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읽는 직업 / 이은혜 / 마음산책

 

 지칠 줄 모르고 누군가를 또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이 편집자의 특성이다. 왜냐하면 글로 사람을 먼저 접하는 우리는 서로의 신상부터 파악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정체성의 핵심(글)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아하게 되는 속도도 빠르고 관계의 밀도도 높으며, 헤어지면 그만큼 커다란 내상을 입는다. 이별 후에도 책이라는 실물이 남아 옛 연인이 준 물건을 버리듯 할 수 없다. 한때는 그 저자가 바로 자신의 일이자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산파 역할을 했던 편집자는 밤새 침대 옆을 지키며 출산을 도왔던 그 산모(저자)와 아기(책)를 잘 잊지 못한다. (p.24)

 

 지성, 전문성, 근면성, 인내심을 갖춘 팩트체커들은 실제로 만나면 얼음처럼 차가울 것 같지만 오히려 유연하고 이해심이 많아 놀라움을 자아낸다. 왜 그럴까. 타인의 오류를 지적할 때 상대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부드러워야 하며, 또 인간이라면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 오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류를 인정하는 것과 외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우리는 오늘도 그 일을 배우고 있다. (p.102)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가 캐낸 삶의 가치 일부를 자기 삶의 자원으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을 읽었다는 것은 때로 삶의 요소로 가져왔다는 것과 동의어가 될 수 있다. 혹은 읽음으로써 삶의 결을 보는 시선을 조금 변경한다는 것과 동의어이거나.
 사실 책을 읽는 이들은 점점 영악해진다. 그것이 독서의 단점이라면 단점인데, 더 많은 책을 읽을수록 독자로서 순진하고 순수한 상태로 남아 있기 힘들다. 따라서 어린 시절에 읽지 않고 지나온 책들을 성인이 되어 읽기는 힘든 것이고(재발견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나의 젊은 시절이나 작가의 절정을 지나쳐오면 다시 그 책으로 되돌아갈 기회를 얻기도 힘들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라는 상투어는 독서에 가장 잘 들어맞기도 한다. (p.182)

 

 편집자가 되자 입장은 180도 바뀌었다. 첫째,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1년에 주문이 100권 이하로 들어오면 절판시킨다. 우리도 통상 계약 기간인 5년이 지나 절판시킨 책이 여러 권 있다. 하지만 저자나 역자는 “주변에서 책을 찾는데 없다고 불만이 크다”며 확증 편향의 견해로 복간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들의 지인은 한두 명의 독자일 뿐이지만 목소리는 마치 열 명처럼 크다. 그리하여 ‘속지 않는다’고 다짐하며 계산에 근거해 때때로 절판 결정을 내리지만,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좋은 책이 절판되면 단호한 분별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저 책은 사라질 만한 게 아닌데. 복간하면 잘될 수도 있을 텐데.’
 편집자는 칼 같은 판매자의 마음을 견지하기도 하지만, 일할 때도 머릿속은 독자라는 자아와 분리되어야 함을 잊은 채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향해 내달린다. 시장에서의 퇴출을 목격하고도, 연민·정의·근거 없는 자신감에 휩싸여 마케터의 마인드는 한쪽으로 미뤄두게 된다. 그러고는 전화를 건다. “절판된 선생님의 책을 복간해보겠습니다.” (p.202-203)

 

 

죽기는 싫으면서 천국엔 가고 싶은 / 에이미 거트먼, 조너선 D. 모레노 / 후마니타스

 

 말할 의무는 그저 시작이며, 환자의 말을 경청할 책임은 여전히 핵심적인 과제로 남아 있다. 경청은 환자에 대한 존중을 보여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정확한 진단과 효과적인 치료에 지극히 중요하지만, 살인적인 병원 스케줄로 그 진가가 대체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 의료 업무의 압박 때문에 경청의 기술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든 듯하다. 꼼꼼한 이력 청취는 변함없이 숙련된 의료인의 핵심 요건이다. 많은 의료인들에게는 좌절스럽기 그지없게도 사실 환자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가능한 한 많은 환자를 봐야 한다는 의사의 재정적 책무에 반한다. 그리고 환자를 “보는” 것은 현대의 진료실 어디에나 있는 모니터들과도 경쟁한다. 모니터에 자료를 띄우고 읽는 데 시간을 보내느라 의사는 진단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비언어적 신호를 놓칠지도 모른다. 조만간 그중 많은 모니터들이 수백만 명에게서 모은 방대한 양의 자료를 복잡한 알고리즘으로 분석해 개별 환자들에게 맞춤 정보도 띄워 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환자들은 이 ‘개인화된’ 의료가 오히려 비인간적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인터넷에서 가져온 자료를 적용할 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을 지켜봄으로써 환자를 어떻게 치료하는 게 최선인지 배우는 것은 중요한 생명윤리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어째서 의사소통 심리학, 경제학, (보건의료 체제를 둘러싼) 정치학, 심지어 사이버 문화 등과 같은 수많은 분야들의 통합이 필요한지 생생히 보여 준다. (p.25)

 

 막대사탕이 없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폴리오 예방접종과 불소 첨가 수돗물이 주어졌음에 매우 감사한다. 여전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증거들은 폴리오 백신이 개개인에게 최소한도 이상의 위험을 부과하지 않으며 전체 인구에 대한 이익의 총합은 전반적인 위험에 비해 지대함을 보여 준다. 잘못된 정보가 야기하는 공포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해독제는 다양한 수준에서 이뤄지는 양질의 보편적인 과학 교육과 윤리 교육, 공중보건과 관련된 의사결정에서 충분한 정보를 토대로 개방적으로 이뤄지는 민주주의적 숙의 등과 같은 선제적 조치들이다. 공중보건의 윤리는 공중보건 프로그램의 목표가 언제든 명확[투명]해야 하며, 그 목표에 효과적으로 도달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요구한다. 에필로그에서 논할 텐데, 현대 뇌과학은 가장 효과적인 공중보건 광고는 흔히 이성보다는 감성에 훨씬 강력히 호소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이성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광고[예컨대, 이성에 호소하기보다 공포를 비롯한 여러 감정에 대한 호소·조작을 통해 작동하는 광고]를 만드는 것이 어떻게, 언제, 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p.87-88)

 

 미끄러운 비탈길 논증은 공공 정책에 관한 논의에서 매우 흔히 쓰이며, 그 윤리학적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정책의 도입에 반대할 의도의, “X는 Y로 이어질 수 있다”라는 주장은 흔히 무언가를 밝혀 주기보다는 은폐하곤 한다. Y가 윤리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그런 주장이 X 역시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는 데 동의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칼럼니스트 조지 윌이 썼듯이, “삶은 불가피하게 온갖 미끄러운 비탈길 위에서 펼쳐진다”.

과세는 사유재산 몰수가 될 수 있다, 경찰은 억압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공교육은 세뇌가 될 수 있다 등등. 어디서나 또 언제나, 문명을 지탱하는 것은 지성을 갖춘 분별력이다.

 윌은 이 주제에 대한 미끄러운 비탈길 논증에서 특히 설득력 있는 비판가이다. 생명의 신성함을 완고하게 고수하는 옹호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남용 방지를 위한 규제를 갖춘 ‘존엄사’ 법에 반대하는 미끄러운 비탈길 논증은 거부한다. 오리건 법은 환자의 자유나 자율성을 만능 면허로 오독하지 않는다. 오히려 환자의 자율성에 대한 존중과 선행이나 해악으로부터의 보호를 보장하기 위한 요건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 이에 반대하는 미끄러운 비탈길 논증은, 아무리 세심하게 제정한다 해도 의사조력죽음을 승인하는 모든 법은 용납할 수 없게도 절대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가벼운 죽음의 문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p.128-129)

 

 우리는 왜 부담 없는 비용의 보편적 보건의료를 그토록 중요한 대의로 여기는가? 우리에게 있어 이것, 보건의료와 공중보건―산전·산후 돌봄에서부터 깨끗한 공기와 깨끗한 물로 이어지는―은 모든 이들이 살면서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이라는 사실과 직결된다. 우리가 보건의료를 인권이라 칭하는 것은 보건의료 없이는 어느 누구도 살면서 다른 모든 것을 누릴 역량과 평등한 기회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권리가 의미 있으려면 보건의료는 반드시 비용이 부담되지 않아야 하기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적절하고 비용이 부담되지 않는 수준의 보건의료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p.173)

 

 확실한 것은 뇌 스캔, 빅데이터, 인터넷이 결합되면 사생활 [침해], 정보에 기반한 동의나 민주적 책임성의 결여, 강력한 기업 행위자들이 대중의 선호와 행동을 조종하는 능력 등이 현저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뇌는 물리적·사회적 환경과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기에 이런 기술들에 의해 강력하게 조종당할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 사이트들은 행동 데이터와 인터넷을 활용해 우리가 가장 ‘구미 당겨’ 할 것으로 계산된 갖가지 것들을 선택적으로 ‘제공하는’ 복잡한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클릭 미끼’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그들의 사업모델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물건을 파는 데 신경과학의 도구들을 사용하는 것은 생각을 파는 데 사용할 때의 잠재력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다. 어떤 면에서 여기에는 뇌 기술은 거의 필요치 않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우리의 사회관계망을 통해 인터넷에 퍼져 있는 자료만으로도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 상품 판매자들은 실험실에서의 스캔을 통해 브랜드명, 로고, 혹은 동영상이 사람의 뇌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 가고 있다. 이제 그들은 특정 브랜드에 대한 반응과 연관되는 ‘신경 프로필’을 만들 수 있다. 회사들은 이 지식을 이용해 정치체제를 혼란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이들에게 서비스를 판매해 이윤을 낼 수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면서 현대적인 마케팅 방식들은 보다 효율적이게 되었고, 그만큼 더 위험한 것이 되었다. (p.327)

 

 

걸 디코디드 / 라나 엘 칼리우비 / 문학수첩

 

 타인의 생각을 읽는 데 능숙한 사람일수록 EQ 수치가 더 높고, 삶의 모든 면에서 더 성공적이라는 이야기는 딱히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바람직한 상호작용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마음가짐과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놀란 부분은 인간의 삶에서 감정이 차지하는 폭과 범위가 사회적 상호작용을 훨씬 뛰어넘어, 인간이 시도하고 노력하는 모든 것을 아우른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이 건전한 결정을 내리는 데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그때까지 나는 가장 좋은 결정이란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냉정하고 계산된 논리에 기초한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친 신경과학계의 연구는 정반대의 사실을 보여 주었다. 감정은 사고 과정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p.80-81)

 

 기술 분야에서 존경받는 네그로폰테는 1984년 MIT 미디어랩을 설립했다. 그가 명성을 얻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기술에 보다 인간적인 관점을 불어넣은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네그로폰테의 이 말은 종종 인용되곤 한다. “우리가 주력해야 하는 건 컴퓨터 문맹률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에 대한 문맹을 걱정해야 한다. 현재의 컴퓨터에는 인간을 읽는 능력이 결핍돼 있다.” (p.187)

 

 나는 우리가 ‘디자인적 사고’를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즉 실제 사용자(이 프로젝트의 경우 아이들과 그 가족들)들이 시스템 설계 과정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대부분 또래나 동료들과 교류하고 있는 고기능 자폐증 청소년(및 성인)들이었다. 그 10대 청소년들은 비언어적인 단서들을 이해하지 못해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의 10대처럼 친구들과 놀고, 데이트하고, 파티에 가는 등 또래들이 하는 모든 것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대인 관계에서 오는 어색함 때문에 잘 어울리지 못했고, 심지어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예의 바른 미소와 ‘너와 친해지고 싶어’라는 의미를 내포한 추근덕대는 미소를 구별하지 못했고, ‘지루하니까 그 얘기 좀 그만해’라는 의미로 굴리는 눈알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폐증이 있는 사람의 이러한 습성을 ‘독백(monologuing)’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이처럼 큰 불리함을 안고 산다. 그들은 비꼬는 표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10대들은 특히나 빈정대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능력 부족으로 친구 관계를 형성하거나 유지하지 못한다. 직업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 주류에서 벗어나 변방의 삶에 머무는 예도 많다. (p.217-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