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니스의 시대 / 위르겐 마르추카트 / 호밀밭
따라서 우리는 피트니스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따져 물어서, 그 피트니스를 통해 이루어지는 감싸기와 배제를 만천하에 드러내야 한다. 누가 핏한 사람으로 간주되며 누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가? 어떤 이는 핏한 사람으로,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인간은 피트니스를 통해 지배받는데, 이 말이 우선적으로 통하는 곳은 자발적 동참을 특별한 정도로 요구하는 여러 자유주의 사회다. 자유주의 사회의 중심 원리가 스스로 책임지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또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를 챙기는 것까지도 의미한다. 이걸 성공적으로 해낸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과 사회에 대해 책임을 떠맡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공한 개인으로, 또 선량한 사회구성원으로 대접받으려는 이는 생산과 재생산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또 근면해야 하며 매력적이고 튼튼해야 한다. 여기에 피트니스가 통제 및 규범적 요소로 작용한다. 그렇다고 예컨대 법규와 처벌을 통해 외적으로 강제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피트니스는 주변부와 쓸데없는 존재를 만들어내며 이로써 배제되는 존재를 낳는데, 바로 여기에 피트니스의 통제적 규범적 작용이 들어있다.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는 이, 병들었거나 신체적 제약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 또는 제 몸에 충분히 신경 쓰지 못함으로써 핏한 상태의 획득이나 그 상태의 유지에 실패한 사람은―분명―가장자리로 밀려나거나 배제되는 것이다. 피트니스가 어느 정도의 작용력을 갖는지, 또 그 피트니스의 여러 요구사항이 어떻게 형성되며 그 중요도가 각각 어떠한지는 역사 속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p.22-23)
요약하면, 음식을 먹을 때 피트니스에 신경 써가며 먹는 것은 우리 시대에 하나의 강박이자 강력한 규범적 지침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달달한 것, 군것질거리 및 패스트푸드에 대한 인간의 열정이 사라지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두 경향은 서로를 제약하고 서로에게 힘을 준다. 그 둘은 ‘좋은’ 식습관과 ‘나쁜’ 식습관, ‘좋은’ 신체와 ‘나쁜’ 신체를 구분한 다음 그걸 정치적 질서의 일부로 삼아버리는 문화사회를 만든다. 좋은 음식을 섭취하는 사람은 자신, 가족 및 집단에 대해, 그리고 그 집단의 건강과 성취역량에 대해 책임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사람은 무엇이 중요하고 옳은지를 아는 것 같고, 자기 자신에게 성공적으로 투자하며 그 과정에서 내내 기쁨까지도 느낄 줄 아는 것 같다. 스스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선량한 국민’의 실천행위라고 작가 바버라 킹솔버는 말한다. 건강한 식사와 거기에 어울리는 생활방식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 이래 두 집단의 차이, 그러니까 삶을 성찰하고 건강과 성취를 의식한다 싶은 사람들과 자신에 대해 그런 걸 요구할 처지가 못 되는 사람들 간의 차이를 만드는 엔진이 되었다. 바로 그런 이들의 몸을 보면 그들의 무지를 읽어낼 수 있는 것 같다. 미국에서는 비교적 가난하고 교육과는 거리가 먼 인구집단뿐 아니라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도 종종 그런 주목을 받는 집단이다. 이로써 그들은―또 다시, 그리고 민권운동의 성공에도 불구하고―자율적으로 인생을 영위할 능력이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패스트푸드는 자기 가능성과 능력에 손해를 끼치는 최악의 무신경한 소비로,―독일 상황과 관련한 파울 놀테의 언급처럼―“교육적 가치라고는 거의 없는 쓰레기 같은 텔레비전 토크쇼와 동급”으로 통한다. 이것이 우선순위와 결정에 잘못(즉 좋은 음식 대신 고선명 텔레비전 시청, 당근과 감자 대신 ‘버거킹’이라는 선택)이 있어서라고 볼지, 아니면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탓이라고 볼지는 일반적으로 논평하는 이의 정치 성향에 달려 있다. 이러나저러나 건강함과 불건강함, 핏함과 핏하지 않음을 구별하는 것은 계급을 구별하는 행위가 되어버렸다. 이런 구별은 현재 갖고 있는 결정능력 및 책임의식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도, 다시 말해 자기 자신, 가족, 사회, 환경 및 지구 전체에 대한 책임의식의 크기도 항상 나타내 준다는 것이다. (p.47-48)
이 무렵 미국 잡지는 여가시간에 이루어지는 여러 피트니스 트렌드의 경기 등락에 대한 기사로 넘쳐났다. 이들 트렌드는 몸으로 경험하고 몸으로 보여주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핏함과 핏해 보임은 그사이 ‘상식’이 되어 건강과 성취능력을 상징했고, 동시에 출세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와 반대로 뚱뚱함은 경쟁이 판치는 일자리 시장에서 ‘죽음의 입맞춤’으로 간주되었다. 1978년 〈슈피겔〉 지는 당시 초창기이던 미국의 ‘비만 권리 운동’을 다룬 기사에서 뚱뚱한 사람은 종종 ‘2등 시민’으로 간주되어 노동의 세계에서 추방될 거라고 언급했다. 몇 년 뒤에는 독일에서도 “‘잘생긴 외모의’ 사람이 오히려 돈이 되는 양질의 일자리를 얻는다”는 말에 그 누구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신식 라이프스타일-인종주의’라는 진단을 콕 집어서 잘 지적한 말이다. 이 인종주의는 오로지 건강한 사람 내지는 자기 상상 속의 건강한 사람처럼 보이는 존재만 인간으로 인정해 준다고 한다. 그 밖의 모든 이들은 그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다는 것이다. ‘라이프스타일-인종주의’ 개념과 더불어 인종주의와 지방공포증이 서로 가깝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그렇게 보는 이유는 인종주의나 지방공포증이 차별적 행위와 정책을 내세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둘 다 눈에 보이는 허상적 증거를 통해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p.154-155)
국가사회주의 및 그것의 깊디깊은, 우월인간이라는 인종주의적 이념은 호전적-영웅주의적 신체정책의 정점이었다. 이 정책은 한쪽은 최적화하고 다른 쪽은 전적으로 배제한다는 비전에 푹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향해 가는 도중에 이 군사적-영웅주의적 이상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이미 깊은 분열을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사람들은 다들 ‘독일의 옛 영웅정신’을 드러낼 기회가 왔다고 환호했다. 하지만 결국 군인의 영웅적 행동과 피트니스가 전쟁에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는 없었다. 집중포화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수류탄 파편이 튀는 상황에서 며칠 몇 주 동안 참호의 진창 속에서 견뎌야 했고 그다음에는―만에 하나 살아남기라도 했다면―‘전쟁 장애인’, 안면 손상자 아니면 ‘전쟁떨림증 환자’로 삶을 이어간 군인들을 어떻게 영웅이라고 존경할 수 있었겠는가? 독일만 해도 영구 장애와 병든 몸으로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이 270만 명이나 되었다. 그 수많은 상이군인은 대서양 양쪽 모두에서 사람들의 짜증거리가 되었고, 의료진과 군 고위층은 셸 쇼크라는 수수께끼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p.230-231)
사회학자이자 문화학자인 제니퍼 리와 캣 포제는 뚱뚱한 사람은 “실패한 시민”이라는 낙인과 함께 살아간다고 비판한다. 리와 포제가 말하는 ‘시민(citizens)’이란 출생지나 혈통에서 도출되지 않는 소속성의 한 형태를 의미한다. 오히려 그들은 시민으로서 참여하리라는 기대와 시민으로서의 과업을 완수하는 일을 도대체 누가 떠맡느냐는 질문을 제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을 준수하거나 적절한 세금을 납부하는 것 또는 몇 년에 한 번씩 투표장에 가는 것이 아니다. ‘시민’으로 온전히 인정받고, 자유롭고 평등한 자들의 사회의,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구성원이 되려면 더 많은 요구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복지, 성장 및 사회 유지에 적극적으로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말이다. 몸은 이런 요구조건에 부응할 수 있는 능력 또는 무능력의 표현 수단으로 간주된다. 무엇보다 ‘장애 연구(Dis/ability Studies)’는 지난 몇 해 동안 온전한 시민,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이상적 몸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도출됨을 보여주었다. 그 외의 모든 다른 몸은 개선되거나 가공되거나 치료받을 필요가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야 인간이 유능한 ‘시민’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몸과, 몸의 입증된 가능성 및 능력이 고정불변인 경우는 매우 드물며 오히려 매우 역동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매달려 애쓰라, 삶을 바꾸라, 실존을 개선하라, 그리고 이를 목표로 몸과 자신에 대한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가꾸라는 호소는 그만큼 더 크게 들린다. 뚱뚱한 이를 ‘실패한 시민’이라고 낙인찍는 것은 항상 무능함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결부되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더 노력하고 자신에 매달려 더 애쓰라는 요구와도 결부되어 있다. (p.270-272)
피트니스 시대는 예컨대 스튜디오에서 ‘워크아웃’을 완수하거나 마라톤을 하면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약속을 통해 작동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하자면 구체적으로 측정할 수 있을 아주 특정한 어떤 성공이 아니라) 원칙으로서의 성공이며, 자신을 활성화하여 자신의 가능성을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길어씀으로써 자신의 잠재력을 키우는 것이다. 피트니스의 요체는 자신과 자신의 한계에 매달려 애쓰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든 의욕이 넘쳐야 하고, 성취를 낼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생산적이고, 정력적이며, 싸울 자세가 되어 있고, 예외적인 것을 행할 능력이 있으며, 도처에 널려 있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언제든 우리 자신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트니스의 그 대단한 무게감을 강조한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항상 어쩔 수 없이 그것에 사로잡힐 거라는 뜻은 아니다. 피트니스 정권의 엄혹함에 맞서서 거기서 벗어나거나 적어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이는 틀림없이 존재한다. 심지어 거기에 전혀 영향받지 않는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예컨대 햄버거와 생크림 케이크를 의식적 저항행위로써가 아니라 그게 그저 즐겁고 기뻐서 먹는 것이 어쩌면 그런 일일 수도 있겠다. 그냥 게으르게 소파에 누워 뒹구는 사람들도 있다. 마음이 그쪽으로 동하면 곧장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모든 스포츠 활동이 피트니스 정권에 대한 복종 행위일 필요도 없다. 이따금 그저 몸 움직이기와 제 몸에 대한 재미와 기쁨으로, 또 도전에 대한 재미와 기쁨으로 스포츠 활동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당연히 알고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이나 행하는 일에서 오는 기쁨 역시 사회적인 것을 벗어나 있거나 여러 문화적 조건의 저편에 있지 않음을. (p.275-277)
바다 생물 콘서트 / 프라우케 바구쉐 / 흐름출판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이 어디건 간에, 그곳이 쾰른이건 에어푸르트건 아니면 알프스 산맥을 걷고 있건, 노르트제 해변에 가만히 누워있건 간에,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당신은 바다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지구 전체 산소의 절반 이상을 식물성플랑크톤―크기가 0.0001밀리미터에서 1밀리미터에 이르는 극도로 작은 식물성 유기체―이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식물성 플랑크톤은 ‘바다의 초록색 폐’로 불리기도 한다. 크기가 극도로 작은 이 유기체들은 육지에 있는 나무와 매우 흡사하게 광합성 작용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물, 이산화탄소, 빛 에너지로부터 당분과 일종의 ‘부산물’ 격인 산소가 생성된다. 활발하게 광합성 작용을 하는 이런 해초들을 가리켜 1차 생산자(primary producer)라고 부른다. 영국 레스터 대학 응용수학과의 세르게이 페트로프스키 교수는 기후변화의 영향에 대해 설명하면서 해수온도가 6℃ 상승할 경우 식물성 플랑크톤이 크게 감소하여 바닷속은 물론이고 전 세계 대기 중 산소의 감소로 이어질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전 세계에 걸쳐 인간과 동물의 떼죽음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p.27)
열대 산호초는 전체 해저 면적 가운데 약 28만 4300평방킬로미터를 덮고 있다. 비록 전체 평면의 1퍼센트도 되지 않는 규모지만, 이 1퍼센트가 전 세계 바닷물고기 4분의 1에게 생활공간을 제공한다. 산호초는 그 다양성과 생산성으로 인해 흔히 ‘바다의 요람’ 혹은 ‘바다의 열대우림’으로 불린다. 산호초는 종 밀집도가 가장 높은 생태계 중 하나로 인간들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산호초를 이용해왔다. 산호초는 해변의 모래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섬(환상산호도 Atoll)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해일을 막아주고, 해안 침식을 방지하며,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지난 50년간 밝혀진 바와 같이, 그것은 신약의 중요한 원천이기도 하다. 산호초는 지구에 존재하는 가장 다채롭고 복잡한 생태계 중 하나로 꼽힌다. 매혹적인 다양성을 자랑하는 산호초는 다채롭고, 생동감이 넘친다. 한마디로 그것은 비밀에 둘러싸인 자연의 불가사의다. (p.58)
반대로 상어는 매년 수백만 마리가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가 매우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왜냐하면 산 채로 지느러미가 잘려나가기 때문이다. 지느러미가 잘린 상어들은 산 채로 다시 바다에 던져져 그곳에서 비참하게 죽어간다. 이런 행위를 가리켜 영어로 ‘피닝(finning)’이라고 한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일까? 혐오스러운 스프에 넣거나 소위 남성들의 정력을 증강하기 위해서다. 비미니야외생물연구소 소속의 상어 생물학자 새뮤얼 H. 그루버와 그의 연구팀은 어업 활동 수치를 근거로 하여 해마다 전 세계에서 약 1억 마리의 상어가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보고하였다. 이 수치는 어디까지나 보수적인 추정치다. 시간당 1만 1417마리의 상어가 죽어나가는 셈이다. 한발 더 나아가 2013년 전문 학술잡지 「마린 폴리시(Marine Policy)」에 실린 연구 논문에서 저자들은 연간 2억 7300만 마리가 더 정확한 수치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 정확한 수치인지 체계적으로 정리부터 해야 하겠지만, 어쨌거나 양쪽 모두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수치다! (p.182)
인간은 자원을 찾아 점점 더 멀리 떨어진 영역으로 전진하고 있다. 모래와 자갈, 석유, 그리고 가스가 이미 오래전부터 해양에서 채굴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인간은 또 다른 풍성한 원료의 보고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심해가 바로 그 대상이다. 저 아래쪽에 펼쳐진 어둠 속에 수십 억 유로의 값어치가 나가는 자원이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 현재 특히 산업 국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국가들이 그들의 기계에 기름칠을 하고 있다. 스마트폰, 자동차, 태양열 집열판 등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유용한 금속에 대한 수요가 높은 상황에서 때마침 심해에 그런 금속들이 존재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본격적인 골드러시가 시작될 참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주장에 따르면, 원료 채굴 과정에서 바다 생물들이 입게 될지도 모르는 피해의 규모가 삼림 벌채에 필적할 정도로 크다고 한다. 한마디로 심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너무나도 보잘것없다. 따라서 채굴에 동원된 기계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심해 동식물 세계가 영구적으로 파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갈망하는 광물질에 대한 수요는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개발 사이클이 점점 짧아지면서 사용 수명이 더 짧아진 최신 스마트폰이 시장에 쏟아지고 있고 구리, 코발트, 알루미늄 등이 함유된 고장 난 전화기들이 휴지통에 버려지고 있다. 전화기가 고장 나면 새 전화기를 장만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도 역시 희귀하고 귀중한 자원들이 들어 있다. 심해에서 채굴을 기다리는 바로 그런 자원들 말이다. 이에 따라 2025년부터 상업적인 채굴이 개시될 예정이다. (p.215-216)
바다에 플라스틱 쓰레기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국가의 순위를 살펴보면 중국(1위), 인도네시아(2위), 필리핀(3위)에 이어 베트남이 4위를 차지하고 있다. 메콩강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플라스틱 쓰레기를 바다로 운반하는 10대 하천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들 국가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어쩌면 당신이 조금 전에 노란색 봉투나 노란색 통에 던져 넣은 요구르트 용기가 그 언제쯤인가 바로 이런 나라들로 향하게 될 지도 모른다. (p.290-291)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480만 톤에서 1270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평균 1분마다 쓰레기차 한 대 분량의 플라스틱이 바다에 버려지는 셈이다! 쓰레기 배출량이 극적으로 줄어들지 않는다면, 이 어마어마한 수치가 2030년이 되면 두 배로 늘어나고 2050년이 되면 심지어 4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2025년이 되면 약 2억 5000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에 떠다니게 될 것이다. 요컨대 물고기가 3톤에 플라스틱 1톤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상황이 계속 이렇게 진행된다면, 2050년에는 바다에 물고기보다 플라스틱이 더 많아질 것이다!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머지않아 슬픈 현실로 다가오게 될 일이다. 유입된 플라스틱 쓰레기의 95퍼센트 이상은 육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강을 경유하여 바다로 흘러들어온다. 특히 10개의 하천이 주요 오염원 역할을 하는데, 이 강들은 모두 합쳐 연간 최대 400만 톤의 플라스틱을 바다로 흘려보낸다. 10개의 하천 중 8개가 아시아에 있고(중국 양쯔강이 선두를 차지하고 있다), 2개는 아프리카에 있다. 나머지 5퍼센트에 해당하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주로 선박에서 온 것들인데, 적절치 못한 쓰레기 처리나 화물 분실 등 원인은 다양하다. (p.297-298)
UN 보고서에 따르면, 연간 약 6만 4000톤의 그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고 하는데, 이것들은 바다에 흘러 들어간 이후에도 작업을 멈추기는커녕 계속해서 어획활동을 이어나간다. 결과적으로 그것들은 떠다니는 죽음의 덫이 되어 무수한 바닷새와 해양포유류, 바다거북, 상어를 비롯한 다른 많은 물고기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덫에 걸린 동물들은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흔히 축구장 크기만 한 그물들은 때때로 산호초에 매달려 장시간 머물면서 산호초를 덮어 질식시켜버린다. 산호초에서 그물을 제거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다른 산호들이 그물을 빙 둘러싸고 자라나는 바람에 그물을 제거하면 산호도 함께 꺾여버리기 때문이다. (p.299)
해산물 산업에 조성된 덤핑가격은 환경에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 소비자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부유한 서구국가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조차도 이런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냉동고에서 꺼낸 연어 조각이나 스시 레스토랑 접시 위에 근사하게 차려진 새우 니기리에는 맹그로브숲의 파괴를 경고하고, 물고기들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기잡이배에서 횡행하는 노예 같은 삶을 알려주는 라벨이 붙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선과 해산물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해법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p.341-342)
사피엔스의 멸망 / 토비 오드 / 커넥팅
주변의 모든 게 무너지고 있는 듯한 상황에서 우리가 진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지 모른다. 이 같은 회의주의가 일어나는 까닭 중 하나는 우리 삶이나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경험은 수년의 단위로 펼쳐지며 그런 시간 척도에서는 나쁜 일과 좋은 일이 비슷한 빈도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 기회보다는 위협에 더 주목하는 인간의 성향도 또 다른 이유다. 일부 정보만을 취하여 의사 결정을 단순화하는 휴리스틱은 행동의 방향을 정하는 데 유용하지만 좋음과 나쁨의 균형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우리가 이 같은 왜곡을 극복하고 인류의 삶을 되도록 객관적으로 평가할 보편적 지침을 찾으려고 한다면 한 세기에서 다음 세기로 넘어가며 일어난 두드러진 발전을 보지 못하고 놓치기란 무척 힘들다.
진보의 경향은 새삼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인류가 수십만 년 동안 이룬 셀 수 없이 많은 혁신의 수혜자다. 기술, 수학, 언어, 제도, 문화, 예술의 혁신과 근대 세계의 거의 모든 면을 창조한 수천억 선조들의 아이디어를 매일같이 누린다. 이 모든 건 눈부신 유산이다. 우리 삶이 덕분에 나아졌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p.30-31)
우리는 최초의 세대가 아니다. 우리의 문화, 제도, 관습 그리고 우리의 지식, 기술, 부는 10,000세대에 걸친 조상이 조금씩 쌓아 올린 것이다. 우리는 앞의 장에서 인류의 눈부신 성공은 세대를 초월한 협력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선조에게 유산을 물려받아 작은 변화를 준 다음 모든 걸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협력이 없었다면 집과 논밭, 춤이나 노래의 전통, 문자, 국가는 없었을 것이다.
1790년에 보수적인 정치 이론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사회에 관해 쓴 글에서 이 같은 생각을 유려하게 표현했다.그것은 모든 과학의 파트너십이자 모든 예술의 파트너십이며 모든 미덕의 파트너십이고 모든 완벽함의 파트너십이다. 파트너십의 목표는 많은 세대를 거쳐야만 달성될 수 있으므로, 살아 있는 자들 사이의 파트너십일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자, 죽은 자, 앞으로 태어날 자 사이의 파트너십이기도 하다.
위 글은 우리에게 인류를 지켜야 할 이유를 과거에서도 찾게 한다. 우리는 자손에 대한 의무뿐 아니라 선조에 대한 의무도 지켜야 한다. (p.70-71)
존재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는 공공재다. 우리 모두 혜택을 누리고 내가 보호받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보호받지 못하는 건 아니다. 따라서 시장이 존재 위험을 방치할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존재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는 전 세계의 공공재이므로 수혜자가 전 세계에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국가들조차 존재 위험을 방치한다.
나는 이 책을 영국에서 쓰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인 영국에는 거의 7,000만 명이 살고 있지만, 이는 전 세계 인구의 1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영국이 홀로 존재 위험에 대응하여 모든 정책 비용을 감당한다면 그 혜택 중 100분의 1도 못 누린다. 다시 말해 영국 정부가 자국민의 장기적 이익을 고려하여 행동하더라도, 존재 위험에 대한 노력의 가치를 100분의 1로 저평가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50분의 1, 미국은 20분의 1로 저평가하며,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도 5분의 1로 저평가하게 된다. 이처럼 혜택 대부분이 다른 국가들에 돌아가므로 각 국가는 다른 국가들의 노력에 편승하려고 한다. 그 결과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될 노력 중에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있다. (p.82-83)
기술은 공짜로 우리에게 훨씬 나은 삶을 선사하지 않는다. 위험이라는 숨은 비용이 발생한다. 우리는 가시적인 이익들에만 주목하지만 언젠가 갚아야 하는 숨은 빚이 쌓이고 있다. 우리가 기술 속도를 바꾸지 않을 거라면, 최소한 기술이 우리에게 선사한 부의 일부를 빚을 갚는 데 써야 한다. 예를 들어 기술이 우리에게 안긴 이익 중 단 1퍼센트를 더 큰 기술 진보로 인한 인류 잠재력 파괴를 막는 데 쓸 수 있다. (p.278-279)
나는 기부가 누구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며 내가 세상에 보답할 중요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인류의 여러 큰 성공이 자선을 통해 가능했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20세기의 가장 혁신적인 발명품 중 하나인 피임약은 한 명의 자선가 덕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정부와 제약업계 모두 피임에 별 관심이 없던 1950년대에 피임약이 개발된 건 캐서린 맥코믹(Katherine McCormick)이라는 자선사업가가 거의 단독으로 투자한 연구 덕분이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이른바 녹색혁명이 일어나 주요 작물들의 개량종이 나오면서 수천만 명이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노력을 이끈 과학자 노먼 볼로그는 1970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볼로그의 연구와 개발도상국으로의 농업 기술 전이는 개인 자선가들 덕분에 가능했다. (p.288-289)
빵으로 읽는 세계사 / 이영숙 / 스몰빅인사이트
고대 이집트의 풍성한 빵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인류가 늘 빵을 풍족하게 먹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사실 일반인들은 귀리죽, 오트밀, 뽀리지라고 하는 곡물죽을 많이 먹었다. 영국의 전래동화 〈골디락스와 세 마리 곰〉을 보면, 곰 가족이 뜨거운 뽀리지를 그릇에 담아 두고 그것이 식을 때까지 산책을 위해 집을 나서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렸을 때 ‘뽀리지’가 뭘까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뽀리지는 오트밀이든 보리든, 호밀이든 하여간 자신이 사는 곳에서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곡식에 물을 넣어 끓이는 것이다. 혹은 채소나 푸성귀 같은 것을 넣어 끓인 수프를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알아둬야 할 것은 야채수프라고 해서 감자나 옥수수, 토마토가 듬뿍 들어간 그런 영양식이 아니다는 것이다. 감자, 옥수수, 토마토는 전부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콜럼버스의 교환’이라고 부르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간의 문물 교류가 행해진 이후에야 유럽에 소개되었다. 그리고 유럽에 들어온 이후에도 낯선 것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오래도록 먹지 않았다.
그러니 당시에는 야채수프래야 잘하면 렌틸콩, 무, 당근, 양파 정도가 들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하여간 참 초라하고 단순한 식탁이었을 것이다. 동화 〈라푼젤〉을 보면, 임신한 여인이 양배추를 너무 먹고 싶어하자 남편이 양배추 서리를 하러 마녀의 채소밭에 들어갔다가 훗날 딸아이를 뺏기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내용이 나온다. 하찮은 푸성귀 하나 먹겠다고 그리 무리수를 두었나 싶지만, 당시의 초라한 먹거리를 생각하면, 특히 특정 음식에 끌리는 임산부의 마음을 고려하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p.52-53)
멕시코의 전통 빵이자 멕시코인들의 주식인 토르티야는 옥수숫가루를 반죽해 둥글고 납작하게 밀어서 구운 무 발효빵이다. 토르티야는 그것을 어떻게 먹느냐, 또는 그것에 무엇을 넣어 먹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변한다. 예를 들어 토르티야 위에 볶은 소고기나 닭고기, 토마토, 양파, 양상추 등을 얹고, 칠리소스를 뿌린 후 반으로 접으면 ‘타코’가 된다. 그리고 토르티야에 고기, 콩, 양파, 생토마토 등을 넣고 김밥 모양으로 완전히 말면 ‘부리또’가 된다. 한편, 토르티야를 칩 형태로 튀기거나 구우면 간식이나 안주로 즐겨 먹는 ‘나초’가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치즈, 채소, 고기 등을 토르티야로 넣어 반으로 접은 후 구워낸 ‘케사디야’, 기름에 살짝 데운 토르티야에 닭, 돼지, 소고기 등을 선택해서 김말이처럼 말아낸 ‘엔칠라다’, 토르티야와 각종 재료와 소스를 따로 내어, 먹는 사람이 입맛에 맞추어 재료를 선택하여 싸 먹도록 하는 ‘파히타 플레이트’ 등 토르티야를 이용한 다양한 음식들이 있다. (p.185-186)
투박하게 생긴 러시아 흑빵은 겉껍질도 매우 딱딱하고 안도 밀을 사용해 만든 빵에 비해 식감이 거친 편이다. 밀경작에 좋지 않은 러시아 기후상 보리나 호밀을 비롯해 잡곡을 사용해 만든 까닭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베개나 방석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겉이 단단하고 딱딱하다 보니 보관도 꽤 오래되고 저장도 쉬웠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빵을 자르려 하다 보면 칼이 안 들어갈 정도로 딱딱하여 이가 약한 어르신이나 아이들은 먹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러시아 가정에서는 어느 집에나 있는 러시아식 난로 사모바르에서 따끈하게 데워진 수프나 차와 함께 흑빵을 먹는다. 러시아는 지정학적으로 위도가 높아서 추운 날씨가 오래 계속되다 보니 난로와 그 위에 뭉근히 끓이는 수프가 일상이다. 추운 날 뜨거운 수프에 흑빵을 부수어 넣어 먹으면 속이 확 풀리는 든든한 한 끼가 된다. (p.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