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피할 수 없는 부채 위기 / 서영수 / 에이지21
임대보증금은 미국 CDO, CDS 등 파생상품처럼 당사자 간 사적 거래에서 비롯된 가장 위험한 가계부채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공식 부채에서 제외됨에 따라 규모가 얼마인지, 공식 부채와 얼마나 중복되었는지 부채 위험을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지표도 찾을 수 없다. LTV, DSR 등 사실상 거의 모든 규제가 제외되어 있다 보니 정부의 대출 규제 강화 이후 임대보증금채무의 남용 흔적도 엿보인다. 그 결과 임대보증금, 신용대출, 전세자금대출 등 다중 채무로 인한 실질 LTV, DSR 등은 금융권 채무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시발점은 금융 혁신이라는 미명 아래 제대로 파악도 관리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CDO, CDS 등 쉐도우 뱅킹(Shadow Banking)이었다. 임대보증금의 위험 성격을 생각할 때 전혀 파악도 어떤 규제도 없었던 CDO, CDS와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한국의 가계부채 위험이 수면 위로 떠올라 금융위기로 확산된다면 그 뇌관은 임대보증금채무가 될 가능성이 높다. (p.33)
가계부채 위험이 크지 않다는 대표적인 논리 근거 중 하나는 ‘한국 가계는 부채 대비 자산이 충분히 많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핵심 부채 통계인 임대보증금을 빼고 자산은 전부 넣으니 자산이 부채보다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1년 1분기 금융 자산 대비 금융 부채 비율이 44.7%로 금융 자산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어 부채 위기가 발생해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실제로 전세보증채무를 포함한 수정 금융 자산 대비 금융 부채 비율은 64%에 달하고, 현금화가 어려운 보험 및 연기금과 같은 자산을 제외하면 92%까지 상승한다. 가계의 부동산 투자와 가계부채가 동반해서 상승했는데 2018년 4분기 금융 자산 대비 금융 부채 비율이 3.2%p나 하락한 것은 부채의 질이 개선된 것이 아니라 누락된 임대보증채무의 증가율이 더 높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자산으로 부채 위험을 분석할 때 간과해서는 안 될 또 한 가지는 평균의 함정에 쉽게 빠진다는 점이다. 은행 꺾기 등 강압이 있지 않는 한 상당한 규모의 대출을 보유한 개인이 대출금리보다 낮은 금리의 예금을 장기간 보유할 유인은 별로 없다. 신용한도대출(마이너스대출)처럼 유동성 관리가 가능하다면 더욱 예금 보유 동기는 사라진다. 굳이 예금을 보유하고 있다면 상당 부분은 2년 뒤 돌려줘야 할 전세보증채무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빈부 격차가 심해 현금의 상당액을 일부 자산가가 보유하고 있거나 부채가 별로 없는 사람이 금융 자산을 많이 갖고 있다면 이 통계 자료는 설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집값이 많이 올라 빈부 격차가 심한 나라가 되었다. 편차가 심해서 평균치로 위험 수준을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p.47)
결론적으로 어떤 정부도 주택 공급 정책으로 단기간 내에 집값을 안정화할 수 없다. 따라서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수요를 줄이는 정책 이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다. 정부 역시 수요 억제를 목표로 다양한 정책을 제시했다. 문제는 공급 확대 정책을 펼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이 의도대로 수요를 줄이지 못한 데 있다. 먼저 집값 상승의 원인을 투기 수요 탓으로 돌렸고, 투기 수요자를 다주택자와 같이 주택 수라는 물리적 기준으로 정의했다. 미국 등 선진국과는 전혀 다른 정책 규제다.
앞서 설명했듯이 상당수 다주택자를 투기 수요자로 정의함으로써 많은 규제의 허점을 노출했다. 예를 들면 5억 원 아파트를 보유한 개인이 5억 원 아파트를 상속받거나 직장 문제로 주택을 하나 더 구매한 가계를 투기 수요자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반대로 무주택자라도 소득이 3천만 원인 개인이 무리하게 대출을 일으켜 갭투자로 20억 원 아파트를 구매했다면 이것을 실수요자로 정의하는 건 현실과 동떨어진다. 결국 다주택자를 투기 수요자로 정의함으로써 무주택자가 투기하는 것에는 면책을 준 것과 다를 바 없다. 다주택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가구를 분할함으로써 이런 면책의 혜택을 누려왔다. 뿐만 아니라 무주택자나 1주택 가계의 주택 과소비 역시 통제하지 못했다. 수요 증가의 상당 부분은 투기 수요뿐 아니라 실수요자의 과소비가 차지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투기 목적이 아닌 주거 목적으로 집을 사더라도 형편에 맞지 않게 모든 사람이 중대형 아파트를 구매한다면 집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p.129-130)
현 정부의 최초 경제 정책 목표 역시 ‘부채 주도 성장 정책’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즉 경제의 부동산 의존도를 줄이고, 제조업 중심의 경제 체제를 서비스업 중심으로 재편해 선진국처럼 내수 기반을 확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늘 그랬지만 현 정부의 개혁 정책은 많은 부작용과 정치적 반발을 야기했다. 결국 현 정부 출범 2년 만인 2019년 6월 경제 개혁을 추진했던 경제팀이 물러나면서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은 좌초하고 말았다. 대신 정책 경험이 많은 관료가 등용되면서 부채 주도 성장 정책 중심의 경기부양책으로 정책 기조를 바꾸었다.
점진적 개혁을 선택했음에도 경제 개혁 과정에서 발생한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집값이 안정되면 부동산 거래가 줄어 주택 등 관련 내구재의 과소비도 줄어들고, 물 쓰듯 쓴 대출도 더 이상 쉽게 이용하기 어려워진다. 경제 체질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주택시장 의존도를 줄이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구축해야 하는데 아무도 감내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경제팀의 전문성과 추진력도 부족했다. 이해 관계자와 언론은 이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버블 경제에서 누렸던 영광을 여전히 요구하기만 했지만 이를 설득하기에 역부족이었다. (p.148-149)
자산은 재화와 다르다. 오를 때는 한없이 오를 것 같지만 떨어질 때는 아무도 사려 하지 않는다. 더욱이 높은 가격에서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중요한 변수가 생기면 심리는 크게 위축된다. 마찬가지로 가파르게 상승한 집값은 하락 반전 시에 급락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갭투자가 활성화되면서 전세보증금, 신용대출, 전세자금대출 등을 끼고 주택을 매수하는 사례가 늘어, 전세 가격이 하락하면 빠르게 부채 축소 과정도 진행된다는 점이다. 가파른 전세 가격 상승으로 서울을 제외한 주요 지역의 전세 가격이 이미 70%를 넘어선 상황으로, 하락 과정에서 투자자는 깡통전세, 역전세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특히 사적 채무인 전세보증금은 부채 축소 과정을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운 영역이라 전세 가격이 상승 반전하지 않은 한 갈수록 상황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상환 능력이 취약한 2030세대의 무주택자가 패닉 상태에서 무리하게 갭투자에 동참해 깡통전세, 역전세 상황을 감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집값이 하락하면 부채 축소에 대응하기 위해 투자자는 집을 매도하려고 한다. 그러면 매물이 쌓이고 쌓인 매물이 가격 하락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제도권 금융이 아닌 사적 금융 부문에서 디레버리지(부채 축소) 현상은 2019년 상반기에도 경험한 바 있다. 당시도 정부는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또 다시 부양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한 미국, 아일랜드, 스페인, 영국 등 대다수 선진국 역시 질 나쁜 부채를 기반으로 주택시장을 부양했을 때 주택시장이 급격히 침체한 경험을 겪었다. 한국의 부채 위험이 당시 선진국 수준보다 더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집값 급락의 가능성은 훨씬 더 크다. (p.178-179)
영업 적자가 장기화되면 폐업을 통해 청산하는 것이 기업에게는 손실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기업은 영업 적자가 늘어나도 대출금을 늘려 폐업을 오히려 미룬다. 영업을 계속 유지하면서 보유한 대지와 공장 부지로 발생할 수 있는 자산 가격 상승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경영의 주된 이유인 영업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기보다 부동산 투자로 수익을 기대하는 사례다. A은행의 경우 공장을 담보로 한 임대업 대출이 전체의 1/3 이상을 차지해 상가 임대가 대부분일 것이라는 상식을 뒤엎는다. 이런 유추 해석은 중소 법인대출 증가율과 주택 가격 간 상관관계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중소 법인대출의 상당수는 영업 활동이 아닌 기업이라는 법적 특혜를 이용해 부동산을 투자해온 기업이거나 아예 가계대출 규제를 피해 대출을 받으려 한 가계성 법인으로 볼 수 있다. 출발은 그렇지 않았지만 영업이 위축되면서 불가피하게 경영 형태가 달라진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가려진 부분은 부동산시장이 침체하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법인은 가계와 달리 건당 대출 금액도 크고 채무 상환 불이행 시에 사주가 유한책임을 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레버리지가 높은 반면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가계대출에 비해 상환 의지가 약하다. 따라서 유동성이 낮은 땅이나 공장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가 담보 가치가 떨어지면 파산해 버리는 모럴헤저드가 많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을 은행이 모를 리 없다. 은행은 부동산시장이 침체로 전환되면 가장 먼저 법인대출부터 상환하려 할 것이다. (p.206-207)
이제 국내 금융회사의 상황을 보자. 오랜 기간 소득 대비 부채가 증가했기 때문에 금융회사 연체는 일정 수준 늘어나는 게 정상이다. 고신용자를 대상으로 한 은행 연체율이 하락했다면 서브프라임 고객을 대상으로 한 제2금융권의 연체율은 상승해야 한다. 그러나 은행뿐만 아니라 카드사, 캐피털사, 서브프라임 대출이라고 여기는 저축은행 가계대출 연체율 모두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낮은 연체율이 상환 능력과 무관하다면 연체율에 맞춰 충당금을 적게 쌓아둔 것은 은행 등 금융회사의 위기 대응 능력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실제로 상환 능력이 달라지지 않아도 금리나 만기 등 대출 조건이 바뀌면 채무 불이행 가능성, 즉 연체율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연체율 하락은 상환 능력의 개선이라기보다 대출금리 인하와 대출 확대 등 정부 정책과 이에 따른 집값 상승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금리 인하 정책이 이자 부담을 줄였고, 정부의 신용대출과 전세자금대출 활성화 정책이 주택담보대출의 수요를 낮춰 원금 상환 부담을 줄인 것이다. 여기에 집값이 상승하면서 대출한도가 늘어난 점, 저소득층에 대한 저금리 대출 지원을 강화한 점 등이 상환 능력 대비 연체율이 낮은 이유다. 이는 해외 선진국 은행과 비교해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계부채 위험이 세계 주요국 중 가장 높은데 연체율과 대손비용률이 낮은 것을 은행의 위험 관리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가계대출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 크다.
2020년 말 기준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78%로 한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미국의 사례를 보자. 미국 은행의 모기지 연체율은 1.74%로 국내 은행의 10배에 달한다. 이처럼 연체율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원리금 분할 상환 대출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미국의 금융 시스템과 한국 시스템의 차이와 함께 상대적으로 높은 대출금리 탓이다. 당연히 높은 연체율은 충당금의 차이를 발생시킨다. 미국 은행의 충당금 적립률은 코로나 위기 시점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한 결과 2019년 1.2%에서 2020년 말 2.2%까지 상승했다. 한국의 은행이 코로나 위기에도 충당금 적립률을 0.45%에서 0.42%로 낮춘 것과는 대조적이다. (p.212-213)
앞서 설명했듯이 한국의 주택시장은 가격이 소폭 하락해도 거래가 급감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만일 주택시장이 침체 국면에 들어서면 건설 및 부동산 분야에서 실업이 큰 폭으로 늘어날 뿐 아니라 장기화될 경우 자영업, 금융업 등으로 확산될 것이다. 또한 주택 가격 하락 과정에서 미루었던 한계 중소기업이 구조조정되면서 제조업에서까지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다.
취약한 구조의 노동시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주택시장 침체를 겪는다면 내수 부진과 실업률 증가는 피할 수 없다. 주택시장 침체가 장기화될 경우 단순히 보고서에서 주장하는 이상으로 소비 감소는 불가피하다. 역대 모든 정부가 구조조정을 추진하다 포기했던 것도 결국 소비 침체에 따른 경제 주체의 반발을 감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p.218-219)
즉 금융 상품의 특성상 가격(금리)은 최우선 경쟁력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시스템이 정착되면 금융 산업은 소수의 플랫폼사가 독점적으로 지배할 것이고 은행, 보험사, 증권사는 상품 제조업체로 전락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책적 수혜는 정작 정부가 지원하고 육성하고자 했던 핀테크사보다 독점적 기업이라 할 수 있는 일부 플랫폼사가 독차지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플랫폼의 차별적 경쟁력을 기반으로 독점 고객과 온라인 판매망 등을 통한 우월적인 고객 데이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 플랫폼사 중심으로 금융 산업이 과점화된다면 금융의 불안정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결국 금융 혁신은 선진국에서 추진한 규제 강화를 통한 금융 안정 제고 정책과 배치된다. 미국 등 선진국의 의도는 지나치게 보수화되어 있는 금융 소외를 보완하기 위한 핀테크 산업의 육성이지, 한국처럼 금융 서비스 시장을 아마존이나 구글 같은 플랫폼사에 맡기려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전문은행 설립 허용의 근본 취지는 창업을 통해 고용을 늘리고, 미국처럼 상대적으로 취약한 중금리 시장의 활성화를 유도하는 데에 있다. 정부는 이들의 성공적인 정착과 부여된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출범한 지 3년이 지나 기존 은행을 뛰어넘는 대형 사업자로 부상했지만 정작 허용 취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책당국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큰 손실은 은행에게 공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더 이상 요구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결국 대형 시중은행도 공공성보다는 수익성과 효율성 개선에 주력했다. 그 결과 은행은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과 외형 성장을 통해 역대 최대의 이익을 계속 달성하고 있다. 그 대신 은행이 부담해야 할 책임과 위험은 정부와 시민이 떠안게 되었다. (p.246-247)
특히 주목할 점은 적합성, 적정성의 원칙에 따라 과잉 대출을 소비자에게 적합하지 않은 대출로 판단하고 소비자 피해 책임을 금융회사에 부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부업법에서도 과잉 대출 금지 조항이 있지만 손해배상 말고는 별다른 처벌 조항이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서 개인신용평가 점수로 한도를 정하거나 관행상 개인사업자대출, 전세보증금 등 중요한 개인의 부채를 누락하더라도 대부업법은 면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금융소비자보호법은 그렇지 않다. 은행은 모든 부채를 파악해야 하고, 대출이 소비자에게 적합한지를 확인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의 채무 불이행이 발생할 경우 은행이 고객이 보유한 모든 부채를 확인하지 않고 대출을 제공했다면 그 책임은 은행에 부여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금융소비자보호법은 정부가 추진하려는 부채 구조조정에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한국도 선진국처럼 정부가 일일이 개입해 대출을 줄이도록 하기보다는 은행이 투기 수요, 과소비성 실수요를 구분해 꼭 필요한 대출만 제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만일 투기나 과소비임을 알고도 은행이 대출을 제공하면 이후 부실 책임은 은행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은행은 과도한 레버리지를 이용해 주택에 투자한 자산가에게 임대보증금을 합쳐 DSR을 계산해 원리금 분할 상환과 부채 축소를 요구할 수 있다. 부채 과다 보유 다주택자는 대출을 줄여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보유 주택을 매각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일반 무주택자가 무리하게 집을 사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만약 전세보증금을 낀 갭투자를 하려 한다면 주택담보대출, 신용대출 모두에 원리금 분할 상환을 요구하고, 금융권 대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거나 회수하면 된다. 전세자금대출, 신용대출을 받아 나중에 투자할 경우 신고를 의무화하고, 위반할 경우 기한이익상실 조항에 삽입하는 방안이다. 이미 현대 사회에서 신용이 중요한 기반이 된 현실을 고려할 때 신고 의무 위반 조항을 개인신용평가에 반영해 신용 점수를 대폭 낮추는 것도 한 가지 대안일 수 있다. 은행 주도로 부채 구조조정을 추진하면 상황에 맞게 추진 속도를 정하기 때문에 시장에 미치는 충격도, 여러 정치적 반발도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p.263-264)
서민 주거 안정이라는 표면적인 목표와 달리 역대 정부의 정책 목표는 모든 가구의 내 집 마련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아예 드러내 놓고 모든 국민을 부자로 만들겠다는 공약까지 내놓기도 한다. 그런데 모든 가구가 집을 소유하려면 최소한 주택보급률 105% 이상을 충족시킬 만한 대규모 주택 공급이 필요하다. 앞서 설명했듯이 늘어나는 가구수를 고려하면 정부의 공급 정책으로는 기존 주택보급률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공급할 땅도 부족하지만 비싼 집을 사려면 빚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다. 내 집 마련 정책을 추진하다 금융위기를 맞은 미국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실현 불가능하며 해서는 안 되는 정책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당장 모든 국민을 부자로 만들려면 다른 나라에서 빼앗아오거나 빚을 내 돈을 국민에게 주는 방법 말고는 없다. 어찌 보면 부채를 일으켜 미래 세대의 부를 훔쳐 오는 것이 부채 주도 성장 정책의 전모일지도 모른다. 서울과 수도권에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는 여건에서 어떤 정부도 ‘내 집 마련의 꿈 실현’ 같은 공약을 실현시켜줄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내 집 마련을 정책 목표로 내세우는 순간 정부의 주택 목표는 달성 불가능한 숫자에 그칠 수밖에 없다. 소유하려는 순간 그 집은 주거 공간의 의미를 벗어나 투자 행위로 바뀌기 때문이다. 즉 직장과 근접한 지역이면서 주위에 공원이 있고 좋은 교육 환경을 가진 집, 한마디로 요약하면 향후 집값이 가장 많이 오를 집만 소유하려는 것이다. 그런 수요를 충족하려면 서울 도심권에 대량의 주택을 공급하거나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교통과 각종 인프라를 구축한 신도시를 건설해야 한다. (p.272-273)
미국 역시 최저임금 인상 논란이 많았다. 최저임금 인상 이후 도소매, 서비스 업체들은 일제히 가격을 인상해 이를 보전했다. 식음료와 기타 서비스 가격이 오르니 자연스럽게 여타 제품까지 물가 상승이 이어졌다. 중요한 것은 가격을 인상함에 따라 업체의 이익이 늘어났고, 고용을 더 늘릴 수 있었다. 적정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고용 증가라는 긍정적인 효과로 연결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업체가 혜택을 본 것은 아니다. 경쟁력 있는 업체는 더욱 가격을 올렸지만 소규모 자영업자는 가격 인상을 제대로 하지 못해 영업 규모를 줄이거나 폐업이 늘어났다. 한계 자영업자가 구조조정됨에 따라 중견 기업은 이익이 더 늘어나 고용을 늘릴 수 있었고, 세금도 더 많이 낼 수 있었다. 구조조정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미국 정부의 임금 주도 성장 정책으로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년 평균 CPI 상승률은 2.1%로 이전 4년 평균 대비 1%p나 증가했다. 2016년 1.7%에 그쳤던 실질 GDP 성장률 역시 2018년에는 3.0%까지 상승했다. 2018년 실업률은 3.8%로 하락해 5년 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한국 정부도 가계부채 주도 성장 정책을 포기하고 여타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을 경기부양의 주요 수단으로 채택했다. 구체적으로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하는 한편 고용보험과 대체 휴일을 확대하는 등 고용인의 권리를 강화했다. 시기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선진국이 추진하는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정책의 집행 과정에서 커다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현 정부는 소득 주도 성장을 핵심 정책으로 공표했지만 소비자 중심의 사고와 인플레이션이 사회 악이라는 과거의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했다. 소득 주도 성장이 인플레이션을 유도하는 정책임에도 플랫폼 산업, 온라인 유통업체를 육성하는 등 경쟁을 통한 가격 인하를 유도했다. 진입 규제를 강화해 기업이 비용 상승을 가격으로 전가할 수 있도록 해야 했는데, 반대로 가격 인상을 규제하거나 가격 인하를 유도했다.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을 추진했던 경제팀은 가장 중요한 경제 순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기업에게 가격 인상 없이 52시간 근무제, 고용보험 확대 등 비용 인상만을 요구했다. 결국 기업은 공채 중단 등 신규 고용 축소로 대응했다. 자영업자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카드 수수료 인하 등 금융권을 압박했지만 모집인과 대리점 직원 감원 등 인력 감소로 연결되었다. 결국 피해는 또 다시 고용인, 특히 신규 진입하고자 했던 2030세대에게 돌아갔다.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은 결과적으로 철저히 실패했고, 그 결과 2019년 또 다시 부채 주도 성장 정책을 꺼내든 원인을 제공했다. (p.281-282)
고립의 시대 / 노리나 허츠 / 웅진지식하우스
일본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65세 이상 노령층의 범죄 건수가 4배로 급증했다. 이들은 5년 내에 재범을 저지를 확률이 70%다. 도치기 교도소 소장 준코 아게노는 이런 현상을 불러온 핵심 요인이 외로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교도소 소장으로 일하면서 그런 확신을 갖게 되었다. 고령 수감자가 증가하는 현상을 연구한 류코쿠대 교수 고이치 하마이도 여기에 동의한다. 하마이는 상당수의 노령 여성이 사회적 고립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옥을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매장에서의 소소한 절도 행위 같은 경범죄(감옥에 가는 것이 목적일 때 저지르기 가장 쉬운 범죄다)로 수감된 재소자의 40%가 가족과 거의 대화하지 않거나 가족이 아예 없다. 최근 몇 년간 절도 행위로 수감된 노인의 절반이 수감 전까지 혼자 살았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들 가운데 다수가 감옥을 “집에서는 찾지 못하는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묘사한다. 어느 80대 재소자의 말처럼 감옥은 “항상 주변에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은 곳”이었다. 동료 여성 재소자인 78세의 O 씨는 감옥을 “이야기 나눌 사람이 많은”, “오아시스”로 묘사했다. 그들에게 감옥은 친구뿐만 아니라 도움과 돌봄까지 제공되는 안식처였다. (p.16-17)
사회학자 노엄 기드론과 피터 A. 홀은 개리, 러스티, 테리, 에릭 같은 수많은 노동자계층 백인 남성이 최근 몇 해 동안 우파 포퓰리스트들에게 돌아선 것은 소득 그 자체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아진 느낌 때문이라고 믿는다. 기드론과 홀은 1987년에서 2013년 사이 12개 선진국을 대상으로 사회적 지위에 대한 상실감과 투표 선호도의 관계를 분석한 2017년 논문에서 대학 졸업장이 없고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느끼는 백인 남성들은 (구할 수 있는 일자리의 질이 낮거나 직업이 없어서, 또는 대졸자와 유색 인종과 여성의 지위가 상승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지위가 낮아진 것 같아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들은 그들에게 존중과 지위의 회복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2016년 선거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적들은 여러분이 한심하고 구제 불능이라고 비난하지만 나는 여러분이 나라를 사랑하고 우리 국민 모두가 더 나은 미래를 갖기를 바라는 미국의 근면한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 군인이고 선원이고 목수이고 용접공입니다. […] 여러분은 미국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존경하고 아끼고 지켜주는 지도자들을 둘 권리가 있습니다. 모든 미국인은 존엄하고 존경스러운 존재로 대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2020년 트럼프는 이 화법을 반복함으로써 지위와 자기 존중감을 되찾으려는 욕구에 다시 한 번 호소했다. “여러분 같은 자랑스러운 시민들이 이 나라의 건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우리나라를 되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국민인 여러분에게 권력을 돌려드리고 있습니다.” 2020년 10월 당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에 남긴 글이다. (p.81-82)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만 우리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본 것처럼 외로움에는 구조적인 요소도 있다. 많은 대도시에서 삶은 단기적이다. 들어오고 나가기의 연속이고 끝없는 부유다. 바로 이것이 큰 요인이 되어 이제 주요 대도시에는 주택 보유자보다 세입자가 더 많다. 세입자는 주택 보유자보다 더 자주 이사한다. 예를 들어 런던에서는 2016년 세입자 수가 주택 보유자 수를 따라잡았는데, 평균 임대 기간은 대략 20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세입자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뉴욕에서는 2014년을 기준으로 이전 3년간 인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수가 집을 옮겼다.
이 문제는 사회의 응집력 차원에서 중요하다. 항상 옮겨 다니는 사람과 한자리에 머무는 사람 모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이웃을 잘 모르게 되고 고립감을 더 느끼게 된다. 이름조차 모르는 이웃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우유를 빌리거나 격리 기간에 장을 봐주겠다고 제안하기란 쉽지 않다. 조만간 살던 집을 떠나 또다시 새로운 동네로 간다는 생각이 들면 지금의 마을 공동체와 유대를 쌓고 보탬이 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으려는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치솟는 임대료와 감당하기 어려운 주택 가격은 도시 거주자가 공동체에 뿌리내리고 정서적 자원을 투입하는 것을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선택지가 되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마을이란 그저 벽돌과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이 다가 아니다. 마을이 활기찬 공동체가 되려면 우리가 마을을 육성하고 무엇보다 마을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신뢰가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가 이웃을 잘 모르면 신뢰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는 미국에서 집 열쇠를 맡길 만큼 신뢰하는 이웃이 있다고 응답한 도시 거주자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시골 거주자의 경우 그 비율은 61%였다.
따라서 우리의 마을이 더 연결되어 있고 우리 스스로 덜 외롭다고 느끼기를 바란다면 우선 사람들이 부유하지 않게 도와야 한다. 여기서 중앙정부와 지역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가령 임대료를 안정시키는 정책을 펴는 것이다. 실제로 베를린 지방정부는 2019년 10월, 임대료를 5년간 동결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임대료 안정화 조치를 이미 도입했거나 도입을 고려하는 도시로는 파리, 암스테르담,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이 있다. (p.111-112)
당신이 사는 곳에서도 주변을 둘러보면 적대적 건축물을 여럿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엉덩이를 살짝 걸칠 정도의 넓이밖에 되지 않는 버스 정류장 ‘좌석’, 팔걸이가 여러 개 달린 공공 벤치, 매장 바깥 도로를 덮은 쇠살대에서 밤이면 솟아오르는 뾰족한 못들, 성채를 방불케 하는 공공 공원 울타리의 방어물. 누군가는 팔걸이 따위가 무슨 문제냐고 물을지 모른다. 맞다, 이따금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처럼 벤치를 분할하는 팔걸이가 부착된 실제 이유는 그보다 음험하다. 이 벤치는 팔걸이 때문에 노숙자가 누울 수 없는 곳이 된다.
외로운 세기에 나타나는 여러 추세가 그렇듯 이것은 전 세계적인 문제다. 가나 아크라에서는 다리 밑에 커다란 바위들을 가져다 놓아 노숙자가 쉬지 못하게 했다. 미국 시애틀에서는 노숙자가 쉬는 평지에 매끈한 자전거 거치대를 설치했다. 나중에 시애틀 시정부는 이 조치가 자전거 이용자에 대한 배려라기보다 “노숙 행위를 막으려는 비상 대응의 일환”으로 “해당 구역이 다시 야영지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인정했다. 노숙 인구가 2004년 이래 3배로 늘어난 홍콩에서는 노숙자나 부랑자를 쫓아내기 위해 공공장소에 앉을 만한 자리를 의도적으로 거의 만들지 않았다. 아마도 가장 사악한 사례는 20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성모마리아 대성당에서 스프링클러를 설치해 성당 입구에서 자고 있던 노숙자들에게 물을 뿌린 굉장히 비기독교적인 행동일 것이다(당연히 대중의 거센 반발을 낳았다). (p.128-129)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구텐베르크 인쇄기부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주요 발전은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지만 사용자들에게 항상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글을 쓰는 행위가 “기억력 훈련을 하지 않게 만들어서 글쓰기를 배우는 사람의 정신에 건망증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15세기 베네딕트회 수도원장이자 박식가였던 요하네스 트리테미우스는 수도사들이 구텐베르크 인쇄기 때문에 필사를 하지 않는다고 나무랐다. 트리테미우스는 이로 인해 엄격함과 지식이 사라지리라고 믿었다(하지만 트리테미우스는 이러한 맹렬한 질책이 담긴 글을 인쇄기로 찍었다. 다른 사람이 그의 글을 읽게 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1907년 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이렇게 한탄했다. “전화기가 널리 사용되면서 공손함과 예의가 장려되기보다 오히려 그나마 남아 있던 것마저 빠르게 쇠퇴하고 있다.” (p.153)
소재, 인류와 만나다 / 홍완식 / 삼성경제연구소
실제로 흑요석을 깨뜨려 돌날을 만들고 그것을 전자현미경으로 확대하면 강철로 만든 칼날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예리한 단면을 지닌 것을 볼 수 있다. 흑요석으로 만든 칼날의 끝은 30옹스트롬(약 33만 분의 1 밀리미터) 정도로 매우 얇은데, 이는 가정에서 쓰는 최상품 면도날의 10분의 1에서 20분의 1 수준이다. 매우 제한적이지만 오늘날에도 흑요석 칼날을 수술 시에 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생각한다면, 돌이 ‘인류 최초의 소재’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굳이 땅을 깊게 파거나 험한 산속을 헤집고 다니지 않아도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는 데다가 제대로 잘만 내리치면 세상에서 제일 날카로운 모서리를 선사해주어 불이나 다른 물질의 도움 없이도 돌만 가지고 도구를 쓱싹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볼 필요는 있다. 과연 돌 말고 다른 대안은 없었을까? 선사 시대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도구였던 ‘날카로운 모서리’를 만들 수 있는 소재로는 나무나 뼈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단단함이라는 측면에서 돌과는 상대가 되지 않기에, 즉 뾰족한 끝이 너무 쉽게 무뎌져 버리기에 돌로 만들기 힘든 바늘 등의 용도 외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물론 이러한 소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썩거나 분해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전해 내려오기도 어렵다. 그 때문에 당시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밝혀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인류사의 가장 오래된 두 시대의 타이틀은 ‘돌’이 차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무나 뼈 같은 보조 재료 역시 인류에게 돌 못지않게 중요한 소재였다. 구석기 인류는 바로 이런 보조 재료를 돌과 조합하여 혁신적 도구를 만들어냄으로써 혹독한 빙하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p.46-47)
도자기로 대표되는 세라믹 소재는 항상 인류 곁에 있어왔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중요성이 퇴색한 적이 없다. 그래서 도자기 시대 또는 세라믹스 시대라고 따로 분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석기, 청동기, 철기 등은 무기나 도구를 만들기 위한 소재로서 주인공이 되었던 시기가 언제부터 언제였다고 못박을 수 있지만, 흙이라는 이 친근한 소재는 인류 문명의 역사를 처음부터 현재까지 늘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세라믹 소재를 음악 용어를 가져와 바소 오스티나토(Basso Ostinato)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음악에서 묵직하게 깔리는 저음은 우리 귀에 두드러지게 들리지는 않지만 그 덕택에 다른 악기들이 연주한 아름다운 멜로디가 풍성한 화음을 구축할 수 있는 것처럼,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도 흙으로 빚은 도자기가 항상 저변을 믿음직하게 받쳐주었기 때문에 다른 소재들이 각자의 특징과 역량을 뽐낼 수 있었음을 빗댄 말이라고 볼 수 있다. (p.119)
금속에 녹이 스는 것은 비교적 천천히 진행되는 현상이라 이때 열이 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녹이 스는 것도 그 과정을 좀 더 빨리 일어나도록 만들면 거기서 상당한 고열이 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실제로 대다수의 한국인은 겨울만 되면 그런 일을 경험한다. 바로 손난로를 통해서이다. 손난로에서 열이 나는 것은 그 속에 든 철이 아주 빨리 녹슬어버리기 때문이다.
손난로는 철가루를 소금, 톱밥, 활성탄 등과 섞어 공기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밀봉한 것이다. 포장을 뜯으면 대기 중의 산소가 스며들어 가서 철과 반응을 시작한다. 철을 곱게 가루로 빻아놓으면 표면적이 늘어나 산소와 동시다발적으로 결합할 수 있기 때문에 녹스는 속도가 매우 빨라진다. 여기에 소금까지 들어갔으니 자칫하면 화상을 입을 지경까지 뜨거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간혹 만져보면 딱딱한 덩어리가 집히고 포장을 뜯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포장 불량으로 공기가 새어 들어가 이미 다 녹슬었기 때문이다. (p.183-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