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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동물들에 관하여 / 리나 구스타브손 / 갈매나무

 

 벵크트가 동료에게 서두르라고 고함을 지른다. 돼지들을 이산화탄소 가스실로 보내야 한다. 다음 수송 트럭이 오는 중이고 계류장은 더 이상 자리가 없다. 직원들이 큰소리를 내며 몰이채로 벽을 때리다가 내가 자리를 뜨면 돼지들도 때린다. 벵크트마저 돼지 등을 때린다. 알아서 앞으로 가고 있는 녀석들을 말이다. 예전에 학교에서 왕따를 시킬 때와 같다. 아무 이유도 없이 때린다. 돼지들은 누구에게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 고기가 되어 우리 식탁에 오르기 위해 여기 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고기가 되러 가는 길에도 매를 맞는다. 나는 울음을 터트리지 않으려고 용쓴다. 하지만 계류장을 나오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진다. 울음을 참으려니 목에 큰 덩어리가 걸린 것 같다. 나는 그 덩어리를 안간힘을 다해 꾹 삼킨다. (p.70)

 

 내 마음과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조리 설명하기 위해 나의 뇌는 최고도로 돌아간다. 우리는 어쩌다 여기에 이르렀나? 나는 어쩌다 여기에 와 있나? 때로는 이 세계로 들어온 것이 특혜라는 생각이 든다. 신뢰의 증거(나의 능력을 신뢰한다는 증거)이기에 나는 여기 머물며 동물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도축장 이야기가 나오면 그 누구도 내게 감히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떠든다고 우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힘이 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다시 나도 공범이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든다. 슬픔과 자기 경멸이 뒤섞인다. 너무 피곤해서 내일 일도 가늠할 수 없을 때가 많다. (p.95)

 

 교과서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일하는 시스템에선 동물이 자원이다. “암퇘지는 새끼를 배거나 젖을 물려야 한다!” 암퇘지의 재생산을 다룬 강연은 이런 말로 시작한다. 동물은 놀고먹으려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새끼 돼지는 원료이고 암퇘지는 고기가 되는 시점까지 제품이다. 새끼를 빼앗기는 순간부터 다시 새끼를 배는 순간까지는 “소용이 없기에” 순전히 비용 요인으로만 취급된다. 이 사업이 이익을 내지 못하면 돼지사육업자도 수의사도 일자리를 잃는다. “암퇘지는 돈이 많이 든다. 새끼를 배지 못하면 일찍 도축해야 한다.” 이것이 수의학과 학생들이 보는 입문서에 실린 문장이다. (p.99)

 

 돈방 창살에 기대서 있으려니 문득 손에 뭐가 닿는 느낌이 난다. 강아지가 손바닥에 축축한 주둥이를 내려놓는 느낌이다. 아래를 보다가 돼지와 눈이 마주친다. 녀석이 내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생물학자 라이얼 왓슨(Lyall Watson)은 돼지를 “오래 마주 보기” 챔피언이라고 말했다. 눈을 돌리지 않고 상대를 계속 쳐다본다고 말이다. 나는 미소 지으며 내 손을 가만히 내버려둔다. 녀석의 코는 탄력이 좋고 입은 부드럽다. 우리가 같은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곧이어 내가 방금 녀석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장본인이라는 생각이 뒤를 따른다. (p.104)

 

 여기선 동물을 제품 취급한다. 하지만 그게 또 그렇게 단순하고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 계류장을 나서려는 데 방혈 공정에서 일하는 직원 한 사람이 나를 불러 세운다.
 “수의사라면서요?”
 “네.”
 “우리 강아지가 며칠 전에 발톱이 절반 정도 찢어졌어요. 그래서 동물병원에 가서 뽑고 왔는데요. 이 녀석이 목에 보호대를 안 하려고 해요. 아무리 달래도 절대로 안 해요. 발을 핥지도 않고 상처도 괜찮아 보이는데 그대로 둬도 될까요?”
 “핥지 않고 상처도 깨끗하다면 괜찮을 거예요.” (p.162)

 

 인트라넷에서 예전에 어떤 수의사가 동물보호를 주제로 쓴 PPT 파일을 발견한다. 위법행위를 관청에 알려도 뭐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알리지 않는다면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선의를 품은 수많은 용맹한 사람들이 이 복도를 지나갔다. 계류장 사무실에서 발견한 작은 노트 속 끄적임에서도 그중 몇 사람을 만난다. 오전 직원 휴식시간에 마침 수송 트럭이 없어서 그곳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하루는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위가 쓰리고 어깨도 뭉친다. 여기서 8월까지 버틸 것 같지가 않다. 그러다 크리스티안 룬드베리(Kristian Lundberg)의 책 《Yarden》(The Yard)을 떠올린다. 그것이 우리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이 세상에서 증인으로 산다는 것? 나는 검사한 돼지 숫자와 폐기한 돼지 숫자를 적으려고 호주머니에 항상 갖고 다니는 수첩을 꺼낸다. 저편 계류장에서 암퇘지들이 비명을 질러낸다.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거기 웅크리고 앉아 종이에 묻은 핏자국을 노려본다. (p.167-168)

 

 동물보호를 외치면서도 우리는 쉼 없이 그런 짓을 한다. 바닥이 젖었다고, 동물들이 울타리에 부딪혀 다칠 수도 있다고 보고서를 쓰면서 우리는 연신 그런 짓을 한다. 새삼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알던 지식이 살아 움직인다. 그 모든 동물보호 아이디어들이 다 연극인 것만 같다. 녀석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도 살기 위해 우리가 연출한 연극 말이다.
 겉만 보면 이곳은 모든 것이 정말로 그럴싸하다. 표준화된 작업 공정, 활발한 소통. 동물보호와 품질안전을 책임지는 책임자도 한 명씩 있다. 단속과 검사도 시행된다. 동물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이 전문 자격증을 갖고 있다. 파란 헬멧을 쓴 수의사 몇 사람이 매일 상황을 감독한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지 않는 그 모든 것은 어찌할 것인가?
 죽기 전의 고통만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겐 동물의 감정과 바람과 생명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스토리다. (p.203)

 

 나는 계류장 사무실에서 보았던 작은 검은 노트 이야기를 꺼낸다. 동물보호의무 위반 사항을 적어 두었던 그 노트 말이다. “희망이 없어 보여요. 7년 전에 적은 내용이잖아요. 그때도 지금이랑 똑같았어요.” 내가 말한다.
 나는 무의미하다는 기분을 쫓으려 애쓴다. 그리고 혹시라도 동료들의 노력을 폄하하지는 않을까 조심한다. 수많은 사람이, 특히 팀장님은 변화를 위해 꾸준히 매진하였고 적지 않은 변화를 일구어냈다.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예전엔 상황이 훨씬 열악했다고 많은 이가 확인해줬다. 지금보다 더 많은 돼지를 몰았고 때리고 밟았다. 위생 상태도 더 안 좋았고 꼬리가 뜯긴 돼지도 더 많았다. 벵크트는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샅굴이 탈장된 돼지 한 마리가 실려왔는데 자기 몸에서 빠져나온 장을 자기 발로 밟고 다녔다고. 실제 지옥에도 여러 단계가 있는 법이다.
 “맞아요. 예전에는 그랬죠. 위반 사항이 있으면 기록만 하고 더이상 추적하지 않았죠. 하지만 동물보호는 특히나 어려운 분야입니다. 내 생각엔 우리가 여기서 감독하지 않으면 더 나빠질 것이고…… 우리가 꼭 여기 있어야 해요.” (p.211-212)

 

 돼지 한 마리가 트럭에서 비틀대며 걸어 나온다.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서 용감하게 친구들을 쫓아가 보지만 또 쓰러지고 만다. 녀석을 도울 수 있다면 좋겠다. 동물병원에 왔던 강아지들을 떠올린다. 그 녀석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었던 위로를 생각한다. 불안에 떠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쓰다듬으며 달랜다. 통증을 줄여줄 올바른 방법을 찾는다. 전화를 걸었을 때 울던 반려인들을 떠올린다. 걱정이 되거나 기뻐서 혹은 더 이상은 살 수 없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퍼서 그들은 울었다. 그러고는 마지막 순간을 반려동물과 함께하고자 득달같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제일 친한 친구죠.” 허리가 구부정하고 손목이 가늘고 더러운 스웨터를 입은 중년 남성이 말했다. 심부전으로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했던 강아지는 그의 품에서 영면했다
 “내 생명을 구했어요.” 고양이 덕분에 식이장애를 이겨낸 젊은 여성이 말했다. 그 고양이는 차에 치여 집중치료를 받았다.
 질병과 죽음과 맞서는 투쟁을 생각한다. 같은 투쟁을 바라보는 우리의 평가가 얼마나 다른지도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욕망에 따라서만 주고 뺏는다. 시멘트 바닥에 앉은 외로운 돼지를 보며 그 모든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녀석은 숨을 헐떡이며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로베르트가 볼트총을 들고 내 옆에 선다.
 “쏴요.” 내가 말한다.

 작업장에서 나는 축구공만 한 낭종이 붙은 신장을 떼어낸다. 몸뚱이가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불가해하다. (p.234-235)

 

 

모두를 위한 의료윤리 / 김준혁 / 휴머니스트

 

 낙태죄는 국가가 다시 인구 증가를 시도하려는 시점에서 문제가 됐다. 당시 국가의 인구정책은 “인구 자질 향상”, 즉 적정인구 유지를 통해 인구 구성의 연령비, 성비를 조절하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남아 비율이 높았던 1990년대엔 성감별이, 아예 출산율 자체가 문제가 된 2000년대엔 낙태 시술이 문제가 됐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낙태죄는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것도, 여성을 처벌하기 위한 것도, 의사와 조산사의 비위를 막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인구 통제를 위한 국가의 장치였다.
 어디서도 태아생명권에 대한 깊은 관심은 찾아보기 어렵고, 적정인구 확보를 위한 국가의 시책이 있었을 뿐이다. 2012년 헌법재판소가 이 문제를 생명권 대 자기결정권의 문제로 호도했다는 지적은, 그러므로 타당하다. 낙태죄가 인구 통제를 위해 여성을 인간이 아닌 수태의 수단으로 여기는 정책의 발로라면, 당연히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하고 이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p.74)

 

 출산-양육의 연속체에서 그동안 전통적으로 여성이 주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를 고수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심각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한다. 저출산이 심각하니 임신중절을 막아야 한다는 역발상은 문제 발생의 원인을 사회가 아닌 여성에게 돌리는 일이다. 물론 아이를 양육하는 데 따르는 부모의 책임을 없애는 것도 옳진 않다. 당연히 부모는 아이 양육에 책임을 져야 하고, 자녀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만 부모에게 적절한 책임 부여의 방안을 고려해야지, 아이를 무조건 낳게 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순 없다는 말이다.
 결국 문제는 그동안 양육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전가해온 사회에 있다. 아직 우리는 가족이, 사회가 함께 아이를 키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 우리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사회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방법을 고민해 실현하거나, 임신중절의 선택권을 전적으로 여성에게 부여하거나. 결코 불가능한 선택지도, 무리한 요구도 아니다. 이를 확립할 때 비로소 태아생명권 보호도 가능하다. (p.89-91)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환자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상황을 살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예컨대 〈해산바가지〉의 화자는 손녀를 얻고 분통을 터뜨리는 친구에게 도덕적 충고를 던지는 대신 왜 옛날이야기를 꺼내는가? “손녀도, 손자도 모두 귀한 생명이고 그렇게 여길 때 우리 또한 존중받을걸세”라고 곧바로 말해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 ‘정답’을 바로 들이밀지 않는 것은, 그런 도덕적 당위로는 상대방을 설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이해를 위해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 공간에서 독자는 등장인물과 작가의 윤리를, 그리고 자신의 판단을 검토하게 된다. 이를테면 작품 속 친구는 ‘여성은 결혼 후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라는 그 자신의 도덕적 결정을 내리고 있다. 이 결정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은 표면적으로는 쉽다. 이 친구의 결정을 ‘가부장주의적 편견’이라 비판하거나 ‘당시 시대상의 반영’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그것을 비판하든 받아들이든 둘 다 여러 층위로 구성된 친구의 삶을 무시하는 일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윤리’를 말하고자 한다면 각자 자신의 접근 자세가 윤리적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윤리를 말한다면서 상대방의 복잡다단한 상황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윤리를 실천하는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p.136-137)

 

 사실 위에 제시한 어떤 방법이든 잘 지키기만 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윤리적 논의가 일찍부터 제기되었음에도 결국 백신은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사회와 세계의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처럼 ‘의료윤리’를 생각한다는 게 이런 상황에선 오히려 좌절을 안기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간으로서 정의를 희구하며, 비록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을지라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그래서 좌절감이 더 커지기 전에 마음을 다잡는다. 지금까지 의료윤리 관점에서 그나마의 논의가 있어왔고 또 문제 제기도 있었기에 현재와 같은 성과라도 얻을 수 있지 않았던가 생각해본다. 코백스 퍼실리티가 준비돼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백신의 공정 분배가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책이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았다고 해서 관련 정책과 제도 정비마저 없어도 되는 건 아니다. 미래를 위해 더 많이 대비해놓으면 된다. (p.185)

 

 

중산층은 없다 / 하다스 바이스 / 산지니

 

 우리가 중산층에 대해 말할 때 “중간”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달리 “계급”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낮춘다. 사실 일부 이론가들의 지적처럼 “중산층”을 이야기하는 것이 “계급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것”과 같을 정도로 계급은 경시된다. 이론가들은 한 집단이 중산층으로 인정된다 해도, 중산층이라는 것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정체성(인종, 종교, 국적, 젠더 혹은 성적 지향성 등과 비교해보라)도, 집단 구성원들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주인-노예, 영주-농노, 더 강력하게는 자본가-노동자와는 달리 중산층에게는 뚜렷한 적대관계에 있는 계급이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중산층은 응집력 있고 확실히 구별되는 집단을 단절된 개인들로 구성된 다중(multitude)의 이미지로 바꿔버린다. 그들 각각은 개인의 역사와 욕구, 운명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어서, 마치 어떠한 확립된 정의도 그들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나갈지를 포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p.42-43)

 

 중산층이 될 가능성은 사회이동(상승과 하락 모두)이 우리 자신의 몫임을 암시한다. “중산층”이 지시하는 대상을 찾는 것은 아주 까다로운 일인데, 왜냐하면 그 “중산층”의 경계들이 매우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경계들은 사회이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유동적이어야 한다. “중산층”은 끝없는 능력주의를 상징하며, 투자하는 이들에게는 중산층으로의 진입을 약속하고 투자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락으로 위협한다. 만족을 미루고, 비축하기 위해 소비를 절제하고, 부채에 따른 위험과 책임을 떠맡고, 교육과 훈련, 집과 저축상품과 연금에 투자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중산층의 상승전략이자 계급 하락을 예방하기 위한 전략이다. 중산층이라는 것은 그 누구라도 변덕스럽거나, 게으르거나, 열망이 부족하면 하락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누구라도 노력, 주도성, 희생으로 계급 상승을 할 수 있다고 암시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며 운의 지배자임을 표명한다. 이는 마찬가지로 동료의 눈에 비치는 우리의 모습에도 강력하게 적용된다. 만약 우리가 성공하면 그건 우리가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고, 실패하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탓인 것이다. (p.44-45)

 

 19세기 후반에 걸쳐 유럽의 가장 발전한 경제에서 증가한 “중산층” 범주의 인기는 가계 재산과 그것을 획득하는 수단이 다양한 형태로 급증한 것과 관련이 있다. 게다가 당시는 사회적·정치적 격변의 시기였으며, 이는 커져가는 자본주의의 영향력과 지배력을 위태롭게 했다. 불만이 쌓인 노동자들을 달래어 축적 과정을 순탄하게 가동하기 위해서, 산업규모의 증가로 인해 발생한 잉여가치의 일부가 대중에게 허용되었다. 이들에게 허용된 잉여가치는 상당한 수의 노동자들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회이동을 하고, 물질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자원들로 압축되었다. 이러한 이동과 보호, 혹은 그것에 대한 약속은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시위에서 투자로 전향시켰다. 불만을 가졌던 노동자들은 잃어버릴까 두려워할 저축이나 집, 자격증을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장점을 내세우고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물질적, 문화적 장치들(accoutrements)을 얻을 수 있었다.
 축적을 위한 혜택은 고분고분하고 의욕적인 노동자를 형성하는 데 있는데, 노동자들은 재산과 그것에 의해 좌우되는 수입을 위한 쟁탈전 속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느라 보편적인 착취를 인식하고 그에 저항할 겨를조차 없다. 이러한 추세를 관찰하면서 어떤 이론가들은 중산층(중간계급)이 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적 위치(contradictory position)를 점하고 있다고 썼다. 모순적이라는 것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 대적하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즉 우리의 직업이 얼마나 명망 있든, 혹은 소득이 얼마나 높든지 간에 우리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잉여가치의 창출을 위해서 착취된다. 그러나 우리가 약간의 저축과 집, 차, 보험이나 자격증을 갖고 있거나 또는 그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한, 직업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소득이 아무리 적다고 해도 우리가 가진 것의 가치를 보호하거나 올려줄 수 있는 자본의 누적 운동(cumulative dynamic of capital)에 편승해서 얻을 만한 것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질이 간신히 획득한 자원들의 가치를 보존하고 지속적으로 소유하는 데 달려 있는 한, 우리는 자본에 대항하면 무엇인가를 잃는다 (p.61-63)

 

 다양한 투자 기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일정하지 않은 움직임은 우리가 더욱 격하게 투자를 좇게 만든다. 보상이 눈앞에 나타나지만 얻기는 어려울 때, 우리는 있는 힘껏 그것을 끝까지 찾아다니기 위해 노력하며, 실패하더라도 더 열심히 노력하기를 단념하지 않는다. 신용은 재산과 투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관계에 그러한 효과를 가진다. 신용은 우리가 꿈꾸는 모든 것들을 우리의 손끝에 두어 우리가 더 열심히 일하고, 그 꿈들을 붙잡기 위해 주머니 속에 더 깊게 손을 뻗게 하는 효과를 가진다. 우리가 겨우 구한 것들이 우리가 기대하고 있었던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밝혀질 때, 신용은 우리를 더 열심히 일하게 하고 손을 더 뻗도록 자극하기도 한다. 자본이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희생시켜서 축적을 이어가는 동안 우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버티는데,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것이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장려하기 때문이다. (p.74)

 

 투자 관념에 크게 의존하는 이데올로기는 그 매력을 유지해줄 투자를 필요로 한다. 가계 재산을 획득할 가능성이 점차 커지면서,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노동자보다는 투자자로 형성하도록 하였다. 금융시장을 통한 재산 획득은 점점 더 많은 전 세계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도록 고무했다. 선진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투자에 참여한 시민들이 사회정책 및 규제를 통해 계획된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자가 기대했던 방식으로 보상되는 한,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투자자로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노동이 여전히 그들의 주요한 생계수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 뒤에서 진행되는 노동의 가치 절하로부터 서서히 눈을 돌리게 되었다. (p.79-80)

 

 불평등에 대한 피케티의 폭로는 재산세에 대한 그의 제안과 함께 충분히 높이 평가받았고 면밀히 검토되어왔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서 특정 맥락은 비교적 관심을 덜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재산 가치의 변동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그는 오노레 드 발자크와 제인 오스틴의 19세기 소설을 골라서 극단적인 불로소득 사회에서는 노동을 경멸하고 그 대신 상속받거나 결혼을 통해 얻은 재산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노동소득보다 더 많은 수익을 가져오는 재산은 결혼에 집착하는 여주인공들에게 신빙성을 부여했다. 인플레이션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는, 재산의 가치 또한 안정된 수입을 창출할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이었다. 19세기 소설가들은 재산의 가치가 세대를 거치면서도 똑같이 유지될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그 가격을 소설에 적었다. 오늘날 재산은 그만큼 집중되어 있고 더 수익성이 높지만, 19세기와는 대조적으로 역동적이고 불안정하다. 지폐 더미는 관리하지 않고 재투자하지 않으면 눈앞에서 사라지기 쉽다. 피케티는 이런 변동성의 중요성을 제기하지만 바로 이를 일축하면서, 많은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은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재산을 다양화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실일 수 있지만,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고 다양하지 않다. 재산은 가치 변동에 너무 취약해서 더이상 안정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p.121-122)

 

 정치인들은 그들이 중산층 유권자라고 선언한 이들에게 호소하는데, 이들은 전형적으로 저축과 대출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부동산 부문, 기업 부문, 은행 부문, 보험 산업 및 연금 시스템의 경제적 안정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통해 이러한 노동자들의 재산 수익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한 정책이 예산 삭감, 해고, 긴축 조치를 필요로 할 때 정치인들의 호소는 더욱 완강해지는데, 사실 이는 그들이 대변한다고 주장한 바로 그 노동자들의 수익에 손해를 가져온다. 이러한 압박이 강화되고 다른 안전망들이 사라지면서, 사유재산의 중요성은 매우 빠른 속도로 커진다. (p.141)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가 소비선택을 반영하고 강화해온 미국에서는, 보호를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정치적 수렁에 빠져 있다.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의존하는 상품 및 서비스의 가격을 낮추는 구조가 그들의 노동 소득을 깎는 구조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국적 소매기업인 월마트는 이러한 복잡한 관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월마트가 확장되는 곳마다, 직종별 평균 임금률은 하락한다. 그런데도 월마트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더 낮은 가격을 누리는 폭넓은 사회적 목표에 공헌하기 위해 높은 임금을 포기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월마트는 소위 낮은 물가와 저임금의 절충이라는 주제에 관한 국민적 담화에 미국 대중 대다수가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이 프레임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을 오로지 소비자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도록 장려할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소비를 애국이라고 강조한다. (p.184-185)

 

 오늘날 금융 부문을 대변하는 이들은 아주 목청껏 투자를 홍보한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그 가치가 잠식되는 은행 계좌에 돈을 넣어둬서 손해를 보지 말고, 그 돈을 글로벌 금융에 투자하고, 이윤을 위해 위기를 이용하고, 시장의 변동 흐름을 타기 위해 투자를 다양화하는 영리한 금융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투자는 또한 우리가 다양한 관계와 선택을 명확히 표현하는 하나의 비유로서 일상 언어에 퍼져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투자자로서 전략을 짜도록 장려되기 때문에,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교육이나 기술 습득, 사회화와 같은 비금융적인 행위도 투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투자는 사회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다. (p.214-215)

 

 우리가 지나치게 많이 투자하고 그로 인해 우리의 투자를 끌어내는 구조와 제도들을 유지한다면,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압박과 인센티브에 부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투자 주도적인 자기 결정을 긍정한다면, 우리는 이 부응이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미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중산층에 암시되어 있는 자기 결정은 거짓이다. 우리가 인생을 계획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관습과 관계를 조정하는 구조들은 우리의 욕구 충족과 꿈의 실현, 두려움 해소와는 상반되는 목표를 위해 나아가도록 설계된다. 그 목표들은 우리가 투자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임시적이고 수단적인 동맹을 맺게 하는 한편, 이익과 손실을 두고 서로 경쟁하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경쟁은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운동들 속에서 지속적이고 효율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서 앗아간다. (p.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