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과 도덕 / 김상규 / 안그라픽스
착하다는 말이 본디 그렇게 많은 뜻을 담고 있지는 않다. 높세울 남영신 선생이 쓴 국어사전에 따르면 ‘착하다’의 풀이는 “언행이 바르고 어질다.” “마음씨가 곱고 어질다.”는 게 전부다. 가격이 바르고 어질 리가 없고 식당이 곱고 어질 수가 없는데, 착하다는 표현이 요즘은 비인격 주체에도 부쩍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착한 몸매’ ‘착한 글래머’라는 말도 있는데, 이 경우는 천박하지 않고 청순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오늘날 착하다는 것은 ‘착한 아이’와 같이 더 이상 인성이 어질다는 뜻을 갖지 않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좋은 가치를 욱여넣는 말로 편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착한’이 남발되다 보니 그 좋은 말이 우스워진 것 같다. ‘착하게 살자’(실제는 ‘차카게 살자’로 표기)는 말이 깡패들의 역설적이고 유희적인 구호이고, ‘그 사람 착해’라는 말은 매력 없는 사람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으로 통용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착한 디자인’은 뭔가? 착한 학문이란 것이 없고 착한 분야라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표현이 생겼을까? 착한 공학이라든가 착한 예술, 착한 건축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보면 착한 디자인은 살펴봄 직한 별난 경우다. (p.18-19)
도널드 노먼의 말대로 스리마일섬 원자력발전소의 비상 밸브가 잘 설계되었다면 1997년에 사고 위기를 넘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위험한 상황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었다. 원자력발전소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에 국제 사회가 원자력발전소 관리의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고 심지어 원자력발전소의 안정성 자체에 대해 강한 의심을 표명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노먼은 문제의 원인을 디자인으로 돌린다. 게다가 디자인을 더 잘하라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어쩌면 착한 디자인은 노먼이 사고를 바라보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복잡한 문제와 불만을 간편하게 해소하려는 방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조와 제도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디자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그에 대한 해법만을 찾고 있다. 그것이 도덕으로 귀결되어 디자인은 착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p.29)
한편으로 보면 정직함, 진정성 등 착하다고 평가받는 가치는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고 성공한 기업일 경우에만 조명을 받게 된다. 거꾸로 말해서 성공했기 때문에 그 기업이 지켜온 가치가 더 소중해 보이는 것이다. 탈세와 착취로 성공을 거둔 글로벌 기업보다야 이러한 기업이 훨씬 훌륭하고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착하다는 가치를 소신 있게 추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기업에게도 우리가 그런 관심을 갖게 될까?
착한 기업, 착한 소비는 정직하고 진실한 기업가가 성공했으면 하는 우리의 바람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풀이할 수 있다. 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계를 고수하고 싶고 그것이 도덕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는 건강한 자본주의이길 바라는 그런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도 지금도 공격적인 경영이 기업 생존의 논리가 되어 왔다. 그나마 최근에 도덕적 논리가 소비자를 설득할 매력적인 논리로 잘 맞아떨어졌지만, 기업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또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 예컨대 건강한 먹거리로 유기농이 환영받다가도 ‘통큰’ 시리즈처럼 파격적인 가격의 상품을 내세우면 소비자는 금세 그리로 몰려가곤 한다. 그러므로 시장 경제에서 ‘착하다’는 표현은 한시적이고 불안한 가치다. (p.80)
1990년대에 등장한 ‘위장환경주의(Greenwashing)’라는 용어는 “어떤 것의 본질을 가리기 위해 친환경 요소를 덧칠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를 일부 기업들은 영리 추구의 수단으로만 활용하려 한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저술가인 조엘 매코워는 이런 기업들의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나열했는데, 그중에는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사면 ‘지구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항목도 있다.
사실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제품은 결국 쓰레기를 만든다. 쓰레기가 많아진 것은 단지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물건을 버리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구매력에 의존하는 대체효과는 또 다른 소비를 낳고 만다. 수전 스트레서는 유행이라는 개념을 전파한 소비 혁명의 발생 시기는 18세기지만, 멀쩡한 물건을 버리는 것은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나타났다고 했다. 구식이 된 것을 버리는 습관이 퍼진 것일 뿐 “원래부터 쓰레기인 물건은 없다.”고 확신한다. 런던디자인뮤지엄의 관장인 데얀 수직은 중세 교회에서 폐기된 면죄부 판매의 관행이 탄소 배출권의 형식으로 부활하고 있는데 그것으로는 6개월마다 휴대전화를 새것으로 바꾸는 습관이 변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일상의 사물들은 사용한 기간이 길고 짧은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 행태 때문에 새 것과 쓰레기로 현격하게 ‘분류’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몸에 배인 소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미국 소비자의 약 70퍼센트는 스스로 환경론자라고 생각하고, 그중 ‘녹색’ 상품이 조금 더 비싸더라도 구입하겠다는 사람도 65퍼센트에 이른다고 한다. 또 76퍼센트는 ‘노동력 착취가 없는(Sweat Free)’ 공장이라는 보증이 있다면 20달러짜리 의류에 4달러를 더 지불하고라도 사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정작 환경친화적인 상품 구매율은 10퍼센트에 머문다. 그것도 나이키에 유기농 면이 들어간 극히 일부 제품을 구매하는 수준이어서 소비 행태 자체가 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p.90-91)
미국의 저널리스트 헤더 로저스는 ‘녹색 꿈(Green Dream)’이라는 글을 “2007년 초 멕시코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구절로 시작하고 있다. 녹색 꿈을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웬 폭동인가? 옥수수 가격이 80퍼센트 넘게 치솟아서 노동자와 농민들은 그들의 주식인 토르티야를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바이오 연료가 인기를 끌면서 옥수수, 콩과 같은 식용작물을 대량으로 수확한 것이 원인이었다. 화석연료를 대신해서 친환경적인 연료를 공급한다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먹거리를 빼앗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들을 직접 목격한 헤더 로저스는 우리가 ‘바이오’ ‘에코’ 등의 수식어에 대해 낭만적이고도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음을 꼬집기 위해서 ‘녹색 꿈’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한편 네덜란드의 건축가 비니 마스의 ‘녹색 꿈’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녹색을 누구나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만큼 남용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녹색 건물이라는 이름으로 잔디가 깔려 있거나 태양 전지 패널을 붙인 추한 건물은 미덕(Virtue)이 미학(Aesthetics)보다 우위에 있음을 말해준다고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녹색은 앞으로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p.93-94)
공정무역의 복잡한 상황을 보여주는 예로 바나나를 살펴보자. 바나나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높고 많이 팔리는 과일이다. 한편 미국의 작가인 댄 쾨펠은 바나나가 가장 골치 아픈 농작물이라고 주장한다. 바나나는 흔히 알고 있듯이 나무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풀이다.
바나나는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한창 도시화가 진행되던 미국에서 인기가 높았다. 당시 바나나를 수입하던 대형회사는 바나나를 저렴하고 영양가 높은 ‘국민 과일’로 각인시키려고 했다. 이들은 가까운 중앙아메리카 농장을 사들이다시피 했고 파나마 병으로 피해를 입자 저항력 있는 품종을 찾기 시작했다. 점차 먼 거리를 이동해서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위한 철도, 해상 운송, 저장기술을 갖추어야 했다. 다른 농작물과 마찬가지로 농약 살포와 같은 환경 문제, 노동 인권 문제가 불거졌고 콜롬비아에서는 바나나 노동자 유혈사태까지 벌어졌다.
근래에는 유기농과 공정무역 바나나가 등장했다. 문제는 저렴한 농지와 인건비 때문에 중앙아메리카에서 재배하던 기업들은 이제 아프리카 대륙으로 농지를 찾아 나섰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들은 다시 숲을 걷어내고 또 대규모 농장을 건설할 것이다.
상품성 있고 강한 품종만 남고 나머지는 도태되면서 품종 다양성이 훼손되었고, 그 때문에 병에 무기력하게 노출된 현실을 유전자 변형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혔다. 각 지역의 독특한 종자들이 이미 사라진 상태에서 여전히 많은 수요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을 공정한 거래로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p.99-100)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중에서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예술평론가인 수전 손택은 생애 최후의 저서로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을 출간했다. 이 책은 그녀가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한 1993년부터 사라예보에서 그곳 시민들과 공포의 시간을 경험에서 비롯한 생각을 담은 것이자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성인의 개입이었다. 우리말로 번역되던 때, 그러니까 세상을 떠나기 꼭 1년 전인 2004년에 그녀는 ‘한국의 독자들에게’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책은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저는 이 책의 도움을 받아서 사람들이 이미지의 용도와 의미뿐 아니라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우리가 너무나 많은 이미지를 접하기 때문에 어쩌면 수동적인 태도로 먼 나라를 상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전 손택은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연민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정작 그녀가 우려한 것은 ‘우리’와 ‘그들’의 정의(Definition)에 있었다. 우리는 누구이고 그들은 누구인가?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선한 의도였다고 해도 연민은 뻔뻔하거나 부적절한 반응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p.102-103)
브루스 누스바움은 《비즈니스 위크(Businessweek)》에 OLPC(One Laptop per Child)에 대해 독특한 시각의 글을 썼다. 그는 OLPC 프로젝트가 서구의 교육 체계를 기준으로 생각해낸 대안을 다른 방식의 교육 체계와 문화를 가진 곳에 억지로 적용하려고 한 것에서 이미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중국과 인도의 교육부 관계자들 중에는 왜 서구의 학습 도구 때문에 자신들의 교육 방식을 바꿔야 하는지 의문을 갖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학생이 컴퓨터를 활용하면서 교사의 역할, 학생들 사이의 관계,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스쿨오브비주얼아트(SVA)의 베라 사체티는 디자인 비평 과정(D-Crit program)의 석사 논문에 이와 같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그녀는 OLPC가 결과적으로는 교육용 저가 노트북 시장을 개척하여 서구 산업에 이익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디자인 십자군: 사회적 디자인에 대한 비평적 고찰(Design Crusades: A Critical Reflection on Social Design)’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제3세계가 디자인의 선교지로 왜곡될 것을 우려한다. 본국에서 선교지를 관할하는 것처럼 원격으로 디자인을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p.103-104)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동정심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고 한다. ‘감정이입(Empathy)’은 스스로 경험하지 않았지만 가치와 이념의 도움으로 다른 사람의 사정에 동정을 느끼는 것이고 ‘공감(Sympathy)’은 사실의 구체적인 접촉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사정에 동정을 느끼는 것을 지칭한다. 고려대학교 최장집 교수는 감정이입을 인간 행동의 급진성을 불러오는 감정형태로 보고 현실의 삶에 기초하지 않은 진보적인 운동이 그런 형태를 띤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강한 신념 윤리를 일으키는 반면에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 윤리가 약하다고 보았다.
요즘은 ‘Empathy’가 ‘공감’이라는 우리말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석학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The Empathy Civilization)』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동정(Sympathy)’이란 말은 유럽 계몽주의 시기에 유행했고 공감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동정이 수동적인 입장을 의미하는 반면에 공감은 적극적인 참여로, “관찰자가 기꺼이 다른 사람의 경험의 일부가 되어 그들의 경험에 대한 느낌을 공유한다.”고 구분한다.
최장집 교수와 제레미 리프킨의 입장이 조금씩 달라서 각 저자의 책에는 ‘공감’이라는 우리말이 서로 다른 영어 단어로 병기되어 있다. 우선 제레미 리프킨에 따르면, 공감의 ‘감(pathy)’이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것”을 뜻한다고 하니, 영어 표현이야 어찌 되었든 ‘공감’이 갖는 의미는 분명히 큰 듯하다. 여기에 덧붙여 다른 사람의 고통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쁨에도 역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제레미 리프킨의 주장은 상당히 신선하게 들린다.
한편 최장집 교수가 공감을 언급한 핵심은 현실에 대한 감각이다. 그것은 지식인, 교양인으로서 느끼는 감정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려는 것이었고 치열한 삶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개선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p.112-113)
미래의 금속이라고 불리는 알루미늄은 재활용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가볍고 매력적인 금속 질감에다 인체에 무해하다는 특성 때문에 음료용기를 비롯하여 여러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알루스위스(Alusuisse)와 같은 알루미늄 회사들은 이름 있는 건축가, 디자이너 들과 접촉하면서 알루미늄에 관심을 갖도록 했고 디자인 공모전을 열기도 했다. 그 결과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하는 알루미늄 재질의 가구와 건축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뉴욕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파올라 안토넬리는 알루미늄이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재료이자 여러 얼굴을 가진 금속”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알루미늄의 원료인 보크사이트가 땅에서 나오고 이것의 채굴 때문에 엄청난 환경파괴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보크사이트는 노천광에서 채굴하여 얻는데 브라질, 자메이카 등 몇몇 열대지역의 나무를 베어내야만 한다. 제련 과정에서도 어떤 금속보다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붉은 진흙이라고 불리는 폐기물은 물과 결합하면서 강한 알칼리성 물질로 변해 주변에 서식하는 동물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지하수까지 오염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속 가능을 이야기하려면 많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최근에는 막연하게 긍정적으로만 인식되던 재활용에 대한 비판적인 주장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물론 재활용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재활용은 가장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지, 가장 먼저 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재활용이 친환경적 실천을 한다는 첫 번째 징표로 여기고 있다.
생산과 소비, 사용, 폐기의 근본적인 문제 그리고 성장 지상주의의 경제 모델이 갖는 한계,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는 잘 다루지 않는다. 소각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재활용은 책임을 면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방책이 되고 있다.
분해 가능하다는 바이오플라스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모빌케미컬컴퍼니(Mobil Chemical Company)는 옥수수 전분을 플라스틱과 섞어 만든 ‘헤프티(Hefty)’라는 이름의 쓰레기 봉지가 자연분해된다고 홍보했다. 나중에 모빌의 대변인은 그것이 홍보용이었을 뿐이라고 실토하여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오늘날도 100퍼센트 식물로 만든 플라스틱은 거대 농장에서 엄청난 양의 농약을 살포하여 길러낸 유전자 조작 작물이 원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이오 연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식량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 일회용 용기로 제작되고 생물의 다양성까지 파괴하고 있다. (p.123-124)
노동은 모든 사회 구조물의 기반을 이루는 힘이다. 경제성장도 시장도 대기업도 정부도 모두 노동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디자인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디자인도 노동이다. 간디는 “지적인 생계 노동은 언제라도 가장 높은 형태의 사회봉사”라고 하면서 육체노동뿐 아니라 지적 노동의 가치도 인정했다. 보편적인 이익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은 그의 임금을 받을 만하고 그러한 생계노동이 사회봉사와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직업적인 활동과 봉사를 구분하려는 선입견을 깨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회에서 착함을 논할 수 있는가. 공공기관에서조차 공적인 일에 대한 공헌 또는 다음의 프로젝트 참여 기회를 위한 봉사의 의미로 엄연한 디자인 업무를 무료로 요구하기도 한다. 물론 행정적으로 윗사람의 재가를 받기 위해 시각적인 이미지나 샘플을 첨부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비용이 따로 책정되어 있지 않아서이다. 시각적인 설명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그런 예산을 편성하지 않는가.
착한 디자인의 수용 여부를 최종 판단하는 기업의 경우는 이에 비할 수 없이 심하다. 착한 상품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노동자에게 착한 가격으로 납품을 요구하거나 사전에 합의된 프로세스 이상의 노동을 추가해서 요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경쟁 사회에서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한 당연한 비즈니스라면 정부와 기업에서는 착한 디자인이라는 말을 떠들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아이디어와 노동의 착취를 무감각하게 반복하는 기관이라면 더욱 그렇다.
에른스트 슈마허는 젊은이들이 앞으로 좋은 노동을 할 수 있도록 어떤 준비를 하도록 해야 할지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먼저 젊은이들에게 좋은 노동과 나쁜 노동을 구별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들에게 나쁜 노동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노동의 즐거움과 필요성뿐 아니라 무의미한 노동의 혐오스러운 점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만약 노동을 불쾌하지만 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면 일을 ‘덜’ 한다는 의미 외에 좋은 노동이란 없습니다.”라는 말이 지당하다. (p.149-150)
2018년 6월, 법무부는 예멘을 제주도의 무사증 입국 불허국에 포함시키기로 했고, 같은 시기 광화문에서는 난민 반대 집회까지 열렸다. 참가자들의 손에는 “국민이 먼저다”라는 구호가 들려 있었다. 여기서 ‘국민’은 누구일까? 한국에 사는 사람 모두를 말할까? 그렇다면 배가 침몰하고 집과 일터에서 내몰리고 소수자 또는 약자로서 최소한의 존엄도 지킬 수 없었던 이들도 거기에 포함되어야 하는데 그들도 정말 ‘먼저’였을까? 아마도 집회에서 말한 ‘국민’이라는 개념은 국적이 다른 사람, 정확히 말하면 내 일자리를 뺏거나 나에게 위협이 될 법한, 부유하지 않은 나라의 유색인들을 배제하려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디자인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인간을 위한 디자인,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지 않는가. 이 책의 주제인 도덕성을 고려한다면 더 절실한 말일 텐데 그 ‘인간’과 ‘모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난민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말하는 ‘국민’처럼 선택적인가? 내가 아는 한, 디자인은 국민의 개념을 강조하지 않는다. 도덕적 디자인, 책임감 있는 디자인의 대상은 오히려 먼 나라에 사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궁핍하고 열악한 환경에 처한 빈민과 난민, 이재민이 그들이다. 정작 그들이 우리 곁에 왔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이제 궁금해진다. 멀리 있는 그들을 위한 노트북이나 펌프, 정수 빨대 같은 제품과 서비스 디자인을 개발하고 그들을 돕자는 포스터와 티셔츠, 동영상, 앱은 만들 수 있지만 그들과 이웃으로 살고 그들과 일자리를 나누는 일은 꺼리는 것이 아닐까.
최근에 일어난 예멘 난민 입국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이제 앞으로 다가올 갈등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이민자 문제는 디자인 전문가 집단을 포함한 한국 사회에서 더 비중이 커질 것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 안에 있는 감정들이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p.172-174)
도덕적 접근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어떤 부분이 낫다는 것인가? 그리고 정말로 그 어떤 부분이 나아진다면 그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무엇보다 의문스러운 것은 더 나은 사회를 과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어떤 판단을 내리기가 무척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고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학습과 경험에 기대어 막연하게 근원적이라고 여기는 윤리의 문제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현실을 파악하고 맥락을 짚어낼 능력이 없는 공동체의 상상력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 원인은 금융자본주의 현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미 문화예술 분야에서 언급되어온 금융화는 영웅적 예술가 대신 브랜드화 된 예술가를, 예술애호가 대신 투자자들을 부상시켰고, 예술을 투자와 수익의 세계에서 화폐와 다를 바 없는 대상으로 추상화했다. 금융자본주의는 미국의 부자들이 ‘모범적인 기부’를 하는 선행 수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한때 사회적 금융, 사회 투자라고 표현하다가 근래에는 ‘임팩트 금융’으로 널리 알려진 현상이다. 미국의 금융경제학자 로버트 실러의 저서 『새로운 금융시대(Finance and the Good Society)』는 금융이란 말이 가진 좋지 않은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 그는 금융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윤리적으로 좋은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금융도 충분히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금융 시스템이 사람들에게 더 좋은 본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낙관한다.
그 책이 출간될 때쯤 설립된 재단법인 한국사회투자도 비슷한 논리의 의견을 언론에 개진했고 ‘금융의 인간화’ ‘착한 투자’ 등의 표현도 언급했다. 2017년에 임팩트금융추진위원회가 출범하기도 했는데 위원장을 맡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2,7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유치하여 주거, 환경 등 다양한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금융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 정부까지 나서서 2018년 2월에 사회적 금융 활성화 방안을 내놓았다. 금융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는데 이 사회 문제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예컨대 오늘날 사람들이 왜 부채를 갚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몹시 혼란스럽다. 한때 녹색자본주의라는 표현이 유행했음에도 환경이 이 지경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p.174-175)
쓰레기에 관한 모든 것 / 피에로 마틴, 알레산드라 비올라 / 북스힐
냉장고와 식품저장실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 안에 있는 것 중 실제로 얼마나 소비하는가? 서방 국가에서는 쓰레기가 매우 많이 나오고,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버리는 관행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의뢰를 받아 2016년에 발표한 「유럽 음식물 쓰레기 수준 평가(Estimates of European food waste levels)」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식량 생산량의 3분의 1에서 절반 정도가 소비되지 않는다.
이 데이터는 다양한 출처에서 수집한 것이며 서로 다른 유형의 음식물 쓰레기(이 표현에서는 가정에서 버린 쓰레기뿐만 아니라 시장 가격이 너무 낮아 경작지에 버려지는 수확물, 식당과 농장에서 나온 남은 음식물, 산업 생산에서 나온 폐기물 등이 포함된다)를 비교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음식물 중 쓰레기가 되는 양이 막대하다는 사실이다. EU로만 한정하더라도, 버려지는 음식물이 2012년 추정 8,800만 톤에 달한다. 매년 유럽 시민 1인당 평균 173kg의 음식물을 버리는 셈이다. 2011년 EU에서 생산된 1인당 음식물의 양이 865kg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약 20%가 버려지는 셈이다. 요컨대, 파스타 5봉지, 달걀 5개 혹은 요구르트 5통 중 하나는 곧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는 말이다.
2012년 유럽에서 음식물 쓰레기 관련 비용은 1,430억 유로로 추정되며, 이 중 3분의 2(약 980억 유로)는 소비자가 부담한다. 흥미롭게도, 보고서에 따르면 버려진 음식물의 약 60%는 여전히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먹을 수 있는 음식물 쓰레기 1톤당 3,529유로를 낭비하는 것과 같다. (p.38-39)
광산에서 1g의 금을 추출하려면 약 1톤의 광석이 필요하다. 이 말은 2014년 7월 2일 EU 환경장관 야네스 포토츠니크에게 제공된 보도자료에 나온 내용이다. 그러나 다음 문장이 없었다면 언론인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41대의 휴대전화에 있는 물질을 재활용하면 같은 양의 금을 얻을 수 있다.”
이 수치는 유엔 대학교 고등연구소(UNU-IAS)를 포함한 여러 권위 있는 출처에 의해 뒷받침된다. 보고서 중 하나는 2014년 전 세계에서 생산된 전자제품 폐기물에 들어 있는 금의 양이 약 300톤이라고 추정한다. 이는 2013년 광산에서 생산된 금(약 2,770톤)의 약 11%에 해당한다. 거기에 더해 은 1,000톤, 팔라듐 100톤, 철 1,650만 톤, 구리 190만 톤, 알루미늄 2만 2,000톤이 있으며, 이는 350억 유로의 추정가치가 있다. 이 때문에 전자 폐기물을 종종 도시 광산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관리는 매우 복잡한 문제를 수반한다.
어쨌든 오래된 휴대전화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p.91)
생명의 근원에는 이상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학 원소가 있다. 바로 인(P)이다. 주기율표에서 원자번호 15번인 인은 1669년 독일의 상인 헤닝 브란트가 처음 분리했다. 그는 소변을 증류해서 인을 얻었는데, 그 명칭은 ‘빛을 내는 것’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파생되었다. 이것은 산소와 접촉하면 발광하기 때문이다.
인은 생선에 풍부하며 기억력 향상에 좋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생선이 다른 많은 음식보다 인을 더 많이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기억력과의 상관관계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한 번도 없다.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인이 칼슘의 동화를 촉진하기 때문에 뼈와 치아에 좋다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어릴 때부터 불러온 첫 번째 원소 중 하나라는 것 외에도 인은 다른 많은 중요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인은 DNA와 RNA, 세포벽과 세포막의 필수 구성 요소이며, 이것은 바로 생명의 뿌리가 된다. 뿌리라는 용어는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물질을 사용하는 최초의 유기체는 바로 식물이고, 그 덕분에 이 물질이 먹이사슬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인은 산소, 탄소 및 물과 같이 식물의 생명에 필수적이다. 인이 없으면 식물은 자라지 않고 장기적으로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없어진다면, 지구상에서 식량이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것이 풍부하면 농업수확량이 높아질 것이다. 인은 비료의 주성분 중 하나이다. 두 세기 전까지만 해도 농민들은 토양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 분뇨나 음식물 쓰레기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이 수천 년 동안 균형 있고 비옥한 토양을 유지해온 순환 과정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농업은 변했다. 실험실에서 합성할 수 없는 인의 대부분이 인산염 형태로 채굴된다. 이것은 우리가 수백만 년 동안 형성된 지질학적 매장량을 소모하고 있으며 이를 대체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석유와 마찬가지로 인 역시 조만간 생산의 ‘정점’에 이를 것이다. 독립적인 6개 국제 연구기관의 협력체인 글로벌 인 연구계획(Global Phosphorus Research Initiative)의 추정에 따르면 매장량은 70년 이내 소진될 것이며 조만간 모자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문제가 되기 전에 반세기를 낭비할 이유는 없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양질 인산염의 85%를 오직 5개 나라, 즉 모로코, 중국, 남아공, 요르단, 미국이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의 희소성과 비용으로 인한 지정학적 긴장이 조성될 것은 이미 확실하다. 만약 인이 종말을 맞는다면(지난 50년 동안 채굴은 매년 3%씩 성장해 4배 증가했다) 시나리오는 극적일 것이다. (p.122-123)
영구동토층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 수십에서 수백 년, 때로는 심지어 수천 년 동안이나 얼어붙은 채로 있던 북쪽 나라들의 토양층이 녹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기적으로 표면 아래 몇 센티미터가 녹았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곳은 단단해서 건물과 기반시설의 기초로 쓸 수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지구 온난화로 지반이 약해져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시작했다.
집들이 기울어지고, 다리에는 금이 가고, 도로는 비틀어졌다. 그리고 북쪽 나라들을 떠나는 환경 이민자의 문제는 이미 목전에 다가와 있다. 북극권 위에 살고 있는 수천 명의 사람은, 계속 살 수 없을 정도로 대지가 너무 약화되면, 집이 있던 곳을 떠나야 할 것이다. 러시아, 노르웨이, 중국, 캐나다, 그린란드 및 미국의 영구동토층(이었던 곳이라 하는 게 나을지도)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이것이 붕괴하는 것은 이들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위협이 된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에 따르면 사실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1조 3,300억~1조 5,800억 톤, 이는 현재 대기에 존재하는 양의 반 정도이다)가 영구동토층의 얼음에 갇혀 있는데, 이 얼음이 녹으면 방출되어 지구온난화를 증폭시킬 것이다.
심지어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사실 영구동토층 아래에 2.5기가톤(25억 톤)의 메탄하이드레이트(메탄가스가 온도와 압력 때문에 얼어서 고체 상태로 있는 것)가 있다고 추정했다. 이미 녹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먼저 물로 갔다가 대기로 방출될 것이다.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며, 대략 20~30년으로 보고 있다. (p.166)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이 생태적인 기후 폭탄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볼 시간을 가질 것이다. 마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영구동토층의 해빙은 수십, 수백, 수천 년 전의 쓰레기를 드러냄으로써, 인류에게 또 다른 위협을 주고 있다. 지하에 묻힌 유기폐기물에는 인간과 동물의 사체와 함께 그것을 죽게 한 바이러스도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해동되면 냉동된 유기체(예를 들어 매머드)는 다시 살아나지 않지만,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는 훨씬 더 저항력이 있으므로 더 높은 온도로 되돌려지면 완전한 활동 상태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2016년 8월 시베리아에서 기록된 평균 기온보다 높았던 기온은 영구동토층의 비정상적인 해빙을 야기했고, 80여 년 전 탄저병으로 죽은 순록의 사체를 드러냈다. 순록이 해동되었을 때 탄저균은 활동 상태로 돌아갔고 포자가 초지를 통해 퍼져나가 다른 많은 순록을 죽이고 어린이들의 죽음을 초래했다. 이미 사라진 것으로 믿었던 많은 박테리아가 활동을 재개했으며 불행히도 그중에는 선페스트와 같은 매우 심각한 질병도 포함되었다. (p.168)
쓰레기는 우리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인종주의자라고 말한다. 1983년 미국 회계감사원(GAO)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유해 폐기물 저장소로 선정된 네 곳과 그 지역 거주자의 인종 구성은 상관관계가 있다. 보고서는 폐기물 처분 장소의 선택이 그곳에 사는 인구와 어떻게 직접적으로 연관되는지 강조하면서, 환경적 인종주의의 개념을 소개한다. 유해 폐기물 반대에는 시간, 돈, 정치적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자원은 일부 지역, 특히 인종적 소수 집단에서 부족하기 때문에 유해물질을 저장하는 장소의 선택은 사실상 무작위나 환경상의 이유로 결정되지 않고 이러한 요소들에 연계되어 있다.
오늘날 ‘환경적 인종주의’라는 용어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소수 인종이 다소 의도적으로 오염원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경우나 물, 깨끗한 공기, 경작 가능한 땅 같은 자연자원에 대한 개인적인 접근이 다른 인종 그룹이나 기업에 더 유리한 상황을 기술하는 데 사용된다. 이 말은 강대국과 개발도상국의 관계뿐만 아니라 한 나라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국제 수준에서, ‘환경적 인종주의’ 정책의 예는 어떤 나라에서는 처리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고 금지된 위험 폐기물을 환경 법규가 덜 엄격한 국가, 일반적으로 개발도상국으로 수출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p.178-179)
피라미드, 콜로세움, 에펠 탑, 리알토 다리, 만리장성, 타지마할 등. 과거의 문명으로부터 내려온 유산을 생각하면 이런 예들이 쉽게 떠오른다. 반면 우리가 물려줄 유산은 무엇이 될 것인가? 우리 문화의 모든 산물 가운데 어떤 것이 수백, 수천 또는 수만 년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까?
예측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생산할 것들 중 적어도 하나는 아주 오랜 수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핵폐기물이다. 높은 활성을 가진 것들은 수십만 년 동안 방사능과 위험을 지닌 채 남을 것이다. 매우 먼 과거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피라미드도 단지 4,500년이 지난 것이고, 콜로세움은 겨우 1,950년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나 위험한 것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특히 미래 세대에게 핵폐기물이 주어진 장소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경고할 것인가? 인간종의 전체 문자 전통은 겨우 5,000년이며 수천 년 후까지 지식의 전승을 보장하는 알려진 방법은 없다. 왕조, 문화운동, 과학기관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기껏해야 몇 세기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다. 심지어 지금까지 가장 오래 지속된 인간의 창조물인 종교도 수천 년을 넘지 않는다.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 폐기물을 안전하게 저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동시에 똑같이 중요한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어 연구자들로 하여금 수십 년 동안 고심하게 만든다. 어떤 방법으로 후세들에게 이 저장소들의 존재와 그 위험을 알릴 것인가? 어떻게 우리의 지식을 다음 3만 세대(추산에 따르면)에게 확실히 전달할 것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은 단지 최고로 안전한 금고를 건설하는 문제가 아니라, 또한 일단 문이 닫히고 나면, 왜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하는지 설명하는 표지판을 부착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언어가 10만 년 후에도 여전히 이해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문자가? 첫 번째 문제는 미국 에너지성이 1981년 엔지니어, 고고학자, 언어학자 들로 이루어진 전문가 그룹이 모여서 이 문제를 토론할 때 제기되었다. 해결책을 제안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연구자들은 메시지가 물리적 표지와 구전 전통 둘 다를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p.180-181)
때로는 예술가들이 작품에 쓰는 쓰레기에 부여한 은유가 충분히 명시적이지 않은 경우가 발생한다. 대중의 취향이 아직 성숙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쓰레기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예술적인 대상’으로 변모할 수 없는 경우이다. 그럴 때 그것들은 진짜 쓰레기가 되어 예술가들이 부주의하게 꺼내왔던 쓰레기통으로 다시 돌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농담을 하고, 다른 이들은 불경한 행위라고 소리친다. 아마도 이렇게 단순하게 묻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 예술이 벗은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고. 자기가 매우 값비싼 마법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다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옷을 입지 않고 돌아다녔던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유명한 임금님처럼 말이다.
마지막 오해는 볼차노 박물관에서 청소부가 〈오늘 밤 어디서 춤을 추지?(Dove andiamo a ballare questa sera?)〉라는 작품을 ‘청소’해버린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술가 듀오 골트슈미트 & 키아리의 이 작품은 마루 위에 병, 종잇조각, 장식 리본과 다른 물건들을 흩어놓은 것이었는데, 청소부가 이것을 파티의 잔해로 착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전날 밤 박물관 다른 곳에서 파티가 있었다.
쓰레기로 만든 현대 미술 작품을 쓰레기로 착각한 경우는 실제로 수없이 많다. 2014년 바리(Bari)에서는 현대미술 전시회 ‘경관을 매개하는 디스플레이(Display Mediating Landscape)’에 전시된 일부 작품 중에서 빈 상자와 다양한 소모품들이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같은 해 라벤나 미술관에서는 벽에 가짜 구멍을 재현한 거리 예술가 에론의 작품 일부를 잡역부가 메워버리기도 했다. 이런 일은 이미 2001년에 데이미언 허스트의 설치미술 작품에도 일어났고, 1999년에는 영국의 가정주부가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 〈지저분한 침대(Dirty bed)〉를 청소하려고 한 일도 있었다. (p.249-250)
아르키메데스는 이 알갱이들의 일부가, 휴가객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고 선망하는 아주 곱고 하얀 열대 해변의 모래가, 기본적으로는…… 쓰레기라는 사실을 몰랐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비늘돔의 진짜 배설물이다.
색깔이 화려한 이 작은 물고기는 산호초에 서식하는 해조류와 새끼 문어를 먹고 사는데, 먹이를 먹기 위해 산호 몇 조각을 뜯어서 씹기도 한다. 이 조각은 소화가 되지 않고 완전히 탈색된 알갱이 형태로 재방출된다. 이런 방식으로 이 물고기는 조류와 다른 식물 유기체로 덮여 있는 죽은 부분을 구석구석 긁어내 깨끗하게 해주어 산호초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도움을 준다. 그렇지 않다면 산호초는 조류에 감염될 것이다. 비늘돔과 산호는 절대적인 공생 관계이다. 물고기는 보초(barrier)와 산호의 생존에 근본적인데, 산호는 그 보답으로 영양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물고기가 날카로운 이빨을 갈고 깨끗하게 할 수 있도록 한다.
열대 낙원 애호가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평균 50cm 길이의 이 물고기는 매우 게걸스럽게 먹는다. 하루 온종일 씹는데, 몇몇 추산에 따르면 1년에 100kg의 모래를 생산할 수 있다. 아르키메데스에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 시험해볼 수 있다. 우주를 새하얀 모래알갱이로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비늘돔이 필요할까? (p.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