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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회사들 / 마틴 린드스트롬 / 어크로스

 

 이렇듯 승객 대부분에게 스크린의 환영 메시지나 실내등, 기내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걱정과 통제 불능, 폐소공포증, 두려움 등 우리가 느끼는 '불안' 요소들이다.
 이 불안들은 비행기를 타봤다면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모두가 알 수 있는 일 아닐까? 그로부터 몇 달 후 스위스국제항공은 새로운 부서를 신설했다. 이 부서의 목표는 승객들이 느끼는 불안을 최소화하고 조직 내부에서 상식의 결핍이 드러나는 곳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후 스위스국제항공은 기존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한 기업이 업무를 단순화하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그것은 최대한 많은 약어(줄임말)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드류, 아직 GLC가 안 들어왔나요? SSNR 승인이 났나요? RDF 호환이 되나요?' 그런데 이후 약어 종류는 직원들이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크게 늘어났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은 '내부약어사전(Internal Acronym Dictionary)'(줄여서 IAD)까지 발간했다. 지겹고 재미없는 이 사전이 나온 이후로, 직원들은 'consumer packaged goods(CPG가 아니라)'와 같은 표현을 쓸 때마다 약어사전을 찾아보라는 핀잔을 듣는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에 약어가 가능한 표현이 있는지 먼저 숙고하는 작업은 이제 기업 규칙(corporate law), 아니 CL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조직 안으로 들어갈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그들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래서 외부인이 보기에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규칙과 절차, 그리고 공식적∙비공식적 행동 규범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은행에서 당좌예금이 동결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혹은 고객 지원 부서로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해서 전화가 다른 부서로 돌아가면서 "이 통화는 교육 목적으로 녹음되고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만 반복해서 흘러나올 때 느꼈던 고통을 잊어버린다. 그럴 때, 외부인이 개입해서 조직 내 구성원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바로잡아야 한다.

 

 포드 CEO를 지낸 앨런 멀러리는 회사에 들어온 지 2주일 만에 직원용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량 대부분이 포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기업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다.

 

 우리는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면 어떤지, 횡단보도에서 자동차가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갈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현관문을 잠그거나 히터를 끄는 것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혹은 무례하게 부탁하거나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란다. 상식은 합리성만큼이나 관심과 연대감, 감정적 동일시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상식은 공감에 관한 이야기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 〈뉴욕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미시간 대학 연구팀은 1980년에서 2010년에 이르기까지 1만 4000명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소위 '상호민감성(interpersonal sensitivity)'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인을 살펴봤다. 그리고 다른 학생의 불행에 대해 고통과 동정을 느끼는 정도를 알기 위해 책과 영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을 포함하여 타인의 입장을 상상해보는 능력 등 다양한 항목을 검사했다. 그 기사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학생들은 공감에서(48퍼센트 하락), 그리고 관점 바꾸기(34퍼센트 하락)에서 상당히 낮은 점수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새천년과 더불어 비디오게임과 소셜미디어, 리얼리티 프로그램, 치열한 경쟁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젊은이들은 점차 자기중심적이고, 피상적이고, 개인주의와 야심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오늘날 공감이 사라지면서 기업들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 결국 공감이란 평생의 충성 고객과 당신의 기업을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소비자를 나누는 기준이다. 예전에 한 경영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내게 유럽의 한 대형 전자 매장에서 계산을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목격한 장면을 얘기해줬다. 그 매장은 그들의 친환경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새로운 규칙을 도입했다. 그것은 비닐봉지 값을 받는 것이었다. 그 경영자 앞에 한 여인이 서 있었는데 그녀의 카트에는 노트북과 프린터, 헤드폰 등 수천 달러에 달하는 물건이 실려 있었다.
 계산이 모두 끝났을 때, 그 여성은 물건을 담을 비닐봉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비닐봉지를 달라고 하자 직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1달러입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잔돈이 없었고, 그래서 신용카드로 결제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직원은 신용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최소 금액이 5달러라며 거절했다. 그녀는 방금 수천 달러어치의 전자 제품을 샀다! 화가 난 그녀는 카트에 담긴 물건을 다 환불해버렸다. 그리고 직원에게 다시는 이 매장에 오지 않겠다고 했다. 누가 그녀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물론 많은 기업이 소비자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다. 포커스 그룹 작업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실제로 구매하고 이용하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않는다. 즉, 소비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고객과 함께하도록 할 때, 조직의 근육기억은 사라지면서 고객 중심적 마음가짐이 모습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스위스국제항공 사람들을(조종사와 승무원을 포함하여) 실제 승객의 집으로 데려갈 때까지, 그들은 비행기를 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승객의 입장에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항공사 직원들에게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일이자 숙련된 업무였다. 즉,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는 가장 안전하고, 스트레스가 덜하고, 편리한 방법이었다. 스위스국제항공 직원들은 항공사 특전 덕분에 공항에서 줄을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기내 수하물을 실을 자리가 남아 있을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비행기에서 내리고 난 뒤 어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힘들 게 뭐가 있겠는가?

 

 기업의 시스템과 절차는 고객의 요구를 외면하도록 하는 것 말고도 다른 악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것은 조직이 내부적으로만 집중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 비즈니스의 일관성이 사라진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특정 장면을 6주, 혹은 6개월 간격을 두고 촬영한다고 해도 디테일은 그대로 유지된다. 캐리 그랜트는 방에 들어올 때 입었던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가? 넥타이가 사라지지는 않았나? 강아지는 여전히 난로 옆에서 자고 있는가? 아니라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러한 연속성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듯, 서비스를 완성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호텔에서(혹은 다른 기업에서) 직원의 역할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다른 부서와 긴밀히 협조해 서비스의 연속성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말은 쉽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 기업의 95퍼센트가 이 간단하고 핵심적인 지혜를 망각하고 있다. 고객의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연속성, 혹은 일관성이 필요하다. 잘못된 정보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신뢰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뢰는 상식과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간다.

 

 머스크는 레고와 더불어 덴마크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기업이다. 1904년에 설립되어 코펜하겐에 자리 잡은 머스크는 선단 규모와 화물 수용 능력에서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컨테이너 운송 기업으로, 오늘날 121개국 343개 항구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다. 머스크는 실질적으로 현대적인 해상운송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오늘날 전 세계 해양을 오가는 물동량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일반적인 머스크 선박은 6미터 길이의 컨테이너 1만 8000개를 실을 수 있으며, 총 15만 톤이 넘는 화물을 실을 수 있다. 가령 BMW 자동차 8000대, 또는 나이키 운동화와 반바지, 탱크톱 수백만 벌, 혹은 한 달 동안 나이지리아에서 판매할 모든 품종의 화훼, 아니면 약품과 곡물, 콩가루, 살충제 수천 톤을 한 번에 실을 수 있다.

 

 머스크와 같은 기업은 틀림없이 감수성이 풍부한 시인이나 예술가 같은 사람은 뽑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극단적으로 좌뇌형인 사람들만 받아들일 것이다. 최근까지도 구글은 면접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인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모형화해보시오. (인도의 길이는 1미터이고 빗방울은 1센티미터라고 할 때) 인도는 언제 완전히 젖게 되는가?" 좀 더 쉬운 질문으로 이런 것도 있었다.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매년 머리를 자를까?"
 비슷한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은 아마도 내부 정치와 관련해서 큰 어려움은 겪지 않을 것이다. 상식과 공감이 종적을 감춘 상황에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나갈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문제로 조직이 붕괴될 때, 내적 저항(소위 면역 시스템)이 작동하면서 외부에서 구성원이 유입되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정치가 잔해처럼 조직 전반에 내려앉게 된다. 한 가지 안타까운 소식은 이러한 조직 붕괴가 거의 모든 기업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나는 오래전에 스칸디나비아항공(SAS)의 비즈니스 클래스를 종종 이용했다. 그런데 한번은 기내식으로 공기 가득한 작은 봉지 안에 든 스낵이 나왔다. 나는 승무원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얼마 전 승객 1000명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는데, 많은 사람이 기내식이 없는 것을 선호한다고 응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체 어떤 승객이 기내식을 포기하고 풍선 같은 프레첼 봉지를 선택한단 말인가? 그들이 말하는 "광범위한 설문 조사"는 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그들이 던진 질문은 아마도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코펜하겐에서 스톡홀름으로 가는 동안 500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면, 당신은 기내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500달러 할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들은 아마도 이처럼 조작된 편향적인 결과를 핑계로 노동과 비용이 많이 드는 서비스(기내식)를 중단했을 것이다. 이는 거대한 컨설팅 기업이 가상의 현실을 창조하거나, 혹은 오직 편협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 결과물에 불과하다. 기업이 컨설팅 업체와 계약을 맺을 때, 먼저 경영진이 가설을 세우고, 6개월 후 컨설팅 업체는 바로 그 가설을 절대적으로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 그러나 이는 사후 정당화에 불과하다.

 

 2년 전 스위스국제항공은 비용 절감 방안을 고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업의 비용과 에너지를 크게 절약해줄 수 있다고 약속한 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몇 달 후 스위스국제항공 본사 건물의 모든 사무실에는 사람이 없을 때 실내조명이 자동으로 꺼지는 시스템이 설치되었다. 전기료를 절약하고 이를 통해 지구를 살리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면, 어느 기업이 이 기술의 도입을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센서가 사람들이 업무에 집중하는 상황과 아무도 없는 상황을 종종 혼동한다는 것이었다. 회의가 시작된 지 10분 만에 조명이 꺼지면서 회의실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러면 마치 세상이 끝난 것 같은, 혹은 해커가 회사 전력망을 장악한 것 같은, 아니면 침입자가 밖에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익숙해졌고,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어 불을 켜는 일은 하나의 일과가 되었다. 본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새로 도입한 그 기술을 하나같이 조롱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기술 관련 문제를 꺼낼 때(와이파이 속도가 느리다거나 파워포인트가 멈췄다는 등)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겪은 비슷한 사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컴퓨터가 다운되거나 서버 속도가 느려질 때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체념한다. 그들은 대개 스스로 상황이나 규정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기업은 업무 효율성에서 엄청난 피해를 본다(기업의 생산성이 10퍼센트나 떨어지기도 한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노트북이 업무적인 삶과 개인적인 삶을 장악하면서 상식과 공감을 쫓아갈 일은 크게 줄어들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을 숙고를 위한 여유가 아니라 생산적인 것들로 채워 넣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가령 아침을 먹거나 공항으로 이동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여유조차 일하는 시간으로 바뀌고 있다. 컴퓨터와 태블릿, 스마트폰도 때로 리부팅이 필요하다. 전원을 끄지 않고 계속 사용하면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우리 뇌도 다르지 않다. 기술 발전에 따라 고독과 자기만족이 증가하면서 공감력은 떨어지고 있다. 인류를 성공한 종으로 만들어준 바로 그 능력을 우리는 지금 포기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상식도 함께 저버리고 있다.

 

 뜨거운 커피가 넘치는 바람에 손을 데인 적이 있는가? 부디 그런 일이 없었기를 바란다. 한 대기업은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라는 격언이 진실임을 탕비실에서 분명하게 보여줬다.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그 기업의 최고운영책임자는 직원들이 마시는 커피 비용을 아끼기 위해 커피머신에서 나오는 양을 줄였다. 이러한 회사의 조치에 직원들은 버튼을 두 번 누르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커피가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직원들은 넘칠 듯 위태로운 커피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가는 위험을 무릅쓰려 하지 않았다. 대신 싱크대에 커피를 조금 쏟아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최고운영책임자의 노력은 결국 돈 낭비로 끝났다.
 비용을 줄이고 싶다면, 커피 한 잔만큼의 상식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온라인 회의든 오프라인 회의든 상관없이,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회의에서 무엇을 얻고 싶은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루 중 첫 번째 회의에 참석했다면 모든 이들에게 안건을 제시하도록 요청하자. 즉, 모두가 회의에 참석한 목적을 말하도록 하자. 팀장은 회의가 끝난 뒤 모든 참석자에게 짧은 이메일을 보내는 방법을 고려해보자. 여기서 주요 의사결정 사항과 방향을 다시 알려줌으로써 한 번 더 상기(그리고 넛지)시키자.
 간단하게 말해서, 회의의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해 두자. 그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 말자. 그건 너무 두루뭉술한 목표다. 승인이나 설명을 구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자. 최대한 구체적인 회의가 되도록 하자.

 

 직원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을 '축하'하는 것이다. 기업은 특별한 순간을 좀처럼 축하하지 않는다. 기업이 축하를 하는 것은 주로 지루한 경제지표나 주가가 올라갈 때다. 혹은 다음 주에 있을 회계팀장의 50번째 생일 파티에 참석할 것인지를 묻는 형식적인 이메일에 대한 것뿐이다. 인사팀만 만족하고 정작 직원들에게는 형식적으로 느껴지는 이러한 유형의 축하는 조직문화에 대한 기업의 인식 수준을 드러낼 뿐이다.
 상식은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긍정적인 변화를 이루고 이를 희망의 확고한 지점으로 삼을 수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축하는 간단하다. 기업이 할 일은 작고 구체적인 성공을 인정하는 것이다. 축하는 중요하며 진정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작은 성공을 인정하고 축하하는 노력은 또한 직원들에게 그들이 정말로 올바른 팀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믿음을 준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변화라고 해도 이는 구성원에게 상징적인 가치를 전한다. 기업은 구성원의 기여를 인정하고 축하함으로써 경영진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

 

 이야기는 조직의 모든 구성원이 스스로 공통된 사명의 일부라고 느끼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이야기에는 의심을 품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설명한다고 해보자. '레고는 매년 1억 2400만 개에 달하는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생산한다.' 그러면 당신은 아마도 너무 지루한 나머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잠들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레고가 매년 생산하는 플라스틱 조각을 쌓으면 달까지 갔다가 되돌아올 정도의 길이에 해당한다'라고 이야기할 때, 당신은 그 표현과 개념을 생생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 숫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그 메시지는 분명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야기는 감정에 다가가는 지름길로써 추상적인 것을 손에 잡히게 만들어준다. 레고의 새로운 사명은 이러한 것이다. "내일의 개발자를 양성하고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기." 여기에 어떤 의문이 있는가?

 

 

세탁기의 배신 / 김덕호 / 뿌리와이파리

 

 결국, 서론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가사노동은 일종의 그림자노동이다. 그러면서도 자발적인 그러나 철저하게 고립된 노동이다. 동료들과 같이 일할 기회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정을 나눌 수도 없는 고독한 상태, 나아가 구조적으로 혼자서만 해야 하는 상태의 노동이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특히 산업혁명 이후 거의 모든 형태의 가족은 핵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회가 그만한 대가를 경제적으로 계산해주지도 않는, 그 결과 지하경제인 양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경제양식으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가사노동은 그저 일방적 희생 아래 가족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보상조차 바라지 않고 매일매일 쉬지 않고 일해야만 하는,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는 몹쓸 형태의 노동이다. 나아가 몇 년을, 몇십 년을 일해도 결코 전문가 대접을 해주지 않는, 전문가가 될 수 없는 노동이기도 하다. 여기에 여성만이, 특히 주부만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낳은 비극이다. (p.32-33)

 

 그 자신이 한때 가정주부였던 애비 디아즈(Abby Morton Diaz, 1821~1904)는 1875년의 어느 날을 아래와 같이 자세히 기록했다. 하루는 마치 끝없는 일의 연속처럼 보였다.

테이블 차리기. 테이블 치우기. 램프와 가스등 정리하기. 화덕, 나이프, 포크와 스푼, 양철 보관통, 문손잡이 등을 광내기. 접시 닦고 말리기. 식사 뒤 남은 음식 관리하기. 금요일의 대청소, 부분적으로 나누어 하는 매일매일의 빗자루질, 더러운 쓰레받기 닦기 등을 포함한 빗자루질의 모든 것. 페인트칠한 표면 청소. 거울∙유리창 닦기와 창문 커튼 세탁하기. 과일 저장하기. 소스와 젤리, 케첩과 피클 만들기. 빵, 케이크, 파이, 푸딩 만들기와 굽기. 고기와 야채 조리하기. 침대와 침구 올바로 정리하기와 침실 가꾸기. 가구를 고르고 배치하고 청소하기. 정해진 시간 안에 세 끼 식사를 준비하고 세팅하여 코스별로 내기. 풀 먹이는 작업이 필요한 옷과 침구를 관리하고 세탁하고 다림질하기. 밤낮으로 아기 돌보기. 아이들을 씻기고 옷 입히기. 아이들의 행동 지도하기. 아이들의 옷 만들기. 그리고 아이들의 차림새가 시간∙장소∙기후와 온도에 적절한지, 얼룩이나 헤진 곳은 없는지 살피기. 안주인이 개인적으로 원해서 하게 되는 일들. 꽃꽂이, 친구 초대와 접대. 주변의 아픈 환자 돌보기. 아이들이 자라감에 따라 옷의 단을 넣고, 내는 일. 헤진 곳에 덧대어 짜깁기하기, 뜨개질하기, 레이스 뜨기. 여자아이 머리 땋기. 퀼트 바느질.

(p.39-40)

 

 가전제품 광고가 목표로 하는 주요 이념은 '청결'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진행된 공중위생과 학교에서의 위생교육은 20세기 전반이 되면 거의 모든 미국인들에게 체화될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따라서 당시 매일 일상에서 부딪치는 집안일을, 특히나 청결의 경우, 하나라도 소홀하게 처리하거나 실수하여 가족들을 불편하게 혹은 당황스럽게 만드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주부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혹은 느껴야만 했거나 느끼게끔 의식화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나 학교에서의 학습을 통해 그녀의 마음에 내재화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920년대 대중적인 여성잡지를 살펴보면, 죄의식으로 가득 찬 중산층 주부들을 보게 될 것이다. 기술사가인 코완이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잡지의 주 독자층인 주부들은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이도 아니면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부엌 개수대의 수채 구멍이 막혀도, 남편이 다림질하지 않은 옷을 입고 출근해도, 어린애가 몸무게가 늘지 않아도, 애들이 학교 가기 전 아침을 충분히 못 먹어도 혹은 학교에 깨끗한 옷을 입고 가지 않아도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오롯이 주부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할 책임이었다. 그야말로 집안 도처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낄 만한 지뢰들이 가득했다. 그럼 가정이란 미국의 가정주부들에게 피할 수 없는 지뢰밭이었단 말인가. 미국 사회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를 기본적인 가치관으로 무장된 사회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모든 문제와 그의 궁극적 해결을 사회가 아닌 개인에서 찾고, 구조가 아닌 개인을 비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 가전제품 광고들이 기본적으로 주부들에게 호소한 주요한 목표 중 하나는, 다음 장들에서 보게 되겠지만, 주부들의 죄책감이었다. 아무리 해도, 어떻게 해도 완벽할 수 없는 주부들의 집안일을 자사의 가전제품이 기꺼이 도와주어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광고는 속삭이고 있었다. (p.152-153)

 

 옷을 빨고 말리고 다리는 일은 주부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 20세기 전반, 미국 농촌에 사는 어느 여성은 신혼의 5년을 제외하고는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살았는데, 어찌나 일이 쉴 새 없이 많고 힘이 들었는지 감옥에서 사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그중에서 가장 힘든 일이 빨래하기였다고 언급했다. 남편과 자식들이 벗어놓은 옷들과 침대보를 비롯한 온갖 세탁물들을 빨고, 널고, 다리고, 개서 서랍장에 넣는 일은 너무도 고단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탁날이 돌아오면 주부들조차도 가능하다면 자신이 하지 않고 가내하인 혹은 세탁부를 쓰고자 했다.
 19세기 당시는 세탁일이 보통 월요일이었다. 그래서 '우울한 월요일(Blue Monday)'이라는 표현이 세탁일을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되곤 했다. 19세기 부유층이나 중산층 집안의 경우, 세탁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안 보이는 곳에 있어야만 했다. 심지어 세탁일이 너무 중노동이라서 대저택에서는 왕왕 말 안 듣는 하인들을 처벌할 목적으로 세탁실로 보내곤 했다. 그만큼 세탁은 모두가 피했으면 하는 집안일 중에서도 으뜸의 자리를 차지했다. (p.161)

 

 "세탁을 하려면 물동이를 지고 물을 데우는 것 말고도 빨래를 적시고 함석통 속에 놓인 빨래판에 온 가족의 빨래를 놓고 문질러야 했다." 그런 후에는 "빨래를 헹구기 위해 더 많은 물을 데워야 했고, 빨랫줄에 널기 전에 모든 빨래를 손으로 짜거나 탈수기에 넣었다." 물먹은 빨래를 짜내는 과정은 혼자서는 거의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나마 탈수기가 있는 집은 힘을 덜 쓰게 돼 조금은 상황이 더 나았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끝난 다음에야 최종적으로 "주철로 만든 새드 다리미(sad iron)로 하루 종일 가족의 옷을 다렸고, 난로가 식을세라 나무를 충분히 넣어 하루 종일 불을 때야 했다." 이처럼 하루 종일 걸리는 세탁일이 얼마나 힘든지 어느 여성은 "빨래를 마치고 나면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았어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라고 회상했다.
 세탁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정주부가 담당해야만 했던 세탁이라는 일상의 노동은 엄청난 시간을 들여야 하는 고단한 일이었고,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결혼을 한 순간부터 여성들은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몸소 체험해야만 했다. (p.162)

 

 전기세탁기가 힘든 빨래를 힘이 덜 들게 하고 빨래의 과정을 좀 더 단순화시킨 것은 사실이었다. 문제는 20세기가 지나면서 개인위생과 더불어 청결 기준이 상승했다는 것이다. 세탁기가 등장하자 마치 세탁기가 모든 더러운 옷을 쉽사리 빨 수 있는 것처럼, 가족들은 더 자주 옷을 갈아입으면서 더 많은 양의 빨래를 만들어냈다. 산업화 이전에는 대다수가 옷이 몇 벌 없었고 자주 세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빨기도 힘든 면직 의류가 기계로 대량 생산되고, 셔츠를 규칙적으로 갈아입어야 하고, 침대 시트도 몇 장씩은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기대치가 높아지면서 갑자기 여자들은 전보다 훨씬 많은 빨래를 하게 되었다.
 '월요일은 빨래하는 날'이라는 규칙은 19세기에 와서야 생긴 것이다. 그런데 세탁기가 등장한 이후로는 특정한 날이 아니라 아무 날이고 시도 때도 없이 세탁기를 돌려야만 했다. 무더운 여름날에 땀을 흘리면서도, 혹은 칼바람 부는 추운 날 그 차디찬 물에 빨래를 해야만 했던 시절에서 벗어나 세탁 온도와 세탁 시간만 맞추어놓으면 빨래가 자동으로 처리되는 전자동 세탁기가 나온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다. 한번에 하는 세탁 시간은 분명히 줄어들었으니 세탁기는 시간 절약적인 기계였다. 그러나 등이 휠 것 같은 고통은 없어졌을지라도, 세탁에 드는 총시간은 세탁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결과적으로 오히려 증가했다. 때문에 여자들은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하여 세탁기는 여성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주부들을 세탁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는커녕 더욱 세탁일에 매달리도록 했다. 가사기술로서의 전기세탁기는 결과적으로 주부들에게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사기술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결과이자 가사노동의 강도를 줄인 대가인지도 모른다. (p.194-195)

 

 이처럼 미국은 서유럽과도 엄청난 격차를 벌이며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지만, 남녀의 고정된 역할은 변할 생각을 안 했다. 1950년대까지도 남녀의 영역 구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하퍼스(Harper’s)』지 1951년 12월호에 실린 미스터리물 소설가인 낸시 마비티(Nancy B. Mavity, 1890~1959)의 글은 여러모로 음미할 가치가 있다. 마비티는 당시 새로운 사회현상인 맞벌이 부부를 논하면서 미국의 장래를 어둡게 예측했다. 하지만 마비티의 글은 주부들이 아이들 양육과 집안일뿐만 아니라 직장의 여러 스트레스까지 감당해야 하는 힘든 상황을 걱정하는 글이 아니라, 맞벌이가 확대될수록 집안에서 남편들의 전통적인 지위가 흔들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이 글에 등장한 어떤 남자는 자신이 만일 부인을 직장에 내보냈다면 많이 부끄러웠을 것 같다고 답변했다. 아마 이 남자의 심정이 당시 미국 대다수 남자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즉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이 있기 전까지 미국 48개 주의 절반 가량이 결혼한 여성을 직장에 고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절반의 미국이 주부들의 임금노동 참여를 법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임금 없는 그림자노동에 만족하면서. (p.256-257)

 

 1928년 오리건주에서 조사한 가정주부의 노동시간 연구는 가전제품을 사용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하여 가사노동 시간을 측정하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모집단을 농촌의 주부와 도시의 주부로 구분했다. 즉, 도시 주부들이 전기화된 가정용 기계들, 즉 가전제품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을 거라는 전제 하에서 농촌 주부들과 비교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사 결과는 뜻밖이었다. 1920년대는 세탁기를 비롯한 주요 가전제품들이 중산층 가정에 도입되고 확산되던 시기였다. 그런데 여러 종류의 가전제품들이 웬만한 가정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에도 가사노동시간이 이전보다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비록 농촌에서는 288가구를, 도시에서는 154가구를 대상으로 하여 동일한 조건은 아니었지만, 농촌 주부의 가사노동시간이 주당 평균 61시간인 반면 도시 주부의 가사노동시간은 63.4시간으로 오히려 2.4시간이나 더 많았다. 즉, 매일의 가사노동량이 농촌 주부의 경우 약 8.7시간, 도시 주부의 경우 약 9시간이라는 의미였다. 이것은 분명 예상이나 상식에 부합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어떻게 가전제품을 더 많이 사용하고도 집안일이 줄어들지 않고, 가전제품을 더 많이 사용하는 도시의 가정주부들이 더 많은 시간을 가사노동에 사용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1929년 농업부 주관으로 여러 주들에서 진행했던 가사노동 사용시간 조사에서도 거의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또한 1945년 브린모어 대학의 경제학자들이 행한 조사에서도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이번에는 농촌, 소도시, 대도시로 구분하여 주부들이 가사노동에 사용한 시간을 측정했는데, 각각 주당 평균 60.55시간, 78.35시간, 80.57시간이었다. (p.272-273)

 

 진공청소기를 사용하면 힘 안 들이고 청소할 수 있는데 왜 먼지를 그냥 내버려 둔단 말인가? 청소기가 없을 때에야 너무 힘이 드니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청소를 하거나 혹은 본격적인 청소는 계절에 한 번 혹은 일 년에 두 번씩 해야 했지만, 이제 그럴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청결에 대한 인식이 20세기 초부터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강박적일 만큼 청결에 대한 기준이 향상되었다. 또한 거의 모든 집에 욕조가 비치되어 있고, 더운물이나 찬물도 수도꼭지만 돌리면 콸콸 나오는데 왜 아이들 목욕을 매일 못 시킨단 말인가? 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목욕을 못해야 하는가? 게다가 애들이 대여섯 명도 아니고 이제는 고작 두세 명인데 말이다. (p.288)

 

 이제 질병들은 통제 가능하기도 하고 예방 또한 가능해졌기 때문에 주부들이 가족의 건강, 나아가 유아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가정이 바뀌어야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주부들이 더 부지런히 청소하고 빨래하고 건강을 해치지 않는 음식들을 준비해야만 했다. 공공의 위생을 국가가 책임진다면, 가족의 위생은 누구보다도 주부가 책임져야만 했다. 따라서 주부들은 세균으로부터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 청결함을 유지해야만 했으며, 그러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주부는 당연히 도덕적으로 '비난' 대상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주부들과 나아가 대중을 대상으로 이러한 지식을 전파하기 위해 '가정과학'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p.291)

 

 그렇다면 노동 절약을 목표로 한 가사기술은 가정주부의 힘든 일은 줄여주었을지라도 가사노동시간은 줄여주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청결 기준의 강화와 육아와 관련한 영양학적 기준치의 증가 등의 사회적 요소들이 추가로 결합되면서 가전제품의 사용 빈도수가 증가했지만, 가사기술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여성들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주지 못했다. 가정에서 진행된 기계화와 전기화는 가사노동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혁명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많은 가전제품들이 미국 가정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오지도, 변화의 원동력도 제공하지 못했다. 미국에서의 가사기술은 단지 미국인들이 지키고자 하는 '사회적 규범', 즉 남녀의 노동에 있어서의 영역 구분이나 가정을 지켜야 하는 주부 등 전통적인 젠더의 역할이 유지, 나아가 강화되는 범위 내에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p.303-304)

 

 

하워드 진 :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불복종자 / 아거 / 인물과사상사

 

 "아버지는 평생 쥐꼬리만 한 보수를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나는 미국에서는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부자가 된다고 말하는 정치가들과 언론의 논평가들, 기업 중역들의 잘난 체하는 말을 들을 때면 언제나 분개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만약 가난하다면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보다도, 은행가나 정치가보다도, 열악한 일자리에서 일하고 있다면 실제로 더욱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한 내 아버지와 셀 수조차 없이 많은 다른 사람들, 남자와 여자들을 보면 이 말이 거짓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진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미국의 계급사회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분노했다.
 "내가 지니고 있는 계급적 분노는 10대 시절 생겨난 것이다.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집세를 내지 못하여 가재도구와 함께 길거리로 내쫓기는 것을 보면서, 경찰봉을 둘러찬 경찰들이 그 일을 감독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뭔가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 나는 그런 일들이 신의 섭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좀 생각한 뒤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운이 나빠 닥쳐온 우연적 재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 조직적이고 반복적으로 가해지는, 그리고 법에 의해 승인된 재난이었다." (p.22-23)

 

 흑인 대학에 가는 것에 대해 진은 별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일자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애틀랜타에 도착해 집을 구하러 다니면서 진은 남부 백인들의 뿌리 깊고 적대적인 인종차별과 맞닥뜨린다. 스펠먼대학에서 일한다고 하면 집을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흑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진은 흑인들이 받았던 끔찍하고 잔인한 인종차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다. 백인과 흑인은 식당에서든, 버스에서든 자리가 구별되어 있었다. 심지어 흑인이 백인과 함께 길을 걸을 때는 백인의 하인이라는 식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길거리 분위기가 싸늘해지기까지 했다.
 진이 처음 가르친 한 학생은 갓 태어난 쌍둥이 동생이 인큐베이터가 비어 있었음에도 '백인 전용'이라는 이유로 이를 이용하지 못해 죽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또 다른 학생은 버스에서 백인 여성 옆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저주를 받아야 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p.65-66)

 

 "1960년대에 한 하버드 법대생은 부모님들과 졸업생들 앞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우리나라의 거리들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대학들은 폭동과 소요를 일삼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파괴하려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완력을 동원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으로부터의 위험, 또 외부로부터의 위험. 우리는 법과 질서가 필요합니다. 법과 질서 없이 우리나라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긴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박수소리가 잦아들자, 그 학생은 청중들에게 조용히 말해주었다. '지금 말한 것들은 1932년 아돌프 히틀러가 연설한 것입니다.'" (p.89)

 

 진은 바로 그 점에 주목했다.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도서관에 묻혀 있던 미국사에서 패배한 이들의 역사를, 권력과 자본에 의해 피해를 당한 자들의 역사를 끄집어내 1980년 『미국 민중사』를 출간한다. 이 책은 누군가의 서평처럼 영웅과 악당이 자리를 바꾼 책이었다. 첫 장부터 진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사실은 탐욕을 위해 원주민들을 고문하고 살해한 잔혹한 인물이었음을 밝힌다. 그것도 콜럼버스가 남긴 기록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연이어 서부 개척의 역사가 인디언 학살의 역사였다는 것을, 인종차별주의가 정책적 산물이었음을,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노동자들이 겪은 참상을 밝혀냈다.
 『미국 민중사』는 여러모로 충격적인 책이었다. 이 책을 통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미국사의 추악한 면모가 드러났고, 미국 역대 정부의 허위와 기만과 위선이 드러났다. 그동안의 역사는 승리자의 역사였고, 패배자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채 잊혔다. 진은 그 숨겨진, 아니 은폐된 역사를 끄집어냈다.
 진은 "국가는 공동체가 아니며 그런 적도 없었다. 어떤 나라의 역사가 한 가족의 역사처럼 보이더라도 사실 정복자와 피정복자, 주인과 노예, 자본가와 노동자, 인종 및 성별상의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서 (때로는 폭발하지만 대부분은 억압되는) 이해관계의 격렬한 갈등을 감추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의 세계, 희생자와 가해자의 세계에서 알베르 카뮈의 표현처럼 가해자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 생각 있는 사람이 할 일"이라며 이 책에서 역사를 어떻게 서술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역사에서 선택하고 강조하는 행위로부터 나오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 피할 수 없는 문제에 있어서 나는 아라와크족의 시각에서 본 아메리카 대륙 발전의 역사를, 노예의 관점에서 본 헌법 제정의 역사를, 체로키족의 눈에 비친 앤드루 잭슨의 역사를, 뉴욕의 아일랜드인들이 본 남북전쟁의 역사를, 스코트 부대의 탈영병들이 본 멕시코 전쟁의 역사를, 로웰 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들의 눈에 비친 산업주의 발흥의 역사를, 쿠바인들이 본 스페인-미국 전쟁의 역사를, 루손섬(필리핀 군도의 본섬) 흑인 병사들의 눈에 비친 필리핀 정복의 역사를, 남부 농민의 시각에서 본 금박 시대(Golded Age)의 역사를, 사회주의자들이 본 제1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평화주의자들의 시각으로 본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할렘 흑인들의 눈에 비친 뉴딜의 역사를, 라틴아메리카의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느낀 전후 미 제국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노력하고자 한다." (p.94-97)

 

 "러들로 학살을 상세하게 이야기하기로 한 것 역시 주관적인(편견을 가진, 편협한) 결정이다. 나의 결정은 우리 역사에서 계급 분쟁의 외연과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처한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투쟁해야 했는지를 사람들이 알고, 과거 정부와 거대 신문들이 계급투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나의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역사에서 수집할 수 있는 정보를 큰 덩어리째 빠뜨린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이 빠졌는가는 사람들이 받는 역사교육이라는 면에서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이 길로, 혹은 저 길로 움직이게 할 수도 있고 꼼짝 않고 제자리에 서 있게 할 수도 있다—기차에 가만히 타고 있는 사람도 이미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데, 가만히 있다는 것은 곧 그 방향을 받아들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내가 의도하는 바는 시민들이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 즉 평등, 민주주의, 평화, 국경 없는 세계를 위해 움직이도록 도와줄 수 있는 주제들을 선택하고 그러한 측면들을 강조하자는 것이다. 사실을 감춤으로써가 아니라 축적된 지식의 정설에 사실을 보태고 정보의 시장을 활짝 열어젖힘으로써." (p.101-102)

 

 "9﹒11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슬퍼해야 하는 걸로 되어 있는데, 산업재해로 자기 직장에서 죽은 수천 명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왜 슬퍼하지 않는가?"
 진은 이 질문을 더 확장할 수 있다며 이렇게 묻는다. "식량과 의료 지원이 되지 않아 이 나라에서 매해 죽어가는 수천 명의 아이들에 대해서는 어찌해서 우리는 슬퍼하고 있지 않은가?"
 진은 온 나라가 전쟁에만 집중하고 있는 사이 미국의 중요한 문제는 외면받는 현실을 일깨우려 했다. 그래서 전쟁을 비판하는 일에만 열중하는 것을 경계했다. 진은 오히려 적은 가까운 곳에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최대의 적은 해외의 어느 나라 동굴이나 군사기지에 있는 게 아니라, 기업의 이사회실과 정부기관의 사무실에 있다. 그곳에서는 의도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이윤과 권력을 추구하다 보니 그에 따라 부수적으로 생기는 수백만의 죽음과 비극을 가져오는 결정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p.115-116)

 

 "민주주의란 대통령 꽁무니에 한 줄로 늘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란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정부를 의심할 수 있으며,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둘러보고 알아내려 노력하는 겁니다. 그래서 정부가 우리를 속인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될 수 있는 한 큰 목소리로 정부를 성토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그래서 진은 민주 시민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진은 "학교에서 젊은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해서는 배우지만 극소수의 부유층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그들 반대편에는 생사의 경계까지 밀려나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 자녀들을 먹이기 위해, 또 학교에 보내기 위해 생활고와 싸우는 수많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계급사회의 실상은 전혀 배우지 못하는 실정"이 미국 교육 체계의 커다란 결함이라고 말한다. (p.130)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 양승훈 / 오월의봄

 

 2016년 거제, 그리고 그 몇 년 전 울산에 구조조정의 여파가 몰아닥쳤을 때 그녀들은 전체 인적 구조조정의 '숫자'를 맞추기 위한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1,000명이 넘는 여성 사무보조직들은 부지불식간에 회사를 등지게 된다. ⟨밥.꽃.양⟩(2001)이라는 독립영화는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자 파업 과정에서 해고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바 있다.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사건이 벌어질 때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을 지키기 위한 대가로 당시까지 직영으로 운영하던 식당을 외주화하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식당 여성 노동자들은 해고당했다. 이들은 남성들처럼 '생계 부양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땐뽀걸즈'였다가 사무보조로 취업해 10년을 넘게 회사를 다닌 여성 노동자들도 같은 이유로 2015년 명예퇴직했다. 2000년대 초중반 농협에서도 부부가 직원이면 둘 중 여성 노동자가 명예퇴직으로 내몰렸다.

 

 한국의 조선소 엔지니어들은 처음에는 생산 설계 도면 정도를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1980년대를 지나면서는 유럽이나 일본에서 사와야 했던 상세 설계 도면을 직접 그리고, 나아가 한국만의 '표준 선형'을 담은 선박 기본 설계를 만들어내는 수준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1990년대가 되자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조선공학과 입학 정원이 미달되기 시작한다. 대학생들이 도시와 먼 조선소에서 근무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은 설계를 최소화하는 선택을 했다. 선주가 원하는 배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표준 선형 설계를 활용하고 자동화를 통해 빠르게 선박을 건조하는 방식이었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작업장 엔지니어들의 전성기가 꽃을 피웠다. 그들은 공학 전문가라기보다는 특정한 분야의 '기능'만을 배운 이들이었지만, 기능올림픽 선두를 달린 끈기와 집념으로 선박 설계를 통합해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해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작업장 엔지니어들의 끝없는 시도와 실패가 조선산업을 청춘으로 이끈 셈이다.

 

 총체적인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력을 충원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여성 엔지니어 채용은 특히 중요한 화두이다. 산업도시를 재생산하고 엔지니어의 인적 다양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초 집단인 중공업 현장에 여성 엔지니어를 충분히 채용하는 것이다. 2016년 산업기술 인력 수급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선∙석유화학∙자동차∙기계 등의 산업을 보유한 경남, 울산, 전남의 여성 인력 채용 비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미래'가 창창한 20대 여성의 고용률도 7% 이내에 그쳤다. 공대 신입생의 4분의 1 가량이 여학생이고, 고등학교 자연계에도 여학생의 비율이 절반이 넘지만 기업은 여전히 '제조업은 남자'라는 편견으로 일관하고 있다. '남성 공대생'의 안전한 전공 선택지로 간주되는 '전화기'(전기∙전자, 화공, 기계)를 선택한 여학생들은 동기 남학생보다 더 높은 취업의 벽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여성들이 지방 근무를 기피한다고 단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지방 근무를 '회사가 막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양한 인력과 관용적인 제도를 겸비한 조직에서 더 높은 생산성과 혁신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조직론의 상식이다. 설계 엔지니어 직군의 성별 편향성은 합리적인 평가를 통해 나온 결과가 아니라, 생산직 노동자들의 성별에서 추론된 빗나간 성 역할 담론이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발생한 일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업무를 사무실에서 처리하고, 현장의 업무도 실제 안전과 크게 상관없는 협의가 주를 이루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엔지니어 집단이 남초 집단이라는 편견은 그야말로 얼토당토않다.

 

 해양플랜트 건조가 한창이던 2010년대 중반,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온 신입사원들의 악전고투는 끝이 없었다. 배우는 동시에 모든 상황에 대응해야 했다. 신입사원 한 명이 회사가 기대하는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들에게는 이런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마치 프로야구에서 1차 드래프트 1순위로 고교 유망주 투수를 뽑아다가 첫 해에 선발, 중간, 마무리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등판시켜 100이닝을 넘게 던지게 하며 혹사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감독이 원하는 바는 많은 실전 경험을 시킴으로써 팀을 대표하는 에이스로 선수를 키우는 것이겠지만, 선수에게 돌아오는 것은 팔꿈치 접합 수술이나 어깨 관절와순 손상 수술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신입사원에게 지나치게 높은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해양플랜트와 심해플랜트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던 조선 3사는 어쩌면 신입 설계 엔지니어를 충원함으로써 어려움에 도전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을 해야 했던 건 아닐까? 외려 회사와 국적에 상관없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뽑아 내부에서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연봉을 더 주는 한이 있어도 이직 시장을 활용해 전문가를 영입하고, 가능하면 해외에서도 충원을 하는 방식이 필요했다. 물론 이런 방식이 한국의 정서 혹은 조선산업과 같은 중후장대 산업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많다. 하지만 조선산업의 역사를 보면, 초창기 조선소의 주춧돌을 세운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현대중공업의 초대 조선소 사장 역시 덴마크인이었다. 대우조선과 삼성중공업도 외국인 고문을 통해 초창기 기술의 틀을 마련했다. 중역으로 외국인 엔지니어를 채용하는 것을 꺼릴 이유는 전혀 없는 셈이다.

 

 2000년대 이후부터 사내하청업체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새로 확장한 사업인 해양플랜트 건조의 90%를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태반이 2000년대 중반 한진중공업의 물량이 줄어들고, STX조선해양, 성동조선 등 중소형 조선소가 불황에 접어든 이후에 조선업계에 발을 들인 이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위험천만한 작업들이 주어졌지만, 그에 비해 보상은 미미했다. 도리어 경기 침체의 국면 속에서 소리 소문 없는 도산의 릴레이가 이어졌다.
 작업 난이도가 높거나 위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사내하청업체에 배당하는 것을 흔히 '위험의 외주화'라고 한다. 1980년대에 입사해 1990년대까지 조선산업의 초석을 마련했던 생산직 노동자들도 200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점차 노쇠하기 시작한다. 1980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사했다고 가정해 보면 2010년에는 최소 50세에 육박하는 셈이다. 게다가 당시는 노동조합 운동의 성과로 작업중지권이 적용되고 산업재해가 광범위하게 인정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용접이나 도장, 의장품 설치, 케이블 포설 결선 등의 업무를 맡던 정규직 생산직 노동자들은 이제 가능하면 생산 지원 업무를 맡고자 했다. 따라서 50%가량이 생산 지원 업무로 전환되었다. 모두가 조선소에 입사해 위험천만한 일들을 다 해본 입장이기에 매일같이 기름때를 묻혀가며 용접 불꽃이 튀는 곳에서 작업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똑같다. 즉 그들은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을 했을 따름이다. 직접생산 업무를 맡는다고 다른 직무에 비해 돈을 더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웬만하면 HSE 요원이나 공구 창고 담당자 같은 직무로 전환하고 싶어 했다. 이제 자식들도 장성했는데 특별히 돈을 더 벌기 위해 잔업을 뛰면서까지 악착같이 일할 필요는 없었다. 상선을 맡던 정규직 생산직 노동자들이 그나마 제자리를 지킨 경우에 해당한다.

 

 공정에 쫓기다 보면 원칙은 결국 '유도리'에게 패한다. 실적을 달성하지 못해 다음 날 깨지는 것에 비하면, 선배 노동자가 "이 정도는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일을 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그 정도의 일을 한다고 꼭 사고가 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작업자들이 그렇게 판단하면 사고 위험은 높아지게 된다.
 이런 사고들은 평일 낮에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평일 낮에 완결 짓지 못한 일들을 휴일과 밤 시간에 쫓기듯 급박하게 처리하며 사고에 노출된다(때로 하청업체들은 오히려 밤 시간에 일하는 것을 선호하기도 한다. 그때가 안전 수칙이 그나마 느슨해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중대 사고가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포함되지 않은 중대 사고는 드물다.

 

 734억 원. 경상남도가 파악한 2017년 말까지 체불된 임금의 총액이다. 이 중 대부분은 거제와 통영에서 발생한 것들이다. 임금이 체불된 노동자는 총 1만 7,016명. 1인당 431만 원가량의 임금이 체불되었다. 대부분의 임금 체불은 조선소 물량팀에서 발생했다. 수익을 내지 못한 임가공 협력업체들이 도산하면서 이들의 임금이 체불된 것이다. 2016년에는 체불 임금이 943억까지 증가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물량팀 노동자들은 한진중공업이 위기를 맞고 통영과 고성의 조선소들이 도산했을 때부터 일감을 찾아 전전하던 이들이거나 일거리를 찾아 전국에서 몰려온 이들이다. 경남권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가족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양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조직의 매우 중요한 지표이다. 조직은 일의 구조를 살피는 사람도 필요로 하고, 그것들을 추진력 있게 집행하는 사람도 필요로 한다. 다양성 없이 한쪽으로만 편향되면 모든 판단이 '집단 사고(group thinking)'에 갇히게 되어 조직의 미래가 불투명해진다는 것은 조직 이론에서 꽤나 자명한 이야기다. 조선산업이 위기를 겪고, 사람들이 조직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조직은 점차 다양성을 잃어갔다. 다양성의 상실은 조선산업의 위기에 따른 결과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다양성보다는 조선산업 부양에만 집중해온 산업도시 거제의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했다.

 

 '국민 세금'이나 축내는 골칫덩이가 된 사람들은 억울할 따름이다. 한때 효자 산업으로 불렸던 조선소에서 그저 산업역군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한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거제도가 오로지 조선산업만 영위하는 도시가 된 것은 전적으로 국가의 산업 정책 탓이다. 따라서 이들이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정당하다. 회사를 방만하게 운영하고, CEO의 지시로 분식회계를 저지르고, 정권과 산업은행의 정경유착으로 지위를 보전했던 사례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어 '살려둘 필요가 없는 기업'이라는 여론이 나돌았을 때, 조선소 노동자들이 이런 따가운 시선에 어리둥절해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조선산업의 위기는 오로지 생산성 하락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사업 팽창에 따른 리스크를 제어하지 못한 것은 물론, 연임에 욕심을 부린 전임 사장들의 분식회계나 '저가 수주'(대우조선), 해양산업의 미래에 대한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 등 위기를 촉발한 요인들은 다양하다. 게다가 사내하청 미숙련 노동자들이 큰 폭으로 증가했던 반면, 위기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숙련 노동자들의 힘은 약화되었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특히 해양플랜트 작업은 대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수행한 탓에, 직영 작업자들은 딱히 역량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위기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지를 둘러싼 의견도 분분했다. 베테랑 생산직들은 온몸을 바쳐 예전의 혁신문화를 되살리고 싶어 한 데 비해, 혁신의 순간을 경험한 적 없는 젊은 정규직 생산직 노동자들은 '일과 삶의 균형', 즉 '저녁이 있는 삶'을 훨씬 더 중시했다. 해양플랜트 작업에서 발생했던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만한 똑똑한 엔지니어들과 계약 담당자들 다수는 이미 회사를 떠난 뒤였다. 조선소에 남아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는 '갈 데 없어 남았다'는 열패감이 남겨졌다.
 그럼에도 조선소의 하루는 계속되고 있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여전히 야드에서 과업을 놓고 치열하게 싸운다. 구조적인 문제, 여러 층위의 적폐가 누적되어 발생한 문제는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늘 그래왔듯 이들은 당장 현장의 문제와 씨름할 뿐이다. "엔지니어는 하루 종일 문제들을 심사숙고한다. 그들은 그 문제들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고 걱정한다." 그게 그들의 숙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비투자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조선산업의 세계적인 호황' 덕택이었다. 중국이 경제를 개방하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적 팽창의 단계를 밟게 되면서 물류량 자체가 증가했다. 이에 따라 해상 운송이 늘어나면서 많은 선박들이 필요해졌다. 당시 중국 조선산업은 태동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모든 물량, 특히 대형 운송에 필요한 대형 벌크선, 컨테이너선 등을 건조할 수 없었다. 일본의 표준선 역시 별로 쓸모가 없었는데, 도크 대형화와 메가 블록 건조 공법이 만들어내는 '규모의 효율성'을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1990년대는 생산 혁신 운동이 벌어져 생산성이 향상되고 품질이 비약적으로 개선되던 시기였다. 20여 년에 걸친 막대한 투자와 조선소의 노력이 호황과 중국 경제의 팽창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수요와 만났고, 이 덕택에 한국은 조선산업의 패권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1990년대에 다수의 대학들에 조선공학과가 설립되면서 장기적으로 설계 엔지니어를 확보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되었다. 새로운 공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선박 모델을 만들고 건조를 통해 구현할 환경이 구축된 것이다.

 

 조선산업의 가격 경쟁력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현재는 인건비가 저렴한 데 비해 기술력이 떨어지는 중국과 인건비는 비싸지만 압도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 사이에 한국이 '샌드위치'처럼 끼여 있다는 식의 담론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도래할 위기의 원인이 단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중국 조선업에 있다고 할 수만은 없다. 외려 경쟁은 진정으로 글로벌하게 다가올 수 있다. 2017년 말, 조선 3사가 해양플랜트 1기(FPSO)에 대한 입찰에 들어간 적이 있다. 당시 조선 3사는 해양플랜트 수주 잔량이 줄어들어 먹거리가 갈급했기 때문에, 최저가, 즉 손익분기점을 달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입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종 수주를 따낸 말레이시아 조선소는 한국의 조선소들보다 20% 가깝게 싼 가격으로 입찰가를 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싱가포르에 상주하는 유럽 엔지니어링 회사 지부의 축적된 설계와 시공 경험을 가지고 있는 엔지니어, 동남아 역내에 산업 인프라 투자를 지속하려는 싱가포르 정부,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노동자의 조합이 예상치 못한 대항마로 나타난 것이다. 이 조합은 한국의 조선산업이 앞으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경쟁 압력에 노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불어 유럽의 조선소들은 자사가 보유한 설계 부문을 독립 회사로 분사했다. 자신들의 생산에 필요한 설계만을 공급하기보다는 세계 곳곳에서 건조될 고부가가치 선박 및 해양플랜트의 설계를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따라서 해양플랜트 기본 설계를 유럽 소재 엔지니어링 회사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젊은 엔지니어들이 유럽 엔지니어링 회사들이 제작한 기본 설계를 검증해 한국의 건조 현장에 적합한 형태로 조정하기 위해서 유럽으로 파견을 가기는 하지만, 그들이 수십 년 동안 축적한 기술력을 곧바로 이해하고 모방해 따라잡기는 어렵다. 많은 선주와 오일 메이저 회사들은 유럽 엔지니어링 회사들의 기본 설계를 선호한다. 한국 조선소들이 당장 비집고 들어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해양플랜트의 국산화율은 현저히 떨어진다. 90% 이상 국산 기자재를 활용하는 선박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실제 공정에서도 해외 기자재를 활용해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많다. 납기가 일정하지 않고, 운송 중 품질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건조 작업 중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이 지연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건조사가 '갑'으로서 할 수 있는 조치는 사실상 없다. 다른 곳에서 기자재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통 주문주들은 각각의 기자재에 대해 '주문주 승인' 인증을 주는데 조선소는 그 목록 안에서만 기자재를 대체할 수 있다. 물론 이는 협상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기본 설계에 대한 장악력을 갖춰야만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다.
 흔히 알려진 '말뫼의 눈물'과 달리 유럽의 조선소들은 이처럼 실제로는 기자재업체들의 경쟁력을 끌어올려 중소기업에서 '강소기업'으로 키워냈다. 인건비가 많이 들어가는 건조 작업을 최종 완성품 시장에서 철수하는 방안만으로 말이다. 고학력의 엔지니어들은 전 세계를 돌며 고부가가치 선박과 해양플랜트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나머지 조선소 인력들은 조선소 내에서 필요한 기자재를 제작하는 쪽으로 업종을 전환한 것이다.

 

 선진 제조업 국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소재, 부품, 장비' 업계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분석이 있다. 일본과 독일이 제조업에서 가장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분야 역시 '소재, 부품, 장비'이다. 메르세데스 벤츠나 폭스바겐, BMW라는 최종 완성품의 기저에서 경쟁력을 구축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중소기업들이다. 그들은 최고의 부품을 만들어 세계 시장에 공급하며, 미국이나 한국, 일본 등에도 수출할 수 있는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스마트폰 시장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로열티나 부가가치 측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스마트폰의 시스템 메모리와 CPU다. 한국이 여태까지 진출하지 못하고 있는 시장 중 하나다. 최종 생산품인 선박, 스마트폰, 자동차 위에는 '알짜 중소기업'들이 제작하는 고부가가치 '알짜 부품'이 존재하는 것이다.

 

 연공서열제는 일본에서 도입되었다. 연공서열제가 가능했던 것은 누적된 숙련이 시간이 지날수록 생산성에 더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노동자들이 매일매일 개선 활동을 하면서 마치 수도승처럼 일에 몰입했던 경험과 맞물려 있다. 숙련도와 역량을 측정할 수 있는 정확한 방식이 없었기 때문에 근속 연수를 기준으로 임금을 지급했던 것이다. 조선산업에서도 숙련을 측정할 수 있는 분야는 용접 정도에 그친다. 용접은 노동자의 숙련도에 따라 품질 차가 크고, 다양한 자세의 용접을 유연하고 고르게 수행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숙련도를 파악할 수 있다. 국가 공인 용접 자격증은 물론 주문주나 선급 등에서 규정하는 각종 인증도 있다. 용접사의 기량이 좌우하는 작업인 것이다. 반면 강판을 가공하거나 절단하는 작업, 그리고 블록을 조립하는 공정 등은 자동화가 많이 진척된 분야다. 예전처럼 노동자들의 숙련도보다 설비투자의 힘이 더욱더 강해지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조선 3사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가공, 절단, 조립 공정에서 제외시켜 의장이나 탑재 같은 숙련이 요구되는 공정으로 전환배치시키려 한다. 최근 많은 사업장에서 '생산 구역 재배치'가 쟁점으로 오르내리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