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네이션 / 애나 렘키 / 흐름출판
양육과 교육 과정에서 발달심리학과 공감이 강조되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가치를 성취도와 별개로 인정하고, 학교 운동장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신체적·정신적 야만 행위를 삼가며, 사고하고 배우며 논의할 수 있는 안전한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완충재를 가득 채운 독방 같은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유년기를 너무 질병처럼 대하고 과하게 관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이러면 아이들은 상처받을 일이야 없겠지만 세상에 대처할 방법도 모르게 된다.
우리가 아이들을 역경으로부터 과보호한 탓에, 아이들이 역경을 그토록 두려워하게 된 건 아닐까? 우리가 아이들을 거짓으로 칭찬하고 현실을 감추는 방식으로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인 탓에, 아이들이 참을성이 떨어지고 권리만 더 내세우며 자신의 성격적 결함에 무지하게 된 건 아닐까? 우리가 아이들이 원하는 걸 다 들어준 탓에, 새로운 쾌락주의 시대를 조장하게 된 건 아닐까?
고통을 둘러싼 패러다임의 전환은 기분을 좋게 만드는 알약을 대량 처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미국 성인 25퍼센트 이상, 미국 어린이 5퍼센트 이상이 매일 정신 치료제를 먹는다.
팩실, 프로작, 셀렉사 같은 항우울제 사용률은 미국을 선두로 세계 각지에서 높아지고 있다. 미국인 10퍼센트 이상(1,000명 중 110명)이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아이슬란드(10.6퍼센트), 호주(8.9퍼센트), 캐나다(8.6퍼센트), 덴마크(8.5퍼센트), 스웨덴(7.9퍼센트), 포르투갈(7.8퍼센트)이 그 뒤를 잇고 있다. 25개국 중에 한국의 수치가 가장 낮다(1.3퍼센트).
중독 증상을 겪는 환자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중독 대상이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지점에 느꼈던 상실감을 고통스럽게 증언한다. 이 단계에 들어선 환자들은 쾌락의 대상을 탐닉해도 전혀 흥분을 맛보지 못한다. 오히려 비참한 기분에 빠진다. 이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증상으로는 불안감, 과민 반응, 불면증, 불쾌감 등이 있다.
고통 쪽으로 기울어진 쾌락-고통 저울은 앞서 상당한 절제 기간을 거친 사람들도 다시 중독에 빠지게 만든다. 왜 그럴까? 우리의 저울이 고통 쪽으로 기울어 있으면, 그저 평범한 기분(수평 상태)을 느끼려 해도 중독 대상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박 장애는 보상 기대(보상 전의 도파민 분비)와 보상 반응(보상을 받고 있거나 받은 후의 도파민 분비) 사이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도박 중독을 앓은 내 환자들은 도박중일 때 한편으로는 지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들은 지면 질수록 도박을 계속하고 싶은 충동은 더 강해지고, 계속 지다가 이기면 쾌감이 더 강해진다고 얘기했다. 이것이 손실 추구(loss chasing)라고 표현되는 현상이다.
소셜 미디어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SNS에서는 다른 이들의 반응이 너무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다. 그래서 ‘좋아요’나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얻기 불확실하다는 점이 ‘좋아요’ 그 자체만큼 우리를 흥분시킨다.
과학은 모든 쾌락에는 대가가 따르고, 거기에 따르는 고통은 그 원인이 된 쾌락보다 더 오래가며 강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즐거운 자극에 오랫동안 반복해서 노출되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감소하고, 쾌락을 경험하는 우리의 기준점은 높아진다. 우리는 순간적이고 영원한 기억을 뇌리에 새기기 때문에 쾌락과 고통의 교훈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그러한 기억이 해마(hippocampus)에 남아서 평생 가는 것이다.
요즘은 사방에서 도파민이 넘쳐난다. 그래서 우리는 즉각적인 만족에 길들여져 있다. 우리가 뭔가를 사고 싶으면, 그다음 날 문간에 그게 떡 하니 놓여 있다. 우리가 뭔가를 알고 싶으면, 곧바로 화면에 답이 나타난다. 결국 우리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해서 알아내거나, 답을 찾는 동안 좌절하거나, 자신이 바라는 걸 기다려야 하는 습관을 잃고 있다.
신경과학자 새뮤얼 매클루어와 그의 동료들은 즉시 보상과 지연 보상 중 하나를 선택할 때 뇌의 어떤 부분이 관여하는지를 연구했다. 관찰 결과, 참가자들이 즉시 보상을 선택했을 때는 뇌에서 감정 처리와 보상 처리를 하는 부위가 활성화되었고, 보상을 미뤘을 때는 계획과 추상적 사고와 관련된 뇌 부위인 전두엽 피질이 활성화됐다.
이 연구가 암시하는 바는, 현대에는 감정적 보상 경로가 삶에 지배적인 동력이 되면서 우리 모두가 전두엽 피질 위축증을 앓을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말하기는 주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자신의 약점을 서슴없이 드러낼 때 특히 그렇다. 이는 반직관적이다. 우리는 자신의 바람직하지 못한 면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떠나갈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내 성격적 결함이나 일탈 행위를 알면 거리를 둔다는 게 논리적으로는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솔직할수록 사람들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 당신의 엉망인 모습을 통해 자신의 약점과 됨됨이를 돌아보고 의심, 두려움, 나약함이 자신만의 약점이 아님을 알게 되면 안심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자신이 주로 피해자이며 나쁜 결과는 남탓이라고 하는 환자들은 보통 상태가 더 나빠지거나 계속 그 상태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남을 비난하기 바빠서 자신의 회복에는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정확히 표현하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하면 호전되고 있다는 의미다.
‘피해자 서사’는 보통 우리가 자신을 특정한 상황에 대한 피해자로 보고 자신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나 사례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광범위한 사회적 경향을 말한다. 정말로 피해를 당한 경우에도 그 서사가 피해자 의식을 넘어서지 못하면 치료가 진행되기 어렵다.
실제 생활이 기대한 이미지와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릇된 이미지만큼이나 거짓된 소외감과 비현실감을 느끼게 된다. 정신의학자들은 이 느낌을 현실감 소실(derealization)과 이인증(depersonalization)이라고 부른다. 이는 자살을 생각하게 할 만큼 무서운 증상이다. 우리가 현실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생을 마감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거짓 자아의 해결책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솔직함이 필요하다. 근본적인 솔직함은 우리를 자신의 존재에 붙들어 놓고 세상의 현실을 느끼게 한다. 또한 온갖 거짓말을 고집하는 데 필요한 인지 부하를 줄이고, 매 순간을 더 진심으로 살도록 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만든다.
2012년, 로체스터대학교 소속 연구자들은 1968년 스탠퍼드 마시멜로 실험을 비틀었다. 한 어린이 그룹은 마시멜로 테스트가 진행되기 전에 약속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 연구자들이 방을 떠나면서 아이가 벨을 울리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는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다른 어린이 그룹한테는 똑같이 말하고는 그들이 벨을 울렸을 때 돌아왔다.
연구자가 다시 돌아왔던 두 번째 어린이 그룹은 약속이 깨진 경험을 한 어린이 그룹보다 흔쾌히 4배 더 오래(12분 간) 기다렸다.
주변 사람들이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세상과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를 갖게 된다. 세상이 질서 있고 예측 가능하며 안전한 곳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무언가 부족하더라도 상황이 괜찮아질 거라고 확신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여유 있는 사고방식이다.
반면에 주변 사람들이 거짓말하고 약속도 안 지킬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해 믿음을 잃게 된다. 세상은 질서 있거나, 예측 가능하거나, 안전한 곳이 될 거라고 기대할 수 없는 위험한 곳이 된다. 우리는 경쟁적인 생존 모드로 들어가 장기간의 이득보다 당장의 이득을 선택하게 된다. 이것이 결핍의 사고방식이다.
“(…) 두 분은 제가 못된 짓을 하더라도 저를 늘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셨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다 받아주진 않으셨고요. 예를 들어 두 분 다 돈이 있으면서도 제 변호사 비용을 대주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비난은 절대 하지 않으셨죠. 편하고 안전한 공간이 마련되도록 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진실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술을 거의 안 마셔요. 뭔가를 해도 극단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고,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라서 정말로 그 길로 갔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 인생에서 그 한 번의 결정적인 순간에, 그러니까 DUI로 걸렸을 때 사실대로 말한 게 저를 다른 길로 이끌었던 것 같아요. 오랫동안 솔직하게 지낸 게 저 자신을 더 편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고요. 저한테는 비밀이 없어요.”
나는 환자들과 만나면서 솔직함이 의식을 고양하고, 더 만족스러운 관계를 만들며, 더 진심 어린 이야기에 힘쓰도록 하고, 만족 지연 능력을 강화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 또한 솔직함은 미래에 중독이 커지는 상황을 막아 준다.
그러나 내게 솔직하기란 매일의 도전이다. 내겐 이야기를 살짝 꾸며서 나를 돋보이게 하거나 나의 나쁜 행동을 변명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늘 있다. 그런 충동을 이겨내려고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5년 동안 꾸준히 회복기를 가진 토드는 12단계 중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단계는 10번째 단계(“개인적인 확인 목록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잘못했을 땐 바로 인정한다”)였다고 말했다.
“매일 저 자신을 확인했어요. 자, 나는 마음이 꼬였나? 뒤틀렸다면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벌충할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벌충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서 지난번에 저는 환자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게 주지 않은 레지던트를 상대해야 했어요. 좌절감이 들었죠. 이게 왜 제대로 되지 않았을까? 그 좌절감을 느낄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토드, 그만해. 이걸 생각해봐. 이 사람은 너보다 경험이 거의 10년이나 부족해. 겁이 났을 거야. 좌절하는 대신 그가 필요로 하는 걸 얻도록 어떻게 도와줄 거야? 이건 회복에 들어가기 전에는 하지 않았을 일이죠.”
일반적으로 종교 단체나 사회적 집단이 여러모로 관대하고 규칙과 제한이 적을수록 더 많은 추종자를 끌어들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더 엄격한 교회들’이 무임 승차자를 걸러내고 더 탄탄한 집단선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분방한 단체들보다 더 많은 추종자를 거느릴 뿐 아니라 성공적으로 안착할 확률도 더 높다.
상호 간의 솔직함은 수치심을 없애는 동시에 친밀감을 길러준다. 우리가 결점을 갖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때, 그들과 나누는 깊은 유대감에서 이러한 따뜻한 감정이 커진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친밀감을 만드는 방법은 완벽함이 아니다. 실수를 바로잡는 데 다 같이 노력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가 친밀감을 높인다.
친밀감 폭발은 우리 뇌의 내인성 도파민 분비를 자극한다. 하지만 값싼 쾌락으로 급증하는 도파민과 달리 진실한 친밀감을 통해 급증하는 도파민은 적응성이 뛰어나고, 활기를 되찾아 주며, 건강을 증진한다.
쓰는 직업 / 곽아람 / 마음산책
일기 쓰기와 편지 쓰기를 통해 혼자 연마하거나 대학 강의실에서 리포트를 쓰며 지도받던 시절이 내 글쓰기 훈련의 1막이었다면, 신문사 입사 이후의 시기를 2막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건 정말이지 끊임없이 ‘나’를 지워가는 과정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완전히 지워지고 싶지 않았다. 항거하며 나의 문장과 문체를 고수할 용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라는 사람이 없는 글을 쓰는 일만으로 인생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여럿이 있는 술자리에서 한 선배가 말했다. “기사의 문장은 효율적이지만 어디까지나 신문을 위한 글이야. 자신만의 글을 계속 쓰는 연습을 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문장이 망가져.” 친한 선배도 아니었는데 그 말만은 가슴에 콕 박혔다. (p.19)
2022년 12월, 우리 회사 편집국의 여성 부장은 딱 한 명인데 그 한 명도 뉴스 제작 부서에 있지 않아 지면 회의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남자들끼리, 남자들의 언어와, 남자들의 세계관으로 진행되는 회의를 보면서 ‘세상의 절반은 여자인데 세상을 담는다는 신문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도 되나’ 생각한다. 여성 기자 수는 또 어떤가. 우리 회사 편집국 소속 전체 기자 수는 237명, 여성 기자 수는 66명이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늘었다며, 여성 기자가 더 이상 마이너리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비율로 따지면 고작 28퍼센트다. 비단 우리 회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여성기자협회 조사에 따르면 2022년 10월 기준 국내 언론인 중 여성 비율은 약 30퍼센트로 추정된다. 여성 임원 비율은 5.92퍼센트, 국·실·본부장급은 14.09퍼센트, 부국장급은 12.72퍼센트, 부·팀장급은 19.25퍼센트에 그친다. (p.97-98)
아버지의 책장에서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제3세대 한국문학전집’을 꺼내 읽던 중학교 1학년 때가 기억난다. 1990년대 초반이었다. 여자 작가가 쓴 책을 읽고 싶었는데 책등에 한자로 적힌 작가 이름만 보고는 짐작이 어려웠다. ‘오정희’를 뽑아보고 성공했지만 ‘김승옥’과 ‘송기숙’에서 실패했다. 이름에 ‘옥’이나 ‘숙’이 들어가도 여자가 아니라니……. ‘박완서’가 여성이라는 것, 남자 같은 그 이름의 가운데 글자가 ‘아름다울 완’이란 걸 배운 것이 책을 모조리 뽑아 프로필을 확인한 후 얻은 성과였다. ‘우리 시대, 한국문학의 정신’이라는 문구와 함께 이청준을 제1권으로 1983년 초판 발행된 스물네 권짜리 전집 중 단 두 권만 여성이 쓴 것이었다. ‘아, 재미없다’ 생각했지만 분노하지는 않았다. 당연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교실에 남학생이 더 많은 것도, 사회 요직의 대부분이 남성인 것도.
당연했던 세상이 당연하지 않게 변하고 있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소설가는 일곱 명 모두 여성이다. 주변의 남성들이 이 사실에 당혹해하는 걸 보면서 좀 억울했다. 나는 왜 지난 세월 동안 당혹감조차 느끼지 못했던가? (p.103-104)
가끔씩, 인터뷰 때 나눴던 또 다른 문답을 생각한다. 그 시절 여성으로는 드물게 독신이었던 선생님. 같은 독신 여성으로서 선배 여성들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여쭤보았다. 외롭지 않냐고 주변 사람들이 물으면 이렇게 답하신다고 했다. “아, 외롭지. 그럼 당신은 안 외로워?” 그러게, 우린 모두 외로운 사람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아이가 있든 없든, 연애를 하든 안 하든, 결국 인생이란 자기 짐을 혼자 짊어지고 걸어가는 길이라는 이치를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해주셨다. (p.113-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