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노동 / 전기가오리
과로사 제2884호
택시기사 이모씨는 2019년 6월 27일 0시 55분 요금 문제로 승객과 시비가 붙어 출동한 경찰관 앞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64세. 고인은 매일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2시까지 근무했다. 만성적인 과로와 사망 당시 승객과의 말다툼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산재 원인으로 판정됐다. (p.8)
과로사 제1612호
인천의 한 플라스틱 사출업체의 외국인 노동자 D씨는 2017년 11월 29일 오전 7시 회사에서 쓰러져 같은 해 12월 4일 숨졌다. 49세. 2012년 9월 입사한 고인은 주야간 2교대 근무로 하루 평균 11.5시간을 일했다. 사망 전 주당 평균 64시간 이상 근무했고, 추가적인 야근 부담도 컸다. (p.9)
과로사 제570호
버스기사 이모씨는 2019년 1월 17일 0시 30분 마을버스 막차 운행을 마치고 회사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 쓰러졌다. 긴급 이송된 다음 날 오후 4시 30분 숨졌다. 59세. 고인은 차고지에서 마을버스를 갖고 오거나 주차를 위해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사망 전 1주일간 73시간 37분을 일했다. 사인은 호흡중추마비. (p.9)
과로사 제545호
김모씨는 2019년 3월 26일 자택에서 쓰러져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전날 야간 맨홀작업을 끝낸 고인은 3월 31일 오전 10시 3분 숨졌다. 57세. 고인은 야간조로 서울 강동구∙송파구, 경기 하남시 일대의 전력구 설비를 관리했다. 고인은 사망 전 16시간 연속 야간업무를 했으며 2~3km에 달하는 지하 전력구 구간 업무의 긴장도가 높았다. 회사는 자택 대기 중인 고인에게 스마트밴드를 착용하게 해 실시간 호출했다. (p.14)
과로사 제2365호
선모씨는 2019년 4월 27일 오전 6시 40분 서울 마포구 홍익대 중앙도서관 인근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56세. 고인은 이른 새벽 출근했다가 그날 오전 10시 59분 숨졌다. 고인은 외주업체 교체로 정리해고 1순위로 불안감을 호소했다. 대학이 도입한 무인 경비시스템에 따른 경비 인력 감소로 인해 노동 강도가 높아졌다. 고인은 사망 전 12주간 주당 평균 80시간 33분을 일하는 만성적 과로에 노출됐다. (p.25)
과로사 제51호
버스기사 김모씨는 2018년 12월 19일 오후 1시 인천의 버스 차고지에서 교대 직전 본인 차량을 주차하던 중 쓰러져 당일 오후 2시 6분 숨졌다. 62세. 하루 평균 11시간 이상 근무했고 휴게시간이 따로 없었다. 배차 간격 사이 10~20분의 대기시간에 화장실을 가거나 식사를 했다. (p.26)
사고사 2020-61-21-005
터널 굴착 경력 8개월의 미얀마 노동자 N씨는 2020년 6월 10일 밤 10시 20분 전남 광양시 소재 전력구공사 갱도에서 자신이 운전하던 축전차량 하부와 레일 사이에 끼여 숨진 채 발견됐다. 35세. 현장 CCTV에는 고인이 홀로 작업하다 최고시속 15~20km로 달리던 축전차에 끼이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p.29)
과로사 제1686호
아파트 경비원 이모씨는 2019년 1월 19일 0시 37분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71세. 고인은 사망 직전 3개월간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사망 전 그의 평균 근무시간은 주당 75시간 10분으로 집계됐다. 고인은 지난 4년 5개월간 24시간 맞교대로 일했지만 온전한 휴게시간을 보장받지 못했다. 숨진 그의 품에는 재활용 페트병이 안겨 있었다. (p.30)
사고사 2020-41-11-002
배달노동자 오씨는 2020년 3월 6일 밤 10시 20분 세종시에서 치킨을 배달하던 중 버스와 충돌해 숨졌다. 27세. 사고 한 달 전 배달 일을 시작한 고인은 매일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 일하며 하루 25건의 치킨 배달을 했다. 사고 당일은 일주일 중 치킨 주문이 가장 많은 금요일이었다. (p.34)
사고사 2020-85-11-003
경남 밀양시의 한 주물공장에서 일하던 태국 노동자 P는 2020년 6월 3일 오전 7시 10분 공장 도가니에서 발생한 원인 미상의 폭발로 전신화상을 입고 긴급 후송된 지 하루 만인 4일 오전 4시 17분 숨졌다. 31세. 4년 경력의 숙련노동자인 고인은 전날 밤샘 작업을 했지만 사고 당시 방열복을 착용하지 않았다. 업체는 숨진 노동자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특별안전보건교육을 하지 않았다. (p.35)
과로사 제68호
서울의 주상복합건물 전기기사였던 최모씨는 2019년 4월 19일 오전 8시 근무지 방재실 간이침대에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다. 41세. 2인 1조 24시간 맞교대 근무 형태였지만 1월 24일부터 18차례 1인 근무를 했다. 고인은 돌발 상황에 대비해 모니터링하는 업무로 하루 수면시간이 3시간에 불과했다. (p.41)
과로사 제702호
전남 광주의 택시기사 임모씨는 2019년 12월 13일 오전 2시 30분 승객을 내려준 직후 노상에서 쓰러졌다. 61세. 고인은 고정 야간근무자로 매일 평균 12시간 운행했다. 그의 사망 직전 1주일간 타코미터 기록으로 총 95시간 39분을 일해 고용노동부 고시 만성 과로 기준치를 30시간 이상 초과했다. (p.45)
조리 과정을 보니 오기 전에 찾아봤던 조리실 사고들이 이해됐다. 2014년 서울 한 초등학교에서 일하던 조리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설거지를 하려고 뜨거운 물을 받아둔 고무통(가로 170센티미터 높이 40센티미터)에 빠져 화상을 입은 조리원은 치료 과정에서 결국 목숨을 잃었다. 위, 아래, 옆 곳곳에 조리기구들이 튀어나와 있는 좁은 조리실에서 적은 인원이 빠른 시간 안에 수백 명에서 수천 명분 음식을 해야 하니 언제든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겠다 싶었다.
알려진 급식 조리원 사망 사건은 더 있다. 2018년 4월 경기도의 한 중학교에서 10년 동안 일한 한 급식 조리원이 폐암으로 숨졌다. 그런데 이 학교에선 2016년부터 조리사들이 연이어 이상 증세를 보였다. 2016년 6월 두 조리원이 구토 증상으로 통원∙입원 치료를 받았고, 2017년 5월엔 또 다른 조리원이 뇌출혈로 쓰러져 1년 가까이 뇌경색과 오른쪽 전신 마비 후유증을 겪고 있다. 이 학교 급식 조리실에 있던, 공기를 조절해주는 공조기와 후드가 낡다 못해 1년 넘게 고장 난 상태였던 것으로 조사됐다. 2009년엔 대구에서 학교 급식 조리원이 식재료를 옮기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뇌출혈로 숨졌고, 2007년엔 광주에서 학교 급식 조리원이 조리 중 이동하다가 미끄러져 급식실 중앙 기둥에 머리를 부딪힌 뒤 숨진 사건도 있었다.
학교 급식 조리실이 단체급식 조리실 중 유독 큰 사고가 많은 건 아니다. 그나마 학교 급식 조리원 중엔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에 가입한 사람들이 있어서 산재사고가 밖으로 알려지기라도 하는 것이다. 일반 단체급식 현장에선 사고가 나도 산재 처리는커녕 쉬쉬하는 경우가 많다. 물과 불, 칼을 함께 쓰는 곳이 바로 조리실이니 사고 위험이 클 수밖에 없다. 조리원들은 몸도 많이 고되다. (p.58-60)
더 많이 공부하면 더 많이 벌게 될까 / 필립 브라운, 휴 로더, 데이비드 애쉬턴 / 개마고원
신자유주의의 교리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도입된 복지 제도가 잘못된 것이었다는 믿음을 설파했다. 자유시장이 재능이 있거나 성실하기만 하면 누구나 적절히 보상받을 수 있는 공정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는데도, 정부가 복지 제도란 미명 아래 실패와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보상을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신자유주의 이념이 확산되면서 개인과 가정의 운명은 그들이 가진 지식∙기술∙자격증들의 시장가치를 증가시키거나, 최소한 유지하는 데 달려 있게 됐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술, 그리고 혁신에 의존할수록 기회가 늘어나는 이런 지식경제에서는 직업과 그에 따른 보상은 지식을 업그레이드해서 경쟁력이 높아진 개인들에게로 흘러가기 마련이라 여겨졌다. (p.13-14)
"배운 만큼 번다"는 믿음 속에서 공부한 많은 미국인들은 세상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품고 있다. 실상은 세상이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주지 않고 있는데도 말이다. (p.15)
독일의 웹사이트인 잡덤핑은 역경매 방식의 대표적인 예다. 이 사이트에서는 청소∙사무직∙케이터링 등의 업무를 상한가와 함께 제시한다. 그러면 구직자들이 경쟁적으로 낮은 가격을 부르고 결국엔 가장 낮은 임금을 제시한 이가 일을 낙찰받게 된다.
이런 역경매 방식이 미국의 대학 졸업자들에게도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점점 깨닫고 있다. 이런 일자리 역경매는 월급 봉투를 얇게 할 뿐만 아니라 노동시간 연장, 퇴직금 축소, 건강보험 혜택 축소, 직업 불안정성의 증가로 이어진다. 노동자들이 덜 받고 더 일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화 초기 단계에서는 역경매 방식이 미국의 저숙련 노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였다. 이제는 높은 생활수준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전문직을 놓고서도 미국의 학생, 노동자들이 보호장비도 없이 싸움판으로 내몰리고 있다. (p.18-19)
개인적인 자유와 지적 호기심은 생계를 위한 경쟁에서 부차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개인의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영역의 모든 측면이 앞서 나가기 위한 경쟁과 연관을 맺는다. 누구에게나 저렴한 비용으로 교육을 받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개인의 노력과 실력에 따라 안정된 삶을 꾸릴 수 있도록 한다는 기회의 바겐은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기는커녕 기회의 덫이 되어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도록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남들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 똑같은 전략을 취한다면, 예컨대 모두가 학위를 딴다거나 상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장시간 일한다고 하면 아무도 앞서갈 수 없는 덫에 걸리게 된다. (p.26-27)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는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소수가 누리는 것을 가질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임금 격차는 교육이나 기술 습득으로는 좁혀질 수 없다. 글로벌 노동시장은 이미 잘 교육받은 저임금 노동자들로 포화상태이기 때문이다. 개인과 국가의 경제적 성공이 인적자본에 대한 광범위하고 효율적인 투자에 달려 있는 '인적자본의 시대'가 열리기는커녕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 수익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고용주들이 생산성 높은 노동력으로부터 이익을 찾아내기 때문에 고급 인력의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창출해낸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지금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딴 세상 얘기다. 즉, 미국에서 고등교육의 확대로 중산층이 증가하고 사회계층 간 이동이 늘어났던 20세기 후반과 같은 시대에나 가능할 법한 얘기다. (p.27-28)
이런 상황은 불가피하게(그리고 원하는 대로) 정부의 역할을 축소시켰으며, 정부가 더 이상 고용을 보장해주지 않는 시대를 불러왔다. 자유무역의 국제적 규칙대로 오직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능력을 배웠느냐 여부에 따라 고용이 좌우됐다. 이는 각 개인이 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함을 의미했다. 정부 역시 고학력 노동자의 공급 확대를 요구하는 기업을 위해, 개인과 가정이 더 많은 돈을 교육에 쏟아부어야 한다고 부추겼다. 실업과 가난 등으로 교육에 투자할 돈이 없는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그 누구도 탓할 수 없게 돼버렸다. 오직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 외에는. (p.48-49)
인재전쟁에 대해 우리와 이야기를 나눈 여러 기업의 고위 임원진들은 "경쟁이 너무 치열해지면서 이제는 배울 시간도 없다"는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털어놓았다. 직원들의 금융서비스 업무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한 부서장은 1970년대에 자신이 처음 입사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대학을 졸업하고 갓 들어온 신입사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다. "최소 1~2년은 사내 교육을 받은 후, 다양한 훈련을 거친 다음에 현장에 투입됐죠. 그러나 지금은 그런 프로그램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업의 최대 목표는 신입사원으로부터 얼마나 빨리 높은 생산성을 뽑아낼 수 있느냐이다. 만약 예전처럼 1~2년의 교육과 훈련을 거쳐야 한다면, 그 일자리는 애초부터 신입사원이 아니라 경력사원에게 주어질 것이다. (p.147)
미국 경제가 호황기였을 때에도 혁신적인 산업 분야에서 고급기술을 가진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상당히 증가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노동통계국에서는 일자리를 창출하는 산업은 대부분 고등교육이 필요한 분야라는 추정을 내놓고 있다. 이런 전망과는 달리 실제로는 대다수 사람들이 낮은 교육 수준과 간단한 직업교육만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에서 지금껏 일해왔듯 앞으로도 일하게 될 것이다. 이는 노동통계국이 내놓은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학사학위 이상 소지자를 필요로 하는 일자리 비중이 2006년 20.6%에서 2016년 21.7%로 거의 제자리에 머물 것이다. 대학교육이 필요한 일자리는 전체의 5분의 1에 불과하며 전체 노동력의 3분의 1은 여전히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고 약간의 교육만 받으면 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p.207)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보다 앞서가려고 노력하면서 뜻하지 않은 사회적 병목현상이 발생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노력(예컨대 명문대에 진학한다거나 이력서를 빛낼 자원봉사활동을 하거나 상사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늦게까지 일하는 것 등)을 하는 사람이 몇 명 안 된다면, 이런 전략이 통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비슷한 전략을 구사한다면 아무도 앞서갈 수 없다. 진입장벽을 높일 뿐이며 장애물의 숫자만 늘릴 뿐이다. "모든 이들이 까치발로 서면 누구도 더 잘 볼 수 없다." 그러나 당신만 까치발을 안 들면 아예 볼 기회조차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하고 싶은 미국인들은 성공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같은 경쟁에 뛰어드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기회의 바겐'이 바로 기회의 덫이 되고 만 것이다. (p.225-226)
계층화된 사회일수록 지위가 중요하다. 모두가 최고의 대학에 진학하거나 기업의 임원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자리들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위를 공정하게 배분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이다. 개인이 노력해서 거둔 성취나 실패에 주목하는 것은 초점을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하라는 격려를 받지만 우리가 모두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고 거기서 발휘하는 능력에 따라 대우하는 실력주의 사회란 결국 어떤 측면에선 불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는 사회일 뿐, 사회적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자격을 갖춘다 하더라도 소수의 승자가 얻는 것을 나머지 전부는 얻지 못한다. (p.227-228)
성과를 더 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들, 모두가 똑같이 그만큼의 노력을 한다면 내겐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남들과 차별화하려고 끊임없이 쏟는 노력에 드는 비용만 고스란히 개인이 부담한다. (p.234)
기회의 덫에 걸린 개인들이 구직시장에서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지불해야 하는 비용만 불어났다. 기회라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확장시키고 꿈을 실현시켜주기보다는 사람들을 자기중심적으로 만들고, 스트레스를 더 받게 했다. 사람들은 갈수록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게 됐다. 더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에 쏟았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은 기회의 양극화라는 벽에 가로막혔기 때문에 최소한 애초부터 경쟁이 불공정했다며 사회를 탓하기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산층 출신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기회를 부여받았는데도 성공하지 못한 건 다 자기 탓이라고 여기기 쉽다. 심지어 경기 침체기에도 사람들은 노력을 열심히 안 했기 때문에 취직을 못했다는 타박을 받는다. (p.234-235)
원래 스포츠∙취미∙봉사활동∙자기계발 등은 재미로 혹은 자기실현 차원이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에서 하는 일들이다. 그러나 직업에서의 성공을 좇는 이들에게는 이런 활동들은 이력서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중요한 목록이 된다. 잘 사는 집 출신이고 그로 인해 각종 혜택을 받은 삶을 살았다는 것만으로는 크게 어필하지 못한다. 우리가 한 일들은 단순히 소중한 인생 경험으로 간직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 프로젝트 차원에서 개인자본으로 포장되어야 한다. (p.236-237)
그는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정신과 의사인 데이나 루크가 겪은 사례를 예로 들었다. 언젠가부터 그녀에게 학습장애 징후가 있는지 검사를 받으러 오는 학생이 갑자기 늘었다. 알고 봤더니 한 대학이 장애가 있는 학생들에게 SAT에서 추가 시간을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여유가 있는 부모들은 자녀가 추가 시간을 얻어서 한 문제라도 더 풀 수 있도록, 진단서를 써줄 의사를 찾아다녔던 것이다. 루크는 부모들이 비용만 두둑이 치르면 어디에선가는 원하는 진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가난한 가정의 학생은 정말로 학습장애가 있더라도 돈이 없어서 진단서를 못 끊을지도 모른다. 캘러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 "학생들이 부정행위를 예전보다 더 많이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제는 부모와 다른 어른들까지 나서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p.238-239)
크리스토퍼 래시는 그의 저서 『엘리트의 반란과 민주주의의 배반(The Revolt of the Elites)』에서 물려받은 사회경제적 기득권이 성공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엘리트들은 "오로지 자기 지적 능력의 힘으로 성공해왔다는 '소설'을 써왔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자신이 받은 수혜에 대한 감사함이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감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성공은 오직 자기 노력과 힘으로 달성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모님의 재산은 어느 정도였으며, 어느 동네에서 자랐고, 어떤 학교에 다녔는지 등의 성장배경은 곧잘 시야에서 사라진다. 사실 이러한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성공을 결정짓는데도 말이다. 글로벌 옥션의 승리자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혼자 힘으로 거둔 '능력의 배지'가 아니라, 사회가 준 선물임을 무시한다.
엘리트들은 타고난 재능을 가진 인재는 많지 않다며 자신들이 받는 특별 대우를 합리화하지만 이런 생각은 이제 뒤집어지고 있다. 엘리트들은 고등교육의 대중화가 교육의 수준을 하락시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이와 다르다. 엘리트들은 언제나 "인재의 희소성"을 강조하지만, 그들의 주장과 달리 인재풀은 그렇게 제한적이지 않다.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소수 엘리트의 능력은 지나치게 과장된 반면, 다수의 능력은 지나치게 과소평가돼왔다. 마찬가지로 신흥경제국의 우수한 인재들도 지나치게 평가절하 돼왔다. (p.263-264)
자본은 단순히 토지∙기계∙자금 등으로 구성되어 개인과 회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축적된 인류 문명의 성과로 봐야 한다. 사실 지난 세기 동안 빠르게 진행되온 기술의 진보는 막대한 공적 자금이 투입됐기에 가능했다. 전자산업의 경우도 그러한데, 미국 국방부의 막대한 기술투자 덕분에 실리콘밸리가 탄생할 수 있었고 나중에 빌 게이츠와 다른 이들이 혜택을 받았다. 오늘날 기업들은 자신들의 상표를 달아 핸드폰을 팔면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지만, 이는 기술문명의 결과물을 회사들이 사사로이 이용하고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p.266)
우리는 진정한 생산 기여도에 따라 보상의 체계를 다시 짜야 한다. 국가 경제의 발전은 육아∙노인복지∙지역사회봉사 등을 막론하고 직간접적으로 생산활동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노력이 합쳐진 결과물이다. 사람들의 다양한 재능을 꽃피우는 것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사회 시스템에서는, 이제까지 공식적으로는 실업상태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노동 역시 제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사회에 대한 기여와 보상을 밀접하게 연계시킴으로써, 사익 추구와 시장 경쟁의 논리로만 굴러가는 사회에 올바른 정의를 다시 세워야 한다. (p.267)
빈곤이 오고 있다 / 신명호 / 개마고원
빈곤선이 인간으로서 최저한의 삶의 수준이라고 해서, 그것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수준의 한계상황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야말로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보릿고개를 겪으면서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학교 대신 공장을 향해야 했던 노년층도 이제는 '휴대전화가 무슨 최소한의 생필품이냐?'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굶기를 밥 먹듯 하던 1960년대 이전을 기준으로 보면, 생물학적 욕구를 해결하는 것과는 무관해 보이는 휴대전화가 생계에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닐 수도 있지만, 문제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에 달려 있다.
사람은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동물처럼 먹고 자는 일만 할 수는 없다. 일터에 나가 노동을 하고, 사람들 속에서 교류하고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도리를 하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현재 어떤 사회에서의 최저생계비가 얼마인가를 산정하려면,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과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p.19-20)
여기서 우리는 빈곤선의 산정 요소가 반드시 생명 유지와 직결된 품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사회에서 최저한의 삶이란, 그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는 삶이 아니라 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다. 그러려면 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활양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른바 사회적 역할을 적절히 수행하고, 공동체 생활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피터 타운센드(Peter Townsend)라는 사회학자는 특히 이 점을 강조하면서 나름대로 빈곤을 정의하고 있다.
타운센드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통상적인 생활양식 가운데 어떤 요소가 부족해 박탈감을 느끼며, 소득이 낮으면서 동시에 그 박탈의 정도가 아주 심한 경우에 그는 빈곤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지난 한 달 사이에 친구나 친척과 한 번도 외식을 하지 못했다'거나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다'면, 그는 사회관계라는 측면에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결핍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측면들을 빈곤을 정의할 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빈곤의 기준은 영양학적 관점에서 최소 생필품의 절대량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설정할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중간층이 누리고 있는 표준적인 생활수준으로부터 상대적 거리가 얼마만큼 떨어져 있으냐로 정해야 한다는 게 타운센드의 입장이다.
타운센드는 이 표준적인 생활수준에 사회적 관계나 감정 같은 보이지 않는 요소들도 포함시켰다. 그래서 상대적 박탈의 정도를 판별하기 위해 그가 만든 지표 가운데는 "지난 2주 사이에 조리된 식사를 하지 못한 날이 하루 이상 있었는가"와 같은 의식주 항목도 있지만, "학교에 다닌 기간이 10년 이하인가?" 혹은 "1년 사이에 집을 떠나 휴가를 가본 적이 있는가?"와 같은 문화적 항목도 들어 있다. 빈곤을 규정할 때 인간 삶의 총체적 관점에서 사회∙문화적 요소까지를 포괄한 훨씬 관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p.23-24)
2010년부터 이명박 정부가 통합전산망을 도입해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하면서 '연락이 닿지 않는다던 당신 아들이 잘 살고 있더라'며 느닷없이 수급 탈락을 통보해오는 일들이 벌어졌다. 지자체에서 월 30만 원의 보조금을 받아오다가 부양의무자인 사위의 소득이 증가한 것으로 드러난 78세의 할머니가 탈락 통지를 받고는 농약을 마시고 세상을 하직했다. 장애인인 아들이 자기 때문에 수급자가 될 수 없음을 한탄하던 50대의 일용노동자 아버지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안타까운 죽음들이 줄을 잇고 시민사회단체들이 부양의무자 기준의 폐지를 줄기차게 요구하자 마침내 2020년 문재인 정부도 여기에 동의했다. 다만, 예산상의 문제 때문에 당장은 중증장애인에 대해서만 기준을 없애고 2023년까지 점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약속이 지켜지는지 두고 볼 일이다. (p.39-40)
빈곤은 단순히 소득이 적은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혹독한 추위와 더위, 물난리나 감염병 재해의 고통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비좁고 비위생적인 공간, 때로는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지지 않는 불안정한 주거 공간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빈곤이라는 현상에서, 우리는 죽음이나 질병에 쉽게 빠지고 한 번 중병에 걸리면 쉽게 낫지 못하는 약한 자들의 생활상을 보게 된다. 이렇게 빈곤은 때로 건강으로부터 소외돼 있음을 의미한다.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은 고등교육 단계까지 지속적으로 공부하기 힘든 여건에 있다. 그들은 중상층 자녀들이 누리는 질 높은 교육 기회를 갖지 못하며, 치열한 학업 경쟁의 사다리에서 남들이 밟고 올라가기에 좋은 발판이나 들러리 역할에 머무르고 있다. 교육은 더 이상 계층 상승의 통로 구실을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빈부격차를 공고히 만드는 역할도 한다. (p.74-75)
따라서 빈곤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은, 가령 주거 측면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공간을 못 가진 사람들은 누구이고 그들의 생활은 어떠하며 어떤 대책이 필요할지를 살피는 것이다. 적정 수준의 주거 공간이 없어서 고통받는 것은 비단 소득이 빈곤선 이하인 사람들이나 정부에 생계비를 의존하고 있는 수급자들(전체 국민의 3.2%)만이 아니다. 훨씬 더 많은 서민들이 주거 문제로 마음을 졸이며 고통을 겪고 있다.
같은 이유로, 보건∙의료∙교육∙고용∙시민권 등의 각 차원에서 최소한의 권리와 서비스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배제되고 박탈당한 삶을 살핌으로써 우리는 빈곤에 대한 이해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다. (p.77)
보건복지부는 노숙인 지원 종합계획을 세우기 위한 최초의 실태조사(2016년)에서 거리노숙인(1522명), 이용시설 노숙인(493명), 생활시설 노숙인(9325명) 외 쪽방 주민(6192명)들을 포함시켜 전국 노숙인 수를 1만1340명으로 집계한 바 있다. 한편, 도시 주거 문제의 전문연구기관으로 정평이 나 있는 한국도시연구소는 이들 외에 피시방∙찜질방 등 비숙박용 다중이용시설 거주자와 여관∙여인숙∙고시원 거주자들까지를 주거취약계층으로 보고, 이들을 모두 '노숙인 등'으로 규정할 것을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그 수는 20만 명을 훌쩍 넘어간다.
홈리스라는 용어를 쓰는 영어권의 사정도 비슷하다. 노숙인 문제에 일차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행정 당국은 되도록 범주를 좁게 잡으려 들고, 노숙인을 돕는 민간단체들은 넓은 의미의 정의를 제시한다. 홈리스에 대한 가장 협소한 정의는 길거리 등 공공장소에서의 거주를 가리키고, 그 다음으로는 지원시설∙피난소∙임시숙소 및 감옥 등에서 사는 '집이 없는 상태'를 의미할 수 있다. 이보다 한 단계 더 확대하면, 빈 건물을 불법 점유하고 있다든지 강제퇴거에 직면해 있는 상태, 친지의 집에 불가피하게 얹혀사는 경우나 심각하게 과밀한 공간에서 사는 등 불안정하고 부적절한 주거까지 포괄해서 홈리스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홈리스의 정의는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무 자르듯 경계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거가 취약한 정도에 따라 스펙트럼처럼 연속성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138-139)
"공장 신축공사 중 철골 구조물 붕괴로 5명 사망" "지하 탱크 청소하다 작업자 2명 질식사" "◯◯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비정규직 청년 사망"… 우리가 한 달이 멀다 하고 접하는 사고 소식들이다. 우리나라에서 2019년, 단 한 해 동안 산업재해 사고로 죽은 사망자 수는 855명이다.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 동안의 산업재해 사망자는 4811명, 다친 사람은 23만 4037명이다. 이들이 대체로 어떤 계층에 속하는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으리라. (p.179)
2020년 초여름, 인천공항공사가 비정규직 신분의 보안검색 요원과 소방대 등 2100여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때도 비슷한 반발이 일었다. 이번에는 기존의 정규직 노조뿐 아니라 공기업 취업을 희망하는 취업준비생들까지 정규직화를 중단하라는 청원을 청와대에 올렸다. 정규직 노조의 반대 논리는 '그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과정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총액임금제로 운영되는 인천공항공사의 재정 구조상 신규 정규직화로 인해 인건비가 늘어나면 긴축재정으로 장차 자신들의 몫이 줄어들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작용한 모양이다. 아무튼 최고 수준의 스펙을 쌓아서 힘든 경쟁을 뚫고 들어온 자신들과 비교해서 보안검색 요원들은 너무 쉽게 정규직이 되는 게 그들로서는 불만이었다. 반면, 취업준비생들은 공채 시험을 거쳐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정규직 자리가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은 아르바이트 직원들" 차지가 되는 것에 화가 났다. 공사 측이 보안검색 요원들은 아르바이트직이 아니라 소정의 전문교육을 수료한 이들이고 직군이 달라서 일반 사무직에 응시하는 취준생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게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취준생들은 "알바 로또 취업은 채용의 공정성을 훼손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기존 정규직 노조원과 취준생의 차이는 '신의 직장'에 들어가는 좁은 문을 이미 통과한 자와 아직 문밖에서 서성이는 자의 차이다. 그리고 뜻밖의 누군가가 그 문을 통과하자, 문 안과 밖에서 그들은 하나가 되어 외친다. "저 자를 문 안에 들이는 것은 공정성과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그들은 문을 통과하기 위한 기존의 규칙(공개채용 시험)이 정말 공정한 것인지는 따지지 않는다. 그 규칙이 자리에 합당한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로서 적정한 것인지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구내식당에서 밥하는 아줌마, 시설을 관리하는 아저씨는 통과의 규칙, 예컨대 영어능력 시험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노력하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정규직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왜 똑같은 일을 하면서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절반만큼 보상받아야 하고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소모품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그들은 묻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이 자기 몫을 더 늘리기 위해 고안한 노동의 착취 기술임을 꿈에서도 상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저 정규직은 노력한 자, 비정규직은 게으른 자일뿐이다. (p.250-251)
아마 그래서 18세기 어느 사상가도 그랬나 보다. "다수의 구성원이 가난하고 곤궁한 사회는 절대로 번영하거나 행복한 사회일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전체 국민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살 곳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으로 인한 생산의 몫을 받아서 웬만큼은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평성이다."
이것은 평등이나 인권의 사상을 설파했던 철학자의 말이 아니다. 오늘날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조로 떠받들고 있는 애덤 스미스의 말이다. 그는 또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복지에 관심을 갖고 타인이 행복해야 자신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원칙을 갖고 있다"고도 했다. 그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냉랭했던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 것은 그의 사상적 제자를 자처하는 후세의 추앙자들이었다. (p.289-290)
커밍 업 쇼트 / 제니퍼 M. 실바 / 리시올
리베카의 이야기는 사회가 시장에 대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해 포스트산업 노동 계급이 극도로 취약해졌음을, 더불어 개인이 혼자 힘으로 자기 운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부상했음을 예증해 준다. 제대로 삶을 누리려면 제도의 도움으로 시장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보호책으로는 정년 보장, 주거 및 교육비 보조, 임금 관련 규정, 노동법, 건강보험 등이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정책이 제도적 보호책들을 무력화했고, 그 결과 리베카 세대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 하나를 빼곤 아무런 안전망 없이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내 연구에 참여한 남녀들은 개인주의와 자립 논리를 수용하며, 힘들게 일해 번 돈, 안정성, 자기 힘으로 일군 성과에서 얻는 자기 가치에 사활을 건다. 많은 사람이 정당한 리스크만 감수하면 경제적 안정과 성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이 성인이 된 이야기는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에서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것은 이윤만이 목적인 강력한 기업들에 맞서 내기를 건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리스크 부담과 리스크 감수의 순환에 붙들려 점점 더 가난과 빚에 몰리게 된다. (p.83)
18~20세 다수가 고등 교육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밝힌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이 청년들은 "'모두를 위한 대학'을 강조하는 교육 이데올로기"를 사들이고 있다. 나와 인터뷰한 청년 절반가량도 여러 종류의 고등 교육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면 전문직 일자리와 높은 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약속은 거의 지켜지지 못했다. 열여섯 명은 커뮤니티 칼리지나 4년제 대학에서 자퇴하거나 제명당했고, 열 명은 주로 커뮤니티 칼리지를 다녔는데 어중간한 상태로 통상적인 학업 기간인 4년보다 훨씬 오래 학교에 다녔다.
돈 문제를 제외하면 졸업하기 전에 학교를 떠난 공통적인 이유 하나는 대학에 다녀서 얻을 수 있는 편익보다 비용이 더 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빚이 초래할 수도 있는 리스크(온전히 응답자들이 짊어져야 하는)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p.100-101)
거실 중앙에 자리한 65인치짜리 텔레비전에서는 「폭스 뉴스」[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텔레비전 채널 뉴스]가 나왔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정부(즉 납세자)에게서 구제 금융을 지원받은 기업의 경우 최고위 중역에게 지급하는 보너스에 상한선을 두기로 결정했다는 뉴스였다. 경제 붕괴 이래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건설 회사에 다니느라 지난달에는 주택 담보 대출 분할 상환금도 내지 못했다면서도 스티브는 뉴스를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넌더리를 냈다. "아니, 왜 보너스를 못 받게 해? 보너스는 원래 계약에 있던 거잖아. 정부가 그걸 가로채면 안 되지! 그런 사람들한테 세금을 매겨도 안 되고!" 딸들도 동의하는 듯한 말을 웅얼거리던 중에 전 국민 건강보험을 지지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 장면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그러자 부모 두 사람 다 보기 싫다는 듯 손으로 눈을 가리기 시작했다. 칼리는 빨래를 개며 "엄마 아빠는 이제 오바마를 보는 것도 싫어해요"라고 말했다. "두 분 다 애국심이 강한데 오바마가 이 나라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려고 하잖아요. 나라 꼴이 어떻게 되려는지." (p.157-158)
카이애너의 설명처럼 청년들은 "계속 움직이는" 법을 배운다. 자신을 사로잡은 감정들이 고통이 되어 짓누르지 않도록 기대나 행동을 재빨리 조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노동 시장에서 느낀 배신감을 적극 관리하는(단기 유연성과 유동성이 자연스런 질서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반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발견하리라 기대했던 교육, 국가, 법 같은 제도의 배신을 관리할 때는 훨씬 더 힘겨워한다. 정보 부족으로 이런 힘 있는 제도들을 한층 더 경계하고 불신하며, 의지할 사람은 자기뿐이라는 뿌리 깊은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된다. 전화를 받거나 룸메이트를 구하는 일상적인 활동조차 리스크 부담이 있고 사기당할지도 모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노동 시장에서는 '유연'해지지만 그 시장 외부에서는 경직된다. 좌절하고 상처 받을 가능성에 대비하고자 내향적인 성격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시장이 사적이고 비사회적이라고 여기지만 제도들에 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정보 제공자들이 국가를 언급할 때 아주 분명하게 드러났다. 청년들은 사람들이 비정하고 표리부동해진 이유가 국가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p.181-182)
어린 시절 경험한 극도의 불확실함과 배신은 청년들에게 타인을 신뢰하는 것이 위험한 게임이라고 가르쳤으며, 이 세계가 자신만을 의지해야 하는 적대적인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도록 몰아붙였다. 실제로 바네사는 고전적 문구(이자 법적 권리)인 '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결백하다'를 뒤집어 표현했다. 이는 노동 계급 청년들이 사회적 유대와 그 안에서 자신이 점한 위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드러내 준다.
응답자 대부분이 사회 안전망 없이 홀로 살아남아 왔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고투가 도덕적으로 옳다고 여긴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 겉옷에 맞추어 코트를 재단'하며, 그리하여 개연성 있는 것을 현실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과정들에 공모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들은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의존을 거부하며, 혼자 힘으로 살아남으려는 태도를 미덕으로 여기고, 그러면서 이런 특질들을 성인기에 대한 자신의 정의와 연결한다. (p.183-184)
하지만 인종적 동일함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응답자들이 일자리, 특히 명시적으로 "차별 시정 조치를 주도하는" 공무원 영역(하지만 이런 정책을 제대로 시행하지는 않기 때문에 수험자들에게 혼란과 쓰라림을 안기는)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해야 할 때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정부가 내 이해관계에 반해 행동한다는, 내가 획득한 무언가를 빼앗아 간다는 생각이 배신감을 점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흑인이라는 사실이 희소한 자원을 차지하려는 싸움에서 유리한 것처럼 부각된다. 경찰, 우편 노동자, 소방관처럼 점점 자리가 부족해지는 일자리에 지원하는 백인 응답자들은 차별 시정 조치가 '역차별'이며 인종이 아니라 '개인적 장점'이 고용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응급 구조사로 아직 부모님 집 지하에 살고 있는 스물네 살 백인 남성 에릭은 씁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소수 민족이니까] 모든 걸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보상 요구는 대부분 억지예요. 저는 노예를 부린 적이 없어요. 노예 소유주한테는 저도 화가 나요." 확실히 여기서 에릭은 인종주의를 과거의 유물로 간주하고 있다. 참전 경험이 취직에 도움이 된 백인 소방관 조지프는 소수 민족 동료들을 원망하지 않지만 앞으로 자기 아들은 군 생활을 하지 않고서도 취업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저는 편견은 전혀 없어요.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건 그냥……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소수 민족이 아니게 되는 날이 언제쯤 올까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가지고 있어요. 조만간 소수 민족이 아니게 되겠죠. 반반이 될 거예요."
공무원 부문 바깥의 백인들도 흑인 관리자는 자격이 부족한 흑인 지원자를 백인보다 더 선호할 것이라며 걱정했다. (p.190-191)
노동 계급 청년들은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만 타인들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듭 배운다. 그런 다음에는 자립, 개인주의, 개인의 책임이라는 문화적 각본을 받아들임으로써 배신의 아픔과 연결의 갈망을 완화한다. 제도와의 상호작용에서 더 '유연'해질수록, 즉 단기적인 헌신과 환멸을 관리하는 법을 배울수록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는 한층 더 '경직'된 태도를 보이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청년들은 유순한 신자유주의 주체가 되어 온갖 종류의 정부 개입, 특히 차별 시정 조치에 반대한다. 그런 개입이 자기 삶의 경험에 대립하고 그 경험을 침해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잠재적인 연대 공동체들은 불안정과 리스크의 부담을 버티지 못하고 갈라져 버린다. 남성은 여성 및 게이와의 경계선을 조심스레 관리함으로써 얼마 남지 않은 공공 부문 일자리를 계속 차지한다. 백인은 흑인이 정부의 돈을 가로채며 자신의 세금을 낭비한다며 도덕적 경계선을 친다. 흑인 응답자는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다른 흑인들과 자신 사이에 한층 더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궁극적으로 노동 계급 청년 남녀는 자신이 혼자 힘으로 삶과 전투를 치러야 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도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제이컵 해커가 말하듯 "리스크는 사람들을 결집시켜 공유된 운명 공동체를 이루도록 이끌 수 있다. 그러나 리스크는 또 사람들을 분열시키기도 한다". 포스트산업 노동 계급은 스스로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원한, 두려움, 불신에 휩싸이며, 따라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큰일이 된다. (p.205-206)
정보 제공자들은 제도가 반복해 자신을 실패자로 만든 방식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이들은 폴 윌리스의 용어인 "부분적 간파(partial penetration)", 혹은 사회 전체에서 자신이 점하는 사회적 존재와 위치의 조건들에 대한 감각을 드러냈다. 이들은 도움을 주리라 믿었던 바로 그 제도들이 성공의 도구를 자신에게서 박탈했음을 깨닫고 있다. 하지만 이 깨달음은 현실에 대한 지배적인 정의들에 포섭된다.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논리가 근본적으로 도전받기보다는 재차 긍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뿌리 깊은 불신 때문에 이들은 광범위하게 퍼진 신자유주의적 발상과 정책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리스크를 사유화하고 집단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삶이라 믿고 있다. 만연해 있는 헤게모니적인 문화 틀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면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자체를] 생산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회 조직"은 은폐한다. 정보 제공자들은 외로움, 불확실, 배신의 경험을 견고한 개인주의와 절대적 자립의 이야기로 번역함으로써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궁극에는 재생산하는 개인 서사를 창출한다. (p.206-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