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 백영경 / 창비
의료는 공공재이며 필요한 사람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많지만, 실제 현대사회에서 의료는 고가의 장비와 약품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의료에 수반되는 돌봄은 매우 귀한 자원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의료를 공공재로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역으로 의료를 공공재로 만들어줄 정치적 공동체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시민들의 삶에서 필수적인 부분은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거기에 집중해서 반드시 필요한 의료에 대해서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가야 하며, 이를 위해 공공과 민간, 전문의료와 돌봄, 다양한 소수자를 포괄하는 커먼즈의 존재 없이 의료는 공공재가 될 수 없다. (p.10)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이 이토록 불안정한 것은 왜소화된 공공의료 때문입니다. 공공병원이 적어도 전체 병원의 20~30퍼센트 정도만 되어도 안전판 역할을 해주면서 의료시스템에 전체적으로 균형이 생길 텐데, 의료기관이 너무 민간에 치우쳐 있다보니 비정상적인 케이스들이 생겨납니다. 민간병원은 비급여 진료 확대, 과잉진료 등을 통해 어떻게든 수익을 끌어올리려고 하죠. 이러한 비정상적인 행위들은 당연히 국민 건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공공병원의 역할 중 하나는 적정진료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과소진료나 과잉진료가 아닌, 가장 적절한 수준의 진료는 민간병원의 수익성에 치우친 과잉진료를 견제하는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p.33)
정부에서는 언택트기술이 환자와 의사 모두 보호할 수 있다고 하죠. 감염병 위험으로부터 의료진과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비대면 의료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의사가 환자를 비대면으로만 진료할 수 있을까요? 비대면이 가능한 특정한 상황을 들어서 비대면 의료가 감염병 시대에 의료진과 환자 모두를 보호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지금도 방호복을 입고 환자들을 일일이 접촉하면서 그 몸을 직접 돌보고 있는 의료진들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습니다. (p.45)
원격의료는 코로나19 국면에서 확실히 급부상했는데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그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런데 정부에서 의지를 갖고 추진하면 돈이 풀리기 시작하죠. 돈이 투입되어 기업이 생기고 노동자들이 생기면 원격의료는 함부로 폐지될 수도 없고 계속 굴러가야 합니다. 실효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국민 건강에 기여하지 못해도 돈은 계속 투입되죠. 그러다보면 정작 필요한 부분, 지역돌봄시스템에 대한 투자는 줄어듭니다. 코로나19 국면에서 정작 더 힘을 쏟아야 할 사업은 이 부분인데 말이죠. 집에서 감당 못하는 돌봄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보조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시범사업도 해봐야 하는데, 디지털의료니 비대면 의료니 하는 데로 국가의 관심이 쏠려 있는 상황이니 답답합니다. 원격의료 사업은 아직 그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는데 여기로 재정이 빠져나가면 실제 국민에게 필요한 분야의 건강보험 예산이 축소되는 결과를 낳게 되고, 이는 곧 건강 불평등을 초래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는 공공병원을 좀더 확충한다고 보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전반적인 흐름이 이런 쪽으로 가버리면 공공성, 형평성의 문제들이 축소되고 취약계층들이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p.46-47)
수도권 쏠림 현상은 의사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현상인데, 지방에 의사가 부족한 문제를 단순하게 의사들의 이기심 때문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지방에는 여전히 더 많은 의사가 필요하고, 높은 연봉만으로는 의사들을 데려올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거잖아요. 그럼 정책을 책임지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의사들이 지방으로 가려고 할지, 의사들이 일하고 싶은 환경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나가야지 단순히 의사들을 손가락질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시간을 끌어봤자 고통받는 건 지방에 있는 환자들입니다. 특히 치료를 위해 서울로 갈 수 없는, 당장 치료가 필요한 응급환자의 경우 더 큰 피해를 보겠죠. (p.83)
2019년 가천 길병원의 전공의 신형록씨가 과로로 당직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는데, 그분 실제 노동시간이 주 110시간이었어요. 이 일로 병원은 고작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습니다.
병원이 이렇게 터무니없이 적은 인력으로 병원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은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의료노동의 특수성 때문이에요. 병원에서 우리가 다루는 것은 생명이니까, 꼭 내가 슈바이처 같은 헌신적인 의료인이 아니더라도 법적 책임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생명을 경솔하게 다룰 수 없는 거예요. 예를 들어 6시가 퇴근시각인데 5시 55분에 간호사가 와서 환자의 출혈 징후를 알려줘요. 그럴 때 5분 뒤 퇴근이니 알아서 하라고 할 수가 없다는 거죠. 80시간을 넘기지 말라고 해도 울며 겨자 먹기로 남아서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왜 간호사들이 물도 못 마시고, 화장실도 못 가고, 바지에 생리혈이 묻은 채로 일을 하겠어요. 모든 간호사나 의사가 희생정신이 넘쳐서가 아니라 안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혹시라도 잘못하면 살인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스스로를 갈아넣을 수밖에 없다는 걸 병원에서도 너무 잘 아니까 터무니없이 적은 인력으로 운영하고, 의료인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 자신의 자리에서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p.84-85)
의사들이 의료수가가 낮아서 치료를 할수록 적자라고, 수가를 올려달라는 말을 정말 많이 하는데요. 사람들은 '손해면 진작 병원문 닫지, 왜 계속 운영하고 있느냐'며 의사들이 돈 더 벌려고 수작 부린다고 생각하죠.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모든 과의 모든 치료가 적자인 것은 아니에요. 적자인 곳도 있고 흑자인 곳도 있죠. 그러니까 어떻게든 병원이 유지되고요. 그리고 이게 문제의 핵심입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적자인 곳을 닫고 흑자인 곳을 키우면 되지만 병원은 그럴 수 없거든요. 만약 적자인 곳을 다 없애면 서울대병원은 중환자실, 어린이병원, 호스피스병동 등을 차례차례 닫아야 할 거예요. 그래서도 안 되고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그 대신 병원은 아무리 필수의료 분야라 해도 적자가 나는 부서라면 투자나 인력을 줄이게 됩니다. 이렇게 의료가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의료수가를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설령 의사들의 요구가 그들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꼭 밥그릇을 챙기려고 하는 것만은 아니에요. (p.86)
2016년에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두살배기 남아가 종합병원 10여곳에서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거부하는 바람에 뒤늦게 수술을 받았지만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아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병원 입장에서는 그 아이를 받으면 그 일로 생기는 모든 문제에 책임을 져야 하니까 가급적 안 받으려는 거예요. 물론 더 잘 치료할 수 있는 병원에 가는 게 아이에게도 더 안전한 일이고요.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은 전국 방방곡곡에 있지만 전문 어린이병원이 규모 있게 갖춰진 곳은 사실 서울대병원밖에 없어요. 아이들은 체구가 작아 성인에게 쓰는 기구나 설비를 병용해서 쓸 수가 없기 때문에 병원들에서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린이 응급환자가 들어왔을 때 실제로 수술할 수 있는 병원이 별로 없고, 그나마 가능한 병원도 아이의 생존 가능성이 높지 않을 경우에는 자칫 아이도 못 살리고 몇억이 걸린 소송을 당할 수도 있으니 환자를 받지 않겠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어떻게 의사가 그럴 수 있느냐 하겠지만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같은 판단을 내릴 거라고 봐요.
한국에서는 의사의 오진에 대해 특히 가혹한 것 같습니다. 의사의 명백한 실수임이 드러난 사안에 대해선 마땅히 처벌해야겠지만, 판단이 애매모호한 문제일 때 형사처벌을 하는 것은 문제예요. 단지 의사들이 억울할 것이라서가 아니라 이런 처벌로 인해 의사들이 방어진료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대처했으면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죽게 될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이런 문제는 크게 드러나지 않아요. 죽게 될 만한 상황이었는지 본인은 몰라요. 주변에서도 모르죠.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의료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 경우에 다른 대처를 했으면 살았을 거라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저는 이런 상황들이 무척 우려스럽고 안타까워요. (p.94-95)
병원은 인건비로 전체 비용의 절반 이상을 쓸 만큼 무척 노동집약적인 곳이에요. 거꾸로 말하면 인건비에서 줄이는 족족 다 이익이 됩니다. 기계 가격은 아무리 깎아도 한계가 있고, 의료기기는 그 수를 줄이면 티가 납니다. 그런데 사람은 열명 쓰다가 아홉명 쓴다고 당장 어떻게 되지 않아요. 빠진 한 명이 할 일을 나머지 아홉명이 나눠서 더 하니까요. 거기서 또 한명을 줄이면? 그 한명의 노동을 또 여덟명이 나눠서 해요.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을 만큼만 노동강도를 높이는 거예요. 그런데 병원 일은 공장처럼 예측 가능하지 않고 환자가 확 몰릴 때도 있고 줄어들 때도 있습니다. 같은 수의 환자여도 환자 상태에 따라 노동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정확하게 계량화하기 애매하고요. 그래서 환자를 생각하고 의료인들의 정신건강을 생각하면 조금 넉넉하게 운영되어야 하는데 늘 조금 모자라게 굴러가는 거죠. (p.100-101)
의료사고가 나면 병원이 인력을 적게 채용한 부분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고, 그 건만 똑 떼어서 해부하듯이 봐요. 해당 간호사나 의사가 매뉴얼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자를 죽게 했다는 거죠. 그 의료인이 돌봐야 했던 다른 환자 상황이나 인력 여건 등은 제대로 고려해주지 않습니다. 이대목동병원 사건 때도 전공의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개선을 요구했으나 반영되지 않아서 그만둔 상황이었어요.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당직을 돌며 주에 80시간 이상씩 일해가면서 빠듯하게 버티고 있는데, 여러 신생아에게 심폐소생술을 해야 하는 응급상황이 동시에 발생한 거죠. (p.102)
선진국처럼 중환자 한명당 간호사가 한명씩 배정된다면 해결되는 문제인데 병원을 운영하는 이들은 부족한 인력으로 굴러가게 둬요. 결과적으로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책임은 당사자가 지지 병원장이나 인사 담당자가 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대목동병원도 각종 적정성 평가나 간호등급 1등급인 상급종합병원이었습니다. 복지부의 등급제 기준이나 감시감독 체계가 얼마나 미진한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진짜 문제는 병원의 운영진이 인력을 이렇게 배치했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도 이런 상황을 낳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응급상황이 언제 터질지 모르니까 중환자실 일대일 간호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버틸 수 없는 것이 병원의 재정구조입니다. (p.103)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에게 치료적 효과 없이 고통만 야기하는 의료행위를 중단하는 것을 환자를 포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아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달라고 요구하곤 합니다. 불필요한 의료자원 낭비일 뿐만 아니라 환자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인데도 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산소요법이나 진통제 투약 등 의료적인 도움이 필요한 말기의 환자들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시설이나 환경이 잘 갖춰져 있느냐, 다른 선택지와 그에 대한 설명과 안내가 충분하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거든요. 결국 이런 것들이 바뀌고 개선되려면 인력이 투입되고 돈이 들어가야 합니다. 1, 2억 들어가서 될 문제가 아니라 조 단위의 예산이 움직여야 하는 문제고요. 조 단위의 돈을 움직이는 선택을 하는 건 결국 정치권이기 때문에 시민들의 요구가 지속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p.108-109)
제가 정말 많이 듣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임신중지는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당사자의 책임인데, 왜 내가 낸 보험료를 이 사람들 낙태하는 데 보태야 하느냐'라는 질문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왜 아기 안 낳는 사람이 낸 보험료로 다른 사람 출산을 지원하고, 내 보험료를 다른 사람 암치료 하는 데 쓰겠어요. 보험, 즉 전국민건강보험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연대와 사회보장체계로서 작동하는 것이지 개인의 호오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게 아니거든요. 신자유주의시대에 들어서면서 개인의 노력이나 책임을 따지는 분위기가 가중됨에 따라 이 사회부조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인식이 약해진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p.133)
미국에서는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문제가 CDC(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질병통제예방센터) 관할이에요. 미국에서는 이걸 건강의 문제라고 보는 겁니다. 폭력이 일어나는 상황도, 당사자들의 사회적・심리적・정신적 배경도 다 건강의 영역인 거죠. 그리고 폭력 때문에 저해되는 여성의 삶도 결국 건강과 보건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굉장히 확고하게 자리잡아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을 여성가족부에서 맡고 있는데 제가 현장에서 진료를 해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진료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여성가족부에서 모니터링을 전혀 하지 않고 매뉴얼과 돈만 주는 시스템입니다. 예를 들면 성폭력 피해자들이 어떤 성매개 감염에 더 취약한지 등에 대한 데이터를 조사하고 통계자료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아요. 여성가족부가 의료기관의 상급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물론 성폭력의 모든 사항을 보건복지부가 전담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의료와 관련된 부분만은 보건복지부가 담당해야 하는데, 보건복지부가 이 문제를 여성가족부에 맡겨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게 문제라고 봅니다. (p.172-173)
또 하나 장기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바라는 게 뭐냐는 겁니다. 흔히 건강이나 생명은 천부인권이고 소중한 거라고 하는데, 그 말이 정말로 의미하는 게 뭘까요? 2017년 WHO가 각 나라의 평균수명을 예측한 결과가 큰 주목을 받았는데, 2030년이 되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남녀 모두 세계 1위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여성은 91세, 남성은 84세까지 산다는 거죠. 모두가 바라던 것 아닌가요? 그런데 시골에 가서 노인들한테 건강 이야기를 하면 지금도 징그러운데 뭘 더 사냐고 손사래를 치세요. 거기서 건강증진, 생명연장 이야기는 안 먹힙니다. 그런데 가만 들어보면 또 금방 죽고 싶어하시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렇다면 우리가 건강이나 의료를 이야기할 때 사회적으로 이루고 싶은 다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즉 건강이라는 것도 재정의되어야 한다는 거죠. (p.276-277)
평균의 종말 / 토드 로즈 / 21세기북스
하지만 평균주의는 우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다. '노르마' 닮은꼴 찾기 대회가 그러했듯 사회는 우리 모두에게 학교와 직장생활과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정의 편협한 기대치를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려고 기를 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쓴다. 영재들이 영재로 불리는 이유는 다른 모든 학생들과 똑같은 표준화 시험을 치르지만 더 뛰어난 성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위권의 입사 지원자들이 심사에서 호감을 얻는 이유는 다른 모든 지원자들과 똑같은 종류의 자격을 가지고 있지만 단지 더 뛰어나서다. 우리는 개개인성의 존엄을 상실했다. 우리의 독자성은 성공에 이르는 길에 놓인 짐이거나 장애물, 아니면 후회하게 될 한눈팔기쯤으로 전락해버렸다.
기업, 학교, 정치인 들 모두가 하나같이 개개인성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정작 현실은 누가 봐도 모든 것이 당신보다 시스템이 중요하게 설정돼 있는 상황이다. 회사의 사원들은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취급당하는 기분을 느끼며 일한다. 학생들은 꿈을 절대 이루지 못할 듯한 불안감을 안겨주는 시험 결과나 성적을 받아 든다. 우리는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성공에 이르는 바른 길은 한 가지뿐이라는 식의 말을 듣는다. 대안적 진로를 따르면 길을 잘못 디뎠다거나 순진하다거나 그냥 틀렸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뛰어난 역량 발휘가 시스템의 순응보다 우선시되는 경우는 드물다.
인간의 중요한 특성은 거의 모두가 다차원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중에서도 재능이 특히 더 그렇다. 문제는 재능을 평가하려 할 때 흔히 평균에 의존하는 바람에 들쭉날쭉한 재능을 표준화된 시험상의 점수나 등급, 업무 실적 순위 같은 단 하나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경향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일차원적 사고에 굴복하다간 결국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
커텔은 컬럼비아대학교의 신입생 수백 명을 대상으로 수년에 걸쳐 일련의 신체 및 지능 검사를 실시하며 소리에 대한 반응시간, 색깔 이름 대기 능력, 10초 내의 판단력, 연속으로 기억해낼 수 있는 글자 수 등을 살펴봤다. 이런 여러 능력 사이에 강한 상호 연관성이 발견되리라고 확신하면서 시작한 검사였으나 막상 해보니 검사 결과는 오히려 정반대로 나왔다. 사실상 상호 연관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지적 능력들은 확실히 들쭉날쭉했다.
등급의 열혈 신봉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보다 낭패스러운 결과는 또 있었다. 커텔이 신입생들의 학부 성적과 이 지능검사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살펴본 결과 둘 사이의 상호 연관성도 아주 약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여러 과목별 성적들 사이에서마저 상호 연관성이 낮았다. 사실 커텔의 검사 결과에서 상호 연관성이 있다고 볼 만한 경우는 학생들의 라틴어 과목 성적과 그리스어 과목 성적 사이의 상호 연관성뿐이었다.
(…)
커텔 이후로 거듭거듭 이어진 연구에서도 개개인의 지능은 들쭉날쭉하며 이는 성격과 기질 역시 마찬가지임이 밝혀졌다. 한 가지 일에 재능이 있으면 대다수 일에 재능이 있다는 식의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 교육 시스템을 세웠던 장본인인 에드워드 손다이크조차 직접 조사를 벌여 학교 성적, 표준화 시험의 성적, 직업생활에서의 성공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 결과 손다이크 역시 이 3가지 사이에 상호 연관성이 약하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그런 사실은 무시해도 무방하다며 합리화했다. 학교와 직장에서의 성공을 뒷받침해주는 그런 일차원적 '학습 능력'이 있다는 (입증되지 않은) 가설에 대한 확신이 굳었기 때문이다.
신체 지수와 마찬가지로 WAIS를 통해 측정된 지능의 각 차원들 간에서는 상호 연관성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다. 즉 지적 재능은 들쭉날쭉해서 IQ 점수 같은 일차원적 값으로는 평가하기나 판단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현재까지도 한 사람의 지능을 단 하나의 등급이나 수치로 평가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란 웬만해선 힘들다. 그러나 지능의 일차원적 평가의 오류는 이 도표상의 지능 단면들을 통해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지금껏 과학자들의 조사에서 드러났듯 지능을 더 세분해서, 이를테면 단어의 단기 기억이나 이미지의 장기 기억을 비교해보면 이런 '미세차원(microdimension)'에서도 상호 연관성이 약한 것으로 나타난다. 지능을 아무리 미세하게 나눠 살펴봐도 그 들쭉날쭉성에는 변함이 없다.
검증 결과 SAT 점수와 출신 학교의 명성은 재능을 미리 예견케 해주는 지표가 되지 못했다. 프로그래밍 경진 대회의 우승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적은 어느 정도 중요한 예견 지표였으나 그것도 졸업 후 3년 동안만 그러했다. "하지만 저나 구글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놀랐던 부분은 따로 있었어요. 자료를 분석해보니 구글의 대다수 업무 영역에서 단 하나의 변수가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니, 단 하나의 업무 영역에서도 그런 경우가 없었다고 해야 맞겠네요."
다시 말해, 구글에서 재능을 발휘할 만한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는 얘기이자 구글이 직원 채용을 최대한 잘하고 싶다면 그 모든 방식에 세심히 신경을 써야 했다는 얘기였다. 칼라일은 구글 인재의 들쭉날쭉성을 감지했고 그에 따라 구글의 신입 사원 채용 방식에 변화를 줬다. 어떤 입사 지원자든 졸업 후 3년이 지나면 시험 성적은 무용지물임이 밝혀진 터라 이제 구글에서는 여간해서는 입사 지원자들에게 GPA를 묻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출신 학교에 대해서도 예전과 같은 식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이제는 어떤 정보를 수집하느냐만이 아니라 그 정보를 어떻게 다룰지도 신경 써야 합니다. 채용 관련 정보에서 가장 중요하게 주목할 요소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실험 덕분에 팀장들이 직원을 적절히 선발하는 데 유용하도록 입사 지원자들에 대해 보다 완벽한 그림을 그려보게 됐죠."
조직에서는 처음 들쭉날쭉성을 받아들이면 흔히들 진흙 속에 묻힌 진주를 발굴할 방법을 찾아낸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특이하거나 숨겨져 있던 재능을 알아볼 방법을 찾아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들쭉날쭉성의 원칙에서는 다른 관점을 갖는다. 우리가 간과된 재능을 알아본 것이라 해도 그 재능은 특이하거나 숨겨져 있던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재능이라고. 그동안 쭉 있어왔고, 들쭉날쭉한 특성을 가진 인간에게만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재능이라고. 따라서 진짜 난제는 재능을 구별할 새로운 방법 찾기가 아니라, 알아보지 못하게 시야를 방해하는 일차원적 눈가리개를 제거하는 일이다.
물론 가장 시급하게 제거해야 할 눈가리개는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들이대는 눈가리개들이다.
맥락의 원칙에 비추어 보면 자제력은 특정 상황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실제로 셀레스트 키드라는 과학자는 마시멜로 실험에 대한 대중의 판단에는 맥락이 간과돼 있음을 간파해냈다. 현재 로체스터대학교의 뇌인지학 조교수로 있는 키드는 당시에 노숙자 쉼터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던 중에 마시멜로 연구를 처음으로 알게 됐다. 다음은 그녀가 나에게 직접 들려준 이야기다.
"그 노숙자 쉼터에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그곳에서는 어떤 아이든 장난감이나 사탕이 생기면 다른 아이에게 빼앗길까 봐 마음 졸여야 하는 분위기여서 뭐든 생기면 그것을 숨겨놓거나 바로 먹어버리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현명한 방법이었죠. 그래서 저는 우연히 마시멜로 연구에 대해 알게 됐을 때 바로 이런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그 쉼터의 아이들은 누구든 다 마시멜로를 받자마자 바로 먹겠구나, 라고요."
애들러는 직장을 맥락 중심에서 바라보는 시각에 착안해 그 자신의 표현처럼 "수행력 기반의 채용"이라는 새로운 직원 채용법을 개발했다. 그는 고용주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사람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요청하는 대신 수행되기를 바라는 직무에 대해 우선적으로 설명해달라고 했다. "기업들은 하나같이 커뮤니케이션 능통자가 필요하다는 말들을 합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직무 설명서에 가장 흔히 기재돼 있는 기량이죠. 하지만 다방면에 걸친 '커뮤니케이션 능통자' 같은 건 없습니다. 특정 직무에 필요할 만한 여러 종류의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있는 것이지, 그 모든 방면에서 능통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고객 서비스 담당자의 경우라면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란 고객의 문제를 이해할 만한 적절한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다. 회계사에게는 고위 임원에게 영업 적자가 수익에 끼치는 영향을 잘 성명하는 능력일 것이다. 애들러는 '뛰어난 커뮤니케이션'의 수행을 위해서는 이러한 맥락적 세부 사항들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캘럼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회사는 초반엔 채용 문제를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할지 잘 몰라서 전통적인 직무 설명서 방식을 활용했습니다. 마케팅 팀을 운영할 사람이 필요했을 때도 일반적인 직무 설명서에 들어맞는 사람을 채용했죠. 그 직원은 화려한 경력을 쌓은 인재였지만 대기업에서 일을 해온 사람이라 성장 속도가 빠른 신생 벤처기업이던 우리 회사와는 업무 스타일이 맞지 않았습니다. 정말 말도 못하게 안 맞았어요."
"기업들은 하나같이 인재가 부족하다고, 기술 격차가 벌어져 있다고들 하소연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고의 격차가 벌어져 있는 것일 뿐입니다. 직무의 맥락적 세부 사항을 통해 생각하려고 애쓰다보면 결국엔 애쓴 보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맥락의 원칙을 적용하는 기업들, 즉 입사 지원자의 상황 맥락별 기질과 직무의 수행 사항을 조화시키려 꾀하는 기업들은 결국엔 보다 일 잘하고 애사심 높고 의욕 넘치는 직원들을 채용하게 돼 있다. 또 우리 개인들로선 맥락의 원칙을 적용하면 진정한 자신의 자질에 잘 맞는 직업생활을 누릴 기회를 얻게 된다.
칸은 유튜브에서 폭넓은 관심을 모았던 2011년 TED 강연에서 속도와 학습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마음에 와 닿는 주장을 펼쳤다. "전통적인 모델에서는 (고정된 기간이 지난 뒤 학생 성취도에 대해) 단편적 평가를 내릴 때 '얘들은 재능 있는 애들이고 얘들은 더딘 애들이군. 얘들은 특별반으로 배치해야겠네. 얘들은 다른 교실로 배치해야 할 것 같군.'이라는 식으로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학생을 저마다의 속도에 맞춰 공부하게 해주면 (중략) 6주 전에 더디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아이들이 이제는 재능 있는 아이들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거듭거듭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좋은 평가를 받아 혜택을 봤던 그 결과들 가운데 단지 시간상 우연의 일치 덕분이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아이가 이차방정식 풀기를 터득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배우는 데 2주가 걸리든 4주가 걸리든 무슨 상관인가? 치의과 학생이 충치 치료를 문제없이 처리하게만 된다면 그것을 익히는 데 1년이 걸리든 2년이 걸리든 무슨 상관인가? 우리의 삶에는 누군가가 통달에 이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다시 말해 통달해내는 것 자체에만 신경 쓰는 그런 영역들이 이미 많이 있다. 운전이 그 좋은 예다. 운전면허증에는 필기시험에서 떨어진 횟수나 마침내 면허증을 따낸 나이 따위가 기록되지 않는다. 누구든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운전을 할 수 있게 허용된다. 변호사 시험 역시 좋은 예다. 변호사 자격증의 획득은 시험에 합격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느냐에 좌우되지 않는다. 어쨌든 합격만 하면 자격증을 딸 수 있다.
모든 학생이 저마다 학습 속도가 다르다면, 또 학생 개개인별로 다른 속도로 다른 시간에 다른 내용을 학습한다면 모든 학생을 고정된 속도에 따라 학습시켜야 한다는 개념은 구제 불능의 오류다. 생각해보라. 당신은 수학이나 과학에 정말로 소질이 없었는가? 아니면 학습이 당신의 학습 속도에 맞춰주지 않았을 뿐인가?
킴 캠벨이 주는 교훈은 한마디로 이것이다. 맞춤이 기회를 만든다. 환경이 자신의 개개인성과 잘 맞지 않으면(이를테면 조종석에서 팔이 잘 닿지 않아 조종하기가 힘들다면) 그 환경이 조종석이든 교실이든 전망 좋은 고급 사무실이든 간에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펼칠 만한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다. 다시 말해 만인에게 평등한 기회를 원한다면, 우리 각자가 잠재력을 한껏 펼칠 기회를 똑같이 누리는 사회를 원한다면, 직장・교육・사회조직이 개개인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링컨은 정치의 "주된 목적은 인간의 처우를 향상시키는 것, 즉 모든 이의 어깨를 짓누르는 인위적 짐을 내려주고 모든 이가 가치 있는 이상을 추구하도록 길을 닦아주며 모든 이가 인생이라는 경주에서 자유로운 출발과 공정한 기회를 누리게 해주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평등한 맞춤은 우리의 조직들이 우리의 소중한 가치와 보다 밀접히 조율되도록 이끌어줄 이상이다. 또한 우리 각자에게 최고의 자신으로 도약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의 훌륭한 삶을 추구하도록 그 기회의 문을 열어준다.
번역 / 매슈 레이놀즈 / 교유서가
역사를 통틀어 세계 곳곳에서, 번역하다가 생겨난 언어적 특이성은 국어의 구조에 흡수되었다. 라틴어 단어 수천 개가 영어로 유입된 16세기에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19세기 초엽에는 독일어와 고전어들 사이에, 말엽에는 일본어와 유럽어들 사이에 타가수분이 일어났다. 영어가 문화 간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되는 바로 지금도 전 세계에서 비슷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은 영어를 제2, 제3, 또는 제4의 언어로서 알고 있고, 현지 사정과 자기네 필요에 맞추어 영어를 재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지도에 필요한 첫번째 발견이다. 번역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건너뛰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불도그와 보르조이를, 또는 장미의 두 변종을 교배하는 것처럼, 번역은 언어들을 섞는다는 의미에서 '언어들을 교배하기'도 한다.
사실 모든 번역 행위는 양측을 중재하는 것이다. 화자 또는 원천 텍스트의 말을 전달하는 번역자는 청자 또는 독자가 수용할 만한 뜻을 의식하여 행위의 목표를 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두번째 발견은 다음과 같다. 모든 번역은 외교술을 내포한다.
사실 모든 번역자는 자신의 작업물을 읽을 독자 공동체로부터 어느 정도 압박을 받는다. 그리고 모든 번역자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각자의 해석에 도달한다.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그리스어 실력이 꽤 좋았으나 18세기 초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번역에 착수했을 때 혼자가 아니었다. 포프에게는 참고할 그리스어 주해들과 이미 영어, 라틴어, 프랑스어 역본들이 있었다. 물론 각종 사전도. 번역자들은 언제나 하나 이상의 원천 텍스트에 의존한다. 번역 장면에 한 사람과 펜과 종이, 번역중인 책밖에 없을지라도, 또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구두로 번역해주고 있을 뿐일지라도, 그 번역자의 언어 지식은 다른 많은 텍스트들과의 대화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번역의 목적은 대상 독자 또는 독자들의 기대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모든 번역은 집단 번역이다(이것이 우리의 세번째 중요한 발견이다).
물론 러시아어, 줄루어, 벵골어, 만다린어처럼 영어와 사이가 더 먼 언어들은 프랑스어만큼 겹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언어들은 나름대로 인접 언어들(각각 폴란드어, 코사어, 아삼어, 광둥어)과 연속되고 서로 겹친다. 언어는 바다의 섬처럼 외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사막과 같은 연속체 안에서 어법들이 모여서 형성하는 사구(沙丘)를 더 닮았다. 어떤 사구는 주변 사구들과 달라 보일지 모르지만, 무한히 이동하고 변화하는 사구들의 경계는 차츰 흐릿해진다.
번역서 서평자들은 이 사실을 좀체 유념하지 않는다. 으레 그들은 번역자가 '원본'의 고유한 '어조' 또는 '정신'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거나 성공했다는 이유로 번역을 꾸짖거나 칭찬한다(보통 꾸짖는다). 그러나 원본은 어조나 정신을 홀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독자들이 원본에 그런 특성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사실 근본적으로 말해 '하나의 원본' 따위는 없다. 독자들과 상호작용하여 여러 해석을 낳는 원천 텍스트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서평자가 어떤 번역이 "원본의 어조를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고 느낄 때 그 느낌의 실상은, 인쇄된 번역이 서평자의 마음속에 있는 암묵적 번역과 어딘가 다르다는 것이다.
명백한 오류의 결과가 아닌 한, 이 다양성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어떤 책을 이미 읽은 후라면, 당신 독법이 옳다고 확인해주는 번역을 과연 원하겠는가? 번역은 동일한 텍스트가 다른 독자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놀랍도록 상세하게 보여줄 수 있다. 댄 건과 같은 서평자의 해석을 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런 해석을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번역은 원천 텍스트가 감싸고 있는 의미의 뉘앙스를 열어젖힐 수 있다. 번역은 꽃봉오리를 활짝 피울 수 있다.
이민자처럼 취약한 사람과 법정처럼 권위 있는 기관 사이를 중재하는 통역자를 생각해보라. 통역자는 이민자의 말을 영어로 '충실히' 옮겨야 할 뿐 아니라 상황에 맞추어 그 발언을 충분히 정확하면서도 적절한 방식으로 전달해야 할 것이다.
법률 서비스와 사회복지가 공정하게 기능하는 데 숙련된 번역자가 아주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정 사건을 위해 일하는 적합한 자격을 갖춘 통역자가 없다면 심문이 취소될 것이다. 사회복지 영역에 적합한 번역자가 없다면, 번역 책임을 지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게 될 공산이 크다.
편역(trans-editing)은 모든 번역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지만 특히 뉴스 번역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이데올로기적 조정을 드러낸다. 어떤 뉴스 사건을 특정 언어로 보도하는 것은 곧 그 사건을 어떤 세계관의 틀에 맞추는 것이자 일군의 관점과 전제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다. 국제 뉴스의 고속도로는 이야기를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실어나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도로는 어떤 사건을 뉴스로 여길지 결정하고 그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고정한다.
번역은 어떻게 보면 언어들의 적, 언어들을 단조롭게 만들고 균질화하는 힘이다. 그러나 번역은 언어들의 연인이기도 하다. 번역은 차이를 분별하고 존중하며, 언어적 혁신을 자극한다. 번역과 마찬가지로 언어 자체의 핵심도 우리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만이 아니다. 그에 더해 언어는 우리가 서로 다를 수 있게 해준다. 언어는 우리가 저 집단이 아닌 이 집단에 속하게 해주고,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를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요컨대 언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이유로 번역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번역은 차이를 드러내고 즐기는 동시에 연결한다. 번역은 바벨탑이 저주였던 것만큼이나 축복이었음을 인정한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 존 러스킨 / 아인북스
인류의 역사에서 다양한 시대를 통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온 여러 망상들 가운데 가장 기이한 망상은 아마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애정이라는 요소를 배제할 때 더욱 진보된 사회적 행동규범을 갖게 된다.'는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소위 '경제학'이라 불리는 현대 학문인 것 같다(믿을 근거가 가장 부족한 망상임에는 틀림없다).
'부'의 이름 뒤에 감추어진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은 다름아닌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다. 좁은 의미에서 부는 하인이나 상인, 그리고 예술가의 노동력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는 힘을 뜻하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국민들의 노동력을 국가의 다양한 목적을 위해(유익하든, 별로 관계가 없든, 아니면 유해하든지 부유층 기득권의 의도에 따라) 이용하는 힘을 뜻한다.
부의 힘은 그것의 지배력 아래 놓인 사람들의 가난에 대개 정비례하고, 반면 공급이 제한된 물품에 매겨진 판매가를 지불할 수 있는 구매 경쟁자들, 즉 유사한 수준의 부를 소유한 사람들의 숫자에 반비례한다. 어떤 가난한 음악가에게 비록 그 액수가 적더라도 자신을 후원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음악가는 적은 후원비라도 받기 위해 노래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후견인이 서너 명 된다면, 음악가는 가장 많은 후원비를 주는 한 사람을 위해 노래할 것이다. 즉, 음악가에게 행사되는 후견인의 지배력은 첫째는 음악가의 가난한 상태에 의해 결정되고, 그 다음으로는 공연장에서 같은 가격의 좌석 티켓을 구입할 수 있는 경쟁 후원자들의 숫자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이를 토대로 부를 정의하면 '역량 있는 사람의 손에 소유된 가치'라 할 수 있겠다. 국력의 한 형태로서 부를 평가할 때는 반드시 두 잣대를 공평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는데, 바로 '소유 재산의 가치'와 그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국민들의 역량'이 잣대가 된다. 이 두 잣대를 들이대면 겉보기에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 중에 대다수는 당초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부를 다룰 역량의 부족으로 인해 그들 금고에 채워진 자물쇠 마냥 실제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국가 경제의 운영에 있어서 마치 물이 고인 웅덩이와 강물의 소용돌이 같은(사람들을 익사시키거나 강물의 흐름에 방해될 뿐이고, 강물이 말라서 그 바닥이 드러났을 때나 그 웅덩이에 담긴 물이 좀 귀해 보일까 싶은) 존재들이거나, 아니면 방앗간 주인 없이 흐르는 강물을 아무런 목적 없이 막아선 제방 같은 존재들이고, 혹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걸림돌과 장애물이 되어서 부를 가져다주기보다는 오히려 그 주변 사람들에게 갖가지 풍지 풍파를 가져오는 요물같은 존재들이다.
자본은 다른 방법으로 반짝일 때, 즉 자가 증식으로 빛을 발하지 않고 오히려 소모되어 밭고랑을 만들 때 생기는 고귀한 마찰로 인해 빛을 발해야 진정한 자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과 관련해 모든 자본가들과 국가들에게 물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은 "당신은 보습을 몇 개나 소유하고 있습니까?"가 아니라 "당신의 밭고랑은 어디에 있습니까?"이고, "이 자본이 얼마나 빨리 증식되겠습니까?"가 아니라 "생명의 증식을 위해 이 자본의 역할은 무엇입니까?"가 되어야 한다. 생명의 증식을 위해 어떤 물품이 공급되어야 하겠는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방벽을 쌓아야겠는가? 이 질문들에 긍정적으로 답할 것이 하나 없다면 자본의 자가 증식은 무용하다. 자본은 생명을 지탱하며 파괴도 하기 때문에 만약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답을 내어 놓는다면, 그런 자본의 자가 증식은 무용한 게 아니라 도리어 유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