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 / 나혜석, 하야시 후미코 / 정은문고
부녀 생활의 일부분을 쓰면 이러하다. 아침 9시쯤 일어나서 식구 모두가 빵 한 조각과 차 한 잔으로 아침밥을 먹는다. 주부는 광주리를 옆에 끼고 시장으로 간다. 점심과 저녁에 필요한 식료품을 사 가지고 와서 곧 점심 준비를 한다. 대개는 소고기를 많이 쓴다.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식탁에 모여 앉아 한담하며 점심을 진탕 먹는다. 이 시간에 각 상점은 철문을 꼭꼭 닫는다. 그리하여 점심시간에는 인적이 끊어진다. 주부는 가사를 정돈해놓고 낮잠을 한숨 잔다. 저녁은 점심에 남았던 것으로 때운 뒤 화장을 하고 활동사진관, 극장, 무도장으로 가서 놀다가 새벽 대여섯 시경에 돌아온다. 부녀의 의복은 자기 손으로도 해 입지만 그보다는 상점에서 만든 것을 많이 사서 입는다. 겨울철에는 여름철 옷에 외투만 입으면 그만이다. 여름이면 다림질, 겨울이면 다듬이질로 일생을 허비하는 조선 부인이 불쌍하다.
오락 시설이 많이 생기는 원인은 구경꾼이 많아져서다. 구경꾼 중에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것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다. 서양 각국에서 오락 시설이 번창하는 이유는 오직 부녀 생활이 그만치 여유가 있고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전에 경성에서 어느 극장 앞을 지나면서 동행하던 친척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극장 경영을 하려면 근본 문제 즉 조선 부녀 생활을 급선무로 개량할 필요가 있다고. 실로 여자 생활에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 오락 시설은 번영할 수 없다. (p.25-26)
알프스 산봉우리 중 두 번째로 높은 4,100미터쯤 되는 융프라우로 향했다. 개미도 능히 기어오르지 못할 만한 높은 봉우리를 전차 타고 가만히 앉아서 올라간다. 산을 넘어 아이거산 터널에 들어간다. 길이가 27킬로미터나 되는 터널로 도중에 돌로 만든 두세 개 역이 있고 매우 기이하다. 산 벽을 뚫은 사이로 아래를 굽어보니 아, 소름이 끼친다. 하얗게 내려 쌓인 눈이 천 길 골짜기에 묻혀 있고, 쳐다보니 융프라우의 맑고 깨끗한 설암이 눈앞 지척에 나타나 있다. 첩첩산중에 사계절 내내 눈이 쌓여 빙하가 되고, 빙하가 녹아 물이 되어 흘러 폭포로 떨어지고, 폭포가 시내가 되어 냇물로 흘러 곳곳에 호수가 되는 것이 스위스의 생명이다. 이것을 보러 각국 사람이 모여들고 이것을 팔아 스위스 국민이 살아간다.
스위스는 큰 나라 사이에 있어 정치상으로나 군사상으로 과히 할 일이 없으니 하늘의 은혜를 입은 자연 경색을 이용한 돈이 수입의 대부분이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강원도 일대를 세계적 피서지로 만들 필요가 절실하다. 동양인은 물론 동양에 있는 즉 상하이, 베이징, 톈진 등지에 사는 서양인을 끌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매년 거액을 들여 스위스로 피서를 간다. 강원도에는 삼방약수가 있고 석왕사가 있고 명사십리해수욕장이 있으며 내금강과 외금강 명승지가 있다. 이렇게 구비한 곳은 세계에 없을 것이다. (p.49)
내가 런던에 체류할 동안 영어를 배우기 위해 여선생 한 명을 정했다. 방금 예순 살 된 처녀로 어느 소학교 교사요, 독신 생활을 해가는 가장 원기 있는 좋은 할머니였다. 팽크허스트 여사 참정권운동자연맹 회원이요, 당시 시위운동 때 간부였다. 지금도 여자의 권리 주장이 나오면 열심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여자는 좋은 의복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조절하여 은행에 저금을 하라. 이는 여자의 권리를 찾는 제1조가 된다.”
나는 이 말이 늘 잊히지 않는다. 영국 여자들의 선각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8월 15일,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p.76)
기자: 그림을 공부하는 데 동양 사람과 서양 사람을 비교하면 어떠한 것 같습니까? 재주로나 열심으로나.
나혜석: 재주야 동양 사람이 그네보다 질 것이 없으나 공부하는 데는 그네의 열심과 인내력을 참으로 따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 동양 사람들은 공부를 하다가 조금만 잘하면 만족하고 조금 잘못하면 아주 낙심을 하고 중지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그 연구소에서 본 일본 사람은 무엇을 그리다가 마음대로 잘 되지 않으면 얼굴이 아주 변색이 되고 종이를 발기발기 찢으며 “다메다, 다메다!(안된다, 안돼!)” 하고 붓을 흔히 던지던데, 저 사람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안되면 이따가 또 그리고, 오늘 안되면 내일 또 그려서 기어이 좋은 작품을 내고야 맙디다. 동양 사람 중에 중국인이 그래도 꾸준히 나아가고, 우리 조선 사람도 공부 중에는 꽤 많이 참습니다.
기자: 여자들은 어떠합니까?
나혜석: 여자요? 참 이번에 보고서 여자의 힘이 강하고 약자가 아님을 확신했습니다. 여기서는 여자란 나부터도 할 수 없는 약자로만 생각되더니 거기 가서 보니 정치, 경제, 기타 모든 방면에 여자의 세력이 퍽 많습디다. 특히 외교상에 있어 남모르게 그 내면적 활동력이 굉장했습니다. 우리 조선 여자들도 그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p.130-131)
일본관광공사에 가니 하얼빈에서 시베리아까지 가는 일본인은 나 혼자뿐이다. 다른 여행자가 있긴 해도 극히 적은 숫자로 독일인 기계 상인과 미국인 기자 두세 명, 나머지는 중국인들이다. “일본인 중에 독일로 넘어간 사람이 있긴 한데 이삼일 분위기를 지켜보죠.” 그렇게 말한들 아무래도 상황을 살필 만한 군자금이 없기에 열차를 타기로 하고 장을 보러 상점가로 향한다. 추위도 대비해야 하고 또 시베리아 열차 식당칸에서 매일 끼니를 때우면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니 담요와 식료품을 사야 했다. 하얼빈에서 산 선홍색 담요, 이제는 수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다. 파리 하숙집에서는 이불 대신 사용했다.
맨 먼저 값싼 으름덩굴 바구니를 산 뒤 거기에 사들인 식료품을 착착 담았다. 난생처음 가는 시베리아 여행이기에 꼼꼼히 따져가며 물건을 살 작정이었음에도 빼먹은 물건이 제법 많았다. 포도주도 한 병 샀는데 쩨쩨하게 굴며 하얼빈산 포도주를 골랐더니 쓴맛이 나서 도저히 마실 게 못 됐다. 그 밖에 홍차 한 통, 사과 열 개, 배 다섯 개, 캐러멜, 소시지 세 종류, 소고기 통조림 두 개, 레몬 두 개, 버터와 치즈, 각설탕 한 상자, 빵 두 개, 젤리, 주전자, 포크, 숟가락, 알루미늄 컵 등을 마련했다. 또 ‘미조구치’라는 상품진열관 사람한테 알코올램프, 옥시돌, 간장, 알코올, 소금 따윌 받아 정말 큰 도움이 됐다. (p.153-154)
사과 한 개가 1루블, 달걀 한 개가 50코펙. 또 놀란 것은 바이칼호를 지났을 무렵 팔러 온 유부초밥처럼 생긴 음식이었다. 나는 엉겁결에 잡지를 냅다 던지고는 “하나!”라고 소리쳤다. 1루블 주고 두 개 산 만큼 잘게 썬 고기라도 들어 있겠지 기대하며 뜨거운 놈을 덥석 베어 물었는데 이런, 밀가루 튀김이었다. 밀가루 튀김 따위가 1엔이라니! 태어나 이렇게 분에 넘치는 쇼핑은 처음이었다. 작은 닭 통구이도 5루블쯤 하니 도저히 손이 나가지 않았다. 우유도 마시고 싶고 삶은 달걀도 당기지만…… 값비싸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p.162)
때때로 옆 객실 독일인이 레코드판을 틀었다. 추운 들판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 탓인지 나는 눈물이 쏟아져 견딜 수가 없었다. 러시아인이란 인종은 대체로 음악을 좋아하는 걸까? 혹시 「삼두마차」라는 영화를 보셨는지? 탱고를 금지하는 세상이라도 여기는 달리는 기차 안. 애달픈 노래가 들리고 창밖에는 그 영화에 나오는 말발구가 달려간다. 독일인의 레코드판이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벌집처럼 문이란 문은 다 열리고 다들 그의 객실 앞에 모여든다. 그 순간 모두의 얼굴에 생기가 감도니 진심으로 음악을 사랑하나 보다. 앞의 식당 이야기이긴 하나 반년쯤 전까지는 강제로 식사비를 뜯어 갔다는데 내가 탔을 땐 먹어도 먹지 않아도 상관없어 참 편했다.
페름 군은 매일 시집 따위를 읽었다. 고리키나 체호프, 톨스토이나 고골리 등을 읽었다고 말하자 그는 네가 러시아어를 말할 수 있다면 훨씬 재미있는 대화를 할 텐데,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 페름 군에게 “기차 식당은 부르주아만을 위한 레스토랑인 것 같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어 내 객실로 항상 빵을 얻으러 오는 거치처럼 능글맞은 피오네르 이야기를 꺼냈다. “왜 식당은 그들에게 밥을 그냥 주지 않는 걸까?” 페름 군은 어린아이처럼 웃더니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한두 번 정도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피오네르는 끼니때를 가늠해 야폰스키 마드모아젤, 부리키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배를 부여잡고 슬픈 척을 했다. 그럼 나는 바위처럼 굳은 빵과 사과를 건네면서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식료품을 거의 다른 사람들에게 준 탓에 나도 레몬 한 개, 설탕, 차, 마른오징어만이 조금 남아 있어 하얼빈에서 산 쓴 와인을 마시는 판이었다. (p.164-165)
옴스크를 출발해 조금 있다 뭐라고 하는 역이 나왔더라, 붉은 짐수레에 목재가 가득 쌓여 있는 작은 마을에서 기차가 멈췄다. 밤이 이슥했기에 마을은 고요했다. 그때 머리에 천을 두르고 블루즈 같은 일복을 입은 여인 두세 명이 뜨거운 물을 담은 양동이를 들고 객실 바닥을 닦으러 왔다. 물을 전혀 짜지 않은 걸레로 리놀륨 마루를 훔치는 젊은 여인들 손등이 보랏빛을 띤 채 부어 있다. 다 닦고 나자 그들은 양동이를 들고 다음 객실로 갔다. 나는 무언가 강한 충격을 받았다. 여인들이 사라진 문을 닫으려고 일어나보니 어느새 좁은 복도에 청어 냄새 나는 여자와 남자가 선 채 잠들어 있었다. 또 짐에 기대 어둠침침한 불빛 아래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난한 노인들도 보였다. “객실이 잔뜩 비어 있는데 어째서 저 사람들은 추운 복도에서 잠을 자는 걸까?” 객실에 있는 러시아 아가씨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는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그저 웃을 뿐 대답이 없었다. (p.168-169)
마침내 하룻밤만 더 가면 모스크바, 창밖 풍경에서 눈이 점점 엷어져 갔다. 이방인에게는 상당히 부자유한 시베리아 열차 여행이긴 해도 눈이 지닌 가지각색 변화를 이토록 많이 본 적은 없다. 자작나무 장작을 가득 실은 삼두마차가 달려가고 눈이 물보라처럼 사방으로 흩어진다. 유리를 포갠 듯 눈길이 반짝이고 기차 소리에 나무 위 눈 덩어리가 도깨비불인 양 톡 떨어진다. 정말이지 차창 너머 설경은 일생 잊지 못할 추억이다. 일본에 돌아가 8전짜리 가락국수를 먹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달려, 달려, 기차여! 눈물을 참을 길 없네, 어이, 아직도 여긴 시베리아 한복판일세. 혼잣말을 해보며 이중창문 밖을 싫증도 안 내고 바라봤다. (p.171)
언어가 통하지 않은 탓일까, 참으로 불가사의했다. 왜냐하면 내 눈에 들어온 러시아는 일본에서 알던 러시아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의 무산자들이 연모하는 러시아가 이런 곳이었던가! 일본의 노동자 농민은 도대체 러시아의 무엇을 동경하는 걸까? 그럼에도 러시아는, 프롤레타리아는 변함없이 프롤레타리아다. 그리고 어느 나라든 죄다 특권자는 역시 특권자다. 3루블짜리 기차 식당에는 군인과 인텔리풍 사람이 대다수였다. 복도에 서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 중에 군인이나 인텔리는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이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오래된 일본 신문(11월 8일 자)에서 도쿄 소비에트대사관이 다과회, 그러니까 소비에트동지회를 열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려 기차 여행을 하는 내게 이 기사는 퍽 감개무량한 소식이었다. 아자부에 있는 그 하얗고 말끔한 소비에트대사관에서 일본 소비에트 애호자를 모아놓고 다과를 내고 영화를 보여주는 그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죄다 무슨 무슨 씨나 무슨 무슨 여사겠지.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막대기처럼 꼿꼿이 선 채 잠들어 있는, 잠자리조차 사지 못하는 러시아인들 얼굴을 나는 눈부시게 바라봤지만……. 어찌하여 소비에트대사관은 일본 노동자 농민을 부르지 않는 건지. 무슨 무슨 씨, 무슨 무슨 여사도 좋지만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애호자이면서 유한 신사 숙녀의 또 다른 이름이지 않은가. 모스크바로 어머니를 만나러 올라온 피오네르는 몇 번이나 빵을 달라고 손을 내밀고, 식당은 돈이 있는 사람만을 위해 열차에 들러붙어 달려간다. (p.174-175)
유럽행 삼등 열차는 마치 일본의 나룻배처럼 많은 사람이 떼 지어 줄줄이 걸터앉아 있다. 새벽에는 프랑스인으로 보이는 가족과 네댓 명의 룸펜 제군이 탔다. 그들은 금세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철포처럼 길쭉한 빵을 우적우적 베어 먹다가 불경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든다. 개중에는 고풍스러운 아코디언을 어깨에 둘러멘 예술가도 있는가 하면 붉은 목도리를 두른 아파슈풍 노동자, 발 한쪽이 없는 남자, 볼에 탄흔이 있는 노인, 귀여운 아이 등등 다들 가난한 사람들뿐이다. 발 없는 남자와 탄흔 있는 노인을 보니 베르됭전투가 떠올랐다. 과연 독일인과 프랑스인은 기차 안에서까지 사이가 나쁜지 “이렇게 불경기인데도 구태여 옆에서 일하러 오는 건 참을 수 없어!” 건너편 칸에 있는 독일 노동자가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한다.
그럼에도 삼등 열차는 한 가족 같으니 어찌 된 일일까? 한가로운 익살꾼이 많은 덕에 언제까지나 명랑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무산자의 모습이란 아무리 인종이 다르다고 해도 보통 단벌 신사로 조선에서 파리까지 다들 같은 풍채다. (p.181-182)
하숙집에서 전찻길 쪽으로 몇 걸음만 나가면 ‘유니프리’라는 상점이 있다. 10프랑 넘는 물건은 팔지 않는 균일상점으로 꽤 번창한 가게다. 일층 식료품 매장에서 아침 커피가 포도 넣은 빵을 합쳐 50상팀이고, 점심 식사가 맥주 한 잔을 더해 3프랑 50상팀이다. 접시에는 샐러드며 햄이며 정어리며 달걀이 담겼을 뿐만 아니라 15센티미터쯤 되는 빵까지 딸려 온다. 가까운 시일 내에 사전을 뒤적이며 먹어볼 작정이다. 요전에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죽을 뻔했다. “돈네 모아, 아이스크림” 따위를 말해봤자 통하지 않는다. 하룻밤 내내 사전을 뒤적이니 웬걸 우아한 단어로 ‘글라스’가 있었다. “돈네 모아, 글라스”라고 말하면 되는 셈이다.
당페르에서 몽파르나스까지는 대여섯 블록밖에 안 되기에 자주 걸어간다. 지하철이나 자동차를 타지 않고 마냥 걷는다. 지금은 걷는 일이 제일 행복하고, 걷는 것 외에는 안정감을 느낄 수 없다. 그렇다고 교외에서 그럴싸하게 살고 있다는 기분도 들지 않으니, 하루빨리 불우한 살림살이에 적응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창밖 전망이 좋지 않아 불빛 없는 행등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듯 방이 어둡기 짝이 없다. 이렇게 파리 지붕 아래 삶은 간단치 않지만 파리 거리에는 벌써 아코디언 악사가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닌다. (p.192)
길가에 자리한 꽃 가게에는 카네이션, 제비꽃, 국화, 미모사 등이 한창이다. 흙이 보이지 않는 탓인지 활짝 핀 꽃잎 색깔을 보면 생기가 넘쳐 기분이 좋아진다. 또 거리를 걸으며 오랜 건축물을 구경하는 일도 즐겁다. 이끼 낀 고풍스러운 길목에 있는 수도꼭지 하나마저 뭔가 특별하다. 겨울 파리도 살다보면 사랑스러워질까. 이른 봄철 나무에 새싹이 솟아나는 파리는 마음에 든다. 파리가 거칠어 보이는 이유는 밤이 길기 때문이다. 파리는 화가들이 오는 동네다. 작가가 와봤자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하면 금세 쓸쓸해진다.
파리에서 처음 사귄 친구인 데이몬드는 “당신이 점점 좋아져서 곤란해. 어서 말을 배우라고!” 같은 한껏 간지러운 말을 건넨다. 이런 다정한 여인이 있으니 파리는 상냥하고 그리운 곳이다. 그녀가 조만간 에펠탑에 데려다준다길래 에펠탑에 올라가도 별로 재미있지 않을 것 같다고 했더니 “밑에서 바람이 불어 올라와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란다. 파리는 가벼운 곳이다. 그녀는 품위 없는 곳만 바라본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지만, 나는 불우하기에 품위 있는 곳과 인연이 없다. 여하튼 빵이 60상팀, 생정어리가 세 마리에 60상팀. 이만큼으로 파리에서 살아가야 하니 즐거운 교제는 잠시 휴식이다. (p.195-196)
너무 오랫동안 기차 여행을 계속해온 탓일까. 나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매일매일 잠만 잤다. 왜 잠만 잤느냐 하면 그간의 피로가 몰려온 것도 하나의 이유이긴 하지만, 실은 호텔을 잡고 난 뒤 날이면 날마다 밤뿐이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어두운 파리의 하루에 멍해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러니저러니 하는 참에 아침이 오고 낮이 오고 밤이 오는, 상당히 자유자재한 일본 풍토에 익숙한 몸이 느닷없이 어둠침침한 파리에 와서 밤만 이어지는 시간을 맞닥뜨리니 마치 근시가 안경을 잃어버린 듯 종잡을 수 없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이고, 겨우 아침이 됐네. 파리의 아침 풍경을 한번 볼까!” 첫째 날 아침, 그렁저렁 12시 가까이 됐을 무렵 일어나 먼저 두꺼운 커튼을 젖히고 레이스 틈새로 밖을 내다봤다. 창밖은 매우 어두웠다. 나는 몇 번이나 손목시계를 귀 옆에 대고 흔들어 시간 검진을 해봤지만 시계에는 어떠한 고장도 없었다. 어긋나 있는 것은 파리 하늘 아래로, 꼭 일본 저녁 빛깔이다. 이런 날이라면 그냥 한숨 더 자야겠다고 마음먹고 다시 잠을 청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밤부터 밤까지 깨어 있는 지독한 절름발이 생활을 한 달 가까이 했다. (p.197-198)
파리 카페는 참 멋지다. 더욱이 번화한 거리 뒤편 작은 카페라면 분위기는 더없이 한적하면서도 커피 한 잔이 1프랑 20상팀. 그곳에는 손자 녀석의 흉을 보는 할머니들도, 체스에 온통 정신이 팔린 청년들도, 맹연습을 거듭하는 어린이 음악단도 없다. 그 밖에 트럼프를 하는 사람들이나 농을 주고받는 하녀들도 없다. 참으로 느긋하기 짝이 없으니 배만 안 고프면 한 잔의 커피로 아침부터 밤까지 눌러앉아 있을 수 있다.
나는 방에 달린 전등 불빛이 어두워 일할 때면 대개 카페에 갔다. 이상하게도 일본에 비해 소음이 신경 쓰이지 않는 데다 카페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 모습이 자연스러운 일상일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차를 나르는 보이는 남자, 팁은 커피값의 십분의 일이라 마냥 천하태평하게 굴기 좋다. 다만 밤에 여자 혼자 카페에 드나들면 어딘가 좀 색다른 일을 하는 여자라고 착각한 남자들이 윙크해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하튼 거리 뒤편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한가로운 카페가 많다. 뭐가 맛있을쏘냐 해도 파리 커피만큼 맛있는 것도 없다. 나는 아침마다 작은 카페에 크루아상 한 개를 갖고 들어가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끼니를 때웠다. (p.206-207)
일본에서는 백화점 식료품관에 가면 커틀릿이며 샐러드가 나무 상자 안에 담겨 진열돼 있다. 그 외에도 초밥이든 과자든 회든 모두 나무 상자에 담아 팔지만, 파리 식료품 가게에는 그런 담음새의 음식이 없다. 따라서 20전이나 30전으로 균일한 가격도 붙어 있지 않다. 가게 유리문 너머로 들여다보면 커다란 법랑 접시에 조개 요리, 샐러드, 고기 요리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부인들이 먹을 만큼만 킬로그램 단위로 자유롭게 산다. 나도 곧잘 빵집에서 가늘고 긴 빵을 산 다음 식료품 가게에 가서 샌드위치로 만들어 먹었다. 빵 옆구리를 칼질해 닭고기나 토마토, 오이나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따윌 넣어주는데, 15전 남짓으로 꽤 맛있는 샌드위치가 탄생한다. 잼을 다 바르고 나서 빈 컵을 돌려주면 컵값을 빼주고 괜찮은 요리 만드는 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니 제법 재치 있는 부엌국이다.
파리 주택은 거의 아파트라서 일본처럼 그렇게 널찍하고 틀에 박힌 부엌을 소유한 집은 별로 없다. 게다가 집 밖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가족이 많은 탓에 굳이 엄청난 부엌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일본에서 레스토랑을 여전히 사치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동안에는 가정주부가 부엌에서 해방되는 일은 아주 먼 이야기겠지. 잠시 유럽에 살다 돌아오고 나서야 깨닫고 놀란 것은, 주변 여인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부엌에서 줄곧 일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지금 도쿄 이웃집은 식구가 여섯 명으로 아이 세 명과 할머니 한 분 그리고 남편과 아내인데, 남편이 외출하고 나면 아내는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낮까지 부엌에 눌러앉아 있다. 점심은 아이들과 함께 부엌에서 먹고 얼마간 빨래를 한 다음 잠깐 낮잠을 자고 나서 바로 저녁 식사 준비에 이어 목욕물 준비며 밤에는 바느질을 한다. 내가 아침부터 밤까지 처마를 잇대고 바라보는 딱한 이웃집 주부에게 뭐라고 경의를 표해야 할지 적절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p.209-210)
옆방에는 의과대학생 형제가 살았다. 크리스마스 저녁에 내 집에 잘못 들어온 일을 계기로 말을 텄는데, 파리 대학생은 일본 대학생과는 다르게 아침부터 밤까지 다사분주하다. 밤이면 내과 전공인 형은 취미 삼아 천문학을 공부하러 다니고, 안과 전공인 동생은 자동차 학원에 간다. “앞으론 한 분야만 전문해서는 생활하기 힘든 데다 삶이 금세 공허해지잖아요. 학비만 허락된다면 아직 연구해보고 싶은 일이 태산같이 많지만……”이라면서 넉넉하지 못한 학비 사정을 푸념하기도 한다. “한 달에 얼마로 사는데요?” 어느 날 내가 형에게 노골적으로 물었더니 둘이서 800프랑이라고 대답했다. 현재 일본 돈이 지독하게 값어치가 없어 비교하기 뭣하지만 일본 돈으로 치면 약 70엔 남짓할 터.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옷장 하나. 혼자 사는 나와 같은 수준인 방을 두고 둘은 그저 잠만 자는 곳이라고 말했다. (p.211-212)
프랑스 여학생이랑은 그다지 알고 지내지 못했지만, 파리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광고를 신문에 냈더니 예순 명가량의 응모자 가운데 절반이 여학생이라 깜짝 놀랐다. 개중에 열일곱 살 먹은 여학생을 불러 오랜 기간 개인 지도를 받았는데, 브르타뉴 출신의 바다 내음 가득한 이 아가씨는 무척 성실해 자신이 모르는 건 일부러 선생님한테 물어보기까지 해서 가르쳐주곤 했다. 또 수요일에는 모자 가게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는 등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당신의 종교는?” 만나자마자 그녀가 처음 던진 질문이다. 내가 불교라고 답하자 『방장기』에 대해 알려달라고 해서 놀랐다. 일본인을 가르치려면 조금이라도 일본을 알아둬야 할 듯해 소르본대학에서 동양 종교라는 강의를 별도로 듣기 시작했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아무리 봐도 열일곱 살짜리 선생은 너무 착실하고 학생인 나는 무사태평하니 난처한 노릇이다. 어쩌다 내가 부엌일을 하고 있을 때 오면 이 귀여운 선생은 요리 두세 가지를 뚝딱 만들어주기까지 하는 좋은 친구였다. “내 꿈은 스스로 일해 번 돈으로 당신의 나라에 가보는 거야.” 이것이 열일곱 살의 꿈으로 내가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문명이 이토록 우리 젊은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는 없단다. “남자 친구는 많이 있나요?”라고 묻자 “남자든 여자든 친구는 많죠”라며 뽐냈다. (p.213-214)
도쿄 긴자에 가면 귀여운 아가씨들이 납종이로 싼 10전짜리 꽃다발을 파는데, 어지간한 살림꾼이 아니라면 그 멋없는 꽃다발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멋쟁이 산책인들은 10전짜리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걷고 싶지 않을 테니까. 해서 살짝 파리 흉내를 내서 긴자인의 가슴을 장식할 수 있도록 작은 꽃다발로 만들어 팔면 어떨까? 파리 저녁 산책로에는 제비꽃이며 카네이션이며 장미를 두세 송이씩 남옥처럼 둥글게 묶은 꽃을 든 장사꾼들이 여자와 함께 지나가는 남자들을 치근치근 따라다닌다. 그러면 남자들은 신문값 정도의 잔돈푼을 주고 그 꽃을 사서 연인 품에 또는 제 가슴에 꽂고 걸어간다. 꽃이 이렇게 세력을 넓혀 나가니 거리는 꽃향기로 넘쳐흐른다. 나도 혼자 걸을 때 쓸쓸하다 싶으면 이 꽃을 사서 가슴에 꽂고 산책을 즐겼다. 파리는 화초가 많은 거리, 여자도 남자도 화초를 사랑하는 마음에 익숙하다. (p.215)
런던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수많은 균일가 백화점. 일본에도 있을까? 틀림없이 아직 없으리라 생각한다. 마을 하나에 반드시 균일가 백화점 한 채가 있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는 여러모로 편리하다. 절대로 6펜스 이상의 제품은 없고 전부 6펜스 이하다. 비누, 백분, 목걸이, 반지, 실, 잡지, 아동용 레코드판, 레이스, 천, 꽃씨, 그릇, 철물, 전등갓, 냄비, 바구니, 문방구, 과자, 입식 식당용 커피와 빵, 샌드위치, 채소, 건어물, 식료품, 조화, 장난감, 소풍 도구, 단행본, 속옷, 바지, 안전면도기, 유리 등등. 실로 풍부한 6펜스 가게는 1페니짜리 휴지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귀중한 보물이다.
그래서인지 이곳만은 사람들로 북적북적 날로 번창한다. 게다가 입식 식당 점심밥은 6펜스로 배가 통통해지니 사람이 늘 많다. 일본에 이런 값싼 백화점이 한 개쯤 생겨도 재미있을 듯하다. 레이스로 말할 것 같으면 1야드에 1페니부터 있고 그 외에 매일 아침 2펜스짜리 홍차를 마실 수 있다. 참으로 자잘한 데까지 세심하고 판매원도 예쁘다. 쇼윈도에는 그달에 팔릴 만한 인기 상품이 수북이 진열돼 있다. 아무쪼록 누군가에게 이런 가게를 열라고 권해주길. 50전 이하의 균일상점이라면 틀림없이 유행하리라고 보증한다. 단 가게 구조는 대단히 큰 편이다. 물론 런던 물가는 뭐라고 해도 비싸다. 환율이 일본과 똑같다고는 해도 여기의 10엔은 일본의 5엔가량 가치다. 일본의 신선한 식품은 도저히 외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p.242-243)
호텔은 시골 호텔로 일본으로 말하자면 여관 같다. ‘파피용 드 플뢰르’라는 거창한 이름이건만 남포등이 허무하기만 했다. 그래도 삼시 세끼 포함 2프랑 남짓인데다 붉은 재킷이 잘 어울리는 안주인은 바지런하고 자기 집에서 먹을 법한 맛있는 요리를 내놓았다. 세차게 내리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남포등 아래에서 식사하는 일은 어쩐지 문학적이라 발자크 소설 속 풍취가 감돈다. 이 호텔은 언덕 위 외딴 집에 가깝지만 밤이 깊도록 시골 아낙네들이 스탠드에 기대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눈다. 내 방 뒤쪽 창을 열면 종비나무 따위가 산 가득히 우거져 있고 새벽녘에는 뻐꾸기 우는 소리도 들린다. 몽모랑시에서는 완전히 비에 갇혀 지냈다. 여기까지 적포도주만 마시러 왔나 싶을 정도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숙소에서 우산을 빌려 숲 깊숙이 들어갔다. 시꺼먼 나무와 나무 사이로 백랍 같은 자두나무꽃이 싸라기눈이 내린 것처럼 피어 있어 비 오는 산중에 꽃향기가 넘쳐흘렀다. 마음속까지 스며들 정도로 꽃의 공기를 한껏 들이쉬었다. 산골짜기 숲에는 성터였는지 돌담이 있고 일본풍으로 해자가 에워싸고 있었다. (p.252)
일본에 돌아오는 여비만 마련한 나는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비 내리는 도쿄에 발을 디뎠다. 반가운 도쿄 거리, 마침내 일본에 귀환했다! 너무 기뻐 어찌할 줄 모르겠다. 1년 동안 나는 파리에서, 런던에서, 바르비종에서 구두 네 켤레를 신고 버렸다. 지금은 마르세유 태생의 하얀 해변 신발이 발을 감싸고 있다. 이런 싸구려 신발까지 일본으로 건너오고 말았지만, 먼 여행을 했다고 해서 하얀 해변 신발에 따로 엄청난 모놀로그가 있진 않다. 다만 이 신발 녀석은 내가 해온 일을 전부 알고 있는 데다 “음, 저쪽에서의 수확은 말이야”라고 말하며 우스꽝스럽게 꺼내놓기에 그야말로 제격인 물건이다. 아, 근데 이 파리를 향한 연모의 정은 어찌 된 걸까? 유독 소중히 여기는 것도 아니고, 별로 돈을 실컷 쓴 것도 아니건만 파리는 참 좋았다.
파리를 떠나온 날은 5월 12일. 마로니에의 새하얀 꽃이 안개처럼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파리는 한창 꽃의 계절, 그 아름다운 거리에서 값싼 호텔 라벨이 덕지덕지한 트렁크 하나를 들고 파리의 역들을 분주히 뛰어다녔다. 영국 런던에도, 뉴헤이번 항구에도 갔다. 또 파리 북쪽 몽모랑시에도, 남쪽 퐁텐블로에도, 바르비종에도 갔다. 다 좋았다. 도회인이 복작복작 찾아가는 곳이 아닌 만큼 추억이 굉장히 맑고 깨끗하다.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 이젠 옛날이야기처럼 기억 속에 어렴풋이 떠오른다. 자드킨의 화실 정원에서 본 스포츠셔츠 한 장만 입고 자전거에 올라탄 콕토 모습은 참으로 활력이 넘쳤다 (p.270-271)
인간의 영혼이란 어떤 것일까요. 영혼은 형태도 없고 빛에도 보이지 않으며 또한 솔직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영주(永住)의 집이나 땅을 알지 못했기에 늘 여수(旅愁)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살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물질적으로 사치스러운 여행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여행 경험만은 제법 풍부해 그 추억은 내 생애에 걸쳐 가장 부귀한 것입니다. 일간 기회가 생기면 외국항로 짐배라도 올라타 세계 작은 항구나 거리를 돌아보고 싶다고, 줄곧 공상하며 고대합니다. 나는 사람에게 지치고 세정에 질리면 여행을 떠올립니다. “사람은 그리하여 있는 그대로의 일을 이야기한다. 뜰에서 딴 과일에 대해, 푸른 이끼 사이에서 핀 꽃에 대해.” 에밀 베르하렌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 나에게는 여행을 가서 객지의 허망 속에서 ‘있는 그대로’를 찾아내는 즐거움이야말로 그리운 천국이기에 여행벽은 점점 심해집니다. 내 영혼은 애수의 소용돌이 안에서만 생기가 넘치는 모양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도 이젠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여행만이 내 영혼의 휴식처가 되어 가는 듯합니다. (p.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