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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나 / 마이크 버드 / 알에이치코리아

 

 이 책에서 나는 왜 토지가 지금도 그렇게 중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토지가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거나 위협할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인 토지를 과거에 어떻게 사용했는지 살펴보는 작업은 단지 역사 공부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오늘날 토지가 어떻게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지, 또 왜 사람들이 그토록 토지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토지는 다른 일반적인 부의 원천보다 더 상징적인 자산이며, 우리의 감정을 더 강하게 자극한다. 역사 전반에 걸쳐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농노제와 봉건제, 혹은 지주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오늘날 전 세계 많은 지역에서 그 의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는 토지와 토지 위 건물을 소유함으로써 안정적이고 독립적인 중산층의 일원이 될 수 있다. 부동산은 성인됨의 상징이자 재정적 안정의 증명이다. 우리는 자신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넘어서 스스로 토지에 속해 있다고 믿는다. 토지는 개인의 소속감이나 정체성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즉, 우리가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p.26)

 

 기업 가치와는 달리, 토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혁신 혹은 경영자의 리더십과 역량이 아니다. 해당 토지의 주변에서 살고 일하는 사람들의 활동 유형이 전적으로 그 가치를 결정짓는다. 그런데 정작 토지의 가치 상승에 기여한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볼 때가 많다. 실제로 매일 아침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분주히 도심을 오가는 수많은 근로자가 해당 지역의 임대료를 충격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계속 거주하기 위해 엄청난 임대료를 감당해야 한다. 아주 조그마한 땅이라도 차지하려면,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아끼고 저축해야 한다. 반면 토지 가격이 오르기 전에 땅을 소유했던 운 좋은 소수가 가치 상승에 따른 막대한 이익을 독식한다. 그렇게 운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공급이 한정되어 있고, 이동이 불가능하며, 자연적으로 손상되지 않는다는 이 세 가지 특성 때문에, 토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밖의 모든 자산과 차별화된다. 우리는 이 세 가지 특성을 중심으로 토지가 농업의 근간이자 국가 권력을 조직하는 구심점으로서 과거의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었음에도 여전히 현대 경제와 정치 시스템에서 거대한 부의 저장고로 기능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동시에 토지는 이러한 특성 때문에 오늘날 인류의 번영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자산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p.31-32)

 

 이동할 수 없고 상하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토지는 대출을 위한 완벽한 담보 자산이 되었다. 교활한 차입자가 토지를 들고 달아날 수도 없고, 대출 상환 전에 그 가치가 갑자기 떨어질 위험도 없었다(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돈을 빌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토지를 담보로 활용하는 것은 이상적인 방식이었다. 귀금속이나 장신구를 담보로 제공하는 경우와는 달리, 돈을 빌려주는 사람에게 토지를 맡길 필요는 없었다. 낮은 금리로 큰 돈을 대출받고 나서도 농사와 거주 및 사업 용도로 예전과 똑같이 토지를 활용할 수 있었다.
 토지를 유동적인 금융 자산으로, 그것도 대규모로 전환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오늘날에도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중요한 개념으로 남았다. 토지는 지금도 전 세계의 신용을 뒷받침하는 최대 규모의 단일 자산이다. 주거 및 상업용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하고 돈을 빌리는 것은 오늘날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대출 방식이다. 영세 사업자도 자신이 보유한 소규모 토지(일반적으로 그가 소유한 주택)를 담보로 제공하고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가난하거나 통치 시스템이 허술한 국가에서도 자신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개인이나 기업은 그렇지 못한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정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전체 은행 대출에서 모기지, 즉 주택 담보 대출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경우, 주택 담보 대출의 비중이 각각 61퍼센트와 68퍼센트에 이른다. 이 수치는 20세기 초의 32퍼센트와 9퍼센트에서 크게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이 수치조차 토지의 높아진 위상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서 더 중요한 사실은 대출이 단지 집을 사기 위해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기업 대출 중 상당한 비중이 토지를 담보로 이뤄지고 있다. 또한 일부 국가는 토지 매각이나 임대를 조세의 대체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든든한 재정력을 확보했지만, 동시에 그에 따른 내재적 문제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처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산인 토지는 지금도 세계 경제의 신용 시스템에서 핵심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높은 것으로 보인다. (p.35-36)

 

 전 세계 모든 정부는 토지의 실질적인 작동 방식 때문에 양립 불가능한 목표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봉건제가 무너진 이후로 전 세계 많은 정부는 수십억 가구의 열망이 된 주택 소유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부동산 가치가 오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주택 소유층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 세기 전과는 달리, 오늘날 선진국 세상에서 주택 소유자의 비중은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유권자 집단을 기준으로 하면 그 비중은 더 높아진다. 그러나 주택 소유자의 비중을 높이겠다는 목표와 토지 가격을 빠르고 지속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는 동시에 달성할 수 없다. 지금까지 많은 정부는 부동산 시장을 뒷받침하고자 세금 및 금융 시스템을 통해 부당한 혜택을 대규모로 제공해왔다. 덕분에 토지는 현대 역사 전반에 걸쳐 아주 수익성 높은 자산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제로섬이라는 토지의 특성이 함께 작용하면서 토지 소유에 따른 부의 불평등은 더 심각해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산인 토지의 특성이 빚어낸 신용과 위기의 갈등은 지난 300여 년 역사에 걸쳐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토지가 경제의 핵심 지위를 차지하면서 가격이 계속 오르든, 아니면 급격히 하락하든 간에 경제적 역동성이 위축되거나 부의 불평등이 심화될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토지 가격이 급등하면 주택 소유자와 기업 사이에서 신용의 팽창과 위축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운 좋은 토지 소유자와 불운한 비소유자 사이의 격차 그리고 번영하는 지역과 쇠퇴하는 지역 사이의 격차를 더 크게 벌린다. 또한 그에 따라 정치적 갈등이 크게 증폭된다. 토지를 소유한 기업은 더 쉽게 돈을 빌릴 수 있다. 투자도 토지를 많이 확보한 기업들 쪽으로 편중된다. 하지만 토지 가격이 급락하면 토지에 크게 의존한 오늘날 금융 시스템은 심각한 위기에 빠지고, 때로 회복 불가능한 붕괴로 이어지고 만다. 우리는 토지의 이러한 특성을 이해함으로써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오늘날 세계 각국이 빠져 있는 거대한 함정의 실체도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p.40-41)

 

 유럽 전역의 지식인들은 철학, 윤리학, 물리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 걸쳐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많은 저자가 오늘날 우리가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상업과 부의 관계 그리고 호황과 침체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유를 설명해줄 이론을 모색했다. 런던에서는 윌리엄 포터라는 한 토지 행정관이 무역과 화폐 및 토지에 관한 이론을 담은 두 권의 책을 집필하고 있었다. 책에서 포터는 화폐 부족이 경제 활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며, 경제 전반에 유통되는 화폐량을 늘리면 거래를 활성화하고 성장 속도를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무렵 화폐는 일반적으로 공급이 제한된 금과 은에 기반을 두고 있거나 이러한 귀금속으로 주조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경제 성장이라고 부르는 흐름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병목 요인으로 작용했다.
 포터도 과거의 많은 학자가 그랬듯 흔한 금속을 희귀하고 가치 높은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토지에도 금만큼 혹은 금을 뛰어넘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아가 지금까지 금이 화폐의 가치를 뒷받침하는 자산으로서 해왔던 역할을 토지가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포터는 이렇게 물었다. 금이 화폐의 가치를 뒷받침할 수 있다면, 토지가 그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포터는 화폐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면 은행이 지폐를 직접 발행해서 이를 필요로 하는 부유한 토지 소유주에게 빌려주면 된다고 설명했다. 대신에 토지 소유주는 매각 외에는 다른 활용 방법이 없는 자신의 토지를 은행에 담보로 제공하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지폐로 토지를 개간하거나, 노동자에게 급여를 주거나, 혹은 그 지폐를 받는 상인에게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면 된다.
 포터는 일단 은행이 화폐가 필요한 사람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대출을 해주면, 그 돈이 유통되면서 결과적으로 고용과 생산 및 무역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촉진할 것으로 보았다. 더 나아가 토지가 금의 역할을 온전히 대체해 통화 전체의 가치를 뒷받침하는 내적 기반이 되리라 믿었다. 1650년에 포터는 이러한 자신의 비전을 정리하여 《부의 열쇠(The Key of Wealth)》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그는 귀금속의 가치에 기반을 둔 화폐 시스템이 경제 성장을 억압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지폐가 모든 화폐를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포터의 진단은 시대를 앞서간 예언이었다. 기존의 금은 본위제는 포터의 책이 출간되고 나서도 몇 세기 더 명맥을 유지했지만, 끝내 세상은 무명의 한 영국 토지 행정관이 예언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p.50-51)

 

 개척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노르만 정복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는 600년 전통의 영국법도 함께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 법의 일부는 아메리카의 새로운 경제 상황과 잘 들어맞지 않았다. 영국에서 봉건주의가 수 세기 전에 이미 힘을 잃었음에도 가장 가치 높은 자산인 토지는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사회적 위상이 크게 높아지게 될 신흥 상인과 산업가 계층이 아닌, 농업 귀족들이 그대로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토지를 기반으로 화폐를 창출할 수 있다는 포터와 블랙웰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가 영국 법체계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토지를 담보로 돈을 빌린 사람이 제때 상환하지 못할 때 토지를 실질적으로 압류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조항이었다. 17세기 영국법은 재산을 토지와 동산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동산은 이동이 가능한 개인 재산으로, 이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고 압류도 가능했다. 반면, 돈을 빌린 사람의 토지를 압류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없었다. 이로 인해 담보로서 토지의 가치는 항상 낮았고, 그래서 토지를 기반으로 화폐를 발행한다는 생각은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영국 지주 엘리트 집단이 보기에, 유서 깊은 가문의 토지를 난데없이 나타난 대금업자나 신흥 상인에게 넘겨준다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그들의 상속자를 비롯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 귀족 집단의 이해관계가 여전히 영국 사회를 좌우하고 있었고, 이러한 권력은 방대한 농지 소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래서 채무자가 빚을 갚도록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은 오늘날에 비해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때로 채무자의 토지를 관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도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로 한정되었고, 상환이 끝나면 토지를 원래 소유주에게 다시 돌려줘야 했다. (p.55-56)

 

 프랭클린은 장기적인 화폐 부족 현상이 아메리카 식민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크게 우려했고, 토지를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1727년 23세의 프랭클린은 《지폐의 본질과 필요성에 대한 소박한 연구(A Modest Enquiry into the Nature and Necessity of a Paper Currency)》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그는 유럽의 대규모 금융 중심지에서 많은 은행이 금과 은으로 교환할 수 있는 초기 형태의 지폐를 이미 발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미국 은행들 역시 토지를 담보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금과 은을 담보로 발행한 지폐가 화폐로 통용되듯이, 토지를 담보로 발행한 차용증 역시 화폐가 될 수 있었다. 프랭클린은 이러한 화폐를 일컬어 “주조된 토지(coined land)”라고 설명했다. (p.59)

 

 1879년 자신의 대표작을 발표할 무렵, 조지는 이미 10년 넘게 토지와 거시적 경제 주기 사이의 관계를 연구해오고 있었다. 그가 《진보와 빈곤》 집필을 마치고 출판사를 찾았을 때, 모두가 그 책의 잠재적 가치를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출판사 대부분이 상업적 성공 가능성이 없다며 출간 의뢰를 거절했다. 최종적으로 출간을 결정한 출판사 디 애플턴 앤드 컴퍼니 역시 조지에게 문체가 “명료하고 힘이 있지만 지나치게 공격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1879년에는 자비를 들여서라도 출간을 하고자 했는데, 실제로 조지는 자기 돈으로 조판을 제작했고, 500부를 인쇄해서 3달러에 판매했다. 이후 활자 조판을 넘기겠다는 조건으로 애플턴은 출간에 최종 동의했다.
 이 책에서 조지는 19세기 말 전 세계 사상가들이 주목한 바로 그 질문을 던졌다. 물질적, 기술적 발전이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빈곤이 이토록 광범위하게 공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보와 빈곤》이 출간되기 10년 전, 전화와 전구가 개발되었고, 내연기관이 역사상 처음으로 대량 생산을 통한 상업화 단계에 진입했다. 현대적인 세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런던을 비롯하여 유럽 내 각국 수도에서 참혹한 빈곤이 새로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서구 사회에 가장 급박한 도덕적 딜레마였다.
 조지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번성하는 산업 중심지의 토지 가격이 급등하는 과정에서 소수의 지주가 개발의 결실을 독점했기 때문이었다. 토지의 가격을 높인 것은 노동자의 땀과 기업가의 혁신이었지만, 그들이 얻은 보상은 게으른 지주에 비해 턱없이 작았다. 조지가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로, 엄청난 부와 참혹한 빈곤의 공존을 설명해줄 유일한 요소는 고정되어 이동할 수 없는 토지였다. 기술과 혁신, 노력으로 생산성이 높아질 때, 지주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임대료를 높이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돈을 주워 담았고, 도시 인구가 증가할수록 그 수익도 늘었다. 미국 도심을 중심으로 도로와 다리, 철도, 인프라가 들어설 때마다 토지 가격은 크게 뛰었고, 지주들은 그런 시설을 직접 만들고 사용하고 투자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모든 이익을 독차지했다. (p.77-79)

 

 얼핏 보기에, 스켈턴과 조지의 정치 철학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양질의 주택을 소유한 대규모 중산층의 등장, 도시 빈민가 지주들의 몰락, 여기에 더하여 농촌 토지 귀족의 세력 약화는 두 사람 모두 두 팔 벌려 환영했을 변화였다. 그러나 스켈턴과 조지의 생각은 토지에서 뚜렷하게 갈렸다. 스켈턴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자산인 토지가 특별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조지주의자처럼 토지의 개인 소유를 전면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를 더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생각이 단기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일지 몰라도, 스켈턴의 이뤄낸 최종 성과는 조지의 이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스켈턴은 영국의 경제와 정치 상황에서 토지를 오히려 더 중요한 자산으로 만들어버렸다.
 당파적 관점에서 볼 때, 당시 영국 정부는 스켈턴과 같은 정치인들의 소망을 정책적인 차원에서 그대로 실현했다. 영국의 교외 지역에 아직도 남아 있는 반단독주택들은 정치 운동에서 조지주의를 파멸로 몰고 갔던 사회와 경제 혁명의 증거물이다. 민간 주택 건설 사업이 대규모로 추진되면서 이제는 지킬 재산이 생긴 새로운 주택 소유자 계층이 등장했고, 이들은 보수당과 더 강한 연대를 형성했다. 조지주의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급진주의의 편에 선다는 것은, 그들의 시선으로 볼 때 힘들게 얻은 소중한 자산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1930년대 말 ‘자산 소유 민주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했지만, 주택을 소유한 비중은 전체 가구의 3분의 1 정도로 이미 크게 높아진 상태였다. 이후 20세기 말에 이르렀을 때, 주택 소유는 영국 전역에 걸쳐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영국 가구의 약 70퍼센트가 자가 소유 주택에 살게 되었다.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은 당연하게도 토지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모든 주장에 저항했다. 한때 귀족이 소유했던 토지를 이제는 대중이 소유하게 된 것이다. (p.113-114)

 

 1920년에 부동산 산업 거물인 조지프 폴 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이 땅이나 집을 사도록 만들면, 급진주의와 볼셰비즘의 중요한 요인 하나를 제거한 셈이다.” 데이가 급진주의를 두려워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937년 〈라이프〉는 한 기사에서 데이를 뉴욕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수백 건의 토지 매매로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역대 최고의 부동산 사업가”로 추켜세웠다. 그리고 토지 소유에 따른 부정적인 영향을 암시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어마어마한 미국식 부를 창조했다. 그리고 그 재산은 부동산에 연결된 것이라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계속 불어나게 될 것이다.” 데이가 사들이고 팔았던 토지는 도시 외곽으로 교통망이 새롭게 확장되면서 그 가치가 크게 뛰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부동산 중개인과 경매업자, 개발업자들은 당연히 아무런 비용도 분담하지 않았다. (p.118)

 

 대공황 시기에 나온 긴급 대응책과 후버와 루스벨트가 구상했던 주택 담보 대출시장 시스템은 이후로도 계속 유지되었다. 이로써 토지와 부동산 투자를 대규모로 지원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러한 정부 지원은 토지를 제외한 다른 자산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1936년에는 전체 주택 담보 대출에서 정부 지원을 받은 비율이 1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1950년에는 42퍼센트로 급증했다. 이렇게 대출 지원이 확대되면서 주택 소유 비율이 빠르게 늘어났다. 1940년에 44퍼센트였던 주택 소유 비율은 1960년에 62퍼센트로 급증하면서 미국은 다시 한번 다수가 토지를 소유하는 나라가 되었다. 당시 토지 투자를 특별하게 대우했던 정부 지원 시스템의 근간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주택 소유를 지원하는 또 하나의 대규모 정책은 의도치 않게 이뤄졌다. 1913년 조세법에 따라 연방소득세가 도입되었을 때, 납세자들은 소득에서 이자 납부금을 공제받게 되었다. 이 방안은 특히 기업가의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보였다. 가령 기업이 1만 달러 매출을 올렸다고 해도 재고와 임금을 비롯한 여러 비용으로 8000달러를 썼다면, 과세 대상은 전체 매출이 아니라 비용을 뺀 2000달러로 잡았다. 바로 이러한 논리에 따라 대출 이자도 비용으로 간주해서 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공제 정책이 가구의 투자 패턴을 바꿀 정도로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1913년에 소득세 기준은 연 3000달러로 대단히 높게 설정되어 있었기에, 당시 소득세를 내는 인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러한 세금 공제가 주택 담보 대출을 받은 수천만 명의 납세자에게 엄청난 혜택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 상황이 바뀌자 처음에 별 고민 없이 도입했던 주택 담보 대출에 대한 이자 공제 정책의 중요성이 갑자기 커졌다. 여기에 더하여 주택 소유자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혜택이 잇달아 쏟아졌다. 1951년 조세법은 실거주 주택에 한해 양도소득세를 처음으로 면제해주었다. 그렇게 주택 소유에 따른 혜택이 점차 늘어났다. 많은 우대 혜택과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 실질적인 보조금 덕분에 순수하게 재정적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주택 소유는 그 자체로 엄청난 이득이 되었다. (p.124-125)

 

 라데진스키가 일본에 오기 전, 히로히토 천황이 항복 선언을 한 지 두 달 만에 피어리는 일본의 농촌 상황에 관한 짧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여기서 피어리는 앞서 라데진스키를 만나 나눴던 논의에서 영감을 얻어 두 가지 개혁 방안을 내놨다. 첫 번째는 온건한 방식으로, 노지 임대료에 상한선을 둠으로써 소작농들의 삶을 개선하고 그들의 법적 권리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다소 급진적인 방식으로, 일본 농촌 지주들의 토지를 수용하여 실제로 경작하는 농부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피어리는 지주들에게 언젠가 보상하게 되겠지만, 파탄에 빠진 일본의 재정 상황이 크게 나아진 다음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피어리의 이러한 제안은 미국 정부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몇몇 외교관은 일본 지주 계층의 분노를 자극해서 사회를 동요시킬 위험이 있다고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후 라데진스키와 피어리는 그들의 급진적인 야심을 펼치는 데 도움을 줄 중요한, 그러나 다소 뜻밖의 지원군을 발견했다. 그는 다름 아닌 새로운 트루먼 행정부의 고위 관료인 딘 애치슨으로, 1949년에 미 국무장관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실제로 애치슨은 피어리의 보고서를 당시 도쿄에 머무르고 있던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했다. 사실 맥아더는 진보나 급진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예전에 그는 대공황이 한창일 때 미국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을 무력으로 해산시킨 적도 있었다. 그래도 맥아더는 일본의 토지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나중에 라데진스키는 토지 개혁에 대한 맥아더의 열정이 부분적으로 필리핀에서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언급했다. 그의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는 군사 통치자 신분으로 필리핀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들 더글러스 역시 필리핀에서 군인으로서 또 민간인으로서 꽤 오랜 시간을 머물렀고, 그동안 거대 지주들이 필리핀의 경제와 정치를 주무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러한 경험으로 더글러스는 라데진스키와 마찬가지로 토지 독점과 농민들의 비참한 삶이 필리핀의 폭력과 사회 불안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세력의 대표로서 맥아더의 권위는 당시 미국이 전 세계에서 차지했던 절대 군주의 지위에 비견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는 일본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을 승인하거나 거부하고 언론을 검열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평화주의 헌법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토지와 관련해서 구상한 것은 경제적, 사회적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1945년 11월, 미국 언론은 맥아더가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연합군 사령부의 비공식 성명서를 보도했다. 그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약속이 담겨 있었다. “일본의 농부와 그 가족들은 이제 노예와 같은 삶에서 해방될 것이다.” (p.134-136)

 

 이제 소작농들의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먼 지역에 사는 지주들이 임대료를 높이는 방식으로 그들의 돈을 가로챘다. 그러나 이제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고, 계획을 세우면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이후로 농업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생산량은 크게 늘었다. 그리고 가계 소득이 오르면서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렸다. 라데진스키는 그 기회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의 시골 지역 어디를 가더라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교육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었다.” 일본 가구들은 이제 자녀 교육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자 했고, 그럴 여유도 있었다. 국가 경제가 서서히 살아나면서 도시화가 빠른 속도로 재개되었다. 미국이 추진한 정책의 효과는 일본 도시들을 중심으로 뚜렷하게 나타났다. 1950년에는 주택금융공사가 설립되면서 주택을 짓거나 구매하려는 사람에게 저리로 대출을 해줬고, 또한 주택 담보 대출시장에서 유동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 기관은 20세기 후반에 일본 주택 건설 사업의 3분의 1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p.138)

 

 인도와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에서는 라데진스키가 애초에 의도했던 것만큼 토지 재분배가 전면적으로 이뤄지지 못했고, 또한 토지 개혁이 법으로 통과되었음에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공통적인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1960년대 초 라데진스키는 필리핀과 네팔, 인도네시아를 방문해서 낙후되어 있던 비효율적인 농업 경제를 시찰했지만, 제한적인 토지 개혁 정책으로부터 어떠한 변화의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동료에게 “거대하면서도 분열되어 있고 상호 모순적인” 인도네시아 정부의 농업 정책을 고려할 때, 농촌 지역을 개혁하려면 기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 밖의 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에서 토지 재분배 개혁 이후 지주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한도인 ‘토지 상한선’은 일본과 대만의 경우보다 훨씬 더 관대했다. 1947년에 라데진스키는 이러한 글을 남겼다. “토지 상한선이 없는 토지 개혁은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 아니다. 토지 상한선은 실제로 몇몇 개혁 사례에서 한 가지 주요한 성공 요인으로 작용했다.” (p.152-153)

 

 미국에서 주택 소유가 급격히 늘어나던 1930년대부터 198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자가 주택에 거주하는 가구 비중은 인구 절반 미만에서 3분의 2 수준으로 크게 증가했다. 그동안 주택 소유가 소수에게만 국한되어 있던 국가들에서도 주택 소유 비중이 아주 빠르게 상승했다. 소수 특권층이 누렸던 자가 주택 방식이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서구 세상의 보편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런데 주택 소유를 장려하는 정부 정책 덕분에 성장한 모기지시장에서 혜택을 받은 것은 주택 소유를 꿈꾸던 세입자들만이 아니었다. 이미 주택을 소유하고 있던 수백만 가구들도 집을 담보로 신용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세상에서 수많은 인구가 합리적인 금리로 대규모 신용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159)

 

 크록은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던 자신의 일화를 “자본주의에 대한 개인적인 기념비”라는 표현으로 소개했다. 오늘날 크록의 사례는 사업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집과 소규모 부동산을 담보로 활용했던 전 세계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사업가와 자영업자, 프리랜서, 혹은 1인 기업가에게 익숙한 이야기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은행 입장에서 토지와 부동산은 가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의 담보다. 토지나 부동산을 담보로 설정함으로써 채무 불이행에 따른 위험을 실질적으로 낮출 수 있다. 사실 많은 경우에 신생 중소기업은 담보 대출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공식적인 금융 서비스에 접근할 수 없다. 오늘날 미국의 경우, 혼자나 동업의 형태로 운영하는 대다수의 소규모 기업에 해당하는 비법인 사업체가 부동산을 담보로 받은 대출 규모는 약 5.5조 달러에 이른다. 이는 전체 대출에서 72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다. (p.161-162)

 

 크록과 소너본은 함께 프랜차이즈 부동산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새로운 맥도날드 매장을 열기 위해 20년간 땅을 빌려줄 토지 소유주들을 찾아 나섰다. 여기서 소너본은 새로운 매장을 열어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을 계산한 뒤, 매장 건물을 프랜차이즈 사업자에게 원래 임대료보다 훨씬 높은 금액으로 재임대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차익을 얻었다. 그리고 몇 년 후부터는 토지 소유주를 찾는 대신 토지를 직접 매입하기 시작했다. 맥도날드는 그렇게 매입한 토지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새로운 매장을 개설한 뒤, 이를 프랜차이즈 사업자에게 임대했다. 단, 사업자는 반드시 그 건물에서만 매장을 운영해야 했다.
 레이 크록은 패스트푸드 산업에서 거물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말하자면, 새로운 유형의 미국 토지 귀족이었다. 그러나 맥도날드의 초기 금융 설계자들조차 그들이 구상한 비즈니스 모델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할 무렵에는 미국 사회가 앞으로 수십 년간 이어질 토지 가격 상승의 초입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후 땅값이 크게 치솟으면서 맥도날드는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패스트푸드 산업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는 가운데, 미국 은행들이 앞으로 수십 년간 밀어 올리게 될 부동산 담보 대출의 파도에 올라타게 되었다. 1961년 크록은 맥도널드 형제로부터 회사를 사들여 프랜차이즈 부동산 주식회사와 합병했다. 오늘날 전 세계 모두가 아는 맥도날드의 비즈니스 모델이 주요 부동산 기업과 한 몸이 된 것이다. 소너본은 맥도날드의 진짜 비즈니스 모델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맥도날드 햄버거 비즈니스가 사실은 부동산 회사를 운영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종종 농담조로 말하곤 했다.
 오늘날에도 세계 최대 기업 중 하나인 맥도날드의 최대 수익은 임대료에서 나온다. 이는 빅맥과 해피밀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러 다양한 메뉴로 벌어들이는 로열티 수익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금액이다. 실제로 맥도날드의 총매출에서 임대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40퍼센트에 가깝다. 2023년 당시 맥도날드가 보유한 토지와 부동산 자산은 감가상각 전 기준으로 400억 달러에 달했으며, 이는 총자산의 70퍼센트를 조금 넘어서는 수준이다. 다시 말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햄버거 기업이 사실은 세계 최대 규모의 부동산 기업이었던 셈이다. 맥도날드 역사에는 소너본의 전략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만약 애초에 그들이 부동산 사업을 동시에 운영하기로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맥도날드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 힘들다. (p.162-164)

 

 오늘날 토지가 금융 권력의 원천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이유는, 토지가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자산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토지는 이동할 수 없고, 내구성이 극단적으로 높다. 덕분에 대출 기관은 담보 자산의 도난이나 훼손, 혹은 은닉의 위험 걱정 없이 안전하게 돈을 빌려줄 수 있다. 그리고 가구나 기업이 소유한 그밖에 다양한 자산들과는 달리, 은행은 토지의 가치를 비교적 수월하게 평가할 수 있다. 물론 부동산 가치는 계속 오르내리지만(대체로 오른다), 그래도 담보로 잡은 토지의 가치가 세월이 흐르면서 크게 떨어질지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얼마든지 장기적으로 돈을 빌려줄 수 있다. 또한 토지 소유가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비교적 널리 대중화되었기에 많은 사람이 이를 활용해서 대출을 받을 수 있다.
 부동산을 담보로 활용하는 것은 사업 초창기의 중소기업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세계적인 기업들의 대차대조표에서도 토지는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치 기준으로 토지와 부동산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전자상거래 거물인 아마존으로, 그 규모는 2023년 기준으로 1050억 달러에 달한다. 다음으로 역시 같은 해를 기준으로 알파벳과 인텔, 애플이 각각 740억 달러와 510억 달러, 230억 달러의 토지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기업이 소유한 토지는 대규모 물류 네트워크를 구축하거나, 특히 최근 들어 데이터센터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과정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만 IT 대기업들의 경우에 토지가 기업의 시장가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토지보다는 브랜드와 지식재산권, 혹은 생산성 높은 숙련 근로자 등 무형 자산이 기업의 전체 자산 가치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p.164-165)

 

 은행과 기업, 토지 간의 연결고리는 오늘날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요소임에도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일부 경제학자는 이 연결고리가 기업가가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발판 이상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들은 개인이 자신이 보유한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도록 해주는 금융 시스템이 경제 발전을 위한 핵심 근간이라고 설명한다. 더 나아가 전 세계 국가들이 보여주는 경제 성과들 사이의 거대한 편차를 설명해주는 요인으로 꼽는다. 우리는 신용을 창출하고 보장하는 시스템 안에서 토지가 차지하는 역할의 비중을 기준으로 왜 어떤 나라는 가난하고 어떤 나라는 부유한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활발하게 작동하는 곳이 있는 반면, 왜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못한지 설명할 수 있다. 이미 수 세기 전에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자들이 깨달았던 것처럼, 원활한 신용 흐름은 경제가 활기차게 돌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점에서 토지를 담보로 활용하는 금융 시스템은 국가의 번영을 위한 필요조건이라 하겠다.
 토지 개혁의 열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점차 식었지만, 토지를 경제적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의지는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 세계은행은 특히 토지 등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토지 등기란 토지 소유자, 특히 소규모 토지를 소유한 개인에게 그가 보유한 토지의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증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러한 등기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농부들이 자신이 소유한 소규모 농지를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84년 세계은행은 타이 정부를 지원하여 전국의 토지를 공식적으로 등록하고 문서로 남기는 야심 찬 사업을 추진했다. 이는 큰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등기를 마친 토지의 가치는 예전에 등기가 되지 않았을 때와 비교해서 75~197퍼센트 더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토지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농부들은 더 쉽게, 더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등기가 이뤄진 토지는 더 활발하게 거래되었고, 토지를 소유한 농부들이 시설과 장비에 더 많이 투자하면서 농업 수확량이 크게 늘었다. 이후 타이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 또한 토지 등기 제도는 이전에 토지 개혁 프로그램이 목표했던 토지 재분배 효과도 함께 보여줬다. (p.166-167)

 

 토지가 담보로서 기업에, 특히 영세 업체들에 대단히 중요한 자산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데소토를 비롯하여 경제 발전에서 담보 자산의 역할을 강조해온 많은 학자의 주장이 옳다면, 토지를 담보로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금융 시스템은 국가의 경제적 성공을 뒷받침하는 근간이라 하겠다. 그런데 토지를 담보로 활용하는 시스템에는 위험도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토지를 담보로 돈을 빌리는 방식이 널리 퍼지면서, 토지는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경기주기와 밀접하게 얽히게 되었다. 토지 가격이 오를 때, 은행들이 상승한 가격을 기준으로 돈을 더 많이 빌려주기 시작하면 전체 대출 규모는 크게 늘어난다. 반대로 토지 가격이 급락할 때, 은행들은 담보로 잡은 토지의 가치가 채무불이행 위험을 낮춰주기에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인식이 시장 전반에 넓게 퍼질 때, 금융 시스템 전체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토지는 지금까지 세계 최악의 금융위기 때마다 핵심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침체에 빠진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능력에서만큼은 그 어떤 자산도 토지를 따라오지 못한다. (p.171-172)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의 경제학자 제바스티안 되르는 부동산을 많이 보유한 미국 기업들이 담보로 활용할 토지가 없는 다른 기업들에 비해 실제로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던 2008년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 추가로 확대된 대출 금액이 이처럼 수익성 낮은 기업들로 대거 흘러 들어가면서 경제 전반의 생산성이 크게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토지를 많이 보유한 생산성 낮은 기업들이 더 젊고 역동적인 기업들의 희생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되르의 주장이 옳다면,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투자가 폭증하는 동안에 경제의 생산 잠재력은 점차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토지를 많이 보유한 기업들이 대출을 대부분 차지하면서 나머지 기업들이 돈을 빌리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토지와 금융의 강력한 연결고리는 일부 기업의 생명을 필요 이상으로 연장시킬 뿐 아니라, 다른 많은 기업이 돈을 빌리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주택시장이 과열될 경우, 은행들은 핵심 비즈니스였던 일반적인 기업 대출을 등한시하고, 대신 부동산 관련 기업을 대상으로 대출을 집중한다. 경제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래 기업가들이 대출시장에서 ‘밀려난다(crowded out).’ 경제학자인 인드라닐 차크라보르티와 이타이 골드스타인, 앤드루 매킨레이는 1988~2006년 동안 주택시장이 과열된 지역에서 은행 대출을 받은 기업들은 다른 지역의 기업들에 비해 더 높은 금리로 더 적은 금액을 빌렸으며, 이로 인해 투자 규모가 줄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p.183-184)

 

 1990년대 전반에 일본의 금융 산업은 토지 거품이 꺼지면서 발생한 문제들로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1991년에 일본의 대형 은행들 대부분 주요 신용평가사들로부터 AA나 AAA 등급을 받았다. 그러나 1998년에 그 등급을 그대로 유지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일본의 은행들은 1997~1998년까지 한국과 동남아시아 경제를 무너뜨린 아시아 금융위기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일본의 대출 기관들이 해외 시장에서 갑자기 철수하면서, 지금까지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아시아 금융시장에서 신용 공백이 발생했다. 1997년 말 중간 규모의 증권사인 산요 증권이 무너졌을 때, 일본의 규제 당국은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산요 증권은 은행이 아니라서 파산해도 금융 시스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불안한 몇 주가 지나고 난 뒤, 대형 은행과 증권사들이 줄줄이 도산하기 시작했다. 1998년 말에는 시가총액 기준으로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큰 대출 기관이자 한때 미국의 어떤 은행보다 컸던 일본 장기신용은행이 파산하면서 국유화되었다. 거품 붕괴의 여파는 분야에 따라 20년 가까이 이어졌다. (p.207)

 

 일반적으로 세계 어느 지역이든 생산비와 인건비, 세금 등의 비용을 제외한 수익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즉, 순이익률)이 10퍼센트 정도일 때, 재무적으로 탄탄한 기업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엄청난 성공을 거둔 기업들, 특히 새롭게 떠오르는 산업을 선도하는 기업들은 이보다 더 높은 순이익률을 기록하기도 한다. 가령 시가총액 기준으로 미국 최대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 30년간 평균 28퍼센트의 순이익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반도체 칩 생산 기술을 확보한 대만의 TSMC는 1992년 이후로 평균 34퍼센트의 순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두 회사 모두 기술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 매년 수십억 달러를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그것은 잠시라도 경쟁에 뒤처질 때, 수익 구조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즈니스 세상에서 이와 같은 세계적인 대기업들의 놀라운 성과도 수익률 측면에서 홍콩의 부동산 개발업체들과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홍콩 최대 부동산 기업인 신훙지 부동산은 1990년 이후로 평균 48퍼센트의 순이익률을 기록했다. 신훙지를 비롯하여 이와 비슷한 홍콩의 몇몇 부동산 기업은 홍콩 내에서는 물론, 아시아,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수익성 높은 기업으로 인정받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홍콩의 대형 부동산 기업과 이를 소유한 갑부들이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부동산 개발 기술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놀라운 성과를 수십 년 동안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독과점을 기반으로 홍콩 부동산 시장을 강력하게 지배했기 때문이다. (p.230-231)

 

 높은 토지 가격이 다양한 성공 요건을 골고루 갖춘 도시에 장기적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를 꼽으라면, 홍콩이야말로 전 세계 최고의 후보일 것이다.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창조적인 인재 보유, 낮은 세금과 가벼운 규제, 세계 최대 생산 및 소비 국가 중국으로 들어서는 관문이라는 확고한 입지야말로 홍콩의 뚜렷한 경쟁력이다. 그러나 토지와 부동산 시장의 왜곡으로 인해 전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홍콩의 경쟁력은 오히려 덫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홍콩의 소득 수준은 항상 비교 대상으로 거론되는 동남아시아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에 크게 뒤처져 있다.
 토지 문제로 지금 홍콩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경제적, 정치적 문제를 훌쩍 넘어선다. 자오쯔양이 헨리 폭을 만나 토지와 부에 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한 순간, 홍콩은 이미 중국 정부가 토지와 주택 및 정부 재정 문제에 대처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시험하는 무대가 되었다. 그렇게 홍콩의 혁신을 억압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조장한 다양한 요인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결과에 대한 신중한 고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p.238)

 

 세수 권한이 중앙정부에 집중되면서 지방정부의 지도자들은 곤경에 처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의 주 정부나 지방정부라면 은행이나 채권시장에서 돈을 빌렸겠지만(현명한 선택이든 아니든), 중국 정부는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갑자기 재정적 난관에 봉착한 중국의 지방정부들은 창의성을 발휘하여 소위 ‘작은 황금 상자(little golden box)’라고 불리는 불투명한 수입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후로 중국 주민들, 특히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멀리 떨어진 농촌 지역 주민들은 비공식적이면서 부당한 그리고 때로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부과된 명백히 불법적인 행정 수수료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각종 수수료는 세수를 보완하는 수단을 넘어 점차 지방정부의 거대한 부패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중앙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지방정부는 이러한 음성적인 재원을 더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1990년대 말이 되면서 중국의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들의 교묘한 재정 마련 방식으로 농촌 지역 주민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많은 주민의 반발을 샀던 기존 관행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앙정부가 나서서 의심스러운 재정 통로를 단속하던 와중에도 지방정부들은 재정적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을 찾아냈다. 10년 전 선전에서 시작된 토지 판매 수입은 예산 외 수입으로 따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부과했던 수수료와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에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토지 판매는 지방 예산의 거대한 구멍을 메워줄 중요한 통로이자 세수와 지출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토지 매각은 수익성 높은 사업일 뿐 아니라 중앙정부가 세수 증대 차원에서 장려하는 방안으로 각광받았다. 토지 판매에 따른 수익이 지방정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세기 말 10퍼센트 미만에서 2010년에는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었다. 중국의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 가한 압박은 홍콩 정부가 했던 것보다 더 강력하게 토지 가격을 끌어올리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중국의 지방정부들은 중앙정부의 압박으로 토지 매각을 통해 최대한 많은 수입을 올려야만 했다. (p.247-248)

 

 선분양이 중국만의 특수한 방식은 아니다. 실제로 전 세계 부동산 개발업체들 모두 선분양을 통해 얻은 자금으로 건설비를 충당하고 있다. 아파트 구매자는 먼저 계약금을 내고 대출을 받아 중도금을 납부한 뒤, 정해진 일정에 맞춰 잔금을 치르고 주택을 인도받는다. 그런데 중국에는 개발업체가 선분양으로 받은 자금을 다른 공사비로 전용하지 못하게끔 제삼자가 돈을 보관하는 에스크로 시스템이 없었다. 중국 부동산 개발업체들은 바로 그 허점을 이용했다. 규제가 느슨한 지역에서는 공사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신규 물량을 쉽게 판매할 수 있었고, 그들이 주택 구매자로부터 받은 선분양 대금을 다른 프로젝트에 쓰지 못하도록 막을 제도적 장치는 없었다.
 일단 신규 주택 구매자들이 아직 지어지지 않은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돈을 지불하면, 개발업체는 그들보다 몇 달 혹은 몇 년 전에 돈을 지불한 구매자들에게 약속했던 다른 아파트를 짓는 데 그 돈을 사용했다. 그야말로 선분양은 개발업체를 위한 완벽한 자금 조달 방식이었다. 중국의 가구들은 은행이나 자산운용사와 달리 조직적이거나 전문적인 채권자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이 미리 지불한 돈은 말하자면 개발업체에 무이자로 제공한 대출이었으며, 그들은 개발업체의 변명에 속아 넘어갈 만큼 순진했기에 대출은 무기한 연장이 가능했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에 중국에서 판매된 아파트 중 실제로 건축이 완료된 것은 15퍼센트에 불과했고, 85퍼센트에 가까운 물량은 여전히 선분양으로 남아 있었다. 이 구조가 유지되는 동안, 즉 판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중국의 개발업체들은 실제로 짓고 있던 규모보다 두 배나 많은 주택을 시장에 내놓고 있었다. (p.256-257)

 

 중국의 주택 거품은 공급 과잉과 공급 부족 양상을 동시에 드러냈다. 개발업체들이 탐욕스러운 수요가 일어난 지역에 엄청나게 많은 물량을 공급하면서 수많은 빈집이 등장했다. 중국 가구 재정 조사를 실시한 간리의 추산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도시 지역의 주택 중 5분의 1 이상이 비어 있었다. 많은 이가 집값이 계속 오를 거라는 기대 심리로 마구 사들인 결과였다. 오늘날 중국 전역에 걸쳐 비어 있는 수천만 채의 아파트는 구리와 콘크리트, 철강 등 건설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과 인적 자원의 어마어마한 낭비를 보여주는 기념물로 남았다. 엄청난 규모의 경제적 오판을 드러내는 실질적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중국 전역에 걸친 공급 과잉에도 불구하고 주택 가격은 수요 공급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듯 떨어지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결국 주택 거품을 만들어낸 부동산 개발업체들을 규제하기로 결정했을 때, 소득 대비 주택 가격 비율은 13.4였다. 이 수치는 가장 비싼 도시만이 아니라 50개 대도시를 대상으로 산정한 것이었다. 실제로 중국의 집값은 샌프란시스코와 런던의 집값(2024년 기준으로 소득 대비 주택 가격 비율은 각각 10과 9.1 정도였다)이 저렴해 보일 정도였다. 집을 장만하려는 중국인들은 소득의 상당 부분을 수십 년 동안 모아야 한다. 실제로 중국의 저축률은 GDP 대비 46퍼센트로 세계 최고 수준에 해당한다. 이는 한국의 34퍼센트와 일본의 28퍼센트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며, 20퍼센트도 안 되는 영국과 미국보다 2배 이상 높다. 이 엄청난 규모의 저축에서 상당 부분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집값을 천정부지로 높였다. (p.262-263)

 

 과거에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토지를 자산으로 거래하는 시장은 토지에 가치를 부여하는 실질적인 활용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부동산 시장은 경제가 발전하고 생산성이 높아진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주택 부족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서구의 값비싼 주택시장과 확연히 다르다. 부동산 외에 마땅한 투자처가 없는 중국인들 입장에서, 상하이나 선전 같은 번화한 도시부터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가난한 내륙 지역 도시에 이르기까지 산발적으로 들어선 고층 아파트는 주거 공간인 동시에 상공의 은행 계좌다. 토지 가격이 어쨌든 계속 오를 것이라는 믿음은 중국인들을 부추겨 어디서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 없이 무분별한 투기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오늘날 중국의 소득 성장세는 크게 둔화되었다. 2020년대 말이 되면 중국 경제 성장률은 3~4퍼센트 수준에 머무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집값 상승을 기대했던, 경제 성장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했던 호황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인구 구성 역시 중요한 문제로 부상할 것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세대는 50대 초반이다. 30~60세 인구는 여전히 많지만, 그보다 젊은 세대의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산층이, 특히 집을 이미 2~3채 보유한 일부 인구가 은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택을 처분하려 할 때, 과연 누가 그 집을 사줄 것인가? (p.267-268)

 

 싱가포르는 소유의 나라다. 가구 중 90퍼센트 가까이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는 대부분의 선진국을 훌쩍 앞서는 수치다. 현재 영국과 미국,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나라의 주택 소유율은 60~70퍼센트 수준이다. 활기가 넘치고 인구 밀도가 높은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의 경우에는 그 비중이 이보다 더 낮다. 홍콩 주민 중 절반 정도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고, 런던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뉴욕시의 주택 소유율은 30퍼센트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 싱가포르의 경우 주택 소유율은 높은 반면, 다른 주요 국제 허브들과 비교할 때 주택 가격은 상당히 낮다. 싱가포르의 평균 주택 가격은 연 평균소득의 약 3.8배다. 이는 로스앤젤레스의 3분의 1 수준이며, 싱가포르와 자주 비교되는 홍콩에는 4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소득 대비 주택 가격을 기준으로 할 때, 싱가포르는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나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같은 지역과 비슷하거나 더 저렴한 수준이다. 실제로 세계적인 주요 허브 도시들을 놓고 볼 때, 싱가포르 주택 가격은 분명히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한다.
 싱가포르는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성공적으로 토지의 덫을 피해왔다. 저렴한 주택 가격과 높은 주택 소유율은 싱가포르 정부가 지난 60년간 추구해온 독특한 모델의 결과물이다. 토지와 주택을 관리하는 싱가포르만의 특별한 접근 방식은 시민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가져다줬을 뿐 아니라, 금융 안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덩샤오핑과 자오쯔양이 토지의 집중화가 점점 심해지던 홍콩의 상황을 좀 더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더라면, 혹은 1980년대 말 높은 토지 가격이 지역 기업들에 가했던 과중한 압박을 잘 인식했더라면, 오늘날 중국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다만 싱가포르가 전하는 교훈은 중국의 상황에 대한 가정적인 추론을 넘어 더욱 보편적인 의미가 있다. 전 세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 이 작은 도시 국가가 지금까지 내린 판단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특히 아직 토지를 자산으로 활용하는 접근 방식을 시도하지 않는 나라라면, 이를 통해 상황을 바로잡기에 늦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p.273-274)

 

 1965년 갑작스러운 독립을 맞이했을 때, 싱가포르 사회는 가난하고 불안정한 상태였다. 국가의 경제 수준은 1인당 소득을 기준으로 멕시코나 남아프리카공화국보다 더 낮았다. 연방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싱가포르의 기업들은 더 이상 해협 건너편의 대규모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혜택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새로운 섬나라에는 농업을 위해 새롭게 개발할 땅도 없었고, 200만 인구는 대부분 지저분한 빈민가나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시골 마을 캄퐁에서 살고 있었다. 내세울 만한 천연자원도 없었고, 식수조차 자체 공급할 여력이 안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싱가포르는 인구가 50배나 더 많고 1963년부터 말레이시아와 콘프론타시라는 비공식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인도네시아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싱가포르가 독립하기 불과 몇 달 전에도 인도네시아의 해병들이 은밀하게 침투해서 도심 건물을 폭파한 일이 있었다.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와의 합병을 강력하게 옹호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1965년 8월, 그는 TV 방송에 출연하여 연방 탈퇴를 발표하면서 공식 석상에서는 드물게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그 작은 나라가 확실한 자원과 강력한 동맹도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불확실한 순간에, 싱가포르 정부는 미래의 경제 번영을 향한 길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리콴유는 토지와 그 소유 시스템을 중심으로 새로운 비전을 구상했다. 싱가포르가 아직 완전하게 독립하기 전인 1964년, 리콴유 총리는 이렇게 자신의 원칙을 밝혔다. “사유지를 소유한 사람이 공공 예산이 들어간 개발 사업으로 이익을 얻어서는 안 됩니다. 공공 개발로 토지 가치에서 발생한 이익은 토지 소유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안을 마련하겠다고 이미 언급했습니다. 토지가 점점 희소한 자원이 되어가고 토지 수요에 대한 압박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토지 가치를 통제해야 할 것입니다.” (p.281-282)

 

 새 독립 정부는 1966년에 토지수용법을 제정했다. 이후로 이 법은 오늘날 싱가포르의 토지와 주택 시스템의 근간이 되었다. 리콴유 행정부는 바로 이 법을 근거로 토지 소유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민간이 소유한 토지를 시장가보다 훨씬 낮게 매입하고, 또한 기존의 행정 당국이 판매했던 장기 임대권을 강제로 해지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싱가포르 정부는 ‘7년 규칙’이란 것을 도입했다. 이는 정부가 토지를 매입할 때, 최근 7년간 공공 투자를 통해 인근에 들어선 도로나 학교 및 기타 제반 시설로 인한 가치 상승은 매입 가격에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유주가 수용에 반대하더라도 저항할 방법은 거의 없었다. 이 새로운 법으로 싱가포르 정부는 국가의 토지 대부분을 확보하고 공공 소유로 전환할 수 있었다. 오늘날 싱가포르는 국가 토지의 약 9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는 1960년의 2배에 달한다. (p.282-283)

 

 토지수용법이 싱가포르 특유의 주택 시스템에 연료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면, 정부가 운영하는 주택개발청은 그 엔진으로 기능했다. 이 기관은 덩샤오핑이 싱가포르를 처음 방문하면서 찾았던 곳이기도 했다. 1960년에 설립된 싱가포르 주택개발청은 정부가 매입한 토지에 주택 단지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과제를 맡았다. 그리고 설립 이후로 싱가포르의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핵심 기관으로, 나아가 가장 중요한 정부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알파벳 약자인 ‘HDB’는 이제 싱가포르 전역에 들어선 수많은 아파트를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들이 건설한 아파트는 오늘날 싱가포르 전체 주택에서 약 80퍼센트를 차지한다. (p.286)

 

 리콴유는 부동산을 소유한 자가 그것을 임대한 자보다 그 자산을 더 잘 관리할 것으로 믿었다. 싱가포르는 더는 식민지가 아니라 엄연한 독립 국가였다. 그러므로 시민들이 집을 소유하게 되면, 국가의 발전과 진정한 이해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동시에 그는 국민에게 의무도 요구했다. 지금도 신체 건강한 싱가포르 남성이라면 모두 2년간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또한 그는 국방의 의무를 다한 남성과 그 가족에 합당한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었다.
 싱가포르에서 주택을 소유한 가구의 비중은 빠르게 증가했다. 주택 소유를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한 지 몇 년이 지난 1970년, 싱가포르에서 주택을 소유한 인구의 비중은 29퍼센트 정도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후에 그 수치는 3배로 뛰었다. 그사이 주택 품질도 상당히 높아졌다. 이제 HDB 아파트에서 과거 빈민가 지역 주민을 구제하기 위해 날림으로 지은 천편일률적인 소련식 아파트의 흔적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새롭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들은 전 세계 고급 공동주택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 아래에는 수영장과 야외 정원, 쇼핑몰 및 싱가포르의 명물 호커 센터(Hawker Centre)가 들어섰다.
 시간이 흐르면서 싱가포르 정부는 이러한 혼합형 주택 시스템 내에서도 시장이 기능할 여지를 조금씩 넓혀나가면서 사람들이 주택을 거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래도 완전한 민간 주택시장과는 차별화되는 핵심적인 제약 사항들은 그대로 남았다. 가령 장기 거주권이 없는 외국인은 HDB 아파트를 살 수 없다. 그리고 싱가포르 가구는 한 번에 한 채의 아파트만 소유할 수 있다. 또한 주택개발청에서 분양받은 주택은 5년 이후부터 매매가 가능하다. 이러한 제한은 다른 나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단기 매매(property-flipping)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p.287-288)

 

 싱가포르의 주택 금융 시스템은 세계 어느 지역과도 같지 않은 형태로 진화했다. 생애 최초로 HDB 주택을 구매하는 사람은 싱가포르의 의무 저축 프로그램인 중앙적립기금(Central Provident Fund, CPF)에서 주택 가격의 75퍼센트까지 대출받을 수 있다. 게다가 소득 최하위 계층은 나머지 25퍼센트에 대한 보조금도 지원받을 수 있다. 2024년 기준, 싱가포르 사람들이 중앙적립기금에서 받는 주택 담보 대출의 이자율은 2.6퍼센트로, 30년 만기 주택 담보 대출을 신규로 받을 때 평균 6퍼센트가 넘는 금리를 적용받는 미국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동시에 싱가포르 정부는 전국 주택시장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소규모 민간 시장에서 주택을 여러 채 매입한 사람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세금과 금융 시스템을 설계했다. 가령 두 번째 주택을 매입할 때 적용되는 인지세는 20퍼센트가 넘고, 세 번째 이후로는 최대 30퍼센트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두 번째 주택을 살 때 일반 은행에서 받을 수 있는 대출 금액은 주택 가격의 45퍼센트로 제한되며, 세 번째 이후로는 35퍼센트로 제한된다. 싱가포르는 이러한 주택 금융 시스템을 근간으로 첫 번째 주택은 쉽게 살 수 있도록 하되, 여러 채를 소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게 만들었다.
 이 시스템이 보여준 성과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홍콩이 토지를 국유화하고 이를 재정 수입원으로 활용함으로써 소수 부동산 개발업체에 엄청난 부를 몰아줬던 것과는 달리, 싱가포르는 시민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주택을 공급함으로써 토지 자산이 사회 전반에 널리 확산하도록 만들었다. 토지 정책 전문가인 싱가포르 경제학자 속용팡은 자산 기준으로 하위 50퍼센트 가구가 국가의 주택 자산에서 25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홍콩이나 런던, 뉴욕 등 주택 소유율이 50퍼센트에 못 미치는 주요 금융 중심지의 경우, 하위 50퍼센트가 소유한 주택 자산 비율은 사실상 0퍼센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싱가포르 시스템은 주택 소유율은 높게 유지하면서, 동시에 주택을 쉽게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식이 미래 세대가 주택을 구매하는 데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p.289-290)

 

 싱가포르의 도심이나 분주한 주거 지역을 돌아다니는 외국 방문객들은 주택과 사무실 건물, 쇼핑몰, 호커 센터가 빼곡하게 들어선 모습을 만나게 된다. 토지는 소유자에게 대단히 가치 높은 자산일 뿐 아니라, 기업에 소중한 투자 자산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한 싱가포르 정부는, 토지가 숨 막히게 부족한 홍콩과는 달리 산업용 토지를 충분히 확보했다. 덕분에 싱가포르에서 제조업은 GDP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1퍼센트에 불과한 홍콩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나아가 싱가포르 정부는 국내 및 해외 기업이 연구개발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할 수 있도록 과학 연구 및 산업 부지도 충분히 확보했다. 이를 위해 서쪽 끝자락에 있는 투아스 지역에 수천 헥타르에 달하는 산업용 토지를 매립으로 개간했다. 지금 새로운 매립지 위에 건설 중인 투아스 항구는 2040년대에 완공될 경우 세계 최대의 자동화 항구가 될 것이다.
 토지와 관련하여 싱가포르 정부의 개입 정책이 국가 번영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지만, 홍콩과의 차이는 점점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첨단 기술 제품의 수출 및 지식재산권 수입을 기준으로 홍콩은 세계 순위에서 크게 뒤처져 있는 반면, 싱가포르는 각각 세계 1위와 15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인구 대비 연구개발 인력도 홍콩보다 2배 이상 더 많이 확보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싱가포르 기업과 개인이 매년 4000~7000건의 특허를 출원했던 반면, 홍콩은 수백 건에 불과하다. 금융 시스템에서도 두 도시 간의 차이는 극명하다. 싱가포르는 토지시장의 변동에 더 안정된 모습을 보이며, 부동산 산업 대출이 전체 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28퍼센트, 가계 주택 담보 대출은 22퍼센트 정도다. 반면, 홍콩은 주택시장이 수년간 침체를 이어오고 있음에도 부동산 산업 대출의 비중이 35퍼센트, 가계 주택 담보 대출은 43퍼센트를 기록 중이다.
 경제 성과를 기준으로 할 때, 오랜 경쟁의 승자는 명백하다. 싱가포르의 공정한 토지 및 주택 모델은 경제 활력을 위축시키기보다 촉진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21세기에 접어들 무렵, 홍콩과 싱가포르의 가구 소득 수준은 비슷했지만, 지금은 싱가포르가 홍콩보다 70퍼센트가량 더 높다. 홍콩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토지 가격 폭등으로 엄청난 이익을 챙긴 자들뿐이다. (p.293-294)

 

 이 책은 주택 공급보다 토지 문제에 더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두 가지 문제는 서구 세계에서, 특히 주택 가격이 아주 높은 지역에서 긴밀하게 얽혀 있다. 건설 부진은 토지 가치를 끌어올려 토지의 특성에 따른 구속력을 더 강화한다. 워싱턴 D.C.의 싱크탱크인 미국 기업 연구소가 내놓은 자료는 건설 부진이 토지에 미치는 영향을 잘 보여준다. 미국의 중간 규모 도시에서 토지가 전체 부동산 가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퍼센트 정도다. 또 토지가 여전히 귀한 자원이지만 그나마 예전에는 고층 빌딩 건축을 허용했던 뉴욕시에서는 56퍼센트에 이른다. 반면 미국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값비싼 도시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산호세는 놀랍게도 각각 69퍼센트와 74퍼센트, 77퍼센트를 기록하고 있다.
 주택 공급 문제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경제학자 크누트 아레 오스트베이트와 브루노 알부케르크, 안드레 아눈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 미국에서 주택 공급이 가격에 반응하는 정도(즉, 공급 탄력성)는 크게 떨어졌다. 이 세 경제학자는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 주택 가격이 장기간 상승했던 1996~2006년 동안, 주택 가격이 1퍼센트 오를 때 건축 허가 건수가 평균 2.8퍼센트 증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2012~2017년에는 주택 가격이 1퍼센트 올라도 건축 허가 건수는 1.8퍼센트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처럼 규제가 강한 상위 10퍼센트 대도시의 경우, 공급 탄력성은 더욱 낮아서 주택 가격이 1퍼센트 오를 때 건축 허가 건수는 0.4퍼센트 증가에 그쳤다.
 이와 같은 주택 건축 부진은 다양한 형태의 실망스러운 결과로 이어졌다. 연구원인 존 마이어스와 벤 사우스우드, 샘 보먼은 ‘주택에 관한 모든 이론(The Housing Theory of Everything)’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주택 공급 부진에 따라 과소 평가된 다양한 결과를 다루고 있다. 비싼 집값은 젊은 가구가 자녀를 키울 주거 공간을 마련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출산율을 떨어뜨리고, 도시의 밀도를 떨어뜨려 자동차가 주요 교통수단이 되게 만듦으로써 비만을 증가시키는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다. (p.314-315)

 

 주택 공급의 유연성이 낮을수록, 주택시장은 토지의 고유한 특성 모두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만큼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토지 공급이 제한된 슈퍼스타 도시에서 부동산 가격은 금리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토지는 상하거나 부패할 위험이 없으므로, 그 가치는 아주 장기적인 차원에서 현금 흐름과 다양한 여건에 의해 결정된다. 금리가 오를 때, 장기적 기대에 기반을 둔 자산의 가치는 크게 떨어진다. 이는 그 자산이 미래에 창출할 예상 수익이 달라지기 때문이 아니라, 잠재적 대안인 안전한 국채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높아지면서 토지의 매력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반면 금리가 하락할 때, 정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투자자가 장기적으로 거둬들일 수 있는 현금 흐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토지의 매력도 상승한다.
 이 말은 주택 공급이 가격 상승에 반응하지 않을 때, 금융 안정성이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산성과 집값이 아주 높은 도시들 대부분이 그렇듯, 주택 공급이 크게 제한된 지역에서는 주택 가격이 금리 변동과 같은 통화정책 변화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브루노 알부케르크는 공저자인 마르틴 이저링하우젠, 프레데리크 오피츠와 함께한 연구에서, 주택 공급이 제한된 도시들은 공급 탄력성이 높은 지역에 비해 금리가 오를 때 주택 담보 대출 연체와 주택 압류, 지역 은행의 건전성 악화와 같은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p.318)

 

 오늘날 전 세계 모든 나라는 토지의 덫에 걸려들었다. 토지가 국가의 부와 금융 시스템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할 때, 그 가격의 등락은 가계와 기업, 정부 혹은 그 세 경제 주체 모두에 거대한 위협을 가한다. 토지 가치가 상승할 때 값비싼 새로운 경제 중심지에 투자한 운 좋은 토지 소유자들과 그 밖의 지역, 특히 경제적으로 쇠퇴하는 소외된 지역에 투자한 불운한 이들 사이의 격차는 점차 벌어지게 마련이다. 또한 토지 가격이 오를 때 잠재 구매자들과 담보 가치가 증가한 기존 토지 소유자들이 더 많은 대출을 받으면서, 국가적, 국제적 금융위기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전 세계 많은 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토지 가격의 장기적인 상승은 경제의 생산 잠재력을 갉아먹는다. 그것은 자원과 자금이 토지를 담보로 활용할 수 있는 기업에 집중되면서 그렇지 못한 기업은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토지 가격이 하락할 때 경제적 불평등은 일시적으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지속적인 토지 가격 상승에 의존해온 국가의 재정 시스템을 의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국가의 금융 시스템 전반을 위태롭게 만드는 치명타로 작용하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 국가 경제가 수년 혹은 수십 년간 정체될 위험도 있다. (p.325-326)

 

 그럼에도 장기적인 토지 호황에 따른 최악의 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대단히 낮은 공실률과 엄청나게 비싼 임대료로 알 수 있듯이, 세계적으로 값비싼 지역을 중심으로 건설 부진 현상이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 주택과 인프라 공급을 적극적으로 확대한다면 토지가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낮출 수 있다. 다음으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생산성 높은 지역에서 높은 토지 가치가 주로 운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헨리 조지의 제안보다 훨씬 더 온건한 형태의 토지 가치세만 도입해도 혁신을 가로막거나 재산세로 인해 투자가 위축되는 부작용을 크게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나 토지 호황 시절의 일본처럼, 특정한 지역이나 시기에 토지는 특히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 된다. 그것은 정부가 다른 투자 대안을 억제하거나 제한할 때, 토지가 폭발적인 경제 성장에 뛰어들 수 있는 유일한 투자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자본시장의 성장을 허용하는 정책만으로도 토지시장의 폭등을 완화하면서 동시에 거품 붕괴의 위험도 낮출 수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토지에 부여한 다양한 세제 혜택과 우대 정책만 폐지해도, 이에 따른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토지는 지금도 집착의 대상이자 사회적 지위와 계급을 과시하는 상징이다. 무엇보다 토지는 전 세계 수많은 이에게 행운의 투자처였다. 비교적 낮은 위험 수준과 정부의 우호적인 정책 덕분에 장기적으로 수익성 높은 주택 투자는 많은 이에게 성공 비결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토지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잠재적 처방 모두, 높은 정치적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서구 세상의 대표적인 대도시 중에서 그곳에 살고자 하는 많은 인구의 수요를 수용할 만큼 주택 공급에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토지 부를 어느 정도 일궈낸 이들은 당연하게도 그들이 보유한 부의 원천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19세기가 저물 무렵에 단일세를 주창했던 이들은 소규모 엘리트 집단을 사회적 병폐의 원천으로 지목하고, 그들이 소유한 토지를 수용해서 다수를 더 잘살게 만들 수 있는 해결책을 내놨다. 당시에는 주택 소유율이 아주 낮고 토지 부가 대단히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절대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광범위한 집단이 지금껏 이익을 누려온 엄청난 규모의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려는 모든 형태의 시도는, 수십 년간 횡재에 가까운 이득을 취했던 수백만 소규모 토지 소유주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p.33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