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도시, 서울 / 이혜미 / 글항아리
지·옥·고(지하방·옥탑방·고시원). 주거 비용은 나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고, 양극화와 저성장에 도시에서 '도태'되어버린 이들이 근근이 먹고 자는 것만 해결하며 살아가는 곳. 불황에 일자리가 없어 노숙 위기에 내몰린 저임금 일용직 노동자와 독거노인 등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옥고로 들어갔다. 5년마다 이뤄지는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2005년 '주택 이외의 거처'에 사는 이들이 오피스텔을 제외하고 5만 가구였다. 증가세는 가팔랐다. 2010년에 13만 가구로 늘고, 2015년엔 39만 가구로 늘었다. 그 중심에는 사법고시 폐지 등을 계기로 학생과 고시생이 빠져나간 후 저소득층 단신 생활자의 새 보금자리가 된 '고시원'이 있다. 이제 고시원에서 홀로 사는 중년을 보는 것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징글징글하게도 그가 국일고시원을 떠나 임시로 짐을 푼 곳 역시 인근의 월 40만 원짜리 고시원이었다. 생존자 중에서도 월세 앞자리 숫자 '4'를 감당할 수 있는 이는 손에 꼽힐 정도다. '현대판 쪽방'이라 불리는 고시원은 그에게 어떤 공간일까.
"고시원요? 세상의 바닥이에요. 이 고시원엔 노숙자 가기 일보 직전인 나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어요. 불났을 때도 짐이 없으니 몸뚱어리만 나온 사람이 태반이었죠."
2019년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극단적 빈민이 최저 실존을 위해 몸 누일 공간 '한 쪽'을 얻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들의 '가난해서貧' '괴로운困' 상황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고, 착취에 가까운 임대업으로 부의 첨탑을 쌓아가고 있다. 이른바 '빈곤貧困 비즈니스'다.
놀랍게도 우리 법은 인간이 존엄하게 일상을 영위할 최소한의 충분조건으로 '최저 주거 기준'이라는 것을 두고 있다. '14제곱미터(약 4.24평)의 면적, 부엌, 전용 화장실과 목욕 시설'은 주거기본법상 1인 가구의 최저 주거 기준이다. 2015년 제정된 이 법은 "물리적·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쾌적하고 안정적인 주거 환경에서 인간다운 주거생활을 할 권리를 갖는다"라며 국민의 주거권을 처음으로 법 테두리 안으로 들였다. 그저 바닥에 등을 누일 수 있고, 눈과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나 너무나도 청신하고 존엄한 이 문장은 오늘날 주거 피라미드 가장 아래에 놓인 쪽방엔 닿지 않는다.
'최후의 주거 전선' 쪽방 앞에서 최저 주거 기준은 무력하다. 집이 아닌 비주택으로 분류되는 쪽방은 법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제대로 된 정의조차 없다. '쪽방'이라는 분류는 국가 통계 등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는 필요할 때마다 쪽방을 그때그때 정의하는 식이다. '일정한 보증금 없이 월세 또는 일세를 지불하며 0.5~2평(1.65~6.61제곱미터) 내외의 면적으로 취사실·세면실·화장실 등이 적절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주거공간'이라는 보건복지부의 표현이 그나마 구체적인 정의다.
쪽방이 없어지면 다 해결되는 문제일까? 아니,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쪽방은 없어져야 하는 걸까? 한 발짝만 물러서면 거리로 내몰릴 주거 난민들에게 쪽방은, 그러나 노숙을 막아줄 '방파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보증금 없이 일세로도 살 수 있는 쪽방은 동시에 거리 노숙을 막는 자원으로 활용되는 게 사실입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는 쪽방과 비슷한 주거자원인 SRO(single room occupancy)가 대거 철거되자 홈리스 인구가 크게 증가했어요." (김선미 서울 성북주거복지센터장)
도시의 주거 비용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이제는 그 쪽방이 부족해 '현대판 쪽방'이라 불리는 고시원까지 가세했다. 판잣집, 비닐하우스, 달방(여관·여인숙의 월세방), 고시원, 쪽방 등 비주택에 사는 인구 역시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다. 2015년 기준 비주택에 거주하는 가구 수는 39만 3792가구. 10년 전인 2005년 5만 7066가구에 비해 무려 7배 가까이 폭증했다. 이 가운데 81.9퍼센트는 쪽방과 고시원에 사는 이들로 추정된다.
중요한 건 '장면'이 아닌 '구조'였다. 왜 이 고민을 선행하지 못한 채 나는 글을 쓰고 있나. 놀랍고, 경악스럽고, 괴롭고, 막막한 온갖 감정이 내면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결정적으로 이런 생태계는 오래 산 사람이 아니고서야 눈치채기 힘들고, 내부 사람이 아니고서야 문제로 드러나기도 쉽지 않았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쪽방은 개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겨우 한 사람 누울 수 있는 공간은 보일러도 없어 난방이 되지 않았다. 공동수도에서는 냉수만 쏟아졌다. 타지에 사는 건물주는 안전 관리는커녕 기본적인 수선 의무도 다하지 않아, 행정 당국에서 세금을 들여 땜질식 수리를 해주고 인근 교회나 쪽방상담소에서 뻗는 온정의 손길로 어설프게 사람이 사는 거처의 형상을 갖춰가는 곳. 이런 곳에서 세입자는 노숙을 겨우 면한 대가로 매달 22만 8188원(서울시 평균)을 세로 낸다. 폐가에 가까운 건물의 수리는 당국의 세금으로 하고, 세입자에게 받는 면적 대비 월세는 강남 타워팰리스 월세의 수배에 이르는 쪽방, 그 이면에서는 세를 모은 건물주들이 빌딩을 세우고도 남을 부를 증식하는 이 황당한 상황이 창신동만의 사례는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연말 송년회 겸 모인 식사 자리에서 한 시민단체 관계자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얼마 전 ◯◯구의 높은 사람을 만났는데, 쪽방촌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대단하더라고요. 쪽방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한 재력가인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주민들을 위해 지자체가 뭘 하려고 하면 그렇게 민원을 넣고 결사반대한대요.
시청이 시설 지으려고 건물을 사려고 하면 알박기를 해서 방해하질 않나. 구청이 국일고시원처럼 불나고 사람들이 떼로 죽을까봐, 안전 설비를 갖추라고 하면 모르쇠로 일관한다나 봐요. 그렇다고 구청이 '고치라'고 세게 나가면 이게 또 압력이 돼서 세입자들이 쫓겨날 수도 있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구청이 소화기 설치해주고, 고장난 곳은 고쳐주고 그러는데 답답한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래요. 결국 우리 세금이 다 집주인에게로 흘러 남 좋은 일만 시키는 형국이잖아요. 사석에서 그분은 '정말 다 밀어버려야 한다'고까지 말하더라니까요."
창신동 쪽방촌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입에 담지도 않았는데, 여러 인사가 비슷한 고민거리를 갖고 있다는 걸 우연찮게 알게 된 날. 이건 '창신동'만의 이야기가 아닌 쪽방촌 전체의 문제, 아니 빈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곪디곪은 문제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왕 도려낼 것이라면, 환부를 싹 다 도려내야 했다. 무엇보다 집주인 개개인을 탓하는 게 아니라, 가장 내몰린 이들의 빈곤마저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하는 약탈적 자본주의와 이를 용인하는 우리 사회 분위기에 경종을 울려야 했다.
'빈곤 비즈니스.'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되,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닌, '빈곤을 고착화'하는 산업. 가뜩이나 돈 없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해, 마땅한 노력 없이 불로소득으로 폭리를 취하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에만 관심을 보이는 행태. 세계 금융위기로 타격을 입은 일본에서 도드라졌던 대표적인 불황형 경제 범죄가 2019년 한국 쪽방촌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이동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쪽방과 고시원이 노숙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그물'이자, 노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발판'으로 기능하는 측면이 있다"며 쪽방의 기능을 일부 긍정했다.
"홈리스가 거리에서 바로 임대주택을 신청할 수 있을까요? 우리 행정 체계상 주소지가 없으면 임대주택 입주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은 삶'으로 상향하고자 주소지를 얻기 위해서라도 홈리스들은 쪽방에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문제는 쪽방을 이용한 약탈적 임대 행위다.
"저는 쪽방 자체의 기능을 부정하진 않아요. 문제는 지금의 쪽방촌이 사람이 살 만한 주거 환경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노숙에 내몰릴 처지를 이용해 불법 수익을 얻는 건물주들의 약탈적 임대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절대 약자인 주민들은 건물주나 관리인의 '나가라'는 한마디에 쫓겨나는 주거 불안에 계속 시달리고 있고요. 상황이 이런데도 이젠 쪽방마저 부족해 요즘은 고시원에 사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어요."
쪽방이 부족해 고시원이 넘쳐나는 세상, 2019년 대한민국 서울.
2019년 4월, 영등포 쪽방촌에서 일어나는 '빈곤 비즈니스'에 대해 말해주겠다던 이씨는 한사코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은 떨어진 곳에서 기자를 만나야겠다고 했다. 워낙 소문이 잽싼 동네라, 조금 먼 곳에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자전거를 타고 영등포구 내 한 카페에서 만난 이씨는 "올해만 해도 영등포 쪽방촌에서 5명이 죽어나갔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지명과 번지수까지 말하면서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온갖 불법과 폭력에 대해 낱낱이 폭로했다.
"261-1번지가 가장 악랄해요. 이 집은 주인이 같이 사는데, 그 사람이 실제 소유주인지 관리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예전엔 그 건물에 장애인이 3명 정도 살았거든요. 기초생활수급비를 받는 사람들이었는데, 매달 20일인가, 그쯤 되면 통장에 또박또박 장애인 연금, 주거급여, 기초생활수급비 이런 것들이 한 달에 110만 원 정도가 들어오나 보더라고요. 장애인들의 통장을 빼앗아뒀다가, 수급날만 되면 '돈 찾으러 가자'며 은행에 데리고 가서 그 돈을 싹 빼요. 그러고선 '이건 방세' '이건 공과금' '이건 밥값' 이러면서 한 10만 원쯤 돌려줘요. 그런 사람이 영등포 쪽방촌에 제가 아는 것만 해도 두 명이에요. 자세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이씨는 구체적으로 지도를 그리면서까지 어떤 집에서 일어났던 일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며칠 뒤 관할 주민센터에 가서 담당 공무원에게 확인한 것도 이와 다를 바 없었지만, 공무원은 "수급비 강탈이 드러나지만 않을 뿐, 이런 동네에선 비일비재한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물론 모든 집주인이 나쁘다고 볼 수는 없겠죠. 하지만 제가 본 대부분의 집주인은 쪽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방세만 받으면 된다'는 심리가 강했어요. 273-1번지 집에는 쪽방이 30개 정도 있거든요. 20만 원짜리가 대여섯 개 있고, 나머지는 25만 원이에요. 그 집은 전기세나 수도세도 별도로 받거든요. 그럼 얼추 계산해도 700만 원을 버는 거잖아요. 집에 물이 새면 사는 사람들이 다 고쳐요. 일반적으로 월세는 주인이 고쳐주고, 전세는 자잘한 것만 세입자들이 고쳐 쓰는데, 이건 원 쪽방 사람들이 물 새는 것까지 고쳐 써야 하니."
영등포 쪽방촌에서도 '빈곤 비즈니스'는 반복되고 있었다. 한 발짝 헛디뎠다간 노숙 신세로 전락하는 극빈층의 취약한 지위를 이용해 임대인(정식 임대사업자 등록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표준임대차계약에 의한 임대가 아니라서 대부분 국가가 파악할 수 없는 형태로 쪽방 임대업이 이뤄지고 있다)으로서의 의무를 내팽개쳤다. 세상에 쫓겨나는 것보다 더 큰 공포가 없는 쪽방 주민들은 법적으로 부여된 '주거권'을 주장하지도 못하고, 입도 벙긋 못 한 채 울며 겨자 먹기로 알아서 고치는 법을 택한다.
쪽방촌 주민 가운데 4명 중 1명(27퍼센트)은 최근 1년 동안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했다. 가난하고 병들어 소비를 하고 노동할 쓸모가 없으면 구조에 부담이 되는 비용으로 바라보는 사회에서 이들이 건강한 심리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안전망이 되어주는 '관계'라도 있으면 절망에 빠졌을 때 누군가 건져내 줄 수 있으련만, 쪽방촌 주민 가운데 75.5퍼센트가 '가족 중 연락할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다. 지난 1년 동안 쪽방촌에 사는 자신을 방문한 가족이나 친지가 전혀 없는 비율도 61.1퍼센트에 달했다.
그 역시 쪽방촌에서 맞닥뜨린 친구의 죽음에 정서적으로 동요되고, 극단적 고민을 했던 순간이 있다고 털어놨다.
"쪽방에 살면서도 함께 봉사활동을 다녔던 친구가 5년 전 화장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어요. 한참 자활활동을 함께 다녔는데, 집에서 나올 시간이 됐는데도 소식이 없는 거예요. 방에 갔는데도 사람이 없어서, 화장실을 뒤져보니 거기서 죽어 있는 거예요.
참 불쌍한 친구예요. 어릴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어버려서 가난을 전전하다가 20년 만에 부모를 찾았거든요. 누나랑 동생과 연락이 닿아서 만났고, 그해 설날 어머니께 세배드리러 갈 거라며 굉장히 들떠 있었어요. 겨우 가족을 찾았는데 쪽방에 사는 모습을 부끄러워할까봐 유독 그해 자활 훈련에 열심히 참여했다고요. 결국 친구는 어머니를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어요. 그 어머니가 장례식장에서 어찌나 우시던지.
웬만한 일에는 이골이 난 저도, 그 친구의 죽음 이후에는 한 달 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쪽방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세상 사람들은 쪽방 사람들이 그곳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가난을 견뎌야만 한다고 말하죠. 그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는 게 형벌 같다'며 그가 울먹였다.
그래도 이씨의 사정은 개중 나은 편이라고 한다. 눈으로 명백하게 보이는 장애가 있어 장애 1급 인정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쪽방 주민 중 '장애가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2018년 기준 29.7퍼센트. 그러나 이 가운데 '등록되지 않은' 장애인의 비율은 31.7퍼센트로 3분의 1이나 된다. '미등록 장애인'의 경우 장애연금 등 기초적인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해 사각지대에 놓인다.
"저는 활동보조인이 매일 와 반찬을 만들어주시는데 미등록 상태 주민들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 생활이 전혀 이뤄지지 않아요. 3년 전쯤 이사 온 이웃만 해도, 뇌를 다쳐 혼자서는 정상 거동도, 생활도, 판단도 불가능한데 거리 생활을 너무 오래해 병원 치료 같은 근거 자료가 없어 장애 등록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이런 모든 삶이 우리가 방치해도 좋은가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여성 노숙인은 노숙인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중의 구별짓기에 처한다. 안정적인 자리에서 잠을 청하기 어려워 도심을 배회하다가 낮에 지하철에서 쪽잠을 자거나, 목욕탕이나 기도원에서 무상 노동을 제공하고 잘 곳을 확보한다. 이동현 활동가는 "워낙 길거리 생활이 어렵다 보니 여성 노숙인이 쪽방에 들어가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며 "대부분 노숙인 시설행을 택한다"고 말했다.
"쪽방은 세를 놓는 거고 건물주들은 부자 동네 가서 살죠. 솔직히 원룸처럼 시설을 잘해놓은 것도 아닌데 월세를 그렇게 받는 건 폭리를 취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화장실도 없고, 주방도 없는 쪽방이 태반인데 이론적으로 따지면 월세 5만 원만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1평에 25만 원 수준이면 웬만한 아파트 평당 월세의 다섯 배는 될걸요."
"남대문 쪽에서 여든 넘은 사람도 쪽방을 하려고 알아보더라니까요. 여든 몇 살 돼서 한 달에 몇백 벌 수 있는 일이 어디 있어요? 그것도 현금으로 받으니까 세금도 없이, 거기다 노인연금도 따박따박 받고."
오히려 오랫동안 쪽방 영업을 하던 이들은 '재개발'을 원하지 않는다는 분석을 내놓는 부동산 중개업소도 있었다.
"월세를 400만~500만 받는 주인들은 오히려 재개발을 원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요. 이번에도 여기 조합 같은 게 생겼는데, 안 하려고 해요. 수익이 없어지니까요. 오히려 알박기하려고 사놓고, 월세로 이자 충당하는, 그러니까 전형적인 투자자들은 재개발되는 게 훨씬 낫죠. 계산기 두드리는 거죠. 아파트 들어서는 게 나을지, 쪽방으로 쓰는 게 나을지."
"돈 있는 게 죄야? 있는 사람들이 이걸 좀 빌려주겠다는데, 쪽방 없어지면 이 사람들 다 없어지는데. 네가 월세라도 대줄 거냐고."
본인도 세입자면서 건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최씨였다. 나는 토지나 건물 등 부동산으로 경제적 이익을 뽑아낼 권리 이전에,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주거권이 우선한다고 생각한다. 집을 임대해서 최대한 많은 돈을 버는 권리보다 사람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권리를 채택하는 세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생에 운이 특별히 좋지 못한 이들을 대상으로 폭리에 가까운 임대업을 하는 것은 '또 다른 권리'가 아니다.
"그래서 보일러도 없이 월세 25만 원씩 따박따박 받는 게 옳다는 말씀이에요? 적어도 사람이 살 정도는 제공해야 할 거 아니에요."
"노숙인 보호시설에 있었는데, 이렇게 살다가는 인생을 망칠 것 같더라고요. 1년 전쯤부터 종로구 창신동 쪽방촌에서 살고 있긴 한데, 방을 구하러 다닐 때 참 기가 막혔어요. '샤워실도 없는데 이런 곳에 어떻게 사느냐'고 했더니 관리인이 '싫으면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저 말고도 들어올 사람은 많다는 거죠. 시청이나 구청이 쪽방촌에 공동생활 시설을 지어주고 호의를 베푸니 오히려 건물주들이 세입자들 요구에 '배 째라'는 식이에요."
평균적으로 월세 22만 8188원을 낸다고 하기엔 터무니없이 열악한 쪽방의 사정을 쏟아냈다. 건물주가 방문을 달아주지 않아 한겨울에도 방풍 비닐에 기대 지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터져 나왔다. 수도관이 동파되어 야외 철제 계단이 빙판이 되었지만, 집주인과 연락이 닿지 않아 얼어붙은 계단을 겨우내 내려오지 못했다는 2층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인간성 상실이 서울 한복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에 분개했다.
"여기 주민들이 대부분 50~70대예요. 각자의 사연과 지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데, 가진 것 없고 초라한 이들을 착취하는 건물주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기사를 보고 참 반가웠어요. 서울시가 나서서 그런 속 시원한 정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기자님이 계속 힘 좀 써주세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생각하질 못해요. 먹고살기가 힘드니까, 그냥 김치 주고 쌀 주고 하면 좋아하니까요. 동네 사람들은 그 기사를 싫어할 수밖에 없지. 아가씨가 왜 그렇게 썼는지도 나는 이해해요. 다 지난 일이고, 쪽방촌 사람들은 하루 지나면 다 까먹어버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는 오히려 기자를 위로했다.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 나는 한 사람의 총기와 통찰력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하게 됐다. 박씨는 '무학無學'이다. 현명하다는 건 학력이 높고 사회에서 번듯한 지위를 가져야만 갖출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박씨의 이 문장에, 학력과 관계없이 개인은 잠재력이 있고 세상에 대한 인식은 계속해서 확장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박씨를 1.5평 쪽방에 20년 동안 가둬버린 것은 우리 사회의 잘못이자 손실이다. 2018년 11월 11일 저녁, 창신동 쪽방촌에서 박씨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인생에 몇 없을 행운이었다.
2018년,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아파트에서는 청년 임대주택(역세권 2030 청년주택)을 '빈민아파트'라 폄훼한 안내문이 하나 붙었다. 아파트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비상대책위원회가 청년 임대주택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⑴ 아파트 가격 폭락 ⑵ 연약 지반 ⑶ 교통 혼잡 ⑷ 일조권, 조망권, 주변 환경 훼손 ⑸ 빈민지역 슬럼화로 범죄 및 우범지역 등 이미지 손상 ⑹ 아동 청소년 문제, 불량 우범지역화 ⑺ 보육권, 교육 취약지역화 등. 아직 삽을 뜨지도 않은 건물에 입주할 청년들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이들은 너무 쉽게 '잠재적 범죄자' '방탕한 청춘' 등으로 대상화됐다.
원룸에, 고시원에, 반지하방에, 옥탑방에 마치 달걀 상자에 달걀이 하나씩만 들어 있는 것처럼 분자화, 원자화돼버린 청년들의 목소리는 고출력 앰프를 끼고 있는 듯한 '비상대책위'의 외침에 가려 들리지 않는다. 이런 일은 어떤 대학가, 어떤 지역을 둘러봐도 반복된다. 2013년 고려대 기숙사 반대, 2015~2017년 한양대 기숙사 반대, 2016년 성북구 동소문동 행복기숙사 반대…….
한 층에 복도가 있고 이를 기준으로 일고여덟 가구가 교도소처럼 줄지어 있는 형태는 아무리 봐도 최근의 경향인 듯싶었다. 게다가 사전 조사 차원에서 들여다본 온라인 방 구하기 카페에는 '미니 원룸' '초미니 원룸'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뭐야, 원룸이 미니인데 '미니 원룸'은 무슨 괴상한 동어 반복이야.' 그러나 농담으로 여길 게 아니었다.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외관의 우편함과 계량기를 기입하며 '미니 원룸'은 타당성 있는 조어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건축가들은 임대료를 극대화하려는 건물주의 이기심이 극에 달했다고 진단한다.
"방 쪼개기를 하면서 화장실 벽 두께마저 줄이느라 고시원처럼 유리벽으로 설치하기도 해요. 벽돌 한 장 폭까지도 아끼는 거죠."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원룸, 오피스텔 기준의 가장 작은 면적이 23.1제곱미터(7평)였지만 1인 가구 최저 주거 기준 14제곱미터(4.2평)보다 더 작은 12제곱미터(3.6평)까지 만들고 있어요. 그럼에도 싱크대와 냉장고, 인덕션 등 풀옵션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월세를 높이고요."
청년의 요구가 징징거림으로 치환되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경구가 살아가는 내내 울려대는 세상이다. 젊음은 온갖 착취와 악조건도 극복해내는 만능 약이라도 되는가. 주거기본법상 최저 주거 기준이나 각종 규제는 건물주의 탐욕 앞에서 무기력하다.
"과거에는 이렇게까지 잔인한 방식으로 착취하진 않았어요. 사회가 이렇다 보니 결국 청년들이 '못 살겠다'며 저출생 등으로 반응하고 있잖아요.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서울 지역 청년 주거빈곤율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상황이 연쇄적으로 이어질 겁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
"'민달팽이 유니온'은 대학생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매년 실태 조사를 벌여요. 그런데 최근 들어 주관식 답변에 '청년 피 빨아먹는 임대업자' 같은 표현이 출현하는 빈도가 잦아졌어요. 저는 청년 세대의 분노가 어느 임계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청년들의 주거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최지희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
기숙사는 늘 부족했다. 전체 대학 정원을 10명이라 봤을 때, 서울의 대학은 겨우 1명밖에 수용할 수 없는 실정이다. 대학 정원 감축 정책에 국내 학생은 차츰 줄어갔지만, 돈벌이에 혈안이 된 대학은 대안 없이 외국인 유학생들을 늘렸다. 이로써 대학가는 '포화 상태'가 됐다. 이 틈을 '신쪽방'이 파고들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2015년 한양대는 결국 '기숙사 신축 계획'을 발표했다.
주택을 원룸으로 리모델링한 건물주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대대적으로 개조하거나 신축한 뒤, 비로소 첫 입주자를 받아 비용을 회수하려던 참이었다. 임대업자들은 곧바로 '한양대 기숙사 건립 반대 대책위원회(대책위)'를 만들었고, 골목 어귀마다 '행당동, 사근동, 마장동 지역경제 초토화시키는 한양대 기숙사 건립 강력히 반대한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 학교 총학생회를 주축으로 한양대 학생들은 강렬하게 저항했고, 학생들과 임대업자 사이의 갈등은 더욱 첨예해졌다.
기숙사 반대에 앞장선 대책위는 모든 단계마다 사람들을 모아 시위를 벌이고, 행정기관에 민원을 넣었다. 공무원들은 대책위원장이 회의 도중 공무원에게 육두문자를 날리기도 하고 기물을 파손해 공무원노조로부터 고발을 당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대책위원장은 언론에 '이 지역 원룸 임대업자들이 대부분 60, 70대의 영세한 지역 주민이라 대학 기숙사로 인해 생존권 위협을 받는다'고 호소했다. 임대업자들의 탐욕이 문제가 아니라, 모두 '생계형'으로 원룸을 임대한다는 논리였다.
"이 정도면 5평은 아니고 4평쯤 되려나. 그런데 아가씨, 내가 아까도 말했지만 이 동네 원룸은 좀 깨끗하다 싶으면 다 이 정도 넓이예요. 그 가격이면 깨끗한 거 포기해야 넓은 집 갈 수 있는데. 막말로 요즘 대학생들 공부한다고 바빠서 집에 잘 있지도 않은데, 넓은 건 그렇게 대수가 아니에요."
아마 중개사의 입에서 무심코 나온 진심이 대부분 대학가 원룸 임대사업자의 생각일 것이다. 어차피 표준임대계약 2년도 다 못 채우고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대학생들이다. 집을 보는 눈썰미가 뛰어나지 못하다보니, 싸구려 새 가구를 집어넣으면 신축인 줄 알고 비싼 월세도 감당하는 뜨내기 손님일 뿐이다. 만족스럽지 못한 집에 살면서 세입자로서 임대인에게 개선을 요구하기보다는 카페, PC방, 도서관, 술집 등 바깥으로 나돌며 자발적으로 '집의 외부화'를 실천하는 온순한 세입자들.
지방 청년들에게 서울은 기회와 희망의 도시다.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 학업도, 취업도 기회가 없다. 미디어는 서울의 청년을 재현한다. 지난 10년 동안 서울과 경기로 유입된 20대 순이동 인구수는 46만 7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울산 등 주요 광역시는 모두 감소했다. 물론 일자리와 대학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지만, 지방에 남아 희망을 보지 못하는 청년도 뚜렷한 대안이 없더라도 삶의 옵션에 대한 주체적 선택을 위해, 교육과 직업, 문화적 기회를 좇아 경제적 곤란을 무릅쓰고 서울로 온다.
'사람은 모두 서울로 가야 한다'는 경구는 지역에 있는 대학을 '지잡대'로 통칭하고, 지방을 모두 식민지로 만들어버린 서울공화국은 서울만 마치 '정식 무대'인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지방엔 오디션 프로그램조차 나가지 못한 무명 기획사 연습생들만 남아 있다.
안정적 주거는 사회적 논의의 폭을 풍성하게 만든다. 지역 사회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도 자신이 정주하는 공간이 생기면 부쩍 나를 둘러싼 동네의 풍경에 관심을 가진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어떤 사람이 자기 이익에서 눈을 돌려 국가 전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강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만일 자신의 집 앞을 지나는 도로를 놓는 문제라면, 그는 이 작은 공적인 문제가 자신의 가장 거대한 사적인 이익에 관계된다는 사실을 단박에 이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정주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마을의 안건을 논의하고, 더 나아가 높아진 주권의식이 정치 참여로 이어지는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역설적으로 쪽방촌 주민과 주거 난민 청년들이 정치권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는 이유는, 파편화·분자화된 주거 형태로 정치적 구심점을 갖지 못해, 한마디로 '표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신자유주의가 극대화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늑대'는 누구인가. 우화는 늑대의 약탈적 행위를 본성으로 치환하며 더 약한 이를 착취하는 구조를 방기하고 모든 책임을 개인의 게으름과 불운에 떠넘겼다. 그리고 '아기 돼지 삼형제'가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아직까지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아기 돼지 삼형제에서 나쁜 것은 누구인가? 게으르고 불운한 첫째, 둘째 돼지인가?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라도 쌓아 올린 그 노력을 수포로 만들어버리고 결국 '홈리스'로 만들어버리는 늑대인가?
이 간단한 질문이 빈곤을 논의하는 데 있어 오랫동안 묵인되고 간과되었던 단어 '착취'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길 바라며, 논의를 마무리한다.
빚으로 지은 집 / 아티프 미안, 아미르 수피 / 열린책들
대부분의 경우 불황은 경제의 생산 능력 변화와 무관하게 발생한다. 예를 들어, 대침체의 경우도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인해 건물이나 생산 설비가 크게 파괴되거나 갑자기 첨단 기술이 퇴보되어 발생한 것이 아니다. 모나코 사의 근로자들 역시 오랜 기간 쌓아 온 숙련 기술을 하루아침에 까먹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경제는 갑자기 삐걱거리고, 사람들의 소비는 급감했으며, 수백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져 버렸다. 불황으로 인한 무형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왜 불황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몸이 아플 때 의사를 찾아가게 된다. 왜 아픈지, 어떻게 하면 통증이 나아질지 묻게 된다.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약을 먹거나 생활 습관을 고칠 의향도 있다.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경제적 고통인 경우에는 누구에게 찾아가야 할까?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의사들에게 드러내는 존경심을 경제학자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30년대 대공황 당시 동료 경제학자들에게 일갈했듯이 경제학자들은 〈관찰된 사실과 이론이 일치하지 않는 데 개의치 않는다〉. 그 결과 보통 사람들은 〈이론적 예측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검증하는 다른 과학자들 집단에 대해 가지는 존경심을 경제학자들에게도 똑같이 가지기를 갈수록 꺼리고 있다〉.
미국의 사례와 국제적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아주 분명한 패턴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경제적 재앙에는 거의 언제나 가계 부채의 급격한 증가라는 현상이 선행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상관관계는 매우 강해서 거시경제학에서 얘기하는 일종의 경험적 법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가계 부채의 급격한 증가와 경제 위기는 소비 지출의 급격한 감소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 상해나 사망처럼 위험해 보이지 않는 주택 가격의 급락은 주택 소유자에게는 회오리바람처럼 예상치 못한 심각한 위험이 된다. 미국인들에게 홈 에쿼티는 유일한 재산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그 돈으로 은퇴 후를 대비하거나 자녀들의 대학 학비를 대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집값의 폭락은 캔자스 주의 작은 마을에 들이닥치는 회오리바람처럼 예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주택 가격 하락으로 인한 피해를 누가 입느냐의 관점에서 보면 모기지 대출에 의존한 금융 시스템은 보험과 정반대의 역할을 한다. 보험이 주택 소유자를 회오리바람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반면, 부채는 집값이 하락할 때 모든 위험을 주택 소유자에게 전가한다.
2006년부터 2009년 사이 집값은 전국적으로 30퍼센트 떨어졌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가난한 주택 소유자들은 빚을 더 많이 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순자산은 더 큰 폭으로 감소했다. 이들 계층의 레버리지 비율이 80퍼센트인 상황에서 집값이 30퍼센트 떨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이들의 순자산은 허공에 사라져 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이 점이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다. 집값은 30퍼센트 떨어졌지만 레버리지 승수 효과로 인해 모기지 대출을 지닌 주택 소유자들의 순자산은 훨씬 큰 폭으로 떨어졌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대침체기에 어떤 주택 소유자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는지 알 수 있다. 가난한 주택 소유자들은 별다른 금융 자산이 없었고, 이들의 부는 거의 전적으로 홈 에쿼티로 이루어져 있었다. 더욱이 홈 에쿼티는 후순위 청구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값이 하락하자 그 충격은 레버리지 승수만큼 커져 버렸다. 주식, 채권 등의 금융 자산 가격은 이후 회복되었으나 이들에게는 어차피 금융 자산이 거의 없었으므로 이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얘기였다.
매년 미국에서는 35만 건 정도의 주택 화재가 일어난다. 화재의 피해는 매우 크다. 경제적, 심리적 손실도 클뿐더러 자녀들의 학업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 심지어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태풍과 화재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수많은 위험들 가운데 몇 가지 사례일 뿐이다. 개인이 혼자서 이러한 위험들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위험들은 건전한 금융 시스템을 통해 제거하거나 줄임으로써 공동으로 서로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금융 시스템을 적절하게 이용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위험으로부터 개인들을 보호할 수 있으며 그 혜택은 장기적으로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재난을 겪더라도 가족이 그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만, 부모는 정상적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다. 그래야 경제 전체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사람들도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빚은 보험과 정반대로 위험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빚은 주택 소유와 관련된 위험을 분산시키기는커녕 그 위험을 감당할 능력이 가장 적은 사람들에게 위험을 전가시킨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빚은 대침체기 동안 부의 불평등을 두드러지게 심화시켰다. 빚은 또한 압류를 통해 자산 가격을 떨어뜨린다. 떨어진 자산 가격은 모기지 대출을 이용한 주택 소유자의 순자산을 크게 감소시키며 이는 또 다른 재앙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예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우리는 모두 한배를 타고 있다는 것이다. 호황일 때 아무런 빚이 없던 가계도 불황과 함께 수요가 감소하면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디애나, 오하이오, 켄터키 주처럼 주택 시장의 호황, 붕괴와 별 관련이 없었던 곳의 자동차 공장 근로자들은 다른 지역의 소비자들이 자동차 구매를 줄이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고용은 레버드 로스로 인한 충격이 전체에 퍼져 나갈 때 가장 중요한 경로가 된다. 하지만 또 다른 경로도 있다. 모기지 대출을 받은 가계가 파산을 하고 은행이 압류를 할 때 주변 집값을 함께 떨어뜨린다. 또한 모기지 대출의 상환 불능이 늘어나면 은행은 대출 공급을 줄이며 경제 전체가 피해를 입게 된다.
4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펀더멘털을 강조하는 시각에 따르면 높은 수준의 실업률이 지속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총수요를 감소시키는 큰 충격이 와도 가격들이 신축적으로 변화함으로써 원래의 완전 고용 수준을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의 센트럴밸리 지역처럼 지역 내 소비 지출이 급감한 지역에서는 식당, 소매점 같이 지역 내 수요와 관련 깊은 곳의 임금은 하락해야 정상이다. 임금이 떨어지면서 해고보다는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하던 근로자들 중 일부는 더 높은 임금을 받고자 교역재 산업으로 옮기려 할 수 있는데 이는 다시 이들 산업의 임금을 떨어뜨리게 된다.
이론상으로 임금은 이들 산업이 센트럴밸리 지역에 계속 머물면서 생산하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하는 수준까지 떨어져야 한다. 이는 경제학자들이 흔히 강조하는 메커니즘이다. 어떤 도시나 나라의 수요가 감소하면 해당 지역의 임금이 떨어지고 이는 산업들의 경쟁력을 높여 주게 된다. 또 다른 조정 메커니즘은 이주를 통해서 작동한다. 낮아진 임금에 불만을 품은 근로자들은 일자리가 많은 곳으로 이주하려 할 것이다. 조지프 슘페터를 인용하는 경제학자들은 이런 〈창조적 파괴〉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심지어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높여 준다고 주장해 왔다. 자원의 산업 간 재배분이 필요할 때마다 근로자들은 가격 변화를 통해 생긴 새로운 기회를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며 결과적으로 산업 간 자원의 재배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침체기 동안 미국 경제는 이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실업도 만연했다. 케인스는 이런 상황을 통찰력 있게 표현했다. 〈가격이 신축적이라 주장하는 고전학파 이론은 경제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하기보다는 경제가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실제와 당위를 혼돈하기 시작하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신축적인 가격 메커니즘에 실업 문제를 맡겨 둘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이러한 메커니즘이 왜 실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지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도대체 무엇이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중앙은행은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하면 은행에 유동성(즉 현금)을 공급함으로써 자기실현적인 은행 위기를 방지할 수 있다. 단순히 중앙은행이 예금주들의 인출 요구에 응할 만한 자금을 가지고 있고 공급할 의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금주들은 자신들의 돈이 보호된다는 것을 알고 예금 인출 사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동아시아 위기 때는 대출이 미국 달러화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 역할을 기대할 수 없었다. 달러화를 찍어 낼 수가 없었으므로 이들 국가의 중앙은행은 외국 투자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국내 은행과 기업들이 연쇄 도산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들은 미국 달러화 형태로 유동성을 공급해 줄 수 있는 기관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국제통화기금이었다.
이 연구 결과에 비쳐 보면 당시 가장 중요한 실수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었다. 첫 번째 실수는 투자자들이 모기지 대출에 대한 채무 불이행이 일어날 확률을 낮게 평가한 것이고, 두 번째 실수는 여러 모기지 대출의 채무 불이행이 같은 시기에 일어날 확률, 즉 채무 불이행 사이의 상관관계를 낮게 평가한 것이다.
시장과 정책 입안자들은 은행 부문이 심각한 손실을 겪을 때 그 부담을 누가 질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야만 한다. 자연스런 해법은 은행의 이해 당사자인 주주와 채권자가 손실을 감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은행에 자금을 대고 은행 자금의 운용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은행에 관해서 논의할 때는, 다른 주장이 쉽게 앞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경제학자들, 규제 기관, 정책 입안자들이 주장하기를 은행은 특별하다. 정부는 종종 일반 대중의 희생으로 은행 시스템을 구하려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스페인만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스페인에서 있었던 일은 대침체 시기 미국과 다른 유럽 지역에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었다. 2008년 코미디언 존 스튜어트는 미국에서 있었던 은행권 구제 금융에 반발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그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던 질문이었다. 「7천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그냥 사람들에게 직접 주면 안 되나요? 왜 문제를 만든 당사자인 은행한테 줘야 하죠?」 그렇다면 은행은 왜 특별할까? 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은행을 보호해야 할까?
정부가 나서서 은행을 보호해야만 한다는 주장에 대한 경제학적 논리는 은행의 역할은 매우 특수해서 다른 기관들이 이러한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고 보는 생각과 맞닿아 있다. 벤 버냉키는 미 연준의장이 되기 훨씬 전부터 대공황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이런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벤 버냉키의 견해에 따르면 〈일부 차입자와 대부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금융 중개는 거래를 체결하기 위한 시장 조성과 정보 수집 활동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1930~1933년에 일어난 혼란은 시장 조성과 정보 수집 활동을 저해하여 금융권 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렸다〉. 버냉키에 따르면 이 시기 은행들의 도산은 신용 경색으로 이어졌고 대공황을 초래했다.
은행 시스템을 보호해야 할 두 가지 독립적인 이유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예금주와 지급 결제 제도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은행의 장기 채권자와 주주 들을 지원할 이유는 전혀 없다. 실제로 주주와 장기 채권자 들의 투자금은 완전히 없어지게 하면서도 지급 결제 제도를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연방예금보험공사가 이런 일을 수차례 수행했다. 그러나 두 번째 두장은 은행이 대출 활동을 통해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은행의 채권자와 주주 들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 대출 시각은 이에 반하는 실증적 증거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로 이토록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까? 가장 냉소적인 주장으로는 채권자들이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실제로 이 견해를 지지하는 확실한 증거들이 있다. 우리가 프란체스코 트레비와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금융 회사로부터 선거 자금을 지원받은 의원들이 은행 구제 금융 법안에 찬성하는 비율이 높았다. 이 결과는 단순히 상관관계가 아니라 인과관계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정계 은퇴를 앞둔 의원들이 재선을 노리고 있는 의원들에 비해 금융 회사의 선거 자금 기부에 덜 민감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선거 자금에 목말라 있는 일부 의원들의 경우 명백하게 금융 회사의 지원에 투표 결과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학자들이 이러한 시각에 대해 논박하고 거부하지 않은 책임도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바로 이 책을 쓰게 된 주요 동기 중 하나이다. 은행 대출 시각은 일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런 지지가 경제 위기 탈출에 필요한 해법을 논의할 때마다 이 시각이 단골손님으로 나타나게 만든다. 이 때문에 위기 탈출에 대한 논의는 온통 은행 위기에 초점이 맞춰지며 가계 부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들은 전부 무시된다.
2013년 4월 한 학회에서 벤 버냉키는 대침체의 교훈을 생각해 볼 때 거시경제학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질문에 답하면서 버냉키는 마찬가지로 주택 시장 붕괴가 기술주 급락보다 더 큰 악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버냉키는 이로부터 어떤 교훈을 끌어냈을까? 「이제 우리 모두가 당연한 사실로 잘 알고 있듯이, 주택 시장 붕괴가 기술주 급락보다 더 큰 피해를 줬던 이유는 신용 중개 시스템, 금융 시스템, 금융 기관, 금융 시장이 주가 하락보다는 집값 하락과 모기지 대출과 관련된 충격들에 생각보다 훨씬 더 취약했기 때문입니다.」 버냉키는 덧붙여 얘기했다. 「주택 시장 붕괴가 훨씬 더 큰 영향을 줬던 이유는 바로 금융 시스템의 자금 중개 기능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버냉키의 대답 어디에도 주택 시장 붕괴가 더 큰 영향을 미쳤던 이유로 집값 하락으로 인해 순자산이 적으며 한계 소비 성향이 컸던 가계에 직접적인 타격이 가해졌다는 설명은 없다. 우리는 미국 역사상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금융 위기 시기에 미 연준을 잘 이끌었던 버냉키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마저도 은행의 중개 기능 악화가 대침체의 주요 원인이라 믿고 있다. 우리가 이 책에서 보이듯이, 통계와 각종 자료들은 다르게 얘기하고 있다.
아마도 모기지 부채 탕감을 위한 정책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을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프레디맥과 패니메이 같은 정부 지원 기관을 관할하는 연방주택금융청 총재서리인 에드워드 디마르코를 들 수 있다. 그는 원금 탕감이 정부 지원 기관과 납세자 모두에게 큰 이득이 된다는 연방주택금융청 자체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원금 탕감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바꾸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갖은 핑계를 대며 원금 탕감을 위한 정책을 외면했기 때문에 재무부 장관 티모시 가이트너도 디마르코를 비난하는 공개편지를 발표하기까지 했다. 또한 2013년에는 명망 있는 주 법무장관들이 이례적으로 오바마 대통령에게 모기지 채무로 인해 고통받는 가계들을 돕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디마르코를 해임하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당파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2012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밋 롬니의 수석 경제자문관인 글렌 허버드조차도 원금 탕감과 리파이낸싱 관련 정책들을 적절하게 수행하지 못한다고 연방주택금융청을 비판했다.
디마르코는 프레디맥이나 패니메이의 경우 정부 지원 기관이므로 납세자의 돈을 지키기 위해 대출금을 제대로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정부 지원 기관의 존립 이유를 좁게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존립 이유를 좁게 해석하는 것도 원금 탕감이 납세자에게 이득이 된다는 연방주택금융청 자체 연구와 대립되었다. 게다가 이런 방식의 해석은 더 큰 맹점을 가지고 있었다. 연방주택금융청 수장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정책이 해당 기관에 미치는 효과뿐만 아니라 거시 경제 전체에 미치는 효과도 당연히 고려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거시 경제적 실패(macroeconomic failure)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적극적인 모기지 원금 탕감이 정부 지원 기관의 대출금 회수에는 해가 될지 몰라도 채무 가계의 부담을 덜어 줌으로써 국가 전체의 이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의 변화에 따른 한계 소비 성향은 소득이 낮고 부채 비율이 높은 가계에서 가장 높게 나타난다는 3장의 논의를 상기해 보라. 우리가 3장에서 논의했듯이, 2006~2009년 사이 가계 지출이 급감했던 이유는 상당 부분 바로 이들 가계의 자산 손실이 컸기 때문이었다.
원금 탕감은 주택 시장 붕괴에 따른 손실을 고르게 부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채무자가 모든 손실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 손실을 고르게 나누어 져야만 한다. 채권자에 비해 채무자가 소득 수준이 낮고 레버리지가 높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손실을 보다 공평하게 나누는 것은 한계 소비 성향이 낮은 계층으로부터 높은 계층으로 부를 이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이는 경제 전체의 수요를 증가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채권자는 지갑 속의 1달러가 없어질 때 소비를 거의 줄이지 않지만, 채무자는 지갑 속에 1달러를 채워 주면 이를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우리가 3장에서 강조했듯이 채무 가계는 부의 변화에 따른 한계 소비 성향이 다른 계층에 비해 세 배 내지 다섯 배 크기 때문이다.
윌 도비(Will Dobbie)와 송재는 모기지가 아닌 다른 종류의 채무에 대한 자료를 이용해서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의 연구는 파산 법원 판사들마다 원금 탕감을 상대적으로 쉽게 해주거나 또는 주저하는 정도의 차이가 다른 것을 이용해서 원금 탕감을 받은 개인들과 그렇지 못한 개인들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조사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부채 탕감을 많이 받은 개인들의 경우 향후 5년간 사망률이 감소했으며 수입과 고용이 크게 증가했다. 여기서 고용이 증가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부채 탕감이 안 될 경우 채무자는 일을 해봤자 어차피 채권자가 번 돈을 모두 가져갈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실업 상태에 있는 것을 선호하거나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지 않을 것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는 평생 은행 돈을 갚기 위해 일할 것 같습니다〉라고 한탄하는 스페인의 마놀로 마반의 사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채 탕감은 벌어들이는 돈을 모두 채권자에게 빼앗길 거라는 채무자의 염려를 불식시킴으로써 채무자에게 열심히 일할 동기를 부여하며, 그럼으로써 경제 전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윌 도비와 송재의 연구는 판사 성향의 차이를 영리하게 이용함으로써 부채 탕감의 효과를 상관관계가 아니라 인과관계로 명쾌하게 보였다. 부채 탕감은 개인의 소득과 고용 확률을 높인다.
이 장의 첫머리에서 살펴본 릭 산텔리의 정서는 일부 주택 소유자들이 깡통주택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본인들의 무책임한 투자 때문이라는 다수의 정서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현장에 있었던 시카고 상품거래소 트레이더들과 같이 많은 사람들은 정부 개입이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것이라 믿는다. 말하자면 빚을 진 가계들이 다시는 그렇게 공격적으로 대출받을 생각을 아예 꿈도 꾸지 못하게 할 만큼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6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제로 다수의 주택 소유자들은 집이 현금인출기라도 되는 양 집을 담보로 돈을 빼서 썼고, 그 결과 전보다 훨씬 많은 소비를 했다.
금융 계약의 최적 설계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온 우리는 도덕적 해이를 걱정하는 이유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경우가 도덕적 해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덕적 해이는 영리한 개인이 시스템이나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서 순진한 거래 당사자로부터 이득을 취하려는 상황을 말한다. 도덕적 해이의 고전적인 예로는 자동차 보험에 가입한 뒤 무분별하게 운전하는 운전자를 들 수 있다. 사고가 날 경우 보험 회사가 손실을 대신 보상해 주기 때문이다. 만약에 자동차 회사가 순진하게 모든 비용을 보전해 준다면, 운전자의 도덕적 해이 문제는 한층 더 심해질 것이다.
하지만 주택 시장 활황기에 일어난 일은 운전자의 경우와 같은 도덕적 해이로 볼 수 없다. 주택 소유자들은 집값이 인위적으로 부풀려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순진한 채권자를 이용한 주도면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본인들의 예상이 틀릴 경우 정부가 나서서 구제 금융을 해줄 것이라 예상하고 움직인 사람들도 아니었고, 실제로 구제 금융을 받지도 못했다. 실상은 이들도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 잘못 판단한 것이다. 집값이 계속 상승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영리한 주택 소유자들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대부자와 정부를 상대로 도박을 한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 만약에 누군가 주도면밀하게 행동했다면, 그들은 집값이 계속 오를 거라고 감언이설을 하며 순진한 주택 소유자들을 용의주도하게 이용한 대부자들일지 모른다.
빚과 디플레이션은 자연스럽게 공범이 된다. 빚을 진 가계가 지출을 줄이면, 가게들은 매상을 올리기 위해 가격을 낮추게 된다. 하지만 이런 가격 인하는 원가를 줄이기 위해 임금을 낮추지 않을 때만 적절한 선택이 된다. 가격 인하를 위해 임금까지 낮추게 되면 가계의 채무 상환 부담은 커지며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결국 가계가 추가로 소비를 더 줄이게 되면 악순환이 반복된다.
미국의 위대한 경제학자 중 한 명인 어빙 피셔는 이런 악순환을 〈부채 디플레이션〉이라 이름 지었다. 그는 1933년에 〈나는 … 채무와 물가 수준이라는 두 가지 경제적 질병이 다른 모든 것들을 합한 것보다도 더 호황과 불황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어빙 피셔의 생각은 자원의 재배분과 관계가 있다. 채무 계약은 명목 금액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이 발생해 물가가 하락하면 채무자의 상환 부담은 더 커지게 된다. 반면 채권자는 물가 하락으로 더 많은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으로 이득을 본다. 즉 디플레이션은 채무자로부터 채권자에게로 구매력(또는 부)을 이전하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한번 누르기만 하면 인플레이션을 쉽게 발생시킬 수 있는 마법의 버튼을 가진 중앙은행 수장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디플레이션을 예방하는 것과 별개로 충분한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키는 일은 더 어렵다. 사실상, 경제가 높은 수준의 채무로 고통받고 있고 제로 금리 하한에 걸려 있다면, 통화정책을 이용해서 물가 수준을 올리는 일은 매우 힘들다. 설사 제로 금리 하한에 의해 부과된, 널리 알려져 있는 제약 조건들을 극복한다 할지라도 레버드 로스 문제는 통화 정책의 효과를 심각한 수준으로 반감시킨다.
〈케인지언〉 이론과 달리 우리가 주장하는 레버드 로스 프레임워크는 수요 침체를 낳은 원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정책적 처방도 자연스럽게 과도한 가계 부채를 직접적으로 해결할 방도를 찾게 된다. 하지만 심각한 경기 침체 상황에서는 정부의 지출 증가도 총수요를 증가시켜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평상시 정부 지출의 증가는 큰 효과가 없다고 본다. 정부 지출의 증가로 인해 민간 투자가 감소하는 구축 효과가 발생하고, 경제 주체들이 정부 지출의 증가가 세금 인상으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한다면 소비를 늘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상시 정부 지출의 증가는 세금을 통해 보상 체계를 왜곡시킨다. 하지만 제로 금리 하한에 걸려 경제가 심각하게 침체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채권 발행을 통한 정부 지출 증가가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재정 지출 확대는 정교한 정책 수단이 아니다. 재정 지출이 원금 탕감의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재정 지출은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수 없다. 더욱이 정부 지출은 종국적으로 누군가의 세금으로 충당되어야 한다. 주택 시장 붐에 일조한 채권자들에게 이 세금이 귀착되지 않는다면 재정 정책은 총수요를 진작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채권자로부터 채무자에게로 자원을 이전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가장 효과적으로 재정 정책을 쓰는 방법은 채권자에게 세금을 물리고 그 돈을 채무자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사실상 재정 정책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모기지 크램다운을 실행하면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도 똑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은행을 구제해야 한다는 방안은 비생산적이다. 통화 정책과 재정 정책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으나, 근본적인 문제인 가계 부채를 직접적으로 공략하는 정책보다 나은 정책은 아니다. 채무를 재조정하는 것이 경제를 되살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떤 정책이 효과적일지 의견을 나누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정책 실행의 차원에서 가장 심각한 장애물이 있다. 우리가 지난 몇 년간 정치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당파적 이해 때문에 위기에 대처하는 정부 정책들이 사장되었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정치적 해결이 가장 필요할 때 그렇지 못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유권자들은 대침체 시기 동안 이념적으로 매우 크게 갈라섰다. 보수적인 티파티 운동이라든가 반대쪽에 있는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침체 시기를 지나면서 미국 전체 국민들 중에서 스스로를 중도라 분류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급감했다.
실업과 학자금 대출의 채무 과다 문제는 서로 결합해 총수요를 줄이며 경제의 수요 부족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최근 졸업자 중 학자금 대출이 많은 사람들은 자동차, 가구 등 큰 단위의 소비를 미루었고 부모님 집으로 다시 들어가 함께 사는 경우도 많아졌다. 「뉴욕 타임스」의 앤드루 마틴과 앤드루 레런의 말마따나 〈늘어나는 학자금 대출은 한 세대의 대학 졸업자들과 빚 때문에 중퇴한 자들에게 먹구름을 드리우며 경제 회복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대학 졸업장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고 있다. 2만 9,000달러의 학자금 대출을 지고 있는 대졸 미취업자 에르자 카지는 학자금 대출 상환 부담에 대한 기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흔히들 사람들이 무식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요새는 교육 비용이 점점 더 올라가면서 오히려 교육을 안 받고 그냥 무식한 채로 있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나은 선택처럼 보여요.」
학자금 대출 문제는 현 금융 시스템의 폐해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대학 졸업장을 따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야 하지만,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은 대학 학위로 인해 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의 젊은이들은 점점 더 학자금 대출이 불공평하게도 총체적인 경제적 위험의 상당 부분을 자신들에게 지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자리 사정이 아무리 악화되어도 대부자들은 아무런 부담도 지지 않으며, 졸업자들은 상환을 위해 없는 돈을 쥐어짜서 대출을 갚아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이런 위험 부담을 짊어지게 한다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 이들이 지은 죄라고는 22년 뒤 최악의 구직난이 있을 줄 모르고 1988년에 태어난 것뿐이다. 왜 이들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할까? 대학 교육을 통해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권장하지는 못할망정, 빚으로 돌아가는 금융 시스템은 대학 진학을 주저하게 만든다.
우리가 보기엔 대규모의 정부 보조 때문에 금융 시스템이 과도하게 빚에 의존한다. 하지만 일부 경제학자들은 다른 요인들을 고려하면 채무 계약은 최적 계약 형태이며 왜 널리 쓰이는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도덕적 해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학자금 대출을 받은 대학생이 미래 소득에 관계없이 대출 상환을 해야 한다면 이 학생은 보수가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할 거라는 논리다. 만약에 되갚아야 할 대출금이 소득에 연동된다면 이 학생이 보수가 높은 일자리를 찾을 동기가 약해진다. 돈을 벌어 봤자 일부는 대출금 상환으로 날아가고, 설사 일을 안 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처벌이 없다면 굳이 일할 필요가 있을까?
위의 논리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한 개인이 앞으로 벌어지는 일들이나 그 결과들을 통제할 수 없다면 위의 논리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얼마나 학업에 열중하느냐는 학생 본인이 결정할 수 있지만, 졸업하는 시점의 일자리 사정은 이 학생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책임 분담 모기지와 같이 우리가 제안하는 주식의 성격이 가미된 계약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을 감안한다. 책임 분담 모기지의 경우 계약은 주택 소유자가 살고 있는 집의 가격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주택 가격 지수에 연동되어 집값 하락의 위험을 덜어 줄 것이다. 학자금 대출의 경우에도 계약은 개인의 소득이 아니라 노동 시장의 전반적인 환경에 따라 상환 부담이 조정되어 대졸자들의 부담을 덜어 줄 것이다. 개인이 어떻게 조정할 수 없는 위험을 감안한 계약은 도덕적 해이 문제를 피할 수 있을 뿐더러 채무자에게 일종의 보험을 제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