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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 우주 속의 소녀 / 아일린 폴락 / 이새

 

 개인적인 노력으로 예일대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막상 입학하고 보니 나는 비참할 정도로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앤도버나 세인트폴 같은 명문 사립학교나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 같은 뛰어난 설비와 교육과정을 갖춘 학교들을 졸업한 대부분의 남자 동기생들은 고급 미적분 및 물리학 심화과정을 이미 1~2년 앞서 공부한 상태였다. ‘이 정도 내용은 이미 다 알 것’으로 간주한 교수의 수준 높은 강의를 들으며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해서 내가 공포심에 사로잡혀있는 동안, 남학생들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해댔다. 나는 몹시 질문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의실의 유일한 여학생으로서 혹시나 바보 같은 질문을 해서 남학생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멍청한 여자로 보일까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질문을 하기로 간신히 결정했을 때는 이미 강의 진도를 상당히 놓친 뒤였다. 이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격차는 더욱더 벌어졌다. (p.17)

 

 이 책은 내가 왜 그토록 고생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물리학 이학사 학위를 따고도 나중에 작가로 전직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설명과 과정에 대해 쓴 것이다. 또한 “강하고 침착해 보이는 어머니가 왜 물리학자가 되려는 꿈을 이루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내 아들의 의문에 답하는 글이기도 하다.
 동시에 2005년 1월에 있었던 한 강연에서 “왜 여자는 자연과학 분야에서 종신교수직에 오르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신중하지 못한 답변으로 전국적인 분노를 일으킨 하버드의 전 총장 래리 서머스(Lawrence Summers)에게 주는 내 나름의 답변이기도 하다. 그는 “가장 높은 수준의 과학과 수학 영역에서는 남녀 간에 선천적인 소질 차이가 있고, 대부분의 여성들이 강도 높은 헌신을 요구하는 직업을 추구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자연과학 분야에 여성 종신교수가 부족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p.19)

 

 이런 현상은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여자와 남자의 능력 차이가 없다고 여기는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다. 미국에서 여학생들은 고등 수학과 과학 과목을 듣지 못하도록, 혹은 해당 과목에서 자연스럽게 탈락되도록 ‘유도’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이과는 물론 문과에도 동시에 소질이 있는 경우가 문제다. 문과와 이과에 동시에 재능을 보이는 여학생들은 교사들로부터 읽고 쓰는 분야에 소질이 있다는 칭찬과 격려를 들으면서 인문학 분야로 유도되는 반면, 똑같은 재능을 가진 남학생들은 미적분, 물리학, 또는 컴퓨터공학 등을 잘할 수 있도록 격려를 받는다. 덕분에 오늘날에도 여학생들은 대학 수업에 필요한 수학과 과학 과목을 듣지 못한 채 대학에 진학하여 어려운 과제물과 시험 때문에 남학생들보다 훨씬 나쁜 성적을 받게 된다. 좌절을 경험한 여학생들은 과외를 받거나 교수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로 선택하는 대신 이과를 그만두고 다른 분야로 떠나버린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조사연구를 하면서 얻게 된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결론은 “여성 과학도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칭찬과 격려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과 연구에 필수적인 헌신과 진지함을 결여한 징후가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여학생의 경우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 때문에 중도에 좌절하지 않도록 특히 많은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학생들 누구도 격려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철학을 마치 공평의 잣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현재 미국 고등학교 이과반 교사들의 지배적인 모습인 듯하다. 대부분의 과학과 수학 교사들은 ‘과학자는 백인이면서 남자’라는 지배적 이미지 자체가 백인 남학생들이 과학자로 진로를 택하도록 하는 사회적 격려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누구에게도 격려의 말을 던지지 않는 것이 공평하다고 믿는 것이다. 더구나 교수들이 전형적인 백인 여성의 이름보다는 백인 남성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더 잘 받아들이고 이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p.23-24)

 

 결혼한 여성 과학자의 경우 자녀 돌보기와 집안일이라는 추가적인 부담을 떠안고 있는 데다 남편과 같은 도시에 있어야 한다는 제한 때문에 직장 선택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결국 여성 과학자들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좀 더 쉬운 일을 선택하거나 연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 같은 요인 때문에 ‘여성은 과학의 최고 단계에서 성공하기 위한 조건, 즉 열정이나 헌신 같은 자질을 갖고 있지 못하며 약사나 교사, 법, 아이 양육, 글쓰기 그리고 사람과 관련된 일에 더 재능을 보인다.’는 사회적 고정관념이 강화되는 것이다.
 특히 이론물리학과 컴퓨터공학 같은 분야의 연구실은 일반적으로 오만함과 공격적인 성향이 강하며 24시간 일을 계속해야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환경에서 형성되는 이른바 ‘클럽하우스 남성 문화’는 자주 여성 비하 농담으로 이어져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소수의 여성을 불편하게 만들곤 한다. 여성 과학자가 여기에 대해 못마땅해하면 이들은 ‘그저 재미로 한 말인데 뭘 그렇게 과민반응하느냐?’는 뜻의 침묵으로 응수하거나 논리와 사실만이 모든 것인 장소에서 개인적인 불만이나 감정을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태도를 보이곤 한다.
 STEM 분야에서는 각 분야의 일반적 표준에서 벗어나게 되면 성공으로부터 멀어지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남성 주도의 과학 분야에서는 여성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일반적 표준에서 벗어난 것이 된다. 여기에 더해 가난하거나 게이이거나 흑인, 히스패닉, 인디언이면서 최고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로 표준에서 어긋나있다면 이미 성공은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다. (p.26-27)

 

 나는 대부분의 과학을 집에서 배웠다. 부모님이 오빠와 그 후배에게 유태교 성년식 선물로 화학실험 세트를 사주었을 때, 난 그 선물이 내 것이라고 우겼다. 하얀 금속상자는 뚜껑을 열면 경이로운 3단 캐비닛으로 변했고, 그 안에는 형형색색의 가루로 채워진 용기들이 들어있었다. 산성이든 알칼리성이든 내가 시험하고 싶은 용액에 담그면 분홍에서 파랑으로, 또는 파랑에서 분홍으로 변하는 리트머스 종이, 시약을 다룰 때 사용하는 숟가락 모양의 도구인 금속 스파튤라, 플라스틱 튜브를 꽂을 수 있는 구멍 뚫린 고무마개, 알약을 담는 상자인 필 박스, 모자같이 생긴 정교한 황동 무게추가 있는 저울, 비이커, 플라스크, 그리고 집게, 액체를 옮길 때 사용하는 고무주머니가 달린 가늘고 긴 실험기구 피펫, 알리바바가 가지고 있었음직한 요술램프 등이 들어있었다. (이 램프는 알코올을 채우고 뚜껑을 닫아두는데, 삼발이 위에 그날 제조하려는 혼합물을 올려두고 그 아래 램프를 놓은 다음 심지에 불을 붙여서 사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비한 것은 검정색 플라스틱 접안렌즈였는데, 이것을 눈에 대면 방사능 광석 덩어리 안에서 방출되는 반짝이는 입자를 볼 수 있었다. (p.53)

 

 어느 날 오후, 나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책을 팔던 크록 문구점을 배회하다가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가 쓴 3부작과 조지 가모프(Goerge Gamow)가 쓴 《1, 2, 3, … 무한대(One, Two, Three … Infinity)》라는 책을 집어들었다. 내가 이 책들을 계산대로 가지고 가자, 주인은 “오, 아니야, 얘야, 이 책들은 남자애들의 책이란다. 여자애들을 위한 책은 뒤쪽에 있어.”라고 말했다.
 그 말은 뜻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았다. 나는 주인이 무슨 책들을 말하는 것인지 보려고 뒤로 갔다. 거기서 발견한 것은 ‘여자애들의 책’인 연애소설로 가득 채워진 책장이었다. (p.66)

 

 내가 월반하지 못한 이유가 여자애들은 과학과 수학을 잘하지 못한다는 선생님들의 선입견 때문이었다는 것을 에릭이 알려준 뒤로 나는 엄마에게 학부모회의에 가서 항의해 달라고 졸랐다. 엄마는 교장선생님과 수학 주임교사인 에드 울프 선생님을 만났는데, 두 분 다 내가 ‘수학 월반’을 원한다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이들은 “너무 어릴 때 아이의 지평을 좁게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수학을 월반한 여학생은 사회생활이 망가져버릴 수 있다.”고 엄마를 설득했다.
 우리 엄마는 남성에 의해 세워진 원칙에 항의하고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대학 진학을 반대했을 때도 반항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 엄마가 어떻게 남학생들에게만 허락된 과학과 수학 과목을 “내 딸도 그걸 들을 권리가 있다.”고 따질 수 있었겠는가?
 문제는 내가 이런 과목들을 들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왜 나는 내가 제프나 에릭과 똑같이 대수학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못했을까? 도대체 무엇이 제프와 에릭을 따로 가르쳤던 갤러거 선생님이 나를 자리에서 끌어내 7학년 수학 교실로 다시 쫓아버리게 했을까? (p.69-70)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무니의 조언을 들을 수 있었더라도 실험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염소가스 발생에 실패한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식도에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배터리에 감전되는 사고를 겪지 않은 것도 다행이다. 어린 내가 실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한 권의 《세계백과사전》만이 아니었다. 어린 나를 보트가게에 데려가 아연 막대를 사주고 배터리를 열어주고 안전하게 실험을 도와줄 어른의 도움이 필요했다. 냄비와 숟가락, 알루미늄 호일 뭉치, 배터리를 준비한 것 외에 아무 결과물도 보여줄 것이 없었다고 해도, 선생님은 그렇게 간단히 “난 너에게 실망했어. 넌 B학점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p.77-78)

 

 브루스터 총장은 우리들에게 “이곳은 일차적으로 배움의 장소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배움이 책이나 실험실 또는 강의실에서만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입학 전에는 그리 자유롭지 못했을 것입니다. 졸업한 후에 다시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유롭게 의문을 가질 특권을 누리세요. 그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세요.”
 이 연설은 나중에 예일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하지만 수많은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실험을 하느라 몰두한 나머지 너무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있던 나는 자유롭게 의문을 가질 기회를 누리라는 그의 연설 내용을 곱씹어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p.112-113)

 

 내가 봉고나 연주하는 얼간이라고 상상했던 파인만은 사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누군가가 첫 물리학 중간고사에서 32점을 받게 된 게 얼마나 심신을 쇠약하게 하는지를 이해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수업을 통해 자신들의 실력이 밑바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낙심한,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들에게 파인만은 가장 혹독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대학에서도 학급의 절반은 반드시 평균 이하의 성적을 받게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네가 최상위 대학에서 물리학 수강반의 하위 절반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열등감이라는 감정적인 문제를 안게 된다. 그러나 낙심할 이유는 없다. 뒤처진 사람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이 복습 강의를 실시하고 있으니까. 이 수업의 목적은 물리학 강의실에 좀 더 머물면서 이걸 감당할 수 있을지 아닐지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p.129-130)

 

 이것이 바로 나를 옥죄는 딜레마였다. 내가 못하면 나는 여성이 과학이나 수학에 있어서 절대 학위를 마치지 못한다는 사실의 증거가 되는 것이었다. 반면 내가 잘하면 나는 점점 더 인기가 없어지는 것이다. 모두 A학점을 받은 여자는 고등학교에서도 밥맛인데, 심지어 예일대에서 물리학 전공으로 모두 A학점을 받았다고 하면 얼마나 더 괴짜 같을까? 이 역설적인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험과 연구보고서에서는 계속 잘해나가되, 수업 때는 조용히 하고, 연구실에서는 어설프게 사랑스러운 광대가 되는 삼중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p.137)

 

 몇 년 후, 내 여동생의 대학 때 룸메이트이자 수학 박사학위를 받고서 성공적으로 가환대수학을 연구하는 직업을 갖게 된 마리(Marie)는 “실해석학은 죽음이며 많은 수학자들도 감을 못 잡는다.”라고 말했다. 나는 “정말? 그러면서도 수학자가 되려고 해?”라고 물었다. “물론이지. 그것이 여자들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야. 사람마다 강점이 있지. 남자들은 자기가 어떤 과목을 잘 못하면 일단 교수 탓을 해. 그렇지 않으면 허세를 부려서 잘 넘기거나 그 과목을 피할 수 있는 전공을 택하지. 반면에 여자들은 자신을 탓해. 여자들은 ‘모 아니면 도’가 많아. 완벽하게 하든지 그만두든지.” (p.178)

 

 교수는 “너는 왜 그렇게 물리학자가 되려고 서두르지?” 하고 물었다. 적어도 교수 중 한 사람 정도는 내가 물리학을 계속하도록 용기를 북돋아주기를 바랐지만, 네메티 교수가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불평할 수는 없다. 그가 왜 나를 격려가 필요한 학생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만약 입장이 바뀌어 내가 교수이고 나 같은 학생을 지도하고 있다면 나라도 조기졸업을 하지 말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서두르니? 너는 물리학 이외에는 하고 싶은 게 없니?” 라고 그가 말했다. 물리학 말고 다른 것을 한다고?
 “이것 참.” 그는 두 팔을 들어올렸다. “나는 항상 아일린이 특별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어. 반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하는 단 한 명의 여학생이니까. 그렇지만 지금 나는 네가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재미없는 학생이라는 것을 발견했어. 그리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따분해질 거야. 너 물리학 이외에는 하고 싶은 게 없니?” “글쎄요. 전 테니스 치는 걸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해요. 그렇지만 그런 건 졸업하고 나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아하!” 그는 귀를 틀어막는 시늉을 했다. “내가 그런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 아니?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시간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박사후과정을 해야 하고 논문을 써서 명성을 쌓아야 하지. 그러면 ‘대학에서 종신직을 보장받고 나면 시간이 있을 거야.’라고 또 얘기하지. 그런데 종신직을 받고 나면 독자적인 실험실을 운영해야 되고, 세미나와 위원회에 참석하고 학과 내에서 정치까지 해야지. 마지막엔 이렇게 생각하지. ‘퇴직하면 시간이 있을 거야.’ 그런데 퇴직할 때쯤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나면 하고 싶었던 게 뭔지 기억조차 못 해. 그리고 내 말을 들어봐. 이 사람들 대부분은 5시 반에 집에 와서는 6시 반이면 실험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식탁에 왜 스테이크가 차려져 있지 않냐고 부인에게 화를 내지. 나 역시 아내와 원하는 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진 못해.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릴 수는 있어. 우리는 여전히 함께 있는 것을 즐기지.” (p.179-180)

 

 나는 이것에 대해 제대로 글 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독자에게 당신의 주장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방정식이 참임을 증명하는 유도식을 가르쳐주지 않은 채 칠판에 분필로 방정식을 써내려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독자로 하여금 당신이 경험한 것을 경험하게 하여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경험을 재창조해야 한다. 신경망에 저장되어있는 데이터를 찾아, 어떤 세부사항이 경험과 연결된 다른 세부사항과 동일한 주파수에서 공명하는지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입체회상을 자유롭게 풀어 삶으로 되가져와서 다시 빛나게 해야 한다. (p.187)

 

 나는 “대학생활을 2학기 남겨놓고 종종 물리학을 그만두고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인문학이 과학보다 덜 중요하고, 따라서 여성에게 인문학이 더 적합하며, 물리학이 너무 어려워서 작가가 되었다고 사람들이 내게 말할 것만 같다. 과학 작가가 되기 위한 의도로 물리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것조차 모든 여성스러움을 파는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적었다.
 내가 고심한 것은 과학자가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남성 천재 과학자가 지닌 괴팍함과 편협한 관심사는 사회적으로 용서될 뿐만 아니라 격려를 받지만, 여성일 경우에는 ‘다른 일을 해보라.’는 말과 함께 사회생활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을 듣는다.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없는 남자는 그렇게 해 줄 부인을 찾으면 되지만, 연구에 정신을 집중하는 여성 과학자를 돌볼 남자는 별로 없다. 만약 여자가 스스로 빨래를 하거나 요리하는 것을 잊어버리면, 그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을 것이다.” (p.189)

 

 이론물리학자가 될 경우 직면할 온갖 현실적인 문제를 참을 수 있을 만큼 그 직업을 열망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흔들리거나 자신감 없어할 때 그 분야를 먼저 걸어갔던 사람들이 좀 더 격려해주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단 한 사람의 교수만이라도 내가 물리학을 잘한다고 칭찬하고 격려해주었더라면 나는 정말로 물리학을 선택해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p.246-247)

 

 피터는 이제는 거의 고철더미가 된 장비들이 높게 쌓여있는 유리창 없는 자신의 사무실을 가리키면서, “이 사무실이 나를 말해준다. 물론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내 일을 위해서 외부 세계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아이를 키우는 것이 여성의 가장 큰 책임이라고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고 조금씩 변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런 문화가 많이 남아있지.”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모든 느린 변화가 모여서 결국 큰 혁명 같은 일을 이루어낸다. 그가 학부생이었을 때 그는 남학생뿐인 학교를 다녔다. 자신이 석사학위를 받았던 칼텍이 남자들에게만 입학을 허용했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어쨌든 그의 강의실에 여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심지어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았었다는 데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옛날에는 여성을 금요일 밤을 같이 보낼 편안한 데이트 상대로만 여겼지만, 지금은 여성을 전문적이고 지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고 같이 공부하고 싶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어. 나보다 더 문제를 잘 풀 수 있는 맞은편 책상에 앉아있는 동료인 거지. 그것은 엄청나게 큰 변화이고 신의 축복을 받을 일이야. 옛날에는 어떻게 그렇게 남성 위주였는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파커 교수는 또한 남성 물리학자가 여성 동료를 보는 방식의 변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번은 딸이 다니는 학교의 학생지도상담사를 만나러 갔는데 학교에 붙은 포스터에 의사는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로, 여자는 클립보드를 들고 있는 간호사로 묘사되어있던 것을 예로 들면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남성 우월주의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에게 딸을 선물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p.275-276)

 

 통계 전문가 및 심리학, 정신의학, 그리고 경영학 분야에 있는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그녀는 남자 교수와 여자 교수 모두에게, 지원자가 최근에 학사학위를 받았고 실험실 관리자 자리를 찾고 있다는 내용의 똑같은 이력서를 보내서 그 반응을 보는 연구를 계획했다.
 이 연구의 핵심은 127명의 교수들 중 반은 존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력서를 받았고 나머지 반은 제니퍼라는 이름의 똑같은 이력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두 지원자의 자격은 일자리를 얻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지원자의 능력을 뒷받침해주는 추천서와 잡지에 실린 기사의 공동 저자임을 증명하는 자료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 성적은 32 정도로 뛰어난 편이 아니었고, 과학 수업 하나는 중간에 그만두었다.
 교수들은 존과 제니퍼를 능력, 고용 가능성, 호감도, 그리고 교수가 그 학생을 고용할 경우 과학자의 길을 걷도록 멘토링해줄 의향이 있는지를 1부터 7까지의 척도로 평가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런 다음 그 지원자에게 자신이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월급의 범위를 선택하라는 요청도 받았다. 결과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응답자의 나이, 성별, 전문 분야, 그리고 연공서열에 상관없이 존이라는 이름은 호감도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적어도 0.5점이 더 높았다. (두 지원자 모두 5점 이상을 받기에 충분한 경력이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0.5점 차이는 훨씬 더 충격적으로 보인다.)
 또 존이라는 남자 이름을 가진 후보자에게는 초봉으로 3만 238달러가 제시된 반면에 제니퍼라는 여자 이름의 후보자에게는 2만 6,508달러가 제시되었다. 그 차이가 매우 커서 연구팀이 심리학자들로 이루어진 청중들에게 그 그래프를 보여주었을 때, “우리는 모두가 엄청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를 들었다.”라고 헨델스만은 말했다. (p.368-369)

 

 헨델스만은 밝혀낸 편견들 중에서 반복적으로 부정적인 충고를 해준 결과가 가장 참혹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한 학생이 대학에서 교수로부터 겪는 상호작용들을 모두 더한다고 생각해보라.” 가령 수업 후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 어느 과정을 들어야 할지 제안해주거나 다가오는 여름에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 연구 프로그램에 지원해야 할지 어떨지, 대학원을 가야 할지 말지 충고해주는 것, 이 모든 것들은 계속 공부를 해야 할지 아닐지 알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가능성을 가늠하기 위해 사용하는 아주 사소하지만 반복적인 상호작용들이다. 이것을 한꺼번에 모두 더해보면 사태는 분명해진다. 교수들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진로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학생들은 잘 모른다.
 “모든 시험에서 백점을 맞는 학생조차도 만약 교수가 잘했다고 확인해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100점을 맞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문제가 모두에게 너무 쉬웠나보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문제라는 듯이 그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상담해주는 것, 충고하는 것, 토론하는 것, 이것들은 학생이 대학에서 얻는 작은 자극들이다. 그런데 남학생은 이런 자극을 통해 자신이 그룹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끼는 반면, 여학생들은 정반대로 느낀다.”
 헨델스만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많은 칭찬과 강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은 선천적이라기보다는 여성들이 남성 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싸우느라 지쳐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자들은 자기들이 받는 명백한 격려 외에도 오랫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회적 격려를 받아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롤 모델이 없고, 한 번도 멘토를 가져본 적도 없지만 자기들이 여태껏 봐온 모든 과학자의 이름과 이미지가 남자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남학생들을 많이 봤다.” 또한 헨델스만은 성별에 관계없이 어떤 학생도 격려하지 않는다는 교수의 말도 믿지 않았다. “남자들은 정말로 격려를 받는다. 모든 교수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최고의 학생들에게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p.371-372)

 

 권위 있는 남부 대학의 어떤 여자 교수는 남학생들이 정기적으로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있다고 썼다. 그녀는 그 대학에서 가장 엄한 교수들 중 하나라는 평판을 가지고 있지만, 남학생들은 교수로서의 그녀의 권위를 의심하여 교수법에 대해 한 수 가르치려 들거나 강의에서 실수하게 만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는 것이다. 또 대학원생이든 학부생이든, 거의 모든 강의에서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낄낄대면서 수업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한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견뎌내고 있는 그녀가 젊고 매력적인 후배 여성이 수학 분야에서 학문적인 길을 가겠다고 하면 과연 그렇게 하라고 선뜻 추천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라고 그녀는 개탄했다. (p.417)

 

 

왜 비건인가? / 피터 싱어 / 두루미

 

 고통을 무시할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면, 그리고 다른 종들이 고통 받고 있다면,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동물, 인간, 도덕』의 필진 리처드 라이더는 우리가 같은 종의 일원을 대할 때 지탄받을 방식으로 다른 종의 일원을 대해도 된다는 믿음을 설명하며 ‘종차별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는 듣기 좋지 않으나 인종차별주의와의 비유를 간결하게 드러낸다. 비인종차별주의자는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행동을 변호하고 싶다면 이 비유를 명심해야 한다. “다른 종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 종의 상황부터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물을 수도 있다. 여기서 ‘종’을 ‘인종’으로 바꾸면 이 질문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채식주의 식단이 영양학적으로 충분한가?”라는 질문은 노예 노동이 없으면 남부 경제 전체가 망한다고 하는 노예 주인의 주장과 닮았다. 심지어 노예제를 일부 옹호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흑인이 백인처럼 고통을 느끼는지에 대해 의심을 제기했다. 이 의심은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지에 대한 의심과 닮았다. (p.42-43)

 

 물론 공장식 축산을 변호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의 논거는 존 해리스가 단편적으로나마 다룬다. 그중 가장 흔한 논거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다른 삶을 알지 못하니 고통을 느끼지도 않는다.’ 동물 행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꺼내지 못할 이야기다. 모든 행동이 학습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 테니 말이다. 닭은 마음껏 행동할 수 있는 조건에서 한번도 살아 보지 못했더라도 날개를 펴고, 걸어 다니고, 긁고, 심지어 땅을 파헤치거나 둥지를 지으려 한다. 송아지는 어미와 몇 살 때 헤어졌는지와 상관없이 모성 박탈로 고통받을 수 있다. 또 다른 논거는 다음과 같다. ‘증가하는 인구에게 단백질을 제공하려면 밀집 사육 방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생태학자와 기근 구호 단체들이 알고 있듯, 콩과 같은 적절한 채소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땅을 사용한다면, 움직임 없이도 섭취한 단백질의 거의 90%를 소비해 버리는 동물에게 먹일 사료를 재배하기 위해 땅을 사용할 때보다 ㎡당 훨씬 더 많은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다. (p.54-55)

 

 닭은 여러 세대에 걸쳐 최소 시간에 최대 고기를 생산하도록 품종개량되었다. 그들은 1950년대에 사육된 닭에 비해 사료는 1/3만 소비하면서 세 배나 빨리 자란다. 하지만 이 무자비한 효율성 추구에는 대가가 따른다. 닭은 근육과 지방이 뼈보다 더 빨리 성장하게 되었다. 어느 연구는 육계의 90%가 다리 문제를 겪고 있으며, 26%는 뼈 문제로 만성 통증을 겪는다고 밝혔다. 브리스톨대학 수의학과 교수 존 웹스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계는 삶의 마지막 20% 동안 만성 통증을 겪는 유일한 가축이다. 그들은 밀집된 공간이 아니라 관절 통증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 가끔은 척추골이 부러져서 마비를 일으킨다. 마비된 새나 다리가 무너진 새는 음식이나 물을 먹으러 갈 수 없으며―사육자가 각각의 새를 확인할 시간이나 의지가 없기 때문에―목마르거나 배고파서 죽는다.” 이것을 비롯한 다른 복지 문제와 관련된 동물의 엄청난 숫자―미국에서는 거의 90억에 육박한다―를 고려할 때, 웹스터는 양계 산업을 “크기와 심각성 모두에 있어서, 느낄 수 있는 다른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비인도적 행위 중 가장 심각하고 체계적인 사례”로 여긴다. (p.67-68)

 

 동물에 대한 처우라는 윤리 문제에 더해 비건 식단을 위한 더 강력하고 새로운 논거가 있다. 프랜시스 무어 라페가 『작은 행성을 위한 식단』을 출간한 1971년부터 우리는 현대 공장식 동물 생산이 지나치게 낭비가 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돼지 농장은 뼈 없는 고기 0.5kg을 생산하기 위해 곡물 2.7kg을 사용한다. 사육장에 있는 육우는 그 비율이 13:1이다. 심지어 공장식 축산 고기 중 가장 덜 비효율적인 닭마저도 그 비율이 3:1이다.
 라페는 우리가 곡물과 콩을 직접 먹으면 훨씬 적은 땅으로도 지금처럼 잘 먹을 수 있다고 말하며, 공장식 축산이 수반하는 식량 낭비와 경작지에 가하는 추가 부담을 우려했다. 지구 온난화는 문제를 더 선명하게 한다. 사람들 대부분은 지구 온난화에 개인적인 기여를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 가족이 타는 승용차를 토요타 프리우스 같이 연비 좋은 하이브리드로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카고대학 연구원 기든 에셸과 파멜라 마틴은 이것이 운전자당 이산화탄소 1t 정도의 배출량 감소로 이어지는 데에 비해, 전형적인 미국 식단을 비건 식단으로 바꾸면 사람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거의 1.5t 감소할 수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비건들은 동물성 제품을 먹는 이들보다 기후에 훨씬 적은 피해를 주고 있다. (p.114-115)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멈추어서 생각해 보면―우리는 대부분 그러지 않는다―예전에 백인이 ‘열등한’ 인간을 지배 아래 두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네 인종이 우월하다고 했던 것과 매우 비슷한 방식으로 우리 종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정당화한다. 하지만 인간의 중요한 이익이 비인간 동물의 이익과 매우 분명하게 일치하는 순간, 우리가 동물에게 가하는 고통의 작은 부분은 비인간 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웻 마켓 금지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일부 특정한 문화적 성향과 시장에서 생업을 유지하는 이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것이라는 반발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비인간 동물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도덕적 고려를 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지엽적인 고민보다 앞으로 더 빈번히 발생할 세계적 유행병이 끼칠 재앙이 결정적으로 더 클 것이다.
 홍콩에서 활동하며 보전과 환경을 주제로 다루는 작가 마틴 윌리엄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웻 마켓이 존재하는 한, 새로운 다른 질병이 등장할 가능성은 여전할 것이다. 중국이 이 시장을 닫아야 할 시간이다. 일거에 중국은 동물권과 자연 보전에서 진보를 이루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사람들을 해치는 ‘메이드 인 차이나’ 질병의 위험을 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한다. 역사적으로, 비극은 가끔 중요한 변화로 이어졌다. 살아 있는 동물을 판매하고 도살하는 시장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금지되어야 한다. (p.129-130)

 

 

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 블루프린트

 

 그 소문은 이렇다. 바틀비는 워싱턴에 있는 ‘수취인불명 우편 처리소’에서 말단 점원이었다. 그는 행정부 내 구조조정으로 인해 그곳에서 갑자기 해고를 당했었다. 이 소문에 관해 생각할 때면, 나를 사로잡는 감정들을 제대로 설명할 길이 없다. 수취인불명 우편이라니! 왠지 죽은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가? 선천적으로 불운하여, 무기력하게 절망에 빠지기 쉬운 인간을 상상해 보라. 수취인불명 우편을 소각하기 위해 계속 정리하고 분류하는 일보다 절망감을 악화시킬 일이 있을까? 그런 우편물들은 매년 수레에 실려 소각장으로 간다. 때때로 그 창백한 얼굴을 한 점원은 접혀 있는 편지지에서 반지를 발견하지만, 그 반지가 끼워졌어야 할 손가락은 아마도 무덤 속에서 썩어갈 것이다. 매우 시급한 구호 자금으로 보내진 지폐, 그 지폐가 구제했을 사람은 더 이상 먹지도, 배고픔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절망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용서, 아무런 희망 없이 죽은 사람들에게는 희망, 구제받지 못한 재난에 짓눌려 죽은 사람들에게 희소식이 됐을 편지들. 생명에 관한 사명을 짊어진 이런 우편물들은 죽음을 재촉하고 말았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