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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이후의 어른 / 모야 사너 / 엘리

 

 18세가 된 청소년들이 고정불변의 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명시적으로 인정한 사례 중 하나로는 1989년 아동법이 있다. 이 법은 보호시설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18세가 되어도 스스로 삶을 꾸려가라는 요구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인정할 것을 사회복지 기관에 명한다. 또한 이 법은 지방자치단체가 이런 상황에 놓인 청년에게 ‘그의 복지에 필요한 만큼’ 지속적으로 도움을 제공할 법적 의무가 있다고 법령 문구로 규정한다.
 ‘그의 복지에 필요한 만큼’이라는 구절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나는 묘한 감동을 느꼈고, 지금도 읽을 때마다 같은 기분이 된다. 언어의 딱딱함에 가려져 있지만 그 말들 속에 깊은 연민과 이해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청년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는 그들이 개인으로서 어떤 사람인지, 또한 어떤 경험들을 해왔는지에 따라 얼마간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고, 이런 지원을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라는 올바른 인식이다. 의회의 편의나 예산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 청년의 여러 욕구에 따라, 그의 복지에 필요한 만큼―최소한 이론적으로는―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감수성과 뉘앙스는 우리 사회와 제도가 어른다움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누락되기도 한다. (p.34)

 

 샘은 세상에 필요한 건 평화로운 혁명, 즉 제도의 변화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변화가 그런 식으로 올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어른들은 혁명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아요. 점진적인 변화를 믿죠. 저는 그 생각을 존중해요. 그리고 그 같은 사고 틀에 사실인 면도, 실용적인 면도 많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그런 틀이 우리를 구속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를 파괴한다고요. 그레타 툰베리를 보세요.” 샘이 말한다. “툰베리는 정말로 급진적인 변화, 꼭 필요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건 어른들이에요.” 샘에게 아이들은 꿈꾸고,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고, 지금 당장 바로잡아야 하는 부당함을 알아차릴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들은 현실에 안주하는 공모자가 되어 뭐든 있는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고, 변화의 과정도 자연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된다. “쳇.” 샘이 말한다. “그런 것도 존중은 하고, 맞는 말이라는 것도 알지만요, 그건 저한테는 상처가 되는 강압적인 힘이에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완전히 다른 가능성들로 가득한 왕국도 있다고요.” (p.82-83)

 

 윌슨은 아이들에 관해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흥미를 가지는 일로 매일을 보내지만 어른처럼 행동하는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어른의 일, 이른바 어른의 일이라는 것들…… 제 말은, 마치 세상이 기울어진 언덕이고, 어른이 되면 어떻게든 정상에 오르게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오히려 그럴 때가 ‘척’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하찮기 짝이 없는 일들이 중요한 척하면서 휴일이나 주방용품 같은 것들을 자랑하는 세상으로 들어가 버리는데, 저는 그런 데는 딱히 조금도 관심이 생기지가 않네요.” 윌슨의 관점은 샘의 관점을 떠오르게 한다. 두 사람은 모두 아이들에게 있는 중요한 무언가가 어른들에게는 없다는 통찰을 전하고 있다. 윌슨에게 이른바 어른의 삶이란 살면서 해야 하는 지루하고 행정적인 일들의 정수로, 콘텐츠 보험에 들기 위한 서류 작업 같은 것이다. 윌슨은 우리가 삶의 경험들의 결과로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도 “그와 동시에, 우리가 여섯 살이든 예순 살이든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윌슨의 말을 들으니 그에게 어른다움이란 그저 샐러드에 올린 잣 같은 것에 불과한 듯하다. 그에게 어른의 자아는 위니콧이 말한 ‘거짓 자아’처럼 진짜인 것을 덮고 성장을 가장하는 무언가를 의미한다. 윌슨은 우리 모두가 정말로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어른이 무엇인지에 대한 어떤 개념 같은 건 우리 모두한테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심지어 가장 안정되고 엄청나게 성숙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제 막 어른인 척하는 법을 배웠다는 게 보이리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일종의 갑옷 입는 법을, 어른의 역할을 수행하는 법을 배운다. “그게 제가 다른 무엇보다 아이들 이야기를 쓰기 좋아하는 이유인 것 같아요. 아이들은 그렇게 ‘척’을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p.116-117)

 

 “어른이 된다는 것에는 사실 자기 자신을 돌볼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도 포함되는 것 같아요.” 애덤에게 어른다움이란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자각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참을성을 갖고 자신을 대하고, 자기가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은지 시간을 들여 살피고, 조심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일해서 다시 번아웃에 빠지지 않도록 그만 퇴근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그건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과 관련된 거예요”라고 애덤이 다시금 말할 때, 어른이 무엇인지―콘텐츠 보험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 인식은 조금 더 날카로워지고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지난 한 해 동안 애덤은 그 말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자신이 옛 습관으로 슬쩍 돌아가려 한다는 신호들을 알아차리는 방법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은 상황에서 다르게 반응하는 법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일을 하는 동안 그에게는 모든 걸 걸고, 밤을 새우고, 뭐든지 할 수 있는 영웅이 되려고 애써도 될 것 같은 순간들이 찾아온다. 하지만 애덤은 그런 충동을 알아채고 스스로 멈춘다. 그러고는 이렇게 되뇐다. “아니. 난 저걸 하지 않을 거야. 난 집으로, 아내한테 돌아가서 다른 일들을 할 거야.” 이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이 애덤에게 의미하는 바다. (p.125-126)

 

 우리의 대화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 중 하나는 카티 윌리엄스가 슬프고 분노에 찬 얼굴로 이렇게 말할 때다. “왜 저는 돈 문제나 집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냥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는 부모를 가질 수 없었던 걸까요. 저를 그냥 어린애로 있게 해주고, 책을 읽게 해주고, 나가서 친구들과 어울리게 놔둬주는 부모를요.” 이것은 슬픔이다. 어른의 영역에 너무나도 일찍, 출구도 없이 갇혀버린 것에 대한 진정한 슬픔이다. 그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몹시 부럽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요. 평범한 어린 시절이란 『신데렐라』만큼이나 동화 같은 얘기죠.” (p.141-142)

 

 블랙스톤의 연구에 따르면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성장 경험이 될 수 있다. 그가 대화를 나눈 많은 사람들은 그 결정을 내리는 데 수년이 걸렸으며, 자신에게 옳다고 느껴지는 선택에 도달하기 위해 많은 심사숙고와 계획과 생각이 필요했다고 말해주었다. 블랙스톤은 이런 생각은 부모가 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설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부모가 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규범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된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에요.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깊이 생각한다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부모가 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기회가 더 많다고 생각해요.” 그가 설명한다. 적어도 그가 인터뷰한 한 여성은 부모가 되지 않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자신이 아는 부모가 된 사람 중 누구보다도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고려를 거쳐 이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니 마음속에서 어떤 해방감 같은 게 든다. 나만의 결정을 내릴 때 어느 쪽으로든 강요받은 적은 없었지만, 아마도 나는 이런 식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과정임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전에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 그 자체로 발달에 중요한 경험이고, 많은 성장 경험이 필요한 어른스러운 결정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그 성장 경험에는 그저 많은 사람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친척들이 원하는 것이나 친구들이 하고 있는 것 대신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알아내는 일, 너는 누구이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네 인생에서 원하는 건 무엇이냐고 자신에게 진정으로 물어보는 일 등이 포함된다. (p.195-196)

 

 “저는 아동기와 성인기를 발달단계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정신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코언은 말한다. 두 개의 자리에 관한 클라인의 이론과 다르지 않다. “그 두 상태는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행하는 위계 관계가 아니라는 거죠. 제가 ‘저는 어른이에요’라고 한다면 그건 제가 어른의 정신 상태에 들어서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뜻입니다. 제가 걸어가는 걸 보면, 혹은 사진 속에서 저를 보면, 아마도 한 명의 어른이 보일 겁니다. 그 나이에 들어서 있고, 그 나이에 맞는 정신 상태와 스타일에 들어서 있고, 그 나이에 맞는 겉모습을 걸치고 편안함을 느끼는 누군가가요.” 나는 그저 나 자신을 조금 더 괴롭히기 위해, 정신분석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어른의 정신 상태에 들어가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설명해 달라고 코언에게 부탁한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과도한 걱정을 짊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해야겠네요. 나 자신 이외의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거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아를 연기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딱히 느껴지지 않는 감각이죠. 그건 타인들의 기대로 인해 과도한 부담을 느끼지 않는 일종의 마음과 정신의 독립이에요.” 그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너무도 간절히 원하고 갈망하는 것이어선지, 그 말들을 듣고 있기가 제법 힘들다. 그리고 나의 다음 질문―그렇게 어른이 되는 과정에는 무엇이 포함되나요?―에 대한 코언의 대답은 그 뒤로 몇 달 동안이나 내 머릿속을 맴돈다. 그것은 내가 상담을 받기 시작한 뒤로 내 정신분석가에게서 다른 형태로 내내 들어온 말이고,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는 무언가인 것 같다. 코언은 말한다. “거기에는 점진적인 분리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규정하려 드는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분리죠.” 그것은 “제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죠?”라는 내면의 마케팅 담당자의 질문에서 벗어나는 것, 그 대신 “나는 누구지?”라고 묻는 것이다. (p.272-273)

 

 코언이 하는 다음과 같은 말에 나는 너무도 깊이 공감한다. “우리의 교육제도와 자녀 양육 경험에 있어서의 태도가 그런 것과는 너무나도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나머지, 우리는 아이들이 인생에서 기본적으로 할 일이 어른들을 기쁘게 하는 거라는 메시지를 항상 그애들에게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마지막으로 나 자신을 위해 작품 하나를 완성시킨 게 언제인지, 성인이 된 뒤에 그런 일을 한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 지금껏 내 글쓰기의 동력은 타인들을 기쁘게 하는 작품을 창조하고자 하는 충동이었다. 그 충동은 어떤 면에서는 생산적이어서 내가 직업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하도록 도와주기도 했지만, 나를 나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그것은 내가 하는 행동의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영향받는다는 뜻이었다. (p.274-275)

 

 심리학자 올리버 로빈슨이 나와의 인터뷰를 끝내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마지막 2분 동안 이 말을 하고 싶네요. 심리학에는 ‘만족’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라는 다소 지나치게 단순화한 가정이 존재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는 그렇지요. 하지만 또 어떤 환경에서는 ‘불만’ 또한 긍정적인 결과가 됩니다.” 심리학과 정신의학이 잘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기분이 안 좋은 상태를 끊임없이 병리화한다는 점이라고 로빈슨은 생각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 슬프거나 불행하거나 불안한 느낌을 질병의 증상으로, 약물로 치료해 없애버려야 하는 잘못된 무언가로 여기는 것이다.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고 로빈슨은 말한다. “기분이 안 좋은 상태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화를 추진하는 요인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강하게 든다면, 자신이 부서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삶에서 바꿔야 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보세요.”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극도로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경험이며, 우리는 그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로빈슨은 말한다. “우리 삶의 모든 지점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과 움직임을 보살피는 법을 배우고, 우리를 퇴행시키기보다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해주는 변화를 적절히 만들어가는 법을 배우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아가거나 퇴행하거나,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똑같은 자리에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행복하다면, 우리는 계속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소망으로 그 상태를 유지하고 하던 일을 그저 계속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게 행복의 즐거움이죠. 행복의 어리석은 면이기도 하고요.” 어리석은 이유는, 당연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애를 써도 시간은 지나가고,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p.277-278)

 

 “그 부분은 여전히 극복하는 중이에요. 제 생각에 사람들은 시간이 충분히 있고, 서두를 필요도 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도 된다는 걸 깨달아야 해요. 우리 두 사람은 지금의 순간들이 여기 있을 때 그것들을 즐기는 게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일 뿐, 다른 누구에 대한 의무도 아니라고 여기는 단계에 도달했어요.” 그리고 여기에는 음악이 도움이 된다. “음악을 연주하는 일이 멋진 이유가 한 가지 있다면, 그게 전적으로 현재에 속해 있는 일이라는 점이에요. 연주 수준이 어떻든 현재의 순간 속에서 그 일을 즐기게 되죠. 그런 일은 굉장히 드물다고 생각해요.” 그레이엄에게 일이란 언제나 만족을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예정이고, 어떤 글이 발표될 예정이고, 보조금을 따낼 예정이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식으로 끝이 없었죠.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일을 즐길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해야 해요. 저는 아마도 그게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것은 차단되죠.” (p.314-315)

 

 “저는 살아가는 일에 대해 너무도 강렬한 기쁨의 감각이 생겼고, 살아가는 일과 삶의 진짜 가치를 알게 됐어요. 심지어 나무들에 달린 잎들이 너무나 강렬해 보이는 것만 봐도 그렇죠. 지금의 저한테서는 벌써 희미해져가고 있지만, 그런 감각은 이런 걸 깨닫게 도와주는 것 같아요. 삶이라는 것에 위태롭고 절박하다는 느낌을, 그리고 그것이 소중하다는 느낌을 부여해주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삶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거죠.”
 이것은 우리가 ‘성공적으로 나이들기’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면서 우리 몸과 마음이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때,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노화에 저항하려 할 때 잃게 되는 것이다. 나이듦에는 해변에 비치는 햇살만큼이나 여러 가지 상실도 뒤따른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과, 노년으로부터 도망침으로써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늦추려 하거나 마라톤복 상의가 암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믿고 바라는 것은 다르다. 그 두 가지는 같아 보일 수도 있다. 그저 60대에 들어선 한 사람이 달리기를 하러 나가는 거니까. 하지만 전자는 그레이엄이 설명했듯 건강의 가치를 제대로 알게 되는 뜻깊은 경험일 수 있는 반면에, 후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현실로부터의 정신없는 도피일 수 있다. (p.321-322)

 

 성장해 어른이 되는 과정에 대해 프로인트가 들려준 이야기가 또 하나 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떠오른다. 프로인트는 이런 변화에 핵심적인 것이 다음과 같은 깨달음이라고 했다. “‘바로 이거야. 이건 시험 가동을 해보는 게 아니야. 이게 내 인생이야. 내 인생은 시간이 지나 언젠가 시작될 그런 것이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말하자면 삶이 시작되기를, 진정으로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삶의 끝까지 걸어가죠. 자신이 삶의 한복판에 있다는 걸 모르는 채로요. 하지만 그들을 위해 다가오는 또 다른 삶 같은 건 없어요.”
 이건 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른다움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때가 되면 내 인생이 시작될 거라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얼마나 무지한 생각이었는지! 프로인트에게 어른이 되는 일의 일부는 이 같은 깨달음이다. “이게 나야, 그리고 이게 내 삶이야. 이건 시험 가동도 게임도 아니고, 이게 내 삶이야.” 프로인트는 이 깨달음이 우리를 좀 더 어른스러운 상태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것은 ‘아 맙소사, 내가 정말 죽게 되겠구나’라는 깨달음이다. (p.328-329)

 

 기타야마는 설명한다. “서구 문명은 슬픔과 행복이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에 몹시 강렬하게 몰두하는 경향이 있어요. 슬픔은 여기 있고.” 그가 한 손으로 손짓하며 말한다. “행복은 여기 있죠.” 그가 다른 손으로 먼 곳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리고 옮겨가는 과정은 굉장히 직선에 가깝다는 거예요. 같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면 제대로 가고 있는 거고, 준비가 되어 있는 거예요. 하지만 궤도가 한번 다른 곳을 향하면 곤경에 처한 거죠. 신체적 고통도 나쁘고(넌 상태가 좋지 않아) 정신적 고통도 아주 나쁜 거예요(넌 상태가 좋지 않아!).” 이것은 너무 명백해서 말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우리에게는 명백해 보이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하고 자명한 진실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에게 진실은 아니어서 실은 말할 필요가 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동아시아의 철학은 그와는 매우 다르다고 기타야마는 말한다. “보름달은 다음날 그것이 완전한 상태를 잃어가기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형태죠. 그건 우리가 몹시 행복할 때 주의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훌륭한 은유예요.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 사랑이 보름달처럼 느껴진다면 조심해야 해요. 내일이면 이지러지기 시작할지 모르니까요.” 우리 할아버지가 이 말을 들으셨다면 “사람은 기분이 좋아야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거란다”라고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기타야마는 똑같은 순환 이론을 행복과 슬픔의 문제로 확장해 본다면 우리의 마음을 약간은 보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지금 당장은 비참할 수 있지만, 생존하고 있는 한, 음식을 먹고 충분히 잠을 자는 한 내일은 더 나은 하루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 불행 속에도 약간의 희망은 있는 거죠.” (p.339-340)

 

 우리는 기분이 나쁜 상태가 나쁜 것이라고 가정하는데, 어떤 면에서 서구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 문화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 문화에서 그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고, 그저 존재하는 하나의 상태일 뿐이다. 정신분석을 받고 정신분석에 관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결과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내 인간관계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라는 명제다. 괴로워하는 일, 기분이 나쁘다고 느끼는 일, 고통을 느끼는 일, 상실을 느끼는 일, 채울 수 없는 욕구를 느끼는 일, 이 모든 것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다. 우리는 삶의 어느 시점에선가 이런 감정을 경험할 것이고, 그 감정은 우리를 상처 입힐 것이다. 상처받는 일은 괜찮다. 나쁜 게 아니다. 나쁜 게 있다면 정말로 기분이 나쁠 때 그렇게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자신을 속이는 일, 기분이 나빠져서는 안 된다고 되뇌는 일,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대신 나쁘게 함으로써 우리 안의 나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풀어버리려 하는 일, 혹은 약물이나 알코올을 사용해 나쁜 감정들을 마비시키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일들이야말로 우리에게 손상을 입히는 일들이다. (나를 포함한) 내담자들은 종종 심리치료가 자신의 고통을 없애주기를 바라지만, 정신분석학자 윌프레드 비온은 “분석의 경험이 고통을 느끼는 내담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 즉 나쁜 감정을 느끼는 일을 더 잘하게 만드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쓰고 있다. 기분 나쁜 상태가 사실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이드는 일 역시 사실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이듦을 이유로 기분이 나빠지는 일을 피하기 위해 영원히 젊은 상태에 머무를 수 있다고 자신을 속인다면, 음, 사실이 그렇지 않다고 판명될 때 정말로 아주 힘들어질 수 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의 고통스러운 진실에 직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애도하고 발전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한다. 고통을 느끼는 일은 우리를 상처 입히지만 성장을 촉진한다. 그것을 피한다면 우리는 어른이 되는 일로부터 뒷걸음치게 되는 것이다. (p.342-343)

 

 나는 체포되었던 일에 관해 뉴먼에게 묻는다. 그가 말하는 방식에서 그 일이 몹시 중요한 경험이었음이 느껴진다. 그 사건의 여파 속에서 뉴먼은 그것이 연장자가 되기 위한 일종의 입회 의식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 일이 ‘도움이 되는’ 일이었음을 이해한다. 체포되는 일이 젊은 사람의 앞날에 끼칠 악영향보다 뉴먼의 앞날에 끼칠 악영향이 훨씬 적기도 했고, 뉴먼은 백인 중산층 노인으로서 경찰의 수중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안전함을 느낄 수 있기도 했다. 뉴먼은 겁이 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제가 거쳐야 하는 일이었어요. 전에는 경찰과 문제가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제가 권위를 겁내는 편이라서요. 그건 한발 걸어 나갈 준비를 하는 것 같은 일이었어요.” 용기란 두려움을 느끼고 그 두려움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일을 함으로써 생겨나는 것 같다. 그것이 연장자로서의 용기다. 뉴먼은 자신과 멸종 반란 모임의 동료 회원들이 런던시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했던 그날 일어났던 일에 관해 들려준다. 그들은 경찰이 시위자들을 에워싸고 있던 곳에 도착했고, 랍비 뉴먼은 ‘신성한 의지’라고 불리는 어떤 글을 읽었다. “멸종 반란 모임 회원 한 분이 쓰신 아주 강력하고 짧은 글인데, 가끔씩 회원들끼리 모임 전에, 우리를 그 순간 속에 단단히 발 디디게 하기 위해 읽곤 하죠. 내용을 조금 소개해보면 이런 거예요. ‘이 순간, 잠시 시간을 내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를 돌아봅시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자양분을 주는 이 행성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뿐 아니라 모두를 위해 이곳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걸 떠올려봅시다.’ 이것보다 그렇게 길진 않아요.” 뉴먼은 시위에서 이 글을 큰 소리로 읽었고, 그가 읽기 시작하자 주위의 모든 사람이 한 구절 한 구절 그것을 따라 하면서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러다가 소리가 굉장히 커졌어요. 경찰은 우리를 괴롭히며 길 건너편으로 데려가려 하는 일을 멈췄고, 그 지역 전체가 신성한 의지의 소리로 가득 찼어요. 우리가 읽기를 끝냈을 때, 저는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는 그 땅 위에 있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아스팔트 포장재로 된 바닥이었지만 흙으로 된 땅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죠.” 경찰 한 명이 다가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체포될 거라고 부드럽고 정중하게 알렸다. “그리고 저는 말했죠. 네, 압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체포되겠습니다.” (p.377-378)

 

 일상생활에서 놀라움을 느끼는 어린애 같은 능력을 당연하게 여기기는 너무도 쉽다. 하지만 우리가 우울해지거나 불안해지거나 슬퍼져서 그 능력이 사라질 때, 그건 너무도 치명적이고 죽음과 닮아 있는 일이 된다.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 내게도 그런 아침들이 있었다. 울면서 깨어났던 아침, 설명할 수 없는 압박감이 너무도 심해 이를 악물어야 침대에서 겨우 나올 수 있었던 아침, 얼굴에 느껴지는 해쇼빛이나 새로 내린 커피 향기, 애정 어린 반려자의 손길처럼 하루를 편안하게 시작하게 해주는 안락한 즐거움들조차 아무것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아침들이. 그리고 그런 즐거움들이 돌아오는 걸 알아챌 때면, 무언가가 우리 안에서 자라나고, 나뭇잎에 난 잎맥들의 복잡한 아름다움이나 거미줄에 파리를 가두는 거미의 치명적인 정확함이나 찻잔에 담가두었던 초콜릿 호브노브 비스킷에서 차를 핥으며 천상의 위로를 맛보는 일에 다시금 자연스럽게, 어린아이처럼 매혹되는 자신을 발견할 때…… 그건 삶으로 돌아오는 느낌이다. 내게는 이것이 포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레이엄이, 재봉틀 앞에 앉은 케미가, 아이들의 귓불에 딱밤을 먹이는 히멀이, 자신의 사회운동에 너무도 활기차게 몰두해 있는 레거니가, 어느 일요일에 자전거를 타는 보루가, 시골길을 잽싸게 달려가는 그의 곁을 쌩쌩 지나쳐 멀어져가는 젖소들이 떠오른다. 그동안 내가 인터뷰한 모든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언급했고, 내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어떤 생애 단계에서든 우리가 얼마만큼 어른다운지의 문제는,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는지 아니면 길 어디쯤에서 멈춰버릴 것인지의 문제는, 우리 내면의 어린 자아들에게―지나 윌리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라는 나무줄기에 새겨진 동심원들에―어떻게 공감하는지와 중요한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그 자아들을 간직하고, 그들을 용납하고 돌봐줄 방법을 찾아내고, 그들이 우리를 살게 할 수 있도록 우리 각자의 내면 아이들을 살아가게 하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p.381-382)

 

 리빙스턴은 높이 평가받는 과학 전문지 〈더 랜싯〉으로부터 전 세계 과학자들이 한데 모여 치매의 원인과 예방 및 치료법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내기 위해 공동으로 연구하고 작업하는 치매 위원회의 책임자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2020년에 열린 이 원회의 최근 회의에서 리빙스턴과 동료들은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치매의 약 40퍼센트는 예방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아냈다. 리빙스턴은 알아낸 사실 중에서도 “저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그리고 우리가 연구를 시작했을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보청기예요. 연구들에 따르면 보청기와 관련된 문제가 집단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위험 인자입니다”라고 말한다. 인터뷰를 마치고도 오랫동안 이 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는 무척 의미심장해 보인다. 청력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보청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위험 인자다. 청각장애가 있는 개인들 중에서도 보청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초과 위험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내 추측으로는 손상은 청각을 잃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청각 능력의 상실이 주는 영향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사회적 고립, 외로움, 예전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관여하고, 그들과 연결되고, 소통할 수 없어지는 것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닐까. 리빙스턴과 동료들의 연구는 다른 연구 결과들을 뒷받침하면서, 모두가 예상하듯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건강한 식단으로 식사하고, 과도한 음주를 삼가고, 금연하는 것 같은 모든 일이 치매를 경험할 위험을 줄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지만, 필요할 때 보청기를 사용하는 일만큼 많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p.398-399)

 

 위그는 내가 그동안 도달하려고 애써왔던 것과 심오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어떤 말을 한다. 그것은 어른이 되는 일이 나와 내 거북이 등딱지에게, 가짜인 것과 진짜인 것 사이에서 고심하는 우리 모두에게 무엇을 의미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통찰이다. “아직은 사람들이 안 믿겠지만, 이건 언젠가 일어날 일이에요. 우리가 평생 사회적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내는 사회적 고치가 있잖아요. 그건 사실 유아기에 생겨나고, 우리는 그때부터 이 미친 세상을 뚫고 나가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거든요. 치매의 아름다운 효과 중 하나는 그 사회적 고치가 천천히 벗겨져 나간다는 거예요. 그리고 순식간에, 그 사람 속에 있던 믿을 수 없이 연약하고 굉장히 진짜인, 있는 그대로의 인간성이 드러나는 거죠.” 소아심장외과 의사였던 어느 거주자에게 일어난 일도 그랬다. 목사관 관리자가 자신이 낳은 아기를 모두에게 소개시켜주려고 목사관에 데리고 왔을 때, 이 은퇴한 의사는 곧바로 청진기를 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아마도 그가 살려냈을 그 모든 아기들을 안았던 것처럼 아기를 안고, 심장 소리를 들으려고 했어요. 누가 그래달라고 부탁해서가 아니라 아이의 심장박동을 확인하고, 아이 어머니를 보고 ‘예쁘고 건강한 아이를 두셨네요’라고 확실히 말하기 위해서요. 그러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본질은 삶의 마지막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었던 거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아마 그 이유는 노년과 새로운 삶에 가까워진 이 남자의 친절함과 너그러움, 악화된 가운데서도 진실하고 아름다운 무언가를 그대로 간직한 마음의 역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p.410-411)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 나는 그저 나라는 이유만으로 가치 있는 존재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하면서 그들을 약간씩 부러워해왔다. 이 친구처럼 예뻐지고 싶고, 저 동료처럼 글을 잘 쓰고 싶고, 트위터의 그 사람처럼 성공하고 싶고, 뭐 그런 식이었다. 이제 나는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성장하여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진실은 얼음같이 차가운 파도처럼 내 머리 위로 부서져 내리며 뼛속까지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다. 나는 이것이 내 삶, 내 유일한 삶이라는 인식을 꼭 붙들고 있어야만 한다. 내가 누군지 알아내고 내 곁에 머무르기 위해 나 자신에게 가능한 한 정직해져야만 한다. 더 이상 우리 할아버지의 열쇠들을 향해 손을 뻗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들을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 행성에서의 내 삶은 한정되어 있고, 언제나 닳아 없어지고 있다. 그리고 당신의 삶 또한 그렇다. (p.418)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숨거나 자신의 일부와 불화하고 있을 때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숨지 않는다는 것은 낡고 뻔한 말로 된 ‘자신을 발견한다’는 개념과는 다르다. 자신을 발견한다는 개념은 확고하고 일관성 있고 유일하고 변하지 않는 자아가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암시한다. 즉, 해피엔딩이다. 반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숨지 않는다는 것은 계속되는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이고, 이 과정은 오직 죽음으로만 끝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 방식에, 나 역시 여전히 알아내려 애쓰고 있는 그런 방식에 자기 자신을 열어둔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계속 정신분석을 받으러 가고, 내담자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고, 글을 쓰고, 살아갈 것이다. 더 이상 안전하게 우리 할아버지가 들고 계셨던 어떤 마법의 열쇠를 꿈꾸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똑같은 대답을 찾기 위한 똑같은 탐구를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어른다움을 찾는 어른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찾아냈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너무도 같은 형태의 어른다움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귀 기울여 듣고, 말하고, 글을 쓰고, 숨 쉬고, 나 자신으로부터 숨는 일을 그만둘 때 내가 발견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일에 열려 있는, 그저 한 명의 사람이 될 것이다. (p.431)

 

 

평행세계의 그대에게 / 강연실, 우아영 / 이음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다. 남은 여생 동안 내가 이렇게 계속 힘들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방에서 단 한 명의 여성으로 향후 10년을, 20년을 또 보낼 수 있을까? 만약 물리학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207쪽)

 그날 커피 두 잔을 사 들고 누군가에게 상담을 청했는데, 견디어 보라거나 잘하고 있다는 식의 피드백은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대신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몇 년 고생하면 국립대 같은 덴 쉽게 갈 수 있을 텐데. 여교수 할당이 따로 있거든. 역차별이지.”

 저 한마디는 제가 학부 4년에 대학원 1년까지 총 5년 동안 끊임없이 되새김질해왔던 ‘자기 의심’을 부풀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여성이자 공학도로서 스스로 내면화하고 있던 ‘자기 고정관념’은 점점 몸집을 키워 마치 명확한 사실인 마냥 저를 압도했고요. (연실 씨도 혹시 이런 경험이 있나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당시 얼마나 학업에 열심이었는지, 동기생들에 비해 성적이 얼마나 좋았는지를 말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겁니다. (p.18-19)

 

 연실 씨, 근본적으로 과학계에 여성이 필요한 이유라는 게 존재할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흔히 사람들은 과학 연구가 매우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이뤄진다고 믿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떤 과학을 연구할지 정하는 과정부터 지극히 사회, 경제, 정치적인 이유가 개입되잖아요. 과학 연구는 공짜로 이뤄지는 게 아니고, 한정된 자원과 인력을 어디에 투입할지 선별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물론 이 선별 과정은 사람이 하고요. 그 사람들의 문화적, 인종, 성별, 국가, 소득, 관심 같은 배경이 이 과정에 영향을 미치겠죠. 이건 정책을 연구한 연실 씨가 저보다 훨씬 잘 알고 계실 것 같아요. (p.23-24)

 

 저는 과학계 내 다양성이 더 나은 지식과 기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아영 씨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인력정책으로 환원된 여성 과학기술인 지원 담론에서는 여성, 더 넓게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과학계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지는 창의적 시너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어떤 종류의 여성 과학기술인 대상 프로그램들은 성평등 문제를 심화시킨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경력 단절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 중 과학 커뮤니케이터나 실험지도사 양성 프로그램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정책들은 경력단절 여성을 과학기술인들을 연구개발 직종으로 다시 불러들이기보다는 주변부로 밀어내는 결과를 낳습니다. 20세기 영국 여성 전산 기술자들이 정당한 승진과 임금 상승의 기회가 박탈되며 밀려났던 것처럼요. 물론 이 직종들은 고유한 가치와 중요성을 갖고 있지만, 그 지위와 보수가 불안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p.40)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동권 투쟁을 벌인 장애인들 역시 청테이프형 사이보그가 아닐까요? 일부 정치지도자들의 투쟁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은 우리 사회구성원의 상당수가 정상인의 정상적인 출근을 방해하는 장애인을 ‘우리’라는 범주에서 배척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장애가 신체적인 제약뿐 아니라 사회적 조건에서 경험되는 것이라면 이러한 차별적 발언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지는 사회에서 장애의 정도는 더욱 심각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동권 투쟁에 나선 장애인들은 장애인과 대중교통이라는 거대한 기술과 제도 체계가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장애인들은 휠체어와 지하철, 흰지팡이와 횡단보도 사이에 놓은 틈들을 메워야 한다고, 엘리베이터나 저상버스와 같은 기술을 도입하고 장애인을 대중교통 이용에서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기술적 측면뿐 아니라 제도적 보완 역시 필요하겠지요. 이 틈들이 메워지면, 장애인뿐 아니라 어린이와 노약자, 임산부와 응급상황에 놓인 사람들까지 조금 더 매끄러운 대중교통 체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글에서 아영 씨는 기술과 엮어 살아갈 앞날을 함께 고민하는 데 우리가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셨죠. 서로 다른 우리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릴 수 있게 지지를 보태는 데에서 우리의 실천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p.70-71)

 

 노동 로봇은 결핍을 통해 만들어진 완벽한 존재입니다. 젊은 로줌에게 노동자로서 인간은 “기쁨을 느끼거나 바이올린을 켜거나 산책을 하고 싶어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필요로 하는 그런 존재”이지요. 인간의 육체적 노동만을 필요로 하는 현대의 생산 공장에서 욕구란 마치 “디젤 엔진에 술 장식을 달거나 문양을 새길 필요는 없”는 것처럼 불필요한 것일 뿐입니다(24쪽). 불필요한 모든 것은 단순화시켜 로봇의 가격을 낮춘 젊은 로줌은 그가 내건 광고문구처럼 “가장 저렴한 노동”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차페크는 희곡의 후반부에서 로봇과 인간의 관계를 역전시키는데, 이를 통해 노동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되묻는 듯합니다. 젊은 로줌이 성공시킨 로봇 대량생산 체계는 그 자체로 인간이 더 이상 고된 노동에 종사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했습니다.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어 관리직이나 연구직에 종사하게 된 인간들은 ‘말’을 일로 삼게 되었습니다. 로봇의 단가가 낮아지는 만큼, 육체노동의 가치는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손’의 노동이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로봇의 반란 이후 모든 인간은 죽고 건축가 알퀴스트만이 살아남게 되는데, 벽돌을 쌓고 흙으로 다지는 일을 하는 알퀴스트는 육체노동의 가치를 유일하게 지켜온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알퀴스트를 죽여야 하는지 묻는 로봇에게 로봇들의 리더 라디우스는 알퀴스트를 살려주라고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로봇처럼 손으로 일을 한다. 집을 짓지. 일할 수 있다.”(198쪽) (p.94-95)

 

 제가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논평이 꼽는 과학과 인종주의의 문제가 과학과 성차별 문제와 너무나 닮아있다는 점입니다. 과학계 정년 교수 중 여성의 비중은 현저히 낮고, 업적에 대한 평가나 학술지 운영 등에 여성 과학자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힘듭니다. 또, 의약품 임상실험이나 자동차 디자인, 실내온도 규정 등은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삼고 있지요. 그러므로 과학과 차별의 문제는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인종 문제는 비교적 중요하지 않게 여겨집니다(한국 사회도 꽤 다인종 사회가 되었음에도 말이죠). 미국 내에서 반인종주의 시위가 일어났을 때 한국인들이 보인 냉소적인 반응이 적지 않다는 데서 꽤나 놀랐습니다. 미국 내에서도 일부 아시아인들은 “Black Lives Matter” 운동에 우호적이지 않았죠. 아시아인도 역시 노골적인 인종차별의 대상이 되어 왔고, 흑인들 역시 아시아인들을 차별했으니까요. 그렇지만 모든 차별은 닮아있고, 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닮아있는 것처럼요. 그러니 우리도 지금보다 더 인종주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p.157-158)

 

 큰 틀의 지식 체계, 지형을 이야기하자면, 저는 교과서가 떠오르곤 해요. 어떻게 보면 되게 작위적으로 선택한 지식 체계잖아요. 수년 전에 과학 교과서 편집자들을 만나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어떤 과학교육 연구자들은 교과서가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었죠. 중립적이긴커녕 젠더, 인종, 연령 면에서 상당히 편향돼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만난 편집자들은 “교수들이 교과서를 집필할 때 엄격한 집필 기준을 따르기 때문에 편향적이기 어렵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교과서는 모든 평가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무엇 하나라도 논쟁의 여지가 있거나 판단을 보류하게 하는 내용을 담을 수 없어요. 주관은 더더욱 안 되고요. ‘예쁜 꽃’ 같은 형용사도 안 되는걸요. 무조건 ‘고루하게’ 써야 해요. 나온 지 너무 오래되어서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요.”

(p.163)

 

 사실 우리에게도 이런 논쟁은 익숙합니다. 능력주의는 (특히) 이공계에서 여성 교원 비중을 높이려는 제도에 대한 비판 논거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커뮤니티에는 “여성과기인 지원정책 찬반”이라는 글타래가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살펴보았는데, 이 타래의 글들은 대부분 여성 교수 임용 할당제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제도가 시행된다면 실력이 부족한 사람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임용될 것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죠. 어떤 글은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면 장애인에 대한 할당제도 시행해야 하는지 되묻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들은 가장 바람직한 대학의 연구인력을 구성하는 방식은 성별에 관계없이 성과가 우수한 사람들을 교수로 채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명제만 놓고 본다면, 이 주장은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성별이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기대, 다른 평가, 다른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성과를 낼 수 있는 환경과 조건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요. 그렇기 때문에 이 역시 당연하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은 것이지요. (p.205-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