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생어의 여성과 새로운 인류 / 마거릿 생어 / 동아시아
여성 내면에 존재하는 힘의 발현이 과다한 출산과 육아로 인해 방해받을 때 여성은 저항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태곳적부터 어떤 형태로든 가족 수 제한을 추구해 왔다. 의식적으로 특별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행동을 취했다. 법률, 관습 및 종교적 제약으로 이를 방해받을 때 피임의 힘을 빌렸다. 그렇지 않으면 아동 유기, 낙태, 영아살해 등에 의존하거나 강요된 모성에 무기력하게 자신을 내맡기고 체념하고 만다.
여성 고유의 번식력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괴적인 수단을 감행한 사례는 경제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양육에 많은 부담을 준 시기에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아테네의 호화 주택에서든, 그리고 중국의 빈곤자 주거지나 호주 원시 야만 종족의 허름한 오두막에서든, 여성은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느라 자기 발전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이들은 필사적으로, 때로는 미친 듯이 자유를 찾기 위한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과거에 교회가 낙태에 반대하여 힘든 싸움을 벌였듯이 오늘날 미국에서 행해지는 낙태를 막기 위한 노력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관행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소용이 없다. 불법 낙태 건수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니 말이다. 매년 점점 더 많은 여성이 낙태에 대한 수치심, 위험과 공포를 감수하게 될 것이다. 이 위험과 공포 그리고 원시인들의 영아살해로 시작된 이 끔찍한 기록은 사회가 근본적인 치료법을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인간의 불행과 인류의 피해를 더해가며 계속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는 무수한 세기 동안 이어온 영아살해와 태아살해에서 배운 무시무시한 교훈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혐오스러운 관행이 처벌과 억압에 의해 끝날 수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억압과 처벌을 계속하면서도 그 문제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교훈을 저버리는 것이며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미국의 기업들은 이민자들이 제분소와 광산이나 공장에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는 점을 악용하여 적은 봉급을 주며 힘든 일을 시켰다. 우리가 이민자들을 빈민가에 몰아넣자 이들은 질병에 걸려 사회적 부담이 되거나 아예 사망하기까지 했다. 이 사람들을 토끼처럼 한데 모아놓고 그 수를 증대시키고 빈곤을 조장했다. 이들을 미국화한다고 말하지 말고, 이민자들을 동물같이 대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준 자유는 이들의 사슬을 더 무겁고 단단하게 만드는 자유일 뿐이다. 헐값의 공장 제품보다 더 하찮게 취급받는 이민자들에게 인류 발전에 대한 희망의 씨앗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모든 척박한 노동 환경은 이민자들만 겪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연방산업관계위원회가 1915년에 연구를 마쳤을 때, 수백만 명의 이주 노동자 대부분이 백인이었다. 이들 대다수가 결혼했지만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었으며,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궁핍한 환경에서 힘들게 생활했다.
1910년 산업관계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에 235만 3,000명 이상의 소작 농부가 있는데, 그중 3분의 2는 남부와 남서부에 퍼져 척박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일을 했다. 보고서에서처럼 소작농들의 생활은 항상 빈곤했으며 흔히 사용되는 소작농 계약 조건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고, 아이를 낳으면 들판에 보내 어른들이 하는 일을 하도록 해야 했다. 이 인구 조사 결과는 소작인 수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뉴잉글랜드와 중부 대서양 연안을 제외한 지역은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 소작인 수가 약 30% 증가했다.
또한 1910년에는 미국에 551만 6,163명의 문맹자가 있었는데, 이 중 137만 8,884명이 순수 백인 혈통이었다. 남부의 일부 주에는 인구의 29%가 문맹이었으며, 물론 이들은 대다수가 흑인이었다.
고려해야 할 요인이 한 가지 더 있다.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언급하지 못한 미국 내 수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저임금 때문에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급진적이지 않은, 동시에 개혁적이지도 않은 공화당 지도부의 보라 상원의원은 1917년 8월 상원 연설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미국 가구 58%의 소득이 800달러 이하입니다. 미국 가구 70%는 소득이 1,000달러 이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가 자신의 가족을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제게 말해주시겠습니까? 음식과 옷을 어떻게 구하죠? 이 남자는 잡역부입니다. 사는 집은 비좁고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죠. 한 주 한 주 지날 때마다 배고픔에 지쳐가는 아내와 아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가족 중 누군가 병이라도 걸리면 자살하거나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아이들 교육은 엄두도 못 냅니다. 시민권을 받을 자격도 안 됩니다. 심지어 조국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도 군인이 될 자격도 없습니다.
보라 상원의원은 분명히 공개 혁명, 유혈 사태 및 경제적 파산 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이미 그가 언급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현재 미국에 널리 퍼져 있는 상황으로 인해 우리가 겪는 해악의 결과만 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다.
이것이 미국에 사는 서민들의 비극입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산업 환경에서 우리는 아직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제까지는 국민들의 새로운 생활, 지금은 거의 사라진 방대한 국유지, 발 빠른 장악으로 보유한 엄청난 천연자원 덕분에 지금까지 구원을 받았지만, 심판의 날이 곧 올 겁니다.
앞에서 언급한 미국의 환경이 300만 명의 아동 노동자를 양산하는 셈이다. 육체와 정신을 갉아먹는 노역을 하는 어린 노예들은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불행한 인류를 생산하는 일에만 적합하다.
한 종족의 진화 속도는 생식 능력에 비해 훨씬 느리다. 인구 증가를 신중하게 규제하지 않으면, 인구 증가로 인해 생겨난 상황에 대처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돌볼 준비가 되지 않은, 즉 교육적·경제적으로 제대로 해낼 준비가 되지 않은 인구의 증가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산아제한에 대한 생각을 널리 퍼뜨려야 한다. 우리가 이미 가진 특권을 무턱대고 버려서는 안 된다. 이 자유와 성장의 기회를 일반 대중의 손에 쥐여주어야 한다.
모성에 자유를 주어야 한다. 드러나지 않은 이민자 어머니에게 원치 않은 아이를 낳지 않게 할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해야 한다. 우리는 감춰진, 그리고 잘 드러나지 않은 인구 증가 요인 중에 민족 고유의 문화적 요인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모성은 이러한 문화적 요소가 흐르는 통로와도 같다.
남편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둘의 결합에서 자녀를 낳는 시기와 자녀의 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때, 모성은 신기할 정도로 원활하게 작동한다. 약골을 낳길 거부하고 노예를 낳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에서 말한 척박한 환경에서 살게 될 아이들을 낳길 거부할 것이다.
이 계층에 속한 여자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빈곤과 박탈감을 겪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경우에는 그 강도가 더욱더 심하다. 부족한 음식을 먼저 요구하는 사람은 남편과 아이다. 여유가 있어도 여가를 누리는 사람은 남편과 아이다. 남편의 노동 시간은 대부분 법이나 노조에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굶주림으로 가장 먼저 고통받는 사람은 여성으로, 이들은 가장 낡은 옷을 입고 남편의 빈약한 수입에 보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장에 나가서 쉴 새 없이 일하는 경우도 무수히 많다. 이뿐만 아니다. 장시간의 노동, 빈번한 출산의 고통 그리고 거의 쉴 새 없는 모유 수유 때문에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고 급기야 자포자기에 빠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가정에서의 과로와 노역으로부터 어머니를 보호할 수 있는 8시간 법은 없으며, 악화된 건강과 임신 및 생식의 질병으로부터 어머니를 보호할 법도 없다. 노동자 가정에서 어머니를 보호하려는 생각이나 배려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치명적인 불행의 사슬 역시 너무 명백해서 누구나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노동자 계층의 여자는 결혼 후 남편의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결혼 초기에 가사 의무는 여자의 능력을 넘지 않는다. 그다음 아이들을 하나, 둘, 셋, 넷, 아마 다섯 이상까지 낳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편의 수입은 가족의 수가 증가한 만큼 빠르게 늘어나지 않는다. 가정에서 음식, 의류 및 기본적인 생필품은 가족 수의 증가를 미처 따라가지 못한다. 여자의 일은 점점 더 늘어나고 아이들을 일일이 챙기기가 힘들어진다. 게다가 이제 남편의 수입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공장에 나가야 할 것이다. 여자는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밤에는 집안일을 한다. 건강은 나빠지고 집안은 엉망진창이 되며, 생필품 부족으로 인한 질병, 특히 결핵에 걸리기 쉽다. 이러한 환경은 연이은 출산 후유증에서 회복할 기회를 점점 사라지게 한다. 뒤에서 표를 통해 살펴보겠지만, 자녀의 생존 가능성 역시 줄어든다.
원치 않는 아이, 가난, 나쁜 건강, 불행, 사망 등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앞 장에서 언급한 계층의 가족들에게 대부분 일어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여성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여성의 경제적 상황은 극심하지만 정신적 박탈감은 훨씬 더 크다. 모성애는 자식에게 뭔가를 표현해 주고 싶어 한다. 이것이 아이의 성장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곤, 안 좋은 건강, 적대감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혼잡한 가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이 가장 단순한 인간적인 표현마저 박탈당한다. 엄마는 아이에게 자신의 인성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한다. 교육은 불가능하고 인정 어린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그 대신 이 엄마는 피곤하고 신경질적이며 툭하면 화내고 짜증 내는 모습만 보여주는데, 아이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될 뿐이다. 모성은 큰 불행이 되고 아이의 어린 시절은 비극이 된다.
아동 노동이라는 악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대가족이 세상에 초래한 이 부도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1915년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에서 매리 올던 홉킨스는 전국 아동 노동위원회 사무총장 오언 러브조이의 말을 인용한다.너무 많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많다는 말일까? … 어머니가 돌볼 수 없는 정도 그리고 아버지가 부양할 수 없는 정도다. … 현재처럼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가 부양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아이들 중 일부는 광산이나 공장 아니면 상점이나 제련소 등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연약한 신체가 손상될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아버지의 임금을 낮출 수도 있다. 집은 단지 피곤함에 찌든 몸과 잠에 취한 영혼이 밤마다 들르는 장소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공장에서 살아남으면, 이들은 결혼을 통해 자신의 무지와 나약함 그리고 질병을 영원히 번식시키려 한다.
여성 노동자는 사회가 자신의 아이를 어떻게 대할지를 안다. 형언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배운 쓰디쓴 진실을 알고 있는 여성은 사회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것은 여성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여성은 세상에 더 많은 아이들을 데려와서 이 상황을 영속시킬 수도, 아니면 재난만 양산하는 이 잔인한 공장으로 아이들이 가는 것을 막을 수도 있다.
여성은 자신이 감내한 불행을 계속 배가시킬 것이라고 사회에 말할 것인가?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가는 출산을 계속 이어갈 것인가? 차라리 모성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할 때까지 여성은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공익을 위해 어머니의 본능을 희생하지 말고 아이들이 노동 시장에서 상품보다 더 나은 존재로 여겨질 때까지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여성은 소가족에 대한 바람을 포기하지 말고, 아이들이 살기에 적합한 세상을 만들 때까지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고 사회에 말해야 하지 않을까?
자발적인 모성은 새로운 도덕, 즉 왕성하고 건설적이며 자유로운 도덕성을 함축한다. 이 도덕성은 무엇보다 여성의 본성이 모성애에 파묻히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여성이 기계적인 출산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기를 원한다.
지금까지 여성의 역할은 인큐베이터에 불과했다. 아이를 품고 있다가 세상에 내놓을 뿐이었다.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고,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 대체로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은 질이 아닌 양이었다. 남성이 지배하는 문명에서 많은 수의 아이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은 그 요구를 충족시켰다.
스스로 짝을 선택하고, 아이를 갖는 시기를 결정하고, 아이의 수를 엄격히 규제하는 것이 자발적인 모성의 필수 기능이다. 사회적·경제적 이익 때문에 선택을 강요받지 않고, 여성으로부터 자발적인 애정이 흘러나올 때 더 나은 부성도 제공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아이를 낳을지, 언제 낳을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으면, 여성에게 생식 능력이 아닌 다른 능력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시간도 생길 것이다. 여성은 자신의 취향, 재능, 포부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래야 온전한 인간체가 될 수 있다. 이리하여 여성은 비로소 더 위대한 인류를 만드는 자질을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 김영민 / 사회평론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생이 이토록 빨리 지나가다니. 이럴 때 두려운 것은, 화산의 폭발이나 혜성의 충돌이나 뇌우의 기습이나 돌연한 정전이 아니다. 실로 두려운 것은, 그냥 하루가 가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흐르고, 서슴없이 날이 밝고, 그냥 바람이 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김수영은 말한다. 예상치 못한 실연이나 죽음에 당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고 한다.
봄이 가는 것이 아쉬운가. 세월이 가는 것이 그리 아쉬운가. 아쉬운 것은, 저 아름다운 것이 지나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내되 모든 것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둘러 출세와 업적의 탑을 쌓는다. 그러나 아무리 크게 출세한 사람도 결국에는 물러나야 한다. (p.19)
공권력은 폐허를 감춘다. 폭력과 재난이 발생한 곳의 삶은 폐허일 수밖에 없지만, 공권력의 화장술은 폐허의 사금파리들을 시야에서 흔적도 없이 치워버린다. 공권력이 폐허를 가리고 덮어 사람들의 망각을 부추길 때, 예술가들은 사람들에게 폐허를 애써 상기시킨다. 영화 〈벌새〉(2019) 역시 그런 폐허로 초대한다. 1994년 10월 21일, 한강에 위치한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가 무너지며 총 4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늘날 말끔해진 성수대교를 달리는 차량 운전자 중 1994년의 폐허를 상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영화 〈벌새〉는 폐허가 된 과거의 성수대교 앞으로 관객들을 불러모은다.
상영 시간 내내 〈벌새〉는 한국의 건물이나 교량 안전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벌새〉는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왜 일어나야만 했는지를 탐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살아온 일상이 일견 깔끔해 보여도 사실 폐허임을 꼼꼼히 증명한다.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일그러진 가장, 폭력으로 얼룩진 남매, 거짓과 관성 속에서 나날을 이어가는 부부, 교육목표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학교, 그 모든 삶의 국면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마저 모두 폐허임을 상기시키는 긴 여정을 거쳐, 성수대교는 비로소 무너진다. 그리하여 관객들은 성수대교가 하나의 부실한 물리적 구조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상징하는 폐허임을 납득하게 된다. 〈벌새〉를 본다는 것은 이 사회가 폐허가 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폐허였는데, 아 폐허였구나 하고 새삼 깨치는 과정에 가깝다. (p.30-31)
인간이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한 인생은 거품이다. 그러나 거품은 저주나 축복이기 이전에 인간의 조건이다. 적어도 인간의 피부는. 과학자 몬티 라이먼은 『피부는 인생이다』에 이렇게 썼다. “한 사람의 몸에서 매일 떨어져 나가는 피부 세포는 100만 개 이상이고 이는 보통 집에 쌓인 먼지의 절반가량을 차지할 정도의 규모인데, 표피 전체가 매월 완전히 새로운 세포들로 교체되며 심지어 이런 흐름이 멈추지 않고 이루어지면서도 피부 장벽에 샐 틈도 생기지 않는다. … 즉, 인간의 피부는 가장 이상적인 거품 형태라고 밝혀졌다.”
아침이 오면 거품 같은 인간이 세면대 앞에서 비누거품을 칠하고, 자신의 오래된 거품인 피부를 씻는다. 또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부풀어 오르지만 지속되지 않을, 매혹적으로 떠오르되 결국 하늘에 닿지는 못할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또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p.61)
오늘날처럼 사람들이 노후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면,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당신이 늙어 죽는다는 보장이 어딨어.” 그가 보기에 노년을 맞는다는 것은 희귀하고 특별한 일이다. 인간은 사고로든 질병으로든 혹은 알 수 없는 이유로든 아무 때나 죽을 수 있다. 마치 자기만큼은 자연스레 늙어서 죽을 것처럼 구는 것은 터무니없다.
인생은 고해라고 말들 하지만, 대개 죽기 두려워서 늙도록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인생이 고해라면서 오래 살고 싶어 하다니. 영화 〈애니 홀〉(1977)의 대사처럼, 그것은 음식이 맛없다면서 더 먹고 싶어 하는 것과 같다. 현자들이 말했다. 죽음은 두려워할 만한 게 아니라고.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정작 죽으면 죽음을 경험할 사람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p.117)
이른바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은 이런 통제 불능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영문도 모른 채, 신의 의도도 모른 채, 하루하루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지만은 않겠다는 결기를 가졌을 사람들이다. 선한 의도와 경직된 계획만으로는 그런 역동적이고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변화하는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판단력과 상상력과 유연성과 탄성이 필요하다.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념 윤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책임 윤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 그리고 언제는 신념 윤리를 따라 행동해야 하고 또 언제는 책임 윤리를 따라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분명히 가려서 지시할 수 없다.” 성숙한 정치인은 자기 의도대로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단정하지 않고, 상황 속에 있는 내적 동학까지 감지한다. 어떻게 하면 그 동학과 함께할 것이며, 그 동학 속에서 어떻게 가능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낼 것인가 고민한다.
그러면 누가 미숙한 정치인인가? 선한 의도를 과신한 나머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한 정치인이 아닐까. 그런 사람이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그 권력을 멍청하지만 과감하게 행사할 것이다. 막스 베버는 정치 현실의 아이러니를 인식하지 못하고 선한 의도에만 집착하는 정치인을 일러 ‘정치적 유아’라고 부른 적이 있다. 막대한 화재가 치밀한 악의를 가진 성인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막연한 선의를 가진 유아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모든 국민이 직업 정치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유아에게 권력이라는 화염방사기를 쥐어줄 것인가의 문제는 결정할 수 있다. (p.227-229)
내가 산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산책에 목적이 없다는 데 있다.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기 싫으므로.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해보자. 대개 기대만큼 기쁘지 않다. 허무가 엄습한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뭐 하지?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고 해보자. 허무가 엄습한다. 그것 봐, 해내지 못했잖아. 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지?
목적을 가지고 걷는 것은 산책이 아니다. 그것은 출장이다. 나는 업무 수행을 위한 출장을 즐기지 않는다. 나는 정해진 과업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난 아닌데? 나는 그냥 태어났다. 여건이 되면 민족중흥에 이바지할 수도 있겠지만, 민족중흥에 방해나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기본적으로 난 산책하러 태어났다. 산책을 마치면 죽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위도식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열심히 일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이런저런 성취도 있을 수 있겠지. 그러나 그 일을 하러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 별거 아닌, 혹은 별거일 수도 있는 성취를 이루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성취는 내가 산책하는 도중에 발생한다. (p.287-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