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화, 돌봄, 녹색 / 김영준 외 / 산현글방
그러나 이 사태를 겪으면서 현 헌법을 손봐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드러났다. 수많은 시민의 엄청난 노력을 통해 헌법을 지키기는 했지만,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자행하고 이후 그 진압이 난항을 빚은 것은 현 헌법에 잠재한 공백이나 한계, 모순 탓이기도 했다.
누구든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한 것은 윤석열이 친위 쿠데타를 감행하기 위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권한(제77조 1항)을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국사회는 역사 속에서 이미 몇 차례 비슷한 사태를 겪은 바 있기에 현 헌법에는 국회가 비상계엄을 해제할 수 있다는 안전장치(제77조 5항)가 마련돼 있었고, 실제로 이 조항 덕분에 윤석열 일당의 내란 시도를 좌절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계엄 선포 권한은 이런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아주 위험한 헌법 조항임이 이번 사태에서 드러났다. 그러니 이참에 대한민국 역사에서 여러 차례 반역과 비극의 빌미가 된 계엄 제도를 과연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는지 따져 봐야 한다. 계엄 제도를 존치하더라도 계엄 선포의 근거를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로 너무나 느슨하게 규정한 대목은 반드시 수정해야 한다. 아울러 국회의 동의 역시 계엄 선포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그것도 과반이 아닌 2/3 이상 찬성을 통해 얻도록 바꿔야 한다. (p.9-10)
흥미로운 것은 12·3 친위 쿠데타 이후 뒤늦게 발견된 현 헌법 내의 공백이나 모순에 대한 답이 제2공화국 헌법 안에 이미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대통령권한대행 문제를 보자. 제2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참의원의장, 민의원의장, 국무총리의 순위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제52조)고 규정했다. 민의원(하원), 참의원(상원)의 양원제를 취했던 제2공화국과 달리 단원제인 제6공화국 식으로 표현한다면, 국회의장이 대통령권한대행을 맡는다는 뜻이다. 60년 전에 벌써 준비됐던 답을 우리는 한참 뒤에야 재발견한 꼴이다.
헌법재판관 임명 문제 관련해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헌법재판소가 제6공화국 헌법을 통해 처음 도입된 줄 아는 사람이 많지만, 헌법재판소는 실은 제2공화국 헌법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승만 정부의 헌법 유린을 지긋지긋하게 경험한 4·19 혁명 직후 한국사회는 당시 서독 등에서도 시행한 지 10여 년밖에 안 됐던 헌법재판소 제도를 과감히 도입했다. 다만 헌법재판소를 채 설치하기도 전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실제 도입이 30여 년 뒤로 늦어졌을 뿐이다. 게다가 제2공화국 헌법은 헌법재판관 임명에 관해 다음과 같이 깔끔하게 정리했다. “헌법재판소의 심판관은 9인으로 한다. 심판관은 대통령, 대법원, 참의원이 각 3인씩 선임한다.”(제83조 4항) 대통령, 국회(참의원), 대법원이 3인씩 선임하면 그것으로 임명 절차는 끝이다. “국회에서 선출하는 자”와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자”를 다시 “대통령이 임명”해야 한다고 하여 한덕수, 최상목 류에게 빌미를 줄 만한 내용 따위는 없다. 대통령을 국회, 법원보다 위에 있는 존재로 보는 사고가 깔려 있지 않았기에 그런 군더더기 조항이 들어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p.15-16)
이제라도 이런 위험천만한 정치-사회 지형을 갈아엎어야 한다. 적어도 내란 진압 와중에 확인한 현 헌법 안의 공백이나 모순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그리고 이런 부분적 개헌만이 아니라 ‘장기 제3공화국 질서’ 전반의 근본적 변혁에 관한 토론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 여기에서 ‘장기 제3공화국 질서’란 대한민국 제6공화국 헌법이라는 짧은 문서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판법학자들이 흔히 ‘물질적 헌정(material constitution)’이라 부르는, 한 국가의 지향과 시스템, 작동방식을 실질적으로 규정하는 헌법과 법률, 제도와 관행의 복합체에 가깝다. 이 복합체에는 당연히 헌법 자체가 포함된다. 하지만 헌법을 보완하는 법률들(정당법, 선거법, 지방자치법 등), 헌법과 긴장 관계를 맺으며 유사 헌법 노릇을 해온 법률들(국가보안법 등), 헌법에 상응하는 위상과 권능을 확보해야 할 법률들(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복지와 돌봄과 기후 관련 기본법들 등) 등도 이 복합체를 이루는 요소들이다. ‘장기 제3공화국’을 넘어서려면 헌법 자체를 비롯해 이 모든 법률과 관련 제도의 개혁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런데 ‘장기 제3공화국 시대’를 종식시켜야 하는 이유는 친위 쿠데타와 극우파 득세 방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더 적극적인 이유는 우리 시대가 기후급변, 돌봄 결핍, 감염병의 주기적 대유행, 미-중 패권 충돌, 디지털 테크놀로지 발전의 충격, 지역 쇠퇴 같은 거대한 위기들이 서로 얽혀 동시에 엄습하는 복합위기, 다중재난의 시대라는 데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이런 복합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면서 그 근본 원인을 치유해나가는 정치가 절실히 필요하다. (p.23-24)
우리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얼마간 완성되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민주주의의 형식에 대한 매우 편협한 인식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 민주주의는 대통령제를 근간으로 한다. 그러나 이 대통령제는 기본적으로 행정부에 과도한 권력을 집중시키는데, 그 권력은 대통령 한 사람의 자의적 운용에 종속된다. 이런 ‘행정권력 인격주의(executive personalism)’(Ganghof 2021) 때문에 대통령은, 설사 민주적으로 선출하고 임기를 제한하더라도, 일종의 ‘대체 군주’일 뿐이다.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는 대통령을 선거를 통해 선출하고 임기를 5년 단임으로 제한하는 데만 초점을 두었을 뿐, 이런 대통령제의 근본 문제를 제대로 검토해보지 않았다. (p.38-39)
게다가 단순다수결주의 선거제도의 문제도 심각했다. 국회의 구성과 관련하여 단순다수결주의와 소선거구제는 필연적으로 양당제를 결과한다는 뒤베르제(Duverger)의 법칙은 우리 사회에서도 관철되었다. 더구나 이런 제도는 경쟁하는 세력이나 집단 사이에 극한적인 대결을 유도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이 선거제도는 대통령제와 연결되어 정치적 양극화가 폭발적 양상으로 나타났다. 대통령 권력이든 국회의원 자리든 이긴 쪽과 진 쪽이 얻는 보상의 격차가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다 보니, 정치인들과 정당들은 경쟁 과정에서 어떤 수단과 방법도 불사한다.
이런 양당제는 또한 거의 필연적으로 두 당이 서로에 대한 견제를 넘어 적대적 대결 정치를 펼치는 ‘비토크라시(vetocracy)’(후쿠야마 2023)를 낳는다. 여기서 두 주요 정당은 서로에 대한 극한적 반대와 저지만을 일삼으며 일상적인 정치적 교착 상태에 빠진다. 이런 체제에서는 대화와 타협, 공동선의 추구를 자양분 삼아 사회의 근본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찾는 정치 자체가 질식사하고 날 선 이해관계의 대립과 맹목적 적대에 기초한 ‘우리 대 그들’의 진영 정치만 난무한다. 정치적 내전 또는 ‘전쟁 정치’는 그 필연적 결과다. 나아가 이런 배경 위에서 우리 사회에는 정치권만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수준에서도 시민들 사이에 극단적인 분열과 대결이 일상화되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이 있기 마련이지만,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민주주의라는 토대 자체를 허물 수 있는 ‘치명적 양극화’(Somer, McCoy, Luke 2021)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래서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살아남더라도 아무런 의미도 없이 생명을 잃고 말 것이지만, 이번 12·3 사태가 보여준 것처럼 실제로 민주주의가 무너질 뻔한 위기도 찾아오게 된다. (p.41-42)
사실 자유민주주의는 그 본성상 강하거나 약한 사법[법조]통치체제(juristocracy)를 내장할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한다(Hirschl 2007). 자유민주주의의 효시라고 평가되는 미국에서도, 가령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나 ‘적극적 차별시정정책(affirmative action)’과 낙태 등에 대한 대법원의 위헌 결정에서 보듯이, 사법부가 민주정치의 진보적 성과를 무효화하는 일이 곧잘 일어나곤 했다.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많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법의 정치화는 이 체제에서는 예외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상적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온전히 작동하려면, 사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가령 미국은 고위 판검사에 대한 선거와 배심원제 같은 장치를 두고 있다. 독일의 경우 평범한 시민이 전문적 판사들과 함께 재판을 진행하는 ‘참심제’가 제도화되어 있고, 연방 대법원의 판결조차 헌법재판소가 다시 심의할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경우 사법부의 판사들이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판결을 내려도 견제하거나 제재할 제도적 방도가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간 우리의 사법제도는 스스로 준사법기관이라 부르는 검찰이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걸 허용해왔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사이비’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p.45-46)
물론 이른바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선 우리 사회에 절대 빈곤 상태에 빠진 시민들이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비정규직 비율과 고용 불안정성, 높은 실업률과 자영업 종사자 비율, 수도권과 대도시의 높은 부동산 가격에 따른 주거 불안정성, 중증 질병에 대한 의료 고비용, 노인 빈곤의 증대 등이 시민들의 인간적 삶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불평등의 문제라기보다는 민주공화국에서 모든 시민이 당당하게 누려야 할 평등한 인간적 존엄성이 부정되는 문제다.
이런 사회적 불의는 ‘사회의 재화, 권력, 명예 등은 오로지 능력이라는 기준에 따라 분배되어야 한다’는 분배정의 원칙을 내세우는 능력주의(meritocracy)로 정당화된다(장은주 2021; 박권일 2021; 샌델 2020). 이런 능력주의는 단순히 사회경제적 재화의 분배 차원만이 아니라 정치의 차원에서도 작동하는데, 그 결과 정치적 사안들은 오직 고도의 전문성이나 지적 전문성을 가진 이들만이 정당한 자격을 갖추고 다룰 수 있다는 정치적 능력주의가 확립된다. 여기서 평범한 시민의 정치적 중심성과 주권성은 그저 공허한 수사에 머물고 만다. 한국의 사이비 자유민주주의는 사실상의 과두정인데, 그것은 바로 이런 정치적 능력주의로 정당화되는 능력주의적 과두정이다. (p.47-48)
제6공화국 헌법은 분명 민주적 헌법이다. 그러나 이 헌법이 작동시키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는 그동안 사회세력들의 극한적 이해관계 갈등을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표출해왔다. 또한 그것을 정치적으로 증폭시키는 전쟁 정치의 숙주로 기능해왔다. 이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정치 공동체가 온전히 존속하고 성숙하려면 꼭 필요한 ‘공동선’에 대한 정치적 모색과 합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민주주의는 그 외양과는 달리 소수 엘리트의 자의적 지배가 일상화되는 사실상의 과두정이다. 그 결과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검찰통치체제를 낳았고, 심지어 민주주의를 아예 파괴하려는 친위 쿠데타 시도마저 가능하게 했다. 이런 와중에 시민들의 불안하고 피폐한 삶은 물론이고 기후위기 같은 새롭고도 근본적인 도전은 정치적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다.
민주적 경쟁은 ‘제로-섬 게임’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의 경쟁은 민주주의가 자기를 파괴할 수 있는 덫이 된다. 이 자기 파괴적 덫을 피하려면, 민주적 경쟁은 참된 공동선을 찾아 그 정치공동체의 운명을 더 나은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생산적 경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가진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 모두가 공적이고 사적인 차원의 지배에서 벗어나 평등한 존엄성을 지닌 민주적 주체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누구든 기본적인 생존과 자유를 위한 나름의 몫과 목소리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런 게 ‘공화(정/국)’의 원리다. (p.49-50)
무엇보다도 제7공화국의 새 헌법은 한편으로 사법통치나 검찰통치 같은 공적 지배의 가능성을 최대한 차단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시민 모두가 기본적인 인간적 필요를 충족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런 보장에 어떤 절대적 기준을 정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는 어느 누구도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광의의 사법 체계(사법부와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 장치를 담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경제생활 영위, 교육, 주거, 의료, 문화적 향유 등과 관련한 ‘사회권’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조국(편), 2017 참조). (p.57-58)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과 관련해 가장 큰 장벽은 국회의원 정원수 변경에 대한 저항이다. 한때 선거관리위원회가 지역구 의석을 200석으로 줄이고 비례대표 의석을 100석으로 늘리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제안한 적이 있는데, 여야 정당들은 이를 모두 거부했다. 재선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의석을 대폭 줄이자는 안에 찬성할 리 만무했다. 독일처럼 지역구와 비례대표의 의석 비율을 1:1로 해서 두 제도의 장점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려면, 그리고 현행 지역구를 그대로 두어 현역 의원들의 이해관계에 반하지 않으려면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는 수밖에 없다. 사실 한국은 의원 1인이 대변하는 시민들의 수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너무 많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정치 혐오’ 때문에 지금 국회의원 수도 너무 많다고 여긴다. 무언가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이런 배경 위에서 나는 한국형 양원제의 도입을 제안한다. 이 모델의 핵심 아이디어는 ‘선거 방식과 역할을 달리 하여 구성하는’ 양원제에 있다. 일단 ‘민주원’ 정도로 이름을 붙일 수 있을 하원은 ‘순수 단순다수결제’에 기초하여 구성한다. 지금의 우리 국회 구성 원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만큼, 현재의 국회 구성 방식은 큰 틀에서 그대로 두면 된다. 그러나 ‘공화원’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상원은 ‘비례대표제’로 구성한다. 지금의 우리 국회에서 비례대표제 몫을 분리해내고 좀 더 확장해서 권역별로 선출하여 구성한다. 여기서 하원은 분권형 대통령제에서 총리 추천·불신임 권한을 독점적으로 가지고, 대신 상원은 하원에서 제출된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가진다. (p.68-69)
돌봄은 누군가를 보살피는 행위뿐 아니라 다른 존재에 대한 관심, 배려, 우려도 의미하는 매우 넓고 깊은 개념이다. 사실상 돌봄은 지구상 모든 존재의 기본적 존재 여건, 존재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정의할 경우, 돌봄은 인간 각자가 고충과 고통을 피하며 자기의 필요를 충족하고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구현하게 하는 모든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돌봄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생존, 발달, 기능할 수 있도록 이들의 생물학적으로 긴요한 필요를 충족하고 기초 역량을 발달·유지하며, 불필요하거나 원하지 않는 고통과 고충을 피하거나 완화하도록 돕기 위해 우리가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하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잉스터 2017; 박동욱·김대환 2021). 더 나아가 돌봄은 “모든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 그리고 관계의 온전함을 유지하는 근본”이며, “인간이 자신과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실천하는 일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달리사·데마리아·칼리스 2018). 이처럼 돌봄은 인간과 사회의 온전한 갱신, 재생에 가장 기본적이고 일상적으로 요구되는 실천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것임에도 돌봄의 가치는 온당히 평가되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제는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요구되는 돌봄의 막대한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그런 인정에 기초해 돌봄 가치를 원칙으로 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이 필요하다. “돌봄이 삶의 모든 수준에서 우선시되고 중심에 놓이는 사회적 이상”으로서의 ‘보편적 돌봄’ 모델이 상상되고 논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보편적 돌봄은, 그 대상이 인간에게만 국한되어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즉 “직접적인 대인 돌봄뿐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구 자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종류의 돌봄에 대해 모두가 공동의 책임”을 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다(더 케어 컬렉티브 2021). (p.79-80)
이런 시대적 흐름의 결과로, 유엔은 2023년 7월 총회에서 10월 29일을 ‘국제 돌봄과 지원의 날’로 지정했다. 동시에 돌봄은 사회와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성평등과 지속가능한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 돌봄은 ‘선의’가 아닌 ‘사회적 권리’라는 것을 강조했다. 국제노동기구(ILO) 또한 2024년 6월 「양질의 일자리와 돌봄 경제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며, 돌봄 노동의 인정(Recognition), 무급 돌봄 노동의 감소(Reduction), 돌봄 부담 재분배(Redistribution), 돌봄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Reward), 돌봄 노동자의 대변(Representation) 등 5가지를 핵심 원칙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처럼 돌봄을 강조하는 국제적 흐름과는 무관하게 현재 한국사회의 돌봄 현실은 여전히 매우 열악하다. 환자, 장애인, 노인에 대한 돌봄을 가족이 주로 감당하는 상황에서 간병의 신체적·정신적·경제적 부담이 매우 크다. 돌봄 노동의 가치도 여전히 저평가되고 있다. 돌봄과 상관관계가 밀접한 사회문제를 OECD 국가와 비교해 보면 노인 빈곤율 1위, 노인 자살률 1위, 합계 출산율 3년 연속 최하위, 아동복지 최하위, 장애인 복지예산 최하위라는 통계를 접할 수 있다. 더욱이 현재 한국은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고, 중증 환자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돌봄받을 권리뿐 아니라 돌볼 권리도 포함하는 돌봄권 개념이 주장되고 있다. 트론토는 《돌봄 민주주의》에서, 돌봄은 사적 영역이 아닌 정치적 영역에 속한 것이며, 돌볼 권리, 돌봄을 받을 권리, 그리고 이러한 권리들이 모두 보장되도록 의료, 노동, 사회복지 등의 정책이 재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러한 의미의 돌봄권을 확실히 보장하려면 개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개헌을 통해 돌봄의 가치와 실현을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돌봄을 공적 가치를 지닌 중차대한 정치적 문제로 바라보며 국가의 돌봄 책임을 헌법에 명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p.84-85)
사회를 평등하고 독립적인 개인들의 결사체로 상정하는 기존의 사회와 개인 개념은 인간 조건의 본질적 특성인 불가피한 의존성(취약성)과 비대등성을 은폐한다. 영아기, 유아기, 청소년기, 질병에 걸린 시기는 물론, 인생의 모든 시기에서 타자 의존은 누구든 피할 수 없는 필수적인 존재 형식이다. 즉 의존은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특성이므로 의존을 필요로 하는 이를 돌보는 행위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사회와 국가의 도덕적 의무라고 할 수 있다(이재홍 2024). 인간의 존엄이 확보되려면 돌봄이 먼저 확보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돌봄이야말로 헌법이 보장하는 바람직한 사회질서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일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돌봄의 의무는 개인의 윤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의 윤리로서 인정되어야 한다(이재홍 2024). 이는 어린이를 돌보는 사람이 없다면 어떠한 사회도 한 세대 이상을 지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이처럼 인간의 취약성과 돌봄 요구에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자율성은 사회와 이를 구성하는 제도적 기반에 의해 비로소 가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Fineman 2010; 이재홍 2024). (p.91-92)
화폐를 매개 삼지 않는 돌봄의 가능성을 키우는 일도 중요하다. 이에 돌봄의 유급 노동화 문제는 원점에서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이윤 극대화에 초점이 맞춰진 지금의 경제 관념으로는 관계재로서의 돌봄이 가지는 가치를 온당히 평가하기 어렵다. 따라서 돌봄의 ‘유급 노동화’가 과연 돌봄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적절한 방식인지 그 자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점점 더 많은 ‘돌봄’이 노동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상품으로서의 ‘돌봄 노동’이 되어 ‘경제’라고 하는 개념 안에 포함될 때, 우리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지는 않을지 생각해볼 일이다. 유급 노동으로 환원될 경우, 돌봄 활동은 비용 절감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라는 시장의 족쇄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돌봄 노동자의 불안정한 처우는 이러한 제도적 한계의 표현이다. 따라서 돌봄 중심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은 돌봄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돌봄 커먼즈(commons)의 방식 등 다양한 상상이 요청된다(백영경 2022; 안숙영 2023). (p.103)
21세기 들어 한국은 그 경제 규모에 비해 터무니없이 소극적인 기후위기 대응 태도를 보여왔다. 아니, 한국의 불량하고 미진한 태도를 지시하는 보다 정확한 용어는 ‘기후악당’일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데이터는 넘쳐난다. 기후행동네트워크는 유엔기후변화총회에서 기후위기 대응에 악영향을 주는 데 최선을 다한 ‘기후악당’ 국가를 선정하는데, 한국은 2023년과 2024년 연속 기후악당 국가로 선정되었다. 2025년 기후변화행동지수(CCPI)에 따르면, 한국은 분석 대상 국가 67개국 가운데 63위를 차지하며 최하위권의 기후행동 점수를 받았다. 글로벌 탄소발자국 네트워크(GFN)가 발표한 2025년 국가별 생태용량 초과의 날에서도 한국은 분석 대상 국가 171개국 가운데 21번째로 초과 속도가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p.113)
기후붕괴 위험과 얽혀 닥친 오늘의 복합위기는 주먹구구식의 법 개정이 아니라 담대한 방식의 헌법 제·개정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기후변화, 환경오염, 생물다양성 손실이라는 삼중 행성 위기(triple planetary crisis)가 겹쳐 복합적으로 위험을 증가시키고 있고, 생태계는 물론 인간 사회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러 난관이 하나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기에, 각각을 함께 보면서도 따로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가타리의 말처럼 자본축적의 위기와 자연파괴로 인한 생존의 위협뿐만 아니라 사회적 연대망과 정신적 삶의 방식의 쇠퇴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재발명되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녹색 헌법의 발명은 이렇게 요구되는 발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에 속한다. 헌법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관한 어느 한 국가공동체의 기본 번영 가치와 규범 가치가 담기는 정신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p.126-127)
20세기 후반기와 21세기 들어 나타난, 인간과 비인간 존재, 지구 시스템에 관한 자연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통찰의 진보 역시 녹색 헌법개정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이 지식과 통찰에 의하면, 인체는 비인간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인간만의 고유한 물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인간-비인간 연결성이야말로 인간의 물리적 실재의 핵심에 해당한다. 태양광은 물론이고, 대기, 물, 암석, 맨틀과 핵 같은 지구 구성 물질의 존속이 인간 복지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여건임도 확인되었다. (태양으로부터 지구로 오는 자유에너지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살아가는 근본적인 힘이며, 외핵의 대류 운동이 생성해내는 지구 자기장은 태양풍을 이루는 전하 입자들로부터 지구를 보호한다. 맨틀의 대류 운동으로 형성되는 암석에 이산화탄소가 충분히 흡수되었기에 비로소 생명체가 지구에 나타날 수 있었다. 인간은 약 21% 농도의 산소 덕분에 불타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고, 산소로 이루어진 오존층 덕분에 화상을 입지 않고 생존할 수 있다.) 350ppm 정도의 농도로 대류권에 존재하는 이산화탄소도 인류의 안녕에 지대하게 중요한데,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환경을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들이 조성하기 때문이다. 인간, 비인간, 지구에 관한 이러한 지식은 국가공동체 번영의 원리와 방향을 정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참조 틀이 되어야 마땅하다. 나아가 생명 부양적 지구 시스템의 존속을 위태롭게 하는 방식의 번영 추구는 지양되고 극복되어야 한다는 녹색 번영의 원리가 정립되고 천명될 필요가 있다. (p.130-131)
라틴아메리카에서 녹색 가치를 헌법에 담아낸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에콰도르나 볼리비아도 우리 사회의 녹색 헌법의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국가의 경우 다양성을 넘어 복수성을 담고자 했고, 국가 형태도 ‘복수국민국가(estado plurinacional)’를 선언하고 있다. 이는 단일 국민을 상정하는 근대국가 자체를 재발명하는 기획으로서, 하나의 국가 안에 복수의 공동체가 존재함을 존중하고 ‘다문화’가 가지는 위계도 거부하는 수평적 공존을 추구한다. 에콰도르는 2008년, 볼리비아는 2009년에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는데, 토착민들의 문화에 뿌리를 둔 ‘공통적인 것’과 ‘좋은 삶(buen vivir)’을 공동체 번영 가치로 규정하고 있다. 이 사례가 보여주듯, 우리는 다른 것들의 공존과 생명의 공존을 여러 번영 가치 가운데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번영의 중심 가치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p.134-135)