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의 종말 / 조나단 말레식 / 메디치미디어
우리는 외과의학 전문가들이 객관적이며 불변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의학적 진단 역시 과학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문화적인 요소다. 질병은 신체나 정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질병은 사회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자신으로부터, 또 사회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반영한다. 장애란 이런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상태다. 다시 말하면, 말을 듣지 않는 무릎이든 위산 역류든 달갑지 않은 생각이든, 제자리를 벗어나 질서를 벗어나는 것이 장애다. 또 ‘질서’로 간주되는 것들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듯 장애 역시 변한다. 즉, 어느 문화에서는 질환인 것이 다른 문화에서는 완벽하게 정상적인 상태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의학적 문제가 도덕적 문제가 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문제의 책임 소재가 외과의사로부터 심리학자에게로 넘어가기도 한다. 예를 들면 동성애는 다른 시대에는 죄이고 범죄이며 정신병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성적 지향이다. 마찬가지로 알코올 의존증은 한때 도덕적 결함이었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신체적 질환이다.
오늘날 번아웃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보면 그 정의가 경합을 벌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지난 역사상 존재했던 다양한 소진 장애들이 전형적으로 겪었던 일이다. 번아웃은 우리 사회에 딱 들어맞는 증상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성적으로 소진되어 있어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다고 느낀 것이 인류 역사상 우리가 처음은 아니다. 안나 카타리나 샤프너는 2016년 저서 《소진의 역사(Exhaustion: A History)》에서 이렇게 썼다. “소진은 단지 우리의 사적인 내면의 삶과 신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더 폭넓은 사회적 발전, 특히 일과 휴식을 바라보는 더 일반적인 문화적 태도와도 복잡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소진된 기분을 느껴왔으나, 그 소진의 방식은 시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달랐다. (p.62-63)
정의, 자율성, 공동체, 가치는 윤리의 기본 구성 요소다. 일터에서 이런 것들이 훼손되거나 부재할 때 노동자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더욱 커지는 간극으로 끌려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소진되고, 냉소적으로 변하고, 성취감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커진다. 이는 즉 번아웃이 근본적으로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의 실패라는 의미다. 번아웃은 우리의 문화 속 행동 규범인 도덕의 실패다. 일터가 사람들이 원하는, 또 그들에게 마땅한 환경을 내어주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번아웃에 시달린다.
또 번아웃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도덕적 실패의 희생자인 동시에 최선의 성과를 이룰 수 없어진다는 점에서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나는 내 학생들에게 마땅한 선생이 되지 못했다. 지치고 의기소침해진 의사는 환자에게 최선의 조치를 해줄 수가 없다. 번아웃으로 인해 냉소주의에 빠진 이들은 동료나 고객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질적으로 저하된 일 때문에 부당하게 훼손당하는 것은 노동자 자신뿐만이 아니다. (p.156-157)
부자들은 일에 있어 비논리적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돈이 가장 덜 필요한 사람인데도 가장 많이 일한다. 첨단기술업계의 억만장자 거물들이 주당 100시간을 일한다고 뻐겨댄다. 회사의 주가를 높여 그들을 더더욱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들의 노동이 아닌데도 말이다. 미국의 고학력자들은 평균 소득 능력이 가장 높지만 저학력자들에 비해 업무 시간이 길고 여가 시간이 짧다. 부유한 부모를 둔 아이들은 여름방학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비율이 가난한 아이들의 두 배 이상이다. 또 은퇴 후를 위해 큰돈을 모아둔 미국의 전문직 종사자들은 나이가 든 뒤에도 계속 출근한다.
한편, 일거리가 없는 것은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악몽이다. 백인 노동계층의 경우 안정적인 직업이 없다는 것은 존경받는 인간이 될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 결과 오늘날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백인 남성 사이에서 우울증, 중독, 자살은 우려될 정도로 흔하다. 나는 번아웃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강의였는데도 강의를 그만두고 나자 방향을 상실한 기분이 들었고, 풀타임 교수직을 그만두고 2년도 지나지 않아서 한 강의당 이전에 벌던 돈의 극히 일부밖에 되지 않는 몇천 달러라는 돈을 받고 겸임교수 일을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오로지 돈을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자원봉사자, 부모, 특히 굶주린 예술가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노동의 대가로 아예 돈을 받지 못한다. 심지어 급여의 한 푼 한 푼이 절실한 부유하지 않은 노동자들조차도 때로는 일하는 이유가 오로지 돈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은 애정 때문에, 봉사하고자, 집단의 노력에 기여하고자 일을 한다. 사람들은 오로지 물질 때문이 아니라 이상 때문에 일한다. (p.159-160)
오늘날 미국인들이 소진되는 시점까지 일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이상은 열심히 일하면 좋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약속이다. 그저 물질적으로 안락한 삶이 아니라 사회적 존엄성, 도덕적 인격, 영적 목표를 지닌 삶 말이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번영하고 싶어 일한다. 나는 대학 시절 지도교수가 좋은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나 역시 교수가 되기를 꿈꾸었다고 ‘들어가는 말’에서 이야기했다. 교수는 존중받는 사람이자 현명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 지식을 얻어 타인에게 전해준다는 분명하고도 고귀한 목표를 지닌 사람으로 보였다. 강의실 바깥에서의 교수의 삶, 그들이 맞서 싸우는 개인적인 악마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몰랐다. 나의 멘토 중 두 분은 결국 종신교수직을 얻지 못해 다른 직업을 찾아야 했다. 세 번째 멘토는 주요 행정 보직을 맡고 몇 년 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나는 이들의 불운과 나의 직업적 전망을 전혀 연관시키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는가? 미국이 주는 약속을 굳건히 믿은 나머지 눈이 멀어 있었다. 제대로 된 직업을 찾기만 하면 성공과 행복은 당연히 따라오리라는 약속 말이다.
하지만 이 약속은 대체로 거짓이다. 플라톤이 ‘고귀한 거짓말’이라고 불렀던, 사회의 근본 질서를 합리화하기 위한 미신이다. 플라톤은 사람들이 이 거짓말을 믿지 않으면 사회가 붕괴할 것이라고 설파했다. 우리 시대의 고귀한 거짓말은 근면함의 가치를 믿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상사의 이득을 위해 일하면서 스스로 지고의 선을 위해 일한다고 믿는다. 번아웃이 서로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두 개의 장대(일에 대한 이상과 일의 현실) 사이에 걸쳐 있는 경험이라면, 우리는 이미 둘 중 하나의 장대, 즉 이상에 매달린 채 일을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직업이 약속을 실현해주기를 바라지만, 바로 이 희망이 결국은 번아웃을 선사하게 될 상황에 우리를 빠뜨린다. 희망 때문에 우리는 추가 근로를 하고, 추가 프로젝트를 맡고, 우리에게 필요한 임금 인상도 인정도 받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열심히 일하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상을 믿는 것이야말로 이 이상이 약속하는 좋은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p.161-162)
오늘날 ‘지식 노동자’의 경우라 해도 그리 다르지 않다. 유수의 컨설팅 및 재무 회사는 젊은 직원들이 장시간 근무하기를 기대한다. 처음에 직원들은 주당 80시간의 업무 일정 속에서 효율적으로 일을 해낸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이 기업 문화 연구자 알렉산드라 미첼의 견해다. “계산 같은 기술적인 능력은 무사하지만, 창의성, 판단력, 윤리적 감수성은 쇠퇴한다.”
미첼은 번아웃이 도덕적 문제임을 강조한다. 일을 하는 잘못된 환경에서 잘못된 이상을 추구할 때 우리는 윤리적 삶에 필요한 공감 같은 인간적 능력에 손상을 입는다. 피퍼는 우리의 능력이 협소해지듯 욕망의 범위도 줄어든다고 믿는다. 기능물은 “자연히 자신의 ‘봉사’에서 완전한 만족을 찾는 경향이 있기에 충만한 삶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되며 이를 인지하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총체적 노동은 우리의 시간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점유한다.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인간성을 표현할 방법을 모르게 된다. 번아웃을 겪기 이전부터 우리는 정체성 그리고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의 큰 부분을 잃는다. (p.182-183)
낮은 위상을 가진 일을 하던 시절 내가 느낀 행복과 종신교수가 된 뒤 느낀 고통의 대조를 통해 번아웃 문화를 종식할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리라. 나는 대학교수가 되고 나면 노동자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줄 알았다. 교수직이 나의 완전한 정체성이자 소명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제대로 된 학자의 직업을 가지면 그럴 수 있다는 관념을 흡수했으나, 사실 이런 기대를 충족하는 직업은 거의 없다. 당연히 직업은 나의 기대와는 달랐고, 나는 수년간 열심히 일하다가 실망감과 좌절감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반면에 주차요원으로 일할 때는 일에 대한 고매한 이상 같은 것은 전혀 품지 않았다. 그저 힘들이지 않고 월세를 벌 수 있을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 전부였다. 이 직업에 ‘몰입’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주차요원으로 살면서 ‘플로우’를 경험할 가능성은 없다. 부스에서 돈을 받는 일에 점진적인 도전 같은 것은 없다. 시간이 간다고 점점 실력이 늘지도 않는다. 피드백을 주는 사람이라고는 요금을 깎아보려는 성난 운전자들뿐이다. 나는 주차요원으로 일하던 시절, 밥 먹는 것조차 잊고 몰두하는 법이 한 번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일하는 시간 대부분을 부스 안에서 동료들과 점심 메뉴를 의논하며 보냈다(주로 피자였다). 주차요원 일은 더 생산적으로 일하고 더 큰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열중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완벽했다.
나는 주차요원 생활이 행복했던 까닭은 역설적이게도 일에 대한 헌신의 부재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직업은 도덕적·영적 의미를 지닌 일이 되기 어려웠다. 존엄성도, 인격의 성장도, 목적의식도 약속하지 않았다. 좋은 삶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나는 일 속에서 충족감을 얻지 못했기에 다른 곳에서 충족감을 찾았고 또 찾아냈다. 글쓰기에서, 친구들에게서, 또 사랑에서 말이다. (p.196-197)
미국의 보수주의 정치인과 작가 들은 노동 규제를 완화하고 비노동인구에 대한 보호 복지를 감소시키자고 주장하면서 일의 존엄성을 이야기한다. 일은 존엄하므로 최저임금법 같은 인위적 고용 장벽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2019년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성인 실업자는 공공 식량 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관련법의 자격 요건을 강화했을 때 프로그램 전반을 관리·감독한 농무부의 소니 퍼듀 장관은 강화된 노동 요건이 “우리 인구의 상당수에 일의 존엄성을 회복”해줄 것이라고 발언했다. 더 진보적인 정치인들 역시 비슷한 주장을 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6년 복지 개혁법을 승인하면서 무조건적인 공공 지원은 ‘일의 세계로부터’ 수혜자들을 ‘추방’했다고 발언했다. 이어 클린턴은 일이 “우리 삶 대부분에 구조와 의미, 존엄성을 불어넣는다”라고 했다.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갖고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데서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퍼듀와 클린턴의 접근은 임금을 떨어뜨리고 노동자들이 더 나은 여건을 요구할 능력을 감소시킨다. 마치 존엄성 자체가 충분한 보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일의 존엄성에 대한 시장 친화적 관점은 노동자를 개인으로 소외시키고, 노동자의 존엄성을 사전에 보장하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끊임없이 존엄성을 벌어 얻어내야 한다는 압박을 가한다. 이런 관점은 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거나 나이, 질병, 장애로 인해 일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조롱을 유발한다. 그뿐만 아니라 백인이나 남성 또는 내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통해 사회적 존중을 획득할 수 없는 노동자들에게 부가적인 압박 역시 가해진다. (p.200-201)
소로가 살았던 시대는 번아웃은 물론 신경쇠약증조차도 등장하기 수십 년 전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미국의 정신 나간 노동 윤리가 자멸적인 동시에 도덕적으로 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노동의 요구에 맞추어 커졌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한 자아에는 결국 금이 갈 수밖에 없다. “노동자는 매일 진정한 통합을 위한 여가를 가지지 못한다. 그에게는 오로지 기계가 될 시간만 있을 뿐이다.” 지난 세기에 반복되는 스트레스가 공장 노동자의 감각과 감수성에 미치는 해를 설파한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소로는 공업 노동의 주된 문제가 노동자에게 습관을 강제하는 힘이라고 믿었다. 소로의 눈에 노동은 사람들을 일과 속에 집어넣고, 시간이 지날수록 일과가 그들을 정의하고 성장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그렇게 노동자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된다. 농부는 “땅에 묻혀 비료가 된다”. 가축 부리는 사람은 그저 말에게 먹이를 주고 말똥을 퍼내기 위해서 산다. 선로 아래 철사를 놓는 아일랜드 노동자는 자신들이 만드는 그것이 된다. “그들 위에 선로가 놓이고, 그들은 모래로 덮이며, 열차는 그 위를 쌩쌩 달린다.” 소로가 이야기한 소외 노동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일과 동일시되어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에 시달리고, 그러다가 일이 그들의 비인간화를 불러온다. 우리는 아직도 그 압박을 느끼며 산다. 아무리 좋은 직업이라 해도 사람을 기계로 만든다. 의사에게 15분 만에 환자를 검사한 뒤에 진단을 내리되 그동안 내내 타자를 치라고 요구해보라. (p.210)
번아웃의 서광이 비치기 전 20세기 중반보다 여성들의 임금노동이 증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에서 노동하는 여성의 비율은 1950년에서 2000년 사이 극적으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동안 수많은 부유한 국가의 여성들은 날마다 육아에 쓰는 시간이 늘어났고, 대학 교육을 받은 여성은 교육 수준이 낮은 여성보다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성이 육아에 쓰는 시간 역시 비록 여성이 쓰는 시간보다는 여전히 적지만 상당히 늘었다. 후기 산업시대에 성장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전부 가질 수 있다”라는 말을 무수히 들어왔다. 자녀, 경력, 공동체, 우정 전부를. 하지만 특히 모성 역시 그 자체로 하나의 직업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전부 가진다는 것은 평생을 총체적 노동이라는 잔혹한 논리에 종속한다는 뜻이다.
위크스는 일의 문제가 소로가 파악한 문제들과 비슷하다고 본다. 일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은 우리를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일의 힘에 더 많이 노출된다는 의미다. 일은 “단지 수입과 자본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통치 가능한 주체, 훌륭한 시민, 책임감 있는 식구를 훈육한다”라고 위크스는 이야기한다. 자본주의가 ‘압도적인 강제성’을 행사해 자본주의에 필요한 근면한 수익원으로 만드는 ‘괴물 같은 조화’라고 이야기했던 막스 베버의 논점도 이와 맞닿는다. (p.218-219)
테일러의 말대로, 모든 사람은 기껏해야 그저 “일시적으로 비장애인”이다. 우리가 현재 가진 능력과는 무관하게 우리 모두 나이를 먹으면서 장애를 향해 간다. 언제라도 우리는 질병과 장애로 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나 같은 비장애인 노동자 역시 스스로를 일할 수 없는 이들과 연대하는 존재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장애는 인간의 본성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존엄성을 발견하고 장애인이 자율적이고 의미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사회적 규칙을 바꾸는 것은 모두의 몫이다. 요안나 헤드바는 공통의 약점에 바탕을 둔 급진적인 새로운 정치학을 요구한다. “서로의 취약함과 약점, 불안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지지하고, 존중하고, 힘을 불어넣는 것. 서로를 보호하고, 공동체를 만들고 실천하는 것. 급진적 동류의식, 상호의존적 집단성, 돌봄의 정치학.”
헤드바의 글은 노동 윤리의 핵심에 놓인 약속이 아니라 다른 약속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해야 가치 있다고 말하는 대신, 베네딕트회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으로 서로를 돌본다고 약속할 수 있다. 과거의 약속을 정부와 일터에 심어두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돌봄의 제도를 만들 수 있다. 레오 8세 교황이 요구한 대로 각자의 ‘건강과 힘’에 일을 맞출 수도 있다. 오늘날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신이 하는 일의 현실이 일에 대한 자신의 이상으로부터 멀어진다고 느낄 수 있으리라. 이런 상황에서 모든 노동자는 잠재적인 번아웃 환자다. 이 역시 연대감의 원천이자 현상황을, 일로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바를 바꾸는 데 박차를 가하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이상이 빚어낸 문제 앞에서 그저 손놓고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회다. 우리는 이상을 바꿀 수 있다. (p.289-290)
한눈파는 직업 / 김혜경 / 마음산책
무엇보다 나는 힘든 것과는 별개로,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 애초에 광고가 좋아서 들어온 회사다. 여전히 이 일이 재밌고, 보람도 있고, 배우는 것도 많다. 사회의 최신 트렌드에 민감하게 안테나를 세우고, 매번 새로우면서도 적합한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사람들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노력하는 일은 나 자신을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회사를 10년 가까이 다녔는데도 여전히 일이 쉽지 않지만, 그 사실마저 계속해서 내 도전 의식을 불태우는 동력이 된다.
일이 주는 의미를 떠나 출퇴근을 반복하는 삶 자체도 좋다. 출퇴근이라는 고정적인 스케줄이 없었다면 내가 제대로 살 수 있었을까 싶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침에는 출근해야 하니까 술도 적당히 마실 수 있고(그게 적당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출퇴근길을 오가며 최소한의 열량 소모라도 할 수 있고(재택근무를 했을 때 열 걸음도 걷지 않는 스스로를 보며 충격받았다), 사내 식당에서 꼬박꼬박 제때 밥을 먹을 수도 있다(심지어 설거지도 해준다). (p.82-83)
이곳에서라면 우리가 바랐던 대로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맨발로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의 열기 때문이었는지, 망설임 없이 인사를 건네오는 친절함 때문이었는지, ‘넘어져도 된다’고 말해주는 다정함 혹은 넘어져 있더라도 ‘계속된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꿋꿋함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주짓수 기술을 유려하게 해내지는 못하더라도, 모르는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인사한다거나 넘어지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도 마음도 강한 여자라니, 정말 멋지잖아? (p.187-188)
며칠 뒤 나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웬 까만 강아지를 만나게 되었다. 새까맣지만 가슴팍은 하얗고, 작달막한 몸통에 비해 다리가 길쭉해서 강아지라기보단 작은 흑염소 같이 생긴 독특한 강아지였다. 모든 게 낯설고 무서운지 굉장히 서러운 눈을 하고선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데, 내가 다가가니 냉큼 뛰어와 안겼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미묘한 무게감이었다. 아주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렇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내뿜는. 조그만 발이 내 허벅지를 밟고, 촉촉한 코와 부숭부숭한 입이 얼굴에 닿더니, 인사를 건네듯 말랑한 혀가 뺨을 훑었다. 그러자 솟아났다, 사랑이. 굉장한 기세로.
사랑은 아무것도 없는 건조한 사막에서 대뜸 솟아나는 오아시스 같은 거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지하수처럼 고여가고 있었다. 한번 세상에 드러난 오아시스는 줄어들 줄 모르고 더 커지기만 했다. 사막이 바다가 될 때까지. (p.232-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