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빈곤 과정 / 조문영 / 글항아리

 

 이러한 국가 주도하의 사회 통치는 복지를 통합과 연대가 아닌 선별적 포섭과 배제, 사회적 버림의 표상으로 만들었다. 공무원연금법(1960), 군인연금법(1963), 사립학교교직원 연금법(1973) 제정에서 보듯, 정권은 체제 수호에 핵심적인 직업 집단을 제일 먼저 포섭했다. 고학력·고숙련 인력도 경제 발전에 유용했다. 북유럽의 사회 보장이 조세 부담을 높이면서 전 인구를 수혜자로 삼은 것과 달리, 한국의 자산 기반 복지는 저축과 소득공제를 실질적 복지 수단으로 삼은 까닭에 집단이 중산층과 고소득층에 집중되었다.(김도균 2018: 84) 서구의 사회보장이 제도 시행 과정에서 먼저 포용했던 빈곤층과 노동계급은 한국의 사회보험제도에서는 거의 배제되었다. 남북한 체제 경쟁의 결과 의료보험 제도가 1977년에 출범했으나, 농어민과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에게 적용된 것은 민주화 이후인 1989년의 일이다. 해방, 전쟁, 분단,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노동계급은 “(서구와 달리) 포섭적 복지 전략의 대상이 아닌 반복지적 억압 전략의 대상”일 뿐이었다.(조성은 외 2019: 153) 빈곤층의 배제도 심각했다. 1953년에 사회부는 공공부조인 ‘국민생활보호법’을 도입하려고 했으나 재정상의 이유로 국회에 상정되지도 못했다. 1961년 ‘생활보호법’이 제정되었으나, 이 법은 1944년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조선구호령’과 대동소이했을 뿐 아니라, 18-65세 연령층,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처음부터 보호 대상에서 제외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생활보호법 대상이 되어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원으로 연명하거나, 노동능력 있는 영세민이라면 ‘새마을 일’로 통용되는 취로사업에 참여해 미미한 일당을 현금이나 밀가루로 받았다. 국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시설에 감금되고 강제 노역에 동원되는 이도 부지기수였다. 부랑인에 대한 강제 단속 및 구금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공론화된 1987년에야 폐지되었다.(최종숙 2021: 292) (p.34-35)

 

 2000년 7월, 나는 서울시 관악구 신림7동 동사무소에서 일을 돕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따라 무허가 판잣집이 빼곡해서 ‘난곡’으로 더 잘 알려진 지역이었다. 10월부터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정식으로 시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신규 접수는 물론 기존 생활보호자에 대한 재조사도 필요했다. 가정방문에도, 부양의무자 조사에도 새 지침이 하달됐다. 1999년에 신림7동에서만 생활보호자가 203가구, 한시생활보호자가 520가구였는데, 사회복지전문요원은 고작 두 명이었다. 지역의 복지사들, 공공근로로 파견된 아주머니들까지 충원했는데도 일손이 부족하자 주임은 현장연구 중이던 나한테도 도움을 요청했다.
 7년 뒤 중국 하얼빈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수급자 신청을 받는 사회복지 전담 부서는 별도의 공간에 배치되었다. 창고를 겸하던 동사무소 2층 공간이 민원 상담실이 되었다. “대낮에도 술 먹고 쳐들어오니 따로 둬야지 어쩌겄어?” 공공근로 아주머니의 말이었다. 당시 언론과 학계는 국민기초생활 보장법 시행의 의의를 대대적으로 전했으나, 현장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기초법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법이 까다로워져서 기존 수혜자까지 모두 ‘잘린다’는 소문이 횡행했다. 아주머니도 소문에 편승했다. “여기가 정말 오리지날 영세민촌이라 정말 별별 짓이 많아. 할머니들 이전엔 거짓말도 많이 했는데, 이젠 그런 것도 못해. 다들 애들한테 폐 끼치기 싫고 하니까 와서 거짓말하고 그러지. 이젠 그러지도 못하지.” 두려움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 사무실에서든 방문한 가정에서든, 담당 공무원은 “9월까지만 된다” “더는 해드릴 수가 없다” “이제 제외될 거다” “저희도 곤란하다, 법이 까다로워졌다” “제가 법을 만드는 게 아니다” 같은 말을 수시로 했다.
 기초법은 기존의 생활보호법과 달리 연령 제한을 없애 더 많은 사람을 지원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복잡했다. 새로운 법 시행을 앞두고 재정경제부가 적자를 우려해 복지부에서 올린 예산을 삭감하면서, 수급 대상자 수는 1999년 (생활보호법 대상이던) 192만 명보다 줄어든 153만 명으로 책정됐다.(류정순 2001: 296) “몸에 옷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에 몸을 맞추는” 행정이었다.(신명호 2020: 36) ‘한시적 생활보호제도’도 쟁점으로 떠올랐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 정부는 실직, 도산, 파산 등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실직자 등을 대상으로 이 제도를 한시적으로 시행키로 하고 생계 보호, 의료보호, 학비 지원 등을 제공해왔다. 한시생활보호자는 부양의무 조건 자체가 없고, 가구당 4400만 원(공시지가) 이하로 완화된 재산 기준을 적용받았다. 하지만 당시의 기초법은 기존 생활보호법처럼 “직계혈족 및 생계를 같이하는 2촌 이내의 혈족”을 부양의무자 범위로 정하고, 부양의무자의 소득·재산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재산도 1-2인 가구 2900만 원, 3-4인 가구 3200만 원, 5-6인 가구 3600만 원(실거래가) 이상이면 수급 자격에서 제외하는 규정이 신설됐다. 기존의 생활보호·한시생활보호 제도에는 없던 토지 소유, 주거 면적 기준까지 상세하게 마련됐다. 승용 목적으로 자동차를 소유한 가구도 제외키로 했다. 과거에는 없던 조건들이 새로 추가되면서 기존 생활보호자들도 불안해지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1982년 생활보호법이 개정되면서 “근로능력자를 가진 생활보호대상 세대”가 ‘자활보호자’로서 지원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 범주에 포함되어 취로사업에 참여해온 노인들은 “9월이 지나면 취로 못하는 거냐”며 수시로 사무실을 찾아왔다. (p.40-43)

 

 몇 년 전 한 학회에 참석했을 때다. 기본소득에 관한 책을 출간한 발표자는 기본소득이 자산 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공부조와 구별되며, 무조건성의 원칙을 견지하기 때문에 운용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각지대와 낙인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사회복지학계의 한 토론자는 공공부조인 한국의 기초법도 디지털 정보 시스템을 구축해서 심사를 대폭 줄이고 제출 서류를 간소화했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가 말한 시스템은 2011년부터 운영된 사회복지 통합 관리망 ‘행복e음’이다. 25개 기관에 수집된 80종의 정보를 연계하여 복지사업별 수급자 선정을 위한 신청, 조사, 결정, 사후 관리 등 업무 처리를 지원한다. 그렇게 방대한 수급 이력·업무 처리 정보가 관련 기관에 연계되어 업무 효율성을 높였다. 주민들이 사회복지 담당 부서를 통해 신청하면 행복e음이 신청인과 부양의무자에 대한 소득·재산 조사를 시행해 수급자 결정 여부를 통보까지 해준다. 주민들이 영세민이 되겠다고 과일 봉투를 들고 통장을 찾던 생활보호법 시절의 풍경도, 공공근로 아주머니들까지 동원해 신청인의 부양의무자한테 일일이 전화하던 기초법 초창기의 풍경도 빛바랜 기록이 된 셈이다.
 하지만 그 학회 토론자는 2010-2011년 복지부가 행복e음을 통해 복지 급여 대상자 확인 조사를 실시한 결과 44만8900명이 수급 자격을 잃었고, 그중 기초생활수급자가 11만6000명에 달했다는 점, 이전에 부양 관계 단절을 입증했거나 단절을 인정받아 급여를 보장받아온 이들도 수급 중단 통보를 받았다는 점, 그 일부는 갑작스러운 통보를 받고 하소연할 방도를 몰라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는 점을 알까? 전례 없이 강력해진 관료-기계는 복지 대상자에게 추가 지원이 가능한 서비스를 안내한다고 하지만, 방점은 “부정수급 예방·방지”와 “중복 급여 차단”에 놓여 있다. 부정수급은 언론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면서 어느새 대중적인 단어로 자리잡았다. 캐나다 주 정부가 운영하는 부정수급 고발 핫라인을 연구한 매슈 D. 상카르티에는 이 시스템을 ‘비난 테크놀로지(Denunciatory Technology)’라 불렀다. 대중 자체를 통치의 도구로 삼으면서, 국가는 숨어 있는 ‘적’, 숨겨진 ‘비밀’을 캐내도록 시민들을 부추기고, 동료 시민을 서로 고발하는 통로를 열어준다. 한국의 국민권익위원회에도 ‘부패공익신고’ 항목 아래 ‘복지·보조금 부정수급’란이 마련되어 있다. “청렴하고 공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누구든 위반 사실을 알면 신고하도록 장려된다. 실제로 권익위는 2014년 신고센터 설립 100일을 맞아 100억 원에 이르는 복지 부정수령액을 적발했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이들이 낸 성과 보고서를 보면 100억 원 중 97억8000만 원은 병원 사무장과 사회복지시설 등 기관 비리에 의한 것으로, 기초생활수급비 부정수급으로 적발된 돈은 7000만 원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권익위 사이트의 존재만으로 시민은 “복지 부정수급자의 삶을 재현된 그대로 믿거나, 이들의 삶을 모르는 집단으로 양분”되며, “부정수급을 알아야 하는 게 대중의 책무인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는 점이다.(Sanscartier 2017: 76) (p.54-56)

 

 나는 오늘날 기초법 수급자와 사회복지가 맺는 관계가 영재와 그룹홈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초법 제정 이후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수급을 당당한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별로 만나본 적이 없다. 수급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수치심을 감내하거나, 영재처럼 도덕적 빈자 연행을 감수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의존성 논의가 복지 영역에서 특히 만연한 것은 사회복지야말로 후술할 ‘사회적 빈곤’ 의제와 조응하여 등장한 지식과 기술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복지‘학’ 발전의 주요 참조국인 미국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전해온 사회공학과 개척 서사를 중심에 둔 선별적 역사 서술이 결합하면서 자율적 개인과 독립을 이상으로 삼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자립’을 숭배하고 ‘복지 의존(welfare dependency)’을 경멸하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시선을 부과하는 담론 권력으로 자리 잡고, 이들의 사회 안전망을 최소화하는 정치 전략으로 작동해왔다.(O’Connor 2001; Fineman 2004) (p.66-67)

 

 사회복지학자 김수영은 지역자활센터가 제도화되면서 펼쳐진 동상이몽의 풍경을 실무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보여준다. 빈민운동 진영에 자활센터란 사회운동의 새로운 거점이었으나, 정부의 시선에서는 “빈민의 자립을 유도하는 새로운 복지시설”이었다.(김수영 2013: 267) 운영의 헤게모니를 놓고 “‘전통적 자발성’을 지닌 사회운동 진영과 ‘제도적 전문성’을 지닌 사회복지 진영” 사이의 골은 깊어졌고, 정부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전문성의 근거로 인정하면서 사회운동가들을 자연스럽게 “비전문가”로 내몰았다.(2013: 267, 275) 더욱이 복지와 노동을 인위적으로 결합한 자활사업은 시행 과정에서 딜레마를 낳을 수밖에 없다.(김수영 2012) 수급자들이 창업하는 자활기업은 지역 복지와 공공성, 연대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수익성을 실현할 수 있는가? 실무자는 사회복지 종사자인가, 사업경영자인가? “복지와 시장이 융합된 자활사업과 같은 혼종적 영역을 관할할 최종적 합리성”(2012: 225)이란 무엇인가? 투입 예산에 비해 참여자들의 탈수급률과 자활 성공률이 저조하다는 정부와, 수급자들의 가난은 복합적이어서 곧바로 자활에 성공하기는 어렵다는 자활센터 간의 의견 충돌이 반복됐다.
 이러한 혼란과 딜레마는 결국 가난한 수급자의 사회적 고통을 악화시킨다. 과거의 생산공동체운동이나 다양한 협동조합에서와 달리, 자활사업 참여자는 처음부터 자기결정권을 박탈당한 채 호명된다. 병원 진단서, 진료기록부 사본, 소견서를 통한 의학적 평가와 국민연금공단의 활동 능력 평가를 거쳐 ‘조건부 수급자’로 범주화되면, 그에게 남은 선택의 자유란 수급을 유지하기 위해 이 범주에 요구되는 기능을 수행할지, 수급을 포기할지 둘 중 하나뿐이다. 전자를 선택하면 세부적인 범주화가 그를 기다린다. 취업이 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으면 고용노동부 취업 성공 패키지에 우선 참여해야 하며, ‘역량 평가’를 통해 근로 능력 미약자로 판정을 받으면 지역자활센터에 배치된다. 후자를 택하면, 게이트 웨이(Gate Way)라는 사례 관리 프로그램을 거쳐 ‘시장진입형’ ‘사회서비스형’ ‘근로유지형’ ‘인턴형’ 중 하나의 일자리에 배치된다. 각각의 일자리는 간병, 집수리, 청소, 재활용 등 특정 사업에 한정되어 있고, 참여자들이 시장 취업이라는 ‘이상적인’ 경로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끔 급여와 참여 기간에 제한을 둔다. 한국도시연구소와 반빈곤운동 단체가 공동 수행한 자활사업 참여자 인터뷰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활을 함께 도모하기보다 강요당하는 처지에 놓인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김윤영 외 2018) 대부분 만성질환이 있으며 실패를 거듭해온 참여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근로 능력 평가, 낮은 급여, 제한된 기간, 강요된 일자리에 대한 불평과 무력감을 내비쳤다. 수급이 유지될 수 있다는 안정감, ‘남들 출근할 때 같이 출근한다’는 소속감 정도가 자활사업에 대한 긍정적 평가였다. 정수남(2019)이 2017년 서울시 노원구의 지역자활센터 소속 기초생활수급자들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인터뷰 참여자 대부분한테 자활사업은 “자립이 아니라 ‘숙명적’ 의존 상태”(223)로 여겨지며 자립 가능성의 소실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빈민이 단지 ‘가난한’ 사람이라면 수급자는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02) (p.95-97)

 

 “물어볼 엄두가 안 나.” 쉬차오가 나지막이 내뱉었던 이 말이, 미국 농촌 백인들의 가난에 관한 자전적 에세이인 『하틀랜드』(2020)를 읽다 불현듯 떠올랐다. 저자인 세라 스마시가 고조할머니부터 자신까지 캔자스 농부 가족 5세대의 이야기를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가난의 천형을 물려줄까 두려워 낳을 엄두가 나지 않는 ‘딸’에게 들려준다. 스마시는 “성취를 향한 투쟁”에 나선 어린 여자아이를 가족들이 불안하고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봤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도시화와 민영화에 따른 고통을 매일의 삶에서 감수하고, 여성과 빈자에 대한 폭력과 경멸을 때로 내면화하면서 살아가는 가족들을 떠나 주류 사회의 지식인이 되기까지, 스마시는 “잘난 척하지 마라” “네 자리를 지켜라” 같은 말을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아빠는 독성 폐기물을 처리하는 일을 하다 중독성 정신병에 걸렸으나 회사와 얼렁뚱땅 합의를 끝내버렸다. 변변찮은 보상 때문에 아파도 일했더니 장애 급여에서 제외됐다. 스마시는 ‘딸’에게 말했다. “제일 충격적이었던 건 아빠가 입은 정신적 상처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해 아빠가 아무 분노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었어. 일하다가 죽는 게 자기 운명이라는 걸 잘 안다는 듯이…….”(스마시 2020: 106) 그의 부친은 회사에 자기 권리를 주장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빈자들이 차별과 경멸의 시선을 끊어내는 대신 감수하는 풍경은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은유(2019: 17)가 특성화고 출신 현장실습생 청소년들의 죽음을 살피다 발견한 것은 이들이 “자신의 고통을 공적으로 문제 삼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 위원장 이은아는 산업현장에서 실습생들이 거듭 죽어가는데도 특성화고 학생들이 무관심을 보였던 까닭을 ‘체념’으로 해석했다. “사회적으로 워낙 고졸이면 모자란 것처럼 나오니까 ‘고등학교 졸업하면 어쩔 수 없나?’ 그런 체념이 깔려 있는 것 같기도 해요. (…) 반항하는 것도 사회적 지위나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은유 2019: 212)
 분노를 느끼지 않고, 체념하고, 반항하지 않는 태도는 박탈당한 사람들이 “순전히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빈곤한 상황에 순응하는 경향”이기도 하다.(센 2013: 118) 아마르티아 쿠마르 센이 빈곤을 단순히 낮은 수준의 소득이 아닌 “기본적 역량(capability)”(2013: 151)의 박탈로 정의한 이유다. 하지만 이 장에서 쑨위펀과의 동행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한 것은, 빈자의 삶에서 급진적 변화에 대한 열망과 분노가 체념, 무관심, 순응에 선행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물어볼 엄두가 안 나고, 아무 분노도 느끼지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은 태생적인 게 아니라, 묻고 따지고 소리지를 자격을 박탈당하는 경험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누적된 결과다. (p.184-186)

 

 서구의 개발원조 프로젝트가 인적·물적 자원을 결집해내는 거대한 빈곤산업(poverty industry)으로 성장하는 동안, 개발원조가 기존 세계 체제의 불평등을 제거하기보다는 온존시킨다는 마르크스주의와 종속이론 진영의 비판은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러한 빈곤산업은 빈자를 가시화할 뿐 아니라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 NGO, 대학 등 공적개발원조라는 기치 아래 개발의 녹을 먹고 살아가는 수많은 전문가, 봉사자, 기관을 양성하는 바람에 개발원조의 반복된 실패가 오히려 당연한 규범(norm)이 되고, 정책의 설계-집행-평가로 이루어지는 개발 사이클의 한 고리로 정형화되는 현상이 벌어졌다.(Ferguson 1994:8) 빈곤산업에 연루된 다양한 행위자들은 ‘로컬’의 요구와 맥락을 강조하면서도 특정 주제와 방식에 규범적 지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파트너십을 다졌다. 지구상의 수많은 현장에서 ‘로컬’ ‘참여’ ‘커뮤니티’ ‘여성’ ‘임파워먼트(역량 강화)’ ‘마이크로파이낸스(소액 금융)’ 등 비슷한 화두가 동시에 출몰하는 국제개발 레짐은 그야말로 초국적 통치성의 대표 사례가 되었다. “빈곤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상이하게 나타나고, 각 지역 빈자들이 자기 상황과 필요를 각기 다르게 인식할지라도, 개발 담론은 빈곤에 관한 지배적 이해를 서술하고 유포한다.”(Sharma and Gupta 2006: 28) 특히 개발이 여성 중심 정책을 통해 작동되는 ‘정책의 여성화(feminization of policy)’는 한편에서 제3세계 여성의 빈곤을 긴급한 문제로 가시화하는 글로벌 페미니즘 운동, 다른 한편에서 젠더 불평등을 온존시키면서 여성의 임파워먼트를 정책의 핵심 ‘타깃’으로 삼는 빈곤산업이 교차한 결과다.(로이 2018: 153-154) 여성을 중시하는 빈국의 발전 계획이 국제사회의 정치적 승인과 원조금을 받기 위한 주요 통로가 된 점(카림 2015: 53)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p.203-204)

 

 쓰촨과 베이징에서의 봉사활동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 참가 학생들을 인터뷰하면서 느낀 것은, 대기업의 해외 자원봉사를 비롯해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각종 대외활동이 단순히 스펙을 쌓기 위한 용도도, “자신들을 도덕적 인재, 공감 능력과 책임감을 지닌 인재로 계발하기 위한 자기의 테크놀로지”(김주환 2012: 234)에 국한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열 명 중 무려 절반이 휴학하고 고시나 각종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 경험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봉사단은 일종의 심리 치료제, 심지어 한 학생의 말을 빌리면 “암흑 속에서 살던 내가 만난 새로운 희망”이었다. 봉사활동에 당당히 ‘합격’함으로써 시험의 실패로 위축된 자신감을 회복하고, 고시원과 학원만 드나들다 닫히고 만 사회적 관계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또래 학생들과의 교류를 통해 회복하고, 고맙다며 손을 붙잡아주는 어르신과의 만남을 통해 “사는 이유”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이들의 인터뷰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주제였다. 휴학 없이 꾸준히 대학에 다닌 참가자들도 잠재된 불안이 “의미 있는 건 뭐라도 해보자”는 다짐에 불을 지핀 건 마찬가지였다. 경상도의 한 국립대 3학년생인 준성(가명)은 공대생이니 그래도 취업은 잘되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문과 애들보다 나쁘지는 않지만…… 공대생이니까 매 학기 주구장창 시험밖에 안 봐요. 그렇게 한 학기 미친 듯이 시험만 보고 방학을 맞으니 뭐라도 해야지 못 살겠더라고요. 가끔 이렇게 대학 들어와서 축제 때 술도 못 마시고 열나게 시험공부하는데 성적도 안 좋아버리면 나는 뭔가 하는 불안이 생겨요. 20대에 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학점도 안 좋고, 그렇게 30대를 맞고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도 못 하고 그럼 난 뭔가…….” (p.257-258)

 

 모두가 불평등의 ‘피해자’ 위치에 정렬하는 상황은 넷플릭스 최고경영자가 초록색 운동복을 입고 기업의 실적을 발표하는 순간 절정에 달한다. 2021년 3분기 넷플릭스 유료 가입자 수가 438만 명 늘었다며, 이 백인 남성 억만장자는 환한 웃음으로 「오징어 게임」을 발굴한 한국 콘텐츠 팀을 치하했다. 극 중에서 게임의 호스트로 밝혀진 참가자 1호도, 넷플릭스 CEO도, 1억 명이 넘는 시청자도 모두 싸구려 운동복에 감정 이입하는 세계에서 불평등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모두가 불평등 구조의 피해자를 자처하는 세계, 불평등이 연일 이슈가 되어 불평등을 측정하고, 통계화하고,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지식 생산에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투입되는 세상에서 불평등 발화는 경계 없이 모두의 감각과 인식에 들러붙었다. 이 경계 없는 불평등의 세계에서 넷플릭스는 대박 난 「오징어 게임」의 인센티브 수익을 몽땅 가져갔고, 사람들은 불평등 담론을 상품으로, 자산으로 만드는 데 열정을 쏟았다. ‘망할 놈의 자본주의’가 작품의 주제라면, 작품의 생애는 ‘자본주의 만세’였다. (p.370-371)

 

 

긴즈버그의 마지막 대화 / 제프리 로즌 / 이온서가

 

로즌 동일한 맥락의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로 판례에서 법원의 실책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런 종류의 다른 사건에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긴즈버그 텍사스 주법은 미국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편에 속했어요. 텍사스에선, 생명이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여성은 임신을 중단할 수 없었지요. 임신으로 건강이 나빠지는지 아닌지, 잔혹한 강간이나 근친상간의 결과로 임신했는지 등이 전혀 중요한 이유로 취급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대법원까지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대법원에서는 그저 ‘너무 극단적’이라고 판결한 것입니다.
 ‘여성의 자유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헌법 위반이다.’ 그러고서 논의는 끝났습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위대한 헌법학자 폴 프로인드는 이렇게 비유했어요. “바나나의 철자를 어떻게 쓰는지 아니?” 아이에게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물론이죠. 어떻게 시작하는지는 알지만 어디서 멈춰야 되는지는 몰라요.”
 법정에서 로 대 웨이드 사건이 다뤄지는 동안 이 문제는 주 의회 전체에서도 이슈였어요. 때로 시민들은 이길 때도 있고 지기도 했어요. 다만, 밖에서 조직하고 활동하는 정치적 경험들은 자산으로 쌓였습니다. 대법원의 로 판결은 모든 법, 심지어 가장 진보적인 법까지도 일거에 위헌으로 만들었어요. 사람들은 오랜 싸움 끝에 승리를 얻었다고 말했지요. “우리가 해낸 일이 얼마나 대단한가. 대법원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로 판결에 대한 반대의견이 고조되었습니다. 각 주마다 한계가 분명한 임신중단법에 맞서 참호를 파서 싸우는 대신, 하나의 분명한 적이 생겼지요. 아직 선출되지 않았던 대법관들이었습니다. 국민의 손으로 선출한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논쟁하고 결론 내렸어야 할 일입니다. 9명의 늙은 대법관들이 아니고요.
 그 법률은 유동적이었어요. 내 고향인 뉴욕주를 포함해 많은 주들이 임신 3개월 안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게 허용했지요. 건강, 강간에 의한 임신, 근친상간을 포함해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다른 주들도 4개 정도 있었지요.
 법은 차차 변화해가는 상태였어요. 저는 그 변화가 계속 진행되었다면 더욱 건강한 방식으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봅니다. 대법원이 가장 극단적인 법을 기각하면 주정부가 이에 대응했겠지요. 보통 대법원은 거시적인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점진적으로 움직입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이 신중한 운영방식에서 예외가 된 일이었습니다. (p.75-76)

 

긴즈버그 VMI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버지니아 군사 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의 약자입니다. 주정부의 지원을 받았는데, 여성은 들어갈 수 없었어요. 문제는 국가가 한쪽 성별에 엄청난 혜택을 제공하면서 다른 한쪽 성별에 그 시설을 제공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가 여부였습니다.
 VMI 사례 때 이런 질문들을 많이 받았어요. ‘아니, 여자가 왜 굳이 그런 학교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서 위험한 일에 노출되고 싶겠어요?’
 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아마 전 안 가겠죠. 제 딸도 아마 안 갈 겁니다. 당신도 남자지만 아마 안 가시겠지요. 그렇지만 그 혹독한 훈련을 겪을 준비가 되어 있고, 의지가 있고, 해낼 수 있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왜 기회를 가질 수 없단 말입니까?”
 판결은 매우 만족스럽게 내려졌습니다. 남편 말대로, 이 의견을 썼다는 건 제가 20년 후에 보어하이머 사건에서 이겼다는 뜻입니다. 필라델피아에는 영재학교가 두 군데 있었는데요. 센트럴 고등학교랑 걸스 고등학교라고 불렸지요. 학교의 이름들이 말해줍니다. 센트럴 고등학교는 과학 및 수학 관련 시설이 훨씬 더 훌륭했어요. 경기장도 한없이 좋아 그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어린 소녀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요. 그 소녀들이 법의 평등한 보호를 거부당했다고 소송을 했습니다. 보어하이머 사건의 개요입니다. 1심 법원인 연방지방법원에서는 승소했습니다. 그런데 항소심에서 2대 1로 졌어요.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넘어왔어요. 대법원은 4대 4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지금은, 그런 경우에 우리가 판결을 내릴 수 없어요. 하급 법원의 결정을 확인할 뿐, 어떤 사건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가치를 점유하진 않습니다. 센트럴 고등학교 사건에서 연방대법관들의 결정은 고르게 나뉘었지요. 버지니아 군사 학교 사건에서는 7대 1의 결정이었어요. 이러한 변화는 제게, 20년간 세상이 얼마나 변화했는지 나타내는 신호입니다. (p.90-91)

 

 미국의 첫 여성 대법관이었던 샌드라 데이 오코너는, 미네소타 대법관인 메리 진 코인이 “지혜롭고 나이 든 여성은 지혜롭고 나이 든 남성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판사의 성별이 다르다고 해서 판결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긴즈버그도 이에 동의했다. 나아가 “동감합니다. 더 나아가, 여성 또한 다양한 집단, 다 다른 민족적 기원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저 훌륭한 법학자이자 5순회법원 판사이셨던 고(故) 앨빈 루빈의 말씀대로 ‘(여성은) 생물학적 차이, 문화적 영향력 그리고 인생의 경험에서 영향을 받아 고유한 시각의 메들리’를 지니고 있다는 데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p.105-106)

 

긴즈버그 지금의 여성들은 아무래도, 여러 단체들이 캠페인, 운동 따위를 벌이던 예전보다는 훨씬 더 공직 출마를 지지받고 있습니다. 글쎄요, 우리 법정만 보더라도 샌드라 데이 오코너는 1981년에 연방대법관으로 지명됐지요. 그 전에는 아예 여성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지미 카터가 저를 DC 순회법원에 임명했을 때, 지미 카터는 말 그대로 미국 사법부의 얼굴을 바꾼 거였어요.
 지미 카터는 법조인이 아니었습니다. 연방 사법부를 찬찬히 관찰한 뒤 이렇게 말했지요. “그들 모두 나처럼,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모두 백인이면서 남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대한 미국의 모습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재판부가 미국인들의 일부 계층이 아닌 모든 계층을 대변하길 바란다.” 카터는 그래서, 우연히, 일회성이 아니라 구성원의 숫자를 바꾸며 소수 계층과 여성을 임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25명 이상의 여성을 연방대법원, 연방지방법원에 기용했습니다. 또한 여성 11명을 순회법원에 임명했는데 내가 그 행운의 11명에 들었지요. 사람들이 가끔 묻더군요. “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나요?” 제가 로스쿨을 졸업할 때는 연방항소법원 판사들 중 여자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p.117-118)

 

 긴즈버그가 렌퀴스트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무엇보다도 성차별 관련 사건에서 자기 시각을 바꾸어보려는 의지였다. 1970년대 긴즈버그가 처음 법정에 섰을 때, 판사석에 앉아 있던 세 명의 판사 가운데 하나가 렌퀴스트다. 긴즈버그가 변론했던 많은 중요한 사건들에서 렌퀴스트는 반대표를 던졌다.
 군인의 가족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그 배우자가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며 1973년 긴즈버그가 법원을 설득했다. 이 프런티에로 소송에서 긴즈버그는 8대 1로 이겼다. 그때 유일한 반대자 한 명이 렌퀴스트였다. 배심원단에서 여성이 배제된 것이 수정헌법 6조 위반이라고 긴즈버그가 법원을 설득한 1975년 재판에서도 역시 한 명의 반대자가 있었다. 렌퀴스트였다. 렌퀴스트는 연방제에 굽힘없이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오코너와 스탠포드 로스쿨 동창이었는데 성차별과 관련돼 이정표가 되는 사건마다 긴즈버그와 입장이 갈렸다. 2000년 미국 대 모리슨 사건에서는 렌퀴스트가 5대 4로 다수의견을 써서 여성폭력방지법 일부가 무효가 됐다.
 그런데 2003년 네바다 주 인사부 대 히브스 사건에서는, 연방 가족 및 의료휴가법 위반으로 피해 입은 주정부 직원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끔 렌퀴스트가 지지했다. 이때 긴즈버그는 크게 고무되었다. (p.145-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