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을 권리 / 황두영 / 시사IN북
'가족 사랑'에서 책임과 의무를 덜어야 한다. 대충 사는 사람도 대충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 덜 부담스러운 방식으로 함께 살고 서로를 돌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존 혈연가족 간 부양부담을 줄이기 위해 보편적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가족이 너무 많은 것을 책임지지 않도록 교육하고 노동 개혁을 해야 한다. 더불어 가족을 구성하는 방식의 무게감을 어떻게 덜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책임과 의무가 덜어진 가족의 자리에 '같이 사는 즐거움'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혈연과 혼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의무를 지는 가족이 아닌 같이 사는 즐거움을 나누는 사람들로, 가족을 다시 생각하는 맥락 위에 생활동반자법을 만들어야 한다. (p.52)
혼자는 힘들다. 누군가와 같이 살고 싶은 이유는 다양하다. 정서적 충만, 경제적 안정, 장애인의 활동보조 등 이성애적 사랑에 비해 작은 이유라고 볼 수는 없다. 어떤 이유로 같이 살고 싶은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너무 익숙할 뿐, 사실 어떤 이유로 같이 살고 싶은지를 국가가 굳이 따져 묻는 것이 더 어색한 일일 수도 있다. 서로에 대해 신뢰하고 서로가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만 묻자. 그것이 생활동반자법의 정신이다. (p.120)
성 역할 구분이 분명한 한국적 핵가족의 아래에서 가족 구성원이 모두 행복하진 않았다. '남편의 수입과 보호로 사랑을 베풀며 사는' 현모양처의 로망은 여성이 접어야 했던 꿈들과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들을 지웠다. 단적으로 한국형 핵가족 모델이 정점을 이루었던 1990년 출생성비는 116.5였다. 즉 딸 100명이 태어날 때, 아들은 116.5명이 태어난 것이다. 많은 딸들이 태어나지 못한 채 임신중절을 당했고, 엄마들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 위험한 중절 수술을 견뎌야 했다.
한국형 핵가족의 낭만은 차별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평등 의식이 커갈수록 점차 사라질 운명이었다. '정상 가족'의 붕괴의 원인을 노동 시장의 불안정에서만 찾는다면 우리는 한국적 핵가족 모형으로 돌아가야겠지만, 성평등과 다양성 증가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p.161-162)
동성동본 금혼제가 유지되고 폐지된 역사는 가족구성권이 특별한 이유 없이 배제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법으로 금지해도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고픈 마음을 꺾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에서 이혼한 여성은 6개월 간 재혼할 수 없었던 규정, 미국의 타 인종간 혼인금지 규정, 세계적으로 논쟁 중인 동성 결혼, 그리고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있는 생활동반자법 등은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권리'가 법과 제도에 따라 보장되기도 하고 배제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갈수록 인격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유연하고 폭넓게 관계의 권리를 보장하는 경향이 있다. (p.178)
사회복지를 개인 중심으로 할지, 국가 중심으로 할지도 나라마다 다르다. 가령 복지국가의 전형으로 꼽히는 북유럽 국가들은 개인 중심의 사회복지를 통해 개인이 가족 형태와 무관하게 일정한 수준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비교적 가족 중심의 사회복지제도를 가지고 있다.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가족부양의무제, 주택분양 및 공공임대 등에서 부양가족 가점제, 국민건강보험에서 피부양자 등록, 부양가족 소득세 공제 등 기초생활보장, 주택, 건강보험, 세금 등 모든 사회복지 분야가 가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p.180-181)
우리 법은 성인이 자신의 뜻으로 가족을 구성하는 방식을 혼인으로 한정한다. 가족이라면 원칙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후까지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사실 결혼할 수 있는 관계, 결혼하고 싶은 관계라는 건 우리가 맺는 친밀한 관계 중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일단 이성 사이고, 성적인 끌림이 있고, 평생 이 관계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동성 커플도, 친구도, 지금 혹은 몇 년 살다보면 평생 도움이 될 지도 모르는 관계도 우리 법상 가족으로 등록할 수 없다. 이들은 법적으로 등록하지 못하고, 가족으로서 누리는 권리에서 배제된다. (p.183)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 하워드 진 / 추수밭
남부의 대농장주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흑인 노예들과 가난한 백인들이 베이컨의 반란 같은 대규모 봉기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인종차별은 흑인과 백인들이 단결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버지니아의 노예제를 연구한 역사가 에드먼드 모건은 ⟪미국의 노예 제도, 미국의 자유⟫에서 인종차별이란 흑백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은 백인 지배자들이 흑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가난한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들에게 경멸감을 가졌다면, 그들을 반란에 가담시키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p.51)
1935년 역사학자 찰스 비어드(Charles Beard)가 발표한 헌법에 관한 새로운 견해를 접한 사람들은 분노했다. 찰스 비어드가 헌법 작성을 위해 모였던 55인에 관해 연구한 결과 그들 대부분이 부자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 가운데 절반은 사채업자들이었고 대부분은 변호사였다. 그들은 현재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경제 시스템을 유지해줄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연방정부를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 찰스 비어드는 여성, 흑인, 계약 노동자, 빈민들이 헌법 작성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힘없는 사람들의 요구 사항이 헌법에 반영되지 않았음을 밝혔다.
헌법에서는 각 주의 입법자들이 연방의회에서 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을 선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 주의 입법자들은 대통령을 선출할 선거인단을 선정한다. 대통령은 대법원의 구성원들을 임명한다. 국민이 정부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하원의원의 선출이 유일했다. 그나마도 각 주는 투표 자격조건에 제한을 두었다. 여성, 인디언, 노예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이와 마찬가지로 거의 모든 주에서는 빈민들에게도 투표권을 박탈했다. (p.75)
거대한 지지 기반이 필요했던 정부는 지지를 얻기 위하여 마련된 '잭슨 민주주의(Jaksonian Democracy)'의 신화를 탄생시켰다.
그 신화는 평범한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정부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정부가 세심히 보살피고 있다고 믿게 했다. 이것은 정부가 필요할 때 중하층계급(lower and middle classes)에게서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국민에게 두 정당을 놓고 선택권을 준다는 것, 조금 더 민주적으로 보이는 당을 선택하게 해 준다는 것은 국민을 통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던 것이다. 공화・민주 양당 지도자들은 국민이 바라는 대로 조금씩 개선해줌으로써 사회의 통제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 지나친 개혁은 금물이었다. (p.128)
1893년 대법원 판사 데이비드 J. 브루어(David J. Brewer)는 "사회의 부가 소수의 손에 쥐어진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다"라는 말을 했다.
교회, 학교, 회사, 정부는 사회의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교육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려고 했다. 가난은 개인이 실패한 것이지 사회의 잘못이 아니며, 부자들은 부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는 옳고도 바른 것이었다. (p.145)
쿠바에서 그랬던 것처럼 필리핀에서도 인종이 문제였다. 미국의 일부 백인 병사들은 필리핀인들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었다. 흑인 병사들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흑인도 백인 못지않게 용감하고 애국심이 투철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또 일부는 군대를 통해서 자기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머지 흑인 병사들은 유색인종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전쟁에서 싸우고 있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술 취한 백인 병사들이 플로리다 주 탬파에서 흑인 소년을 과녁 삼아 사격 연습을 하면서 인종 폭동을 일으켰던 미국에서의 흑인들에 대한 폭력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수많은 흑인들이 필리핀전쟁에 반대하고 나섰다. 필리핀전쟁은 인종적인 갈등이며 백인들이 유색인종을 정복하기 위해 벌인 싸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조국에서도 부당함과 싸우고 있었다. 매사추세츠의 한 흑인단체는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에게 인종 간의 평등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비난의 편지를 보냈다.
19세기 내내 흑인들은 여성, 노동자, 빈민들과 함께 억압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높여왔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는 정치・경제 체제의 가장 가혹한 위력에 저항하는 방법들을 찾아냈다. 그 다음 세기에 그들은 변화를 위해 스스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p.161-162)
헬렌 켈러(Helen Keller)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참정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각장애와 청각장애가 있던 헬렌 켈러는 정신력과 펜으로 변화를 위해 투쟁했다. 1911년 그녀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허울뿐이지 않은가. 우리가 투표를 한다? 그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거기서 거기인 것들을 놓고 선택할 뿐이다." (p.172-173)
뉴딜정책은 미국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예술의 비약적인 발전이란 결과를 낳기도 했다. 연방정부는 창조적인 계획을 세우고 수천 명의 작가, 화가, 음악가, 사진가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그로 인해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연극이나 음악회의 관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39년에 그러한 예술 프로그램들은 끝났다. 점차 안정세를 보이자 뉴딜정책이 끝났던 것이다.
자본주의는 변하지 않았다. 국가의 부는 여전히 부자들의 수중에 있었고 법, 법정, 경찰, 신문, 교회,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수백만 명의 영웅이 되었지만, 대공황을 초래한 시스템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p.200)
전쟁이 끝났을 무렵 많은 사람은 생활이 향상된 듯했다. 전쟁으로 거대 기업들은 이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배분해주었다. 농부들은 더 높은 농작물 가격을, 일부 노동자들은 임금을 올려 받았다. 국민이 반란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부유해졌던 것이다. 그야말로 정부에 의해 학습된 낡은 교훈, 즉 전쟁이 국가 통치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준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이에 만족한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General Electric Corporation)의 회장은 기업과 군부가 "영구적인 전시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p.208-209)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오늘 우리 부대는 임무수행을 했고, 저는 저 자신을 비롯하여 전우들과 조국이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베트남 파병 미군 병사가 집으로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대체 어떤 전쟁이었기에 병사가 저런 말을 했을까? 수많은 미국인이 조국에 대해 분노하고 부끄러워하게 한 전쟁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한 강대국이 10년 가까운 시간을 소비하면서 약소국과 싸워 이겨보겠다고 애쓰다가 결국에는 실패했다. 미국이 동남아시아 국가 베트남과 벌였던 전쟁은 현대적인 군사기술과 조직적인 인간들과의 대결이었다. 거기서 인간들이 이긴 것이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던 최대 규모의 반전운동을 일으켰다. 수천 명의 사람이 길거리 행진을 했으며, 학생들은 조직적인 항의를 했다. 예술가, 저술가, 그리고 군인들도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대대적으로 일어난 반전운동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베트남전쟁을 종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p.227-228)
찰리 멍거 자네가 옳아! / 재닛 로우 / 이콘
그는 나나 다른 사람들이 더 훌륭한 사업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게 이끌어주었으며, 일이 잘못되어갈 때는 순전히 자신의 탓이라고 하고 반대로 일이 잘될 때에도 거기에 대한 자랑을 일삼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관대함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며 아집에 사로잡혀 합리적인 판단을 그르친 적도 없다.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무수한 사람들과 달리 찰리는 스스로가 정한 점수표로만 자신을 판단한다. 그리고 그는 절대로 후한 채점자가 아니다.
멍거와 버핏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초기에 변호사 일을 하던 찰리는 이렇게 말했다. "워런처럼 저 역시도 부자가 되고 싶다는 강한 열정이 있었지요. 페라리를 타고 싶어서가 아니라 독립하고 싶었어요. 저는 정말로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청구서를 발송해야 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품위 있는 생활은 아니었죠. 어디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성공한 투자 고문이자 찰리의 하버드 로스쿨 동기인 헨리 그로스는, 지인이 찰리를 가리켜 성공하더니 거만해졌다고 지적하자 찰리를 이렇게 변호해주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였습니다. 나는 찰리가 젊고 가난했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그 친구는 늘 거만했습니다."
찰리는 조부에게 배운 원칙대로 살았다. 첫째, 비즈니스를 구축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현재 책상 위에 놓인 일에 집중하는 것이고 둘째, 수입을 초과하여 지출하지 않고 현금을 모아서 미래의 부를 마련하는 데 투자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 어떤 일에 더 뛰어난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이끄는 사람이 되기 전에 우선은 따르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배역을 연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어울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멍거는 독립적인 사고를 갖출 것을 역설한다. "전적으로 타인이나 전문가의 조언에 의존해서 어떤 일을 판단한다면 정작 자신의 작은 테두리를 벗어날 때마다 큰 고난이 닥칠 것입니다." 찰리는 전문적인 조언을 구하기 위해 의사, 회계사 등 그 방면의 전문가를 찾아갈 필요가 있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전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들의 의견을 고려하고, 계속해서 조사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그리고 마침내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한다.
"개인 투자자에게 주식의 가치가 지니는 기본 개념이라든가, 가격 모멘텀이 아니라 내재가치를 증권 매매의 동기로 삼아야 한다는 개념 등은 아마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입니다."
멍거는 자신의 부가 안정 궤도에 이르렀을 때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처럼 하고 싶었다. "프랭클린은 (재정적인) 자유를 획득했기에 사회에 공헌을 할 수 있었습니다." 멍거는 진정으로 부자가 되려면 사업을 소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시즈캔디가 대단히 훌륭한 계속기업(ongoing business)임이 드러나자, 멍거와 버핏은 곤경에 처한 회사를 헐값에 매입해서 시간과 에너지와 때로는 더 많은 자본을 쏟아 붓는 것보다는 훌륭한 기업을 인수해서 그대로 굴러가게 하는 것이 훨씬 쉽고 유쾌한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가 될지 안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여성 본인의 권리라는 판단을 내리자 멍거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자원을 쏟아부으며 사태를 바꿀 방법을 찾아다녔다. 그는 회계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지만 사회 문제에 있어서는 진보적 성향을 지닌 버핏을 설득해서 닥터 벨루스의 변호비용을 일부 부담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멍거와 그의 법률회사 파트너들인 로드 힐스나 짐 애들러가 나머지 비용을 부담했다.
버핏의 설명을 들어보자. "그 사건을 맡은 찰리는 최고 수준의 변호사들로부터 법률에 대한 조언과 의견서를 얻어내는 한편 의대 교수들에게서도 의견서를 확보했습니다. 찰리는 그 소송에 자신의 모든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버핏도 멍거만큼 단호한 입장이다. 1994년 버핏은 이렇게 선언했다. "이 나라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가 원해서 태어나는 아기라면 세상의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이를 도와주기 위해 우리 곁에 가장 가깝게 있는 것이 바로 가족계획협회입니다. 여성이 출산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평등한 사회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버펄로 뉴스 발행인인 스탠 립시가 말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찰리는 워런의 사고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게 도와주었습니다. 가령 보다 강력한 독점기업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사고 말입니다. 그들의 대화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폭넓게 사고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뿐 아니라 유익한 조언도 얻을 수 있습니다."
난문쾌답 / 오마에 겐이치 / 흐름출판
어떠한 힘이 일시적인가, 지속적인가. 그것은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지속적인 힘이라면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인가, 약화될 것인가. 벡터는 일정한가, 변화하는가. 이 모두를 고려해서 미래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지 생각해본다. 이러한 논리적 통찰을 반복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통찰력은 예언, 직감, 영감과는 달리 누구나 익힐 수 있다. (p.28)
'이것만큼은 잘한다' 하는 한 가지 강점을 알아둔다. 어떤 분야든 상관없다. 누구도 자신을 대신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p.42)
인간을 바꾸는 방법은 3가지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 3가지 방법이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은 가장 무의미한 행위다. (p.50)
오늘 내 인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해보자. 오늘의 자신은 내일의 근원이다.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일이 달라진다. (p.65)
"나도 같은 의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고의 미숙함'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같은 의견입니다"라고 말하는 학생에게 "반대합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라고 지시한다. 실은 찬성한다 해도 반대하기 위한 논거를 생각해보면 사고력을 키울 수 있다. (p.77)
'고객의 욕구'를 철저히 따르는 사업가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3C(company, consumer, competitor) 중에서 고객이 제일 중요하다. 고객이 좋은 에어컨을 원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좋은 에어컨이 아니라 쾌적한 실내 환경이다. 즉, 에어컨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p.154)
아이디어를 많이 생각해내는 훈련을 해보라. 그러면 쓸모없는 아이디어를 버리는 용기가 생긴다. (p.182)
사업가가 되는 그 순간부터 적극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학창시절의 성적 우수자들이 '왜 일이 잘되지 않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혼자 '어떻게 하면 잘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은 통쾌한 일이다. (p.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