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을 위해 죽다 / 제니 챈, 마크 셀던, 푼 응아이 / 나름북스
“아이폰을 위해 죽다”라는 말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전 세계 소비자가 최신 모델을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상황에서 중국 신세대 노동자들은 아이폰과 다른 첨단제품 생산에서 속도와 정밀도에 대한 회사 측의 요구를 정확히 충족시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애플의 성공은 질 좋은 제품을 빠른 속도로 생산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디자인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는 우세한 지위를 고려할 때, 애플은 폭스콘과 그 직원들의 조건을 설정하는 데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다. 2010년 현재 폭스콘은 애플 아이폰의 독점적인 최종 제조업체일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많은 기술 대기업의 다양한 전자제품에 대한 주요한 도급업체이기도 하다.
폭스콘의 중국 내 시설들과 봉쇄된 기숙사 창문에 내걸린 자살 방지 그물은 연쇄 자살이 정점을 이룬 2010년 5월 말 이후, 청년 노동자들이 목숨을 던지도록 만든 절망과 비극에 대한 기업의 책임, 그리고 좀 더 인간적인 일터를 만들기 위한 노동자들과 그 지지자들의 집중적인 노력 등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p.21-22)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친 뒤 이어진 사원 오리엔테이션에서 한 인사담당자가 톈위를 비롯한 신입사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잠재력은 오직 여러분 각각의 포부에 달렸습니다! 태어나는 건 선택할 수 없었지만, 여기에서 당신은 자신의 운명을 향해 나아갈 겁니다. 오직 꿈만 있다면, 당신은 솟구쳐 오를 겁니다!”
인사담당자는 젊은 신입사원들을 고무시키기 위해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 인텔 회장 앤드루 그로브,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와 같은 기업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실제 애플 못지않게 폭스콘 경영진은 노동자와 소비자를 위한 낭만적인 미래를 그리는 데 통달해 있었다.
“그리고는 저를 비롯한 수백 명의 신입사원이 회사 버스를 타고 폭스콘 채용센터에서 1시간쯤 떨어진 공장으로 이동했어요. 그때 폭스콘 공장이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들었죠”라며 톈위는 당시를 회상했다. (p.32-33)
화낙(FANUC)의 전직 디렉터이자 폭스콘의 자동화 기술 부서위원회 위원장 다이자펑은 2016년 7월에 발표한 글에서 “폭스콘은 수십만 개의 자동화 장비 말고도 완전하게 작동하는 산업용 로봇 4만 대를 설치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폭스콘 내부의 주된 변화는 노동자를 로봇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 직원을 학생 인턴과 하청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로봇 공학은 폭스콘의 생산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을 차지하며, 폭스콘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로봇은 인간의 역할을 단지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p.55-56)
폭스콘 노동자들은 기자들에게 초과근무가 “강제적”으로 이뤄진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폭스콘 경영진들은 구매사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공급 사슬에서 애플의 신제품 준비기와 연휴 혼잡기 내에 생산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계약이 파기될 수 있음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폭스콘은 강압적 관리와 초과근무를 계속 강제했고, 종종 불법적인 수준에 다다르기도 했다.
선전시 정부 역시 이러한 폭력적인 작업장 환경을 외면했다. 폭스콘은 2006년 7월 〈제일재경일보〉의 편집장 웡바오와 왕여우 기자를 타깃으로 삼았는데, 이들은 룽화 아이팟 조립공장의 노동권 침해에 대한 후속 보도를 주도하고 있었다. 사건이 알려지기 이전에도 폭스콘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두 기자에게 3,000만 위안(미화 370만 달러)의 벌금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선전시 인민법원이 두 기자의 개인계좌와 자산 동결에 나선 바 있다. 언론사가 아닌 언론인 개인을 겨냥한 기업의 명예훼손 소송은 중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파리에 본부를 둔 ‘국경없는기자회’ 주도로 대중의 거센 항의가 잇따르자, 폭스콘은 명예훼손 소송을 취하하고 상징적인 금액인 1위안(미화 12센트)의 합의금을 수용했다. (p.73)
폭스콘의 대응은 자살을 결심한 이들이 뛰어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창살과 자살 방지 그물을 설치한 것처럼 방어적 맥락이었다. 궈타이밍은 젊은 노동자들을 자살로 몰아넣은 원인을 조사하는 대신, 2010년 5월 중순 악령을 물리친다며 선전 공장에 승려들을 데려왔다. 폭스콘은 이와 동시에 모든 취업 응시자에게 36개 질문으로 구성된 심리테스트를 이수하도록 요구했다. 이 회사는 자살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노동자에게 있다고 간주했다. “개인의 문제들”을 처리할 능력이 부족한 직원들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폭스콘의 인사담당 부서는 전 직원이 회사의 면책 조항이 포함된 ‘자살 금지 서약서’에 서명하게 하는 매우 비열한 해결책을 고안했다.자살과 자해를 포함하여 폭스콘이 책임질 수 없는 부상이나 사망이 발생할 경우, 본인은 회사의 규정 및 법적 절차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는 데 동의한다. 본인 및 가족은 회사의 명예가 훼손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법에 명시된 것 이상의 추가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자살 금지 ‘서약서’에 따르면, 폭스콘은 모든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 할 뿐 아니라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자살의 책임을 노동자 개인에게 지우려 했다. 이후 노동자들의 격렬한 비판이 있자, 폭스콘은 이 서약서를 철회했다. (p.93-94)
초박형의 신형 아이폰은 너무 쉽게 긁혀서 조립하는 동안에는 보호 케이스에 넣어둬야 한다. 이 경우 노동자들의 섬세한 작업은 더욱 어려워지지만, 이 작업을 완료하는 데 추가시간이 주어지진 않는다. 한 노동자는 “우리는 기계보다 더 빨리 일해요”라며, “폭스콘 경영진은 엔지니어를 소중히 여기지만, 엔지니어들은 우리의 적이죠. 우린 그들을 증오해요”라고 덧붙였다.엔지니어들이 스톱워치를 들고 돌아다니면, 우리는 일부러 작업 속도를 늦춰요. 저는 7초 안에 나사 8개를 조일 수 있어요. 하지만 작업 속도가 빠를수록 생산 할당량이 많아지니까 저와 동료들이 속도를 늦추는 거예요. 그러면 엔지니어들이 다시 와서 테스트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경영진은 노동자와의 싸움에서 계속 승리했다. 엔지니어들은 작업 매뉴얼을 개정했다. “이제 우리는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양손을 모두 써야 해요. 한시도 손을 가만히 둘 수 없을 정도예요.” 나사 조임 작업을 하는 노동자가 설명했다. “예를 들어, 오른손으로 전동 드라이버를 잡고 왼손으로 나사를 고정해요. 그런 다음 다른 인쇄회로기판을 집어들죠. 저는 쉴 새 없이 나사를 조여요.”
아이폰 한 대에는 100개가 넘는 부품이 있다. 모든 노동자는 한 가지 작업에 특화되어 있으며, 수개월 동안 매일 10시간 이상 빠른 속도로 반복 동작을 수행한다. 일명 “선진 생산 시스템”은 인간의 생기나 성취감을 파괴한다. 한 노동자는 자신을 기계 톱니바퀴로 묘사했다.저는 정전기 조립라인의 일부인 육안 검사대의 톱니바퀴예요. 바로 옆의 납땜 오븐에서 스마트폰 마더보드를 넘겨주면, 두 손을 뻗어서 받아와요. 그리고는 머리를 좌우로 계속 돌리며 마더보드의 좌우상하를 끊임없이 살피죠. 일단 뭔가 발견하면 크게 소리쳐요. 그러면 저와 같은 또 다른 인간 부품이 와서 어떤 오류가 있는지 물어보고 고쳐요. 저는 같은 일을 하루에 수천 번 반복해요. 머리에 녹이 스는 것 같아요.
조립라인에서의 노동은 점차 노동자의 인간성을 말살시킨다. 폭스콘대학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면,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까? (p.108-110)
한 중국문학 교사는 학생 인턴 제도가 1930~40년대 학생들을 학대했던 “계약 노동제”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가난에 시달리던 마을의 어린이와 청소년이 노동청부업자에게 팔려가 상하이의 일본인 소유 면직공장에서 밤낮으로 혹사당하던 절망적인 시기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인턴십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역할에 대해 쓴웃음을 지으며 “전 현대판 청부업자예요”라고 털어놓았다. “제 외동딸이 17살이에요. 지금 대학 입시를 준비 중이죠. 결과가 어떻든, 딸아이가 이 회사에서 인턴을 하거나 취업하지 못하게 할 겁니다. 더 중요한 건 폭스콘에는 교실과 작업장의 통합을 통한 진정한 학습이 없다는 거예요. 오늘날 중국의 직업교육은 심하게 왜곡됐어요.” (p.140)
2011년 3월까지 폭스콘 청두의 노동력은 5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17세의 쓰촨 출신 노동자는 “폭스콘이 사람을 뽑고 있어요. 도시 전체가 미친 것 같아요. 공무원들이 사람들을 붙잡고 폭스콘에서 일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봐요. 정부가 이걸 공식 업무로 정했대요. 각급 공무원에겐 채용 할당량이 떨어졌죠. 정말 미친 거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정부 청사에서 고용 담당 공무원들이 입사 지원자들의 폭스콘 입사서류 작성과 면접 준비를 도왔다. 이러한 무료 행정 서비스는 기업의 채용 비용을 낮췄다. 게다가 지방정부가 노동자 채용과 더불어 제공한 넓은 산업용지와 각종 보조설비가 있는 생산단지 및 기숙사로 인해 폭스콘의 서부 진출이 순조로웠다. (p.157)
2011년 3월, 한 아이패드 제조 노동자가 “우리는 한 달 내내 딱 이틀만 쉬면서 장시간 초과근무를 해요”라고 설명했다. 당시 애플의 최고운영책임자였던 팀 쿡은 전 세계의 수요를 추적하면서 “상한 우유를 사려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재고는… 기업에 있어 근본적인 악이다. 마치 낙농업에 종사하는 것처럼, 유통기한을 넘기면 문제가 생기는 것으로 여기며 관리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다. 그 결과 공급업체 공장에서는 강제적인 초과근무와 노동속도 강화 측면에서 노동자의 희생과는 상관없이 작업 완수를 위해 애플의 명령에 따라 시간과의 경쟁에 나서게 된다. (p.161-162)
시위에 나선 노동자들이 이의를 제기했던 쟁점은 임금문제만은 아니었다. 폭스콘의 광택 작업 노동자들은 알루미늄 원료를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아이패드 케이스로 만드는 일을 담당한다. 광택기는 훨씬 더 정교하게 케이스를 연마해서 작업할 때 금속 분진이 발생한다. 미세한 알루미늄 분진이 노동자들의 얼굴과 옷을 뒤덮는다. 한 노동자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저는 폭스콘에서 진공청소기처럼 알루미늄 분진을 들이마시고 있어요.” 작업장 창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노동자들은 질식할 것 같다고 느낀다.
덕트 및 환기 시스템 점검 등 작업장 위해성에 대한 감시 활동은 아이패드 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시되었다. 20세의 노동자 마취안은 쓰촨 방언으로 “미세한 알루미늄 입자가 눈물에 씻겨 나올 때면 눈이 찢어지는 듯 아파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작업장의 모든 사람이 활성탄 필터가 달린 얇은 천 마스크를 쓰지만, 밀착밴드가 없어서 전혀 보호되질 않죠”라고 덧붙였다.
이 마스크는 알루미늄 분진의 독성 효과를 차단하는 데 쓸모가 없었지만, 폭스콘이 각종 공장 검사를 통과하는 데에는 쓸모가 있었다.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기침하며 목이 아프다고 호소했지만, 폭스콘 경영진은 물론이고 청두 공장에 파견된 애플의 엔지니어들과 제품개발팀은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보다 시간당 생산량만 중시했다. 마취안의 동료 중 4명은 수습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회사를 그만뒀다.
광택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은 면장갑을 꼈지만, 초미세 입자가 얇은 재질의 장갑을 뚫고 손으로 들어왔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알루미늄 분진의 노출 정도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비누와 물로 손과 몸을 씻을 수밖에 없었다. 작업이 끝난 뒤 마취안은 면장갑을 벗고 알루미늄가루로 뒤덮인 양손을 무기력하게 바라봤다. (p.164-165)
2010년 5월과 6월 〈글로벌포스트(GlobalPost)〉는 “실리콘 노동착취 공장”이라는 제목으로 두 편의 탐사보도 기사를 발간해 노동자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노말 헥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뉴스 보도는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때때로 [윈텍] 공장 노동자들은 깊고 고통스러운 근육 경련으로 기숙사 침대에서 깨곤 했다. 몇 주 후 많은 노동자가 제대로 걷지 못했고, 공장 바닥을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최신 유행 기계에 사용되는 섬세한 터치스크린을 닦느라 한때 날렵했지만, 이제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으로 일하느라 씨름했다. 그들은 일하면서 화면을 닦기 위해 사용한 용제가 말초신경을 공격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상으로 그들은 약해졌고, 휘청거렸고, 종종 고통스러웠다. 때때로 시야도 흐려지고, 두통은 예사였다.
공장 내 방진 클린룸에서 모든 노동자가 노말 헥산으로 1교대당 1,000개의 아이폰 터치스크린을 닦아야 했다. 노말 헥산은 산업용 알코올보다 훨씬 빨리 증발하는 용액으로, 이를 사용할 때는 마스크를 쓰고 환기되는 장소에서 작업해야 한다. 하지만 윈텍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쫓고 쫓기는 게임이 다음과 같이 진행됐다. 쑤저우시 ‘안전생산감독관리국’ 검사팀이 공장에 도착하자 생산 관리자는 즉시 모든 비상문을 열어 폐쇄된 환경 속의 독성 화학물질 농도를 희석시켰다. 감시자가 없으면, 창문과 문은 작업 시간에 절대 열리지 않았다.
2011년 2월 한 언론매체가 노동자들의 배상문제를 질의했을 때 애플 대변인 크리스틴 휴젯(Kristin Huguet)은 “윈텍 사례를 언급하길 거부했다.” 공급사가 직원의 직업 건강 및 안전에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애플과 다른 전자 회사들이 자사 제품 제조 시 어떤 화학물질과 어떤 공정을 거치는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윈텍이나 폭스콘 같은 공급사들만의 책임이라고 단순하게 주장해선 안 된다. (p.222-223)
노동단체들은 애플과 거대 기술업체들이 공급업체 공장에서 가장 위험하고 독성 있는 화학물질 사용을 중단하고 안전한 대체물질로 교체하도록 계속 압박해 왔다. 환경활동가들은 “전자제품의 새로운 기술적 진보가 이뤄지는 모든 세대에서 환경, 건강, 안전, 사회적 정의 차원에서 나란히 개선되는” 미래를 기대한다. 흥미롭게도 2011년 초 비디오게임 개발사 몰레인더스트리아(Molleindustria)의 이탈리아팀이 새로운 아이폰을 시장에 출시하는 과정을 풍자한 교육용 게임 “폰 스토리(Phone Story)”를 선보이며 그 명분에 기여했다. 불법 광산에서의 원자재 추출 및 아동 노동 남용, 노동자 자살과 상해와 관련된 초과근무 압박 및 속도전, 소비지상주의와 미리 계획된 제품 노후화 전략, 지구 전체의 전자 폐기물 덤핑 및 환경 재해에 이르기까지, “폰 스토리”는 폰의 생산, 소비, 폐기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참여자들의 사회적 의식을 고양한다. 이는 아이폰의 생명주기(life cycle)에 내재한 환경오염과 노동 부정의를 부각함으로써 자신을 친환경 기업으로 홍보한 애플의 진상을 드러냈다.
기업 이미지에 대한 위협을 항상 경계하던 애플은 출시 몇 시간 만에 앱스토어에서 “폰 스토리”를 제거했다. 미국의 다국적 기업은 “아이들에 대한 폭력이나 학대를 묘사하는 앱은 금지된다”와 “지나치게 불쾌하거나 조잡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앱은 등록 취소될 것이다”라며 이를 두둔했다. 하지만 무엇이 “불쾌하다는(objectionable)” 것인가? 폭스콘과 애플에 의한 기업의 권리 남용을 일컫는 것인가, 아니면 광부와 노동자의 삶을 위협하는 자신들의 남용 그 자체인가? (p.227-228)
그냥 그렇게 서서 잠들어
누렇게 바랜 내 눈앞의 종이에
강철 펜으로 울퉁불퉁 검은 칠을 새겨 넣어
온통 노동에 관한 말로 가득해
작업장, 조립라인, 기계, 출근카드, 야근, 월급…
난 그들에게 유순해지도록 훈육되어
소리 지르거나 반항할 줄 몰라
불평하거나 비난할 줄도 몰라
그저 묵묵히 피로를 견딜 뿐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
매월 10일의 회색 월급봉투만 기다렸어
뒤늦게나마 내게 위안을 주려고
나의 모나고 거친 언어를 벼려야만 했어
무단결근 불가, 병가 불가, 사적 휴가 불가
지각 불가, 조퇴 불가
생산라인 옆에 쇠처럼 붙어 서서, 두 손은 날듯이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그렇게 선 채로 잠들었던가
― 쉬리즈, 2011년 8월 20일
이후 쉬리즈는 바닥에 떨어진 나사에 관한 시를 통해 폭스콘에서의 삭막했던 삶과 죽음을 그려낸다.
땅에 떨어진 나사
나사 하나가 땅에 떨어지네
야근 중의 이 어두운 밤에
수직으로 떨어져, 가벼이 소리를 내네
누구의 관심도 못 끌겠지
지난번처럼
이토록 어두운 밤에
누군가 땅에 떨어졌을 때처럼
― 쉬리즈, 2014년 1월 9일
그가 어딘가에서 기록한 것처럼, 생산라인 위의 쳇바퀴 경쟁은 인류의 본성 및 염원과 충돌한다. (p.300-301)
요즘 애들 / 앤 헬렌 피터슨 / 알에이치코리아
번아웃은 1974년 정신과 의사 허버트 프로이덴버거(Herbert Freudenberger)에 의해 과로의 결과로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붕괴를 겪는 환자들에게 처음으로 진단되었다. 번아웃과 탈진(exhaustion)은 관련이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범주에 속한다. 탈진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는 걸 의미한다. 번아웃은 그 지점에서 며칠 동안, 몇 주 동안, 또는 몇 년 동안 더 나아가라고 스스로 몰아붙이는 걸 의미한다.
번아웃의 한복판에서는 고단한 과제에 뒤따르기 마련인 성취감이 영영 오지 않는다. “번아웃에 수반되는 탈진은 완성 상태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잠재울 수 없는 요구나 불안이나 방해물이 반드시 발목을 잡을 거라는 고통스러운 감각을 결합시킨다.” 번아웃 전문 정신분석가 조시 코언(Josh Cohen)은 이처럼 적고 있다. “모든 내적 자원을 소진하고도 그와 무관하게 전진해야 한다는 초조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번아웃을 느낀다.” 번아웃은 잠을 자고 휴가를 가도 진정으로 털어버릴 수 없는, 무딘 탈진의 감각이다. 가까스로 머리를 수면 위에 내놓고 있지만 아주 사소한 변화 하나가―질병, 자동차 고장, 망가진 온수기가―당신과 당신 가족을 저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힐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해야 할 일들로 납작해진 인생이다. 스스로가 신체 기능이 장착된 노동 로봇으로 최적화됐다는 느낌을, 당신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 무시하려 해도 떨쳐낼 수 없다. 코언이 표현했듯 당신의 정신이 잿더미가 된 기분이 그러하다.
지금껏 밀레니얼이라는 단어의 전형적인 쓰임은―높은 기대치와 게으름, 냅킨이나 결혼반지 같은 산업 하나를 “파괴하는” 경향에 대해 말할 때 이 단어의 쓰임은―밀레니얼 세대 인구 중 특정 하위 집단의, 거의 언제나 중산층이며 백인인 하위 집단의 행동을 묘사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이는 수백만 밀레니얼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2018년 미국에 거주하는 밀레니얼 7천3백만 명 가운데 21퍼센트가 히스패닉으로 정체화한다. 25퍼센트는 가정에서 영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한다. 밀레니얼 중 대학 학위를 가진 비율은 39퍼센트에 불과하다.
번아웃이 밀레니얼을 정의하는 경험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밀레니얼의 번아웃 경험이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중산층 백인이 신문을 읽으며 피로를 느낀다면, 밀입국자로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사람은 무엇을 견디고 있겠는가? 직장 내 암묵적 성차별에 대처하는 게 지긋지긋하다면, 여기에 더해 별로 암묵적이지 않은 인종차별까지 겪어야 하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기성세대가 일궈놓은 재정적 성과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의 번아웃은 어떻게 다른가? 가족 중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사람에게, 학자금 대출의 부담은 얼마나 더 쓰라리게 다가오는가?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누군가의 번아웃을 치유하지는 못했다. 하물며 나 자신의 번아웃조차도 그렇다. 그러나 명확해진 사실 하나가 있다. 번아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번아웃은 사회적 문제다. 생산성 앱, 불렛 저널, 마스크팩 피부 관리, 망할 놈의 오버나이트 오트밀 따위로 치유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치유책에 끌리는 건 우리 힘으로 이겨낼 수 있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규율과 새 앱, 더 나은 이메일 정리법, 또는 식사 준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만 더하면 우리 삶이 다시 중심을 잡고 기반을 다질 수 있다고, 미디어가 쉽게 장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벌어진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는 정도에 불과하다. 일시적 출혈은 멈춰줄지 몰라도 반창고가 떨어지면, 기분은 더 가라앉을 것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가 티끌 하나 없는 황금시대였던 건 아니다. 그러나 회사의―그리고 회사에 고용된 직원들의―변동성은 오늘날보다 눈에 띄게 낮았다. 대공황이 미국에 어떠한 경제적·사회적 재난을 일으켰는지 추적한 정치학자 제이콥 해커(Jacob Hacker)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정치·사업 지도자들은 은퇴 후 빈곤에 빠질 위험, 실업과 장애를 겪을 위험, 가장의 이른 사망으로 인한 위험을 비롯해 기본적인 경제 부담을 널리 분산시키려 새 제도를 마련했다.” 그중 일부는 사회보장연금처럼 모든 월급 명세서에 함께 불입되었고, 다른 일부는 회사 연금처럼 근로 계약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둘 다 기본 원리는 같았다. 어떤 위험은, 개인의 힘으로 이겨내기엔 너무 컸다. 그러므로 위험을 훨씬 많은 사람에게 분산시켜 개인에게 재난이 닥칠 때의 영향을 둔화시키는 것이 제도의 목적이었다.
밀레니얼은 자신을 걸어 다니는 이력서로 완전히 개념화한 최초의 세대다. 부모와 사회, 교육자들의 보조 아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적 자원”으로 여겼으며, 경제 활동에서 더 나은 성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압박은, 어떤 대가를 치르든 대학에 가기만 하면 번영과 안정을 누리는 중산층의 삶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인식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자금 대출에 짓눌린 채 능력과 관련 없는 일을 하는 수백만 명의 밀레니얼들이 증언하듯, 주위 모두가 믿는 신조라고 해서 그게 반드시 사실인 것은 아니다.
대학은 우리 부모들의 경제적 불안을 낮춰주지 못했다. 중산층 지위를 보장하지도 않았고, 많은 경우엔 취업 시장에 현실적으로 대비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겪은 대입 준비는 오래도록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반대의 증거가 아무리 등장해도 상관없었다. 열심히 일하면 성공과 만족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철석같이 믿어야 한다는 신조가 우리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맬컴 해리스의 말에 따르면 인적 자원은 “한 사람의 미래 소득에 대한 현재 가치, 혹은 자유로운 노동자들을 매매할 수 있다고 상상할 경우 그 사람의 가상 판매가격에서 유지비를 제한 것”이다. 지독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것이 자본주의가 체제 아래 노동자들에게 하는 짓을 명철하게 바라본 시각이다. 우리가 다루는 기계들처럼, 우리의 가치는 고용주를 위해 가치를 창출할 능력으로 측정된다.
(…)
사회 전체에 퍼진 이런 생각이 어떤 문제들을 만들어 낼지는 뻔하다. 한 사람의 가치가 일의 역량에 달려 있을 때 장애가 있거나 나이 든 사람들, 풀타임으로 일할 수 없는 사람들, 무급이거나 높은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 돌봄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더 큰 사회적 방정식에 따라 평균 이하가 된다. 사람의 가치는 인품의 강건함, 남들을 섬기고 대하는 친절의 크기로 정해진다고 철석같이 믿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을 적는 순간조차도 그런 믿음이 우리의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실감할 수밖에 없다.
좋아할 수 있는 직업은 사람들이 무척 탐을 내기에, 그만큼 지속 불가능하다. 너무나 적은 자리를 두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경쟁하는 상황에서는, 보상 기준이 점차 낮아져도 별다른 여파가 없다. 당신만큼 열정을 불태우며 당신의 자리를 대체할 만한 누군가가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복지를 대폭 축소하거나 없애도 된다. 연봉을 입에 겨우 풀칠할 수준으로 낮춰도 된다. 특히 예술계라면 더 문제없다. 웹사이트에서 콘텐츠 작가에게 돈을 주는 대신, 역으로 작가가 웹사이트에 이름을 올릴 기회를 얻기 위해 무급으로 노동하는 경우도 많다. 한편으로 고용주들은 구직자의 최소 자격 조건을 상향시킨다. 업무에 필요한 조건인지는 상관없다. 더 높은 학력, 더 많은 학위, 더 많은 훈련을 지닌 자만이 후보에 오를 수 있다.
그리하여 ‘멋진’ 직업 및 인턴십은 수요-공급의 법칙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직업 자체가 근본적으로 보람이 없거나, 알량한 보수에 비해 너무 많은 노동을 요구해 있던 열정도 사그라지게 만든대도, 1000:1의 경쟁률을 뚫고 그 일을 해낼 사람으로 어렵게 뽑혔다는 사실 자체가 그 일자리를 더더욱 열망의 대상으로 만든다.
“직업 체험을 한다고 해서 돈이 들어오는 건 아니다.” 패닉쿨은 ‘무급 인턴십이 나 같은 여자의 법조계 진입을 막는다’라는 제목의 블로그 포스트에 적었다. “경험이 월세를 내주진 않는다. 통근 교통비를 내주지도 않는다. 먹을 걸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대출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그 경험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취업에 성공하려면 인턴십을 통해 이력서에 쓸 만한 경험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이다. 따라서 급여가 아무리 적더라도 인턴십을 해야 취직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불문율이 된다. 패닉쿨은 적는다. “일을 하고 보수를 받는 게 호사여선 안 된다. 법을 공부하던 때 나는 무급으로 일할 기회가 어찌나 감사했는지,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컨설턴트들과 그들이 컨설팅하는 회사 사이의 거리가―문자 그대로의 ‘거리’와 비유적인 ‘거리’가―그들이 지닌 가치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은 직접 아는 직원이나 애착을 지닌 직원이 없으므로 해고에 관해 망설임 없이 판단할 수 있다. 직속 상사나 CEO와 달리 정리 해고를 당하는 직원들을 다시 볼 일이 없다. 직원들의 가족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속하지 않은 이 동네에 권고안이 미칠 파장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들을 냉혹한 살인자로 보지 않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 회사가, 흔히 주주들을 만족시키고자 안달복달하는 회사가 요청한 것이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컨설턴트는 권고만 한다. 실제로 권고안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건 회사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는 동안 컨설턴트들의 권고안은 회사의 핵심 역량을―회사가 다른 곳보다 먼저 선점한 방식으로 가장 잘하는 일을―밝혀내는 데, 핵심 역량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누구든 조용히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데이비드 와일(David Weil)이 《균열 일터(The Fissured Workplace)》에서 지적하듯 이는 회사의 부분들을 분리시키고, 몇몇 부서를 아예 없애고, “비필수” 노동의 경우 회사가 유의미하게 낮은 비용으로 동일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예컨대 임시직 노동자들에게) 아웃소싱한다는 의미였다.
청소 회사를 예로 들어보자. 한 스타트업에 청소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수십 개 청소 업체가 경쟁한다. 회사는 그중에서 가장 낮은 금액을 제시한 업체를 낙찰할 것이다. 가장 낮은 금액을 제시하는 업체는 직원들에게 매우 낮은 임금을 지불하는 회사일 것이다. 자, 스타트업 회사의 소유주들은 자사 직원들에게 그만큼 낮은 임금을 주겠다는 치사한 생각은 한 적이 없을 것이다(홍보에 좋지 않으니까!). 하지만 하청 용역은, 회사가 전체 임금 구조에 대해 무지한 시늉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에 대한 이야기는 곧 우리의 시간을 사고파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길을 거닐거나, 운전 중 신호에 걸려 허공을 바라보거나, 잠자기 전 뒤척이던 17분 같은 시간을 사고파는 것. 주목 경제는 우리 삶의 틈새 시간을 점유하는 것뿐 아니라 주요한 사건들을 미묘하게 반복해서 일상을 차지하는 것을 기반으로 삼는다. 넷플릭스 CEO가 던진, 넷플릭스의 주된 경쟁자가 수면이라는 유명한 농담처럼.
SNS가 아닌 다른 서비스들도, 원래 이랬던 건 아니다. 스냅챗이 처음부터 누군가 메시지를 입력 중이라는 알림을 보냈던 건 아니다. 뉴스 사이트가 원래 푸시 알림을 보냈던 건 아니다. 명상, 스타벅스, 데이트,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스페인어 학습, 숫자 매칭 게임도 마찬가지다. 세포라는 점포 가까이에 갈 때마다 알림을 보내지 않았고 구글은 지하철 탑승이 어땠는지 평가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주목하지 않는다면―강박적으로 되풀이하여 주목하지 않는다면―이 앱들은 가치가 없어지거나 크게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앱들은 알림을 통해 부드럽게 주목을 요구하고, 조종하고, 명령한다.
우리는 SNS 포스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서사로 만든다. 즉 우리 삶이 어떤 모양인지 나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람찬 좋은 직업과 균형 잡힌 개인 생활로부터 얻게 되리라 기대했던 만족을 느낄 수 없을 때, 자기 삶에 확신을 가질 최선의 방법은 남들이 그렇게 보도록 그와 같은 만족을 전시하는 것이다.
내 인스타그램을 보는 이들은 내가 자연과 반려견들을 벗 삼아 산에서 달리거나 걷거나,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타면서, 또는 격주로 매번 똑같이 아름다운 새로운 장소로 여행하면서 모든 시간을 보낸다고 추측할 것이다. 나는 실제로 야외에서 개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직업상 여행하며 보내는 시간도 많다. 그러나 내가 야외 사진을 포스팅하는 이유는 나 자신과 남들에게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집 컴퓨터 앞에서 보내며 살지 않는다고 입증하기 위해서다. 다른 사진들은 나 자신과 남들에게 여행을 떠나는 일이 소외감을 주는 강행군이 아니라 설렘이라고 입증하기 위해서다. 내가 체험한 삶은 사진 찍힌 삶과 목표한 삶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따금 잠들기 전 불안에 맞서 싸우며 SNS를 확인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내가 나 자신에게서, 내 삶에서 분리된 기분이 들 때, 인스타그램은 내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했는지 상기시킨다.
자기 전에 딱 15분이 남았는데 피로하다면, 나는 책을 읽으며 쉬는 게 제일 좋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핸드폰을 내려놓는다는 선택을 하는 데조차 나를 다스릴 규율이 필요하다. 인스타그램 앱을 여는 건 쉽다. 기분이 엉망이 되었더라도, 책을 읽으면 얻었을 진짜 탈출감이 더 절실한 상태였더라도.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도 똑같다. 읽고 있던 걸 계속 읽으면 어떨까? 눈을 감거나, 짧게 명상을 하거나, 그냥 내 주위에 빼곡하게 앉아 있는 인간들을 관찰하면 어떨까? 나는 그러는 대신 그새 내 SNS에서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지, 누가 내 삶을 긍정해 주었는지 확인하려 초조하게 LTE가 잡히기를 기다린다.
SNS는 이렇게 우리에게서 번아웃을 상쇄해 줄 순간들을 빼앗아간다. 경험을 기록하는 데 집착하는 사이, 우리는 실제 경험에서 멀어진다. 또한 SNS는 우리에게 불필요한 멀티태스킹을 시킨다. 과거엔 여가에 사용되었던 시간을 침식시킨다.
밀레니얼들이 여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몇 번이고 거듭 등장한 단어가 있다. ‘망가졌다’는 것이다. 역사상으로 여가란 하고 싶은 걸 하는 시간, 일이나 휴식에 쓰이지 않는 하루의 8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정처 없이 산책하는 것부터 비행기 모형 조립까지 다양한 취미를 가꿨다. 중요한 건 그 일들의 동기가 더 좋은 연애 상대가 되거나, 사회적 지위를 선언하거나, 부업으로 가욋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거다. 취미생활은 나의 즐거움을 위해 하는 것이었다.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세대라고 언급되는 밀레니얼들이, 단순히 개인의 즐거움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걸 모르거나 어색해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우리의 여가는 우리를 회복시켜주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이끄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재미도 없다. 친구들과 놀러가는 것? 조율하려면 피곤하다. 데이트? 온라인에서 상대를 찾는 것도 고역이다. 파티? 준비할 게 너무 많다. 나는 토요일 아침마다 긴 시간 달리기를 하는 이유가 내가 달리기를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달리기가 내 몸을 단련시킬 생산적인 방법이어서인지 헷갈린다. 내가 소설을 읽는 건 소설 읽기를 좋아해서일까, 아니면 소설을 읽었다고 말하기 위해서일까? 이건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밀레니얼 세대에게 만연한 번아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쉬는 시간이 일처럼 느껴질 때, 노동의 피로에서 회복하기란 어렵다.
우리 대부분은 자원봉사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웃는 것이 온라인 대화보다 더 유익하다는 것, 명상 시간을 가지면 마음의 균형이 잡히고 불안이 줄어든다는 것을 증명하는 연구들을 읽어본 적이 있다. 우리는 여가가, 특히 퍼트넘이 사회적 연결의 기반이라고 묘사하는 유형의 여가가, 우리 기분을 개선시킨다는 걸 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이런 활동을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극복 불가능한 에너지 소비를 떠올린다. 요컨대 우리는 너무 지친 나머지 실제로 휴식을 취하며 회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올바니에 사는 백인 여성 미건은 행정 보조로 풀타임 근무를 하고 부업으로 책을 판매한다. 그녀에게 여가 시간은 하루 한 시간, 주말 중 하루가 전부다. 개인 간의 상호작용, 특히 데이트는 갈수록 감정적으로 벅차고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일로 느껴진다. 제일 친한 친구와 어울리는 것조차 그녀를 녹초로 만든다.
미국 대도시에 사는 에이미는 이렇게 말했다. “육아 번아웃에 빠지면 다시는 누구도 보살피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듭니다. 다른 이의 자질구레한 일과를 기억해야 하는 게 싫어요. 너무나 사소한 이유로 아이들에게 짜증이 나고, 툭하면 분노가 치밉니다. 거실 한가운데에서 너무 오래 굴러다니는 양말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지고, 이미 일곱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데 한 가지를 더 부탁받으면 버럭 화가 나기도 해요. 남편은 출근을 하고, 일이 바쁘면 시간 맞춰 집에 돌아오기로 한 약속을 잊을 수 있는 특권을 지녔죠. 그에 대해 분개하는 제가 너무 싫습니다. 때로는 ‘엄마’라는 무거운 이름에 비해 저라는 존재는 너무 작게 느껴져요.”
미국 서부의 작은 마을에서 아이를 키우는 제니는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사실 ‘번아웃’ 개념이 썩 와닿지 않아요.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David Foster Wallace)가 금붕어와 물에 대해 한 말이랑 비슷하죠. 금붕어가 다른 금붕어에게 묻습니다. ‘물속은 좀 어때?’ 다른 금붕어가 답하죠. ‘물이 대체 뭔데?’”
2015년에 가족노동연구소에서 시행한 연구 결과, 직업이 있는 무자녀 밀레니얼 남성 가운데 “남자가 돈을 벌고 여자가 가정을 보살핀다”로 요약되는 전통적 가족 역할을 지지하는 사람은 35퍼센트였다고 한다. 반면 자녀가 있는 밀레니얼 남성들에게 물었을 땐 비율이 53퍼센트까지 뛰었다. 스스로 히스패닉, 백인,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혈통이 섞였다고 말하는 앨리사는 이렇게 표현한다. “진보적인 제 남편이, 육아 분담에 관해선 이렇게 보수적일 줄 몰랐죠.”
이렇듯 노동이 불평등하게 배분되는 데에는 무수한 설명이 따른다. 남자는 여자보다 멀티태스킹에 능하지 못하다, 남자는 모유 수유를 하지 못하므로 영아기 초기에 여자처럼 돌보는 역할을 맡을 수 없다, 여자는 남자가 일을 완수하는 방식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품고 있다 등등. 로크먼은 각각의 관념을 계통적으로 분류하고선, 독자들의 생각을 바로잡는다. 예를 들어 남자들은 멀티태스킹을 못하게 ‘타고난’ 게 아니라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길들여진 것이다. 반대로 여자들은 멀티태스킹을 하도록 길들여졌다. “우리가 성별 차이라고 부르는 모든 건, 다른 관점에서 보면―권력의 관점에서 보면―흔히 설명됩니다.” 뇌과학자 리즈 엘리엇(Lise Eliot)이 로크먼에게 들려준 설명이다. “남녀 간 차이가 생래적인 것이라는 추정은 남성들에게 아주 유리했죠.”
에마의 만화는 인터넷에서 여러 차례 화제가 되어 퍼져나갔으며, 많은 여성이 내게 에마의 만화를 읽으며 울었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구체적인 일들이 인정받는 건 물론, 묘사되는 것조차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의 일은 대체로 눈에 잘 보이지 않으며, 가장 노력하는 배우자들조차 그 일을 덜어주기가 무척 어렵다. 플로리다주에서 아이를 키우는 상류층 어머니인 데비는 말한다. “저는 그걸 ‘부탁하지 그랬어’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남편을 사랑하고, 그가 정말 좋은 남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제가 부탁을 해야만 그나마 뭘 합니다. 제가 콕 집어 설거지를 해달라고 부탁해야만 저녁 후에 설거지를 하고, 그럴 때조차 부엌을 아주 깨끗하게 치우지는 않습니다. 대놓고 무언가 해달라고 부탁할 때에도, 일부러 무능하게 구는 건지 원래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해주는 적이 없어요.”
로크먼은 저서에 남성의 ‘여가 특권’에 대해 풍부한 연구를 인용한다. 예를 들어 유치원에 다닐 연령의 자녀를 둔 워킹 맘은, 밤중에 아이가 깼을 때 같이 깰 가능성이 아버지보다 2.5배 높다. 유아를 키우는 아버지는 주말에 ‘여가’로 보내는 시간이 어머니보다 두 배 길다. 아기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불구하고 가을에 주말마다 풋볼 경기를 보고 야외 파티까지 참석했던 친구가 생각난다. 그는 아내가 그런 일정을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내내 보내지 못하게 한다고 화를 냈었다. 문제는 아버지가 여가 시간을 누릴 자격의 유무가 아니다. 문제는 어머니의 여가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도 많은 아버지가 본인의 여가 시간을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빈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지적 부담’을 가한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인생의 기본적 요소들을 찾아내고 유지하느라 너무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부은 나머지 공부하고, 저축하고, 야학에 등록하고 출석하는 데 사용할 에너지가 바닥난 것이다. 숙제를 할 에너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제때 공과금을 내는 건 번아웃에 빠진 중산층에게도 어려운데, 컴퓨터도 없고 인지세로 낼 여윳돈도 없는 사람에겐 얼마나 더 어려울지 생각해 보라.
《결핍의 경제학(Scarcity: Why Having So Little Means So Much)》에서 경제학자 센딜 멀레이너선(Sendhil Mullainathan)과 심리학자 엘다 샤퍼(Eldar Shafir)는 “결핍이 정신을 어떻게 사로잡는지” 분석했다. 샤퍼는 시티랩(CityLab)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빈곤층의 경우처럼 여유 공간이 전혀 없는 이들은 저항해야 할 것에 저항하지 못하고,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인내심이 바닥나고, 하교한 아이들에게 쏟을 관심도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가난한 부모들은 번아웃에 ‘도달’하지 않는다. 애당초 번아웃 상태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현실에 순응하고 산다고 해서 그게 옳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진실이며, 사람들이 그 진실을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서 그 진실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일에서 성공하는 것과 개인으로서 잘 사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몸이 이제 쉬어야 한다고 가능한 한 모든 방법으로 알려줄 때, 몸이 시키는 대로 쉬면서 좋아지는 기분을 느껴야 한다. 육아는 경쟁이어선 안 된다. 여가는 이렇게 부족하지 않아야 한다. 가사노동은 이만큼이나 불평등해선 안 된다. 그 근처에라도 가선 안 된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이렇게 걱정하고, 겁먹고, 불안해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죽거나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혹은 의미 있는 일을 하니 쥐꼬리만 한 월급을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면 어떨까? 일이 우리 삶의 모든 구석까지 스며들게 놔두지 않겠노라 거부하면 어떨까? 주식 시장이 경제적 건강의 지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부자는 이렇게까지 부자여선 안 되고 빈곤층은 이렇게까지 가난해선 안 된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지지하는지에 관한 해묵은 망가진 믿음을 내세워, 용서할 수 없는 현실들을 용서해선 안 된다―그런 믿음들이 이미 권력을 손에 쥔 이들이 이득을 얻는 데 쓰일 때엔 더더욱.
책 만드는 일 / 박혜진, 이영준 외 8명 / 민음사
열일곱, 아니 열여덟 살이었나. 고등학교 선생님의 말이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프랑스어를 가르치셨던 그분이 수업하다가 불쑥 말씀하셨다. “너네는 불문학과 같은 덴 가지 마라. 굶어 죽기 딱 좋다.” 농담이라기에는 너무 진지했다. 인문계 중에서도 쓸모없다는 문학 전공은 갈수록 취업이 힘들어지는 현실에 어린 제자들이 걱정되셨던 것 같다. 하지만 충고도 헛되이 나는 불문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동기들 가운데 전공을 살려 밥벌이를 하는 아주 희귀한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어 작품 전담 편집자를 거쳐 이제는 프랑스어 번역자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글’을 ‘책’으로 만드는 일. 그것이 편집자의 일이다. 보고서와 메일 작성, 회의 등의 업무가 산적한 회사원의 일상에서, 퍼킨스처럼 작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지금의 편집자들 역시 가능한 모든 시간을 투여해 좋은 글을 찾아 헤매고, 그런 글을 만나면 설렘과 흥분을 느끼며 그것을 더 좋게 고쳐 책으로 만들고자 진력한다. 좋은 글이란 빼어난 글솜씨로 쓰인 문장들의 묶음이 아니라 정돈된 사유를 탁월하게 표현한 글이고, 좋은 책이란 존재 이유가 명확한 책이다. 글을 책으로 엮는 과정의 순간순간에 좌절과 소망, 긴장과 기대, 쾌감과 자긍심이 찾아온다.
세계문학전집 편집은 이런 희로애락을 겪을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재미가 덜한 작업이다. 전집의 작품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좋은 글’로 이미 심의필 한, 확정된 텍스트다. 나 아닌 다른 편집자에 의해 벌써 책으로 만들어진 글, 갈고닦을 원석이 아니라 진즉에 보증서가 붙은 채 보석상의 진열대 위에 올라가 있는 작품이다. 그 수정할 수 없는 권위 앞에서 편집자가 운신할 폭은 좁아진다. 교류하며 공감을 나누고 싶은 저자는 저세상이나 먼 나라에 있다.
그다음에는 작품의 예술적·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작가의 문체와 어휘 선택에 찰떡같이 맞아떨어지면서도 새로운 감각의 우리말을 입혀 줄 번역자를 섭외해야 한다. 작가의 문학 세계 전체를 일별하는 해설을 곁들여야 함은 물론이다. 한 작품만 번역 품질이 떨어져도 자칫 전집 전체의 신뢰도를 해칠 수 있다. 게다가 고전은 고리타분하고 읽기 힘들다는 편견까지 엄연하다. 결국 세계문학전집의 관건은 번역에 있다. 민음사에 이어 여러 출판사들이 전집 시장에 뛰어든 지금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맞춤하고 실력 있는 번역자를 찾기는 쉽지가 않다. 작품을 애써 골랐어도 번역할 사람이 없으면 출간은 난망해진다. 번역서가 다 그렇지만 세계문학전집의 경우에는 형편이 더 어려운데, 번역 최적임자가 해당 작가의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대개는 작품에 대해 자문해 주었던 이에게 번역을 부탁한다.) 대학의 어문학과들이 축소·폐과되고 있고, 어문학 전공으로 연구자의 길을 가는 것은 생존을 건 무모한 도전으로 치부되고 있다. 학계가 척박해지면서 신진 연구자가 줄어드는 만큼, 문학 고전(그리고 인문학 고전)의 번역 출판도 고전을 겪고 있다.
저작권 계약을 마친 후, 평소 교류가 있던 독문과 교수에게 자문을 구해 번역자를 추천받았다. 번역을 맡기로 수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번역자 김연수 선생이 질문을 해 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지향하는 새로운 시각과 기획 의도가 무엇인지, 이 작품을 전집에 넣으려는 취지는 무엇인지, 한국의 출판 현장에서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편집자의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세계문학’과 그 정전(canon)에 대한 고민을 담은 물음이었다. 다른 어떤 번역자에게서도 받아 보지 못했던 그 질문은 나를 당황케 했지만, 그저 관성적으로 목록의 구색만을 맞춰 온 것은 아닌지 자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어떤 답변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나의 생각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진실이라는 ‘보편성’에 가닿는다.
연일 주식이나 부동산 키워드의 책들이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다. 그렇지만 5층의 편집자들은 사무실 구석에서 묵묵히 『한서 열전』이나 『하버드 세계사』 같은 책들을 만들고, 드디어 몽테뉴의 에세이 번역이 완료되었다며 들떠 회의를 요청한다. 가끔 나는 그 묵묵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주식이나 부동산보다 우리가 내는 책들이 나에게 더 유용한 것이라 착각하며 자리로 돌아와 다시금 책 팔 궁리를 한다. 효율과 가성비가 최고로 평가되는 세상에서 이런 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다. 늘 새로움을 찾아다니는 내가 일만큼은 한자리에서 꽤나 오래 하고 있는 이유도 그래서인 것 같다.
짧은 한국 그림책 역사를 훅 올라가면, 초창기에는 그림책 작가라는 개념조차 미비했다. 그림책 자체에 대한 이해도도 무척 낮았다. 그저 동화에 그림이 많이 들어간 책 정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해다. 그림책은 글과 이미지가 하나의 호흡으로 움직이는 문학의 한 장르다. 글이 그림에 녹아들어 그림으로만 이야기가 전개되거나, 때로는 글이 주는 이미지를 그림이 이어받아 글의 호흡에 맞춰 더욱 크게 확장한다. 따라서 이런 장르적 특성을 깊게 이해하고, 중심을 잘 잡아 다듬으면서 완성해 가는 것이 그림책 편집자가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