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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휴먼 / 주디스 휴먼, 크리스틴 조이너 / 사계절

 

 가끔 부모님이 연극이나 발레, 오페라 입장권을 사 오셨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문화생활을 굉장히 좋아해서 독일에 살 때 종종 이웃 마을 극장에 가려고 몇 마일을 걸어가 단지 공연을 보기 위해 전단지 돌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우리가 문화예술과 가까이 지내도록 해주었다. 버스나 기차에는 접근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내 휠체어를 접어서 차 트렁크에 넣고 함께 갔다.
 일요일에는 아버지가 정성껏 요리해주는 베이글, 훈제연어, 흰살 생선과 사탕, 달걀, 패스트라미를 브런치로 맛있게 먹기도 했다. 식탁에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지루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버지는 토론거리를 들고 와서 우리를 논쟁하게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에 우리는 조간, 석간신문을 구독했고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들과 나는 항상 신문, 잡지, 책을 읽었다. 우리 집에서 어떤 것에 대해 의견이 있다면 방어할 준비를 해야 했다. 우리는 논쟁하고, 토론하고, 정말 많이 웃어서 이웃들은 창밖에서 분명히 우리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곧 여름이 되고 방학이 시작되면, 다시 거리에서 노는 시간이 돌아올 것이다. (p.32)

 

 조명이 번쩍 터지고 나서 인생의 모든 것의 의미가 뒤틀어졌다. 나는 이 학교에도 갈 수 없고, 저 학교에도 갈 수 없었다. 나는 이것도 할 수 없고, 저것도 할 수 없고, 계단을 걸어 올라갈 수도 없고, 문을 열 수도 없고, 길을 건너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달랐다. 항상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온 세상은 내가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은 집 안에서 침대에 누워 있다. 아픈 사람은 밖에서 놀지 않고, 학교에 가지도 않는다. 아무도 그들이 밖에서 놀거나, 어떤 무리의 일원이 되거나, 세상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마치 그 사실이 내 몸 구석구석에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것 같았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날 정도로 굴욕감을 느꼈다. 사람들이 나에게 계속 숨겼던 걸까? 부끄러움이 배 속 깊숙한 곳에 차가운 덩어리로 자리 잡고 있다가 팔다리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날씨가 맑았던가 흐렸던가. 모르겠다. 알린이 내 휠체어를 밀었고, 우리는 함께 가게에 가서 사탕을 사고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나비였던 나는 애벌레가 되었다. (p.35-36)

 

 하지만 캠프는 완전히 달랐다. 캠프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필요를 염두에 두고 기획되었고, 부모님들은 우리를 여기에 참여시키려고 비용을 지불했다. 우리의 참여는 누군가의 관대함에 달려 있지 않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거나 어디에 가고 싶을 때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한다는 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옷을 입혀주고 화장실에 데려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까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진행 요원들은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해주며 보수를 받았고, 이 사실이 세상을 바꿔놓았다.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혹은 굳이 그 일을 해줄 필요가 없을 때 부탁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호의에 기대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호의를 베푸는 동안 시간이 흐른다. 호의란 당신의 일을 돕기 위해 그들이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언제나 방해로 느껴질 수 있다.
 캠프에서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한 번에 많이 부탁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부탁하지 않기 위해 남몰래 필요한 일들에 순위를 매길 필요도 없었다. 내가 어떤 것에 접근할 수 없을 때, 그리고 나의 모든 세계가 접근 가능했더라면 나 스스로 할 수 있었을 어떤 일을 누군가 안 된다고 말했을 때 나쁜 감정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사회가 우리를 포함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캠프를 통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p.53-54)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도와달라고 말하기 싫었다. 내가 물리적으로 수업에 갈 수 없거나 계단을 오를 수 없어서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인데도 스스로 무언가를 충분히 잘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항상 들었다.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늘 걱정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화장실에 갈 필요가 없도록 최선을 다했고 가능한 한 음료를 적게 마시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무엇을 마실지, 화장실에 가야 한다면 주위의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지, 혹시 시험이나 그 밖의 다른 일 때문에 그들이 나를 도와줄 수 없는 것은 아닌지 등 많은 것을 계획하고 고민했다. 사실 요즘도 화장실에 갈 방법이 없을 때 곤란해지지 않기 위해 이런 일들을 어느 정도는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략을 짜고 부탁을 하는 내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런 일들은 내 타고난 외향성을 억압했다. 내가 타인의 호의에 그렇게 의존하지 않았더라면 그 시절에 나는 아마 훨씬 더 외향적이었을 것이다.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나를 억지로 밀어 넣어야 했다. (p.71-72)

 

 나는 교육위원회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불안했다. 하지만 이때는 처음으로 나의 권리를 위해 스스로 일어나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기도 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은 부모님이 나를 위해 싸우는 것과는 매우 다르게 느껴졌다. 현미경 아래 완전히 노출된 것 같은 기분이었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어졌다. 나의 권리를 얻기 위해 이전의 나는 요구하지 못했던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할 수 있을까? 나에게 권리가 있었던가? 많은 사람이 휠체어에 앉은 여성이 얼마나 잘 가르칠 수 있는지 궁금해하며 지켜볼 것이다. 만약 내가 이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 형편없는 교사로 평가받는다면 나의 실패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내가 가르치는 일을 잘 해내지 못해 사람들이 장애가 있는 사람은 누구를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장애를 가진 교사가 수천 명 있다면 실력 없는 교사 한 명이 눈에 띌 일은 없다. 그러나 내가 장애를 가진 유일한 교사로서 실패한다면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동시에 책임감도 느꼈다. 장애가 있는 친구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의 교사 면허 취득이 거부될 것으로 예상되자 친구들은 내게 맞서 싸울 것을 권했다. 우리는 내 사례가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장애 이슈에 대한 인식도 높일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우리의 이런 생각을 다 믿었지만, 무엇인가를 믿는 일이 항상 일을 쉽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내 몸을 채우는 강렬한 공포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약 내가 싸우지 않는다면, 누가 이 싸움을 할까? (p.88-89)

 

 나는 장애인이 교육, 고용, 교통 접근성 측면에서 마주하는 삶의 장벽이 일회성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기 위해 내 이야기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우리의 장애는 재활로 치료될 수 있는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소아마비로 인한 신경 세포 손상을 극복해서 걷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그것이 내 삶의 목표도 아니었다. 베트남전쟁에서 장애인이 되어 돌아온 퇴역 군인의 팔과 다리는 다시 자라지 않으며, 척수 치료를 한다고 해서 그들이 다시 걸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근육위축증을 가진 친구들이 장애 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사고, 병, 유전적인 요인, 신경학적 장애, 노화 등은 성별이나 인종과 같이 인간의 기본적인 상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학교나 고용주, 시의회가 장애인이 참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정책을 만들고 건물을 세우고 버스를 설계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우리의 시민권을 침해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는 우리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책임을 가져야 했다.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부가 우리를 계속 무시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정부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할 것이다. (p.91-92)

 

 1년에 걸친 소송과 첫 교직 생활 동안 나에 대한 기사가 적어도 한 달에 한 건씩은 계속해서 나왔다. 많은 사람이 나를 알아봤고 길 가는 나를 불러 세웠다. 운전을 하며 지나가다가도 경적을 울리며 나를 멈춰 세우곤 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상점에 있던 사람들도 나와서 길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축하해요! 계속 힘내세요.”
 어떤 사람들은 차별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를 돌아보면, 내가 만약 두려움과 불안에 굴복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두렵기도 하다. 소란을 피하기 위해 문제를 그대로 덮어두었다면 어땠을까? 먼저, 내가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이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고 그저 제도의 결정에 따랐으리라는 점이다. 만약 소송에서 패소했더라도 내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제도를 향해 잘못되었다고 나서서 이야기하는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믿는 것을 위해 싸웠다.
 소송에서 이겼다는 사실은 내 관점이 옳았음을 증명해주었다. 많은 장애인이 차별을 겪으며 살아간다. 시간을 가지고 싸워나간다면 우리는 차별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얼마 후 뉴욕주는 시각장애인이나 지체장애인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막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p.103-104)

 

 문제는 504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은밀하게 진행되어 그 규정의 영향을 받게 될 대학과 병원 및 다른 기관들이 포드 행정부가 의견 청취를 위해 초안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초안을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504조 도입을 꺼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기관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변화에는 시간이 걸리고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관들은 장애인을 위한 건물, 프로그램, 교실을 개선하기 위해 자원을 지출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 많은 비용이 지출될 것이며, 이는 불공정한 재정적 부담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과연 대학에 가거나 이런저런 활동에 참여하는 장애인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는 사실 우리의 딜레마이기도 했다. 이 나라는 너무 접근성이 낮아서 장애인들이 밖으로 나와 무엇인가를 하기 어려웠고, 그 결과 일상에서 장애인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쉽게 깎아내리고 무시했다. 시설이 우리를 강제로 수용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계속 갇힌 채로, 보이지 않는 상태로 살게 될 것이다. 갇힌 채로, 보이지 않는 상태로 사는 한 누구도 우리의 진정한 힘을 볼 수 없고 우리의 목소리는 묵살당할 것이다. (p.127)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휠체어를 마이크 앞으로 몰았다. 재킷에 붙어 있는 ‘504조에 서명하라’ 스티커와 함께 심장이 요동쳤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잠시 조용히 기다렸다. 수백 명의 기대에 찬 얼굴이 나를 쳐다보았다. 연설을 시작했다.
 “저는 다섯 살 때 학교에 접근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학교에 다닐 권리를 거부당했습니다. 4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우리 반 친구 중 몇몇은 열여덟 살이 넘어서도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서명이 이루어진다면 504조는 장애인이 사회의 완전하고 평등한 참여자가 되는 것을 가로막던 장벽을 무너뜨리는 역사적이고 기념비적인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목이 메어 잠시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관중은 숨죽인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규정에 이용당해왔습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숨을 들이쉬었다.
 “우리는 미국장애인시민연합을 만들었습니다. 워싱턴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고, 초안에 대해 논평하고, 전국의 기관들과 대화했습니다. 우리는 지미 카터 행정부가 수정 없이 규정에 서명할 것이라는 말을 믿었습니다.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지금 칼리파노 장관은 시간을 끌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참을 만큼 참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우리는 규칙을 잘 따르고 하라는 대로 하면, 언젠가 우리도 아메리칸 드림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렸고, 너무 많은 타협을 했고, 너무 많은 시간을 인내해왔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의 타협도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의 차별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p.138-139)

 

 “이 모든 일은 오늘 아침 풀턴가 50번지에 있는 오래된 연방 정부 건물 바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의 시위 직후에 장애인들이 건물로 쳐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마치 외국 군대처럼 묘사되었다. 대중은 어리둥절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이다. 비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실이 그렇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한번 생각해보라. 당신이 학교에서 우리를 볼 수 없다면, 그것은 학교가 우리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일터에서 우리를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 없거나 고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버스나 기차와 같은 대중교통 수단이 접근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식당이나 극장에서도 우리는 같은 이유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어디에서 보았는가?
 어딘가에서 보았다면 아마도 텔레비전이었을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불구자’ 타이니 팀도 보았겠지만, 아마도 자선기금 모금 방송에서 더 많이 보았을 것이다. 당시 제리 루이스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근육위축증 장애인을 위한 모금을 진행하고 있었고, 뇌성마비연합이 뇌성마비 장애인을 위해, 이스터 실즈가 더 광범위한 장애인을 위해 모금을 했다. 그 밖에도 많았다.
 어떤 방송이든 전부 병들어 보이는 아이를 앞세워 사람들의 연민, 아니 더 정확하게는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병들고 불쌍해 보이는 장애인의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의학적인 문제로 사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무기력하고, 어린아이 같으며, 사람들의 동정을 얻어 병을 치료할 돈을 모으는 부류의 사람들로 치부되었다. 그들에게 우리는 무언가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알릴 시간이 되었다. 연방 정부 건물을 아무 이유 없이 점거할 리는 없다. 이제 그 이유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p.154-155)

 

 504조 규정에 서명이 이루어진 이후의 몇 년은 버클리 자립생활센터에 있던 우리에게는 혼돈의 시간이었다. 법이 통과되었다고 해서 그 내용이 반드시 다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1956년에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의 버스 보이콧의 결과 대법원이 인종 차별 철폐를 명령했을 때는 법이 실행되기에 앞서 버스들이 새롭게 설계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장애와 관련해서는 504조가 통과되고 규정에 사인이 되었다고 해도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나야만 우리가 더 많은 곳에 접근할 수 있다. 그 구조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다. 504조를 이해하고, 구체화하고, 시행하기 위해서는 프로젝트, 프로그램, 조직이 구성되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통합하거나,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건물을 만들거나, 그 밖에 규정이 요구하는 무수히 많은 다른 일들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미국대중교통협회에서는 버스 시스템을 장애인이 접근 가능하도록 만드는 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는 입장문을 내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큰 싸움을 준비했다. 그러면서 버스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비용과 휠체어 리프트를 설치하는 비용이 같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버스 협회의 재정 모델은 대부분의 장애인은 버스를 타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이는 억측이었다. 그랬다. 나도 처음 버스를 이용할 때는 시내버스에 내 휠체어를 어떻게 싣는지 몰라 두려웠다. 그러나 한 번 경험해보고 나니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로는 계속 이용하게 되었다.
 솔직히 현상 유지를 원하는 사람들은 ‘아니오’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다. 특히 비즈니스와 재무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시민권을 논의하기 시작했을 때 다른 어떤 시민권 이슈에서도 비용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p.218-219)

 

 변화에 반대하기 위한 가장 단순한 주장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거나, 안전하지 않다거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비용이 많이 들고, 안전하지 않고, 불가능하다는 말은 사람들을 논쟁의 좁은 미로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재무 상황이나 안전에 관한 여러 시나리오를 두고 다양한 해석을 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결국 우리 각자가 고유하게 가져야 할 시민권이라는 이슈에서는 멀어져버린다.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여 우리가 그것을 해결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게 해야 했다.
 우리 장애 활동가들은 기술적인 부분을 지원하고, 엔지니어 및 재무 분석가와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논쟁하기 위해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다. 그 결과 더 많은 공부를 하면서 점차 전문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우리의 일이 탄력을 받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변화가 일어날 때 사람들이 학습 곡선상에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임을 인정해야 했다. 사람들이 장애인의 시각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거부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해야 했다. (p.220)

 

 나의 요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이 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는가? 장애인들은 동등한 기회를 요구하면서 혹시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건 아닌가 부담을 느끼는 마음도 극복해야 한다.
 평등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도 문제였다. 그게 아닐 때도 말이다. 평등은 공정성에 관한 이야기다. 접근 기회의 형평성에 대한 이야기다. 나 같은 사람,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는 수천수만의 우리는 주거나 건강, 교육, 고용 등의 문제에서 접근 기회의 형평성을 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경사로, 더 넓은 출입구, 안전 손잡이, 수어 통역사, 자막, 접근 가능한 기술, 음성 안내, 점자로 된 문서, 지적장애인과 지체장애인을 위한 활동 보조인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권리를 요구하는데도 ‘불만이 많다’, ‘이기적이다’라는 틀에 갇히고 만다. 이런 일은 특히 여성에게 일어난다. 우리는 ‘끝없이 요구하는 사람들’이라 불리고, 물러서지 않으면 ‘끈질기다’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에게 ‘끝없이 요구하는’, ‘끈질긴’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우리를 ‘굴복하게’ 하려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p.221-222)

 

 “비장애 어린이의 교육 문제 먼저 다루죠. 그런 다음 장애 어린이를 걱정합시다.”
 이 모든 상황은 낯설지 않았다. 기본적인 논리는 이런 것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x’ 또는 ‘y’ 또는 ‘z’의 혜택을 장애가 없는 사람들만큼 받지 못할 것이다. 이는 ‘x’ 또는 ‘y’ 또는 ‘z’가 필수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혜택 없이 살아간다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교육, 고용과 같은 다른 이슈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것은 무슨 논리인가? 여기에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배울 수 있는 잠재력이 떨어지고, 사회에 기여할 능력도 부족하며, 덜 유능하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즉 우리가 덜 평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가?
 장애는 인간사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전쟁을 일으킬수록, 의학이 발달할수록 이전 시기라면 아마 죽었을 사람들이 점점 더 오래 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장애를 가진 채.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을 중심으로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 (p.280-281)

 

 

지상 최대의 작전 / 이한결 / EBS BOOKS

 

 2019년 호주에서는 유례없는 가뭄과 폭염으로 산불이 6개월간 지속되면서 우리나라 면적보다 넓은 12.4만 제곱킬로미터의 숲이 불타올랐다. 호주 숲의 20퍼센트 이상이 잿더미가 되고 약 30억 마리의 야생동물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생태계 교란이 일어났다. 광합성으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는 나무들이 사라지면서 자연의 이산화탄소 흡수 능력은 감소한 반면 나무가 수십 년 동안 흡수해서 저장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탄소는 한꺼번에 방출된 것이다. 이 산불이 뿜어낸 이산화탄소의 양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1퍼센트가 넘는다.
 호주의 숲과 마찬가지로 대기 중의 탄소를 흡수하며 탄소 순환의 역할을 담당하는 아마존 열대우림, 아한대 숲 등이 산불과 삼림 벌채 등으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숲이 파괴되면 나무가 타거나 썩으면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해 이중고를 낳는다. 삼림 벌채 등의 토지 이용으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양은 9퍼센트 정도로 화석연료에 비하면 적은 양이지만 탄소 순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산화탄소 저장 공간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는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양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산화탄소의 증가 추세다. 불과 150년 만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420피피엠까지 급격하게 치솟았고 머지않아 500피피엠에 이를 것이다. 현재의 농도에 이르게 만든 이산화탄소 중 절반 이상이 지난 30년 사이에 배출되었다. 이는 자연적으로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는 것보다 100배에서 1000배 빠른 속도다. 자연 상태에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연소될 화석연료가 인간의 활동으로 불과 150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마구잡이로 연소되었기 때문이다. 매년 화석연료의 사용에 의해 약 370억 톤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지만 자연은 그 절반도 흡수하지 못하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늘어만 가고 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p.31-33)

 

 RE100은 2050년까지 글로벌 기업들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퍼센트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겠다는 국제 캠페인이다. RE100에 가입한 292개 글로벌 기업들 중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30여 개 기업은 2020년에 이미 재생에너지 100퍼센트라는 목표를 달성했다(국내에서는 SK그룹이 최초로 가입신청). 이 기업들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재생에너지 발전 단가가 원자력이나 석탄보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수요가 늘고 관련 기술이 발전해 단가가 계속 하락하고 있다. 가격도 싸고 환경에도 이롭고 ESG 평가도 좋아지는데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동안 우리나라 상황은 국제적인 분위기와 동떨어져 있었다. 국내에서는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와 따로 계약을 맺는 것이 불가능해서 재생에너지를 공급받을 방법도, 인증받을 수 있는 제도도 없었다. 2020년 정부가 그린뉴딜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형 RE100 도입을 결정하면서 달라지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녹색프리미엄제, 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구매, 자가발전 등을 통해 재생에너지를 구매하고 인증받을 수 있게 되었다. (p.60-61)

 

 미국항공우주국(NASA)을 비롯한 50여 개 연구기관이 참여한 연구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18년까지 3조 9000억 톤에 달하는 그린란드의 빙하가 소실되었고 이로 인해 해수면은 10.8밀리미터 상승했다. 빙하가 녹아내리는 속도는 1990년대부터 꾸준히 늘어 2010년대에 들어서는 7배나 더 빨라졌다. 2019년에는 그린란드에서만 5320억 톤의 빙하가 유실되면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남극도 예외는 아니다. 남극의 빙하는 그린란드와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유실되고 있다. 1992년부터 2017년까지 남극에서만 3조 톤의 빙하가 녹아내렸고 이로 인해 해수면이 7.6밀리미터 상승했다. 남극의 빙하가 녹는 속도는 1992년부터 매년 증가해 2017년에는 3배가 늘었다.
 더군다나 빙하는 얌전히 녹지 않는다. 빙하 표면이 녹으면서 생긴 물은 빙하에 있는 틈새를 파고들어간다. 틈새로 들어간 물이 축적되면 압력에 의해 그 틈이 더 벌어지고 임계점을 넘어서면 빙하가 붕괴하면서 순식간에 바다로 떠내려간다. 그 여파로 주변 빙하에 더 많은 균열이 생기고 그 틈을 녹은 물이 채우면서 연쇄적으로 붕괴한다. 깨진 얼음이 더 빨리 녹는 것처럼 붕괴된 빙하는 따뜻한 바닷물에 의해 더 빠른 속도로 녹는다. (p.72-74)

 

 한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필수노동자라고 한다. 경찰, 소방, 보건의료를 비롯해 보육, 돌봄, 교통, 물류, 배달, 환경미화 업종에 종사하는 필수노동자들은 코로나19가 심각해져도 대면접촉 업무를 피할 수 없으며 오히려 업무 강도가 높아진다. 그동안 필수노동자 대부분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 과로, 불안전한 고용에 시달리면서도 이들의 사회적 기여와 소중함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부 교수 장하준은 코로나19로 모두의 기본 생활과 기초 건강을 보호하지 않으면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우리나라는 경제 발전 수준에 비해 복지가 빈약하고 노동권이 약해 개혁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그는 앞으로 경제 지상주의를 탈피해 모두를 보살피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가사와 육아의 노동 가치를 인정하고 필수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급 육아휴직의 연장, 가사노동 수당 신설 등의 복지제도와 고용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노동시장의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p.162-163)

 

 과연 식량 생산량을 늘리면 기아에 시달리는 인구가 줄어들까? 식량 부족의 더 큰 원인은 생산이 아니라 불공정한 분배에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인구의 약 두 배인 140억 명이 먹을 만큼 충분한 양의 식량이 생산된다. 그 많은 식량은 늘 넘쳐나는 쪽으로 더 많이 쏠려 있다. 10명 중 3~4명이 넘치는 식량을 먹다 남기는 사이 1명은 굶어 죽어 가는 것이다. 뱃가죽만 남은 열 살 이하의 아이들이 오늘도 하루에 10만 명, 5초에 1명씩 굶어 죽고 있다.
 과잉 소비를 줄이고 남는 식량을 공정하게 분배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일명 ABCD라 불리는 미국의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ADM)와 카길(Cargill), 아르헨티나의 벙기(Bunge), 프랑스의 루이드레퓌스(LDC) 등의 곡물 메이저 기업들이 세계 곡물 시장의 약 80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 특히 카길의 점유율은 40퍼센트에 달한다. 이들은 전 세계 곡물 교역량의 80퍼센트, 저장 시설의 75퍼센트, 운송의 50퍼센트를 차지하고 곡물의 생산, 저장, 유통, 수송 등을 독점한 채로 곡물 시장을 마음껏 주무른다.
 이들은 막대한 자금력과 독점체제를 바탕으로 곡물을 사들여서 각국 정부와 기업에 판매해 엄청난 이윤을 거두어들인다. 그뿐만 아니라 씨앗, 농약, 살충제, 가공식품, 생명공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닭을 파는 농장에 병아리를 팔고 병아리에게 먹일 사료와 투여할 항생제를 판매하고, 병아리가 닭이 되면 매입해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축산계열화사업도 진행한다.
 곡물 메이저의 영향력은 보이지 않게 사람들의 일상으로 스며들어 있다. 우리가 빵이나 면에 사용하는 밀가루, 곡물 사료와 물엿, 액상 과당 등에 사용하는 옥수수, 음식과 음료수에 사용하는 설탕, 소금, 감미료는 모두 이들 기업에서 온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밀 자급률은 1.2퍼센트, 옥수수는 3.3퍼센트에 그쳐 사실상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p.182-184)

 

 우리나라 곡물자급률은 40년 사이 56퍼센트에서 21퍼센트로 줄어들었고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더 이상 개별 국가가 식량 주권을 회복하고 지속가능한 농업 식량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미뤄서는 안 된다. 단기적 이익을 위해 시장을 개방하고 초대형 농식품 업체나 곡물 생산 업체에 의존한다면 언제든지 식량 수급 체계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특히 세계 인구가 급증하며 식량의 수요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상황에 이상기후나 코로나19와 같은 외부 요인의 영향으로 언제든지 전지구적 식량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필요한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선까지 식량자급률을 끌어올려야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아도 회복탄력성을 유지할 수 있다. 자국의 소규모 농가를 보호하고 식량 유통 단계를 줄여 생산자와 소비자를 긴밀하게 연결하면서 각 지역에서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p.188-189)

 

 전 세계에서 매년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40억 톤에 달한다. 하지만 40억 톤의 3분의 1인 13억 톤 상당의 식량이 버려진다. 이렇게 버려지는 식량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1200조 원에 달한다. 식량 낭비는 곧 식량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물, 토지 등의 천연자원을 낭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도 만만치 않다. 매년 낭비될 식량을 생산하며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데, 이는 중국과 미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에 버금가는 양이다. 무엇보다 이 정도의 식량이면 배를 곯는 8억 5000만 명보다 4배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다. 그런데 왜 굶주리고 있는 8억 5000만 명에게 식량을 분배하지 않는 것일까?
 상식적으로 보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만이 식량 낭비인 것 같지만 사실 식량은 생산되는 농장에서부터 어마어마하게 낭비된다. 이상기후, 병충해, 농산물 가격 하락 등으로 인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면 수확하지 않는 농산물은 밭에서 썩게 마련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결국 농산품도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과일이나 채소의 경우 먹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해도 크기나 모양, 색깔 등이 좋지 않으면 상품성이 떨어져서 수확할 이유가 없다. 멀쩡해 보여도 길고 복잡한 유통 단계를 거쳐 소비자에게 도달할 쯤이면 너무 익거나 썩어버릴 농산물도 그냥 버려진다. 농사가 너무 잘되어도 문제다. 풍년이 들어 물량이 많아지면 농산물의 가격이 떨어지는데 유통 비용까지 계산하면 농부들에게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애써 키운 농산물을 대량으로 폐기하기도 한다.
 선진국에서는 생산과 수확 단계 때 가장 많은 식량이 낭비되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수확 후 건조, 저장, 포장, 운송 등의 유통 과정에서 가장 많은 손실이 발생한다(생산과 수확 단계에서도 많은 양의 식량이 버려진다). 주로 음식이 상하기 좋은 열대지방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신선하게 보존하려면 온도나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저장고나 냉장 시설을 갖춘 운반 차량이 필요한데, 개발도상국의 농부나 유통업자들은 이런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다. (p.189-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