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료에게 말 걸기 / 박동수 / 민음사
‘한국어로 철학하기’를 구현해야 한다는 주문은 책을 쓰는 내내 편집자가 반복해서 주입한 사상이다. 한국어로 철학하기는 서양에서 나온 철학 사상을 한국 사회에 적용한다는 뜻도 아니고, 우리만의 고유한 것을 맨땅에서 만들어내자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개념을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의 현실 상황에서 이해하고, 다시 나의 고민과 연결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사랑과 돌봄 같은 문제를 개념적으로 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혼 생활을 시작하며 내 몸으로 겪은 가사 노동의 경험과 연관시켜 사유하는 것이다.
철학을 현실 세계에서 빼내기보다는 오히려 현실 세계 안에 집어넣는 것. 그리고 철학의 바깥으로부터, 철학의 조건들로부터, 노동과 예술과 과학과 사랑과 정치로부터 ‘경험을 통해’ 배울 줄 아는 것. 이것이 한국어로 철학하기가 걸어가는 길이다. 이때 철학은 누구나 가진 고유한 경험의 복잡함을 복잡하게 사유하는 일이 된다. 내가 발 딛고 선 그 자리가 오늘의 철학이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할 일종의 의무 통과점이 되는 셈이다.
내가 발 딛고 선 곳에서 철학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철학 자체에 천착하거나 철학의 사회적 쓸모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자리 한복판에서 끝까지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나의 생각을 주어진 현실과 범주의 한계까지 밀고 나갈 때, 우리는 거기에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때 철학이란 생각에 선행하는 어떤 고정된 사물이나 사상이 아니라,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행위와 그 결과물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p.9-10)
이 책이 일관되게 견지하는 하나의 태도는 동료에게 말 걸기다. 철학책에서 굳이 동료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철학자는 두 가지 길을 걸어왔다. 하나는 고독한 사색가의 길이다. 홀로 깊이 사유하며 진리에 도달하려는 수행자의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스승과 제자, 혹은 같은 학파의 동지들과 함께 진리를 탐구하는 길이다. 그런데 오늘날 철학은 이 두 가지 길과는 다른 관계를 요청한다.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진리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대화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세계관, 서로 다른 가치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다원화 시대 속에서, 기후위기 앞에서, 민주주의 위기 한가운데서 우리는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이웃들과 공존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같은 신념을 가진 동지 관계도, 진리를 전수하는 사제 관계도 아니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즉 동료와의 관계다.
동료는 우리에게 낯선 사람이다.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적도 아니다. 동료란 같은 직장에서 일하거나, 같은 업계에 속해 있거나, 같은 나라에 살거나, 아니면 같은 지구 위에 거주하는 사람이다. 직장 동료, 업계 동료, 동료 시민, 동료 지구인 같은 관계다.
동료는 동지가 아니다. 동지가 같은 뜻을 품은 사람이라면, 동료는 같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같은 뜻을 갖지 않고 비자발적으로 함께하는 관계이기에 때로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동료는 적도 아니다. 동료는 서로 간의 평등을 전제한다. 권위에 기대어 상대를 깔보거나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면서 서로 배울 수 있는 관계다. 이 점에서 동료의 반대말은 권위주의다. (p.13-14)
낯선 동료에게 말을 걸려면 물론 잘 말해야 한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잘 말하기를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과 자신이 말해야 하는 상대방 모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번역한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존중하며, 그에 대해 잘 말하는 법을 천천히 배워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상대가 말하는 모든 것에 무조건 동의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잘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유일한 방법은 동료와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가’다. 말의 내용만큼이나 말하는 방식과 태도가 중요하다. 말을 건네는 태도에는 상대를 동료로 대하는지, 적으로 규정하는지, 혹은 계몽의 대상으로 삼는지가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태도의 문제를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존재양식의 문제, 곧 철학이 풀어야 할 중심 과제로 다룬다. (p.15-16)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일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방향에 대해 의문을 품고 행하기를 주저하는 행위다. ‘이 길이 정말 옳은 길인가?’라고 묻는 머뭇거림과 망설임 속에 대화를 향한 희망이 있다. 부조리와 폭력의 연쇄를 반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폭력에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들이 민주주의를 지킨다. 나는 여기서 철학자 리처드 로티를 따른다. “민주주의 사회들의 우월성은 합리성에서의 우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회들이 덜 잔인하다는 사실로 이루어져 있다.” 권위주의의 귀환 속에서 우리가 붙잡고 가야 할 민주주의의 덕목은 덜 잔인한 사회를, 타인을 존엄하게 대우해야 할 필요성을,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에 합류해야 할 의지를 간직한 겁쟁이의 태도다. (p.18-19)
때는 1970년대 프랑스, 68혁명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국립도서관의 고문서 보관소를 뒤지다 한 편의 편지를 발견한다. 1830년대 프랑스에서 노동자로 살아간 목수 루이 가브리엘 고니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랑시에르는 19세기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찾으려 했지만, 뜻밖에 마주한 것은 한 노동자의 낯설고 생기 넘치는 삶이었다. 고니는 휴일을 내일의 노동을 위한 회복 시간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는 탐미주의자처럼 산책을 하며 풍경을 즐기고, 철학자처럼 글을 쓰며 형이상학적 가설을 전개하고, 활동가처럼 만나는 벗들에게 노동운동을 전파했다. 그것은 오히려 부르주아의 여가에 가까운 것이었다.
낮에는 마루 까는 노동자로 바닥을 무릎으로 기어다니고, 밤에는 시를 쓰고 철학책을 읽고 동료들과 정치 토론을 한다. 매일매일 시간을 도둑맞는 슬픔을 더 이상 견디지 않고 온전히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되겠다는 의지다. 사회 질서는 ‘누가 무엇을 읽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가’를 당연한 듯 구분 지어 놓는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여가와 부르주아의 여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지를 때, 고니는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질서를 모두 교란하는 존재가 된다. 그는 노동자로 살지만 부르주아처럼 읽고 사유하고 말할 수 있었다. (p.27-28)
어쩌면 랑시에르가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목수 고니가 친구에게 보낸 다음 말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를 끔찍한 독서 안으로 던져 봐. 그게 너의 불행한 삶 속에서 정념을 일깨워 줄 거야.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자신을 집어삼키려 드는 것에 맞서 일어나기 위해 바로 그런 게 필요해.” 프롤레타리아의 고통을 마비시킨다고 여겨진 다른 세계들과의 만남, 곧 시와 철학, 연극 등이 때로는 고통에 대한 의식을 가장 첨예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p.29)
가족은 정제된 언어로 말하려 들면 오히려 가장 먼저 말문이 막히는 존재다.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언제나 애정과 수치심 사이를 오간다.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끝내 끊어 내지 못하는 감정 앞에서 우리는 주저한다. 에리봉의 책이 폭넓은 반향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는 이 주저함을 피하지 않고 곧장 문제화했다는 점에 있다. (p.43)
에리봉의 글쓰기가 주는 강한 인상은 가족을 서정화하지 않는 데 있다.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지도, 가족을 미화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혐오하거나 열등감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다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사회학자의 눈으로 감정을 해부하고 기록한다. 이러한 거리 두기는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사유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다. 그에게 글쓰기는 곧 자기 자신과 가족을 이해하는 방식이고, 자신이 부끄러워했던 장소를 다시 보는 일이다.
이런 글쓰기 방식은 쉽지 않다. 에리봉은 이렇게 말한다. 가족과 고향으로 ‘되돌아가기’에 대해 쓰는 글은 문학, 이론, 정치라는 필터를 통과해야만 가능하다고. 날것의 감정을 그대로 쓰는 일은 너무 많은 감정적 부하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가림막을 두고 감정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이다. (p.45-46)
경주라는 도시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겠지만, 경주가 어떻게 지금의 경주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천년의 고도이자 세계적인 관광지로 유명한 경주가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다. 문화재 전문 언론인 김태식은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 시대 대한민국 수도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겨냥한 대한민국 ‘정신의 수도’는 경주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주의 모습은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최초의 관광단지인 경주 보문관광단지가 조성되었고 경주 전체가 문화재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통해 외화를 획득하고, 화랑정신 아래 국민 정서를 통일시키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경주는 권력자가 사랑한 도시였다. (p.60-61)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는 노르망디 지방의 소도시 이브토 출신이다. 그는 고향에 잠깐 들렀다 올 때마다 새로 생겨난 건물과 상점을 보게 되지만, 오늘날의 모습은 마음에 남지 않고 즉각 잊고 만다고 쓴다. 바뀌고 새로운 것들은 망각되지만, 오래전 마음속에 새겨진 기억은 현실보다 강력해서 계속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기억은 현실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에르노에게 이브토는 기억의 도시이자 기억의 영토다. 세계에 대한 배움이 일어났고, 욕망과 꿈과 수모로 채워진 영토. 실제 도시와는 아주 다른 주관적 영토. 그곳은 “체험의 영토”다.
각자의 고향, 가족, 기억은 같지 않다. 같은 지역이라도 체험이 다르고, 같은 체험조차 전혀 다른 기억으로 새겨진다. 각기 다르게 살아온 세계는 물리적 장소이기 이전에 감정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이 체험의 영토다. 체험은 객관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나이, 계층, 거주지, 교육 같은 사회적 조건과 감정적 관계의 결을 따라 달리 형성된다. 그러니 순전히 객관적이고 벌거벗은 기억이나 체험은 있을 수 없다. 잊었다고 믿었던 장면들, 말하기 꺼려졌던 기억들, 숨기고 싶었던 감정들이 모여 있는 곳. 그곳이야말로 다시 사유해야 할 자리다.
랭스, 김해, 경주 같은 지명은 행정 문서에 기입된 단순한 경계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곳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자부심과 수치심, 애정과 모욕, 양가감정이 켜켜이 쌓인 감정의 지층이다. 어떤 지역의 사람들이 특정 정당을 반복해 지지하거나 외면하는 정치적 결정에는 언제나 단순한 이념이 아닌, 말해지지 않은 긴 이야기가 숨어 있다. (p.70-71)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정치가 화제로 오르기만 하면 분위기는 금세 싸늘해졌다. 어느 날인가 말싸움처럼 대화가 끝났을 때 나는 홧김에 “책 한 권 안 읽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라고 쏘아붙였다. 아버지는 조용히 반문했다. “그럼, 문맹인 내 친구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글을 읽지 못하는 친구의 삶이 그 자체로 존엄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반면 나는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과 통하지 않는 사람을 미리 갈라놓고 있었다. 어떤 유형의 사람은 아예 말 걸어 볼 필요조차 없는 존재로 규정해 버린 셈이다. 마치 극우 지지자들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섣불리 단정 짓는 것처럼. 그러나 이런 태도는 애초에 ‘대화 불가능한 절대 타자’를 만들어 버리는 일이다. 그것은 말 걸기를 시작부터 가로막는 오류다. (p.75)
한번 생각해 보자. 누군가 나에게 고함치고, 여러 사람 앞에서 지적하며, 오류의 꼬리표를 붙였을 때 과연 내 생각이 바뀐 적이 있었을까? 아니면 나를 따로 불러 이야기하고, 나와의 관계를 존중하며, 자신도 비슷한 실수를 한 적이 있다고 고백할 때 비로소 내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올바른 비판을 위해서라도 지지와 돌봄이라는 기본 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 비판은 공통된 지반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가능하다. 서로 다른 행성에 사는 것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먼저 관심사의 공유가 필요하다. 전면적 거부도 완전한 동조도 아닌, 들쑥날쑥한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서 중간 지대에서 타협과 비판의 전선을 함께 그려 가야 한다. 그럴 때 지지자인 동시에 비판자가 될 수 있다. (p.89)
지금의 나는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라 해도, 대화 속에서 누군가가 가르쳐 준다면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도 마침내 이해할 수 있다. 생활사 조사가 구술자와의 대화인 것처럼, 모든 대화는 일종의 생활사 조사를 통한 배움의 길을 미리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고 가는 말들 속에서 타인의 말이 조금씩 나를 바꾸게 놓아 두는 일, 나를 다시 배워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경계를 열고 내 치부를 드러내며, 상대방의 치부 속으로 들어갈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순간에도 그 대화를 곱씹게 되고, 상대방의 한마디가 내 안에 무겁게 자리 잡는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깨닫게 된다. 그것은 짐이 아니라, 나를 지탱하고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그럴 때 대화는 상대방의 말이 내 언어 속에서 숨 쉴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언어가 달라져야만 한다. 요컨대 좋은 대화란 타인의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나를 바꾸는 노력이다. (p.92)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사랑론을 참고로 삼아 보자. 바디우는 사랑을 하나 됨이나 합일로 정의하지 않는다. 모든 개체성이 녹아 버리고 하나의 동일성만이 남는 기적 같은 사랑 개념, 낭만적인 사랑 개념을 거부한다. 사랑은 “둘이 황홀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사랑을 이렇게 재정의한다. “사랑은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폐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 내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이다. 요컨대 사랑은 나 혼자만의 관점이 아니라 둘의 관점에서 세계를 탐색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나르시시즘적 세계상을 벗어나 타자의 관점에 서는 것이고, 둘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다. 차이를 반대하고 자기 동일성만을 원하는, 자신의 세계상만을 강요하려 하는 자아야말로 사랑의 주된 적이다. 그래서 사랑은 “둘이 등장하는 무대”, 곧 “둘의 무대”다. (p.100-101)
따라서 ‘대가’와 ‘대중’이라는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 사이를 잇는 수많은 연구자, 번역자, 편집자, 강사, 기자, 독자, 사회관계망서비스 논평자들이 모두 ‘감식가’로서 이론의 재생산에 관여한다. 그들은 저마다의 자기이론을 갖고서 간극의 지점을 포착하고 선별하고 증폭한다. 그 누구도 한낱 중간 매체나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며, 각자는 담론을 변형하고 번역하는 매개자로서 크고 작게 활동하고 있다. 그렇기에 구조든 습속이든 결코 일방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이렇듯 자기이론의 통찰은 포스트구조주의의 문제의식을 각자의 삶으로 확장한다.
이제 중요해지는 것은 고급 이론의 통달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여러 동료들과 맺는 깊은 대화다. 대가들의 고급 이론만큼이나 대중들의 저급 이론도 중요하다. 포니에가 말하듯 “철학자를 인용할 때만큼 중요하게 여동생을 인용”할 수 있어야 한다. 주변적 자리에서 생성되는 일상의 앎도 동등한 권위를 지닐 수 있다는 뜻이다. 바로 거기에 자기의 삶으로 작업하기라는 관점의 독특한 힘이 있다. (p.125)
과거에도 현재에도 아마도 미래에도 이런 경멸적 태도는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때마다 매번 얼굴을 붉히기 전에, 우리가 제대로 된 형식과 태도를 갖추고 상대를 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쪽이 어떨까. 경멸이라는 그릇 속에 들어간 지식은 멀리 여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러한 경멸을 지지하는 거짓된 동료만을 남길 뿐이다. 여기에 건전한 학문적 토론과 대화가 설 곳은 없다.
혹자는 이런 존중의 태도가 지식 그 자체에 비해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지만, 사소한 것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 속에 있는 미세한 차이를 학문적 텍스트 속에서 그리고 일상의 발화 속에서 식별해 내는 일이 역사상 가장 촘촘하게 연결된 시대의 인문학적 작업이 아닐까. 사상과 학문이란 “타자를 누르는 것이 아닌 말이 있는 곳을 계속 확보해 가는 것”이다. (p.135-136)
암루테에 따르면 디지털 노동자들에게 조율은 단순한 감정노동이 아니다. 조율이란 “기술적으로 매개된 결정들의 장을 가로질러 사유하는” 능력이다. 중요한 것은 조율이 인간과 인간의 감정적 소통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조율 개념의 핵심은 일반적 규칙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경험칙의 중요성이다. 정서적 조율만이 아니라 신체적, 주권적, 기술적 조율이 함께 얽힌다. 예컨대 출판 편집자는 저자, 독자, 원고라는 텍스트, 종이책이라는 물질, SNS 네트워크, 그리고 인공지능까지 이질적인 존재들 사이에서 지식을 조율한다.
콜센터 상담사의 조율 행위도 마찬가지다. 상담사들은 단지 고객의 기분을 달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제공한 응답이 고객에게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실시간으로 개입해서 대화를 이어 간다. 이것은 규칙 적용이 아니라 경험칙을 발휘하는 것이며, 사람과 기술 사이에서 실질적인 관계를 맺어 가는 창조적 노동이다. (p.152-153)
이처럼 축산업자와 채식주의자 사이의 긴장은 기후위기의 특징을 드러낸다. 기후위기 대응은 사람들을 통합시키지 않고 오히려 분열을 초래한다. 자동차 회사와 대중교통 이용자, 개발업자와 생태운동가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아마존 숲이든, 빙하든, 지구 대기 온도든 우리가 힘을 모아 구할 수 있겠지’라고 낙관하며 실제 상황 속 긴장과 갈등을 부정하는 것은 문제를 푸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이것은 거의 전쟁 상태에 가깝다!’라고 솔직히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는 천천히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일종의 게릴라전, 곳곳에서 벌어지는 작은 전투들과 협상들이 있다. (p.175-176)
거대한 문제는 멀리서 해결책을 찾는다고 해서 풀리지 않는다. 철학자 존 듀이가 말했듯 “신발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만이 어디에 뭐가 있어서 발이 아픈지 안다.” 나에게 거치적거리는 작은 문제, 내가 의존하는 구체적인 관계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신발 속 돌멩이 같은 내 영토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서로에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관찰하고 묘사하고 대화하고 의식을 갖게 되면 자연스레 행동 역량도 생긴다. 거대한 문제에 거대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야 한다. 그러한 문제 역시 언제나 작고 사소한 문제들의 결합과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작은 존재들과 작은 변화들의 연쇄다. (p.180-181)
문제는 근대화의 깊은 이야기가 다양한 존재양식의 현실을 억압하고, 오직 하나의 직선적 서사, 곧 계몽과 진보의 이야기로 세계를 통합하려 했다는 데 있다. 자신을 ‘근대인’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존재양식들이 품고 있는 고유한 감정과 현실을 ‘비합리적’이라 몰아붙이면서 기술적 효율성, 경제적 수익성, 과학적 객관성만을 합리적 규범으로 내세웠다. 전통은 타파해야 할 구습이 되었고, 종교는 미신이 되었으며, 공동체의 애착은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전속력으로 나아간 진보는 그 반동 효과로 거대한 퇴보를 낳았다. 근대적 계몽의 서사는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깨우치려’ 했지만, 정작 그 결과는 반동과 반발, 극우의 성장이었다. 기후위기도 다르지 않다. 가능한 한 빨리 성장하려다가, 가능한 한 많이 개발하려다가 마침내 되돌리기 어려운 기후 파국에 이르렀다. (p.191)
근대인이 타자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그들을 선 바깥에 있는 전근대적 존재로 내몰 때, 이는 타자가 그런 속성을 정말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근대인이 타자를 ‘전근대’라는 칸에 집어넣고 그들과의 모든 연결 고리를 지워 버렸기 때문이다. 타자와 근대인 사이에 있는 온갖 소통의 통로를 사전에 차단한 채,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내고 있는 셈이다. 예컨대 토속 신앙을 ‘미신’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안에 담긴 생태 지혜나 공동체 윤리를 볼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이해할 통로를 스스로 막아 버린 것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여기는 한, 이 폐쇄적 상황에서 탈출할 길은 없다. 오직 ‘우리도 그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여길 때만,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의 상황을 재해석할 때만 이 불모의 대립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우리가 보는 그들이라는 근대적 서사의 틀에서 벗어나 그들이 보는 우리라는 대칭적 인류학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다. 라투르가 말하듯 진정한 비교가 가능하려면 “근대인과 비근대인 사이를 자유롭게 왕복할 수 있을 정도로 대칭적이어야 한다.” 이런 시점의 전환이 ‘탐구’의 출발점이다. 요컨대 상대를 바꾸려 하기 전에, 먼저 나의 시선을 바꾸는 것이다. (p.196-197)
분명한 것은 ‘내가 맞고 너는 틀렸다’, ‘내가 가르쳐 주겠다’ 같은 태도로는 상대의 감정이나 존재양식을 바꿀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여러 척도가 존재한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우리가 지닌 깊은 이야기가 현실을 단순화하는 편리한 거대서사임을 직시할 수 있다면 타협과 협상은 언제든 가능하다. 결국 라투르가 제시하는 탐구의 길은 대화 상대방에게 잘 말하는 기술을 습득하는 일이다.
정치적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를 라투르는 명확히 지적한다. 그것은 과학과 정치 사이의 범주 오류다. 적절히 구부러진 정치적 말하기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느린 협상을 직선적인 말로, 진리나 선악의 관점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대화는 멈추고 경멸만이 남는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직선적인 이야기는 무용하다. 우리는 이동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능숙해야 하고 유연해야 하며 다른 진리진술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적 사실을 존중하는 동시에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도 합의의 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정치 고유의 유연한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모든 것을 과학적 객관성이나 도덕적 진정성의 이름 아래 직선적으로 밀어붙이는 순간, 정치 고유의 존재양식과 진리는 사라지고 만다. (p.20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