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방문 / 장일호 / 낮은산
따로 자던 고양이가 이불 속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가을이다. 사람이 없는 집에도 고양이는 있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에어컨이, 한겨울에는 보일러가 쉬지 않고 돌아간다. 나는 더는 전기료 5400원을 내던 가구원이 아니다. 무엇보다 고양이 몸에서 가장 추워 보이는 귀가 따끈따끈하면 마음이 누긋해진다. 나는 잠든 고양이의 귀 끝을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특히 고양이 귀 끝 주름을 만질 때면 초보 집사 시절이 떠올라 매번 웃는다. 고양이 귀 끝은 마치 찢어진 것처럼 보인다. 초보 집사였던 나는 매끈하지 않은 고양이 귀가 찢어진 거라고 생각하고 울면서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인간이 있든 말든 침대 위로 올라와 가로로 길게 누워 버리는 고양이를 볼 때면 ‘역시 잘 키웠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고양이가 이렇게 제멋대로인 것이 안심이 된다.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제대로 한 일은 없는 긴 하루들의 반복 속에서 나는 자주 일을 좋아하는 건 역시 조금 슬프고 쓸쓸하다고 여긴다. 그런 삶이지만 고양이와 누울 수 있는 하루 몇 시간 덕분에 버틴다. (p.113-114)
기존 법과 제도가 다 끌어안지 못했기에 아직 이름붙일 수 없는 관계는 그만큼 다양하고 많아졌다. 영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모건은 1980년대 영국의 가족 전반을 연구한 저서 《가족의 탐구》에서 가족 개념을 재정의한다. “가족은 거주지, 혈연, 법체계에 의해 정의된 고정된 범주나 구조가 아니다. 사람은 복잡하고 유동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가족은 구성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데이비드 모건은 가족의 핵심으로 친밀성과 돌봄, 경제적 부양을 꼽는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일상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활동이지만 구성원 간 상호작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다고 본다. 가족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doing family)’이라는 관점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는 이 제안은 이후 가족사회학 연구를 확대하는 데 기여한다. 인구 통제의 관점에서 가족을 ‘인정’해 왔던 국가가 아닌, 가족을 ‘구성’하는 개인으로 논의를 돌려놓는 기획이기 때문이다. (p.124-125)
당연한 말이지만 뉴스를 만드는 데는 돈과 노동과 시간이 필요하다. 언론이 중요하다고,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유료로 구독하는 사람은 한 줌이다. ‘좋은 기사’를 쓰면 반응하는 독자(시장)가 있다는 믿음은 기자에게도 없다. 언론도 문제지만 독자도 이 망가진 시스템의 일부라는 의미다. 같은 기사지만 종이로, 웹으로, 영상으로 보는 일은 모두 다른 경험이다. 디지털 시장은 아직까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이것저것 해 보거나 못 하거나를 반복한다. 해 보고 싶은 건 많지만 돈이 없을 때가 많다. 이곳저곳에서 취재 비용을 펀딩 받을 수도 있지만, 인건비는커녕 제작비도 못 맞출 때가 많다. 그럼에도 나를 갈고 주변을 갈아 가면서 한다. 좋은 뉴스와 좋은 매체가 필요하다고 간절하게 생각하니까. (p.164-165)
몇 년 전 호스피스 병원을 취재하며 만난 의사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전공의 시절 읽었던 미국 논문 한 편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논문은 전공의 4년 차와 말기 암 환자를 연결해 환자가 죽을 때까지 환자 집을 방문하며 돌보는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한 결과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프로그램 시행 전후 차이가 컸다고 했다. 전인적 돌봄에 대한 의사의 의지와 지식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논문을 읽은 그 역시 엉덩이가 들썩였다. 방문 간호사를 따라 나섰다. “어느 날 환자 집에 갔는데 소변이 너무 마렵더라고요. 그런데 차마 화장실이 어디냐고 못 물어봤어요. 그때 깨달았죠. ‘아, 환자가 병원 진료실에 들어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의료진이 집으로 방문하면 환자가 주인이고 나는 방문객이잖아요. 그럴 때 의료진이 갖고 있는 권위를 내려놓게 되는 것 같아요.” (p.235-236)
양창모는 왕진을 통해 환자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보는 경험을 한다. 환자가 다 말하지 못한 사정과 상황을 헤아리는 법을 배운다. 진료실을 지키며 “주지 않아도 될 약을 처방하거나 해 줘야 할 얘기를 빼먹은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마음속으로 처방전을 끊임없이 수정”하던 그는 결국 병원이라는 ‘하드웨어’ 바깥으로 삐져나온다. “‘없어서’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구체적인 얼굴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냉기가 사라지지 않은 봄 산에 올라가 나물을 캐 온 할아버지의 손에서 돈이 대신하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배웠다. 시계가 세 개나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시간 맞는 시계가 없었던 집에서는 언어가 되지 못한 사정을 읽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일상이 있다는 걸 헤아렸다. 그 과정에서 ‘증상의 뿌리’가 사회임을 마주한다. 그는 ‘내가 아프다’는 것이 곧 ‘우리가 아프다’는 일임을 알게 된다. 전문가에게 부족한 것이 “자기 지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의 지식을 바라보는 태도”임을 깨닫는다. (p.237-238)
아무튼, 정리 / 주한나 / 위고
청소 노동은 외주화되었고 청소 노동자 또한 정당한 보상을 받고 노동을 하는 것이니 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릴 때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리면서 ‘나는 고용 창출 중이야’ 하던 애들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사고를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서 내가 먹은 자리를 조금만 정리해도 여기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을 왜 손님인 네가 쓸데없이 거드느냐고 타박하거나 음식물을 바닥에 흘리거나 쏟고도 그냥 내버려두면서 치우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보이지 않는 태도. 그 밑에는 내가 ‘돈’을 냈으니 이 정도는 당연히 서비스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대가를 지불하고 그에 합당한 서비스를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부류에 나도 얼마간은 포함된다. 그러나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보다 더 심하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서비스’로 취급하는 시스템에는 흠칫하게 된다. (p.87)
많은 동료들이 원격 근무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왔지만 이전의 숫자에는 한참 못 미쳤다. 재택근무의 끝을 애도하는 동료들이 많았고 의외로 사무실로의 복귀를 반기는 이들도 있었다. 코로나 전만 해도 나는 틀림없이 전자에 해당했겠지만 아니었다. 나는 코로나 이후에도 텅텅 비어 있는 사무실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꼬박꼬박 출근한다. 하루 종일 아무도 볼 일이 없어도 그렇다.
출퇴근할 때의 지옥철, 러시아워의 복닥거림을 다들 증오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하루 중 그때가 오롯이 혼자 즐길 수 있는 시간이라는 이도 있었고, 출근할 때는 사회인으로, 퇴근할 때는 가정의 나로 변신하기 위한 준비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다는 이도 있었다. 정체성과 역할을 구분하는 시간과 공간의 막, 또는 터널이라고 해야 할까. 사무실로 가면서는 집에서 해야 하는 일과 아이들 학교 관련 문제를 잠시 지우며 업무 모드로 전환하고, 사무실을 떠나면서는 끝내야 하는 업무와 다음 날의 미팅을 지운다. 그렇게 구역 정리를 하고, 출퇴근은 그런 구역을 통과하는 포털이 된다. (p.94)
잔디밭은 아주 오래전 귀족들이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한다. 잔디 깎기 기계가 있는 요즘에도 잔디밭을 단정하고 고르게 유지하려면 손이 엄청 간다. 물도 자주 뿌리고 잡초도 수시로 뽑아줘야 하는 등 귀찮은 일이 많다. 요즘에도 미국에서 잔디를 관리하기 위해 쓰는 물이 야외 물 소비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이는 주거지역 물 소비량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양이기도 하다. 살충제, 제초제, 비료 등을 농경지보다 열 배는 더 들이붓는다는 잔디밭에 하루에 4백억 리터의 물이 뿌려지고 그렇게 화학약품은 하수로 흘러 들어간다. 눈에 거슬리는 ‘잡초’는 모두 없애고 잘 정돈되고 푸릇푸릇한 보기 좋은 정원을 얻기 위해 지불하는 환경 비용이다. (p.98)
내가 살고 있는 시애틀은 몇 년 전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난 홈리스 문제로 몸살이다. 동네 주민들끼리 교류하기 쉽게 해주는 생활 정보 앱 ‘넥스트도어(Nextdoor)’에는 홈리스들에 대한 논란이 그칠 날이 없다. 그들에게 복지 정책을 행하면 다른 도시에서 더 많은 홈리스가 몰려온다고 반대하는 이들에게 거꾸로 대책을 물으면 ‘그들을 쫓아내라’라는 주장 말고는 없다. 홈리스 전체를 범죄자, 약물중독자 등으로 매도하며 감옥으로 보내라고 외치기는 쉽다. 반대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면서 ‘슬퍼요’ 아이콘을 누르기도 쉽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홈리스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
확실히 홈리스가 모인 지역에 어지럽게 늘어선 텐트와 쓰레기 더미를 보면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가 그리워질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 자신도 홈리스 문제가 없는 지역에 살기를 선호하나, 외국인노동자로서 몇십 년 살다 보니 나 역시 사회 구성원들이 경원시하는 ‘정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체감상 외국인 비율이 절반 이상이라 차별은 거의 없다 느꼈던 런던에서조차 브렉시트 이후로는 외국인들에게 “네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외침이 자주 들렸다. 생김새로만 보면 영국인보다 훨씬 더 백인인 폴란드인들을 벌레에 비유하며 그들을 쫓아내자는 주장도 많이 보였다. 그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p.10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