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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왜 그래? / 김선영 / 스리체어스

 

 그러니 내과 의사의 상품 가치는 혈압과 혈당을 잘 조절하거나 항생제를 적절하게 써서 환자가 더 잘 회복하게 해 주는 데 있지 않다(그런 것은 어차피 평가 자체도 어렵다). 또한, 상급 종합 병원에서 배웠던 것들 즉,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는 기관 삽관 혹은 중심 정맥관 삽입을 할 줄 안다거나 인공호흡기를 다룰 줄 안다고 해서 더 대우받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내시경이나 초음파를 볼 줄 아는지에 따라 몸값이 달라지고 여기에 미용 레이저까지 다룰 줄 알면 금상첨화이다.
 내과라는 전공을 택할 때 젊은 의사 대부분은 만성 질환을 잘 관리해 건강 수준을 높이는 환자들의 동반자(일차 진료 의사)가 되거나, 중증 질환의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지키는 수호자(상급 종합 병원 전문의)가 되고 싶었을 테다. 그러나 강호에 동반자를 찾는 곳은 없고, 수호자 역할을 하기에 일자리는 너무도 적다. 강호에서 할 수 있는 남은 역할은 내시경, 초음파 기술자가 대부분이며, 그나마도 그 자리가 점점 포화하고 있다. 2009년 1만 1974명 수준이었던 내과 의사 수는 2019년 1만 8424명으로 50퍼센트가량 증가했고, 이들은 종종 동반자나 수호자의 역할도 하지만, 대개는 기술자다. (p.26-27)

 

 반대로 정부 정책이 기피과의 지원율을 끌어올린 좋은 예는 응급의학과다. 물론 지금도 근무 환경이 좋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수가 인상과 규제를 적절히 활용해 일자리를 늘린 결과, 예전보다는 전공의 충원율이 높아졌다. 정부가 응급 환자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응급 의료 체계 개선에 착수한 2013년 이후 권역 응급 의료 센터의 수가가 올라갔고, 전문의를 다섯 명 이상 의무적으로 채용하도록 기준을 강화했다. 병원이 전문의 채용을 늘릴 수밖에 없는 당근을 제시한 결과 수요가 늘었고, 자연스럽게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의 몸값은 껑충 뛰었다. 응급의학과는 높은 직무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일정 부분 일자리가 보장되고, 연봉이 높은 편이라는 장점에 힘입어 선호도가 올라갔는데, 50~7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던 전공의 충원율은 일자리와 소득이 늘어나면서 90~100퍼센트 수준에 근접했다. 아직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흉부외과나 산부인과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이다.
 응급 의료 체계 개선은 전공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건강을 위한 정책이었다. 그것이 응급의학과 의사의 장기적인 전망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었다. 다른 진료과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심장 수술의 수가를 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수술을 더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의사를 더 많이 채용하도록 인력 기준을 마련한다면 흉부외과 의사의 전망이 더 나아지면서 이 일을 하려는 이들도 늘어날 것이다. 밤새 응급으로 심장 이식 수술을 하고 다음 날 아침 바로 판막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 대학 병원 흉부외과 의사에게 그를 대신할 수 있는 동료를 만들어 준다면 말이다. (p.32-33)

 

 이제는 의사 면담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간혹 진료를 받고 약 처방이 없으면 진료비를 돌려 달라 시비를 거는 이들이 있다. 의사의 면담과 진찰은 오로지 약과 시술, 수술 등의 결과물로 나타나야 하고 면담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니 3분 진료가 일반적인 행태로 자리잡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사회가 진료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진료의 질이 올라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우리 사회는 의료 서비스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에는 대체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예술 분야 창작자들이 재능 기부라는 허울 아래 공짜 노동을 요구받는 일이 허다한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p.51-52)

 

 사실 진료를 하다 보면 입원이 왜 많은지 대략 짐작이 가기도 한다. 외래 진료실과 응급실에서 입원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이들, 병실에서 퇴원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이들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은 집에 돌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거나 집에서 상태가 나빠질까 봐 불안하다는 것이 가장 흔한 경우다. 가족이 아파도 간병 휴직을 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또한, 비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혹시 가족이 아프더라도 바쁜 경쟁 사회에서 간병에 발목 잡혀 시간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 집에서 환자를 돌보다가 잘못될까 싶은 불안감도 크다. 가정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은 구하기도 어렵고 고가이며, 간병인 시장은 주로 병원 위주로 형성되어 있다. 병원은 국가와 지역 사회에서 담당해야 할 복지와 돌봄의 외주 공간이 되어버렸다.
 입원해야만 더 큰 보상을 제공하는 실손 보험 구조도 입원을 선호하는 요인이 된다. 특히 고가의 항암제를 투여받는 이들은 입으로 복용하거나 1~2시간이면 주사실에서 맞을 수 있는 약인데도 실손 보험 때문에 입원하기를 희망하는 경우가 많다. 왜곡된 보험 구조가 낳은 도덕적 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본인이 환자임에도 집에 있으면 가사와 돌봄 노동을 짊어져야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입원을 선호하는 여성들도 있다.
 결국 한국 사회의 노동, 복지, 성평등과 관련된 여러 구조적인 문제는 입원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고 이로 인해 병상이 늘어났다. 낮은 수가 때문에 적고 값싼 인력으로 많은 병상의 환자를 진료하다 보니 환자들의 불만은 늘어났으며, 전공의 과로와 PA의 불법 노동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이다. (p.64-65)

 

 미국 의사협회가 〈The Doctor〉에 덧붙인 "이 그림에서 정치를 몰아냅시다"라는 구호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틀렸다. 의사가 죽어 가는 환자 곁을 지키려면 그가 담당하는 환자들을 다른 의사가 봐줄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병원이 중증 질환을 진료하는 의사를 충분히 고용해야 하는데, 이는 정치 없이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다. 의료계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얼마나 많은 자원을 투입할지 논의하는 것이 곧 정치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만 제대로 된 정치의 과정이란 의사들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가는 것도, 반대로 의사 단체의 로비나 압박에 정책을 쉽게 뒤집는 것도 아니라고 믿는다. (p.96-97)

 

 

가난을 팝니다 / 라미아 카림 / 오월의봄

 

 마이크로파이낸스와 젠더에 관해 조사하게 된 것은 농촌 여성의 창업과 경제적 역량 강화에 의문을 갖게 되면서였다.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위축된 국가인데도 그라민은행과 내가 연구한 세 NGO는 모두 98퍼센트의 높은 대출 회수율을 자랑했다. 방글라데시 농촌 여성들이 모두 사업가로 성공한 것이 아니라면 높은 회수율의 이면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다음의 질문들을 던져보았다.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가장 신용도 높은 수혜자층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이는 어떻게 여성들의 역량을 강화하는가? 돈은 충분한가? 나는 이 높은 회수율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정직하기 때문에 돈을 갚는다는 도덕적 담론을 떠올리기보다는, 그 이면에 좀 더 복잡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NGO들의 수사 뒤에 감추어진 이야기를 밝히고자 방글라데시를 연구 지역으로 선정했다. (p.7-8)

 

 현지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역설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남편을 여읜 한 노파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라민은행에서 대출금을 받아 집으로 가는 길에 조카를 만났는데 그가 노파에게 대출금을 내놓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숙모, 오늘 그라민은행에서 돈 받은 거 알고 있습니다. 사업할 돈이 필요한 조카에게 돈을 내놓는 게 숙모로서 도리가 아닙니까." 노파는 과부이자 숙모로서 조카를 돕는 것은 자신의 친족의무라고 설명했다. 돈을 내놓지 않는다면 다른 가족들이 노파가 돈을 내놓을 때까지 압박할 것이 뻔했다. 한번은 그라민은행 사무실의 여성 부관리자에게 신입회원을 받는 선정 기준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대답인즉슨 신입회원을 받기 전에 대상자가 가지고 있는 물건 전체에 대한 상세한 목록을 만든다고 했다. 냄비, 침대, 팬, 의자, 나무, 닭 등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한다. "대출금을 주기 전에 우리 돈을 회수할 수 있는지 확인합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그라민은행은 자선기관이 아니라 기업이에요."
 이 두 가지 민족지적 순간은 마이크로파이낸스의 근본적인 모순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한편에는 친족의무 때문에 대출금을 남자 친척에게 내주어야 하는 여성 대출자가 있고, 다른 쪽에는 마이크로파이낸스를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라고 여기며 (여성 대출자들을) 시장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여성 주체라고 여기는 은행 관리자가 있다. 내 연구는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들의 수사―어떻게 마이크로파이낸스에 대한 '진실'을 생산하는지―와 대출자인 여성들의 삶, 즉 여성들에게 경제활동을 강요하는 촘촘한 사회적 친족의무와 그 상호관계 간의 역설과 모순을 탐색한다. (p.16-17)

 

 그라민은행은 복지 비용을 축소하는 신자유주의 국가 모델을 촉진하는 선구자로 여겨진다. 그라민은행의 설립자인 유누스 교수는 신자유주의 국가 정책의 강력한 지지자다. 그는 "세계는 자기고용의 인류 전통을 잊었다. …… 인류가 동굴에서 살던 시절에는 모두 알아서 살았다. 도움을 청할 국가는 없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비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적이고 주된 성과"는 가난한 이들의 부를 부자들에게 재분배한 것이며, 신용체계는 "탈취에 의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 과정을 이루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신용이 탈취의 수단이라는 하비의 주장은 방글라데시의 상황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다. (p.28)

 

 라만의 민족지적 연구 《방글라데시 농촌의 여성과 마이크로크레디트(Women and Microcredit in rural Bangladesh)》(1999)는 내 연구에서도 검증되는 놀라운 내용을 보여준다. 라만은 "여성이 마이크로크레디트 프로그램의 일차 대상이 되는 것은 그들의 취약한 지위 때문"이라고 보고, 대출 때문에 여성에 대한 폭력이 증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마이크로크레디트 그룹에서 마을 단위 파벌이 만들어지면 그라민은행은 이를 도리어 연대와 신뢰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의 형성이라고 부추긴다는 점도 밝혀냈다. 자원을 결집시키기 위해 "대출자의 90퍼센트 이상이 그라민 대출센터에 친척을 두고 더 큰 연대 그룹 안에서 작은 파벌을 만들어 유지"하는데 이 때문에 불화와 반목이 벌어지기도 한다.
 페르난도는 그라민은행과 ASA에 관한 연구를 통해 마이크로파이낸스 대출로 이득을 보는 것은 지역 상인과 사채업자임을 발견했다. 방글라데시의 상업 중심지 딴가일과 가까운 그의 연구 지역에서 대출자들은 지역 상인과 사채업자에게 대출금을 통째로 맡기고 매일 식량배급을 받았다. 또한 이어서 "여성 대출자들은 국가에서 받는 교육, 보건, 농업 보조금으로는 절대로 잘살게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페르난도의 말대로 현장 직원들은 "본부에서 높은 회수율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기 때문에 이런 현실을 보고서에" 보고한다고 해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10년에 걸쳐 마을 15곳을 조사한 무함마드(2007)는 대출금을 생산적으로 활용한 여성은 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냈다. 대출자 50퍼센트는 자신들의 경제 상황을 개선하지 못하고 여러 곳에서 돈을 빌려 겨우 대출금을 갚았다. 45퍼센트에 달하는 사례에서 여성들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p.35-36)

 

 오늘날 NGO라고 불리는 새로운 행위자는 지역적·국가적·국제적 차원에서 중요한 이해 당사자로 떠올랐다. NGO라는 용어가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1949년 유엔에서지만,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90년대에 와서다. 지지자들은 NGO가 "기업, 정부, 자선단체"에서 가장 좋은 부문만을 합쳐 인도주의적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이라고 한다. 그 결과 NGO는 "특효약"이자 "발전 문제의 만병통치약"으로 떠오르게 된다. NGO의 규모와 집행 능력은 점점 커져 일부 NGO는 "전국적 차원의 사회복지와 채용 시장"에서 중요한 공급자로 떠올라 지역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비판적인 좌파들은 NGO를 결함 있는 발전 모델로 간주했다. (p.44-45)

 

 이러한 내용은 방글라데시에서 두드러지는 사실이다. 방글라데시에서 국가와 NGO는 모두 서구 원조기구에 의존하는 기생적인 구조로 발전해왔다. 정부는 NGO들의 농촌 재건 활동을 지원해 일정 수준의 농촌 발전과 원조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확보했다. 그러나 짧은 기간 안에 원조사회의 원조-전달 요구와 풀뿌리 대변자인 NGO 사이의 이러한 실용적인 파트너십은 복잡한 관계로 변해갔다. 원조기구들은 점점 더 발전기금을 방글라데시로 유입시키는 통로로서 (정부보다는) NGO 분야를 선호하게 된다. 방글라데시 농촌 지역의 NGO들은 마이크로파이낸스, 초등교육, 생식 보건 관리, 태양전지 기술, 도로 건설, 마시는 물, 양어, 삼림 관리, 환경보호, 민주주의 훈련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요 공급자다. 이러한 서비스는 NGO를 자원을 분배하는 유일한 통로일 뿐 아니라 유럽 중심적인 발전 의제가 농촌 사회로 진입하는 경로로 만들었다. (p.45-46)

 

 1980년대 후반부터 마이크로크레디트 모델이 NGO운동의 최전선에 나섰다. 그라민은행이 가난한 고객들을 대상으로 부채 회수에서 거둔 기록적인 성공은 원조사회가 지속가능하다고 강력하게 보증한 시장 모델을 증명해 보였다. 원조에 의존하는 많은 NGO가 의식화 활동을 중단하고 마이크로크레디트 모델을 받아들여야 했다. 마이크로크레디트는 토지와 물을 얻기 위해 농민들을 조직화하는 일보다는 재정 규율과 대출금 회수, 빈민 여성을 재정적으로 자립 가능한 타고난 사업가로 만드는 데 몰두했다. 정치활동에서 금융활동으로 NGO 프로그램이 옮겨가면서 NGO 기업 문화도 재정립됐다. NGO는 이제 신용 있는 농촌 여성뿐 아니라 재정 기록과 예산을 운용하고 금융 책임이 있는 고객을 모으고 유지할 직원을 찾게 됐다. 하셰미는 이런 새 모델에 대해 논하면서 NGO 기업문화의 중요한 변화에 주목했다.

직원을 채용할 때 기존에는 정치활동가를 선호했지만 이제는 대학 학위와 업무 능력을 갖춘 직원을 뽑는다. …… 이전에는 운영도 탈중심화되어 지역의 정치 의제에 따라 무엇을 할지 결정했지만, 이제는 중앙집중화되어 지역에서 집단적으로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지역 직원들은 중앙의 명령에 따라 (교육과 법률구제와 같은) 특정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제 NGO 직원은 공고한 권력 구조에 맞서 농촌 인민을 선동하고 조직하던 열정적인 현장활동가와는 거리가 먼 주체 위치로 전락했다. 하셰미는 사회 변화의 이상적 가치보다 전문성을 강조하는 이런 현상을 NGO 문화의 '패러다임 이동'이라고 불렀다. (p.65-66)

 

 2007년 구호활동은 사유화된 NGO 사업이 되었다. NGO는 관료제의 논리를 따르면서 국가나 원조자 양쪽에서 보기에 능력 있는 구호활동 단위로 등장했다. 홍수 구호는 국가적 캠페인에서 NGO가 운영하고 전문가들을 고용하는 사적 캠페인으로 변했다. 해마다 홍수가 나는 나라에서 농촌 인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NGO인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사이클론 시드르의 피해가 발생했을 때가, 관련 NGO 7,000곳이 활동하는 등 마이크로파이낸스 프로그램이 농촌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시점이라는 것이다. 언론에서 NGO들이 대출금을 강압적으로 회수한다고 보도하자 마침내 정부가 나서 사이클론 시드르 이재민의 연체 금액을 면제해주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형 NGO들(BRAC, ASA, 그라민은행)은 대출금을 일부 탕감해주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러나 마이크로파이낸스 프로그램의 수익률에 기관의 존폐 여부가 달려 있는 많은 중소형 NGO들은 계속해서 이재민들에게 연체금을 받아냈다. 국제구호단체 액션에이드(Action Aid)의 보고서는 NGO들이 대출금을 갚으라고 대출자들을 괴롭혔다고 밝혔다. 이런 행동은 내부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는 NGO의 권력과 비정부 행위자들을 관할권 안으로 끌고 오지 못하는 국가의 실패를 보여준다. (p.86-87)

 

 신용대출과 부채는 동일한 금융제도의 동전의 양면과 같다. 신용은 긍정적으로 이론화되지만, 부채를 진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부채는 사회적 행동을 규제한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부채는 현재와 미래를 한데 묶어버린다. 즉 빚을 지면 채무자의 현재 행위가 미래의 대출금 상환을 결정한다. 부채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지배-종속 관계를 만드는데, 여기에는 금융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가 모두 담겨 있다. 구성원들이 얼굴을 맞대고 사는 공동체에서 채무자와 채권자가 서로 잘 알기 때문에 지배-종속 관계는 더 강화되고, 제때 돈을 갚지 못하면 채무자는 은행에 물질적 자산을 빼앗기는 것 이상으로 명예를 잃게 된다.
 더 중요한 지점은 대출자들이 고립된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마을의 확대 가족 안에서 친족관계로 연결된 주체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삶의 조건에서는 친족관계가 개인, 특히 가족 안에서 여성을 통제한다. 따라서 여성이 신용대출을 받으면 남편이나 친족, 다른 윗사람에게 돈을 내주어야 한다. 대출을 받는 주체로서 여성은 이제 두 가지 형태의 권위―남편/가족과 NGO/대출자 그룹(같은 그룹에 속한 대출자들은 대출금 회수에 연대책임을 진다)―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대출금을 제때 갚지 못하면 친족 집단과 공동체에서 신뢰를 깨뜨리는 일이 되어버린다. (p.92-93)

 

 몇몇 그라민 그룹 모임에 참석한 후 한 젊은 여자가 자기 집에 가보자고 했다. 그라민 관리자는 가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보면 그라민 대출로 얼마나 덕을 많이 봤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가보니 그 집은 양철지붕까지 두른 큰 집이었다. 여자는 대출받은 돈으로 재봉틀을 사서 아이들 옷을 만든다고 했다. 이제 사업이 커져서 도와줄 사람을 고용했다고 했다. 집에는 탁자, 의자, 침대, 선풍기, 옷을 담아두는 철제 캐비닛 등 가구도 구색을 맞춰 갖춰져 있었다. 그라민식 성공의 완벽한 예처럼 보였다.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자 군인이라고 했다. 즉 옷을 만들어 파는 사업이 천천히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남편의 월급으로 주당 상환금을 갚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만난 첫 번째 그라민 성공 사례의 후보는 군대에서 매달 급료를 받는 농촌 중산층이었다. 여자가 대출금을 갚을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수입 덕분이었다.
 그라민은행은 대출자들에게 대출을 받은 다음주부터 돈을 갚게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대출자가 대출금을 투자해 번 돈으로 상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우유를 팔아 돈을 버는 대출자라면 송아지를 사서 우유를 생산하기까지 여섯 달은 걸린다. 농촌에서는 정말 어려운 상황에 처하지 않는 한 젖소를 내다팔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牛)대출을 받은 그라민은행 대출자는 대출을 받은 다음주부터 돈을 갚기 시작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살펴본 군인의 아내처럼 일용직 노동자나 월급을 받는 고용자로 다른 수입이 있지 않는 한 상환은 불가능하다. 이 군인의 아내는 '가난한' 가구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라민은행에 가입하는 것이 급하지도 않은 처지였다. 그런데 이 중산층 여성이 그라민은행의 성공 사례로 전시되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작은 사업을 시작하거나 사치품을 사려고, 혹은 남편의 사업을 확장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NGO에 가입한 농촌 중산층 여성을 수없이 만났다. (p.100-101)

 

 NGO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 가깝게 지내면서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기도 했다. BRAC는 교육센터가 있는 마이멘싱에 시범 마을을 두었다. 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여기저기 다른 마을로 옮겨 다니며 연기를 하는 이동형 마을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외국에서 온 정부 고관들과 서구 원조기구 사람들은 여기로 와서 각본에 짜인 발전을 목격하는 것이다.
 한 전직 NGO 관리자는 원조기구 사람들이 프로젝트 평가 방문을 온다고 하면 시장에 가서 물고기를 사서 연못에 풀어놓는다고 했다. 원조기구 사람들이 오면 NGO 직원들은 연못에 그물을 치고 물고기를 잡아 성공적인 양어장 프로젝트의 증거로 내보인다고 했다. 내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적은 없지만, 국제투명성기구 방글라데시지부의 2006년 보고서는 그런 '발전 연극'이 존재하며 "NGO들은 원조기구들이 현지를 방문하면 NGO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만 말하는 잘 훈련된 수혜자 집단을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역 사람들이 보기에 NGO는 이런 짜여진 연극을 통해서 원조기관을 조종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기관이다. (p.105)

 

 현지조사가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이런 대출금 유통을 파악해보기 위한 설문조사를 해보았다. 설문조사에서 물어본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가입한 NGO 수, NGO에 가입한 횟수, 대출을 받은 목적과 실제로 돈을 쓴 곳, 누가 돈을 어디에 쓸지 정하는가(여성, 남편, 다른 남자 친척), 가입한 NGO 전체에서 빌린 대출금 총액, 연체금 총액, 대출받을 때 개량 종자나 종계 같은 끼워팔기 상품을 사야 했는지 여부, NGO에 추가로 내야 하는 돈이 있었는지 여부, 대출금을 다음 중 어느 범주에 사용했는가(농업, 소규모 상업, 다른 대출금 갚기, 개인적 소비, 사채업, 지참금, 건강, 교육). 설문조사 대상 가계의 지출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 대부분은 돈을 어디에 썼는지 기억할 수 있었다.
 (…)
 설문조사는 내가 벌인 민족지 연구에 대한 추가 연구로, 민족지 연구로 발견한 내용을 확증해주는 동시에 다음 영역에서 데이터를 제공해주었다. 1) 대출금에 대한 책임은 아내에게 있지만 기본적으로 돈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것은 남성이다. 2) 대출금 대부분은 생산 활동에 투자되지 않고 개인 소비에 쓰인다. 3) 새로 받은 대출금은 예전에 받은 빚을 갚는 데 쓰인다. 4) 여러 NGO에 가입한 여성들은 수입보다 훨씬 더 많은 대출을 받았다. 설문 대상 158가구 중 96가구가 전에 진 빚을 갚기 위해 NGO에서 대출을 받는다고 밝혔다. 142가구에서 남편이 돈을 사용하고 10가구는 부부가 함께 사용하며 한 가구는 남자 친척이 결정한다고 했다. 110가구는 여러 NGO에 가입해 있다고 했다. (p.116-117)

 

 성역할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지만 방글라데시 농촌에서는 여전히 고정되어 있다. 여자들은 집 안에서 외간 남자가 나타날 만한 장소에 출입할 수 없다. 남자들은 주로 농사일을 하고 여자들은 보통 집 안에서 하는 이차적인 농사일을 한다. "시장에 관련된 일이나 집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참석하는" 것은 남자의 책임이다. 여자는 아이들과 집안 살림을 돌보는 일을 맡는다. 자녀의 교육, 사업 투자, 병원비 같은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것은 대체로 남자다. (p.122)

 

 나이 든 여성들은 견고한 가부장제 가족 구조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젊은 여성들에게 여자로서의 규범을 지키도록 강요해 자신들의 권위의 권력을 유지한다. 여성의 이동이 제한적인 농촌 사회에서 여성의 행동거지는 세심하게 감시당한다. 가족 중 여성 연장자는 젊은 여자들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가까이에서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규율을 어기는 여자는 즉시 처벌받는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규율이 있음에도 방글라데시 농촌 여성들은 규율을 깨뜨리거나 도전하고 변화시켜 '자유'의 길을 만들어낸다. 밖에 늦게까지 머물고, 읍내와 주변을 돌아다니며, 외간 남자와 말을 섞는 여성들이 있다. 그런 경계를 넘어서는 여성들을 무크 짤루(mukh chalu)라고 부른다. 이 말은 입이 풀린 여자라는 뜻으로 말을 너무 많이 하거나 행동이 너무 앞서간다는 뜻이다. (p.123-124)

 

 농촌 사람들의 수입에 거의 변동이 없는 상황에서 대출금 액수가 늘었다는 점은 상당히 놀랍다. 대출액이 늘어난 것은 2000년대 들어 마이크로파이낸스에 자금이 유입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용 있는' 대출자들이 여러 기관에서 계속 대출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2007년 대출자들 및 NGO 활동가들과 이야기해본 결과, 대출자들은 여러 기관에서 대출을 받아 한 기관에서 받은 대출로 다른 기관에서 빌린 대출금을 갚고 있었고 경제가 어려워지면 이 악순환은 더 심각해졌다. 이들 NGO가 보인 유의미한 행보는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농민이나 상인 같은 중산층 대출자를 더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는 내가 1999년 1차 현지조사에서 그 전조를 알아차린 바이기도 하다. 대출금 액수가 늘어나고 핸드폰, 가공식품, 인터넷 같은 새로운 상품을 내놓으면서 더 여유 있는 계층에 속하는 대출자들을 찾아나선 것이다.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고객을 대상으로 한 금융 서비스를 확대하면서, 이들 NGO는 직업 훈련과 문맹 교육을 중단했는데 이는 빈민 여성들의 시장 협상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p.131-132)

 

 대출금은 보통 100달러에서 200달러 사이며 1년 거치 기간에 고정이율 20퍼센트로 빌려준다(1998년 기준). 1995년 세계은행의 연구에 따르면 그라민은행은 높은 이율 덕에 이미 거의 자립 가능한 수준에 달했다. 그라민은행 대출자들이 실제로 내는 이자는 고정이자 외에도 그룹 회비, 의무 저축, 가입비, 취소 수수료, 개량종 종자를 끼워 파는 농업 대출 등이 포함되어 있어 명목상 이자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 비용을 감안해도 그라민은행의 이자는 120퍼센트에 달하는 농촌지역 사채업자의 이자보다는 훨씬 낮다. 신용발전포럼(CDF, Credit Development Forum) 감독관은 NGO 대출금 중 35퍼센트는 이런저런 명목으로 회원들이 부담하고 있다고 밝혔다. (p.141)

 

 방글라데시 농촌 사회에는 상스런 말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규제하는 것부터 간음을 들춰내 가난한 사람들을 훈육하는 것까지 다양한 형태의 망신 주기가 있다. 공개적인 처벌과 제재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태형, 몸에 송진 붓기, 여성의 머리카락 밀기, 신발로 엮은 목걸이를 목에 걸기, 가족 전체를 마을에서 따돌리기, 그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침 뱉기, 공개적인 모임에서 잘못했다는 표시로 귀를 잡고 있게 하기, 돈을 갚으라며 집을 뜯어가기 등등. NGO 대출자들이 벌이는 망신 주기는 공개적인 언어폭력부터 체불한 여성의 집에 집단으로 찾아가 팔 만한 물건을 가져오기, 소나 염소를 끌어오거나 나무를 땔감으로 자르기까지 다양하다. 극단적인 경우 대출자들이 집단으로 집을 팔아서라도 돈을 갚으라고 하기도 한다. 이 모든 행위는 '유책' 당사자를 고립시키고 공개적으로 모욕감을 주기 위한 것이다. 나는 이를 수치의 경제(economy of shame)라고 부를 것이다. 예전부터 있어온 형태의 망신 주기를 현대적 기관이 전유하는 것을 뜻한다. NGO는 특정한 방향으로 농촌 사람들이 움직이도록 수치의 개념을 통치화해 다양한 형태의 망신 주기를 자신들의 자본주의 복리, 즉 대출금 회수에 주요하게 배치한다. (p.158-159)

 

 보꿀의 집을 나서면서 NGO 직원들의 행동을 전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지 질문해보았다. 방글라데시에는 수백만 명의 보꿀이 있다. 나는 자라면서 다까로 이주해 중산층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보꿀 같은 젊은 여성을 수없이 만났다. 그들이 처한 노동조건은 끔찍했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가난의 시나리오에서 선택지는 무엇인가? 내가 만난 NGO 현장활동가 대부분은 단란한 중산층의 삶을 간절히 바라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일자리가 부족한 방글라데시에서 NGO는 현장활동가들에게 지방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은 삶을 보장해주었다. 종종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 강압적인 (회수) 테크놀로지에 연루되는 복잡한 심경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한 NGO 책임자는 자신들이 마주하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상환금을 제때 내지 못한 여자 집을 찾아간 적이 있어요. 부엌에 들어가 보니 밀가루 5킬로그램짜리 한 부대가 있더라고요. 그걸 팔아서 돈을 갚으라고 했죠. 그 밀가루가 아이들을 먹일 유일한 먹을 것인데도 말이죠. 하지만 그래야만 했어요. 그러고 나서 보니 이제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 회의가 들더군요. 이 사람들을 돕겠다고 일하는 건데 아이들 입 안에 있는 먹을 것까지 빼앗고 있었으니까요. 제일 큰 아이에게 50따까를 쥐어주며 시장에 가서 먹을 것을 좀 사라고 하고 돌아왔어요.

 그 책임자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나요?" (p.200-201)

 

 나는 그에게 왜 조카의 집을 부수는 일에 동참했냐고 물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동정을 구하려고 했다. "선생님이 NGO 활동에 비판적이시니 말씀드리지요. 사람들이 떠나는 건 NGO 때문이에요. NGO가 시골 사람들에게 새로운 욕망을 심어줘요. 밑 빠지게 가난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돈을 얻고 그걸 그냥 다 써버리죠. NGO가 돈을 어떻게 투자하라고 알려주는 일은 없어요. 그저 대출금 회수에만 신경 쓰죠. 그건 그냥 사업이에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는 가난하니까 빚을 탕감해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하지만 NGO 돈을 빌리면 반드시 100퍼센트 다 갚아야만 하죠. NGO가 벌이는 독재는 말도 못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맞서야 할지도 몰라요." (p.208-209)

 

 이슬람 지도자들의 권력은 꾸란, 순나, 하디스를 해석하고, 파트와를 내리며, 꾸란과 샤리아에 따라 농촌 사회를 지도할 수 있는 권위를 바탕으로 한 도덕 권력이다. 이들 권력의 사회적·경제적 토대는 결혼, 이혼, 탄생, 장례, 할례 같은 의식을 주관하고 공동체 안에서 이런 활동을 통해 모은 기부금을 기반으로 한다. 예를 들어 농촌 사람들은 나무에서 처음 딴 과일, 암탉이 처음 낳은 달걀, 첫 수확으로 얻은 쌀을 동네 모스크를 관장하는 이슬람 지도자에게 바쳐 존경심을 표한다. 또한 사춘기도 되지 않은 어린 딸을 나이 든 이슬람 지도자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신앙심 깊은 행동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주요 마드라사에 속한 이슬람 지도자들의 권력은 자신들의 구성 성분인 학생들에게서 나온다. 마드라사 학생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의 가난한 고아들이다.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은 자녀를 마드라사에 보내지 않고 현대적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립학교에 보낸다. 마드라사에 다니는 빈민의 자식이나 고아들은 어리고 예민한 나이에 마드라사에 입학해 이슬람 지도자들을 종교적 지도자이자 부모로 여기며 자란다. 가난한 가족들은 아들 하나를 마드라사에 보내 이슬람 지도자로 기른다. 이 역시 아들이 알라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는 신실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상호적 관계를 통해 자식 하나 키우는 비용을 마드라사에 전가하는 방식으로 가난한 집안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준다는 점이다. (p.235-236)

 

 말하는 사람의 지위에 따라 그 내용의 진실성이 판가름되는 방글라데시의 구술문화에서 깔끔하고 '과학적인' 문서가 '사실'로 출판되는 것은 테크노크라트 지식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NGO들은 뉴스레터, 전단, 잡지, 연구 프로젝트에 관한 연례 보고서, 연구 논문, 도표, 포스터, 비디오를 내놓는다. 이 연구들은 자기지시적이다. 저자는 자신의 연구를 후원하는 발전 정책을 정당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들이 예전에 한 연구를 인용한다. 이런 담론에서 퇴출되는 것은 저자의 삶이다. 연구 논문의 저자는 NGO나 세계은행의 대변인 아니면 원조산업의 컨설턴트인가? 만약 그렇다면 지식 생산을 제한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해의 충돌이 중복되는 문제는 도시지역 연구 공간에서 말해지지 않는다. NGO 프로젝트를 평가하도록 고용된 연구자가 과거에 같은 NGO에서 프리랜서 컨설턴트로 일했던 경우가 자주 나타난다. 방글라데시의 후원-수혜 문화에서 과거의 인연과 NGO 후원자의 호의는 현재 프로젝트 지원금을 보장해준다. 어떻게 누가 지식을 생산하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는 NGO의 사회적 삶에 깊이 관여해야만 접근 가능하다. (p.277-278)

 

 NGO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발전지식을 둘러싼 이러한 헤게모니는 방글라데시의 기능적인 특이성을 통해 벌어진다. 방글라데시에는 서구의 원조를 받는 발전담론이 선호하는 언어인 영어로 글을 쓰는 기초 조사자의 수가 매우 적다. 영어로 교육받은 지역 연구자들의 소수 집단이 발전담론을 지배하고 특정한 전문 영역을 만들어내며 (예를 들면 마이크로파이낸스와 여성의 역량 강화, 재생산 보건과 여성, 환경과 농촌 빈곤 등) 이 영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철저하게 제한되어 있다. 주요 NGO들에게는 홍보와 미디어에 노출되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컨퍼런스를 조직하고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홍보할 반짝이는 전단을 만든다. 세미나와 워크숍, 컨퍼런스는 그런 이미지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공개적인 이미지 메이킹으로 NGO들은 스스로를 도시지역에서 '발전'의 동반자로 재발명해낸다. 이런 세미나들은 외국의 발전경제학자, 컨설턴트, 원조기관의 대변인, 서구에서 공부한 현지 학자들과 위엄 있는 고위직 혹은 퇴직 정부 관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 빈곤 연구에 관한 컨퍼런스들은 원조자, NGO, 영어 교육을 받은 소수의 전문가들 간의 연대를 공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p.279-280)

 

 1998~2005년 그라민 행동계획에서 유누스는 '가난 없는 삶'이란 가난한 사람들이 다음 항목들을 갖춘 세상이라고 정의했다. "1) 양철지붕 집, 2) 모든 가족에게 침대나 아기 침대, 3)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물, 4) 위생적인 화장실, 5) 취학연령 어린이는 모두 학교에 다님, 6) 충분한 겨울옷, 7) 모기장, 8) 채소를 기르는 텃밭, 9) 연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음, 10) 가족 중 성인 모두가 충분한 수입을 얻을 기회가 있음." 이들 항목이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것들로 제시되었다.
 그라민은행은 그라민 대출자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 10개 항목을 이용한다. 그라민은행은 대출자 중 50퍼센트가 가난을 벗어났으며 나머지 50퍼센트는 목표에 가까이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질문지는 사람들이 모기장을 사고 관우물 물을 마시고 야채를 기르고 세 끼를 먹는 등의 능력을 그라민 대출과 일대일로 직접 연결시킨다.
 내 연구 지역에서는 지방자치단체가 빈민 대다수를 대상으로 관우물을 시공해주었기 때문에 안전한 물과 그라민 대출은 아무 상관이 없다. 회원 한 명이 모기장 안에서 자는데 그것이 그라민은행 덕분인지 아닌지를 그라민은행이 어떻게 결정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회원이 가입한 다른 NGO와 다른 수입은 어떠한가? 연구 지역의 그라민 관리자에게 회원이 처음 그라민에 가입할 때 이미 가지고 있는 항목은 제외하는지, 어떻게 이런 변화가 회원의 그라민은행 활동의 직접적인 결과인지 분석하는가 물었더니 그라민은행 직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렇게 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요. 우리는 본부에서 목록을 받아서 매달 목록을 체크합니다." 달리 말하면 회원들이 갖추고 있는 항목들을 직원들이 표시해서 본부로 보내면 본부에서는 그라민과 마이크로파이낸스의 긍정적인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현장에서 올려보낸 자료를 수집, 분석한다. 내 연구 지역에서는 상황이 이러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3장에서 살펴봤듯이 현장활동가들은 일상 업무만으로도 격무에 시달리고 있어 저 자료를 입증하는 데 따로 시간을 쓸 가능성은 별로 없다. (p.287-288)

 

 현지조사 기간이 끝나갈 즈음 나는 한 저명한 방글라데시 경제학자를 인터뷰했다. 한 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 경제학자는 내가 연구하며 발견한 내용에 대해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국내에서 가장 저명한 경제학자를 자임하는 그의 가부장적 측면과, 인류학자이고 여자인 나는 시시한 연구나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그 무관심이 우려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학자로서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그라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내가 남자들이 대출금을 쓰고 여성들은 집 안팎에서 가중되는 폭력과 마주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는 내 지적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나를 설득하려면 더 탄탄한 자료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무엇이 "더 탄탄한 자료"인지 어떻게 그런 "탄탄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민족지보다는 특정한 형태의 통계 연구―전형적으로 많은 수치를 처리하는 연구자가 그 예가 될 것이다―를 선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행동은 방글라데시 현지 NGO 문화에 속한 많은 학자들의 행동을 반영했다. (p.295-296)

 

 수도 다까는 마이크로파이낸스를 연구하기에 전형적인 장소다. 인구 1,000만이 사는 이 도시에서는 마이크로파이낸스에 관한 세미나가 끊이지 않는다. 다까에 갈 때마다 새로운 마이크로파이낸스 관련 컨퍼런스가 열려서 이런 컨퍼런스들이 다까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과연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이 세미나들에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 수많은 컨퍼런스의 주제는 빈민이다. 그러나 빈민은 단지 퍼센트, 그래프, 도표로만 나타나며 어떤 결말을 위한 수단으로만 기능하는데 그 결말이란 빈곤 연구자들과 NGO에 재정 지원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소수의 비싼 컨설턴트와 발전 연구자들이 방글라데시 현지의 빈곤 연구 현장을 좌우했다. 그들 대부분은 BIDS와 연관된 경제학자들이었다. 다까의 유일한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열리는 초대장 소지자만 입장 가능한 권위 있는 세미나는, 이 폐쇄적인 집단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만나기 어려운 학자들과 안면을 트기 위해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다. 그런 빈곤 세미나장의 복도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누가 가장 권위 있는 빈곤 연구 계약을 따내고 컨설턴트 비용은 얼마이며 누가 다음번 해외 유엔 컨퍼런스에 참석하며 누가 유엔개발계획(UNDP), 미국국제개발처(USAID), DFID, CIDA. SIDA, DAINDA 아니면 세계은행에 들어가고 나왔는지, 누가 컨설턴트가 필요한지 등등에 관한 것이다. (p.300-301)

 

 객석에서 질문을 받기 시작하자 청중들은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반응은 적극적이고 비판적이었다. 첫 번째 질문자는 분노한 퇴직 의사였는데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토론이 진행될 줄 알았다며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이 고향 마을에 자주 간다고 덧붙였다. 그가 겪어보니 그라민에 가입하고 몇 년 지나면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전보다 더 가난해져 갔다. 그가 계산해보니 그라민은행이 부과하는 이자는 50퍼센트를 넘고도 남았다. 그는 발표자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우리가 따라야 할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렇게 높은 이자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가? 발표자들은 아무도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발표자들에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퇴직 의사는 그 자리를 떠났다.
 (…)
 몇몇 사람들도 자기고용을 경제성장의 엔진으로 만드는 것의 효용성에 대해 질문했다. 누가 농촌 여성들이 생산해낸 계란, 닭, 튀긴 쌀, 부채 등을 살 것인가? 살 사람은 많지 않은데 너무 많은 여성들이 너무 많은 제품을 생산하면 가격만 내려가고 이문이 줄어든다는 것이 드러났다. 내가 여성들에게 너무 높은 이율을 부과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자 한 은퇴한 은행가가 말했다. "저분은 미국에 살고 신용카드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신용 거래를 못할 이유가 있나요?" 여기서 간과한 것은 미국 소비자들에게는 파산법과 법적 보호 장치가 있지만 방글라데시에서는 NGO가 연체한 여성들을 경찰과 법정으로 끌고 간다는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발표자들이 '유누스노믹스'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통과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반응은 비판적이었다. 분위기가 달라지자 발표자들은 유누스 교수가 자신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시자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유누스가 기여한 것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기본 교리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p.304-305)

 

 유누스 교수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자신이 수년 전 빈민을 대상으로 "신용대출이 가능"하다고 봤듯이, 다국적기업들도 빈민을 상품 판매가 가능한 미개척 시장으로 보라고 요청했다. 그라민은행이 빈민을 대상으로 한 "신용대출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보자 마이크로파이낸스 기획에 수백만이 몰려들었다. 자본과 이타주의가 합쳐진 혁신적 모델인 사회적기업은 다국적기업이 지역 경제로 진입해 발전도상국에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장악할 수 있는 진로가 된다. 그러나 그라민다농의 샥띠도이 마케팅은 사회적으로 재고해야 할 심각한 문제들을 보여준다. 첫째, 왜 쌀을 사기도 버거운 형편인 부모들에게 단맛 나는 요구르트를 파는가? 정말로 이 상품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마찬가지로 그라민보건의료와 아프리카 및 인도에서 정수 사업을 해온 프랑스 회사 베올리아사의 합작사업도 비슷한 우려를 낳는다. 이들의 사업 구상은 방글라데시 농촌 사람들에게 최저 가격으로 무비소 생수를 판매한다는 것이다. 방글라데시의 지하수 60퍼센트는 비소에 오염된 물이다. 델타 지역에서 비소에 오염된 물은 심각한 보건문제로 떠올랐고 방글라데시 국민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 있다. 물은 공공재이므로 방글라데시의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도시에는 비소에 오염되지 않는 수돗물이 있다. 그렇다면 해결책이 생수 판매여야 하는가? 아니면 농촌지역에도 비소를 제거한 물을 공급하려는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어야 하는가?
 질문은 무엇이 무상이고 무엇이 아닌지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이다. 필수재를 포함한 모든 것에 가격표가 붙은 세상을 만들어서 돈 주고 사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부를 뽑아내야 하는가? 중산층은 관우물 물 말고 생수를 사 마실 만한 수입이 있다. 이런 미개척된 중산층 시장이 바로 베올리아의 관심 대상이다. 궁극적으로 다농과 베올리아는 현재의 시장 영역 너머에 있는 새로운 시장―빈민 대상이 아니더라도 발전도상국의 중산층 시장을 찾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낙숫물이 떨어진다면 사회적기업의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다. (p.316-317)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이제껏 없었는가? / 린다 노클린 / 전기가오리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이제껏 없었는가?'가 함의하는 것을 진정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관한 우리의 의식이, 중요한 물음들이 제시되는 방식에 의해 어느 정도로 조정되는지를―그리고 종종 왜곡되는지를―깨닫게 된다. 우리는 동아시아 문제, 빈곤 문제, 흑인 문제, 무엇보다도 여성 문제가 실재한다는 점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선 우리는 이 '문제들'을 누가 정식화하는지를 물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그렇게 만들어진 정식이 어떤 목적에 기여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나치가 제기한 '유대인 문제'의 내포와 얽힌 기억을 상기해볼 수 있다.) 즉각적 의사소통의 시대에, 권력 집단의 비(非)양심을 합리화하고자 '문제들'은 재빨리 정식화된다. 이를테면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미국인이 제기한 문제는 미국인에 의해 '동아시아 문제'로 언급된다. 동아시아인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이것이 더 현실에 가까울 텐데―'미국 문제'가 되겠다. 이른바 빈곤 문제도 도시 빈민가나 지방 불모지에 사는 거류민에게는 '부의 문제'로 간주되겠다. 같은 아이러니가 백인 문제를 그 반대인 흑인 문제로 왜곡한다. 우리가 현재 처한 사태를 '여성 문제'로 정식화하는 데서도 이 역(逆) 논법이 나타난다. (p.11-12)

 

 특권을 가진 이들은 반드시 그 특권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로 얻는 이득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어떤 종류의 더 우월한 힘에 강제로 복종하게 될 때까지 그 특권을 꽉 붙든다.
 그리하여 미술에서든 다른 분야에서든, 여성의 평등에 관한 문제는 개별 남성의 선의나 적의, 자신감이나 비굴함과 무관하다. 이 문제는 제도적 구조 자체의 본성 및 그 제도적 구조의 일부분인 인간에게 제도적 구조가 강제하는 현실관과 유관하다. 100년도 더 전에 존 스튜어트 밀이 짚었듯, "보통의 모든 것은 자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예속은 보편적 관습이며, 이 관습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은 자연스레 부자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토록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자연적' 질서를 선뜻 포기하기는 평등을 입에 담기만 하는 대부분의 남성에게 어려운 일이다. 밀이 통찰력 있게 지적하듯 다른 피지배 집단이나 계층과 달리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복종뿐 아니라 무조건적인 애정도 요구받으며, 이로 말미암아 여성의 사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리하여 남성 지배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내면화한 탓에, 그리고 물질적 재화와 편리의 과잉 탓에 여성은 더욱 취약해진다. 즉, 중산층 여성은 족쇄를 끊으면 잃을 것이 많아졌다. (p.14-15)

 

 여성이 미술보다는 문학에서 훨씬 더 평등하게 남성과 경쟁할 수 있던, 심지어 독창적일 수 있던 이유가 확연해진다. 미술 창작에서는 집 바깥의 제도적 환경 속에서 특정한 순서로, 특정한 기술을 배우고 도상과 주제에 관한 특정 어휘와 친숙해지는 것이 전통적으로 요구된 데 반해, 이와 같은 요구가 시인이나 소설가에게는 전혀 가해지지 않았다. 그 누구든―여성 역시―언어를 배워야 하고, 읽고 쓰는 법을 익힐 수 있으며, 자신의 방에서 홀로 앉아 개인적 경험을 종이에 남길 수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좋은 내지 위대한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데 수반하는 어려움과 복잡함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비교는 브론테나 디킨슨은 존재하지만 시각 예술에서 그에 대응할 만한 작가가 최근까지도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단서가 될 수 있다. (p.31)

 

 동물의 골격을 연구하는 데 자신을 아끼지 않고, 가장 불쾌한 환경 속에서도 소와 말이라는 작업 대상을 성실하게 좇고, 긴 커리어 동안 꾸준히 인기 있는 그림을 그려내며, 굳건하고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명백하게 남성적인 표현 양식을 선보이면서, 파리 살롱의 첫 메달을 따낸 미술가이자 레지옹 도뇌르 훈장 장교이자 이사벨 여왕 십자문화대훈장(Order of Isabella the Catholic) 및 벨기에 레오폴드 연맹(Order of Leopold)의 사령관이며, 빅토리아 여왕의 친구이기도 한, 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가가, 늦은 나이에, 그 이유가 어쨌든 간에, 남성적 방식에 대한 자신의 완전하게 합리적인 가정을 정당화하고 제한하라는 강요를 받는 것은, 바지를 입은 그리 정숙하지 않은 여성을 자기 마음이 요구하는 바에 맞추어 비난해야 한다고 느낀 것은, 어찌 보면 안타깝기까지 하다. '여성적인' 여성이 아니라는 점은 보뇌르가 아버지의 지원을 받았고, 비(非)관습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보뇌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이미 어려운데, 여성 미술가에게는 이런 요구로 인해 어려움이 계속해서 부가된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네벨슨(Louise Nevelson)은 자신이 작품에 '비(非)여성적'으로 전념한다고 말하면서도 눈에 띄게 '여성적인' 인조 속눈썹을 붙이고 있다. 미술 창작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고 확신했지만 "결혼은 해야 한다고 모두가 말해서" 17살에 결혼한 것은 또 어떤가? 이 두 뛰어난 미술가의 사례에서도―〈말 시장〉을 좋아하든 않든 로자 보뇌르의 직업적 성취는 존경할 만하다―여성성의 신화, 그리고 그에 담긴 자기애와 죄책감의 잡탕은 내면화되어, 가장 높은 수준의 독창적인 미술작품을 창작하는 데 요구되는 내적 대담함을, 그리고―도덕적 측면과 미적 측면에서의―절대적인 확신과 자기 결정을 서서히 약화시키다가 종국에는 무너트린다. (p.5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