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인버스 / 단요 / 마카롱

 

 승리의 트로피를 받아 들었을지라도 그 순간을 영원히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충만감은 삶을 채우기에는 너무 짧고, 욕망이란 이루어진 목표를 새로운 목표로 교체하는 부단한 과정이므로. 그러니까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지란 사실 둘뿐인지도 모른다. 갈증 속에 내달리다가 때때로 주어지는 기쁨을 달콤하게 받아들이는 것. 혹은 갈증도 짜릿함도 내버리고 다만 평온해지기로 마음먹는 것. (p.218)

 

 

상식의 재구성 / 조선희 / 한빛비즈

 

 세계 의약산업의 꼭대기는 대체로 미국과 유럽 회사들이 차지한다. 50위 안에 한국 업체는 없고 유한양행과 녹십자, 대웅, 한미가 100위권에 들어있다. 의약산업에서 한국은 선진국의 문턱을 향해 접근하려 애쓰는 중이다. 백신 개발은 속도전이고 코로나 백신 성공의 관건은 단기간에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있느냐와 메르스나 에볼라 등 과거 감염병 때 백신 개발 플랫폼을 구축했느냐다. 속도에서 밀린 2순위 의약업체들은 해외에서 개발된 백신이 들어오면 일단 시장을 잃을 뿐 아니라 임상실험 대상자 모집도 어려워지기 때문에 개발을 포기하면서 기술축적에도 실패하게 된다.
 그것은 역시 미국과 유럽, 노벨의학상 챔피언들의 저력이다. 방역의 단계에서 그들은 행정 시스템이나 의료 서비스의 나른함과 노후함을 드러냈지만 백신의 단계로 넘어오자 여러 세기에 걸쳐 질병과 싸우면서 축적해온 의학기술과 연구역량을 과시했다. 상대적으로 한국은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에서 토대가 취약함을 인정해야 했다. 현재가 과거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1989년 갤럽 조사에서 국민의 75%가 자신을 중산층이라 대답했는데 2019년 SM C&C 조사에서 중산층이라는 대답은 48.7%였다. 우리 사회 상위 30%에 해당하는 핵심 중산층의 3분의 1만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느낀다고 한다. 국민소득이 증가했는데 만족도가 따라 오르지 않는 것은 기대치도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간계층이 얇아지는 양극화의 한 현상이기도 하다. IMF 트라우마, 언제든 실직할 수 있다는 불안이 중산층의 안정감을 흔들고, 맨 꼭대기로 쏠리는 소득의 불평등과 불공정 스트레스가 중산층의 만족감을 빼앗아간다.
 한국은 사회적 발언들이 정치 쟁점에 쏠려 있다. 불평등이나 양극화 문제는 국회나 언론에서 의제 설정의 우선순위에 있지 않다. 노년층이 압도적인 태극기부대가 노령기 삶에 절대적인 국민연금을 위험에 빠뜨린 박근혜 대통령이나 삼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계급구조는 잘 보이지 않고 경제민주주의는 까다로운 문제라 사람들은 계급과 불공정 문제를 평소에 잊고 살다가 ‘땅콩 회항 갑질’이나 ‘물컵 갑질’ 같은 가십성 뉴스에서 폭발하고 ‘자원봉사 표창장’을 국가적 이슈로 띄워 올리기도 한다.
 국민소득 3만 불이라 해도 공사장에서 떨어져 죽는 일이 흔하다면 선진국이라 할 수 없다. 또한 부모에게 맞아 죽는 아이가 있는 한 복지국가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생활고로 자살하는 일가족이 있는 한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은 위선이라는 점이다.

 

 한국은 갈등요인이 그렇게 큰 사회가 아니다. 인종이나 종교처럼 폭발성 강한 갈등의 뇌관을 끼고 사는 나라들도 있다. 우리는 남북분단이라는 치명적 장애를 안고 있고, 수도권 집값 상승이 계급격차를 벌리고 있으며, 대개의 선진국들과 같은 일자리 감소와 청년실업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2019~2020년의 신문 헤드라인을 지배한 것은 그런 주제들이 아니다. 몇몇 정치인과 검찰총장의 이름이 압도했다. ‘아젠다의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정치 집단과 언론이 채택한 쟁점이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일과는 무관했다. 국민 대중이 쓸데없는 갈등에 에너지를 낭비한 것이다. 가을운동회의 보물찾기 게임에서 보물들이 숨겨진 동쪽이 아닌 북쪽에서 헤매다 지쳐 돌아온 꼴이다.
 한 사회를 뒤흔들어놓은 정치 스캔들이나 대대적인 부정부패 사건을 흔히 ‘게이트’라 부른다. 1997년 ‘한보게이트’의 경우, 한보그룹 총수 정태수가 정재계 로비를 통해 은행돈 5조 7천억 원, 자기자본의 18배를 대출받아 쓰다가 부도를 내면서 크고 작은 기업들이 연쇄도산하고 IMF 외환위기를 불러왔다. 또한 대통령부터 여야 정치인들이 뇌물수수로 고구마줄기처럼 딸려 나오고 국회의원, 은행장 등 10여 명이 징역 20~25년씩 선고받았다. 1~2년에 걸쳐 사회를 뒤흔들어놓는 것은 똑같은데 2019~2020년식 게이트는 함량미달이다. 떠들썩한 데 비해 알맹이가 별로 없다. 과거엔 며칠 뉴스에 나오다 말았을 ‘의혹 사건’을 ‘게이트’로 키워 1~2년 동안 미디어를 뒤덮은 건 검찰이다. 검찰이 정치행위를 한 것이다. ‘검찰이 왜 그랬을까’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명백한 것은 그런 ‘함량미달의 게이트’들로 국민 대중을 과도하게 흥분시킨 것은 미디어들이라는 사실이다.

 

 언론 역사의 맨 처음에 기자는 계몽운동가였다. 거기서 저널리즘의 건강한 엘리트의식이 출발했다. 새로운 사상을 소개한 것도 기자들이었고 농촌에 들어가 문맹타파운동을 벌인 것도 그들이었다.
 1920년에 〈동아일보〉가 창간됐을 때 식민 통치하의 민족이지만 우리도 우리의 언어를 갖게 됐다. 〈동아일보〉는 식민지 지식인들이 모여 ‘민족신문’ 창간운동을 벌인 성과였다. 순한 양 같던 조선 사회로부터 느닷없이 3.1 만세의 뒤통수를 맞은 총독부는 대중의 동향을 파악할 필요도 있고 해서 신문을 허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항마’로 친일기업인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에 〈조선일보〉를 만들게 했다. 〈동아〉는 창간 이래 사주 김성수의 가계에 의해 지금까지 왔고, 〈조선〉은 1924년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매입하면서 진보적 민족신문으로 재창간됐다가 1933년 금광 부자 방응모에 인수된 이래 방씨 가계에 의해 운영돼왔다.

 

 100년 전 프랑스는 어수선하지만 그나마 기본은 갖췄던 민주주의 사회였다. 대역죄인과 마녀들이 종교재판에서 또는 재판도 없이 화형당하거나 참수되던 시대는 적어도 지난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수세에 몰린 정부가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언론이 마녀사냥으로 공작 정치를 완성하는 하나의 전형적인 스토리다. ‘유대인 간첩’이라는 딱지는 프랑스 대중의 슬럼프 밑바닥에 웅크린 반유대주의와 반독일주의의 연료탱크에 점화장치로 쓰기 딱이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이 일은 진실이 구출당하고 양심이 승리한 사례가 되었다. 때로는 양심적 지식인 한 사람이 하나의 신문 이상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정치권력과 미디어의 협공 사이에 진실이 놓였을 때 양심의 힘이 진실을 구출할 만큼 늘 강하지는 않다. 역사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드라마가 아니다.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경우보다 그대로 수장된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히는 백서들의 도서관이기보다는 희생양들의 공동묘지에 가깝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생각을 갖고 자기 의견을 말하고 이해관계가 부딪치고 갈등이 터져 나오는 것은 사회의 온도가 사람 살기에 적당하다는 뜻이다. 갈등은 민주주의의 물증이다. 얼어붙은 수면 아래서 욕망과 갈등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우리는 전체주의 사회라 부른다. 얼음이 깨지고 욕망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갈등이 표면화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다. 갈등이 폭죽처럼 터지는 것이 민주주의의 일상이다.
 청계천에서 노동자 한 사람이 자기 몸에 불을 질러서야 사람들이 깜짝 놀라 노동자들도 불편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게 됐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들이 잠자는 시간 빼고 하루 16시간 일하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당연한 희생도, 당연한 지위도, 당연한 권위도 없다. 사람들은 각기 공정과 불공정, 정당과 부당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가진다.

 

 더구나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미디어산업의 격변과 함께 찾아와서 우리를 시험에 빠뜨렸다. 인터넷 모바일 시대의 민주주의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적 없는 내용이었다. 온라인 사회에 적응하기도 전에 모바일 사회로 넘어가고, 노멀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뉴노멀이 밀려온다. 의사표시를 할 수 없던 시대의 불행보다는 낫지만 의사표현의 자유가 무한대 보장되는 시대의 어지러움과 메스꺼움도 만만치 않다.
 과거엔 밀실에서 벌어지던 권력투쟁이나 정치갈등이 실시간 중계되는 시대에 어쩌다 우리는 육식동물들의 사파리 같은 정치 세계의 잔혹한 다큐멘터리를 관람하기도 한다. 정치판이 콜로세움이 될 때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로마 시민이 되어 사자와 싸우는 검투사들의 혈투를 관람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보드라운 양탄자는 아니라는 것, 사회갈등에 코피 터지고 무릎 깨진다는 것. 하지만 사실 이것이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사회다. 우리가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 쟁취한 사회다. 모든 갈등을 공권력으로 잠재우고 국민을 가련한 눈치꾸러기로 만드는 사회가 아니라 욕망에 솔직하고 갈등에 노골적인 사회를 우리는 원했다. 다만, 갈등 사회가 되었는데, 민주화는 되었는데, 어떻게 민주화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느냐, 갈등해결의 내공을 가진 사회로 진화하느냐가 문제다.

 

 민주화는 많은 좋은 것들을 가져다주지만 정치 집단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전면화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더구나 뉴스 과잉의 시대, 정치 그라운드의 움직임이 너무 잘 보이고 너무 많이 보인다. 이것은 미디어의 미필적 고의인데, 미디어가 정책 이슈보다 정치투쟁을 즐겨 팔로우업하는 것은 대중과 정치인 사이를 ‘이간질’한다. 정당 정파들이 서로에게 오물을 튀기는 뉴스 세례 속에서 대중은 지지 정당을 잃고 정치에 정을 뗀다. 또한 팬데믹이든 국제관계든 국가적 위기를 당리당략의 셈법으로 가지고 노는, 이해타산이 대의명분을 이기는 정치는 당장의 승패를 떠나 정치에 대한 환멸을 가져오고 대중을 정치 무관심의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다.
 ‘니들끼리 다 해먹고 날 건들지만 마라. 세금은 좀 작작 걷어가라’는 것이 안드로메다의 정서다. 불법연행하고 고문하고 감옥 보내는 종류의 인권유린이 없는 시대에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조세제도뿐이니 세금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세금을 걷어서 사회를 운영하고 소득을 재분배하는 정치와 행정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정치인이 현실 사회의 위계에서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을지라도 도덕성이나 인간성에서 평균 이하라 여긴다. 그들이 선의의 정치를 구경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정치인 책임이든 미디어 탓이든, 그들의 무관심을 비난할 수는 없다. 투표장에 나오지 않는 것 역시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것이 단순한 정치적 무관심이 아니라 의지할만한 정당이 없다는, 애정하는 정치인이 없다는 적극적 의사표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미디어는 정치와 데칼코마니, 대칭구도다. 미디어는 정치를 ‘미러링’한다. 정치가 점잖으면 언론도 점잖아진다. 교과서대로라면 정치가 싸움판일 때 견제하고 중심을 잡는 게 ‘정론(正論)’의 저널리즘이겠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다. 정치가 전쟁일 때 언론이 그 주무대가 된다. 특히 과포화의 뉴미디어 시대에 과당경쟁하는 매체들이 시장에서 지분을 확보하려 할 때 정치권의 지지기반을 공유하는 것이 손쉬운 방법이다. 미디어와 정치의 협업은 양쪽 모두에게 생존전략이다.
 이런 협업은 정치와 미디어 사이에 포퓰리즘의 시너지를 불러일으킨다. 정치인은 미디어의 관심을 끄는 쟁점과 어법을 개발하고, 미디어는 그들의 자극적인 언어를 골라 쓰며 클릭 경쟁을 한다. 국회 상임위에서는 카메라들이 서 있다가 어떤 의원이 강성 발언을 하면 일제히 플래시가 터진다. 조용해서는 얻을 게 없고 일단 지르고 본다. 그래서 멀쩡하고 상식적이었던 사람들이 여의도에 들어가면 강성 투사가 된다고들 한다. 의원들 다수가 정책 쟁점보다 정치 쟁점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건 미디어의 왜곡된 앵글 탓이 크지만, 실제로 그들이 국회를 국가 사회의 중대한 현안을 푸는 장소로 여기는지 유권자 대중에게 개인기를 과시하는 퍼포먼스의 무대로 여기는지는 알 수 없다.

 

 비대한 검찰권력을 개혁하겠다는 것이 정치인들이지만, 검찰권력을 비대하게 만드는 게 정치인 자신들이라는 얘기다. 정치 양극화, 양당과 양 진영 사이의 대립이 심해지면 고소고발전도 가열된다. 검찰로 달려가는 정치인들이 검찰 정치의 판을 깔아준다. 정치의 공이 검찰과 법조로 넘어가면, 대립하는 양 진영 사이에서 그들이 캐스팅보트를 쥐게 된다. 사건의 선택과 수사의 방향, 판결의 내용에 따라 얼마든지 정치 상황을 주무를 수 있으니, ‘검찰패권’ ‘법조패권’이라는 용어가 유행한다. 1980년대까지는 절대권력이 입법 사법 행정을 장악하고 ‘삼권분립’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이었는데,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처음 삼권의 분립과 상호견제를 경험하는가 싶었을 때, 검찰법조 패권이 행정과 입법부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 검사는 행정부에 소속된 검찰 공무원이고, 판사는 개개인이 하나의 독립된 헌법기관이다. 상당수의 법관은 헌법이 보장한 지존의 권위, 그 양심과 윤리를 지킨다고 보지만, 또 상당수의 법관은 승진에 목을 맨, 정치권에 촉각을 곤두세운, 자신의 편향과 감정을 판결에 싣는, 법정구속에서 권력의 쾌감을 즐기는 한 개인인 것도 사실이다. 학교교육의 단계마다 연전연승해 서열 사회의 챔피언이 된 사람들의 집단인 만큼 서열싸움과 자존심 경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시 합격해서 판검사 된 이들은 대학원 가서 법학 교수가 된 쪽을 한 수 아래로 보고, SKY 출신이 타대학 출신을 아래로 보고, 판사가 검사를, 검사가 변호사를 아래로 보고, 같은 판검사라도 사시에 언제 합격했는지 따지고, 사시 동기끼리도 사법연수원 성적 따지고, 같은 기수라도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냐 설거지 코스 밟아왔냐를 따지고, 그러는 개인들이다.

 

 전후 아시아에서 박정희와 가장 엇비슷한 사례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1921년생(박정희는 1917년)에다, 쿠데타 당시 나이도 40대 중반이었고,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립운동가 출신 수카르노 대통령을 밀어내고 집권했으며, 처음에는 식민 종주국이었던 네덜란드 군 장교였다가 2차대전 때는 일본군 장교였으며, 1천 명 국민협의회의 대통령 간접선거로 31년 장기독재했고, 1967년 집권 이후 수출주도 경제개발 정책으로 연평균 성장률 7%의 고속성장을 했지만,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반정부시위로 물러났다. 수하르토는 가족의 배를 불리는 데 국가권력을 적극 활용한 금권유착의 챔피언이었다는 점에서 분명 박정희와는 다르다. 재임 중 여섯 자녀가 TV방송, 은행, 제약업, 제지회사, 항공, 통신, 호텔, 쇼핑몰, 자동차, 택시운수에 걸쳐 약 100개의 기업체를 거느렸고, 외환위기로 IMF 구제금융을 받을 때 IMF의 요구가 수하르토 일가의 자산 관리와 상충되어 협상에 난항을 겪었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2004년 수하르토를 ‘20세기 가장 부패한 정치인’으로 뽑았다.

 

 몽플레 시나리오 워크숍에선 몇 가지 대화의 원칙이 있었다.
 ‘어떻게 돼야 한다’ 또는 ‘어떻게 돼선 안 된다’고 말해선 안 된다. 자신의 입장, 또는 소속 집단의 입장을 말하면 안 된다. 다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다음에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건 안 돼’라고 평가하면 안 되고 단지 물어야 한다. ‘왜 그런가, 그다음엔 또 어떻게 될까.’ 그런 대화가 가능했던 건 워크숍 참석자가 모두 젊은 세대였고 자기 소속 집단에서 기득권이 공고한 기성세대는 배제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나리오 씽킹’이라는 것. 결론을 가지고 시작하는, 설득하고 이기기 위한 대화가 아니라, 서로의 상상력으로 ‘사다리 타기’ 하며 결론을 찾아가는 대화, 계몽주의가 아닌 사실주의 화법, 그것은 논쟁적인 현안을 놓고 갈등하는 주체들 사이에 시한폭탄의 뇌관을 제거하고 시작하는 대화의 매뉴얼이다. 또한 예상되는 결과로부터 소급해서 플랜A 플랜B를 도출하는 생산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먼 미래까지 나아갔다가 미래를 출발점으로 해서 현재로 돌아오는 ‘정신의 산보’이자 ‘생각의 소풍’, 그리고 평소에 잘 안 쓰는 생각의 근육을 쓰게 해주는 ‘상상력의 전신 운동’이다.

 

 독일 국민은 유럽에서 가장 신문을 많이 보는 사람들이다. 신문시장이 중국, 인도, 일본, 미국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크다. 다분히 선정적인 일간지 〈빌트〉는 발행부수 140만 부로 유럽 최대부수이고, ‘정론지’로서 독일 언론의 간판이라 할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발행부수 100만 부로 역시 유럽 최고다. 1960년대 전성기에 지금의 3배쯤이었던 판매부수가 처음엔 TV와의 경쟁, 그다음엔 모바일의 공습으로 쪼그라들었지만 종이 매체의 힘이 여전히 강하다.
 전철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서울이 90%라면 베를린은 60~70%쯤 될까. 대략 ①스마트폰 ②책 ③신문 순서인데, 독일 스마트폰 소유자가 78%, 세계 8위라는 통계가 승객들의 행동을 뒷받침한다.
 독일 역시 모든 신문들이 온라인에서 치열한 브랜드 경쟁을 하고 있지만 한국 같은 인터넷 미디어 난립사태는 없다.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헤드라인 경쟁이 없는 것은 검색 시스템과도 관련 있다. 독일은 구글이 검색엔진 1위, 점유율 90%를 넘는다. 한국처럼 포털사이트라는 백화점에서 입점업체인 미디어들이 전재료를 놓고 조회 수 경쟁을 하지 않는다.

 

 1976년 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 있는 보이텔스바허라는 작은 마을에 한 무리의 지식인들이 모였다. 긴 토론 끝에 정치교육의 원칙에 합의했는데 마을 이름을 따서 ‘보이텔스바허협약’이라 불린다. 그 세 가지 원칙의 요지.

첫째, 주입식 교육 금지. 정치적 견해 강요 금지. 독립적 능동적 판단을 방해하지 말 것
둘째, 논쟁성 유지. 논쟁이 되는 사안은 서로 다른 입장을 그대로 전달할 것
셋째, 자신의 이해관계, 삶의 경험에서 출발해 정치적 입장을 발전시키도록 할 것

 독일은 각급 학교에 정치교육과목이 있고 철저히 ‘보이텔스바허협약’에 따라 수업을 한다. 모두 토론과 실습으로 이루어진다. 가령 정당을 만들고 모의선거를 하거나 지역 현안들에 대해 토론하고 지방자치단체 운영을 실습해보는 식이다.
 또한 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정치교육 프로그램이 그야말로 ‘천지삐까리’다. 정당들이 운영하는 아데나워재단(기민당), 에버트재단(사민당), 로자룩셈부르크재단(좌파당), 하인리히뵐재단(녹색당)을 비롯해 16개 주의 정치교육원, 각 도시의 시민학교(Volkshochschule), 대학이나 교회, 노동조합, 시민단체가 정치교육 프로그램들을 진행한다. 이들 모두 ‘보이텔스바허협약’을 준수하는 조건으로 내무부 산하 연방정치교육원의 예산 지원을 받는다.
 이 같은 민주주의교육의 원리는 당연히 언론에도 적용된다. 미디어는 정치교육의 가장 중요한 채널이기 때문이다. 가령 총파업이 일어났을 때, 최소한 정론지로 분류되는 매체들은 노조 입장과 사용자 입장을 공평하게 실어준다. ‘논쟁이 되는 사안은 서로 다른 입장을 그대로 전달할 것.’ 보이텔스바허협약의 두 번째 항목이다.

 

 2019년 11월 장벽 붕괴 30주년 행사의 하나로 베를린 한인 사회에서 열린 ‘베를린청년컨퍼런스-웬 통일?’에서 베를린자유대학 객원교수인 독일통일 전문가 김상국 씨의 말. “동독은 북한과 다르고 서독은 한국과 다르고 지금 국제정세는 당시와 너무도 다르다. 하지만 독일통일보다 더 나은 모델이 없으니 할 수 없다.”
 무엇보다 다른 것은, 독일통일은 1990년을 전후한 세계적인 변화의 트렌드를 탔다는 점이다. 1986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에서 비롯된 소련 해체 및 동구 공산권 붕괴의 도미노 속에 베를린장벽도 함께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장벽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다. ‘작은 걸음 정책(Small Step Policy)’이란 것이 있다. 빌리 브란트가 서베를린 시장 시절 동서 베를린 간에 최소한의 접촉과 왕래를 유지하자면서 했던 말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는 작은 걸음이라도 떼는 게 낫다”에서 비롯된 ‘작은 걸음 정책’은 1969년 브란트가 독일연방의 총리가 됐을 때 소련 및 동유럽과 교류를 트는 ‘동방 정책’의 기본원칙이 되었다.

 

 2008년 미국 부동산 버블의 붕괴로 과도한 주택담보대출이 부실화하면서 160년 역사의 리먼브라더스 등이 파산했고 월스트리트의 쇼크는 전 세계 금융위기로 번졌다. 미국 정부는 7000억 달러의 긴급 지원금을 풀었는데, 문제는, 구제금융으로 살아난 금융기관들이 임원들에게 상여금으로 수백만 달러를 지급한 것. 부시 행정부의 재무장관이 정부소유 기업인 AIG에 상여금을 철회하라고 했을 때 AIG 회장은 “가장 우수하고 똑똑한 인재”를 쓰려면 어쩔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나마 상여금이 예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이었다. 미 하원은 구제금융을 받은 기업 임직원들의 상여금에 90% 세금을 매기는 법을 통과시켰다. 금융위기의 여파로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직자들이 생겨났지만 금융계 구조조정 와중에 월스트리트의 CEO와 임원들은 수백만 달러의 퇴직금을 받고 떠났다.

 

 “보수와 진보를 둘러싼 이념갈등이 한국 사회의 담론 형성 및 정치, 시민 사회의 장에서 실제 이상으로 과대포장되어 유통되고 있고 그 중심에 언론이 있다. (···) 대다수 사람들은 계층불평등과 같은 경제적 이슈를 가장 중요한 균열선이자 핵심적인 갈등으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언론은 이념갈등을 지나치게 부각하여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해온 것이다. (···) 이념갈등의 최대 수혜자는 정당이었고 이념의 정치를 끊임없이 활용한 것도 정당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이념갈등은 시민 사회 영역보다는 정치사회를 중심으로 정당과 언론이 상호작용하면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경향이 강하다.” ― 박길성, 《한국인의 갈등의식》, 2009

 

 자살률과 관련해 흔히 잘못 알려진 것은 한국의 높은 자살률이 90년대 이후 풍요시대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 인구 10만 명당 10명 미만에서 점점 늘어나 2003년에 OECD 1위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1983년 통계청이 생겨나면서 자살률이 처음 공개됐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경찰 통계에 따르면 자살이 늘어난 건 전쟁이 끝난 1950년대 중반부터였고 1960~70년대 개발시대의 자살률이 이미 2000년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유명한 ‘자살왕국’인 헝가리가 1961년 24.9명으로 세계 최고를 기록했을 때 한국은 24.4로 거의 헝가리 수준이었다.
 따라서 지금 한국의 자살 신드롬은 부유한 나라들이 앓는 ‘선진국 병’이 아니라 한국의 특별히 터프했던 근대화 과정, 경쟁과 과로의 경제성장, 급격한 도시화 물결 속에서 개인들이 겪은 스트레스로 이해해야 한다. 속칭 ‘자살공화국’은 한국경제의 이륙과 함께 시작했다. 지표면으로부터 급히 상공으로 치솟을 때 엔진이 풀가동되고 기체가 흔들리면서 겪게 되는 비행기 멀미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자살 신드롬은 집단적인 ‘근대화 멀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