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다시 프로그래밍을 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이 사회가.”
 이곳이 아니라 더 좋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라며 문을 열어 주고 싶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좁은 케이지 안에서, 정해진 시각에 배식하는 기계에게 온기를 느끼겠다고 몸을 부비는 아이들을 보며 이 행성에서 인간이 사라졌으면 하고 얼마나 많이 바랐던가. 지독히도 인간 중심적인 이 행성에서 동물들은 변화의 희생양일 뿐이었다. 보호받지 못하면 살 수 없도록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자유를 주다니. 복희는 그것 역시도 착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심이라 여겼다.

 

 달리지 못하는 말들의 최후를 익히 봐왔기에 투데이를 두고 나누는 그들의 대화는 민주에게 충격적이거나 실의를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민주는 언제나처럼 씁쓸한 도라지를 씹는 것 같은 기분만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말들이 불쌍하다고 해서 민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돈이 되지 않는 말들을 경마장 측에서 계속 보살핀다면 그건 경마장의 손해였고, 그렇게 경마장 운영이 어려워지면 그 역풍은 민주에게 닿을 거였다. 민주는 말들의 관리인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마방에 갇힌 또 다른 말이었다. 사회는 개개인이 촘촘히 연결된 시스템이었고 그 선은 서로의 목을 감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끊어야 할 때 연결된 선을 과감하게 끊어야 하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죽이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이 세상에서, 아니 이 우주에서 사람만 이렇게 잔인한 거 같아요.”
 보경이 은혜에게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이 사소한 불편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은혜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정상적인 사람에게 너의 정상성은 괜찮은 것이고, 그것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은혜도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보경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가끔은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음을 확인시키는 차갑고 날카로운 창살 같다는 것을. 휠체어 덕분에 걷지 못하던 이들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게 아니라, 버스와 지하철, 인도, 계단, 에스컬레이터 때문에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기술의 발달 과정에서 은혜는 철저하게 삭제되었다. 사람들은 지하로 가라앉은 은혜를 모르는 척 외면하더니 어느 순간 휠체어에 앉혀놓고 측은하고도 안쓰러운 눈빛으로, 이 기술이 너를 구원했다는 듯이 굴었다. 이 몸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다면 애초에 생겨나지도,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였다.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켰다.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각자 살아갈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정상의’ 사람들은 모르는 듯했다.

 

 영화의 길고 잔잔한 오프닝을 바라보다가 콜리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그냥 데리고 왔다고 했잖아. 사실 그거 거짓말이야.”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연재가 이것만은 콜리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이 다 망가진 채로 건초더미에 누워서 나한테 하늘이 예뻤다고 말하는 네가 불쌍했어. 그리고 순간 내가 너를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호기심도 들었어. 그대로 내버려두면 너는 사라지겠지만 내가 데리고 오면 사라지지 않으니까. 같잖은 연민이지. 그래도 후회 안 해. 나는 내가 좋아했던 걸 그동안 싫어한다고 믿고 살았는데, 아니더라고. 너 만지면서 알게 됐어. 그리고 지금 내 말에는 대답하지 마. 명령이야.”
 콜리는 연재의 명령을 지켰지만 처음으로 명령을 어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 충동이 몸체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났는지, 콜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속에서 무언가 어긋남을 느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연재를 방해할 수 없어 가만 충동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한 번 외출하기 위해 남들보다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준비를 한다고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의지나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끝내 포기하는 경우도 많아요. 어렵거든요. 도움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길들이 많으니까요. 누구는 쉽게 수술을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그 수술은 누군가에게 불가능과 같은 비용이거든요. 그리고 또 그 사람은 우리와 같은 온전한 두 다리를 갖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다리는 형체죠. 진정으로 가지고 싶은 건 자유로움이에요. 가고자 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요. 자유를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아주 잘 만들어진, 오르지 못하고 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바퀴만 있으면 돼요. 문명이 계단을 없앨 수 없다면 계단을 오르는 바퀴를 만들면 되잖아요. 기술은 그러기 위해 발전하는 거니까요. 나약한 자를 보조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강한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연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마지막 문장까지 무사히 내뱉었다.
 “인류 발전의 가장 큰 발명이 됐던 바퀴도, 다시 한 번 모양을 바꿀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바퀴가 고대 인류를 아주 먼 곳까지 빠르게 데려다줬다면 현 인류에게도 그렇게 해줄 거라고 믿어요.”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더 많은 단어를 알았더라면 나는 마지막 순간 그들을 무엇으로 표현했을까.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 정도를 적절히 섞은 단어가 세상에 있던가.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

 

 

메이커스 랩 / 론 M. 버크먼 / 윌북

 

 애플 스토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반복, 실험, 즉흥적인 대응 등이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나아가는 창조적인 방법임을 입증한다. 점진적인 진화에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빛나는 재능과 확고한 비전을 지닌 천재’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뒤집는다. 실제로 코베와 그의 팀은 잡스와 함께 ‘응용 제작applied making’의 핵심, 즉 스케치하고,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모형을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고, 시험하고, 연구하고, 질문을 만들어내고, 뜻밖의 발견을 하고, 동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과정을 거쳤다.
 애플 스토어 탄생 이야기에는 내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만들면서 알게 되는’ 과정의 많은 요소가 담겨 있다. 이 개념은 창조성에 관한 논의에서 놀랄 만큼 홀대받아 왔다. ‘만들면서 알게 되는’ 과정은 만드는 행위 자체를 통해 백지 위의 불확실성에서 창조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뛰어난 예술가와 디자이너 들의 이야기를 통해, 창조성의 본질과 그것을 발휘하게 되는 과정의 비밀을 낱낱이 밝히는 것이다.

 

 시각예술가 앤 해밀턴은 창작 공간의 불확실성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이런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자기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을까요? 창작 과정에서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는 어떻게 대응할까요? 무엇을 만들지 모르는 상태에서 창작이 이루어질 공간은 어떻게 구축해야 할까요?”
 이 예술가들의 이야기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들이 창조적인 활동과 발견, 만드는 것과 아는 것 사이를 연결 지었다는 점이었다. 칼더는 철사를 이용한 작업, 즉 창작 재료를 조작하는 물리적 행위를 통해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칼더는 ‘만들기 때문에 생각한다’. 에코는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줄거리의 핵심적인 부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쓰기 때문에 안다’. 해밀턴은 ‘알지 못하는’ 공간을 우선 구축하고, 만드는 활동 자체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발견한다. 그는 ‘만들기 때문에 발견한다’.

 

 작가는 어떻게 글을 쓰기 시작할까? 리처드 휴고의 말을 빌리면 작가를 ‘자극하는 주제’, 즉 시작점은 무엇일까?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았다. “백지를 마주했을 때, 무엇이 창작에 나서도록 시동을 걸지요? 빅뱅 같은 위력적인 힘인가요? 아니면 막연한 느낌인가요?” 각양각색의 대답이 돌아왔다. 인생에 관한 철학적인 질문에 자극받는 작가도 있고,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에 자극받는 작가도 있다. 관찰, 경험, 동요하는 감정, 아이디어, 리드미컬한 충동, 또는 어떤 ‘나타남’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소설가 에이미 벤더는 강제적으로 시작점을 만들었다고 했다. “저는 매일 글을 써요. 무조건 한 시간 반 동안은 책상 앞에 앉아 있기로 했어요. 우습게 들리겠지만, 처음에는 진짜로 다리를 의자에 묶어뒀었어요.” 벤더의 방법은 빅토르 위고가 서재 문을 걸어 잠그고 벌거벗은 채로 글을 썼다는,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위고는 하인들에게 자신이 일정 분량의 글을 쓸 때까지 옷을 돌려주지 말라고 엄명했다고 한다.
 벤더는 위고보다는 조금 더 균형 잡힌 방식을 마련해놓았다. 그는 글을 쓰든 안 쓰든 정해진 90분을 신성하게 여기고 지킨다. 무얼 하든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만 한다. 벤더는 스스로 정한 시간을 창작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한 시간 반이 끝나는 시간을 적어둬요. 그리고 그 시간을 지켰지요. 언젠가 정신분석 전문의 애덤 필립스가 쓴 지루함에 관한 에세이를 읽었어요. 지루한 상태에서 오히려 창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지루함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정말로 제 글이 바뀌더군요. 따분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고 마음이 들썩거렸지만 정해 놓은 규칙을 따랐어요. 그러자 과거나 습관에 얽매이지 않고 한결 새로운 글을 쓰게 됐고, 자유로움을 느끼며 많은 양의 원고를 완성할 수 있었어요. 이런 방식이 지금껏 여러 권의 책을 쓸 수 있게 해주었지요.”

 

 스턴과 벤더는 모두 ‘꾸준함’을 강조했다. 스턴은 훌륭한 작가이자 스승인 엘리 위젤 밑에서 공부하던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위젤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조언을 한 가지 하겠네. 만일 자네가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한다면, 매일 글을 쓸 시간을 만들어야 하네. 20분이든 4시간이든 괜찮아. 그 시간에 완전히 쓰레기 같은 글을 쓰든, 엄청난 대서사시를 시작하든 상관없어. 매일 쓰기만 한다면 말이야.”
 스턴은 “그 말을 들은 게 20년 전이었어요. 그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써왔죠”라고 말했다.
 규칙적인 리듬에 맞춰서 글을 쓰는 것 또한 창조가 이루어지는 미지의 공간에 들어서는 방법이다. 글쓰기를 근육 단련에 비유하는 작가들도 있다. 운동선수가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듯 작가는 글쓰기로 글을 단련한다. 처음에는 고통스럽기 마련이지만 나중에는 튼튼하고 유연해지며 더 나아가 우아해진다. 매일 쓰는 훈련은 작가를 위한 기본 트레이닝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